⊙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러시아… 2차 세계대전 말기 日蘇중립조약 파기로 불신의 대상
⊙ 중국은 일본인의 88%가 싫어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대화가 되는 어른스러운 나라’로 인식
⊙ 文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파기, 레이더 照射 사건 겪으며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트라우마 생겨
⊙ 문재인 정권 시절 ‘친일파 파묘법’, 김옥균 암살 후 야만적인 능지처참 연상케 해
⊙ 韓日이 티격태격하면 박수 치고 좋아할 나라는 북한과 중국
李相哲
1959년생. 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졸업, 日 조치대 신문학 박사 / 中 《흑룡강일보》 기자, 日 《테레케이블신문》 기자, (주)도호오(東方)실업·(유)중국경제발전연구소 대표이사, 조치대 국제관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푸단(復旦)대 신문학과 객좌교수 역임. 現 류코쿠대학 사회학부 교수 / 저서 《김정은 체제 왜 붕괴되지 않는가》 《한·중·일 한자문화, 어디로 가는가》 《일중한 미디어의 충돌》 《만주에 있어서의 일본인 경영 신문의 역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인 경영 신문의 역사》 등
⊙ 중국은 일본인의 88%가 싫어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대화가 되는 어른스러운 나라’로 인식
⊙ 文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파기, 레이더 照射 사건 겪으며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트라우마 생겨
⊙ 문재인 정권 시절 ‘친일파 파묘법’, 김옥균 암살 후 야만적인 능지처참 연상케 해
⊙ 韓日이 티격태격하면 박수 치고 좋아할 나라는 북한과 중국
李相哲
1959년생. 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졸업, 日 조치대 신문학 박사 / 中 《흑룡강일보》 기자, 日 《테레케이블신문》 기자, (주)도호오(東方)실업·(유)중국경제발전연구소 대표이사, 조치대 국제관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푸단(復旦)대 신문학과 객좌교수 역임. 現 류코쿠대학 사회학부 교수 / 저서 《김정은 체제 왜 붕괴되지 않는가》 《한·중·일 한자문화, 어디로 가는가》 《일중한 미디어의 충돌》 《만주에 있어서의 일본인 경영 신문의 역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인 경영 신문의 역사》 등
- 2022년 9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뉴욕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뉴시스
많은 일본인은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일본을 제일 싫어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들은 한국을 제일 싫어하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는 러시아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고 최근에는 전술핵무기 사용까지 들먹이는 등 막무가내식 행태를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러시아를 ‘약속을 안 지키기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뿌리가 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의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자 소련은 일소(日蘇)중립조약을 깨고 1945년 8월 9일 만주국 주변에 전개되어 있던 174만 명의 극동군을 투입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했다. 그들은 무장해제를 한 관동군 57만여 명을 시베리아로 연행해 억류하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들 가운데 약 6만 명이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이는 그해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행위다. 포츠담 선언 13개 조항 가운데 제9조는 ‘일본군은 무장해제된 후 각자 가정으로 복귀해 평화적이고 생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대한 불신
필자와는 오랜 친구인 베스트셀러 작가 도미나가 다카코 씨(논픽션 《다롄(大連) 공백의 600일》 등 작품이 있음)는 다롄에서 태어나 12세 때 그곳에서 종전(終戰)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다롄경제전문학교 교장이었던 그녀는 그때까지 공주처럼 자랐는데 소련병이 진주(進駐)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머리를 빡빡 밀고 얼굴에 검은 숯을 적당히 바르고 지냈다고 한다. 소련(일반인들은 러시아로 인식) 병사들은 소녀든 할머니든 상관없이 폭행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뒤져서 가져갔고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만년필까지 빼앗아 가기도 했다. 이런 체험은 일본 본토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없지만, 수많은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들도 러시아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은 아직까지 크다.
소련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난 집 도둑질하듯 일본의 패망이 확실시되자 쳐들어 와 북방 영토를 빼앗았고 지금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때까지 북방 영토 4개 섬에는 약 1만7000명의 일본인이 생활하고 있었고 러시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일본이 옳았고 러시아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약속, 계약, 룰(rule)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싸움하다 지면 무조건 머리를 숙이고 심지어 할복까지 하는 사무라이 문화가 아직까지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한 약속이라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는 일본 사람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살면서 배운 지혜이기도 하다. 사무라이는 룰을 어기고 약속을 안 지키거나 구질구질 변명을 하는 사람은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중국은 싫지만 대화가 가능한 나라
그럼 중국은 일본인들에게 어떤 나라일까. 최근 세계 주요 국가 국민들이 다른 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식조사에서 88%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싫어한다고 대답했다(2021년 7월 ‘뷰 리서치’ 조사). 10명 중 9명이 중국을 싫어한다는 얘기다.
필자의 일본 유학 당시(1990년대 초) 길거리에서 만난 아저씨가 내가 중국에서 온 유학생임을 알고 밥도 사주고 용돈까지 주었다. 그때 많은 일본인은 “중국은 우리의 선생이었으며, 국민은 순박하고, 대국(大國)다운 문화가 남아 있는 훌륭한 나라”라고 칭찬했다. 그때는 일본과 중국이 국교(國交)를 맺은 지 20년이 좀 넘은 시점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중국 바람이 불고 있었다.
1972년 국교 정상화 회담에서 중국은 일본에 대한 전후(戰後) 배상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공동성명 제6항).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등이 보여준 대국인다운 태도 그리고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찾았던 만리장성의 웅장함에 일본인들은 매료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모든 것은 계산된 연출이었고 속임수였지 않았냐”고 말하는 일본인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태도가 표변(豹變)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의 ‘너그러움’에 감격한 나머지 50년 가까이 거액의 자금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의 현대화를 위해 제철소를 지어주고 공항, 항만 건설에 자금을 지원하고, 무상(無償) 기술협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간 일본은 중국에 무상자금 제공 외에 3조3165억 엔의 차관(借款)을 제공했다(2020년도 통계).
이러한 자금이 중국 경제발전의 종잣돈이 되었고 지속적인 발전을 지탱해왔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언제 그런 일들이 있었냐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돈을 번 다음에는 오만해졌고 심지어 일본을 우습게 여기기까지 하니 일본인들의 마음이 평온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일본의 많은 지식인·정치가들은 그래도 중국은 한국과는 달리 ‘대화가 되는, 어른스러운 나라’라고 한다.
한국에 대한 호감 높지만…
문제는 한국이다. 요즈음 일본인들은 한국을 싫어할 수도, 그렇다고 좋아한다고 하기도 싫고, 도대체 한국하고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권 5년을 겪으며 한국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재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문재인 정권 이전에도 한일 관계는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두 나라 정부 사이에는 대화가 오갔다. 일본의 많은 지한파(知韓派)들은 한국을 이해하려 애썼고 심지어 한국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은 가치(價値)를 공유(共有)하는 나라’라고 규정했다는 점이다. 2016년까지 일본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소책자나 공식 홈페이지에 ‘한국은 우리나라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등의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인접국’이라고 기술(記述)했다. 하지만 이후 양국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최근에는 그냥 ‘중요한 인접국’이라고만 적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은 근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대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빈곤 문제, 기후 문제, 인권 문제, 헌법 지키기 같은 진보적인 이슈에 꽤 열성적인 교수·학생들이 많다. 일본의 평균적인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은 여학생 비율이 더 높은데 이는 간사이(關西) 지방의 웬만한 집 부모들이 딸을 도쿄(東京)보다는 교토에 보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우리 대학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면 거의 모든 학생이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한일 관계가 최악이라고 했던 2019년 이후에도 그랬다. ‘얘는 조상이 한국인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도 많다.
최근 오사카(大阪)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에 다녀온 적이 있다. 제일 눈에 띄는 풍경은 중고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한국음식점을 찾고 한국 패션으로 무장하고 한국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오카시(お菓子)를 손에 들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닌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잡지나 텔레비전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세계에서 한국을 제일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일한 관계는 최악’이라고 대서특필한다. 미디어가 오버하거나 사실을 왜곡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사실 일본인들은 지금 한국하고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위안부 합의 파기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일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국 관계가 간단히 풀리지는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일본 정부는 물론 일반 국민들이 한국 정부에 너무나 실망했고, 한국과의 관계에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뒤엎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재빠르게 합의의 문제점을 찾기 위한 민관합동TF를 만들었다. 외교 비밀로 되어 있는 기록까지 뒤져내 2017년 12월에 조사 결과 보고서를 냈다. 당시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지난 합의(박근혜 정부 때 일본하고 맺은 약속)가 양국 정상의 추인(追認)을 거친 정부 간의 공식적인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고 발표, 사실상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2018년 1월 9일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무상(당시)은 이를 ‘폭거’라고 비판하면서 “한일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이며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약속’이다. 약속을 착실히 이행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이는 들끓고 있던 일본 전체의 여론을 대변한 것이었다.
한일 관계 파탄 낸 ‘레이더 照射 사건’
그 후 일본인들이 문재인 정부가 일본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 연속해서 발생한다. 2018년 12월 20일에 발생한 ‘레이더 조사(照射) 사건’이 상징적이다.
일본 노토반도 해역에서 표류하고 있던 북한 선박을 구조하러 현장에 나타난 한국 해군 구축함 광개토대왕함이 구조 현장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를 향해 공격 의도를 암시하는 사격지휘시스템을 가동, 레이더를 조사한 사건이다. 당초 한국 해군은 “북한 조난 선박을 (찾기) 위해 레이더를 가동한 것인데 일본이 오해했다”면서 레이더를 쏜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런 사실은 없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 측에 사죄까지 요구했다.
한반도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북한과 한국을 보아온 필자는 이 사건은 일본의 현대 국제 관계사에서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만든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우방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이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고, 북한(선박)을 위해 주저 없이 일본을 적으로 간주했으며, 오히려 일본에 사과를 강요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또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북한을 위해서라면 일본하고의 관계를 희생할 수 있다는 인상을 일본인들은 받았다. 그 결과 ‘한국은 그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라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일본 잡지나 신문에서는 “한국하고는 상종할 필요도 없으며 국교를 끊어도 일본이 어려워질 일은 없다”고 주장하는 칼럼·특집이 이어졌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지한파라고 자처하는 지식인·정치인이었다는 점에 필자는 더욱 놀랐다.
‘친일파 파묘법’이 일본에 준 충격
그런 가운데 일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또 전해왔다. 한국 국회에서 때아닌 ‘친일파 파묘(破墓)법’(‘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된 것이다. ‘친일 행위자’로 결정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고 하는 법이다. 처음에는 ‘앞으로 국립묘지에 친일파는 안장하지 못한다’는 취지의 법인가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안장되어 있는 ‘친일 행위자’들의 묘를 파내 유골을 다른 곳으로 이장(移葬)해야 한다는 법이었다.
이 법이 국회에서 발의된 직접적인 계기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아온 백선엽(白善燁·1920~2020년)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 문제였다. ‘파묘법’을 가지고 좌우가 대치하고 있던 2020년 7월 15일 백선엽 장군의 운구차가 국립대전현충원 입구에서 시민단체의 저지를 받는 모습이 고스란히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졌다.
친일파의 묘를 파내자는 발상이 국회에서 공론화되는 모습을 보며 일본인들은 100여 년 전의 한국을 떠올렸다. 구한말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관심을 보인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메이지(明治) 시대의 사상가이고 저술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년)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82년 3월 후쿠자와는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고 조선 문제에 관한 수많은 사설을 지면에 실었다. 후쿠자와의 ‘조선개조론’ ‘일본 맹주론’ ‘탈아론(脫亞論)’ ‘아시아주의’는 이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서양학자로 알려진 후쿠자와가 왜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후쿠자와 연구로 유명한 도쿄대학 쓰키하시 다쓰히코(月脚達彦) 교수는 이에 대해 저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고단샤)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유길준
1881년 6월 조선 정부는 문명개화를 부르짖으며 서양문물 도입에 몰두하고 있던 일본에 12명의 조사(朝士)를 위시한 63명의 시찰단을 파견하여 관청과 산업시설을 둘러보았다. 그때 조사의 한 사람이었던 어윤중(魚允中·1848~1896년)은 일본의 재정을 관리하는 관청인 대장성(大藏省·현 재무성) 시찰을 담당했었다. 이때 어윤중의 수행원이었던 유길준(兪吉濬), 유정수 등이 후쿠자와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현 게이오대학)에 입학했다.
그때까지 일본은 서구에 유학생을 보내기는 했지만 외국 유학생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후쿠자와가 당시 런던에 있던 문하생에게 보낸 편지(후쿠자와 전집에 수록된 1881년 6월 17일 서간)에는 당시 감개무량했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편지에서 후쿠자와는 “두 명의 조선인 유학생을 자기 집에 체류하도록 했으며 성심껏 이끌어주고 있는데, 꼭 20여 년 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젊은 시절 막부(幕府) 정부가 파견한 세 번의 유럽시찰단 일원으로 유럽에 다녀왔었는데, 조선의 두 젊은이를 자신이 만든 의숙(대학)에서 가르치며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렸던 것이다.
후쿠자와가 교류를 가진 조선인은 유길준이 처음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의 명을 받고 1879년 일본으로 밀항해온 승려 이동인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동인은 밀항 이듬해인 1880년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의 승려였던 데라다 후쿠쥬(寺田福壽)의 소개로 후쿠자와와 만났고, 그 후 빈번히 후쿠자와의 집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당시 후쿠자와는 《시사 소언(時事小言·시사 문제에 관한 소견)》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후쿠자와는 ‘아시아 동맹론자’였다(쓰키아시의 연구). 다만 동맹의 맹주는 일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먼저 문명개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882년 3월 1일 자 《지지신보》에 게재된 ‘조선과의 교제를 논함’에서 후쿠자와는 “아시아는 힘과 마음을 합쳐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맹주가 되고 인접국인 지나(중국)와 조선은 문명화되고 독립되어야 한다”고 썼다.
갑신정변과 脫亞論
이러한 맥락에서 후쿠자와는 조선이 독립하고 문명화되려면 조선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조선개조론’을 폈다. 그는 조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이) 힘을 행사하는 것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개화파(開化派)’를 지원했다.
하지만 1882년 7월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淸)나라의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일단 좌절됐다. 임오군란으로 일본인 세 명이 숨지고 공사관이 불태워지자 그해 8월 말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 체결한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사죄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당시 22세였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년)가 전권대신 겸 수신사(修信使)를 맡고 김옥균이 고문 자격으로 참가했다.
박영효는 방문 일정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김옥균은 일본에 남아 후쿠자와와 빈번히 만났다. 그때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의 앞날이나 ‘조선개조’를 둘러싸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으로 보인다.
1884년 12월 4일에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젊은 개화파 지식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은 후쿠자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김옥균 등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피하지 못한 많은 개화파 젊은 지식인은 어린이와 노인까지 온 가족이 함께 처형당했다. 그 처형 방식이 너무나도 처참하여 일본인들을 전율시켰다.
조선 정부의 이런 ‘야만적’인 참수형(斬首刑)을 보며 후쿠자와는 조선에 크게 실망했다. 1885년 2월 23일 및 26일 자 사설 ‘조선 독립당의 처형’에서 후쿠자와는 ‘우리는 이 나라(조선)를 야만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요귀·악마의 지옥 같은 나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이런 비분강개한 감정은 그의 유명한 ‘탈아론’으로 이어졌다.
김옥균의 암살
그 후 일본인들을 더욱 놀라게 하고 조선과는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여론을 조장한 사건은 조선 정부의 김옥균 암살과 ‘능지처참’ 형이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상하이(上海)에서 병조판서 민영소(閔泳韶)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한 것은 1894년 3월 28일이었다.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시신에 거열형(車裂刑)을 가하기 위해 시신에 방부제(防腐劑) 대용으로 페인트를 칠한 후 한양으로 보내게 했다. 시신이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조선 정부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공사관을 통해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외무대신 명의로 ‘김씨의 시신에 잔혹한 형벌을 가하지 말기 바란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4월 14일 김옥균의 시신은 한강 양화진 백사장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죽은 시신의 사지(四肢)를 찢은 후 목을 베어 효수(梟首)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후쿠자와는 물론 많은 일본인은 조선은 ‘야만’ ‘미개’한 나라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은 일본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는 나라이며 조선과 같은 ‘악우(惡友)’하고는 교제를 거절해도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후쿠자와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주장은 이러한 조선의 상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필자가 100년도 더 전의 옛날 얘기를 끄집어낸 것은 후쿠자와 시대의 조선이 보여준 모습과 ‘친일파 파묘법’을 만들려고 했던 오늘의 한국이 묘하게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日, ‘약속 지켜진다는 보장 없다’ 생각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일본은 좋고 나쁨을 떠나 후쿠자와 시대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국가적인 숙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한국과의 불편한 관계는 문재인 정부 때뿐만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때도 그랬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비즈니스맨인 데다 친미적(親美的)인 것으로 알려져 일본에서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임기 막바지에 가서 독도 문제, ‘천황(天皇) 사죄’ 문제를 들고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도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몰아붙였다.
그때마다 많은 일본인은 ‘이참에 역사 문제를 깨끗이 청산하고 미래 지향으로 나가자’고 했고, 실제로 상당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한국 측은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필요하다고 퇴박을 놓았다. 그러자 일본도 엇나가면서 번번이 과거로 되돌아갔다.
정권 출범 후 문재인 대통령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까지 부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강제 징용자 문제도 양국 간의 합의(한일청구권 합의)가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양국 합의에도 불구하고 강제 징용자 개인이 미쓰비시를 비롯한 회사를 상대로 가지는 민사적인 권리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례입니다.”(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
문재인 대통령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권리’ 요구를 일본이 수용하려면 한국과의 기본 관계를 설정한 기본 조약(1965년)을 수정해야 한다고 일본에서는 해석한다. 그래서 일본은 결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징용공 문제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또 일본에서는 “이번에도 적당히 타협해 새로운 약속이나 협정을 맺는다고 해도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외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국제적인 약속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종전선언’과 관련해서 유엔총회 연설에서 “먼저 북한에 약속해주고 북한이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약속을 취소하면 된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尹 정부 들어섰어도 한일 관계 회복 안 되는 이유
필자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 후 한국의 신용 실추를 만회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진지하게 나서려고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를 포함하여 관료들, 지식인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있는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약속은 한 번 했으면 됐다는 논리다. 즉 한일 관계에서 제일 큰 문제로 떠오른 징용공에 대한 배상 문제는 이미 1965년의 청구권 협정 때 약속한 대로 하면 된다. 즉 한국이 약속을 지키면 해결되는 문제라는 논리다.
둘째, 적당히 타협하면 또 새로운 역사 문제가 불거질 것이기 때문에 약속한 대로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지금이 한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적기(適期)이니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하여 일본도 양보해야 된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런 주장은 잘 먹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과는 교제를 끊고 다른 나라들과 잘 지내면 된다고 주장하는 식자(識者)나 정치가들도 있다.
聯韓對中이 답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다르다. “한국과 관계 개선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지금의 한국은 후쿠자와 시대의 한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때의 한국은 무능한 정부 밑에 변변한 군대도 없었고 외교력도 없었으며 세계에서 제일 낙후한 농경사회였다.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나라로 전락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은 어떤가. 세계 제10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국방예산은 일본을 능가하고 군사력은 세계 6위다(2021년도 미국 글로벌파이어파워의 평가). 4년 후면 한국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을 넘어설 수도 있다. 또 세계지적소유권평가기관(WIPO)에 따르면 2022년 세계 이노베이션 지수에서 한국은 세계 6위로 아시아에서는 최고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보여준 한국의 실력은 눈이 부실 정도다. 즉 문화적인 영향력 면에서도 한국은 일본을 앞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이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우위를 자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한국은 일본의 경제 및 국방에 제일 중요한 나라가 될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본하고 티격태격하면 박수 치고 좋아할 나라는 북한과 중국이다. 중국 삼국시대의 위진(魏晉)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제일 큰 원인은 촉(蜀)나라와 오(吳)나라 사이가 벌어지고 싸우면서 국력을 허비했고, 오나라가 촉나라가 아닌 위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역사에서 답을 찾는다면 일본은 고민할 것도 없다. ‘연한대중(聯韓對中·한일이 손잡고 중국을 상대함)’이 답이다.⊙
일본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는 러시아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고 최근에는 전술핵무기 사용까지 들먹이는 등 막무가내식 행태를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러시아를 ‘약속을 안 지키기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뿌리가 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의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자 소련은 일소(日蘇)중립조약을 깨고 1945년 8월 9일 만주국 주변에 전개되어 있던 174만 명의 극동군을 투입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했다. 그들은 무장해제를 한 관동군 57만여 명을 시베리아로 연행해 억류하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들 가운데 약 6만 명이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이는 그해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행위다. 포츠담 선언 13개 조항 가운데 제9조는 ‘일본군은 무장해제된 후 각자 가정으로 복귀해 평화적이고 생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대한 불신
필자와는 오랜 친구인 베스트셀러 작가 도미나가 다카코 씨(논픽션 《다롄(大連) 공백의 600일》 등 작품이 있음)는 다롄에서 태어나 12세 때 그곳에서 종전(終戰)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다롄경제전문학교 교장이었던 그녀는 그때까지 공주처럼 자랐는데 소련병이 진주(進駐)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머리를 빡빡 밀고 얼굴에 검은 숯을 적당히 바르고 지냈다고 한다. 소련(일반인들은 러시아로 인식) 병사들은 소녀든 할머니든 상관없이 폭행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뒤져서 가져갔고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만년필까지 빼앗아 가기도 했다. 이런 체험은 일본 본토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없지만, 수많은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들도 러시아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은 아직까지 크다.
소련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난 집 도둑질하듯 일본의 패망이 확실시되자 쳐들어 와 북방 영토를 빼앗았고 지금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때까지 북방 영토 4개 섬에는 약 1만7000명의 일본인이 생활하고 있었고 러시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일본이 옳았고 러시아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약속, 계약, 룰(rule)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싸움하다 지면 무조건 머리를 숙이고 심지어 할복까지 하는 사무라이 문화가 아직까지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한 약속이라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는 일본 사람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살면서 배운 지혜이기도 하다. 사무라이는 룰을 어기고 약속을 안 지키거나 구질구질 변명을 하는 사람은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중국은 싫지만 대화가 가능한 나라
그럼 중국은 일본인들에게 어떤 나라일까. 최근 세계 주요 국가 국민들이 다른 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식조사에서 88%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싫어한다고 대답했다(2021년 7월 ‘뷰 리서치’ 조사). 10명 중 9명이 중국을 싫어한다는 얘기다.
필자의 일본 유학 당시(1990년대 초) 길거리에서 만난 아저씨가 내가 중국에서 온 유학생임을 알고 밥도 사주고 용돈까지 주었다. 그때 많은 일본인은 “중국은 우리의 선생이었으며, 국민은 순박하고, 대국(大國)다운 문화가 남아 있는 훌륭한 나라”라고 칭찬했다. 그때는 일본과 중국이 국교(國交)를 맺은 지 20년이 좀 넘은 시점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중국 바람이 불고 있었다.
1972년 국교 정상화 회담에서 중국은 일본에 대한 전후(戰後) 배상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공동성명 제6항).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등이 보여준 대국인다운 태도 그리고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찾았던 만리장성의 웅장함에 일본인들은 매료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모든 것은 계산된 연출이었고 속임수였지 않았냐”고 말하는 일본인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태도가 표변(豹變)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의 ‘너그러움’에 감격한 나머지 50년 가까이 거액의 자금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의 현대화를 위해 제철소를 지어주고 공항, 항만 건설에 자금을 지원하고, 무상(無償) 기술협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간 일본은 중국에 무상자금 제공 외에 3조3165억 엔의 차관(借款)을 제공했다(2020년도 통계).
이러한 자금이 중국 경제발전의 종잣돈이 되었고 지속적인 발전을 지탱해왔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언제 그런 일들이 있었냐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돈을 번 다음에는 오만해졌고 심지어 일본을 우습게 여기기까지 하니 일본인들의 마음이 평온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일본의 많은 지식인·정치가들은 그래도 중국은 한국과는 달리 ‘대화가 되는, 어른스러운 나라’라고 한다.
한국에 대한 호감 높지만…
문제는 한국이다. 요즈음 일본인들은 한국을 싫어할 수도, 그렇다고 좋아한다고 하기도 싫고, 도대체 한국하고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권 5년을 겪으며 한국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재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문재인 정권 이전에도 한일 관계는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두 나라 정부 사이에는 대화가 오갔다. 일본의 많은 지한파(知韓派)들은 한국을 이해하려 애썼고 심지어 한국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은 가치(價値)를 공유(共有)하는 나라’라고 규정했다는 점이다. 2016년까지 일본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소책자나 공식 홈페이지에 ‘한국은 우리나라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등의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인접국’이라고 기술(記述)했다. 하지만 이후 양국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최근에는 그냥 ‘중요한 인접국’이라고만 적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은 근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대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빈곤 문제, 기후 문제, 인권 문제, 헌법 지키기 같은 진보적인 이슈에 꽤 열성적인 교수·학생들이 많다. 일본의 평균적인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은 여학생 비율이 더 높은데 이는 간사이(關西) 지방의 웬만한 집 부모들이 딸을 도쿄(東京)보다는 교토에 보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우리 대학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면 거의 모든 학생이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한일 관계가 최악이라고 했던 2019년 이후에도 그랬다. ‘얘는 조상이 한국인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도 많다.
최근 오사카(大阪)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에 다녀온 적이 있다. 제일 눈에 띄는 풍경은 중고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한국음식점을 찾고 한국 패션으로 무장하고 한국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오카시(お菓子)를 손에 들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닌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잡지나 텔레비전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세계에서 한국을 제일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일한 관계는 최악’이라고 대서특필한다. 미디어가 오버하거나 사실을 왜곡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사실 일본인들은 지금 한국하고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일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국 관계가 간단히 풀리지는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일본 정부는 물론 일반 국민들이 한국 정부에 너무나 실망했고, 한국과의 관계에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뒤엎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재빠르게 합의의 문제점을 찾기 위한 민관합동TF를 만들었다. 외교 비밀로 되어 있는 기록까지 뒤져내 2017년 12월에 조사 결과 보고서를 냈다. 당시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지난 합의(박근혜 정부 때 일본하고 맺은 약속)가 양국 정상의 추인(追認)을 거친 정부 간의 공식적인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고 발표, 사실상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2018년 1월 9일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무상(당시)은 이를 ‘폭거’라고 비판하면서 “한일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이며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약속’이다. 약속을 착실히 이행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이는 들끓고 있던 일본 전체의 여론을 대변한 것이었다.
한일 관계 파탄 낸 ‘레이더 照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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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측에서 ‘레이더 조사 사건’이라고 하는 광개토대왕함 사건으로 한일 간 갈등이 고조되던 2019년 1월 26일 정경두 당시 국방장관은 해군작전사령부와 세종대왕함 전투통제실을 순시했다. 사진=국방부 |
일본 노토반도 해역에서 표류하고 있던 북한 선박을 구조하러 현장에 나타난 한국 해군 구축함 광개토대왕함이 구조 현장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를 향해 공격 의도를 암시하는 사격지휘시스템을 가동, 레이더를 조사한 사건이다. 당초 한국 해군은 “북한 조난 선박을 (찾기) 위해 레이더를 가동한 것인데 일본이 오해했다”면서 레이더를 쏜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런 사실은 없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 측에 사죄까지 요구했다.
한반도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북한과 한국을 보아온 필자는 이 사건은 일본의 현대 국제 관계사에서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만든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우방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이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고, 북한(선박)을 위해 주저 없이 일본을 적으로 간주했으며, 오히려 일본에 사과를 강요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또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북한을 위해서라면 일본하고의 관계를 희생할 수 있다는 인상을 일본인들은 받았다. 그 결과 ‘한국은 그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라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일본 잡지나 신문에서는 “한국하고는 상종할 필요도 없으며 국교를 끊어도 일본이 어려워질 일은 없다”고 주장하는 칼럼·특집이 이어졌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지한파라고 자처하는 지식인·정치인이었다는 점에 필자는 더욱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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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정문에서 벌어진 백선엽 장군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시위는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진=조선DB |
이 법이 국회에서 발의된 직접적인 계기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아온 백선엽(白善燁·1920~2020년)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 문제였다. ‘파묘법’을 가지고 좌우가 대치하고 있던 2020년 7월 15일 백선엽 장군의 운구차가 국립대전현충원 입구에서 시민단체의 저지를 받는 모습이 고스란히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졌다.
친일파의 묘를 파내자는 발상이 국회에서 공론화되는 모습을 보며 일본인들은 100여 년 전의 한국을 떠올렸다. 구한말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관심을 보인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메이지(明治) 시대의 사상가이고 저술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년)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82년 3월 후쿠자와는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고 조선 문제에 관한 수많은 사설을 지면에 실었다. 후쿠자와의 ‘조선개조론’ ‘일본 맹주론’ ‘탈아론(脫亞論)’ ‘아시아주의’는 이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서양학자로 알려진 후쿠자와가 왜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후쿠자와 연구로 유명한 도쿄대학 쓰키하시 다쓰히코(月脚達彦) 교수는 이에 대해 저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고단샤)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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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亞論’을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 |
그때까지 일본은 서구에 유학생을 보내기는 했지만 외국 유학생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후쿠자와가 당시 런던에 있던 문하생에게 보낸 편지(후쿠자와 전집에 수록된 1881년 6월 17일 서간)에는 당시 감개무량했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편지에서 후쿠자와는 “두 명의 조선인 유학생을 자기 집에 체류하도록 했으며 성심껏 이끌어주고 있는데, 꼭 20여 년 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젊은 시절 막부(幕府) 정부가 파견한 세 번의 유럽시찰단 일원으로 유럽에 다녀왔었는데, 조선의 두 젊은이를 자신이 만든 의숙(대학)에서 가르치며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렸던 것이다.
후쿠자와가 교류를 가진 조선인은 유길준이 처음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의 명을 받고 1879년 일본으로 밀항해온 승려 이동인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동인은 밀항 이듬해인 1880년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의 승려였던 데라다 후쿠쥬(寺田福壽)의 소개로 후쿠자와와 만났고, 그 후 빈번히 후쿠자와의 집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당시 후쿠자와는 《시사 소언(時事小言·시사 문제에 관한 소견)》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후쿠자와는 ‘아시아 동맹론자’였다(쓰키아시의 연구). 다만 동맹의 맹주는 일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먼저 문명개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882년 3월 1일 자 《지지신보》에 게재된 ‘조선과의 교제를 논함’에서 후쿠자와는 “아시아는 힘과 마음을 합쳐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맹주가 되고 인접국인 지나(중국)와 조선은 문명화되고 독립되어야 한다”고 썼다.
갑신정변과 脫亞論
이러한 맥락에서 후쿠자와는 조선이 독립하고 문명화되려면 조선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조선개조론’을 폈다. 그는 조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이) 힘을 행사하는 것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개화파(開化派)’를 지원했다.
하지만 1882년 7월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淸)나라의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일단 좌절됐다. 임오군란으로 일본인 세 명이 숨지고 공사관이 불태워지자 그해 8월 말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 체결한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사죄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당시 22세였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년)가 전권대신 겸 수신사(修信使)를 맡고 김옥균이 고문 자격으로 참가했다.
박영효는 방문 일정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김옥균은 일본에 남아 후쿠자와와 빈번히 만났다. 그때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의 앞날이나 ‘조선개조’를 둘러싸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으로 보인다.
1884년 12월 4일에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젊은 개화파 지식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은 후쿠자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김옥균 등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피하지 못한 많은 개화파 젊은 지식인은 어린이와 노인까지 온 가족이 함께 처형당했다. 그 처형 방식이 너무나도 처참하여 일본인들을 전율시켰다.
조선 정부의 이런 ‘야만적’인 참수형(斬首刑)을 보며 후쿠자와는 조선에 크게 실망했다. 1885년 2월 23일 및 26일 자 사설 ‘조선 독립당의 처형’에서 후쿠자와는 ‘우리는 이 나라(조선)를 야만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요귀·악마의 지옥 같은 나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이런 비분강개한 감정은 그의 유명한 ‘탈아론’으로 이어졌다.
김옥균의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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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암살된 김옥균이 처참하게 효수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상하이(上海)에서 병조판서 민영소(閔泳韶)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한 것은 1894년 3월 28일이었다.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시신에 거열형(車裂刑)을 가하기 위해 시신에 방부제(防腐劑) 대용으로 페인트를 칠한 후 한양으로 보내게 했다. 시신이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조선 정부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공사관을 통해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외무대신 명의로 ‘김씨의 시신에 잔혹한 형벌을 가하지 말기 바란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4월 14일 김옥균의 시신은 한강 양화진 백사장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죽은 시신의 사지(四肢)를 찢은 후 목을 베어 효수(梟首)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후쿠자와는 물론 많은 일본인은 조선은 ‘야만’ ‘미개’한 나라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은 일본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는 나라이며 조선과 같은 ‘악우(惡友)’하고는 교제를 거절해도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후쿠자와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주장은 이러한 조선의 상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필자가 100년도 더 전의 옛날 얘기를 끄집어낸 것은 후쿠자와 시대의 조선이 보여준 모습과 ‘친일파 파묘법’을 만들려고 했던 오늘의 한국이 묘하게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日, ‘약속 지켜진다는 보장 없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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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상징 시부야 스크램블을 지나가는 BTS 홍보차량. 일본은 한류를 비롯해 국력이 신장된 한국과 손잡아야 한다. 사진=조선DB |
최근 한국과의 불편한 관계는 문재인 정부 때뿐만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때도 그랬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비즈니스맨인 데다 친미적(親美的)인 것으로 알려져 일본에서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임기 막바지에 가서 독도 문제, ‘천황(天皇) 사죄’ 문제를 들고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도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몰아붙였다.
그때마다 많은 일본인은 ‘이참에 역사 문제를 깨끗이 청산하고 미래 지향으로 나가자’고 했고, 실제로 상당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한국 측은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필요하다고 퇴박을 놓았다. 그러자 일본도 엇나가면서 번번이 과거로 되돌아갔다.
정권 출범 후 문재인 대통령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까지 부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강제 징용자 문제도 양국 간의 합의(한일청구권 합의)가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양국 합의에도 불구하고 강제 징용자 개인이 미쓰비시를 비롯한 회사를 상대로 가지는 민사적인 권리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례입니다.”(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
문재인 대통령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권리’ 요구를 일본이 수용하려면 한국과의 기본 관계를 설정한 기본 조약(1965년)을 수정해야 한다고 일본에서는 해석한다. 그래서 일본은 결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징용공 문제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또 일본에서는 “이번에도 적당히 타협해 새로운 약속이나 협정을 맺는다고 해도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외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국제적인 약속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종전선언’과 관련해서 유엔총회 연설에서 “먼저 북한에 약속해주고 북한이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약속을 취소하면 된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尹 정부 들어섰어도 한일 관계 회복 안 되는 이유
필자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 후 한국의 신용 실추를 만회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진지하게 나서려고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를 포함하여 관료들, 지식인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있는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약속은 한 번 했으면 됐다는 논리다. 즉 한일 관계에서 제일 큰 문제로 떠오른 징용공에 대한 배상 문제는 이미 1965년의 청구권 협정 때 약속한 대로 하면 된다. 즉 한국이 약속을 지키면 해결되는 문제라는 논리다.
둘째, 적당히 타협하면 또 새로운 역사 문제가 불거질 것이기 때문에 약속한 대로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지금이 한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적기(適期)이니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하여 일본도 양보해야 된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런 주장은 잘 먹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과는 교제를 끊고 다른 나라들과 잘 지내면 된다고 주장하는 식자(識者)나 정치가들도 있다.
聯韓對中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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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의 반일 캠페인이 한창이던 2019년 8월 31일 ‘아베정권 규탄 촛불문화제’가 열려 한일정보보호협정과 한일기본조약 파기를 주장했다. 사진=조선DB |
그때의 한국은 무능한 정부 밑에 변변한 군대도 없었고 외교력도 없었으며 세계에서 제일 낙후한 농경사회였다.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나라로 전락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은 어떤가. 세계 제10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국방예산은 일본을 능가하고 군사력은 세계 6위다(2021년도 미국 글로벌파이어파워의 평가). 4년 후면 한국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을 넘어설 수도 있다. 또 세계지적소유권평가기관(WIPO)에 따르면 2022년 세계 이노베이션 지수에서 한국은 세계 6위로 아시아에서는 최고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보여준 한국의 실력은 눈이 부실 정도다. 즉 문화적인 영향력 면에서도 한국은 일본을 앞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이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우위를 자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한국은 일본의 경제 및 국방에 제일 중요한 나라가 될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본하고 티격태격하면 박수 치고 좋아할 나라는 북한과 중국이다. 중국 삼국시대의 위진(魏晉)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제일 큰 원인은 촉(蜀)나라와 오(吳)나라 사이가 벌어지고 싸우면서 국력을 허비했고, 오나라가 촉나라가 아닌 위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역사에서 답을 찾는다면 일본은 고민할 것도 없다. ‘연한대중(聯韓對中·한일이 손잡고 중국을 상대함)’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