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4년, 첫 번째 아방가르드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의 제목을 묻자 “그냥 인상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 죽어가는 아내 카미유의 변해가는 얼굴색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려주고 싶다”며 카미유 그려
⊙ 미술품 수집가의 아내 알리스와 재혼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 죽어가는 아내 카미유의 변해가는 얼굴색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려주고 싶다”며 카미유 그려
⊙ 미술품 수집가의 아내 알리스와 재혼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년)
인상파 양식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 〈인상:해돋이〉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탄생했다.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죽을 때까지 신봉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喜劇)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悲劇)이라고 한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년)의 그림도 그렇다. 멀리서 보면 아득하게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거칠고 짧은 물살 같은 붓질에 물감들이 수소와 산소 분자처럼 붙어서 애달프게 일렁이고 있다. 화가 모네 역시 우아하고 잘생긴 외모와는 상반되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내면의 소유자였다. 그가 평생을 그토록 천착한 ‘빛과 대기의 외피(外皮)’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특별한 시선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어떤 순간의 분위기, 후회나 그리움 같은 감정, 그리고 불행에 대한 예감 같은 것들.
印象派의 탄생
빛의 사냥꾼, 인상주의(印象主義) 창시자 중 한 명인 그는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신봉(信奉)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어느 순간이 주는 인상의 기록이었다. 그는 ‘인상(印象)’이라는 용어 자체를 좋아했다. 당시 미술원의 화가들은 대상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고유의 색채 그대로 그리되 인간의 눈에 감지될 때 색채 변화를 일으키는 빛의 효과 따위는 무시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모네는 이런 관습에서 벗어나 시시각각 보이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다. 그는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자 동문(同門)이었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와 함께 독립 전시회를 열 계획을 세웠다. 한 살 터울로 유난히 절친했던 모네와 르누아르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당시 파리지앵(프랑스 파리에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를 그리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복잡한 도시보다는 자연을 동경(憧憬)했다. 모네는 센강 변에 집을 얻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묘사했고 본격적으로 빛을 탐구하기 위해 배를 작업실로 개조해 선상(船上)에서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몰입했다.
드디어 1874년, 첫 번째 아방가르드 전시회를 앞두고 담당자가 일출(日出)을 그린 작품의 제목을 물었을 때 그는 “그냥 인상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라고 툭 던졌고 그렇게 작품 제목은 무미건조하게 〈인상:해돋이〉로 정해졌다. 모네가 이렇게 답한 이유는 실제로 르아브르의 고향집에서 내려다본 항구를 보고 느낀 즉흥적인 인상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장님 천치들’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한 19세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그리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겼다. 새로운 화풍(畵風)에다 보잘것없던 주제를 다룬 그들의 시도를 사람들이 처음부터 반겼을 리 없다. 기존 통념을 전복시킨 미술계의 투사(鬪士)들에게는 예상대로 혹독한 비평이 쏟아졌고 비평가들은 모네의 그림 제목에 착안하여 이 그룹을 ‘인상파’라 명명(命名)하였다.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思潮)의 탄생치고는 참 무성의하고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당시 유명 평론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작품을 두고 “그리다 만 벽지도 이 그림보다는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또 어떤 평론가는 르누아르 그림이 안개를 너무 선명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꿈과 현실도 구분 못 하는 불쌍한 장님 천치들”이라며 조롱했다. 이때 모네는 이 안개 타령에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당시 같은 기간에 열린 주류(主流) 전시회에는 매일 1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입장을 하고 있던 반면 모네와 친구들의 전시회에는 첫날 175명, 마지막 날엔 54명이 전부였다니 그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생 라자르 역〉
1877년 모네는 파리 생 라자르 기차역을 그리기로 한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의 엔진에서 내뿜는 수증기와 자욱한 연기를 통해 어떻게 현실이 꿈결처럼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줄 심산(心算)이었다. 찰나를 그리고 싶었던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게다가 당시 증기기관차는 산업혁명의 아이콘(icon)이 아닌가.
그는 역을 탐방한 후 루앙행 기차가 정시 출발한 후 30분쯤 뒤가 가장 빛깔이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순간을 그리려면 기차 출발 시각을 조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기차역 측에서 일개 화가를 위해 일정을 조정할 리가 만무(萬無)했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그는 그에 못지않게 연기력도 남달랐다. 화창한 어느 날, 모네는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차려입고 웨스턴 철도 회사의 사무실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러곤 마치 대단히 성공한 화가인 양 거만한 말투로 제안을 했다. 기차역의 풍경을 담은 대작(大作)을 구상 중인데 생 라자르 역과 근처의 노드 역 중 어느 곳이 나을지 고민 중이라고.
잠시 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모든 기차가 멈추고 기차역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모네는 역 안이 가득 찰 정도로 기관차의 증기를 내뿜어 달라고 요청했다. 생 라자르 역이 역사에 남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역장은 혹시라도 그가 맘이 바뀌어 노드 역으로 떠날까 봐 긴장한 채 그의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모네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림을 그렸다. 그의 위엄(威嚴) 있는 태도에 압도당한 직원들은 눈앞의 이 화가가 살롱전에서 낙선(落選)을 밥 먹듯이 하는 무명(無名)의 화가라는 사실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후일 이 사건을 전해 들은 르누아르는 “세상에, 나는 골목길의 조그만 가게 앞에서도 그림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던데!”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 〈생 라자르 역〉은 마치 생생한 꿈인 듯, 꿈같은 현실인 듯 알 수 없는 매력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기차가 뿜어 올리는 증기가 뭉게구름처럼 퍼지며 유리로 만든 역사(驛舍) 채광창에 쏟아지는 햇살과 어우러져 뿌옇게 흐려진 광경이라니. 혹평과 비난으로 점철(點綴)된 독립 전시회 후 다시는 인상파의 그림을 구매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아트 딜러들의 마음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평생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
프랑스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모네는 어려서부터 독창적인 풍자만화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다. 열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뒀는데 그 무렵부터 이미 사람의 특징을 한순간에 잡아내는 캐리커처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생활비 충당은 물론이고 남은 돈으로 창작 여행을 다닐 만큼 풍족했다. 그러던 중 열아홉 살에 파리로 가서 2년간 미술 공부를 하다가 군대에 소집되었고 알제리 주둔지에서 복무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샤를 글레르 밑에서 전통적인 그림 기법을 배웠는데 이미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옥외(屋外) 그림에 빠져 있던 그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모네는 잘생긴 외모에 레이스 소매를 소화할 만큼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뭇 여성들을 감탄케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쇄도하는 유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성 취향이 독특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865년 어느 날, 스물다섯 살의 철벽남 모네가 드디어 평생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를 만난다. 직업 모델이었던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모네는 그녀에게 오직 자신만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고 바로 동거(同居)에 들어갔다. 2년 후 카미유가 혼전(婚前) 임신을 하자, 안 그래도 전통 회화가 아닌 새로운 화법을 추구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던 모네의 아버지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동안 보내주던 생활비를 끊고 당장 고향집으로 돌아오라고 종용(慫慂)했지만 모네는 끝내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 장까지 태어나자 모네는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빌려야 했고 카미유 역시 세탁부 일을 해가며 고단한 삶을 꾸려가야 했다.
자살 시도
집세가 밀려 장장 6개월이나 걸려 그린 작품을 빼앗기는가 하면 밥을 굶는 일도 예사였다. 모네는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출품을 했지만 보수적인 미술협회의 거부는 계속되었다. 결국 1869년 살롱전에서 또 낙선하자 그는 극도로 절망한 나머지 파리 센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다행히 바로 정신을 차려 헤엄쳐서 나오긴 했지만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당시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끔찍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후에 모네는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어 그때가 행복했노라”고 회상했다. 당시에 그린 카미유와 아들을 담은 풍경화를 보면 그녀에 대한 사랑은 물론 그림 전체에 아득하게 퍼져 있는 행복한 공기가 손에 잡힐 것처럼 생동(生動)한다.
하지만 그들의 소박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모네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형편도 피기 시작했지만 어쩐 일인지 카미유의 얼굴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파리 근교의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그녀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기는커녕 병석에만 누워 있다가 1879년 9월 서른두 살을 일기(一期)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둘째 아들을 낳은 지 고작 1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녀의 병명은 자궁경부암.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때라 어차피 치료가 힘들었지만, 모네는 가난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여기며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하트
빛과 색채에 미쳐 있었던 모네. 그는 카미유가 숨을 거두던 날에도 침대 곁에서 임종(臨終)을 지키다가 점점 변해가는 카미유의 얼굴빛을 포착하고는 그 자리에서 이젤을 펼치고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절친 르누아르는 무슨 짓이냐며 당장 멈추라고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네는 “내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해준 것이라곤 오직 그녀를 그림 속에 담아준 것뿐이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려주고 싶네”라며 눈물을 훔쳐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그려진 작품 〈임종을 맞은 카미유〉의 우측 하단에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사인이 새겨져 있다. 클로드 모네 서명 끝에 깃발처럼 혹은 꼭 붙잡은 풍선처럼 검은색 하트(♥)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하트다.
죽은 아내의 곁에서 그 얼굴색의 변화를 화폭에 담은 모네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후일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이 작품의 창작 당시 상황에 대하여 모네와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클레망소가 “보통 사람들은 임종을 지켜볼 때 대상을 먼저 관찰하는 데 반해 모네, 당신은 색조의 관계만을 관찰하는 것 같다”고 하자 모네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려고 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아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붙잡으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먼저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빛들에 대한 전율이 기질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나의 일상적인 삶의 흐름이 다시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속에 빨려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아내 알리스
모네의 인생에서 뮤즈는 카미유 단 하나였지만 1891년 그는 조용히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모네는 1876년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트 오슈데와 그의 아내 알리스를 만나 작품을 의뢰받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1878년 오슈데가 경기 불황으로 파산한 후 혼자 벨기에로 도망쳐 버리자 이를 모른 척할 수 없었던 그는 알리스와 여섯 자녀를 모두 자신의 집으로 거둬들였다.
카미유가 병마(病魔)와 싸우는 동안 알리스는 카미유를 간호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갓난아기 둘을 포함해 총 여덟 명의 아이를 돌보았다. 그러다 어느 시점인가부터 둘은 연인(戀人)이 되었는데 그게 정확히 카미유가 죽기 전인지 후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후에 경기(景氣)가 회복되고 후원자들이 돌아오자 1883년 모네 일가족은 파리 근교 지베르니 마을의 넓은 정원이 딸린 저택으로 이사를 했다.
모네는 1893년에 대지를 더 구매하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과 아이리스 등 수생식물을 심고, 연못 위로 일본풍의 아치형 다리를 놓으며 정원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려 여섯 명의 정원사를 두고도 몸소 정원 일을 할 정도로 모네는 정원을 사랑했다.
알리스는 모네가 오직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조(內助)를 다했다. 혹여 알리스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식사 때를 놓치기라도 하면 모네는 금방 토라져 버리곤 했다. 상류층 출신으로 인테리어 안목이 뛰어났고 사교(社交)에도 능통했던 알리스는 지베르니 저택에 미술계 인사들과 후원자들을 초대해 자주 접대를 했다. 그 덕분에 모네는 당대에 몸값이 가장 비싼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모네의 사랑은 카미유가 다 가져갔는지 몰라도 그의 예술적 성공의 후광(後光)만큼은 알리스가 다 받았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여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1911년 알리스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딸이 집안일을 물려받았다. 덕분에 모네는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일상의 방해 없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최전선이 지베르니에서 불과 60km도 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神의 눈을 가진 인간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視力)을 잃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네가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에 흐릿한 색채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70대 때나 30대 때나 초점이 나간 상태이긴 마찬가지였다. 모네는 태양이 뜨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질 때까지 하루 종일 빛을 직접 보면서 작업했다.
당연히 시력이 크게 손상되었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는 시시각각 아니 초(秒) 단위로 빛의 변화가 포착되었다. 칭찬에 인색한 폴 세잔조차도 “모네는 그냥 하나의 카메라 렌즈다. 하지만 세상에, 그의 렌즈는 너무도 훌륭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빛의 변화를 정확하게 감지하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神)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제작했다. 〈건초더미〉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 등의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더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1893년부터 30년간 수련을 무려 250여 편이나 그렸다.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視線)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 〈수련〉을 보고 있자면, 왠지 아련함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이 꼭 초기 작품들 속 카미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들판에 우두커니 서서 빛에 휩싸여 있는 〈건초더미〉들은 꼭 모네 자신(自身)을 닮은 것 같다. 건초더미와 수련,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빛과 대기, 그리고 안개.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둘러싼, 수억 년 전에 폭발한 저 별에서 날아온 원자들이 섞인 대기의 움직임이 살짝 느껴진다. 마치 특별한 렌즈를 얻은 것처럼.⊙
印象派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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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해돋이(Impression:Sunrise)〉 인상주의와 인상파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작품. 제목만큼이나 단순한 기법으로 그려졌으며 뚜렷한 사물의 형상을 통해 풍경을 나타내지 않고 빛과 그림자 효과를 통해 인상을 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근대적 리얼리즘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
하지만 모네는 이런 관습에서 벗어나 시시각각 보이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다. 그는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자 동문(同門)이었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와 함께 독립 전시회를 열 계획을 세웠다. 한 살 터울로 유난히 절친했던 모네와 르누아르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당시 파리지앵(프랑스 파리에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를 그리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복잡한 도시보다는 자연을 동경(憧憬)했다. 모네는 센강 변에 집을 얻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묘사했고 본격적으로 빛을 탐구하기 위해 배를 작업실로 개조해 선상(船上)에서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몰입했다.
드디어 1874년, 첫 번째 아방가르드 전시회를 앞두고 담당자가 일출(日出)을 그린 작품의 제목을 물었을 때 그는 “그냥 인상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라고 툭 던졌고 그렇게 작품 제목은 무미건조하게 〈인상:해돋이〉로 정해졌다. 모네가 이렇게 답한 이유는 실제로 르아브르의 고향집에서 내려다본 항구를 보고 느낀 즉흥적인 인상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장님 천치들’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한 19세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그리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겼다. 새로운 화풍(畵風)에다 보잘것없던 주제를 다룬 그들의 시도를 사람들이 처음부터 반겼을 리 없다. 기존 통념을 전복시킨 미술계의 투사(鬪士)들에게는 예상대로 혹독한 비평이 쏟아졌고 비평가들은 모네의 그림 제목에 착안하여 이 그룹을 ‘인상파’라 명명(命名)하였다.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思潮)의 탄생치고는 참 무성의하고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당시 유명 평론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작품을 두고 “그리다 만 벽지도 이 그림보다는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또 어떤 평론가는 르누아르 그림이 안개를 너무 선명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꿈과 현실도 구분 못 하는 불쌍한 장님 천치들”이라며 조롱했다. 이때 모네는 이 안개 타령에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당시 같은 기간에 열린 주류(主流) 전시회에는 매일 1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입장을 하고 있던 반면 모네와 친구들의 전시회에는 첫날 175명, 마지막 날엔 54명이 전부였다니 그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생 라자르 역〉
![]() |
〈생 라자르 역(The Gare St-Lazare)〉 생 라자르 역은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기차역이다. 당시 거의 모든 지역으로 가는 노선이 있었을 만큼 규모가 컸다. 모네는 역장의 도움으로 이 거대한 역에서 기차를 멈춰 세운 채 11점의 〈생 라자르 역〉 연작을 그려냈다. |
그는 역을 탐방한 후 루앙행 기차가 정시 출발한 후 30분쯤 뒤가 가장 빛깔이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순간을 그리려면 기차 출발 시각을 조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기차역 측에서 일개 화가를 위해 일정을 조정할 리가 만무(萬無)했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그는 그에 못지않게 연기력도 남달랐다. 화창한 어느 날, 모네는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차려입고 웨스턴 철도 회사의 사무실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러곤 마치 대단히 성공한 화가인 양 거만한 말투로 제안을 했다. 기차역의 풍경을 담은 대작(大作)을 구상 중인데 생 라자르 역과 근처의 노드 역 중 어느 곳이 나을지 고민 중이라고.
잠시 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모든 기차가 멈추고 기차역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모네는 역 안이 가득 찰 정도로 기관차의 증기를 내뿜어 달라고 요청했다. 생 라자르 역이 역사에 남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역장은 혹시라도 그가 맘이 바뀌어 노드 역으로 떠날까 봐 긴장한 채 그의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모네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림을 그렸다. 그의 위엄(威嚴) 있는 태도에 압도당한 직원들은 눈앞의 이 화가가 살롱전에서 낙선(落選)을 밥 먹듯이 하는 무명(無名)의 화가라는 사실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후일 이 사건을 전해 들은 르누아르는 “세상에, 나는 골목길의 조그만 가게 앞에서도 그림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던데!”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 〈생 라자르 역〉은 마치 생생한 꿈인 듯, 꿈같은 현실인 듯 알 수 없는 매력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기차가 뿜어 올리는 증기가 뭉게구름처럼 퍼지며 유리로 만든 역사(驛舍) 채광창에 쏟아지는 햇살과 어우러져 뿌옇게 흐려진 광경이라니. 혹평과 비난으로 점철(點綴)된 독립 전시회 후 다시는 인상파의 그림을 구매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아트 딜러들의 마음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모네는 어려서부터 독창적인 풍자만화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다. 열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뒀는데 그 무렵부터 이미 사람의 특징을 한순간에 잡아내는 캐리커처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생활비 충당은 물론이고 남은 돈으로 창작 여행을 다닐 만큼 풍족했다. 그러던 중 열아홉 살에 파리로 가서 2년간 미술 공부를 하다가 군대에 소집되었고 알제리 주둔지에서 복무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샤를 글레르 밑에서 전통적인 그림 기법을 배웠는데 이미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옥외(屋外) 그림에 빠져 있던 그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모네는 잘생긴 외모에 레이스 소매를 소화할 만큼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뭇 여성들을 감탄케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쇄도하는 유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성 취향이 독특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865년 어느 날, 스물다섯 살의 철벽남 모네가 드디어 평생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를 만난다. 직업 모델이었던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모네는 그녀에게 오직 자신만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고 바로 동거(同居)에 들어갔다. 2년 후 카미유가 혼전(婚前) 임신을 하자, 안 그래도 전통 회화가 아닌 새로운 화법을 추구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던 모네의 아버지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동안 보내주던 생활비를 끊고 당장 고향집으로 돌아오라고 종용(慫慂)했지만 모네는 끝내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 장까지 태어나자 모네는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빌려야 했고 카미유 역시 세탁부 일을 해가며 고단한 삶을 꾸려가야 했다.
자살 시도
집세가 밀려 장장 6개월이나 걸려 그린 작품을 빼앗기는가 하면 밥을 굶는 일도 예사였다. 모네는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출품을 했지만 보수적인 미술협회의 거부는 계속되었다. 결국 1869년 살롱전에서 또 낙선하자 그는 극도로 절망한 나머지 파리 센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다행히 바로 정신을 차려 헤엄쳐서 나오긴 했지만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당시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끔찍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후에 모네는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어 그때가 행복했노라”고 회상했다. 당시에 그린 카미유와 아들을 담은 풍경화를 보면 그녀에 대한 사랑은 물론 그림 전체에 아득하게 퍼져 있는 행복한 공기가 손에 잡힐 것처럼 생동(生動)한다.
하지만 그들의 소박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모네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형편도 피기 시작했지만 어쩐 일인지 카미유의 얼굴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파리 근교의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그녀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기는커녕 병석에만 누워 있다가 1879년 9월 서른두 살을 일기(一期)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둘째 아들을 낳은 지 고작 1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녀의 병명은 자궁경부암.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때라 어차피 치료가 힘들었지만, 모네는 가난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여기며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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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맞은 카미유(Camille sur son lit de mort)〉 카미유 동시외(1847~1879년)는 〈초록색 드레스〉 〈정원의 여인들〉 등 젊은 시절 모네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에 모두 등장하는 모델이다. 모네와는 1870년에 결혼했고 1867년에 장, 그리고 1878년에 미셸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자궁경부암에 걸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
이렇게 그려진 작품 〈임종을 맞은 카미유〉의 우측 하단에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사인이 새겨져 있다. 클로드 모네 서명 끝에 깃발처럼 혹은 꼭 붙잡은 풍선처럼 검은색 하트(♥)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하트다.
죽은 아내의 곁에서 그 얼굴색의 변화를 화폭에 담은 모네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후일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이 작품의 창작 당시 상황에 대하여 모네와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클레망소가 “보통 사람들은 임종을 지켜볼 때 대상을 먼저 관찰하는 데 반해 모네, 당신은 색조의 관계만을 관찰하는 것 같다”고 하자 모네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려고 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아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붙잡으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먼저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빛들에 대한 전율이 기질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나의 일상적인 삶의 흐름이 다시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속에 빨려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아내 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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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Nymphéas)〉 1890년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에 집을 마련하고 정원을 만들면서 새로 판 연못에 수련과 수생식물, 아이리스 등을 심었다. 무려 여섯 명의 정원사를 두고도 몸소 정원 일을 할 정도로 모네는 정원에 애착을 보였다. 그의 마지막 연작인 〈수련〉은 무려 250여 점에 달한다. |
카미유가 병마(病魔)와 싸우는 동안 알리스는 카미유를 간호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갓난아기 둘을 포함해 총 여덟 명의 아이를 돌보았다. 그러다 어느 시점인가부터 둘은 연인(戀人)이 되었는데 그게 정확히 카미유가 죽기 전인지 후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후에 경기(景氣)가 회복되고 후원자들이 돌아오자 1883년 모네 일가족은 파리 근교 지베르니 마을의 넓은 정원이 딸린 저택으로 이사를 했다.
모네는 1893년에 대지를 더 구매하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과 아이리스 등 수생식물을 심고, 연못 위로 일본풍의 아치형 다리를 놓으며 정원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려 여섯 명의 정원사를 두고도 몸소 정원 일을 할 정도로 모네는 정원을 사랑했다.
알리스는 모네가 오직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조(內助)를 다했다. 혹여 알리스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식사 때를 놓치기라도 하면 모네는 금방 토라져 버리곤 했다. 상류층 출신으로 인테리어 안목이 뛰어났고 사교(社交)에도 능통했던 알리스는 지베르니 저택에 미술계 인사들과 후원자들을 초대해 자주 접대를 했다. 그 덕분에 모네는 당대에 몸값이 가장 비싼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모네의 사랑은 카미유가 다 가져갔는지 몰라도 그의 예술적 성공의 후광(後光)만큼은 알리스가 다 받았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여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1911년 알리스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딸이 집안일을 물려받았다. 덕분에 모네는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일상의 방해 없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최전선이 지베르니에서 불과 60km도 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神의 눈을 가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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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초더미(Meules)〉 흔하디 흔한 일상적이고 전원적인 소재 건초더미. 모네는 빛과 대기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오묘한 색채를 섬세한 붓 터치로 생생하게 담아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건초더미〉 연작으로 모네는 생애 처음으로 커다란 물질적 성공을 거두었다. |
당연히 시력이 크게 손상되었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는 시시각각 아니 초(秒) 단위로 빛의 변화가 포착되었다. 칭찬에 인색한 폴 세잔조차도 “모네는 그냥 하나의 카메라 렌즈다. 하지만 세상에, 그의 렌즈는 너무도 훌륭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빛의 변화를 정확하게 감지하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神)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제작했다. 〈건초더미〉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 등의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더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1893년부터 30년간 수련을 무려 250여 편이나 그렸다.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視線)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 〈수련〉을 보고 있자면, 왠지 아련함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이 꼭 초기 작품들 속 카미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들판에 우두커니 서서 빛에 휩싸여 있는 〈건초더미〉들은 꼭 모네 자신(自身)을 닮은 것 같다. 건초더미와 수련,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빛과 대기, 그리고 안개.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둘러싼, 수억 년 전에 폭발한 저 별에서 날아온 원자들이 섞인 대기의 움직임이 살짝 느껴진다. 마치 특별한 렌즈를 얻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