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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53〉 고정희·이문재·정봉렬·김길녀·심인자의 가을 시

“산처럼 큰 정적 불타는 10월 오후, 그대 음성이 불타고 있다”(고정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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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시인의 계절… 모국어로 채우는 가을 시들 많아
⊙ ‘혼자 있어보니/ 혼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이문재)
‘비탈길 느릅나무에 불이 붙는다. 넋을 박은 가로수에 불이 붙는다’. 작년 11월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을 둘러싼 숲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가을은 시인의 계절이다. 시인의 한 줄 기도를 기억해야 하는 우리는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기꺼이 암송하고야 만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은 낙엽과 함께 지는 조락(凋落)의 계절이기에 감상의 밀도가 더욱 짙은지도 모른다.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김광균의 ‘추일서정(秋日抒情)’도 이맘때면 생각난다.
 

  ‌‘이슬치는 가을밤 홀로 거닐면/ 시름에 쌓이는 나그네 마음/ 멀리 배에서는 등불이 새어오고/ 초승달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
 
  올해 간행된 시집 중에 가을 느낌을 물씬 풍기는 시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시인들은 가을을 노래하고 있었다.
 
고정희 시인의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작고 시인 고정희(高靜熙·1948~1991)의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문학동네 刊)가 지난 6월 출간됐다. 이 시집은 1979년 간행됐다가 1985년 평민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세 번째 재출간인 셈이다. 고정희 하면 장시집(長詩集) 《초혼제》가 떠오른다. 이 시집으로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다. 신동엽(申東曄·1930~1969)의 《금강(錦江)》, 신경림(申庚林)의 《새재》가 떠오른다.
 
  시인은 ‘누가 내 혼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간다’고 노래했다. ‘느릅나무에 불이 붙고 가로수에, 관목숲에 불길이 번진다’고 썼다. 또 ‘진혼곡 같은 가을바람이 불살을 흔들고 있다’고 노래했다. 강렬한 불 이미지가 가을을 불태우는 듯하다.
 
  ‌내 속에 깊이깊이 잠든 그대가
  흐르는 바람 저쪽에서 회오리치는 날은
  누가 내 혼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간다.
  비탈길 느릅나무에 불이 붙는다
  넋을 박은 가로수에 불이 붙는다
  산의 이쪽, 대안의 푸른 욕망을 나부끼는
  관목숲에 서서히 번져드는 불, 불길
  드디어 산이 불타오르고 그대여,
  산처럼 큰 정적이 불타는 10월 오후에
  그대 미세한 음성이 불타고 있다
  내 핏줄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고
  내 혼 어디에도 채울 수 없는 누가
  내 모든 어둠의 확을 열고
  찬란한 불길을 오관에 켜고 있다
  아아, 멀리서 진혼곡 같은 바람이
  불살을 흔들고 있다
 
  -고정희의 ‘가을’ 전문

 
  올해는 고정희 시인의 30주기가 되는 해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뱀사골 계곡에서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정봉렬의 시조집 《난세기(亂世記)》.
  정봉렬(鄭奉烈·61) 시인의 시조시집 《난세기(亂世記)》(세창미디어)가 지난 5월 출간됐다. 여섯 번째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은 시집에 ‘가을비’ ‘가을의 심연’ ‘가을맞이’ ‘가을의 노래’ 등 가을을 담은 단시(短詩)를 여러 편 실었다. 시조 형식을 띠고 있으나 율격에서 자유롭다. ‘추일서정’의 낭만이 쓸쓸하게 담겨 있다.
 
  ‌찬바람 불어와서 낙엽 다 진 쓸쓸한 길
  혼자서는 휘파람도 이어가지 못한 노래
  저만치 비틀거리는
  가을 속의 음표여
 
  -정봉렬의 ‘가을의 노래’ 일부
 
  목마른 가을빛이 깊은 못에 빠져 있다
  높은 하늘 주저앉고 고개 숙인 산봉우리
  아무리 외치고 불러도
  대답 없는 메아리
 
  -정봉렬의 ‘가을의 심연(深淵)’ 일부

 
 
  ‘가을’과 生의 절실함
 
김길녀의 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김길녀(金吉女·56) 시인의 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애지)도 지난 5월 나왔다. 이 시집에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가 실려 있다.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신이다. 1990년 《시와 비평》으로 등단해 여러 권의 시집과 여행 산문집을 펴냈다.
 
  시인은 유년의 기억 속에서 가을을 떠올린다. ‘다락방 동그랗게 몸 말아 무릎에 두 팔을 묻고’ 열두 살 계집아이로 돌아간다. 엄마 잔소리가 들리고 해 질 녘 둑길에 핀 패랭이꽃, 그리고 노을, 옛집이 떠오른다. 그 옛집에는 자장가를 불러주는 엄마가 있다. 모두 가을이면 연상되는 추억의 이미지들이다.
 
  ‌화살나무 빨강 잎사귀 손톱으로
  꾹꾹 누르면 적도의 석양처럼
  지평선 낮은 구름에도 붉게
  스미어 쓸쓸함을 키워줄까,
  무심히 지나쳤던 수목원 나무들
  가을이 오면 점령군이 되어 하늘로
  하늘로 온몸을 펼친다
  헐렁하던 허공이 색색의 이파리들로
  채워지는데 하느님은 어디로 숨을까,
 
  다락방에서 동그랗게 몸말아 무릎에 두 팔
  묻고 열두 살 계집아이 그림자를 부른다
  억울한 엄마 잔소리에 눈물 훔치며
  달려갔던 해질녘 둑길
  패랭이꽃보다 고운 노을 비추던
  저녁 강에 어룽지던 엄마 미소
  그 엄마, 영원의 가을 속으로 떠난 옛집
 
  담장 너머 뚱뚱한 오동나무 밑동에서 들려오는 개미떼의 합창
  뒤뜰 포도나무 넝쿨마다 알알이 열매로 자라난 앨범 속 풍경
  지하 창고에서 정든 향기로 익어간다
  지금도 엄마 숨결 남아 있는 항아리들
  저쪽별에서 이쪽별 바라보는 엄마 얼굴
  저무는 햇살에 반짝이는 빨래집게 펄럭펄럭
  옥상의 저녁은 기울어진 기와산
  마주 보며 일찍 자리를 펼친다
 
  조금씩 빨리 찾아오는 어둠 데리고
  먼 길 떠났던 식구들, 별과 함께
  자장가 부르며 하나 둘 엄마를 찾아서
  옛집으로 몰려오고 있다
 
  -김길녀의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 전문

 
‘찬바람 불어와서 낙엽 다 진 쓸쓸한 길’. 작년 11월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걷고 있다. 사진=조선DB
  심인자의 시 ‘대신이라는 말’은 생의 절실함을 느끼게 한다. 지난 2월 간행된 시조집 《대신이라는 말》(책만드는집)에 실렸다. 절실함만큼 가을과 잘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심인자의 시조집 《대신이라는 말》.
  암병동을 찾아간 시인은 ‘지랄 같은 슬픔’과 마주하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지켜보는 마음은 ‘난장판 심연’과 같다. 도저히 참다못해 눈물의 기도로 ‘속죄물’을 자원한다. 오죽했으면 대신 데려가라 호소했을까.
 
  ‌한 방울 피도 못 되는 지랄 같은 슬픔이
  목울대 밀어 올리며 새벽을 찍어 누른다
  어둠 속 불 켠 전자시계 초초히 떨며 가고
 
  불면을 이기지 못한 난장판 심연은
  삽날에 뒤집히는 두려움 끌어안고
  속죄의 제물을 자원한다 대신은 안 될까요
 
  말라버린 눈물과 뭉그러지는 기도만
  투두둑 가슴 안에서 때 없이 분질러진다
 
  서른은 너무하잖아요.
  내 생을 떼 흥정한다
 
  -심인자의 ‘대신이라는 말-암 병동에서’ 전문

 
 
  시인이 말하는 ‘혼자’의 비밀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출처=pixabay 무료사진
  이문재(李文宰・61)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혼자의 넓이》(창비)가 지난 5월 나왔다.
 
  1982년 동인지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 시력(詩歷)은 마흔의 나이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하고 있다.
 
  새 시집에 담긴 다양한 빛깔의 언어들 속에 ‘혼자’라는 단어가 독자들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시 ‘혼자의 넓이’ ‘혼자와 그 적들’을 여러 번 읽었다.
 
  ‘혼자’는 자기만의 넓이가 있는데,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혼자’는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고, 밤새 외등을 켜놓기도 하며,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이문재의 ‘혼자의 넓이’ 전문

 
이문재의 시집 《혼자의 넓이》.
  이문재 시인은 또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혼자 먹는 밥, 혼자 마시는 술도 시끌벅적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마운 분, 미안한 분, 고약한 놈들은 굳이 부르지 않아도 찾아와 서로 치받는다. 그러니 혼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마지막 행이 인상적이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는 말은 첫 연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와 정확히 일치한다.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없는 사람 없던 사람
  매번 곁에 와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도 시끌벅적
 
  고마운 분들
  고마워서 미안한 분들
  생각할수록 고약해지는 놈들
  그 결정적 장면들이 부르지 않았는데
  다들 와서 왁자지껄했다 저희들끼리
  서로 잘못한 게 없다며 치고받기도 했다
 
  혼자 있어보니
  혼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
 
  -이문재 ‘혼자와 그 적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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