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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1

알렉산드로스(상)

‘고정관념을 깨는 리더십’

글 : 엄광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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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의 名馬 부케팔로스는 중국 역사에 나오는 西域 명마 汗血馬
⊙ 그라니코스강 전투에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背水陣 펼쳐 승리
⊙ 카네기, 입사 시험에서 ‘고르디온의 매듭’ 응용
페르시아를 정복해 東西 간 문명 교류와 헬레니즘 문명의 기틀을 마련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왕자(王者)의 재목으로 떠오른 것은 12세 때 부케팔로스라는 명마(名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부왕(父王) 필리포스 2세는 테살리아의 말 장수 피로니코스에게 13탤런트를 주고 ‘소 대가리’라는 뜻을 가진 부케팔로스를 샀다. 숯덩어리처럼 검은 말이었는데, 배에 소머리 모양의 흰 무늬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당시 1탤런트는 육체노동자 20일 치의 임금에 해당하므로 꽤 비싼 값에 구입했는데, 성질이 워낙 사나워 누구도 등에 올라타는 사람이 없었다.
 
  필리포스 2세가 부케팔로스를 제대로 타는 자에게 선물하겠다고 선언하자, 왕자 알렉산드로스가 선뜻 나섰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말을 타다 실패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고, 그 결과 말이 땅바닥에 길게 늘어진 제 그림자에 놀라 뒷발질을 하고 겅둥거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태양을 향해 말 머리를 두게 한 후 안전하게 말을 탔으며, 부케팔로스를 자신의 애마(愛馬)로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지혜로웠던 알렉산드로스가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즉위했을 때였다.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그리스가 앞섰지만, 돈의 위력 앞에서는 페르시아에 한 수 뒤지는 형편이었다. 그 무렵 알렉산드로스의 부왕인 필리포스 2세가 호위병에게 암살당했는데, 배후로 페르시아가 지목되었다. 필리포스 2세를 죽이기 위해 호위병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부왕이 암살당한 해는 기원전 336년으로 알렉산드로스가 20세 때였다. 바로 그해에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가 맹주(盟主)로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연합전선을 펴려고 하였다. 테베와 아테네 등이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반기를 들 기미를 보였는데,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그 도시국가들을 평정한 후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스 문명 전파단’
 
  21세 때인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평정하고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원정 떠날 때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전 재산을 군사들에게 모두 분배했다. 이때 휘하 장수 중 하나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면 왕은 무엇이 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가진 것은 희망이야”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겠다는 야망이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출정에 앞서 그리스 신(神)들을 위한 축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군사 출정식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뮤즈의 신들에 바치는 일종의 문화축제였다. 즉 클레이오(역사), 에우테르페(서정시), 탈리아(희극), 멜포메네(비극), 테르픽소라(무용), 에라토(연애시), 폴리힘니아(찬가), 우라니아(천문학), 칼리오페(서사시) 등 각종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들을 위한 축제였다.
 
  이 뮤즈의 신들을 기리는 문화축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역사·종교·문학·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그리스 문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원정에 함께 가는 이른바 ‘그리스 문명 전파단원’이었다. 단원 중에는 지질학자·지도제작자·식물학자·동물학자 등도 있었다.
 
  특히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칼리스테네스는 원정 기간에 알렉산드로스의 일거수일투족과 전쟁 상황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고 참가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이자 제자로, 나이가 알렉산드로스보다 많았지만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워 평소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가 군사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 종사자들을 모두 동원하여 원정길에 오른 것은, 매사 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컸다. 강력한 지배력은 강한 군사력이 아닌 문화의 동질성을 통한 신뢰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기 직전 알렉산드로스는 괴짜 철학자로 알려진 디오게네스를 만났다. 당시 디오게네스는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부유한 코린토스에 살고 있었는데, 당대 최고 현자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좁은 통나무 안에서 걸인처럼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라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앞에서 햇살을 가리지 말고 조금만 비켜주시오”라고 대답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측근들에게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라며 감동한 눈빛을 보였다고 한다.
 
 
  이소스 전투
 
이소스 전투를 그린 고대 벽화. 왼쪽에는 공격하는 알렉산드로스가, 오른쪽에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그려져 있다.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 군대의 첫 만남은 그라니코스강에서 이뤄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는데, 그가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을 때 들판에는 세 배가 넘는 페르시아 군대가 버티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연합군은 강이 배후에 있어 전진밖에는 적을 뚫을 길이 없었다.
 
  명마 부케팔로스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태양을 등진 채 적에 총공격을 감행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을 피해 전투를 감행한 것은 위치상 햇살의 눈부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어릴 적 명마 부케팔로스를 얻을 때의 지혜를 역이용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동쪽에 위치한 페르시아 군대는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보며 전투에 임하면서 햇빛에 눈이 부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던 것이다.
 
  첫 전투에서 대패(大敗)한 페르시아 군대는 지리멸렬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세를 이어 그동안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던 소아시아 여러 나라를 공략해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333년 2월, 알렉산드로스가 계속 전진하여 고르디온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 도시의 신전에는 전차가 산수유나무 껍질로 꼰 동아줄에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당시 전설에, 그 동아줄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하는 왕이 된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도 그 매듭을 푸는 자가 없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칼을 뽑아 단숨에 동아줄을 잘라낸 후 스스로 ‘아시아를 지배하는 왕’임을 선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시리아를 거쳐 이소스 평원으로 달려갔다. 이소스는 시리아의 북쪽 국경 인근인 오늘날 터키 중남부 지역으로, 당시 페르시아의 군사적 요충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곳에서 다리우스 3세는 10만명이 넘는 병력으로 4만명의 마케도니아 군대와 맞섰는데,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가 애마 부케팔로스를 타고 황금 투구를 번쩍이며 페르시아의 주력 부대를 향해 쐐기를 박듯 돌격해 들어가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다리우스 3세는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왕이 도망치자 페르시아 군대는 급격히 무너졌다.
 
  이소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는 가족까지 팽개친 채 깊은 산속으로 도망쳤고, 그의 모후(母后)와 왕후를 비롯한 자식들은 알렉산드로스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다리우스 3세의 가족은 벌벌 떨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최대한 선의를 베풀어 그들을 감동시키기까지 했다.
 
 
  페르시아 정복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는 티로스섬에 있는 난공불락의 성곽을 어렵게 점령한 후, 페르시아 중심부로 쳐들어가지 않고 이집트로 향했다.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이소스 전투를 소문으로 접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이름만 듣고도 겁에 질려 항복했으며, 그는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이렇게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나라와 지중해 연안의 요새들을 점령한 후, 드디어 다리우스 3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가우가멜라로 향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 현재 이라크의 모술 근처인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페르시아 주력군과 일대 결전을 벌였다. 이 전투도 이소스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군은 10만명 병력, 마케도니아군은 4만명 정도였다. 더구나 페르시아 군대는 200대에 달하는 전차(戰車)를 갖고 있었는데, 네 바퀴에 날이 선 칼과 창을 장착해 보병은 물론 기병들도 겁내는 가공할 위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겁을 먹지 않았다. 다리우스 3세가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순간적으로 군사를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여 전차를 피했으며, 저돌적 공격으로 10만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박살 냈다. 그러자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이 지휘하던 박트리아 기병대와 그리스 용병대를 이끌고 메디아로 피신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손쉽게 바빌론에 입성하였으며, 곧이어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까지 점령했다. 결국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군사들에게 쫓겨 다니다 박트리아 기병대를 이끄는 휘하 장수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완벽하게 정복했다.
 
 
  영웅 리더십
 
  고정관념을 깨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실크로드’라는 말을 만들어낸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
  사람의 이동이 실크로드를 만들었고, 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인류 역사는 발전해왔다. 동서양 문명 교류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전쟁을 통하여 헬레니즘 문명을 꽃피운 실크로드 영웅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실크로드(Silk Road)’라는 용어는 18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F. von Richthofen)이 처음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 고대 중국과 로마 사이에 있던 비단 교역의 주된 통로를 ‘실크로드’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실크로드는 ‘비단의 교역로’라는 협의적(狹義的) 의미보다는 ‘문명의 교류’라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실크로드는 대체로 상인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개척되었으나, 정복군주들의 전쟁 루트로 활용되면서 더욱 빠르고 가열한 문명 교류가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했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중국 비단을 좋아해서 비싼 돈을 주고 그것을 사들였다. 일찍부터 페르시아가 부를 축적하여 군사대국이 된 것도 장사수완이 뛰어난 덕분이다.
 
  페르시아의 전성기는 다리우스 1세 때였다. 그는 정복군주로 페르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구축했으며, 각 정복지를 연결하는 ‘왕의 길’을 만든 실크로드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길을 통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명마 부케팔로스도 마케도니아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汗血馬
 
漢나라 시대의 靑銅馬像. ‘한혈마’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서역(西域)의 대원(大宛·페르가나)·오손(烏孫·톈산산맥 중서부 지역) 등지에서 나는 말이 명마로 알려져 있다. 대원의 말은 ‘한혈마(汗血馬)’라고 하고, 오손의 말은 ‘천마(天馬)’ 또는 ‘서극마(西極馬)’라고 불렸다. 한혈마는 목덜미와 어깨 사이의 피하조직에 기생충이 서식하고 있는데, 말이 달릴 때면 혈관 팽창으로 인하여 그 부위에 구멍이 생겨 땀과 피가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서역에서 왕을 상징하는 ‘칸’의 한자 표기가 ‘한(汗)’, 거기에 혈통을 뜻한 피(血)를 합쳐 ‘왕의 혈통’이란 뜻으로 ‘한혈마’라 했다고 한다. 털 빛깔이 붉은 한혈마를 ‘적토마(赤兎馬)’라고도 하는데, 말이 질주할 때 털 빛깔 때문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기원전부터 서역의 말은 실크로드 교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역품을 싣고 이동하는 수단으로도 그렇고, 전투용으로도 각광을 받았다. 당시 전투에서는 기마대가 매우 위협적인 전술전략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인·소그드인 등 상술(商術)에 뛰어난 무역상들에 의해 교역이 이루어지던 서역의 명마들이야말로, 동서양의 강국들이 귀하게 여기던 실크로드의 중요 교역 품목이었다.
 
  아무튼 오늘날 한혈마는 중국 동부와 몽골, 헝가리와 프랑스 등지에 비교적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는 오래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의 말이 동과 서로 활발하게 교역되었음을 실증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명마로 알려진 ‘아칼테케(Akhal-Teke)’라는 말은 바로 옛 서역의 한혈마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예부터 한혈마는 하루 400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지구력이 강하고 더위를 잘 이겨내서 경주마로 인기가 있는 아칼테케의 경우 84일 동안 무려 4300km를 달린 기록도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타던 부케팔로스도 대원의 한혈마로 추측된다. 부케팔로스는 검은 빛깔의 말로 배에 소머리 모양의 흰 무늬가 있었는데, 당시 그리스어로 ‘부’는 ‘소’이고 ‘케팔로스’는 ‘머리’라는 뜻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와 부케팔로스는 아시아 원정 때 한 몸이 되어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기원전 326년경 파키스탄의 휴다스페스강 전투에서 부케팔로스는 당시 인도의 200마리나 되는 코끼리 부대와 대적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희생되었다.
 
  자신의 몸과 같았던 이 명마가 죽자 알렉산드로스는 전쟁에서 이긴 후 그 지역에 ‘알렉산드리아 부케팔로스’란 도시를 세웠다. 한편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공략할 때 건너온 바다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사이의 다르다넬스해협이다. 오늘날 터키의 보스포루스해협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루는 해협인데, 옛날부터 중요한 유라시아 교역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이 두 해협은 실크로드를 통해 아시아에서 유럽의 로마까지 연결되는 인후부(咽喉部) 같은 곳으로, 교역을 통한 상권다툼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지역 간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를 위시한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세력다툼은 상권을 선점(先占)하여 부(富)를 축적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이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문명교류도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문화를 아시아에 전파, 동서 문명의 융합을 통한 ‘헬레니즘 문명’을 탄생시킨 것은 실크로드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고정관념을 깨다
 
  처음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정복에 나섰을 때 그라니코스강 둔덕에서 광활한 동쪽 들판의 페르시아군을 대적(對敵)해 승리를 거둔 것은 곧 ‘배수진(背水陣)’의 전법(戰法)이 통했기 때문이다. 이미 퇴로가 차단돼 적과 죽기로 싸워서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 한(漢)나라 때 명장 한신(韓信)이 ‘배수진’을 쓰기 100여 년 전에 이미 알렉산드로스가 그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더구나 페르시아군이 그라니코스강 언덕에 진을 치고 마케도니아군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불리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강하여 적을 들이쳤다. 마케도니아군은 그라니코스강을 뒤에 두고 싸워야 했으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불리했다. 언덕 위에 진을 친 페르시아군이 공격해올 경우 뒤에 강이 있으므로 마케도니아군은 자연적으로 배수진의 전법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면 강물에 빠져 몰살당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앞으로 진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기병대를 앞세워 적을 공격하는 전술에 뛰어났다. 강 언덕의 유리한 위치에 있던 페르시아군은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그렇게 빨리 공격을 가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대는 적진의 중앙을 향해 일격에 파고들어 가 페르시아군을 양편으로 흩어지게 만들어놓고, 다시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 적의 양 측면을 공격했다. 한편 기병대의 양편에 배치된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양쪽으로 갈라진 페르시아군에게 협공을 가하여 전 진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와의 첫 전투인 그라니코스강에서 대승(大勝)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배수진’을 치고 기습공격을 감행한 알렉산드로스의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감히 마케도니아군이 그라니코스강을 건너 공격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고 불리한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고르디온의 매듭
 
  ‘고르디온의 매듭’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의 일화 역시 고정관념을 깨는 리더십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일화를 ‘강철왕’ 카네기는 신입사원 시험에 활용하기도 했다.
 
  카네기가 신입사원 면접시험을 볼 때였다. 복잡하게 매듭이 지어진 상자가 신입사원 응시자들 앞에 하나씩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문제였다. 그것을 알려면 반드시 매듭을 풀어야 하는데, 많은 응시자가 거듭 시도를 하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제를 풀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한 응시자는 제시문을 듣고 나서 주변을 살피더니 심사위원 책상 위에 있는 칼을 가져다 매듭을 뚝뚝 자른 후 상자 속의 물건을 꺼냈다. 그가 당시 알렉산드로스의 ‘고르디온의 매듭’ 일화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카네기가 원한 답은 바로 ‘고정관념 깨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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