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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마지막회〉

‘거타지 설화’를 탄생시킨 진성여왕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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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강왕, 죽음 앞두고 “天資가 明銳하고 골상이 장부와 같다”며 누이를 後嗣로 지명
⊙ 숙부인 각간 위홍 및 2~3명의 미소년과 관계해 淫女로 단정되었지만, 최치원 중용 등 개혁정치 추진
⊙ 名弓 거타지 설화는 唐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구원하려던 진성여왕의 염원 반영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진성여왕은 개혁정치를 위해 최치원을 등용했으나,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신라에는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의 세 여왕이 있었다. 그중에서 진성여왕만 역사적으로 홀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를 대표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모두 진성여왕을 음녀(淫女)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조 2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소량리(小梁里 혹은 沙梁里)의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전부터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좋아지내더니, 이때에 이르러 항상 입내(入內)하여 용사(用事)케 하고 이내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수집하도록 시켜 《삼대목(三代目)》이라 이름하였다. 위홍이 죽으니 그를 추시(追諡)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왕은 이후로 비밀히 2, 3명의 소년 미장부(美丈夫)를 불러 음란(淫亂)을 하고 이내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진성여대왕 거타지’ 기록에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된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魏弘) 잡간(迊干) 등 서너 명의 총신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政事)를 문란하게 하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陀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에 던졌다. 왕과 권신들이 이를 얻어 보고 말했다.
 
  “이것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지었겠느냐?”
 
  이에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그를 놓아주었다.〉
 
  이처럼 두 기록 모두 대놓고 진성여왕을 ‘음란한 여인’으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다라니의 은어’란 진성여왕을 ‘음란한 여인’으로 비방하는 전단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고,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금욕(禁慾)을 불도(佛道)의 기본 도리로 알고 있는 승려라는 점에서 글을 쓸 때의 내면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 사회, 특히 왕실의 골품제를 이해한다면 진성여왕을 ‘음란한 여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골상이 장부와 같으니…”
 
  진성여왕이 신라 세 번째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윗대인 제50대 정강왕(定康王)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왕이 질병에 걸려 시중(侍中) 준흥(俊興)에게 말하기를, “내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사자(嗣子)가 없으나 나의 누이 만(曼)은 천자(天資)가 명예(明銳·명민)하고 골상이 장부(丈夫)와 같으니 경(卿) 등은 옛날 선덕(善德)·진덕(眞德)의 고사를 의방(依倣)하여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록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정강왕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다. 신라 제48대 경문왕은 태자 정(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헌강왕이 되었고, 헌강왕은 후사가 없어 동생 황(晃)이 그 뒤를 이어 정강왕이 된 것이다. 정강왕 역시 누이 만에게 왕위를 이어주었으니, 경문왕의 두 아들과 딸이 모두 대(代)를 이어 왕이 되었던 것이다.
 
  정강왕의 유언처럼 진성여왕은 하늘이 내린 자질을 갖고 태어나 총명하고 사내 대장부처럼 기골이 장대했던 모양이다. 대체로 왕의 시호(諡號)는 죽은 다음에, 그 왕이 재위 시절 펼친 정사의 공력을 높이 기려 결정한다. ‘진성(眞聖)’이란 시호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김부식이나 일연이 기록한 것처럼 ‘음란한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덕과 진덕처럼 성군 느낌이 드는 시호라고 생각된다. ‘성(聖)’ 자는 아무 군주에게나 붙여주는 시호가 아니다. 만약 당시 진성여왕 덕에 부귀와 권세를 누린 신하들이 그와 같은 시호를 지어 올렸다 하더라도, 그 이후 여전히 왕의 흠결이 문제시될 경우 정쟁(政爭) 도구로 대신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 사후(死後) 역사 기록에서 그러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성여왕은 음란한 여인이었나?
 
  그런데 어찌하여 진성여왕은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음란한 여인’의 표상처럼 되어버린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진성여왕과 궁궐에서 자주 성적(性的) 관계를 가졌다고 알려진 각간 위홍은,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에 보면 당시 구층목탑 중수 책임자며 경문왕의 친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문왕이 진성여왕의 친부(親父)이므로, 위홍은 숙부가 되는 셈이다.
 
  진성여왕과 위홍이 질녀와 숙부 사이로 근친상간(近親相姦)을 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역사적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당시 골품제를 중요시한 왕실에서 조카딸과 삼촌 사이의 성적 관계는 크게 흠이 될 일이 아니었다.
 
  위홍 이외에도 진성여왕은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곁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당시 신라 왕실에선 관례처럼 행해지던 일이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보면 선덕여왕이 ‘삼서지제(三壻之制)’의 관례에 따라 용춘(龍春)·흠반(欽飯)·을제(乙祭) 세 남자와 관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삼서지제란 후사가 없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용춘은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이며 태종 무열왕의 친부로, 선덕여왕의 숙부이기도 하다.
 
  이러한 당시 신라 사회의 관행으로 볼 때 진성여왕은 결코 ‘음란한 여자’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덕여왕과 진성여왕의 역사적 해석은 천양지차로 달리 표현되고 있다.
 
 
  나라 위기 극복하려 최치원 등용
 
함양 상림에 있는 최치원 신도비. 최치원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후 함양에 상림숲을 조성했다.
  진성여왕이 ‘음란한 여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신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선 것을 진성여왕 시대부터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때는 도처에서 도적 떼가 일어나고 무장 세력들이 무리 지어 각 지역을 점거하여 이른바 ‘후삼국(後三國)’의 시초가 되는 반란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진성여왕 재위 5년에는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에서 양길(梁吉)이 반란군을 결집해 일어났고, 휘하 부장(部將) 궁예(弓裔)로 하여금 명주(溟州·지금의 강릉) 관할 내의 10여 군현(郡縣)을 급습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재위 6년에는 완산(完山·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지칭하고 반기를 들어 무장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때 당대 최고 학자인 문신 최치원(崔致遠)은 나라를 크게 걱정하여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써서 진성여왕에게 진언하였다. 그러자 여왕은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아찬(阿飡)의 벼슬을 하사하고, 그의 지혜를 정사에 반영코자 하였다. 아찬은 육두품(六頭品)인 최치원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다. 신라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지방호족들의 득세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도둑이나 산적이 되는 등 혼란이 더욱 가중되자, 최치원은 진성여왕과 함께 나라를 바로잡는 개혁정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들어선 뒤였다.
 
  결국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 요(嶢)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전하지는 않지만,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으로 하여금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을 편찬케 한 일이나, 최치원의 ‘시무십여조’를 받아들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보려고 노력한 점 등은 진성여왕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논한 것처럼 ‘음란한 여인’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는 대목이다.
 
  최치원도 진성여왕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진성여왕을 도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힘썼으나, 중앙 귀족들의 반발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효공왕(孝恭王)이 제52대 왕위에 오르자, 최치원은 관직을 떠나 각지를 유랑하다 가야산 해인사에 이르러 머물며 학문 도야에 힘썼다.
 
 
  거타지 설화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성여대왕 거타지’ 기록을 살펴보면, 설화 이면에 진성여왕의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느낄 수 있다. 제목에서부터 ‘진성여왕’이 등장하는데, 정작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부터 묘한 여운을 준다. 설화는 매우 드라마틱한 구조로 짜여 있다.
 
  〈이때에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궁수 쉰 명을 뽑아서 그를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우리말로는 곧섬(骨大島)이라 한다-에 닿으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열흘 이상 묵게 되었다. 공은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이 일을 점치게 하였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그곳에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놓으니 못 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아올랐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은 꿈에서 깨어 그 일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두면 좋겠는가?”
 
  여러 사람이 대답했다.
 
  “나뭇조각 50쪽에 우리 이름을 각각 써서 물속에 가라앉게 함으로써 제비를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은 그 말에 따랐다. 군사 중 거타지(居陁知)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쓰인 나뭇조각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그 사람을 남겨두니 순풍이 불어 배는 지체 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가 근심에 잠겨 섬에 서 있는데, 갑자기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쪽 바다의 신(神)이오. 매일 중 하나가 해 뜰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 주문을 외우고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뜨게 되는데, 중은 내 자손의 간장을 빼먹곤 하오. 이제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았소. 내일 아침에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중을 활로 쏘아주시오.”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이니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니 과연 중이 와서 그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내려고 했다. 이때 거타지는 활을 쏘아 중을 맞혔다. 그러자 중은 즉시 늙은 여우가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물속에서 나와 치사를 했다.
 
  “공의 덕택으로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공에게 아내로 드리겠소.”
 
  “저에게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원하던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 품속에 넣어주었고, 이내 두 용을 시켜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의 배를 따라가서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 지경에 들어가게 했다. 당나라 사람은 신라의 배를 두 용이 받들고 있음을 보고 사실대로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가 말하였다.
 
  “신라의 사신은 정녕코 비상한 사람이다.”
 
  그러고 나서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거타지는 고국에 돌아와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한 다음 함께 살았다.〉
 
 
  ‘거타지 신화’는 진성여왕의 救國愛民 의지 반영
 
  진성여왕이 ‘거타지 설화’의 배경이 되고 있음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성여대왕 거타지’라는 제목에서 이미 예시되고 있다. 진성여왕이 바로 거타지인 것이다. 번역자들은 ‘眞聖女大王 居陁知’를 ‘진성여왕과 거타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두 사람 사이를 살펴보아도 ‘과’라는 접속어는 보이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진성여대왕 거타지’인 것이다.
 
  거타지 설화는 진성여왕이 죽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다. 그리고 당나라 사신으로 가는 뱃길을 돕기 위해 섬에 남는 거타지는 죽은 진성여왕의 분신(分身)과 같은 상징적인 존재다.
 
  《삼국사기》 진성여왕조 7년 기록에 보면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바다에서 익사했다고 나온다. 북원에서 양길이, 완산에서 견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계획이 무산된 것에 대해 당시 진성여왕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성여왕은 죽어서라도 아들 양패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마음이, 거타지 설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설화에는 중이 매일 아침 못가에 나와 ‘다라니 주문’을 왼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왕거인이 다라니의 은어를 지어서 길에 뿌렸다고 한다. 즉 진성여왕을 ‘음란한 여인’으로 묘사하여 요즘 말로 ‘지라시’를 뿌린 것이다. ‘거타지 설화’와 ‘왕거인 이야기’의 공통분모는 ‘다라니’다. 다라니는 불경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표방하여 음흉한 계략을 꾸며내는 주술적 역할을 하고 있다.
 
  거타지 설화에서 다라니 주문을 외는 중은 서해의 용인 노인 가족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아, 지방 토호나 반란의 괴수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가난한 백성으로 상징되는 노인 가족의 간장을 빼어 먹으려는 중의 못된 짓을 막는 것은 바로 활의 명수 거타지다. 진성여왕의 희망이 거타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대목이다.
 
  진성여왕은 자신의 분신인 거타지를 통해 서해의 용 두 마리를 앞세워 아들 양패로 하여금 사신들을 이끌고 무사히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가서 임무를 완수하고 오도록 설화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귀국 후 거타지가 품속에 간직했던 꽃가지를 꺼내 여인으로 변하여 함께 살도록 한 것은, 신라 백성들의 안락을 강조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최치원이 본 진성여왕
 
  그렇다면 ‘진성여대왕 거타지’의 설화는 누가 만들었을까. 진성여왕 사후 나라는 더욱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왕의 측근이나 문신들이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백성 사이에 퍼뜨려 진성여왕을 성군으로 받들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한때 진성여왕과 함께 개혁정치를 펴려고 했던 최치원은 ‘사사위표(謝嗣位表)’라는 글에서 진성여왕에 대해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다병(多病)한 몸으로 한가함을 사랑하고, 말해야 할 때를 기다렸다 말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성여왕에 대한 극찬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진성여왕 당대에 세워진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을 통하여 ‘은혜가 바다와 같이 넘쳤다’고 하였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의 인품을 ‘바다’로 표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 당대의 최고 학자이자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진성여왕을 매우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음란한 여인’의 기록은 신라 당대의 풍속을 모르고 저자가 임의적으로 해석해 문장화했을 수 있다. 진성여왕의 ‘진성(眞聖)’이란 시호가 그냥 부르기 좋아 붙여진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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