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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16〉

김춘추를 사랑한 문희와 보희 자매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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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보희의 꿈을 산 문희, 김춘추의 옷고름 꿰매준 인연으로 왕비가 돼
⊙ 가야계 김유신, 차기 유력 王權 후보자인 김춘추와 인연 맺기 위해 기획·연출·감독
⊙ 《화랑세기》에 의하면 언니 보희도 나중에 次妃로 김춘추와 결혼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김유신의 두 누이 보희·문희와 결혼했다.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보희・문희 자매의 꿈에 얽힌 이야기는 ‘사랑’을 주제로 다룬 신라의 대표적인 설화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조에 자세히 나오고, 《삼국사기》 문무왕조에서도 법민(法敏)이 태어나게 된 사연을 소개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약술해서 다룬 것을 보면, 이 설화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비단치마를 주고 언니 보희의 꿈을 사서 동생 문희가 왕후가 되었으니 당대 사람들에겐 최고의 이야깃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설화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기획과 연출에 의해 이루어진 이야기임이 사건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다는 점이 여느 설화와 다르다. 얼핏 설화는 그 이야기의 씨앗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황당무계한 이야기처럼 보이기 십상인데, 보희와 문희의 꿈 이야기는 거의 사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꿈의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당대의 실제 주인공들인데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면서 갈등 구조를 만들고 해피앤딩으로 끝을 맺는 이른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기법이 범상치 않다. 다시 말하면 탄탄한 이야기 구조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영화를 보더라도 기획부터 연출, 연기까지 참여하는 전천후 감독들이 더러 있다. 보희와 문희의 꿈 이야기는 철저하게 김유신이 기획・연출하고, 거기에 직접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만능 감독 역할을 하고 있어 더욱 흥미를 느끼게 해준다.
 
 
  꿈을 팔아 뒤바뀐 운명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희와 문희 자매의 꿈에 얽힌 이야기 속에는 김유신의 야망이 숨어 있으므로, 그 내용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 야망이 무엇인지 이야기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웠는데, 경성(서라벌)에 가득 찼다. 아침에 깨어나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언니, 그 꿈 나한테 팔아. 내가 아끼는 비단치마를 줄게.”
 
  “그래. 어젯밤 꿈을 너에게 주마.”
 
  보희는 손을 뻗어 꿈을 던지는 시늉을 했고, 동생 문희는 치맛자락을 벌려 그것을 받았다.
 
  그로부터 열흘 뒤, 김유신은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춘추공과 함께 자기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였다. 운동 도중 일부러 춘추공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뜯어놓고 나서 말했다.
 
  “우리 집에 들어가 꿰맵시다.”
 
  김유신은 춘추공을 누이동생 아해(阿海·보희의 어릴 적 이름)에게 안내하여 옷고름을 꿰매줄 것을 부탁했다.
 
  “어찌 사소한 일 때문에 경솔히 귀공자를 가까이하겠습니까?”
 
  아해는 한사코 사양했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번에는 막내 누이동생 아지(阿之·문희의 어릴 적 이름)에게 부탁했다. 아지는 쾌히 바느질로 춘추공의 떨어진 옷고름을 꿰매주었다.
 
  그런 인연으로 춘추공은 아지를 알게 되었고, 자주 왕래하며 만나던 끝에 임신까지 하도록 만들었다.
 
  김유신이 아지를 크게 꾸짖었다.
 
  “네가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임신을 했으니, 대체 어찌 된 노릇이냐?”
 
  김유신은 그날 이후 임신한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고 온 나라에 소문을 퍼뜨렸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것을 보고, 김유신은 뜰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피워 연기가 꾸역꾸역 일어나게 하였다.
 
  남산 위에서 선덕왕이 연기를 보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신하들이 대답했다.
 
  “김유신이 처녀인 누이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고 불에 태워 죽이려는 것입니다.”
 
  선덕왕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임신을 하게 한 사내는 누구인가?”
 
  때마침 가까이 있던 김춘추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선덕왕은 조카의 소행임을 알고 짐짓 꾸짖은 후 어서 가서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김춘추는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김유신의 집으로 가서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곧 아지와 결혼식을 올렸다.〉
 
  여기까지가 설화 내용이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아들 용수(龍樹 또는 龍春)와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그에게 선덕왕은 이모가 되는 셈이었다. 임금이 이미 조카 김춘추에게 화형에 처해질 뻔한 아지의 목숨을 구해주라는 어명을 내렸으므로, 그 후 두 사람의 결혼도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가야 출신 김유신의 고민
 
가야系 武將인 김유신은 골품제하에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두 누이를 김춘추에게 접근시켰다.
  이 설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김춘추와 문희(아지)의 결혼은 철저하게 김유신의 사전 기획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왜 이미 결혼한 몸인 김춘추에게 누이동생을 시집보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일까? 당시 김춘추는 진골(眞骨) 출신이지만, 선덕왕 다음으로 성골(聖骨) 출신의 대(代)를 이을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차기 왕위에 오를 적임자였다. 김유신은 그것을 노리고 누이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 신분 상승을 꿈꾸었던 것이다.
 
  김유신의 조상은 가야 출신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가야가 멸망하기 전인 법흥왕 19년(532년)에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었다. 그리고 그의 조부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도총관이 되어 백제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친부 서현(舒玄) 또한 대량주(大梁州) 도독을 지냈다. 어느 날 서현은 길을 가다가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눈이 맞아 중매도 없이 야합하여 부부가 되었다. 그 야합으로 태어난 아들이 바로 김유신이었다.
 
  친모(親母)가 왕실과 이어지는 신라 귀족의 딸이기는 했지만, 친부(親父)가 가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김유신은 철저한 골품제 사회에서 출세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야심이 강했고, 신라 귀족의 중심 세력에 들어가기 위한 전략으로 누이동생을 활용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김유신은 신라 귀족 중에서 누이동생의 배필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았는데, 그가 바로 김춘추였다. 신라는 오래전부터 성골 출신만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진평왕 대에 와서 아들이 없어 딸 덕만(德曼)이 대를 이어 선덕왕이 되었다. 하지만 자식이 없어 다음 왕위가 또 문제였다. 성골 중에 진평왕의 동모제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勝曼)이 있었으나, 역시 여자였으므로 다음 대를 잇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골 중에서 다음 왕위를 이을 만한 인물을 찾아야 하는데, 그 적격자가 바로 김춘추였던 것이다.
 
  김유신은 여기서 잠시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김춘추는 이미 결혼해 딸까지 있는 몸이라 누이동생의 배필로는 결격사유가 있었다.
 
  김춘추는 스무 살이 되기 전 이미 화랑도의 제16대 풍월주였던 보종공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난 보라궁주(일설에는 보라궁주의 동생 보량궁주라고 하기도 한다)와 결혼해 딸 고타소를 낳았던 것이다. 김춘추가 왕이 되기 이전 일이지만, 딸 고타소는 이찬(伊飡) 품석(品釋)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642년(선덕왕 11년) 백제와의 대야성(大耶城) 싸움에서 그곳 성주로 있던 남편 품석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김춘추는 왕이 된 이후에도 비참하게 죽은 딸 고타소를 잊지 못해 백제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고 한다.
 
  아무튼 김춘추가 이미 결혼해 딸까지 낳은 유부남이므로, 김유신은 자신의 기획을 실현시키는 데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삼국통일의 의지로 표현되었을 만큼 그의 야망은 컸다. 김유신은 어찌 되었든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김춘추를 우군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난 남자’ 김춘추
 
  김유신의 처음 기획은 먼저 누이동생 보희를 김춘추와 맺어주기로 했는데, 막내 누이동생 문희가 나타나면서 의외의 변수가 생겼다. 자매지간이지만 보희는 격식을 차릴 줄 알고 남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타는 소심한 성격인 데 반하여, 문희는 좀 더 활달하고 적극적인 편이어서 김춘추의 사랑을 먼저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보희가 김춘추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춘추는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상당히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화랑세기》 춘추공조에는 ‘얼굴이 백옥 같고 말을 온화하게 잘하였다. 큰 뜻을 지녔으나 말은 적게 하였고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기흥 박사(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김춘추가 국내외적으로 큰 신임과 명망을 얻고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덕여왕 2년(648년) 사신으로 간 김춘추를 만난 당태종은 그의 풍채가 늠름하고 아름다워 칭찬해 마지않고 그를 신성한 사람으로 여기며 환대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보다 한 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일본인들에게 매우 호감을 주었던 듯 《일본서기(日本書紀)》 효덕천황기 대화 3년 기사는 “춘추는 용모와 얼굴이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했다”라고 하여, 그의 용모가 빼어났으며 웃음을 머금은 대화는 큰 설득력을 가져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주었던 사실을 전해준다.〉
 
  외국에서까지 이처럼 김춘추의 외모와 말씨에 대해 극찬한 것을 보면, 당시 신라에서 그는 여성들의 우상이었을 것이다. 진골 귀족에다 잘생기고 말솜씨도 좋으니 어느 여성인들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희는 처음 겸양으로 김춘추의 옷고름 꿰매는 일을 거절했지만, 동생 문희에게 선수를 빼앗긴 후 엄청 후회를 했을 것이다. 김춘추와 문희가 사랑에 빠졌을 때,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보희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친동생이지만 문희가 너무 밉기까지 했을 것이다.
 
 
  김유신, 비담·염종의 난 진압
 
  누이동생 문희의 화형을 가장한 연출은 철저하게 김유신의 각본에 의해 진행된 것인데, 그것이 더욱 극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선덕왕이 두 남녀의 사랑을 인정한 것이 되므로, 김춘추는 떳떳하게 문희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아지(문희)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김춘추가 비밀로 감추려고 했던 것은 이미 정실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김유신의 화형식 액션을 통해 선덕왕에게까지 알려지면서 문희를 후처로 맞아들이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김유신이 애초 기획한 각본에서 보희가 문희로 여주인공이 바뀌긴 했지만, 연출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김유신의 출세가도가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김춘추의 정실부인 보라궁주가 둘째 아이를 낳다가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딸 고타소 하나만 남겨졌다. 때마침 문희는 아들 법민을 낳았으니, 보라궁주 사후(死後)부터 떳떳하게 정실부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한편 선덕왕 16년(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선덕왕이 여자라서 정사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면서 국고가 많이 탕진된 데다 잦은 전쟁 등으로 군역에 시달리게 되자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비담의 반란군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김유신이 이끄는 관군과 맞섰다. 김유신은 10여 일간 공방전을 펼쳤지만 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아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이 사건과 관련,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이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유혈(流血)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여주(女主: 선덕왕)가 패전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군사들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왕은 듣고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하기를 “길흉은 무상하여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중략) 성진(星辰)의 변이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왕은 근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그런 연후 그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풍연(風鳶)에 실어 날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같이 하였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길거리에 말을 퍼뜨리기를,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도로 올라갔다고 하여 적군들이 의심토록 만들었다.〉
 
  김유신의 이와 같은 지략으로 반군 세력의 사기가 떨어져 패주하였으며, 역도 비담 등을 붙잡아 목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김춘추의 즉위
 
  선덕왕이 죽고 나서 다시 마지막 남은 성골 출신인 승만이 왕위를 이어 ‘진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진덕왕이 재위 7년 만에 죽고 나자, 이제 더 이상 성골은 없으므로 신라 군신들은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攝政)을 청하였다.
 
  알천은 김유신보다 나이가 많은 백전노장이었다. 선덕왕 시절 많은 장수와 남산 우지암에 모여 국사를 논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를 때려잡았을 정도로 완력이 대단한 장수였으며, 그만큼 백성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그러나 사심이 없었고, 이미 자신은 늙었으므로 진골 출신 중에 덕망 있으면서 지혜가 뛰어난 인물을 왕으로 세우자고 하였다.
 
  이때 김유신은 알천을 만나 다음 왕위를 이을 만한 인물로 김춘추를 추천하였다. 알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군신(群臣)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 한 인물이 없으니 그는 실로 우리 신라를 이끌어갈 영웅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군신이 모두 알천의 제의에 따라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된 것은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재위 7년(660년)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자, 무열왕은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나당연합군을 결성, 그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춘추의 외교술과 김유신의 전략전술이 콤비를 이룬 쾌거였다.
 
  김유신은 자신의 매제인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여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야망인 삼국통일(비록 한반도의 반쪽 통일이지만)의 꿈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누이동생 보희와 문희의 꿈 이야기를 기획한 김유신은, 애초 꿈꾸었던 신분 상승의 목적을 넘어서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렸던 것이다. 더구나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법민은 후에 문무왕(文武王)이 되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김춘추의 후비가 된 보희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선 끝내 언급되지 않은 보희의 결혼 이야기가 《화랑세기》 춘추공조에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았다. 공이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오는 것이다.〉
 
  《화랑세기》는 문명황후(문희)가 화랑도의 풍월주였던 김유신의 친동생 흠순공(欽純公)에게 이 기록을 전했으나, 왕의 대업은 역사책에 있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고 부연 설명까지 달아놓고 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는 《문명황후사기》가 문희의 사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면, 그 내용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언니 보희가 나중에 태종 무열왕의 차비가 되어 아들을 낳았으니, 자매가 모두 김춘추의 사랑을 받은 셈이다.
 
  아무튼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자매를 모두 사랑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당시 한 명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매를 사랑했으므로, 김유신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보희까지도 끝내는 김춘추로 하여금 후비로 들어앉히도록 주선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춘추가 왕이 된 이후에는 자매가 모두 궁궐로 들어와 정비(正妃)와 차비(次妃)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 자매의 꿈을 사고판 이야기는 더욱 드라마틱한 설화 구조를 갖출 수 있었다.
 
  김춘추의 정비인 문희는 법민·인문·문왕·노차·지경·개원 등의 아들과 마지막으로 지소란 딸을 낳아 무려 6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문희의 언니지만 후비가 된 보희는 김춘추와의 사이에서 아들 개지문·거득·마득 3형제와 딸 5명을 낳아 3남 5녀를 두었다고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춘추는 정비인 문희와 후비인 보희 자매 두 여자를 모두 사랑했으며, 금실 또한 좋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보희가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어 서라벌 장안이 다 잠겼다는 꿈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을 자매 사이에 사고판 이야기는, 동생인 문희가 태종 무열왕의 정실이므로 그에 걸맞은 타당한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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