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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13〉

龍과 神物도 반한 절세미인 ‘水路부인’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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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水路부인의 남편 순정, 《일본서기》 《속일본기》에도 등장… 딸은 경덕왕의 妃
⊙ 가는 곳마다 龍이나 神物에게 납치당한 水路부인은 무당, ‘헌화가’와 ‘해가’는 굿노래일 가능성
⊙ 水路부인 납치한 東海龍은 강릉의 海商세력(토호)·산적·해적일 수도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삼국유사》 권2 기이편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 실려 있는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은 당대 절세미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순정공(純貞公)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에 반하여 암소를 몰고 가던 노옹(老翁)이 반해 ‘헌화가’를 불렀다. 동해의 용(龍)도 수로부인을 보고 반해 납치를 하자, 백성들이 ‘해가(海歌)’를 불러 그녀를 구출했다.
 
  ‘헌화가’와 ‘해가’는 모두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이 왕명을 받고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노정(路程)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또한 두 노랫말 모두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과 직접 관련된 일이다.
 
  과연 당시 수로부인에게는 어떠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에 ‘헌화가’와 ‘해가’란 노랫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일까. 이 미스터리의 사건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
 
  우선 《삼국유사》에 나오는 성덕왕 때의 순정공은 누구인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본기 제8 성덕왕조에는 순정공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덕왕의 둘째 아들인 경덕왕 즉위년에 순정공의 이름이 등장한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憲英)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던 까닭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비(妃)는 아찬 순정(順貞)의 딸이다.〉
 
  ‘헌영’은 경덕왕의 이름이다. 성덕왕의 장남이 효성왕이고, 차남이 경덕왕이다. 효성왕은 재위 6년 만에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뒤를 이어 동생인 헌영이 왕위에 올라 경덕왕이 되었다. 그리고 경덕왕의 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순정공과 《삼국사기》에 나오는 순정은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효성왕의 재위가 6년밖에 안 되므로, 순정공은 확실히 성덕왕 때부터 효성왕을 거쳐 경덕왕 때까지 활동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전덕재 박사(단국대 교수)는 〈신라 중대(中代) 대일외교의 추이와 진골귀족의 동향: 성덕왕~혜공왕대를 중심으로〉란 논문에서 《일본서기》에도 김순정의 이름이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속일본기》 9권 신귀(神龜) 3년(726) 추(秋) 7월 무자(戊子)조에서 신라 사신이 일본에 가서 김순정이 전년(725)에 죽었음을 알리자, 성무천황(聖武天皇)이 애도하는 조서와 함께 황색 비단과 면(綿)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속일본기》에는 김순정이 일본과 외교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신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경덕왕 당시 김순정의 관등이 이찬(伊湌)이었다면, 그는 당시 진골 집안 출신으로 매우 높은 관직에 종사한 인물일 것이다. 신라에서 이찬은 17관등 중에서 두 번째 높은 직급으로,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순정은 경덕왕 때 이찬이었으므로, 그의 부왕인 성덕왕 때도 꽤 높은 관직에 있던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진골 출신으로 지방관인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를 띠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사안이다.
 
 
  순정이 강릉으로 간 까닭은?
 
  《삼국유사》에는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길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성덕왕 당시 강릉의 지명은 ‘하서주(河西州)’였다. 그리고 당시엔 ‘태수’라고 하지 않고 ‘도독(都督)’이라고 했는데, 이는 저자 일연이 고려 중기 때의 인물이므로, 오기(誤記)를 할 수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아무튼 성덕왕 때 진골 출신의 순정공을 강릉태수(하서주도독)로 파견한 것은, 당시 그곳에 큰 변란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현지의 지방관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중대한 사안이므로, 중앙에서 진골 출신의 인물을 급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속일본기》에 김순정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국가의 중요한 일에 중책을 맡길 만큼 그는 성덕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나중에 경덕왕이 된 둘째 아들 헌영을 순정공의 딸과 결혼시킨 것을 보면, 그가 왕실 외척으로서 성덕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8 성덕왕조에 보면 재위 14년(715) 6월 기사에 ‘하서주’가 등장한다.
 
  〈6월에 큰 가뭄이 드니, 왕이 하서주(河西州・江陵)의 용명악거사(龍鳴嶽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못 위에서 비를 빌게 하였더니 열흘 동안 비가 내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처럼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게 된 것도 성덕왕 14년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헌화가’에 보면 암소를 모는 노인이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순정공이 왕명을 받고 하서주(강릉)로 가던 때는 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음력으로 4월일 것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하서주가 가뭄이 든 것이 6월로 돼 있다. 약 2개월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하서주가 봄부터 가뭄이 들어서 순정공이 그 일을 해결하러 간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하늘의 일이므로 가뭄이 해소되지 않아 6월까지 지속되자 ‘용명악거사’를 지칭하는 무당으로 하여금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하면, 오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심한 하서주에 순정공이 왕명을 받고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이다. 왕을 대신해 백성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특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친 老翁
 
  《삼국유사》 수로부인조의 내용을 보면,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수로부인에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첫 번째 사건은 다음과 같다.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지금의 명주(溟洲)-로 부임할 때 바닷가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높이 천 길이나 되는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고, 그녀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이들에게 청했다.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는가?”
 
  종자들이 대답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를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고는 모두가 안 되겠다고 했다. 그 곁으로 한 노옹(老翁)이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와서는 또한 가사를 지어 바쳤다. 그 노옹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노옹이 그때 부른 ‘헌화가’를 《삼국유사》에선 기사 끝머리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짙붉은 바위 가에/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것은 어쩌면 사건이라고도 할 수 없는 ‘에피소드’ 성격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수로부인을 모시는 젊은 종자들조차 겁을 내어 포기한 상황인데, 암소를 모는 노옹이 왜 목숨을 걸고 바위 벼랑을 기어 올라가 철쭉꽃을 꺾어다 바쳤는가에 있다.
 
  노옹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해석이 제각기 다르다. 불교적 입장에서 선승(禪僧)으로, 도교적 입장에서 신선(神仙)으로, 혹은 농경사회에서 받드는 농신(農神)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여자에 반한 물욕에 사로잡힌 촌로(村老)라는 견해도 있다. 향가 연구자들의 이러한 해석들은 ‘헌화가’의 내용에 나오는 ‘암소’나 ‘꽃’ 등이 암시하는 의미를 각자의 견해에 따라 신화적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는 면이 없지 않지만, 정확하게 노옹의 정체에 접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동일 박사는 《한국문학통사》 1권 ‘향가의 작품세계’에서 수로부인을 다음과 같은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순정공이 부인과 함께 갔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고, 부인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고 했다. 물길을 뜻하는 ‘수로’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부인은 용모가 아름다워서 궁벽한 곳을 지날 때마다 귀신 따위에게 앗긴 바 되었다고 했다. 이 점은 수로부인이 무당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내게 한다. 민심이 소란하자 순정공이 힘으로 다스리고, 부인은 굿으로 다스리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갔겠다.〉
 
  그러므로 조동일 박사는 수로부인조에 소개되고 있는 ‘헌화가’와 ‘해가’를 모두 굿을 할 때의 주술, 즉 ‘굿노래’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수로부인을 납치한 東海龍
 
  남편 순정공을 따라 임지로 가던 도중 수로부인에게 일어난 두 번째 사건을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시 이틀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엎어지면서 땅에 주저앉았으나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이제 바닷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은 그 말에 따랐다. 그러자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공에게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닷속에서의 일을 물으니, 부인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곱 가지 보물로 장식한 궁전에는 음식이 달고 향기로워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부인은 용모가 세상에 견줄 이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려갔다.〉
 
  《삼국유사》에선 또한 수로부인조 기사 말미에 다음과 같은 ‘해가’의 가사를 소개하고 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남의 부녀를 빼앗아간 죄가 얼마나 클까/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서 먹으리라.〉
 
  그렇다면 수로부인 설화에 나오는 ‘용’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조동일 박사는 《한국문학통사》에서 ‘수로부인이 용에게 잡혀간 사건은 꽃거리에서 본 것보다 더 큰 수난이다. 용에게 잡혀간 부인을 구출해내는 설화 유형이 거기 작용하고 있다. 용은 악룡이며, 재앙과 반역을 상징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정확하게 용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조동일 박사는 설화적으로 풀이하여 ‘재앙과 반역’의 상징으로서 악룡(惡龍)임을 명시하고 있다.
 
 
  노인의 獻花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호소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로부인 설화’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설화가 잊히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팩트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냥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묻혀버리고 말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헌화가’와 ‘해가’의 내용대로 수로부인이 겪게 된 두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설화적으로 포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이 성덕왕·효성왕·경덕왕 3대에 걸쳐 높은 관직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부인도 사람들 사이에 ‘수로’라고 불렸지만, 실제 이름은 달랐을 것이다. ‘수로’는 ‘해가’라는 노랫말이 나온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간 별칭일 가능성이 크다.
 
  ‘헌화가’의 노옹과 ‘해가’의 용에 대한 학자마다의 해석이 다르지만, 수로부인 설화 속에 실제 사건의 팩트가 존재한다면 그 상징화된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해진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성덕왕 재위 14년에 강릉에서는 오랜 가뭄으로 인해 곡식이 말라 죽고, 더구나 그 시기가 ‘보릿고개’라서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도둑 떼가 출몰하고, 악룡으로 상징되는 반역의 기미도 포착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성덕왕은 이찬 김순정을 보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반역의 기미를 사전에 차단하라는 특명을 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로부인 설화’에서 부인의 고난은 순정공이 현지에 가서 겪는 난감한 현실의 상징적 표현일 수 있다.
 
  ‘헌화가’에 나오는 노옹은 아마도 가뭄으로 목이 타는 백성들을 대표하는 장로일 것이다. 새롭게 강릉태수가 부임해 온다고 하니, 길 안내를 맡거나 가뭄으로 도탄에 바진 강릉 백성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암소를 끌고 온 것은 농경사회에서 소가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노옹을 ‘농업의 신’으로 신격화시키기 위해 설화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옹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바위 벼랑에 기어 올라가 꽃을 꺾어다 수로부인에게 바쳤으므로, 순정공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진 강릉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간접화법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바위 벼랑은 당시 강릉 백성들이 겪는 악조건 상징이며, 노옹이 고난을 무릅쓰고 꽃을 꺾어다 바친 것은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는 구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된다.
 
 
  ‘海歌’와 ‘龜旨歌’
 
  두 번째 사건의 용은 강릉 지방의 토호일 가능성이 크다. 신라 후기에는 지방호족들이 득세했다.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울 때 지방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딸을 인질로 삼아 후비(后妃)로 바치게 한 것은, 그만큼 그들의 세력을 다루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지방호족은 부(富)를 축적하고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어 지방관들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용’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동해를 통해 무역을 하거나 고기잡이로 부를 창출한 거부(巨富)를 상징한다고 추측된다. 오랜 가뭄으로 백성이 허덕일수록 지방호족들은 그 틈을 이용하여 부를 챙긴다. 먹을 것을 구하려면 백성들은 비싼 이자를 물기로 하고 당장 허기를 메우기 위해 거부의 창고에 가득한 곡물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수로부인이 ‘용’으로 표현되는 지방호족의 사병들에게 붙잡혀가자, 한 노인이 나타나 백성들로 하여금 언덕에서 막대기로 땅을 치며 ‘해가’를 부르라고 일러주었다. 이는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걸 알면서도 지방호족으로 짐작되는 ‘용’이 반역의 뜻을 품고 경거망동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시위를 통해 그 작태를 멈추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된다. 요즘 말로 하면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를 찾기 위한 일종의 ‘데모’ 같은 성격을 지닌 군중시위였던 것이다.
 
  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부른 ‘해가’는 묘하게도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 설화에 나오는 ‘구지가’와 같은 맥락으로 통한다. 이는 혹시 수로부인이 가야 출신의 핏줄일 수도 있고, ‘구지가’의 내용이 지방호족(용)을 끌어내는데 썩 잘 어울려 당시 강릉 백성들이 가사에 살을 조금 더 붙이고 각색하여 불렀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덕왕 재위 14년 6월 기사에 “용명악거사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 못 위에서 비를 빌게 하였더니 열흘 동안이나 비가 내렸다”는 내용은 비로소 강릉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기우제를 지내 비가 내리기도 했겠지만, 왕명(王命)을 받고 부임한 순정공이 해신제(海神祭)를 지내는 무당으로 이름난 ‘용명악거사’란 별명을 가진 이효의 도움을 받아 백성을 괴롭히는 ‘용’이란 거부의 행위를 잠재울 수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용명악거사’란 별칭에도 용이 들어가는 것은 바다와 관련된 업(業)에 종사하는 무당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해신제를 지내는 무당이라면 바다를 통해 무역을 하거나 고기잡이를 해서 부를 챙기는 지방호족들도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수로부인조 기사 끝부분에 ‘수로부인은 용모가 세상에 견줄 이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려갔다’는 내용을 보면, 당시 강릉은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해 굶주리는 백성들이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거나 큰 못가의 수적, 또는 바다에서 해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설화에서 ‘신물’로 표현되는 산적이나 수적, 해적들 또한 지방호족(용)처럼 수로부인의 미모에 반해 납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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