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역사 속의 여인들 〈12〉

원효의 여인 ‘요석’, 의상의 여인 ‘선묘’

글 : 엄광용  소설가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원효,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노래…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결합해 설총 낳아
⊙ 의상 흠모하던 선묘, 龍이 되어 의상의 부석사 창건 도와
⊙ 승려 부득, 여인으로 현신한 관세음보살을 돌보고 成佛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는 일본에도 전해져서 그림으로 기록됐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중에서 신라는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워 불국토(佛國土)의 세상을 이룬 국가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法興王)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인해서였다.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371), 백제가 침류왕 1년(384)에 불교를 공인한 것과 비교하면 신라는 한참 늦은 시기에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늦게 들어온 것은 지리적인 여건과 국력이 약한 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천축국(天竺國·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여 화북(華北)의 패권(覇權)을 쥔 전진(前秦)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어 승려 순도(順道)를 보냈다. 전진을 견제하고 있던 강남의 동진(東晋)은 백제에 마라난타(摩羅難陀)를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전진이 고구려와 선린외교를 맺은 것처럼, 동진 또한 백제와 외교관계를 수립해 서로가 세력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 역시 마찬가지로 서로 견제하는 측면에서 중원(中原)의 강국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가 중원의 강국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인 반면에, 신라는 지리적 여건상 중원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쉽지 않아 소외되어 있었다. 육로를 통해 중원에 접근하려면 고구려를 거쳐야 했고, 해로를 통해 가려 해도 당시 해상왕국이라 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해를 장악하고 있던 백제 때문에 쉽지 않았다.
 
 
  아도와 묵호자
 
  결국 신라는 뒤늦게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처음에는 대신들 사이에서 반대가 심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보면 이미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 일선군 모례의 집에 토굴을 파고 머물며 민간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또한 비처왕 때는 고구려에서 아도화상(我道和尙)이 모례의 집에 와서 묵었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고 한다. 아도와 묵호자가 동일인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아도는 고구려에 초전(初傳) 불교를 전한 아도와도 이름이 같아 혼동이 되고 있다. 아도는 위나라(曹魏) 정시 연간(240~248)에 아굴마(我堀摩)라는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高道寧)과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 아도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위나라로 가서 친부(親父) 아굴마를 만나고, 거기서 한동안 승려 현창화상(玄彰和尙)에게서 불경을 익힌 후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민간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도는 시대를 달리한 같은 이름으로 불린 사람일 가능성이 크며, 묵호자 또한 별명이란 느낌이 강하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도 흥법 제3 아도편에서 다음과 같이 묵호자를 표현하고 있다.
 
  〈또 공주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의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도 진짜 이름이 아니라 단순한 별명일 것이다. 양(梁)나라 사람이 달마(達磨)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 하고, 진나라에서도 중 도안(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 하는 따위다.〉
 
  묵호자는 먹[墨]처럼 검다고 해서, 벽안호는 파란 눈[碧眼]이라고 해서, 칠도인은 옻칠[漆]을 한 듯 검붉다고 해서, 당시 천축국의 승려들에게 붙인 별명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아도가 묵호자와 비슷했다면, 천축승으로서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들어왔다 신라로 입국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차돈의 순교
 
  아무튼 눌지왕 때 아도가 공주의 병을 고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대신들은 여전히 불교를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법흥왕 때 젊은 신하 염촉(厭髑·이차돈)이 순교를 함으로써 대신들도 크게 감화하여 불교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사정이 그를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치솟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석양이 그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임금이 슬퍼하여 눈물이 용포를 적시고, 여러 재상도 겁을 먹고 근심한 나머지 머리에 쓴 사모에 땀이 배었다. 샘물이 말라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연못에서 뛰어오르고, 곧은 나뭇가지가 부러지자 원숭이가 울었다.〉
 
  이것은 법흥왕과 염촉이 사전에 밀약을 하고 대신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일부러 염촉이 왕명으로 절을 세우라고 했다고 대신들에게 전했고, 대신들은 즉시 달려가 명을 거두라고 간했다. 그러자 법흥왕은 짐짓 크게 화를 내며, 염촉이 거짓 왕명을 전했다며 그를 처형케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라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그 이후 신라의 불교는 불처럼 일어났으며, 마침내 불국토의 나라가 되어 훌륭한 고승을 배출하고 많은 사찰을 창건했다.
 
 
  ‘아이돌’ 원효
 
원효대사.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무찌른 신라는 비록 고구려 땅의 일부인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지만, 삼국통일을 이룩한 셈이었다. 나중에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는 발해가 들어서 이 시대를 ‘남북국시대’라 일컫게 되었다.
 
  아무튼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이후 불교가 더욱 중흥되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고승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승려가 삼국통일을 전후해 활동한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었다.
 
  원효와 의상은 불경 공부를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온 바 있었다. 당시 스님들 사이에서는 당나라 유학이 꿈이었다. 그리고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스님들은 신라 사회에서 가장 우러러보는 신분에 속했고, 여성들에게는 요즘의 ‘K팝’으로 전 세계를 주름잡는 ‘아이돌 가수’처럼 최고 인기를 누리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당나라 유학을 위해 가는 도중 요동 벌판의 묘지에서 잠을 자다 해골바가지 안에 있는 물을 마시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귀국한 원효는, 비록 유학생은 아니지만 특히 신라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한때 화랑이기도 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신라 귀족의 딸들은 남몰래 그를 흠모했다.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온 이후 원효는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며 불경을 연구하고,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서라벌에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분황사에 불공을 드리려고 왔던 신라 귀족 여인들은 먼빛으로 그의 모습만 보고도 가슴이 설레곤 했다. 당시 40세 가까운 나이의 원효였지만, 젊은 시절 못지않을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 원효의 파계(破戒)에 대해 다루는 대목에서, 《향전(鄕傳)》에 나오는 기록이라며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해 설총(薛聰)을 낳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자루 없는 도끼’
 
  〈대사가 어느 날 일찍이 상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보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그 노랫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대사가 아마 귀부인을 통해 훌륭한 아들을 얻고 싶은 모양이다.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어디 있을 것이냐.”
 
  이때 요석궁(瑤石宮)-지금의 학원(學院)이 바로 이곳이다-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리가 왕명을 받고 원효를 찾아 나섰는데, 이미 그는 남산 근처의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궁리가 원효를 발견하고 왕명을 전하려는데, 그는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설총이다.〉
 
  원효가 불렀다는 노래에서 ‘자루 없는 도끼’는 ‘자루’가 남자의 생식기를 상징하므로 구멍만 남은 ‘도끼’는 곧 남편을 잃은 과부를 뜻한다. 또한 ‘하늘을 받칠 기둥’은 국가의 동량이 될 재목을 이르는 말이다.
 
  당대의 고승인 원효가 시쳇말로 육두문자(肉頭文字) 같은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분명 그 내면에 다른 뜻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상징화시켜 부른 노래이므로 백성들은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태종무열왕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즉시 바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궁리에게 명해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가라고 한 것이다.
 
  이미 왕은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가 원효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원효 또한 풍문으로 그러한 사실을 접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는 화랑 김흠운(金歆運)과 결혼했으나, 남편은 백제의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일찍이 과부가 된 딸을 안쓰럽게 생각하던 왕은, 공주가 원효를 남몰래 연모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을 것이다.
 
  이때 원효는 요석공주와 결합해 파계승이 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그는 요동 벌판에서 해골바가지에 괸 물을 마시고 나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밤에 잠을 자다 목이 말라 마실 때는 꿀물처럼 달고 시원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물이라 그 즉시 토해내고 말았다. 이때 그는 이 세상 모든 일이 마음에 달려 있음(一切唯心造)을 깨달았다.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의 이러한 깨달음은 요석공주를 찾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마음으로 불륜(不倫)이 아닌데, 그로 인해 파계가 된들 무슨 대수냐는 뜻으로 요석공주와 관계를 맺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布施)와도 같은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에 대해 일연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설총은 나면서 총명하여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했으며, 신라의 십현(十賢)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말을 가지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세간 풍물과 이름을 통하게 하였으며, 육경(六經)과 문학을 뜻풀이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경전을 배우고 익히는 자들이 그것을 전수하여 끊이지 않고 있다.〉
 
  원효는 설총을 낳은 이후 승복을 벗고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그는 파계승을 자처하며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일컬었고, 광대들이 갖고 노는 박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등의 행위를 통해 서민들에게 불교를 전파했다.
 
 
  의상의 여인 ‘선묘’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서 유학하기 위해 요동까지 갔다가, 원효가 뜻한 바 있어 먼저 귀국한 뒤 혼자 남았다가 변방을 지키는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첩자로 의심받아 구류되었다가 수십 일 만에 풀려나 죽음을 면하고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650년에 의상은 때마침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에 동승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의상의 당나라 유학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만, 당나라에서 만난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조차 없다. 그러나 의상이 창건한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얽힌 전설에는 선묘(善妙)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의상이 산동반도 등주(登州)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불교 집안에 거처를 정해 머물렀는데, 그 집안의 딸인 선묘라는 여인이 그의 준수한 용모에 반해 남몰래 연모를 하게 되었다.
 
  선묘는 홀로 가슴앓이를 하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의상을 찾아가 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의상은 불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 여인의 구애하는 간절한 눈길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을 물리쳤다.
 
  의상은 그 길로 당나라 수도 장안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로 갔다. 거기서 지엄(智嚴) 스님을 만났다. 이때 의상이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내막을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엄은 전날 저녁 꿈에 큰 나무 한 그루가 해동(海東)에서 생겨나 가지와 잎이 널리 우거지고 그늘이 생겨 중국에까지 와서 덮는 것을 보았다. 그 나무 위에 봉황새의 보금자리가 있었으므로,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었는데 멀리까지 빛나는 것이었다. 꿈을 깬 후 놀랍기도 하고 이상해서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왔다. 지엄은 특별한 예로 영접하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어젯밤 꾼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온다는 계시였구나.”
 
  그리하여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세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다. 지엄은 뛰어난 자질을 지닌 의상을 만난 것을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가르쳤다.〉
 
 
  부석사
 
  공부를 다 마친 의상이 670년 신라로 돌아올 때였다. 무려 20년 만에 신라로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신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장안에서 산동반도 등주로 향했다. 등주에 도착했을 때, 옛날 그를 사랑했던 선묘가 그때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상이 입을 법복을 손수 지어놓고 재회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상이 등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선묘가 바닷가로 달려나갔을 때, 이미 신라로 가는 배가 막 출항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법복을 의상에게 던져주었다. 그런 후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며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선묘가 뛰어든 바다에서 용이 한 마리 불쑥 솟아오르더니, 의상이 탄 배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날 때는 용이 앞에서 인도를 해주고, 해적이 나타나면 물리쳐주어 안전하게 의상이 탄 배는 신라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의상이 왕명으로 영주에 부석사를 창건할 때였다. 화엄종이었던 의상은 다른 종파의 반대가 심해 부석사를 짓는 데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때 선묘가 용의 모습으로 나타나 큰 돌을 세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다. 그걸 보고 절 짓는 것을 반대하던 자들이 겁을 먹고 도망쳐, 마침내 의상은 그곳에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절 이름도 뜰 부(浮) 자, 돌 석(石) 자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선묘각(善妙閣)에는 선묘의 초상이 걸려 있다.
 
 
  성불한 두 성인 이야기
 
  《삼국유사》 제4 탑상편에는 ‘부득’과 ‘박박’ 두 성인(聖人)에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는데, 스무 살이 되자 똑같이 승려가 되었다. 그들은 백월산 무등곡에 들어가 성불(成佛)을 위해 암자를 각자 짓고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박박은 북쪽 고개에 판자로 지은 판방(板房)을, 부득은 남쪽 고개 돌무더기에 뇌방(磊房)을 만들어 암자 겸 승방으로 사용하며 불공을 드렸다.
 
  어느 날 박박의 판방으로 한 여인이 찾아와 하룻밤 쉬어가기를 소원했다. 그는 성불을 하려 도를 닦는 사람에게 여인의 유혹은 방해가 된다며 즉시에 물리쳐버렸다.
 
  그 여인은 다시 부득의 뇌방으로 찾아가 똑같이 말했다. 부득은 방으로 여인을 불러들였고, 때마침 임신부인 그 여인이 산기(産氣)가 있다 하여, 손수 목욕물을 끓여 몸까지 씻겨주었다. 그런데 목욕물이 금빛으로 변했다. 여인이 말했다.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어주려는 것입니다. 이 금물로 몸을 씻으십시오.”
 
  말을 마치자 여인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한편 박박은 자신을 찾아왔던 여인이 반드시 부득에게 가서 사정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부득이 계(戒)를 어겼을 것이니 가서 마음껏 비웃어주겠다며 뇌방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부득은 미륵존상이 되어 광채를 빛내고 있었다.
 
  부득은 친구 박박을 보고, 찾아온 여인이 관음보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득은 그녀가 목욕한 금물로 씻었더니 미륵존상이 되었다며, 친구 박박에게도 권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성불할 수 있었다.〉
 
  부득과 박박의 성불 이야기는 원효와 의상의 이야기와 일맥 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원효의 여인 요석공주나 의상의 여인 선묘 모두, 부득과 박박 두 성자 앞에 관음보살로 현신(現身)한 여인과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조회 : 4487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