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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31〉 베이커의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노인, 더욱 아름다워질 수는 없나요”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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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이 땅을 버리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 땅을”
⊙ “인생 칠십이면 가히 천심이로다. 내 품 안에 떠가는 구름들아”
벤치의 노인. 그의 곁에 비둘기가 모여 있다.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칼 윌슨 베이커(번역 장영희)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수많은 멋진 것이 그러하듯이
  레이스와 상아(象牙)와 황금
  그리고 비단도 꼭 새것만이 좋은 건 아닙니다.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깃들어 있듯이
  이들처럼 저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욱 아름다워질 수는 없나요.

 
 
  Let Me Grow Lovely
  Karle Wilson Baker
 
  Let me grow lovely, growing old
  So many fine things do:
  Laces, and ivory, and gold,
  And silks need not be new;
  And there is healing in old trees,
  Old streets a glamour hold;
  Why may not I, as well as these,
  Grow lovely, growing old.

 
 
미국의 여류시인 칼 윌슨 베이커.
  칼 윌슨 베이커는 1878년 11월 13일 미국 아칸소주(州) 리틀록(Little Rock)에서 태어났다. 시카고대학을 나와 모교인 리틀록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아름다운 시를 썼다.
 
  고(故) 장영희 선생이 번역한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는 모든 노인의 바람을 담고 있다. 누구나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고 싶다. 젊은 시절 땀 흘려 일하고 노년에는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싶다. 생계를 위해,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일이 어느 정도 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일’로 충분한 노동이었으면 좋겠다.
 
  봄기운 물씬한 정월 장날,
  어린 머윗잎보다 할아버지의 비단 한복
  더 여리고 고와 슬퍼지다
 
  등 위로 해거름 지고 귀가하는 노부부
  상상하다, 고와서 울다
 
  -최광임의 ‘고운 빛에 울다’ 전문

 
  화자(시인)는 시골 장터에 앉아 머위를 파는 어느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 머위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산자락이나 밭둑에서 주로 자란다. 봄에 입맛을 돋우는 채소다.
 
  머위 파는 노인이 울긋불긋한 색동 한복을 입고 있다. 몸은 늙었을망정 새 한복을 차려입고, 여리고 고운 머위를 파는 노인의 모습이 시인의 눈엔 슬픔으로 비쳤나 보다. 그 모습은 해거름 지고 귀가하는 노부부가 연상되어 ‘고와서 울다’라고 썼다. 노인과 노부부, 그리고 머위와 색동 한복을 대비하는 시선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인생이란 것이 별것인가
 
  김건일 시인의 ‘노인과 달빛’은 최근 펴낸 시집 《밭 만들기》(시문학 刊)에 수록되었다. 그는 1973년 《시문학》 11월호에 조병화, 이원섭 시인의 추천으로 시단에 입문했다. ‘노인과 달빛’ 역시 슬픔이 배어 있다. 몸은 농사에 지쳤으나 마을엔 일할 청년이 없다. 젊다는 사람이 쉰 나이다. 땅을 놀릴 수 없어 노인은 다시 쟁기를 든다. 힘에 부쳤으나 소를 앞세워 땅을 간다.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고삐를 놓을 수 없다. 뼈가 ‘뿌러지는’(‘부러지는’이 맞는 표현이지만 강조하기 위해 시인은 된소리로 표현했다) 한이 있더라도 땅을 간다.
 
김건일의 시집 《밭 만들기》.
  그 노인이 논을 갈고 있었다
  마을에는 젊은이라고는 없고
  젊다는 사람의 나이가
  쉰이 넘었다
 
  소는 쉴 틈 없이
  입에 거품을 뿜으며
  쟁기를 끌고
  노인은 힘에 부쳤으나
  소의 고삐를 놓을 수 없었다
 
  어찌 이 땅을 버리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 땅을
  어찌 풀밭으로 만들랴
  뼈가 뿌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땅을 갈고
  이 땅에 씨를 뿌려야지
 
  노인은 달빛을 받고 있었다
  하이얀 달빛을
 
  -김건일의 ‘노인과 달빛’ 전문

 
  김건일의 같은 시집에 담긴 시 ‘인생이란 별것인가’는 죽음을 다루고 있다. 늙음은 필연적으로 가까운 가족의 죽음과 만나야 한다. 어느 날 시인은 형을 잃었다. 추운 날이면 그 형이 그립다. 어린 시절, 형은 부모님처럼 따뜻했다. 그러던 형이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다. 부모님 같은 형의 몰락이 동생은 안타까웠다. 집도 없이 노숙하는 형의 얼굴이 보기 싫었다. 그런 형이 어느 날 말도 없이 죽었다. 시인은 ‘모든 것을 버리고/말없이 떠나버리는 것//인생이란 것이 별것인가’라고 읊조린다.
 
  따뜻한 것이 그립다
  형이 그립다
  살아계셨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추운 날은
  따뜻한 형이 그립다
 
  부모님 같은 형
  형이 망하여 노숙할 때
  왜 형이 노숙하느냐고
  노숙하는 형이 미워 미워
  형의 얼굴이 보기 싫었다
 
  왜 노숙을 해 노숙을 해
  형이 원망스럽고
  밉고 불쾌하고
  보기가 싫어서 형을 외면했다
  보기가 싫어서 말도 안 했다
  아아 형이 그런 형이
  말도 없이 돌아가시자
  무엇인가 강하게 때렸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너도 더 그럴 수 있다
 
  힘이 없으면 생각도 없고
  힘이 없으면 부끄러움도 없고
  힘이 없으면 죽는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을 버리고
  말없이 떠나버리는 것
 
  인생이란 것이 별것인가
 
  -김건일의 ‘인생이란 별것인가’ 전문

 
 
  어찌 늙어보지 않고 삶을 논하는가
 
두 노인. 시인 이채는 ‘어찌 늙어보지 않고 늙음을 말하는가’라고 말한다.
  시인 이채의 시 ‘인생 칠십이면’은 나이 일흔에 겪게 되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시인은 ‘인생 칠십이면 가히 천심’이라 노래한다. 욕망의 덧없음을,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듯하다. ‘흐르는 물’이 내 세월 같고 ‘부는 바람’이 내 마음 같다, 세상사 모질고 거칠어도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탐하겠느냐고 토로한다. 죽음이 먼 듯 느껴지지만 ‘영혼의 날개’를 달면 단숨에 닿을 수 있다.
 
  인생 칠십이면 가히 무심이로다
  흐르는 물은 내 세월 같고
  부는 바람은 내 마음 같고
  저무는 해는 내 모습 같으니
  어찌 늙어보지 않고 늙음을 말하는가
 
  육신이 칠십이면 무엇인들 성하리오
  둥근 돌이 우연일 리 없고
  오랜 나무가 공연할 리 없고
  지는 낙엽이 온전할 리 없으니
  어찌 늙어보지 않고 삶을 논하는가
 
  인생 칠십이면 가히 천심이로다
  세상사 모질고
  인생사 거칠어도
  내 품 안에 떠가는 구름들아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탐하리오
 
  그곳이 먼 듯하여도
  천리만리 먼 듯하여도
  마지막 눈감으면
  영혼의 날개 달고 단숨에 닿는 그곳
  누가 하늘을 멀다고 하는가
 
  -이채의 ‘인생 칠십이면’ 전문

 
 
  늙어서도 열매 맺으며 수액이 많고 싱싱하리니
 
어느 유럽 수도원의 늙은 수사들. 그들은 노년의 성장을 위해 〈시편〉 92장 13~15절을 외운다고 한다.
  강성백의 시 ‘늙음의 높이’는 ‘늙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시다. 한때 소년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몰래 아버지 신발을 신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일하며 아버지(가장)의 시간을 살았다. ‘늙은 내’가 마당을 쓸다가 문득 논을 갈고 있는 젊은 아버지가 떠오른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이 하나로 이어짐을 느낀다. 소년과 젊은 아버지, 노인의 시간이 서로 중첩되고 엇갈린다. 마지막 행은 마치 선시(禪詩) 같다. ‘백년 후에도/오늘처럼 바람이 불어오리라’.
 
  한때 나는 소년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몰래 아버지 신발을 신고
  아득한 시간 밖을 서성이다 오곤 했다
  나이 들어
  아버지의 세월을 내가 가고…
  중력을 벗어난 시간 속에서는
  젊은 아버지가 논을 갈고
  늙은 내가 마당을 쓸고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이
  다를 바 없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백년 후에도
  오늘처럼 바람이 불어오리라
 
  -강성백의 ‘늙음의 높이’ 전문

 
  《구약(舊約)성경》의 〈시편〉 92장 13~15절 말씀은, 노년의 성장함을 상징하는 구절이다. 육체적 강함이 아니라 정신적 삶의 수액을 내면에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톨릭 수도원의 늙은 수도자들은 이 구절을 외우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돋아나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돋아나리라.
  늙어서도 열매 맺으며 수액이 많고 싱싱하리니.
 
  -〈시편〉 92장 13~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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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은중    (2019-03-05)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우리말로 거부감 없이 잔잔하게 가슴으로 들어오는 시 한권의 시집은 제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습니다 여기에 소개되어 더 반갑습니다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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