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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4〉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들여온 허황옥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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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로왕비 허황옥, 인도 동남부 타밀족 지역인 아요디아 쿠빰 출신일 수도
⊙ 우리말의 ‘나’는 타밀어로 ‘난’, ‘너’는 ‘니’, ‘강’은 ‘강가’, ‘궁둥이’는 ‘군디’
⊙ 허황후를 기리는 王后寺, 허황후 오빠 長遊가 세웠다는 은하사·동림사 등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김수로왕비 허황옥. 인도 아유타국 출신이다.
  근래에 들어와 우리나라 불교 전래는 초전(初傳)과 공전(公傳)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에는 한국불교의 전래를 공전에 두고 국가가 불교를 공인한 해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 국가가 불교를 공인하게 되는 것은 이미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정치주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성립된다.
 
  종교야말로 문화현상 가운데 가장 전파성이 강한 분야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은 《한국 속의 세계》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 전파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종교의 전파는 초보적인 전달 과정인 초전(初傳)과 문화적인 변용(metamorphosis)을 수반하는 공전(公傳)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실현된다. 초전은 주로 민간에서 잠행적으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파이며, 공전은 일정한 초전 과정을 거친 후 국가나 권력의 공식적인 허용, 즉 공허(公許)에 의해 공개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전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 2년(372년)에, 백제는 그로부터 8년 뒤인 침류왕 1년(384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의 공전이 4세기에 이루어진 반면, 신라는 한참 늦어 6세기인 법흥왕 14년(527년)에 가서야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화로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初傳불교의 전래
 
  그러나 삼국에서 불교의 초전은 공전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다. 불교의 초전에 대해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고,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은 것은 우리의 중요한 역사이자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을 기록하는 데 근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유사(遺事)’라는 제목을 단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고구려의 불교 초전은 위(魏)나라 정시(正始) 연간(240~248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아굴마(我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녕(高道寧)과 사통(私通)해 아도(我道)를 낳았다고 한다. 아도는 다섯 살 때 출가를 하였고, 열여섯 살 때 위나라에 가서 부친 아굴마를 만났다. 이때 아도는 현창화상(玄彰和尙)에게 불법을 익힌 후 고구려로 돌아와 민간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위나라 정시 연간은 고구려 동천왕 때이며, 3세기에 이미 불교가 민간에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아도는 신라 서라벌로 가서 엄장사(嚴莊寺)에 거처를 정하고, 미추왕 2년(263년)에 대궐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제의 초전은 어느 때인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멸망당한 가야의 경우, 기록이 거의 없어 유일하게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 탑상편 ‘금관성과 파사석탑’과 ‘어산의 부처 영상’ 등의 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 기록에 보면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 공주가 배에 싣고 온 보물 중 파사석탑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 석탑은 허황옥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초전불교를 들여온 실물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혼
 
김수로왕릉 정문 입구에 그려진 쌍어문(雙魚門). 허황옥이 인도 출신임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이 가락국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뱃길이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해 허황옥이 김수로왕과 결혼한 이야기를 재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건무(建武) 24년 무신(48년) 7월 27일, 가락국 구간(九干)이 김수로왕을 알현하고 아뢰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아직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臣)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서 뽑아 들여 왕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김수로왕이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다. 나와 짝지어 왕후가 되게 하는 것도 하늘이 명할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그러고 나서 김수로왕은 유천간에게 명하여 망산도(望山島)로 달려가 붉은 돛을 단 배에 탄 왕후를 맞이하게 했다.
 
  정말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에 붉은 깃발을 펄럭이는 배가 나타났고, 유천간은 섬 위에서 횃불로 신호를 보냈다. 배는 그 신호를 보고 육지 쪽으로 재빠르게 다가왔다. 곧 이 소식은 망산도 높은 곳에 있는 승점(乘岾)에서 망을 보던 신귀간 등 신하들에 의해 왕에게 전해졌다.
 
  김수로왕은 신하들로 하여금 곧 궁궐로 왕후를 모셔오게 했다.
 
  신하들이 왕명이라며 궁궐로 안내하려고 하자, 배 안에 타고 있던 왕후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말만 듣고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신하들이 그 말을 전하자, 김수로왕은 왕후의 말이 옳다고 여겨 직접 궐 밖까지 행차하여 해안에서 가까운 산 언저리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마침내 왕후는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온 후, 산의 높은 언덕에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이때 시종으로 따라온 잉신(臣)인 신보(申輔)와 조광(趙匡),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인 모정(慕貞)과 모량(慕良), 노비들까지 모두 스무 명이나 되었다. 배에 싣고 온 것도 수를 놓은 비단과 두껍고 얇은 비단, 각종 의상, 필로 된 비단, 금과 은, 구슬과 옥, 여러 가지 장신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김수로왕은 왕후를 맞아 궁궐로 함께 들어갔고, 신하들을 시켜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도 편안한 거처와 음식 등을 마련해 주도록 했다.
 
  예식을 차린 후 침전에 들었을 때, 왕후가 조용히 김수로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라 하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5월 어느 날 부왕과 모후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내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를 만나 뵈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한 신성한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직 혼처를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을 삼도록 하라’ 하시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 가락국을 향해 떠나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나가 신선이 먹는 대추(蒸棗)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의 복숭아(蟠桃)를 얻은 후 마침내 이곳으로 달려와 용안을 뵙게 된 것입니다.”
 
  이때 김수로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왕비를 맞이하자는 신하들의 간청을 구태여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그대가 몸소 내게 왔으니, 이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드디어 혼인을 하고 이틀 밤과 하루 낮을 지낸 후 마침내 공주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배에 오른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열 섬과 베 서른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허황옥의 혼인길 추적
 
김병모 교수.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온 것은 서기 48년 7월 27일이었다. 그해 5월에 떠났으므로 약 3개월간의 항해 끝에 가락국에 도착한 셈이다.
 
  과연 허황옥이 온 인도의 아유타국이 어디인가에 대해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로 설이 분분하다. 《허황옥 루트-인도에서 가야까지》의 저자인 고고학자 김병모 박사는 허황옥의 혼인길을 추적한 대표적인 학자다.
 
  1961년 7월 어느 날, 그는 옛날 가락국의 중심이었던 금관가야 지역인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릉을 찾았다. 그때 그는 능 입구의 정문 위 나무판에 새겨진 두 마리의 물고기, 즉 ‘쌍어(雙魚) 문양’을 보고 ‘허황옥의 혼인길’을 추적하는 대장정에 나섰다. 그로부터 장장 30여 년간 그는 ‘쌍어 문양’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을 돌았다. 쌍어 문양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큰 강이나 바닷가 등에 사는 사람들이 ‘풍어’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표식 중의 하나였다. 큰 물길이 지나가는 세계 곳곳의 지역이나 도시에서 쌍어 문양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쌍어 문양만으로는 추적이 쉽지 않자, 김병모 박사는 ‘아유타국’이란 국명의 발음을 가지고 지도 위에서 그와 비슷하게 불리는 인도 지역이 어디인가 찾아보았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인도 북부의 갠지스 강 중류 연변에 있는 도시 ‘아요디아’였다. 역시 강을 끼고 있는 이 도시에는 쌍어 문양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인도 북부 지역에 고대국가인 ‘아유타국’이 있었다면, 허황옥은 어떤 루트를 통해 가락국까지 왔는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관심을 가졌다. 쌍어 문양을 추적하면서 아요디아시를 아유타국으로 비정한 김병모 박사는, 이번에는 허황옥 능 앞의 비석에 새겨진 ‘가락국 수로왕비(駕洛國 首露王妃) 보주태후 허씨릉(普州太后 許氏陵)’이란 글자에 주목했다. ‘태후’는 존칭인데, 그 앞에 붙은 ‘보주’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이때 김병모 박사는 ‘보주’가 허황옥의 태생지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추적한 결과 중국 사천 지방에 ‘보주’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는 직접 그곳을 답사한 후 아유타국의 지배층이 1세기 초 북방의 월지국(月氏國) 세력에 쫓겨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넘어 사천의 보주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았다. 즉 허황옥은 아유타국의 공주로 보주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장강(長江)을 타고 황해로 나와 가락국으로 왔을 것이라 추측한 것이다.
 
 
  허황옥은 인도 남부 타밀 출신?
 
경남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릉. 《삼국유사》에 김수로왕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러나 ‘아요디아’란 지명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국의 10여 곳에서 쓰이고 있어, 이견을 갖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아요디아’는 인도 힌디어의 뿌리인 산스크리트어로 ‘싸움이 없는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도에는 ‘아요디아’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북부의 갠지스 강 중류 이외에도 동남부 해안에 ‘아요디아 쿠빰’이란 지역이 있다. 이곳 역시 몇몇 학자들 사이에 허황옥이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향할 때 출발한 항구로 비정되고 있다.
 
  ‘아요디아 쿠빰’이 유력하게 옛날 ‘아유타국’이 있던 지역으로 거론되는 것은, 이곳이 인도 동남부의 타밀나두 주(州)의 주도인 첸나이 동쪽에 있는 해변으로 파사석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탑상편 ‘금관성의 파사석탑’ 기사를 보면 다음과 내용이 그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하려 했으나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왕에게 그 사실을 고하자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해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정박하였다.〉
 
  이 기사를 볼 때 파사석탑은 김수로왕 당시 가락국과 아유타국의 교역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물증이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나지 않으나 인도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질의 돌이기 때문이다.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현재 김해시 구산동에 세워져 있다.
 
  또 하나, 인도 동남부의 ‘아요디아 쿠빰’ 해변을 허황옥의 출발지로 보는 것은 그 지역의 언어인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 때문이다. 타밀어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데, 비교언어학자 강길운 박사는 드라비다어 중에서 무려 1800여 개의 언어가 우리말과 비슷한 뜻과 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교포로 현지에서 타밀학회를 이끌고 있는 김정남 회장도 우리말과 타밀어가 500개 이상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 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말의 ‘나’는 타밀어로 ‘난’, ‘너’는 ‘니’, ‘강’은 ‘강가’, ‘궁둥이’는 ‘군디’, ‘엄마’는 ‘음마’, ‘이리 와’는 ‘잉게 와’ 등등이다. 이와 같은 타밀어와 우리말의 유사성에서, 허황옥이 인도 남동부에서 드라비다족의 4개 언어 중 하나인 타밀어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허황옥을 기리는 사찰 ‘王后寺’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있는 가락국 사찰 칠불사. 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중 김질왕(金王)에 대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시조 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은 부지런하게 나라를 다스렸으며, 매우 도를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하여 원가(元嘉) 29년 임진(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결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액자에 ‘왕후사(王后寺)’라 했다.〉
 
  이처럼 김질왕 때 시조모를 위해 ‘왕후사’를 세웠다는 것은, 허황옥이 불교 신봉자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수로왕이 당시 불교를 봉행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기사가 《삼국유사》 탑상편 ‘어산의 부처 영상’에도 보인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그 못 안에는 독룡이 살았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羅刹女)가 있어, 그 독룡과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뇌우(雷雨)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呪術)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할 수 없으므로, 머리 숙여 부처를 청하여 설법을 했다. 그랬더니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五戒)를 받았으며, 그 이후로는 재해가 없었다.〉
 
  이 기록에 보이는 ‘왕이 부처를 청하여 설법을 했다’는 것은, 이 또한 가락국 초창기에 이미 김수로왕까지도 불교를 신봉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존 우리나라의 불교 전래에 대한 학설은 북방에서 왔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이론이었다. 즉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을 통해 육로로 불교가 들어온 북방불교 전래설이 보편화된 정설로 통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올 때 배에 파사석탑을 싣고 온 것을 근거로 하여 북방보다 먼저 남방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북방에서 육로를 통해 들어온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불교보다 적어도 300년 이상 앞선 시기에 해상을 통해 남방에서 가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연구는 우리나라에 초전불교를 가져온 주인공이 허황옥임을, 바로 그녀가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을 증거로 하여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김질왕이 시조모를 기리기 위해 452년에 세웠다는 ‘왕후사’도 시기적으로 볼 때 신라 최초의 가람인 흥륜사 창건보다 70여 년 앞서고 있다.
 
  한편, 옛날 가야의 영역이었던 지리산 화계골에 있는 칠불암도 허황옥과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은 허황옥이 일곱 아들을 성불시키고 이를 기려 세운 원찰(願刹)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가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김해의 은하사, 녹산의 명월사, 장유의 장유암, 삼랑진의 부은암 등의 사찰도 남방불교의 특성을 보이고 있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불교와는 다른 가야불교만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김해 신어산 서쪽에 있는 은하사(銀河寺)의 경우 김수로왕 시대에 인도에서 온 승려 장유(長遊)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장유화상은 허황옥의 오라버니로 인도불교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은하사를 창건했으며, 또한 동쪽에는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가야국의 번영을 기원했다고 한다.
 
 
  ‘元祖 페미니스트’ 허황후
 
  이처럼 가야불교에 대한 기록이 별반 남아 있지 않고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것은, 532년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면서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야의 경우 역사기록조차 미흡해 신화를 통해서만 해석이 가능한 ‘신비의 왕국’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를 강자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가야 역사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삼국유사》의 기록은 고구려나 백제도 거의 배제되고 신라 위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다.
 
  허황옥은 김수로왕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이었으며, 둘째와 셋째 아들은 허황옥의 소원대로 허씨(許氏)로 사성(賜姓)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칠불암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성불(成佛)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해 허씨의 유래는 허황옥의 ‘자주적인 여성관’을 드러내 주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근래에 들어 페미니즘이 일반화되면서 남녀가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의 성을 함께 쓰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이미 허황옥은 약 2000년 전부터 아들에게 자기 성씨를 남겨 줌으로써 ‘여성의 평등’을 떳떳하게 주장한 원조(元祖) 페미니스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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