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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21세기 시민혁명과 언론 ⑦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2명 축출한 ‘1·2차 튤립 혁명’의 열매는 ‘형식적 민주화’뿐… ‘부정부패’와 ‘언론 탄압’은 심화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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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튤립 혁명(2005년)’은 ‘장미 혁명(2003년)’과 ‘오렌지 혁명(2004년)’에 이은 구소련 지역의 세 번째 ‘시민혁명’
⊙ 변변한 산업 기반 없는 ‘貧國’ 키르기스스탄… 1인당 국민소득은 북한과 비슷한 수준
⊙ “키르기스스탄 개혁의 걸림돌 ‘씨족’… 국회의원은 국민대표 아닌 씨족 대표”
⊙ ‘고려인’ 알렉산드르 김, 키르기스스탄 유력 일간지 두 곳 운영하며 정권 치부 폭로 활동 지속하다 탄압받아
⊙ “키르기스스탄 정권은 알렉산드르 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감옥에 가두겠다고 협박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키르기스스탄은 ‘혁명의 나라’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키르기스스탄에서는 2005년과 2010년에 ‘혁명’이 있었다. 2005년에 있었던 첫 혁명은 조지아의 ‘장미 혁명(2003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2004년)’에 이어 구소련 지역 국가에서 세 번째로 발발한 ‘시민 혁명’이다. 당시 외신은 이를 ‘튤립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는 집권 초반에는 다소 개혁 성향을 보였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정권 연장에 집착했다. 사진=키르기스스탄 《한인일보》 전상중 제공
  ‘튤립 혁명’으로 인해 1991년 이후 장기 집권했던, 당시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yev)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혁명 후 혼란상을 수습하고, 대통령에 선출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Kurmanbek Bakiyev)는 5년 뒤인 2010년에 발생한 ‘제2 튤립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5년 전,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친 시민은 자신의 권력 강화에만 몰두하고 친인척 등 비선의 국정 개입을 방조하던 바키예프에게 반기를 들었다.
 
  바키예프는 정부군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이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쇄도하는 인파를 막을 길은 없었다. 뒤늦게 대통령궁을 빠져나온 바키예프는 자신의 고향인 ‘잘랄아바트’로 가서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신변 위협을 느낀 바키예프는 구소련 국가 중 하나인 벨라루스로 도망갔다.
 
  바키예프 정권 붕괴 후 ‘여성 외교관’ 출신 로자 오툰바예바(Roza Otunbayeva)가 과도 정부 수반이 돼 국정을 맡는 동안 의회에선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내용을 담은 새 헌법을 제정했다. 내정은 총리가 맡고, 국방과 외교를 총괄하는 대통령은 ‘6년 단임’으로 한다는 게 골자였다.
 
  이후 치러진 총선(2010년 10월)에서 과반 득표 정당이 나오지 않아 구성된 ‘3당 연립 정권(조국당, 사회민주당, 공화당)’에서 사회민주당 대표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Almazbek Atambaev)가 총리로 선출됐다. 아카예프, 바키예프 정권 당시 각료로 활동했고 두 차례 혁명을 주도한 아탐바예프는 이듬해 10월 대선에서 승리해 그해 1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근로자 월평균 임금은 200달러… 경제활동 인구 절반이 1차산업 종사
 
‘1차 튤립 혁명’의 수혜자인 2대 대통령 쿠르만베크 바키예프는 아들 막심 바키예프를 정권 요직에 앉히고, 국정 농단을 하게 했다. 사진=키르기스스탄 《한인일보》 전상중 제공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人)의 나라’란 뜻이다. 츄이, 이식쿨, 오슈, 바트켄, 탈라스, 잘랄아바트, 나린 등 7개 자치주와 비슈케크와 오슈 등 2개 특별시(市)로 이뤄진 이 나라의 인구 610만명 중 약 70%가 키르기스족이다. 이 밖에 우즈베크인(14%), 러시아인(13%) 등 80여 개 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엔 스탈린 정권 당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의 후손도 약 2만명이 있다. 주로 키르기스인이 수도 비슈케크를 중심으로 한 북부, 우즈베크인이 오슈 인근의 남부에 거주한다.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 서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 북서쪽으로는 중국, 남서쪽으로는 타지키스탄과 접한 이 나라의 다양한 인구 구성은 ‘소련의 유산’이다. 소련이 지배하기 쉽게 국경을 나누면서 역사적·문화적 동질성과 무관하게 여러 민족이 한 나라에 살게 됐고, 이에 따라 민족 분쟁 가능성이 상존하게 됐다. 인구 구성과 달리 종교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그 분포가 단순하다. 19세기부터 대대적으로 받아들인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이 전체 인구의 75%가량을 차지한다. 국민 4명 중 3명이 ‘이슬람교도’인 셈이지만, 이들을 지배하는 건 이슬람 율법보다는 유목민의 전통이다.
 
  키르기스스탄은 ‘빈국(貧國)’이다. 2017년 말 기준,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의 명목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100달러로 북한(1074달러)과 비슷한 수준이다.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어 경제활동인구 절반이 1차산업에 종사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약 200달러다.
 
 
  비슈케크가 일국의 수도임을 보여주는 건 소련 시절 유산뿐
 
  국내엔 키르기스스탄 직항 노선이 없다. 키르기스스탄에 닿기 위해선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 또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먼저 가야 한다. 여기서 현지 항공을 이용하거나 차량으로 이동해야 비슈케크로 갈 수 있다.
 
  6월 15일,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지 7시간 만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도착했다. 알마티에서 비슈케크까지 차량으로 갈 때는 약 5시간이 걸린다. 알마티에서 키르기스스탄과 접한 국경도시 코데이까지 가는 데 4시간, 여기서 국경을 넘어 다시 1시간을 가야 비슈케크에 닿을 수 있다.
 
  비슈케크는 약 100만명이 사는 키르기스스탄의 수도다. 명색이 정치·경제 중심지지만, 비슈케크의 외관은 초라하기만 했다. ‘대도시’인데도 고층 건물은 많지 않았다. 10층에 있던 숙소 창을 통해 비슈케크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곳이 그나마 한 나라의 수도임을 보여주는 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알라 투 광장 인근에 남은 소련 시절 건물뿐이었다. 알라 투 광장은 우리의 광화문 광장처럼 ‘국가 상징물’과 같은 의미를 갖는 곳이다. 두 차례 혁명 당시 이 알라 투 광장에서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렸다. 특히 2010년 혁명 당시엔 정부군과 반정부시위대의 충돌로 인해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튤립 혁명’ 이전 키르기스스탄은 주변국보다 ‘민주화’된 나라였다. 인접국인 카자흐스탄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1990년부터 집권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엔 이슬람 카리모프가 26년 동안 권좌를 차지했다.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그의 집권이 끝났으므로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타지키스탄은 1992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선출돼 권력을 쥔 에모말리 라흐몬이 24년째 대통령직을 맡으면서 국민에 대한 감시·통제를 강화해 왔다.
 
 
  “중앙아시아 민주주의 섬, 키르기스스탄”
 
‘2차 튤립 혁명’ 당시 비슈케크 시내 중심가 건물들이 시위대가 놓은 불에 타오르고 있다. 사진=키르기스스탄 《한인일보》 전상중 제공
  이와 달리 키르기스스탄은 서방 학자로부터 ‘중앙아시아 민주주의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인접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초대 대통령 아카예프(재임 1991~2005년)가 장기 집권하면서도 강력한 통제 정책을 실시하진 않아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보다는 민주화된 사회였다. 바꿔 말하면, 혁명 이전 키르기스스탄은 권력 누수 현상이 생겨 독재 정권의 통제력이 약화될 경우 여기저기서 다양한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와 ‘치안 부재’ 또는 ‘국정 마비’ 상황에 직면할 소지가 다분한 상태였던 셈이다.
 
  키르기스스탄의 지역 불균형도 두 차례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이다. 국내 연구자에 따르면 비슈케크와 오슈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와 남부의 경제력 차이는 심각하다. 남부의 경우 1인당 지역 총생산(GRDP)이 키르기스스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58~63% 수준에 불과하다. 빈곤층도 북부는 국가 평균(30.6%) 이하인데, 오슈를 비롯한 남부의 빈곤율은 모두 국가 평균치를 웃돈다. 경제력 격차에 따라 상존해 온 북부와 남부의 ‘지역 갈등’은 ‘정치 불안정’을 가져왔다.
 
  가장 결정적인 ‘튤립 혁명’ 발발 요인으로 꼽히는 건 ‘씨족 갈등’이다. ‘씨족 갈등’은 키르기스스탄 사회문제의 핵심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선 키르기스스탄이란 국가 정체성, 키르기스인 또는 우즈베크인이란 종족 정체성, 이슬람교도란 종교 정체성보다 ‘씨족 정체성’을 중시한다. 법령에 따른 공식 절차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사적 관계가 우선시되는 사회였다는 얘기다. 이 같은 ‘전통’은 지금도 키르기스스탄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내 정쟁은 유력 씨족들의 국가 자산 사유화 과정”
 
  ‘씨족 사회’ 전통은 키르기스스탄 민주화의 장애물이었다. 선거를 통한 국민주권 실현, 다양한 인사들의 정치 참여, 삼권 분립, 언론과 시민사회의 권력 견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선거는 씨족 중심으로 치러졌다. 선거 입후보자들은 씨족의 지원을 받는 지역사회의 유지 또는 사업가들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정계로 진출한 인사들은 씨족들의 지지를 잃을까 봐 ‘개혁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이권을 줘가면서 씨족의 환심을 샀다. 이와 관련, 강봉구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교수(유라시아 국제관계)는 《튤립 혁명 이후 키르기스스탄 재민주화의 한계(2009년)》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력 씨족 출신의 의회 엘리트들은 국가 자산을 입법 과정을 우회하여 자신의 씨족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용하는 것을 책무로 삼는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국민과 주민이 아니라 씨족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발호하는 의회 활동은 ‘부족 파당주의(tribal factionalism)’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중략) 집권 세력은 강력한 씨족 후견망을 동원함으로써 권좌를 연장하기도 하지만, 반대 세력 역시 씨족을 중심으로 결집하도록 만드는 부수 효과를 낳는다. 즉 집권 세력이든 반대 세력이든 이념이나 정당, 정강정책 등을 기준으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씨족 망을 통해 지지를 확보하는 키르기스스탄의 정치 상황에서 광범위한 유권자층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나 야당 세력을 형성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웠다. 유력한 씨족 망이 동원되고 그에 따라 정치적 지지가 결정됨으로써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인 대표성과 경쟁성은 질식되어 갔으며, 2002년에는 아카예프 대통령의 사위가 주요 독립언론 그룹 중의 하나를 매입함으로써, 언론조차 씨족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산업시설 없어 필연적으로 씨족 이권 챙겨주는 데 한계 봉착… 정치 갈등 가능성 상존”
 
  집권 초반, ‘개혁’을 외치며 ‘씨족 정치’에서 탈피하려 했던 아카예프도 연임을 위해 씨족 세력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과 부인의 씨족 망과 동맹 세력을 동원해 정권을 연장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 자산은 북부 씨족들의 사유재산이 됐다. 국가 요직도 이들의 차지가 됐다. 권력을 장악한 씨족 엘리트들은 다시 자신들의 기득권 공고화를 위한 ‘개혁 저지’와 ‘국가 자산 사유화’에 치중할 뿐 ‘민생’은 등한시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 챙길 ‘이권’이 부족해지면 기존에 동맹 관계였던 씨족 사이에 ‘갈등’과 ‘내분’이 생기게 된다. 이와 관련, 강봉구 한양대 교수는 앞선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는 에너지 자원의 개발로부터 지속적으로 국부가 창출되기 때문에 유력 씨족들에 배분할 몫이 존재하고, 씨족들은 이해관계에서 일종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의 경우는 ‘지대추구(rent seeking)’가 가능한 지하자원도 부족하고, 산업시설도 거의 전무한 조건에서 유력 씨족 망들에 의존하는 씨족 정치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북부 유력 씨족의 지도자인 쿨로프가 모종의 밝혀지지 않은 경제적 거래를 둘러싸고 아카예프 대통령과 등을 지게 됨으로써, 아카예프를 지지하는 씨족 연합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2002년에 들어서는 남부의 유력 씨족인 ‘베크나자로프(Beknazarov)’가 대통령을 공격하는 비판의 포문을 열었고, 그동안 시혜 구조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남부와 동부의 다른 씨족들이 반대 운동에 가세하였다.〉

 
 
  매체 빼앗고 기자 투옥했지만, 독재 정권에 굽히지 않은 키르기스스탄 언론
 
  2005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키르기스스탄을 놓고 조지아의 ‘장미 혁명’과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에 이은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전망이 국내외에서 흘러나왔다. 야당 인사들은 공공연하게 ‘혁명’을 얘기했다. 후일 키르기스스탄의 과도정부 수반을 지내기도 한 로자 오툰바예바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우크라이나식 오렌지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총선 이후 국민이 부정 선거에 항의해 거리로 뛰쳐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경계하며 아카예프도 같은 해 초부터 “선거를 앞두고 외부 세력이 키르기스스탄으로 잠입하고 있다” “외부 정략가 100명이 들어와 있다”는 식으로 외부 개입설을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대선에 불출마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15년 동안 ‘이권’에서 배제된 ‘반(反)아카예프’ 세력은 줄기차게 ‘혁명’을 주창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게 키르기스스탄 언론이다. 언론 자유도가 낮고, 기자들이 신변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현지 언론 매체는 정권 비판적인 기사와 칼럼을 내놨다. 아카예프는 반정부 성향의 기자들을 투옥하면서 그들의 필봉을 꺾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아카예프 정권은 2001년, ‘고려인’ 알렉산드르 김(Alexander Kim)이 사주이자 발행·편집인으로 운영하던, 키르기스스탄 최대 일간지 《석간 비슈케크(Vechernjy Bishkek)》를 빼앗았다. 알렉산드르 김이 자신에게 비판적이란 이유에서였다. 아카예프는 자신의 사위 아딜 토이콘바예프로 하여금 《석간 비슈케크》 지분 절반을 인수하게 해 알렉산드르 김의 경영권을 빼앗았다. 토이콘바예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석간 비슈케크》는 이후 ‘친(親)아카예프’ 논조로 돌변했고, ‘튤립 혁명’ 때도 아카예프 정권에 유리한 기사를 내보냈다.
 
 
  고려인이 만든 신문과 현직 대통령의 대결 결과는 ‘혁명’
 
‘고려인’ 알렉산드르 김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유력 일간지를 운영하면서 “우리는 왜 가난한가?”란 주제로 국민을 계몽하는 한편 독재정권의 치부를 폭로했다. 사진=키르기스스탄 《한인일보》 전상중 제공
  알렉산드르 김은 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신문사를 빼앗기고 나서 얼마 안 돼 《우리수도신문(Moja Stolica Novosti)》을 창간했다. 당연하게도 해당 신문은 ‘반(反)아카예프’ 논조를 띠었다. 정권 비판적인 신문은 초창기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자금난을 겪어야 했다. 휴간과 복간을 거듭하던, 2003년 8월 이후 성장을 거듭해 《석간 비슈케크》에 이어 키르기스스탄에서 두 번째로 발행 부수가 많은 신문이 됐다.
 
  그 사이 아카예프 정권은 《우리수도신문》 인쇄를 방해하는 식으로 언론 통제를 하려 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비슈케크에 ‘독립 인쇄소’를 설립해, 현지 독립 언론 활동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르 김의 《우리수도신문》이 2005년 2월, 아카예프 대통령 일가가 소유 또는 통제하는 회사와 부동산 목록과 함께 아카예프 대통령의 호화로운 주택 공사 현장을 담은 사진이 실린 ‘특별호’ 20만 부를 찍으려 할 때는 미국 대사관이 직접 나섰다. 아카예프 정권이 《우리수도신문》을 인쇄하는 프리덤하우스의 독립인쇄소에 대한 전기 공급을 끊자 미국 대사관에서 발전기 2대를 지원해 ‘특별호 인쇄’를 도왔다. 그렇게 아카예프 정권에 치명적인 기사가 보도되자 민심이 들끓었다. 아카예프는 “《우리수도신문》이 중상모략과 거짓말로 나와 가족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주장하면서 지지자들에게 대통령에게 모욕적인 기사를 보도한 해당 신문을 고발하라고 공개 촉구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키르기스스탄 총선 이후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시 총선에서 민심과 달리 아카예프가 이끄는 집권여당이 전체 75석 중 59석을 차지했다. 아카예프의 딸 비르멧 아카예프(당시 32세), 아들 아이다르 아카예프(당시 29세)도 의회에 입성했다. 해당 총선 과정을 감시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EC)는 ▲투표권 매수 ▲불공정한 언론 보도 등을 지적하면서 총체적인 부정선거라고 평가했다.
 
 
  ‘튤립 혁명’ 이후 등장한 바키예프 정권은 경제적으로 무능하면서도 전 정권보다 부패해
 
알라 투 광장 인근에 설치된 ‘튤립 혁명’ 관련 조형물이다. 건장한 남성들이 검은 벽을 밀어 넘어뜨리는 한편 흰 벽을 끌어오고 있다.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자 야당 인사들은 유목 부족 지도자들의 원탁회의인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아카예프 퇴진’을 요구했다. 오슈와 탈라스 등에서는 선거 결과에 반발하는 시위가 있었다. 특히 야당인 인민행동당 당수 쿠르만베크 바키예프의 고향인 ‘잘랄아바트’에서는 주민 1만명이 총선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주 정부 청사를 점거했다. 이후 오슈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아카예프 정권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됐다. 아카예프는 시위 진압을 위해 내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경질하고, 무력 진압을 천명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2005년 3월 24일, 자기 씨족과 지원 세력을 수도 비슈케크의 알라 투 광장으로 집결시키고, ‘아카예프 퇴진’을 주장하는 시위를 개최했다
 
  당시 알라 투 광장에 모인 시위대는 야당 지도자들의 연설이 끝나자 대통령궁으로 몰려갔다. 경찰은 이들을 막지 않았다. 이미 아카예프가 대통령궁을 나와 러시아로 떠났기 때문이다. 대통령궁을 장악한 시위대는 국영방송사와 교도소를 점령하는 한편 아카예프 일족이 운영하던 상가를 약탈했다. 야당 세력은 바키예프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포했고, 키르기스스탄 대법원은 ‘총선 무효’를 선언했다.
 
  같은 해 8월 14일, 키르기스스탄 국민은 새로운 대통령으로 바키예프를 선택했다. 당시 바키예프의 득표율은 89%였다. 바키예프는 지역 갈등 해소와 부패 척결, 빈곤층 문제 해결 등을 외쳤지만, 그의 재임 기간 바뀐 건 없었다.
 
  바키예프는 전임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으면서도 결국 같은 길을 걸었다. 부패 척결을 외쳤지만, 스스로 부패의 온상이 됐다. 친인척을 낙하산식으로 요직에 앉혀 국가 조직과 자산을 사유화했다. 정권 강화를 위해 방송을 장악하고, 정권 비판적 성향 언론을 탄압했다. 반정부 성향 기자가 의문사 당한 일도 있었다.
 
  ‘튤립 혁명’에 의해 탄생한 ‘바키예프 정권’은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바키예프 집권 기간, 키르기스스탄의 1인당 GDP는 그대로지만 재정 적자는 증가했다. 북부와 남부 간 지역 격차는 심해졌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물가상승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공공요금도 대폭 올랐다. 2003년부터 7년 동안 동결해 왔던 공공요금은 2010년 1월 인상, 이전보다 가스요금은 400%, 전기요금은 170% 올랐다. 겨울철 연료비가 갑작스레 오르자 주민들은 분노했다. 이는 애초 약속과 달리 비슈케크 마나스 공군 기지에 미군이 주둔하는 기간을 연장하는 데 합의한 바키예프를 무너뜨리기 위해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석유와 가스 가격을 갑자기 인상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 와중에 부패 지수는 2005년 튤립 혁명 이전보다 악화됐다.
 
 
  시위대 향해 발포 명령 내린 바키예프… 1차 혁명 때와 달리 사망자 100여 명 발생
 
비슈케크 알라 투 광장 인근에 자리한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이다. ‘1차 혁명’ 당시 아카예프는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포기하고 망명했지만, ‘2차 혁명’ 당시 바키예프는 발포 명령을 내리는 등 끝까지 권좌에 미련을 보였다.
  부패 의혹 가운데엔 ‘막심 바키예프’가 있었다. 2009년 10월, 바키예프는 이른바 ‘국가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막심 바키예프를 국가 경제 혁신 전략을 개발하는 ‘중앙투자혁신개발국’의 국장에 앉혔다. 막심은 이후 각종 부패 의혹의 중심에 서게 된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현지에서 18년 거주하며 《한인일보》란 현지 신문을 발행하는 전상중씨의 말이다.
 
  “2005년 혁명은 아카예프 대통령이 자기 자식을 국회의원으로 앉혀서 문제가 됐던 거고, 2010년 혁명은 바키예프 아들 막심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게 문제가 된 거죠. 막심은 ‘진공청소기’라고 불렸습니다. 외국 투자금을 다 빨아들였어요. 그런 와중에 전기요금을 인상한다고 발표하니까 사람들이 폭발한 거죠. 탈라스에서 먼저 시위(2010년 4월 6일)가 발생해서 내무부 장관이 갔는데, 이 사람이 거기서 폭언한 거예요. 시위대가 내무부 장관을 잡아 가두니까 경찰이 구출하려고 하다 서로 충돌하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진 겁니다. 이 나라는요, 뭐든지 전개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탈라스에서 터지니까 다음날에는 전국에서 들고일어났어요.”
 
  탈라스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다음날 전국으로 확산됐다. 수도 비슈케크에서도 대규모 인파가 대통령궁 앞으로 몰려갔다. 알라 투 광장에 천막을 치고 시위를 하며 대통령궁 진입을 꾀했다. 이들 일부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상점을 약탈하고 검찰청사와 경찰청사에 불을 질렀다. 대통령궁을 지키던 정부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당시 시위대 측 주장에 따르면 사망자는 100명가량이다.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데도 시위대가 흩어지지 않고, 알라 투 광장을 가득 메우자 바키예프는 몇몇 측근과 함께 대통령궁에서 나와 자신의 고향인 잘랄아바트로 피신했다가 카자흐스탄을 거쳐 벨라루스로 도망쳤다.
 
 
  아탐바예프 이후 평화적인 정권 인수·인계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 시절 알렉산드르 김 구속 시도를 비롯해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인을 탄압하고, 검찰총장으로 하여금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게 했다. 사진=키르기스스탄 《한인일보》 전상중 제공
  당시 키르기스스탄의 반정부 시위대는 왜 죽음을 불사하면서 바키예프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을까. 이들은 정말 민주주의를 갈망했을까. 이에 대해 전씨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나라 정치 지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실 일당으로 얼마씩 받고 동원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 나라 민주주의를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얼마를 준다고 하면 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돈맛’을 보고 지지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가서 듣다 보니까, 거기서 나오는 말들이 옳다고 생각되거든. ‘왜 대통령 아들이 나라 땅을 자기 마음대로 파느냐?’면서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죠. 그럼 ‘이건 아니다’라면서 들고일어서게 돼 있죠.”
 
  바키예프 축출 이후 키르기스스탄 의회는 2010년 7월 3일, 전 외무부 장관 로자 오툰바예바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안 국민투표(6월 27일), 국회의원 총선거(10월 10일), 연립정부 수립(12월 1일) 등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11년 10월 30일, 대선에서 당시 연립정부 총리였던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승리해 같은 해 12월 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으로 규정한 새 헌법에 따라 2017년 11월에 퇴임한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역사상 최초로 순조롭게 퇴임한 대통령이 됐다. 이와 함께 아탐바예프의 ‘친구’이자 해당 정권의 총리였던 수론바이 진베코프(Sooronbay Jeenbekov)는 반정부 시위를 거치지 않고 처음으로 권력을 평화적으로 인수한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이 됐다.
 
 
  ‘혁명’ 이전보다 키르기스스탄 민주화 수준은 퇴보
 
수론바이 진베코프는 ‘혁명’ 없이 ‘평화적 선거’에 의해 정권을 인수한 키르기스스탄의 첫 대통령이다. 사진=키르기스스탄 《한인일보》 전상중 제공
  두 차례 ‘혁명’을 거치면서 키르기스스탄은 ‘민주화’되고, 국민의 ‘삶의 질’은 개선됐을까.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다. 경제 부문을 보면 혁명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판단할 수 있는 지표를 찾기 어렵다.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10% 가까이 증가했지만, 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매년 물가가 상승해 실질적인 경제 성장 효과는 크지 않다.
 
  민주화 수준도 개선되지 않았다. 1980년부터 세계 각국의 민주화 지수를 발표하는 미국의 비정부기구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튤립 혁명’ 직전 연도인 2004년 당시 키르기스스탄의 민주화 점수는 5.67, 2018년 현재는 6.07이다. 프리덤하우스는 점수가 ‘7’에 가까울수록 해당 국가의 민주화 수준이 낮은 것으로 해석한다. 이를 감안하면,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두 차례 ‘혁명’을 거치면서 ‘퇴보’한 셈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이전보다 시민사회 역량, 독립 언론의 자유, 사법부 독립성은 악화됐다. 부정부패도 증가했다. 선거 과정의 공정성만이 소폭 개선됐을 뿐이다. 특히 두 차례 ‘민주혁명’을 거쳤는데도, 키르기스스탄의 언론 자유는 갈수록 위축됐다.
 
  일례로 2005년 ‘튤립 혁명’ 이후 알렉산드르 김은 《석간 비슈케크》 되찾아 키르기스스탄 유력 일간지 두 곳을 경영했지만, 아탐바예프 정권 시절 다시 지배력을 잃었다. 알렉산드르 김의 《석간 비슈케크》는 2015년 당시 현직 대통령 아탐바예프의 형에 대한 비리 의혹을 고발하는 기사를 내보냈는데, 해당 보도 이후 아탐바예프의 형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탐바예프는 형의 사인(死因)을 《석간 비슈케크》의 악의적인 보도라고 주장하면서 고소했고, 《석간 비슈케크》 역시 아탐바예프를 맞고소했다. 이런 와중에 아탐바예프 후원자이자 《석간 비슈케크》의 전 대주주 알렉산드르 류부시킨이 신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소를 제기했다. 법원은 류부시킨의 손을 들어줬다. 알렉산드르 김이 2005년 당시 경영권을 되찾는 과정이 위법했다고 판단한 셈이다. 참고로, 키르기스스탄의 판사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알렉산드르 김 측은 법원의 결정을 아탐바예프의 ‘언론 탄압’이라고 여겼다.
 
  이후 알렉산드르 김은 《우리수도신문》 경영 일선에서도 물러났고, 2017년엔 ‘횡령’ ‘탈세’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알렉산드르 김의 근황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수도신문》에 문의했다. 해당 신문 관계자는 “키르기스스탄 정권은 알렉산드르 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감옥에 가두겠다고 협박했다”면서 주의해서 접촉하라고 조언했다. 과거 《우리수도신문》에서 일했던 현지 기자는 “아탐바예프를 계승하겠다고 밝힌 진베코프 정권이 전임 대통령과 악연이 있는 알렉산드르 김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기자를 통해 키르기스스탄 현지에서 알렉산드르 김과의 인터뷰를 추진했지만, 결국 그와의 문답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통령 존엄 훼손했다”며 검찰총장이 언론 상대로 소송 남발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 시절 검찰총장을 동원해 알렉산드르 김 외에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인을 상대로 수사와 기소를 남발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 인터넷 매체 ‘자노자(zanoza)’가 “유럽 키프로스공화국에 아탐바예프의 비밀계좌가 있다”고 보도하자 아탐바예프 정권의 검찰총장은 “대통령 존엄을 훼손했다”며 해당 매체 계좌를 동결하고, 설립자와 기자를 기소했다. ‘자노자’가 야당 인사 발언을 인용해 보도한 기사를 비롯한 정권 비판적 내용의 보도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는 “유포된 정보가 대통령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했다면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대신해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고 규정된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의 활동 보장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른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법원은 검찰 주장을 인용해, 손해배상 명목으로 아탐바예프에게 34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또 ‘자노자’ 측의 항소를 기각했다.
 
  앞서 밝힌 것처럼 키르기스스탄 근로자 월평균 임금은 200달러다. 기자들이 받는 급여 역시 같은 수준이란 점을 감안하면 키르기스스탄 법원이 ‘자노자’의 설립자들에게 부과한 손해배상액은 기자 141명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인 셈이다. 이와 관련, ‘자노자’의 후신인 ‘칵투스 미디어(Kaktus madia)’의 편집장 나탈리아 티미르바에바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검찰은 2017년 상반기 이후 언론인과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 5건을 제기했습니다.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을 대신해서 진행한 소송이었습니다. 재판은 피고의 방어권이 침해된 채 불공정하게 진행됐습니다. 결국 법원은 ‘자노자’의 설립자들에게 손해배상액 34만 달러를 한 달 안에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이를 이행하지 못한 우리 설립자들은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상기한 대로 키르기스스탄 내 ‘언론 자유’는 ‘혁명’ 이전보다 퇴보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층은 언론을 협박하고, 기자들을 상대로 각종 소송을 제기한다. 언론사 소유권은 독립되지 않은 사법부의 결정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닌다. 언론의 비판을 봉쇄하는 독재체제가 지금껏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하면, 키르기스스탄 언론이 촉발한 ‘튤립 혁명’의 결과물은 애초 기대와 달리 ‘민주’란 가면을 쓴 ‘독재’와 ‘언론의 자유 억압’이란 얘기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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