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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범의 해상실크로드 기행

쑤저우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한 鄭和함대 출항지 劉家港

글·사진 : 허우범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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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和, 윈난성 출신의 이슬람 교도, 원래의 姓은 무함마드에서 유래한 馬씨
⊙ 明 太祖 주원장, “한 조각의 판자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을 엄금”
⊙ 정화함대의 함선에는 조선의 造船 기술이 들어갔을 것

許又範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난징 룽장 보선제작터에 원형으로 복원된 정화 보선.
  2000년 대 초만 해도 중국에서의 여행은 이동 시간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까닭에 다음 목적지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은 기본적으로 소비됐다. 대부분 이정표도 없었기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만 했다. 길을 물어봐도 저마다 동서남북으로 가라고 하니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막다른 길목에서 차를 돌리는 것도 다반사였다. 이러다 보니 하루 두어 곳을 보면 다행이었다. 특히 성(省)과 성을 오갈 때에는 이동하는 데에만 꼬박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거침없이 달린다. 자동차 연료를 구하기 위해 고속도로 정유소마다 수 km씩 줄지어 섰던 화물차들도 보이질 않는다. 그야말로 제 역할을 다하는 ‘고속도로’가 된 것이다.
 
  장쑤(江蘇)성의 성도(省都)인 난징(南京)에 다다르자 창장(長江)지역의 3대 찜통도시답게 푹푹 삶는 날씨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먼 길을 달려온 터라 허기가 몰려온다. 괜찮은 식당을 찾아서 요리를 시켰다. 하지만 곧 실망하고 말았다. 난징의 요리가 맛없기로 유명하지만 오늘따라 더욱 그렇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식당을 나서는데 문밖에 있던 날씨가 턱밑까지 달려와 열기를 뿜어 댄다. 애꿎은 날씨만 나무라며 냉수 한 병을 들이켠다.
 
 
  중국 정부, 박물관 입장료 없애
 
난징의 친화이허(秦淮河). 진시황이 이곳의 王氣를 끊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 날, 둘러볼 곳이 많아 일찍 호텔을 나섰다. 새벽에 소나기가 왔는지 도로가 젖어 있다. 하지만 찜통날씨는 어제 그 날씨 그대로다. 새로운 정보도 얻을 요량으로 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입장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건만 줄을 선 사람이 벌써 수백 명에 이른다. 중국 정부는 역사공정(歷史工程)을 시작하면서 모든 박물관의 입장료를 없앴다. 누구나 와서 중국의 위대한 역사와 문명을 보고 배우라는 의도다. 이를 통해 자연스레 하상주(夏商周) 시대를 넘어 전설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까지도 역사 속으로 끌어들여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난징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이 도시가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때다. 초나라는 이곳을 금릉(金陵)이라고 불렀다. 황제가 나올 곳이라는 뜻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이곳에 와서 창장의 물길을 끌어들여 지세(地勢)를 끊었다. 지금의 스터우청(石頭城) 앞을 흐르는 친화이허(秦淮河)는 그때 만든 것이다. 이름도 말릉(陵)이라고 고쳤다. 꼴을 베어서 말이나 기르는 땅이 되라는 뜻이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삼국시대 때다. 당시에는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부터는 창장 이남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4세기 이후에는 동진(東晋)과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등 남조(南朝)의 도읍으로서 더욱 발전했다. 그 후, 지방의 치소(治所) 역할을 하다가 14세기에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를 건국하면서 다시 번창했다.
 
  한참을 기다려 입장한 남경박물원은 중국문명의 위대함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화려한 문양의 청동 제기들과 청옥(靑玉)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관에 가득하다. 당삼채(唐三彩)를 비롯해 시대별로 수준 높은 도자기도 넘쳐난다. 인파만큼이나 많은 유물들이다. 찬찬히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몰려드는 관람자의 발길에 채여 밀려나야 하기 때문이다. 해상실크로드와 관련된 유물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개괄적으로 훑어보고 정화(鄭和)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색목인 정화
 
푸저우항에 있는 정화상.
  정화는 명(明)나라 때의 환관(宦官)이자 항해가(航海家)이다. 그는 윈난(雲南)성 출신의 색목인(色目人)이다. 색목인은 원(元)나라 때 유럽이나 중·근동 및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외국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의 조상이 몽골을 지원한 덕에 원나라를 건국할 때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이슬람교를 믿는 후이족(回族)이었다. 원래 성씨도 마흐무드(Mahmud)에서 따서 마(馬)씨라고 했다.
 
  정화는 12살 때 명나라군에게 붙잡혀 거세된 후 환관이 됐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넷째아들인 연왕(燕王) 주체(朱)로 하여금 국경지대인 베이징(北京)에 주둔하게 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정화는 연왕의 환관이 되어 연왕부(燕王府)의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연왕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쫓아내고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에 오르자 그는 환관 최고 직위인 태감(太監)이 됐다. 또한 정(鄭)씨 성을 하사받고 이때부터 ‘정화’로 불리게 됐다.
 
  환관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대규모 선단(船團)을 꾸려 7차례의 항해를 실시했다. 제독 정화가 이끄는 함대는 한 번 출항할 때마다 수십 척의 배와 2만명이 넘는 병사가 동원됐다. 이는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1세기나 빠른 것이었으며, 선단의 규모도 10배나 큰 것이었다. 정화가 항해한 곳은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을 넘어 아프리카 지역까지 이르렀는데 실로 엄청난 항해였다.
 
 
  西洋取寶船
 
  정화가 항해를 위해 선박을 만들었던 유적지가 난징의 룽장(龍江)에서 발견됐다. 이곳에서 건조된 배는 수문을 열면 곧장 창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도로가 지나가고 시민들이 산책하며 볼 수 있게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개의 수로가 있는 공원에는 당시 이곳에서 보선(寶船)을 건조하던 모습들을 하나씩 재현해 놓았다. 수로의 길이는 대략 500m에 폭은 50m 정도다. 정화함대의 보선 길이가 150m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과연 충분히 제작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로의 끝에는 정화가 이끌었던 보선을 원래 크기대로 복원해 놓았다.
 
  정화함대의 배를 일컬어 ‘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이라고 불렀다. ‘서양에서 보물을 가져오는 배’라는 뜻이다. 이를 줄여 보선이라고 한 것이다. 갑판 위에 집(屋)을 층층이 만들고 그 위에 돛을 달았다. 이러한 배를 안정적으로 운행하려면 배의 규모가 다른 배에 비해서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항공모함 수준의 크기가 되는 것이다.
 
  실제 크기로 복원한 보선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거대하다. 방향타(方向舵) 하나만 해도 11m가 넘는다. 이러한 배가 수십 척씩 항구에 도착하면 그곳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우호적인 방문일지라도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중국은 송·원(宋元) 시대를 거치며 왕성한 해상교역을 전개했다. 동남아는 물론 페르시아만(灣)의 아랍인들도 중국을 드나들었다. 이들은 우리의 고려시대 국제무역항인 예성강의 벽란도까지 왕래했다.
 
 
  鄭和의 南海원정
 
정화함대의 남해원정 출항도. 정화는 30년에 걸쳐 7번 출항, 아프리카까지 다녀왔다.
  하지만 명태조(明太祖) 주원장은 ‘한 조각의 판자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을 엄금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폈다. 주원장이 해금정책을 편 것은 저장(浙江)성과 푸젠(福建)성의 연안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왜구(倭寇)와 결탁한 채 세력을 뻗치는 군벌(軍閥) 때문이었다. 이들이 기존 세력들을 결집하여 신흥제국에 대항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후퇴를 초래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명대 이전까지의 제국은 개방성과 교역을 통한 실리를 중시했다. 반면에 명나라는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울러 천자(天子)의 제국으로서 권위와 체면을 중시했다. 전 시대의 활발함에 비하여 융통성이 결여된 명나라의 대외(對外)정책은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夷蕃)의 갖가지 물건들은 모두 중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미 일상적인 생활필수품이 된 교역품들을 해금정책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연히 밀무역(密貿易)이 성행하고 해금을 반대하는 관리들도 이에 가담했다.
 
  영락제가 황제에 오르자 해금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황제가 정화에게 함대를 이끌고 남해원정을 추진토록 한 것이다.
 
  영락제는 왜 선황(先皇)이 정한 해금정책을 깨면서까지 대규모 항해를 추진한 것일까. 사라진 건문제의 행방을 찾기 위한 것이라거나, 황제의 정통성 시비를 밖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라거나, 신흥제국의 위력을 과시하고 조공을 받아내려는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됐지만 확실한 일치를 본 것은 없다. 하지만 정화의 7차례에 걸친 항해는 중화 중심의 조공질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됐다. 나아가 육지로만 집중됐던 중국의 지리적 인식이 바다를 통해서도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됐다.
 
 
  정화함대의 함선은 누가 만들었을까?
 
정화함대의 출항지였던 쑤저우 유가항에 있는 정화 보선.
  정화가 함대를 이끌었던 보선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본다. 정화는 해금정책을 실시한 지 30년이 지난 후에 남해원정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해금정책이 시행됐음에도 보선을 만들 정도의 선박기술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일까.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배와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우리는 흔히 고대(古代)의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은 중국이 월등한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착오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황해(黃海)를 장악했다. 백제(百濟)의 어원인 ‘백가제해(百家濟海·많은 가문이 연합해 바다를 제어한다)’는 백제가 해상강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의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 덕분이었다. 이러한 선박 제조와 운용(運用) 기술은 상호간에 전승되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했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있는 朝鮮國船 그림. 정화 보선과 흡사하다.
  장보고의 해상 기술을 이어받은 고려에는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硝馬船)과 과선(戈船)이 있었다. 과선은 뱃전에 창검을 꽂고, 뱃머리에는 철로 만든 충각(衝角)을 설치한 대형 군선(軍船)이다. 과선은 선체가 높고 크며 좌우로 4층의 옥(屋)을 세웠다. 고려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에 확실하게 나타난다.
 
  원나라가 고려에 3000~40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 1000척을 주문하자 고려는 단시일에 이를 완수했다. 고려가 건조한 배들은 송나라에서 건조한 배들보다 훨씬 견고하여 부서지지 않았다. 이처럼 뛰어난 조선술이 면면히 이어져 왔기에 조선시대에도 이순신의 거북선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오늘날까지도 조선강국의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일찌감치 중국 대륙을 오가던 장보고의 후예들은 선진적인 기술로 중국의 해운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해금정책 시행은 선박제조 기술의 퇴보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화는 이제껏 유례가 없는 크기의 배를 건조했다. 이는 최고의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바, 자연스레 연안과 운하를 장악하고 있던 우리의 전문가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一帶一路와 정화
 
니우쇼우(牛首)산에 있는 정화묘. 이슬람 양식의 무덤이다.
  정화는 일곱 번째의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에 사망했다. 약 30년에 걸친 항해였다. 그의 묘는 난징의 니우쇼우(牛首)산에 있다. 산의 형상이 마치 소의 뿔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산 중턱에 있는 불정궁(佛頂宮)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모두 비싼 입장료를 내고 거대한 불정궁으로 향한다. 정화묘는 불정궁과는 상관없는 출입구 바로 오른쪽에 있다. 하지만 출입구는 한 곳이기에 입장료를 내야 했다. 100위안(元)을 내고 정화묘로 향한다. 봉분은 그가 평생을 믿었던 종교인 이슬람 방식으로 쌓았는데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하여 단출하기만 하다.
 
  중국의 해안 도시는 저마다 해상실크로드의 역사를 자랑하고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접목해서 발전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정화는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제일 먼저 내세우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정화와 관련 있는 지역이면 어느 곳이나 할 것 없이 그가 이끈 함대나 보선을 세우고 홍보에 열을 올린다.
 
  보선 제작터를 살펴보느라 점심시간도 잊었다.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허름한 식당에서 두부삼겹살볶음과 면을 주문했다. 그런데 허기진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맛이 일품이다. 맛없기로 소문난 난징에서 의외의 맛집을 찾으니 더욱 배가 부르다. 소나기도 때맞춰 시원하게 내리며 더위를 식혀 준다. 편안한 마음으로 쑤저우(蘇州)로 향했다.
 
 
  太湖石
 
太湖石은 그 형태가 기이해 정원석 등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난징에서 쑤저우로 가려면 타이후호(太湖)가 있는 우시(無錫)를 지나야 한다. 도시의 이름이 ‘주석이 없다’는 뜻이다. 무슨 연유일까. 원래 이곳은 중국 제일의 주석 생산지였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채굴된 주석은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건국할 즈음에 고갈되어 버렸다. 그러하매 더 이상 주석이 나오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수백 년에 걸쳐 생산된 주석은 구리와 합금되어 명검(名劍)을 탄생시켰다. 천하대란의 시기였던 춘추전국시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던 오월(吳越)이 패자(覇者)가 됐던 것도 바로 이곳의 풍부한 주석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우시는 주석이 고갈됐음에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바로 바다와 같은 거대한 타이후호가 있기 때문이다. 이 호수는 창장이 만들어 낸 삼각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제주도가 풍덩 빠지고도 남는 크기다. 가히 바다라고 아니할 수 없다.
 
  타이후호가 더욱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돌 때문이다. 일명 태호석(太湖石)이라 불리는 이 돌은 호수 밑바닥에서 채취되는데, 조류의 영향으로 구멍이 뚫리고 깎이면서 문양과 형태가 기묘하여 마치 세상의 모든 자연물을 표현해 놓은 듯하다. 크기도 손으로 들 수 있는 것에서부터 산처럼 거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당대(唐代)의 백낙천은 태호석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시까지 지었다. 북송(北宋)의 황제 휘종(徽宗)은 태호석 운반선을 만들고 대운하를 통해 카이펑(開封)으로 옮겼다. 이후 너나없이 모든 저택과 정원에는 태호석을 사용하여 석가산(石假山)을 만들고 이를 즐기는 풍습(風習)이 유행했다. 또한 그림에서도 좋은 소재로 활용됐다. 태호석도 수백 년을 채석(採石)하다 보니 바닥이 날 정도였다. 그리하여 명대(明代)에는 가짜가 판을 쳤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태호석의 인기는 시들지 않았으니 그럴듯한 모조품도 정원에 어울리는 예술품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
 
  쑤저우도 일찍이 춘추전국시대에 오(吳)나라의 도성으로 발전했다. 쑤저우가 더욱 발전된 것은 수(隋)나라 때 대운하가 개통되면서부터다. 항저우(杭州)와 함께 강남지역의 곡식을 수송하는 물류(物流) 중심지로 번성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하늘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天上天堂地下蘇杭)’라고 불리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쑤저우는 정화가 함대를 이끌고 남해 원정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정화함대가 출항한 곳은 류자장(劉家港)이다. 류자장은 원(元)나라 때 설치됐다. 이곳에서 창장을 이용하면 상하이(上海)가 지척이다.
 
  영락제는 황제가 되자 이곳을 개항하여 국제무역 항구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각국의 상선(商船)들이 모여들었는데, 일명 ‘육국부두(六國碼頭)’라고 불렀다. 고대 항구 대부분이 그렇듯이 류자장도 한적한 마을로 변했다. 지명도 류허진(瀏河鎭)으로 바뀌었다. 장강변에 새로 건설된 거대한 신항(新港)에 자리를 넘겨주고 600여 년 전, 정화가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간 곳이라는 역사만 아로새기고 있다.
 
 
  중국항해박물관
 
정화가 출항한 곳임을 홍보하는 푸저우(福州)항의 정화함대상.
  상하이로 가는 고속도로를 탄다. 중국항해박물관(中國航海博物館)을 보기 위해서다. 푸둥신구(浦東新區)에 위치한 박물관에 도착하니 국가급 박물관답게 웅장하고 화려하다. 돛 모양을 형상화한 박물관에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항해와 선박의 발전사를 일목요연하게 전시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각종 시뮬레이션을 통한 체험교육은 물론 해양강국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각종 멀티미디어 기술로 보여주고 있다. 전시관을 하나씩 살펴보노라니 부러움 너머로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21세기는 바다의 시대다. 해양력을 갖추지 못하면 주변부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중국은 명대의 해금정책이 가져온 ‘망국(亡國)’을 뼈저리게 겪었다. 그리고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상하이에 건립된 중국항해박물관은 바로 이러한 의지의 표명이나 다름없다.
 
  우리도 고대로부터 해양강국이었다. 그럼에도 고대부터 이어온 선박과 해양에 대한 연구는 미천하다. 이를 지원하고 홍보해야 할 전문 박물관은 걸음마 수준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가 이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조선시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해양력(海洋力)을 내려 놓은 이후로 바다까지도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다.
 
  날은 어둡고 참았던 비가 쏟아진다. 감기 기운이 오는지 몸이 으슬으슬하다. 숙소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이동해야 한다. 멀리 둥팡밍주(東方明珠)탑이 보인다. 화려하고 찬연한 빛이 중국의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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