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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5〉 스페인의 유대인 탄압이 네덜란드의 일본 진출로 이어지다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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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상업회사인 동인도회사(VOC)가 對日무역 주도… 종교적 색채 없이 200년간 일본과의 교역 독점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출현, 자본주의 발흥
⊙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 세계 각국의 유대인 네트워크와 결합해 네덜란드의 해외무역 발전에 기여
일본에 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선박.
동인도회사는 철저히 상업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일본과 교역했다.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성립 이후 대(對)일본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종국에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1600년 네덜란드 선적 리프데호가 일본 땅에 표착한 것이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리프데호에 탑승하고 있던 윌리엄 애덤스와 얀 요스텐 등을 총애하였고, 이들의 지원사격을 받은 네덜란드의 일본 접근은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네덜란드는 1609년 히라도(平戶)에 상관(商館) 설치를 허가받아 정식으로 일본과의 교역에 돌입하였으며, 1639년 포르투갈인들의 입국 금지령을 계기로 일본과의 교역을 승낙받은 유일한 유럽국이 되었다. 1641년 포르투갈 세력의 추방으로 무주공산이 된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로 상관이 이전된 이후 네덜란드는 무려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곳에 상관을 유지하며 대일(對日)무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의 대일관계는 기존의 포르투갈 또는 스페인 세력의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일본과 무역 관계를 맺은 것은 정확하게는 국가(또는 왕실)가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였다. 수익 창출이 최우선 목표인 비(非)국가 상업조직으로서 VOC는 기독교 포교에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비종교적 태도가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유럽과의 교역을 원하되 기독교를 배척하고자 하는 막부의 의향에 이보다 더 잘 들어맞는 교역 파트너는 없었다. 이러한 VOC의 속성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 여타 지역에서도 우호적인 교역 환경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2세는 종교적 맹목에 사로잡혀 에스파냐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
  유럽의 소국(小國) 네덜란드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 최강 해상국가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VOC의 역할이 컸다. VOC의 등장은 조금 색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흔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유대인에 의한 세계 금융 지배’라는 현상은 VOC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박해받는 소수(少數)민족에 불과했던 유대민족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집단이 될 수 있었을까?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나 17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확산이 유대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한 전환점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VOC이다. 그 역사적 경위를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을 떠돌던 유대인들이 일찍이 모여들던 곳이다. 8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세력은 유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다. 이베리아의 이슬람교도들은 가장 큰 적대 세력 기독교도와 일대 투쟁의 와중이었다. 유대인 정도의 소수 이교도와의 평화적 공존을 개의치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들로부터 탈환하려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거의 마무리되는 15세기가 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은 기독교 세력은 유대인들을 이단으로 취급하였고,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기독교도가 되거나, 이베리아를 떠나거나’가 그곳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였다.
 
  그러한 박해의 상징적인 조치가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공동 발령(發令)한 ‘유대인 추방령’(Alhambra Decree)이다. 유대인들은 이 추방령에 따라 에스파냐의 영토를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改宗)하여야 했다. 이때 이베리아를 떠난 유대인의 숫자가 20만명에 달한다.
 
  잔류를 선택한 사람들은 ‘콘베르소’(converso・개종인)가 되어 기독교도로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개종인들 중에는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은자(隱者) 유대인’(crypto-Jews)이 많았다. 개종과 관계없이 이베리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감시의 대상이었고 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후에 에스파냐 왕국)이 발한 이 추방령에 의해 쫓겨난 유대인들은 오스만제국・북아프리카・동유럽・영국・저지대 국가(Low Countries・현재의 베네룩스 지역) 등으로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포르투갈과 유대인
 
  초기에 가장 많은 인원이 피신한 곳은 인접한 포르투갈이었다. 이때 포르투갈로 몰려든 이베리아 반도 각지의 유대인들을 포르투갈 유대인(Portuguese Jews)이라고 한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레콩키스타의 한 축이었던 포르투갈 역시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지 않았고, 1497년 이교도(異敎徒) 추방령을 발한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항해・지도제작・귀금속가공・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대인들의 기술과 네트워크가 필요하였던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달리 실질적으로는 국외 이동을 허용하지 않고 강제 개종을 강요하였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다수가 콘베르소가 되어 포르투갈에 잔류하였으나, 이들은 실상 유대인의 정체성(正體性)을 포기하지 않은 은자 유대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계기로 다시 에스파냐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포르투갈 동방 무역을 지탱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인구 130만 정도의 소국인 포르투갈은 유대인들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16세기에 들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여 큰 부(富)를 획득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달랐다. 에스파냐는 강성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대륙을 오가는 상선에 무장 함대 콘보이(flotas)를 제공하여 물자 유통의 안전을 확보하였으나, 포르투갈은 그러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주요 해상교통 요지에 교두보를 확보하되, 무력(武力) 점령에 의한 영토 확장보다는 현지 세력과의 통교(通交)를 통한 무역 이익 독점에 주력하였다.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달리 아랍・인도・중국 등 유럽에 필적하는 문명권에 진출하여야 했던 사정도 있었다. 이들 구(舊)문명권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재래의 관습·관행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었고, 교역을 성사시킬 중개자(broker)가 필요하였다. 당시 가장 방대한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무어인(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을 적대시하고 추방한 포르투갈로서는 이러한 역할을 (이탈리아 상인들과 함께) 유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이 진출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유대인들이 있었다. 아프리카・고아・믈라카 등 포르투갈의 진출지에는 포르투갈의 콘베르소들이 무역・세관・의료・회계・법률 분야에 종사하며 교역 체제를 지탱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쇠락한 이유
 
  포르투갈의 실용적인 유대인 정책은 1547년 종교검열(Inquisition)이 강화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종교검열이란 신(新)기독교인(주로 유대인)들이 실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인지를 조사하여 허위로 밝혀질 경우 엄중한 처벌(주로 공개 화형)을 가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교황 공인의 반(反)종교혁명 조치이다.
 
  종교검열은 에스파냐의 필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겸하면서 그 극악성을 더해갔고,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더 이상 포르투갈 잔류를 포기하고 국외(國外) 탈출을 감행한다. 당시 동방 무역은 큰 위험이 따르는 도박과도 같은 벤처 비즈니스였고, 그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유력 자산가들의 금융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포르투갈 유대인의 채무 회수 안전성이 크게 저해된 자산가들은 포르투갈로 향하는 돈줄을 틀어막았다.
 
  유대인이 자취를 감추고 돈줄이 마르자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은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한다. 무역의 과실을 따 먹으며 호사를 누리던 왕실과 귀족 세력은 종교 도그마에 빠져 자신들의 부를 지탱해 준 유대인의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챌 능력조차 없었다.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은 17세기에 접어들어 전성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처참한 수준으로 급전직하하였고, 2류 국가로 전락한 포르투갈은 그 후 다시는 열강(列强)의 대열에 오르지 못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교 탄압을 피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각지로 퍼져나간 .유대인들을 ‘세파라디 유대인’(Sephardi Jews)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독일 지역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간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 Jews)이라고 한다.
 
  종교적 탄압이 이주의 이유였기에 세파라디 유대인들이 유대교 탄압이 심하지 않은 곳을 찾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신정착지 중의 하나로 선택된 곳이 저지대 지역이었다. 저지대 지역의 공국(公國)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자치권을 획득하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오스만제국의 위협, 황제와 교황 간의 불화로 가톨릭의 교세가 위축되고 신교(新敎)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대두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본사. VOC는 자본주의 발달에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6세기 초반 이후 세파라디 유대인들은 (현재) 벨기에의 항구도시인 앤트워프(Antwerp)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앤트워프는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와 포르투갈의 동방 항로에서 유입되는 물산이 서유럽권에 유통되는 해상교통 요지였다. 향신료・양모・원면・설탕・귀금속 등의 주요 원자재 집산지가 되자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무역·금융 서비스를 담당할 인적 자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다.
 
  152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칙령에 따라 신교 포교 금지가 해금(解禁)되자, 앤트워프의 영내(領內)에서 종교검열이 폐지되었다. 에스파냐의 악명 높은 종교검열에 신음하며 강제로 고향을 등진 유대인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앤트워프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종교 탄압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강점인 무역과 금융 분야에 종사하며 앤트워프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고, 앤트워프는 16세기 중반 유럽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하며 번성하였다.
 
  앤트워프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1576년 저지대 지역에 주둔하던 합스부르크 용병 부대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앤트워프를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위 ‘앤트워프 약탈’(The sack of Antwerp)로 불리는 사건이다. 네덜란드 7주(州)의 독립 의지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은 보다 안전한 암스테르담으로 정주지를 옮긴다. 암스테르담에는 16세기 중엽부터 세파라디 유대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해상교통 요지인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 약탈 시점에 이미 국제무역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앤트워프로 향하던 물량까지 암스테르담으로 전환되자 암스테르담의 위상은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하루 200여 척의 화물선이 들락거릴 정도로 엄청난 물동량을 자랑하는 무역항이 됨에 따라 자극을 받은 것은 ‘거래소’(exchange, bourse)였다. 여기서의 거래소란 단지 물리적 장소의 의미가 아니라, 주문・결제・인도 등 상품 거래에 수반되는 일련의 법적・금융적 문제들이 관행과 제도화에 의해 처리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앤트워프에서도 초기 단계의 거래소 개념이 형성되었으나, 암스테르담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축적이 일종의 임계점에 다다르며 제도화가 급격하게 진행된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로고.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해외 원격지에서 상품을 입수하여 유럽까지 운반하는 데에는 많은 리스크가 수반된다. 그 리스크를 감당하며 상선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즉 그 배가 귀환하였을 경우 수익을 배분하고, 반대로 귀환하지 못하였을 경우 손해를 분담하기 위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를 기획하고 관리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 솜씨 좋은 항해사가 있어야 하고, 성능 좋은 배가 있어야 하며, 입수된 상품을 판매하여 높은 수익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유통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위험을 분산시키고 책임을 한정하기 위한 일련의 제도와 기법들이 고안된다. 구체적으로는 수익권을 보장하는 주식(stock), 거래의 안전을 위한 신용장(letter of credit), 선하증권(bill of lading) 등 각종 증권 발행을 통한 신용 기반 금융기법 등이 거래소를 중심으로 태동하고 발전한다.
 
  1602년, 암스테르담에서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증권 기반 상업 프로젝트 기법을 집대성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출범한다. VOC의 성립에 맞춰 암스테르담 거래소(Amsterdam Bourse)가 개장한다. 세계 최초의 공개 증권거래소라 불리는 곳이다. 이제 회사의 소유권은 분할된 증권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증권을 소유한 사람은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전까지 모든 투자는 회사 자체에 대한 것이었고 회사의 실적에 따라 손익이 결정되었지만, 거래소의 성립으로 증권의 소유자는 증권의 거래만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기존에 왕이나 귀족이나 대부호 상인만 소유할 수 있던 생산수단을 약간의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거래소 방식에 의한 부의 창출·분배 메커니즘은 과거 정치적 권위에 의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율적 투자에 따른 수익 향유가 가능하였다.
 
  VOC는 동방으로부터 유입되는 각종 물산을 독점하며 부를 창출하였고, 그 창출된 부는 거래소를 통하여 분배되었다. 유대인들은 거래소의 성립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새로운 축재(蓄財) 기회를 맞이한다. 종교 탄압 신세를 면하였다고는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사회적 멸시의 대상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예배당(synagogue)을 짓는 것도 어려웠다. 기독교도들과의 교류를 막기 위해 독자적 상점 운영 등 도시 내수(內需) 경제에 편입되는 것도 제한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의 반 타의 반(自意半 他意半)으로 이러한 제약이 적용되지 않는 국제무역 분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행운의 열쇠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국제무역이 증권 기반 비즈니스로 성격이 전환됨에 따라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리스크 회피와 수익 극대화를 도모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유대인 네트워크의 발흥
 
  종교의 압박에서 벗어난 채 국제무역에 종사하면서 수익권을 증권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게 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은 존재였다. 전술(前述)하였듯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는 많은 콘베르소 유대인이 잔류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영국・오스만제국・인도·신대륙 일대에 세파라디 유대인들이 퍼져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그 이전에는 같은 유대인이라도 서로 사용하는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각 지역에 퍼져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는 세파라디 유대인들은 무역 경쟁력의 면에서 유럽인들에 비해 큰 비교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A가 런던의 향신료 상인 유대인 B로부터 상품 주문 신용장을 접수했다고 치자. A는 향신료 유럽 도착항인 리스본의 유대인 C와 출발지인 고아의 유대인 D에게 현지 시세와 동향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중간 기착지인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E에게 선하증권을 발행하여 상품 일부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투자를 제공받거나, 암스테르담 거래소에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해당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있다.
 
  현대와 같은 금융기관이나 신용평가기관이 없어서 신용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당시 상업 환경하에서 유대인들, 특히 같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세파라디 유대인 간의 인적 네트워크는 엄청난 경제적 자산이었다. 세계 각지의 세파라디 유대인 네트워크는 초기 단계의 글로벌 무역·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증권화에 의해 유대인 네트워크의 효용성은 크게 증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점을 배경으로 동인도회사의 지분권을 높여갔고, 나아가 VOC가 촉진한 자본의 증권화 진전에 따라 유럽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역사는 서로 이어지는 것
 
  ‘점 잇기 놀이’라는 것이 있다. 종이 위에 번호가 붙은 점들이 찍혀 있고, 각 점을 순서대로 이으면 별·달·동물 등의 형상이 나타난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점들이 규칙에 따라 선으로 이어지면서 식별 가능한 형상이 도출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도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event)들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복잡계 이론의 나비효과처럼, 어느 한 곳에서의 사건이 다른 곳에서의 사건을 유발하고, 그 연쇄적 상호작용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는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가 아시아의 역사로 이어지고, 아시아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에 반영된다. 200여 년간 일본의 대유럽 교역 창구로서 난학(蘭學) 등의 지적 자극을 통해 일본 근세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네덜란드의 일본 진출사는 따지고 보면 유럽 역사를 요동치게 한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추방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흥미로운 소재로 주목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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