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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10〉 孔子, “禮란 일을 다스리는 것이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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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형, 權門에 추종해 좋은 자리를 도모하려 하지 않아… 정변 주체가 아니면서도 세조의 총애 받아
⊙ 성삼문, 세조 제거 거사 뒤로 미루었다가 파국…, “글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 받아
⊙ 신숙주, 剛明함을 갖춘 대인배였지만, 큰 권력에는 맞서지 않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신숙주는 유능한 경세가였지만, 큰 권력에 맞서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 우리는 예(禮)를 주자학이나 성리학의 가례(家禮)에 한정하지 않고 공자가 말했던 원래의 뜻에 충실해 사리(事理)로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예기(禮記)》 중니연거(仲尼燕居)편에는 이같은 우리의 시도를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훨씬 분명하게 보여주는 공자의 언급이 나온다. 제자 자유(子游)가 예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예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일을 다스리는 것[事之治=治事]이다. 군자는 어떤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다스리게 되는데 나라를 다스리되 예가 없으면 비유컨대 장님에게 옆에서 돕는 자가 없는 것과 같다.”
 
  즉 여기서 공자는 예를 말하다가 곧장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로 나아간다. 사실 이미 《논어(論語)》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았으나 우리가 예를 가례(家禮)로 국한해서 풀이하려는 좁은 시야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먼저 선진(先進)편이다.
 
  〈자로, 증점, 염유, 공서화 네 제자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때 공자가 말했다. “내가 너희들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하여 나에게 말하는 것을 어려워 말라. 평소에 너희들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혹시 사람들이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하겠느냐?”
 
  먼저 자로가 경솔하게 나서 대답을 한다. “전차(戰車) 1000대를 가진 제후의 나라가 대국들 사이에 끼여 군사적 침략이 가해지고 그로 인하여 기근이 들게 되거든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릴 경우 3년이 지나면 백성들을 용맹하게 하고 또 의리를 향해 나아가는 법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제자들은 제외하고 자로의 이 대답에 대한 공자의 평(評)만 보자. 자로가 이 말을 할 때 공자는 약간 비웃었는데 증점이 그 점을 지적하며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로써 해야 하는데, 그 말이 겸양하지 않기[不讓]에 웃었다.”
 
  한마디로 자로가 일을 다스릴 줄 몰랐기 때문에 비웃었던 것이다. 공자는 그래서 자주 예양(禮讓)이란 말을 썼다. 일을 잘 다스리는 본질적 태도는 다름 아닌 삼감[敬]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논어》 팔일(八佾)편 마지막 구절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너그럽지 못하고[不寬], 예를 행하는 사람이 삼가지 못하고[不敬], 상을 당한 사람이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는다면[不哀] 내가 과연 무엇으로써 그 사람됨을 알아보겠는가?”
 
  그중에서 오늘 집중하게 될 것은 불경(不敬)이다.
 
 
  이석형과 성삼문
 
  이석형(李石亨),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세 사람은 동시대 인물로 모두 조선 태종 말기에 태어나 세종 때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에 역사의 격랑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미시적으로 이들의 선택을 추적해 보면 예(禮)가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이석형은 1415년, 신숙주는 1417년, 성삼문은 1418년생이다.
 
  먼저 이석형이다. 조선시대 급제자 명단인 《문과방목(文科榜目)》에 따르면 이석형은 1441년(세종 23년) 문과의 장원급제자다. 게다가 《문과방목》은 “우리 조정에서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모두 장원한 사람은 배맹후(裵孟厚), 김구(金絿) 그리고 이덕형 세 사람뿐인데 공은 다시 문과에서 장원을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속되게 말해 조선 초의 ‘율곡 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그의 나이 26살이다. 당시 함께 급제한 동료들 중에는 양성지(梁誠之), 김국광(金國光), 강희안(姜希顔)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석형은 급제와 동시에 사간원 좌정언(정6품)에 보임됐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문과에 급제한 순서는 나이와 정반대다. 성삼문은 1438년(세종 20년) 문과에 급제했고 신숙주는 1439년 문과에 급제했다. 성삼문과 이석형은 3년마다 있는 정식 문과인 식년(式年)을 통과했고 신숙주는 특별히 실시되는 친시(親試)를 통과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석형은 이듬해 집현전 부교리에 임명돼 14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 직전(直殿) 직제학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무엇보다 학재(學才)였다. 그의 비명(碑銘)에는 아주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기록돼 있다. 그는 집현전 응교로 재임한 1447년 문과 중시(重試)에 합격했다. 중시란 관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의 일종으로 훗날 승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삼감[敬]을 갖춘 선비, 이석형
 
  〈정묘년(丁卯年·1447년, 세종 29년)의 중시 대책(重試對策)에서 공이 또 합격했는데 공과 더불어 우등(優等)으로 선발된 여덟 사람을 임금이 시험해 장원을 정할 때 어제(御題)는 ‘팔준도(八駿圖)’라 하고 여러 가지 체(體)를 임의로 제술하게 했다. 공이 처음에 전문(箋文)을 지었으니 “하늘이 도와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성인(聖人)은 천년(千年)의 운회(運會)에 응했고 땅에서 이용하는 것은 말[馬]을 당할 것이 없는데 신비로운 물건은 한때의 기능을 발휘했다”라는 글로써 머리 연구(聯句)로 삼았다. 성근보(成謹甫·성삼문)가 남들에게 말하기를 “금번 과장(科場)에서 가장 두려운 자는 이모(李某)이다”라고 하더니 이 글을 보고 속여 말하기를 “그대가 늙은 학구(學究)의 여문(麗文·화려체 글쓰기)에 일삼는 것을 본받으려 하는가?”라고 했다. 공은 장자(長者·덕이 있는 사람)인지라 그 말을 믿어 전문(箋文)을 버리고 시(詩)를 쓰게 됐다. 성삼문이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공이 지은 연구를 빼앗아 전문을 지어 마침내 장원을 획득했다. 공이 평소 말하기를 “이 무릎을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꿇어본 일이 없었다”라고 했고 성삼문은 평소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꿇지 않은 무릎을 나는 꿇게 할 수 있다”라고 했으니 한때의 미담(美談)으로 전해 온다.〉
 
  ‘장자(長者)’라는 말이 이석형의 삶을 풀어내는 실마리다. 1451년(문종 원년) 이석형은 부친상(父親喪)을 당해 3년 시묘살이를 하게 됐는데 그로 인해 당시의 정쟁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중추부 첨지사가 돼 성균관 사성(司成)을 겸임하면서 드디어 집현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곧바로 불려와 형조참의에 올랐다. 공신(功臣)은 아니었지만 세조가 아꼈다는 뜻이다.
 
  곧은 성품[直]이었기에 이석형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1456년 6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전해지자 사육신의 절의(節義)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겨서, 치죄(治罪)하자는 대간(臺諫)의 여론이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묵살되고 오히려 예조참의에 올랐다. 공주목사로 나갔다가 다시 불려와 한성부윤에 올랐다.
 
  세조는 평안도 순시를 앞두고 이석형을 황해도관찰사로 삼았다. 이때 모든 준비를 잘 갖춰 세조로부터 ‘서도(西道·황해도)의 주인’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정권의 핵심이 아니면서도 이석형이 고위직에 올라 한성판윤만 7년을 재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답은 비명(碑銘)에 있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그 지위에 의지해 문사(文士) 사귀기를 좋아하더니 공의 명망을 듣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한번 보기를 원했으나 공이 마침내 가지 아니하고 보낸 선물도 받지 아니하니 (훗날) 사람들은 공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했다. 세조 대왕이 즉위함에 공이 선조(先朝)의 중신(重臣)으로서 형적(形跡)이 외롭거늘, 공을 헐뜯는 자들이 백방(百方)으로 틈을 노렸으나 공이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고 어색한 기미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권문(權門)에 추종해 좋은 자리를 도모하려 하지 아니하고 한가한 외직(外職)을 구해 해치려는 자들을 멀리하기에 힘썼다.〉
 
  이석형은 한마디로 삼감[敬]을 갖춘 선비였던 것이다.
 
 
  ‘더벅머리 겁쟁이 선비’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
  이와 대비되는 인물이 성삼문이다. 다시 《예기》 중니연거(仲尼燕居)편이다. 제자 자공(子貢)이 예(禮)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삼가면서도 예에 맞지 않으면[敬而不中禮] 거칠다, 촌스럽다[野]고 하고 공손하면서도 예에 맞지 않으면[恭而不中禮] 아첨한다[給=諂] 하고 용맹하면서도 예에 맞지 않으면[勇而不中禮] 도리에 어긋나 일을 망치게 된다[逆=乖]고 한다.”
 
  세 번째에 주목하자. 이미 《논어》 태백(泰伯)에서 공자는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난을 빚는다[勇而無禮則亂]”라고 했다.
 
  성삼문이 1453년(단종 1년)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성삼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疏)를 올렸다. 그 후 1454년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1455년에 예방(禮房)승지(동부승지)가 됐다. 그해에 세조가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세조에게 바쳤다.
 
  이후 아버지 성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허조(許慥) 권자신(權自愼) 이개 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해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던 중에 1456년(세조 2년)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한명회(韓明澮)가 세조를 설득해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別雲劍)의 시립(侍立)이 폐지돼 거사는 중지됐다. 이때 유응부 등은 곧바로 한명회 등을 제거하고 거사를 추진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 등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했다. 결국 함께 모의했던 김질(金質)이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해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래서 국문받을 때 유응부는 성삼문을 향해 “너는 글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또 “더벅머리 겁쟁이 선비 놈들과 거사를 치른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일을 모르기는 사람을 잘못 알아본 유응부 또한 크게 다를 바 없다 할 것이다.
 
 
  큰 권력에 맞서지 않은 신숙주
 
  우리는 흔히 성삼문과 신숙주를 대비시켜 성삼문의 충신(忠臣) 면모만 높여 왔다. 그러나 이석형과 대비할 경우 성삼문에게 높은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석형과 신숙주를 대비할 경우 뛰어난 학재(學才)과 이재(吏才)로 여러 임금을 섬기며 한 시대를 이끈 신숙주에 대해 마냥 좋은 평가만을 하기는 어렵다. 물론 신숙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나약하고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무엇보다 일을 할 줄 아는 신하였다. 후에 신숙주는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이 됐다. 이때의 일화는 그가 문약(文弱)한 선비라기보다는 강명(剛明)함을 갖춘 대인배였음을 한눈에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사신의 일을 마치고 귀국할 때 태풍을 만나 모두 공포에 떨었으나 그는 홀로 태연자약하여 이렇게 말했다.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 이제 내가 이미 일본국(日本國)을 보았고, 또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에 경박(經泊)하여 예악문물(禮樂文物)의 성(盛)함을 얻어 보는 것도 또한 유쾌한 것이 아니겠느냐?”
 
  금릉이란 명나라 초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을 가리킨다. 아마도 예전에 표류한 배들이 중국 남쪽 해안으로 간 일들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그는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 등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새로운 계기가 찾아온 것은 1452년(문종 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가 돼 중국에 갈 때 서장관으로 따라갔다. 이미 이때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해 함께 갈 것을 청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수양대군과 정치노선을 함께하게 된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신숙주는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출발해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세조가 즉위하자 공신으로 책봉됐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낸 다음 세조 4년에 우의정, 그리고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卒記)에 이런 표현이 있다.
 
  “예종조(睿宗朝)에는 형정(刑政)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광구(匡救)한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한마디로 예종의 횡포가 극에 달했는데 원상(院相)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바로잡으려 힘쓰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애당초 큰 권력에는 맞설 생각이 전혀 없던 그였다.
 
  신숙주의 경우 공자의 말대로 하자면 “공손하면서도 예에 맞지 않으면[恭而不中禮] 아첨한다[給=諂]고 한다”에 해당됐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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