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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 뉘우스

경성의 뒷골목 풍경

카페, 선술집, 전당포, 호떡집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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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팁’이라는 喜捨가 연애의 가격
⊙ 전당포… 도대체 무엇을 빨아 먹으려는 것인가?
‘2011 한복 페스티벌’ 패션쇼(2011년 10월 21일 옛 서울역사)에서 모델들이 1920년대 패션 리더였던 신여성들의 옷을 재현한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수도의 이름 한성은 경성으로 바뀌었다. 곧이어 서울 주변의 공간이 경기도로 편입, 규모가 1/8로 줄었다.
 
  경성은 한성과 같은 지위의 서울이 아니었다. 다양한 부류의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경성은 식민지 조선의 축도(縮圖)였다.
 
  청계천을 경계로 ‘일본인의 남촌’과 ‘조선인의 북촌’이 나누어졌다. 일본인 거주 지역은 경성에서 전등이 가장 먼저 가설됐고 수도, 공중전화가 먼저 들어왔다. 예컨대 지금의 충무로인 ‘진고개’는 비가 오면 질어서 걸어 다니기 힘든 지역이 아니었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11월 24일 자 신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촌의 본정(本町·지금의 충무로-편집자) 혹은 황금정(黃金町·지금의 을지로-편집자), 태평통, 남대문 등지에는 가로등의 시설이 완비되어 가로의 미화로 보든지 밤거리의 화려 찬란한 것으로 보든지 도회지로서 손색이 없으나 대경성의 중앙지대인 종로 일대는 아직까지도 가로등 하나 없어…〉
 
  경성의 뒷골목은 가난한 식민지의 비애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1930년대를 기점으로 카페와 여급이 등장하고 전당포가 등장한다. 먹고살기 위해 세간살이를 내놓고 몸을 팔아야 했다. 양요릿집이 아닌 서민의 먹거리인 호떡과 우동, 선술집이 자리 잡은 것도 그즈음이었다.(참고 김영근 《일제하 식민지적 근대성의 한 특징》, 2000)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경성 앞뒤 골 풍경〉은 1931년 《혜성》 11월호에 실렸다. 1930년대 유행한 경성의 카페 문화를 두고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퇴폐적인 도시 향락 문화의 온상이자 잠재적 매춘 장소’라는 지적과 ‘사창(私娼)의 이미지를 넘어 연애와 향락의 주체로서 여성이 자리매김했다’는 견해도 있다.(참고 서지영 《식민지 시대 카페 여급 연구》, 2003)
 
  이 글의 필자인 웅초(熊超) 김규택(金奎澤·1906~1962)은 일제시대 신문과 잡지의 만화가, 삽화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1933년 9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광수(李光洙)의 〈유정(有情)〉의 삽화를 비롯해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林巨正)〉, 한용운의 〈삼국지〉 등 많은 삽화를 그렸다. 광복 후에도 《조선일보》에 시사만평을 발표하고 염상섭(廉想涉)의 〈난류(暖流)〉 등의 소설의 삽화를 그렸다.

 
 
  〈경성 앞뒤 골 風景〉
  웅초(熊超)
 
  CAFE
 
1929년 9월 조선은행 앞 가설무대에 등장한 마네킹 걸과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 《조선일보》 1929년 9월 7일 자에 실렸다.
  “남촌의 카페의 빙수(氷水)집”이라더니 요즘에는 북촌에도 어느 틈엔지 카페가 늘어간다. 불경기니 뭐니 하야도 카페만은 풍성한 품이 딴 세상이다.
 
  여기는 새로 개업 ××이다.
 
  “노보코상~! 삼방.”
 
  여급 감독인 듯한 모(모 보이?-편집자)가 도돔 보리식(式)으로 외친다. 콜롬비아의 29년도 유행가에 젊은 양복쟁이들이 푼수 없이 뒤떠는 광경! 독주에 취하야 흐느적거리며 노래를 고함치는 신사(紳士) 그리고 학생. 이 구석 저 구석에는 에로 신이 점점(點點)이 전개된다.
 
  예쁜 듯하고도 못난 에로 걸이 한 신사에게 이를 보이며 대든다. 방긋이 웃는 입에 황금이빨이여!
 
  “무엇을 잡수시겠어요?” 애정 공손, 그리고 애교의 10할을 다한 말솜씨다.
 
  “고이~.”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가슴을 졸이는 그 여자. 확실히 머릿속으로 팁 수입을 수(數)판질 할 것이다.
 
  “당신이 노부꼬요?”
 
  “네, 제가 노부꼬예요.”
 
  “허- 조선 색시가 일본 이름은.”
 
  “호호호호 여기서는 그렇게 부른답니다.” 그런 말 아니해도 모를 그가 아니언만 그 여자의 변명이다.
 
  “정종 가지고 오.” 한마디에 노부꼬는 고개를 까딱하며 참새걸음으로 뛰어간다.
 
  술잔이 오간다. 창자로 들어간 술이 왼몸(온몸?-편집자)을 거의 적신 모양이다. 된소리 안 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신사의 손은 용감하게도 초대면 여자를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술이라는 간단한 수속(手續)만으로—.
 
  “아까는 빠가미루했어요. 손님이 술을 먹고는 살짝 달아났답니다.…”
 
  “달아나거나 말거나 무슨 걱정이야.”
 
  “아이참, 우리가 물어내니까 그렇지요.”
 
  “허허허. 그럴 게야. 가엾어.” 신사양반은 노부꼬의 볼기짝을 툭툭 치는지 어루만지는지 한다.
 
  “아이, 이이가!”
 
  이 ‘델리케이트(여린, 연약한·delicate-편집자)’한 비명이 좀 더 농후한 에로 교섭(交涉)에 대하야 NO가 될지 YES가 될지? 이것이 연애시장의 일절(一節)이다. 다음은 이절, 삼절은? (모른다.)
 
  카페는 진짜 연애는 아닐지라도 그와 여실(如實)한 연애를 파는 시장이다. 여급이 연애 형식 이상의 그 무엇을 파는 수가 덜어 있을지는 모르나 연애만은 공공연하게 팔 수 있다. 카페는 단지 연애의 수속비(手續費)로 술을 팔 뿐이요 ‘팁’이라는 희사(喜捨)가 연애의 가격이 된다.
 
  공황! 불경기! 하면서도 세월 좋은 이 시장을 보라! 30~40원의 값은 월급쟁이 포켓에서 감투 쓴 할아범을 그린 퍼런 종이딱지가 풀풀 뛰어나오지 않는가. 이것이 무엇인 줄 아나? 모르거든 차디찬 구들장 위에서 발발 떨며 웅성거리고 앉은 애미 애비나 마누라 자식에게 갖다 주어 보게. 얼마나 그들이 감사를 표(表)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시장으로 모여드는 흥정꾼들을 보게. 밥보다도 먼저 그리고 밥보다도 더 비싼 연애를 사러 다니기에 청년 신사 학생은 골몰하고 있다.
 
  이 위대한 시장 요릿집에다 기생집을 좀 더 첨단화시킨 이 시장이 유행에 뒤지지 않으랴는 모의 선도(先導)로 북촌거리 여기저기에 몰려오고 있다.
 
 
  작박 계(稧)
 
잡지 《혜성》 1931년 11월호 표지.
  아무리 살아보라 하여도 살 도리가 안 생긴다. 돈벌이를 하랴 해도 벌이가 안 된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태워도 일거리가 없다. 이러하다가는 굶어 죽지는 안 하더라도 꼼짝없이 말라비틀어져서 제 명대로 못 살고 죽을 것이다.
 
  “예—기(예끼?-편집자) 경칠 것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 덤벼드는 곳이 미두장. 그렇지 않으면 노름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쥐꼬리만 한 이 방면의 지식과 기술(?)이라도 있어야만 엄두를 낼 수 있다. 이것이 없고 밑천까지 없는 사람들이 만만히 달려드는 것이 작박 계다.
 
  사대문 안 청계천 건너 입정정(笠井町·중구 입정동. 을지로 3가 주변-편집자)에는 몇 개의 계도가(都家・원문에는 계()로 표기돼 있으나 글의 문맥상 계(契)로 추정된다.)가 있다. 곗날이 되면 갓 탕건을 잡쑨 영감탱이들이 팔짱을 끼고 서서 길 지나는 사람을 볼 적마다 “이 양반, 계 안 드시료” 하고 묻는다. 그러다가 “글쎄요” 한마디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곗집으로 모셔 들이곤 한다.
 
  “간밤에 설사 한 꿈을 꾸었으니까 계가 빠질런지, 하고 여편네 속옷, 밥사발 할 것 없이 모조리 끌어다가 전당포에 넣고 일금 50전을 간신히 얻어가지고 뛰어가는 곳이 곗집이다. 꿈땜만 잘하면 300원! 이런 누워 떡 먹는 재수가 어데 있습니까.
 
  십실통팔십사호(十一統八十四號)라는 번호를 사가지고 ‘물찌똥후닥닥출’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붙였다. (흔히 이런 이름이 잘 뽑히니까.)
 
  표(票)는 잃을까 두려워서 족히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두고 수통 흔들 시간만 기다린다. 소상인, 행상인, 인력거꾼, 배달부 등등의 무리와 구차한 집 아낙네들이 뜰 안에 꽉 들어찼다. 이 수백 명 되는 사람이 다 각기 좋은 꿈 하나씩은 꾸어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통 흔드는 사람이 모기장같이 가늘게 짠 철망 속에서 거대한 폭탄과 같은 둥근 통 속에 천 개가 넘는 계 알을 넣고 뒤흔들기 시작한다. 마지막 판에 통꼭지 구멍에서 톡 튀어나오는 놈이면 그 알의 소유자는 큰 횡재다.
 
  긴장 대긴장! 통수가 꼭지 마개를 빼고 한번 뿌리쳤다. 은행 같은 하—얀 알 하나가 쳐놓은 포장 위로 톡 튀어나왔다. 누구의 것일까? 수백 명 모인 사람은 몰라도 ‘십시통팔십사호 물찌똥후닥닥출’의 소유자는 한번 깊이 들이마신 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주먹에는 땀을 꼭 쥐고 있다.
 
  흔들던 사람 옆에는 한 사람이 파리채 같은 것으로 알을 살며시 떠가지고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알에 씌워 있는 통호(統號)와 이름을 부른다.
 
  “십일통”을 길게 한마디 빼고 그다음에 호수를 부를 참인데 ‘물찌똥후닥닥출’의 소유자는 긴장하다 못하야 얼골이 벌써 사색(死色)이다. 그다음은?
 
  “팔십”
 
  그 소유자는 쓰러질 지경이다.
 
  “이호의 신통줄—”
 
  가슴에 꽉 찼던 숨이 코로 입으로 확 밀려 나오느라고 헹! 소리가 저절로 난다. 벌써 원등(元等) 300원은 절망이다. 얼떨떨한 정신을 가다듬고 “혹시 건등(乾等)?” 하고 긴장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건등 10원의 세 개 축에도 못 들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술이나 사 먹을걸” 하고는 어리석고 못난 후회가 몸을 괴롭게 군다.
 
  이와 같이 만사가 뜻대로 안 되는 가엾은 사람의 사행심을 이용하야 엉터리 없이 착취하는 계는 박멸(撲滅)해야 될 것이 아닌가. 계에서 해(害) 입는 사람이 몇만 명이며 그 돈이 또한 몇십만 원이랴. 이 돈은 송두리째 계장(長)의 뱃속으로 소리도 없이 들어간다.
 
  계알의 정수(定數)가 천여 개에 계원의 것은 200~300에 지나지 못하고 나머지 700~800개는 계장의 것이다. 여기에서 10의 8은 원등이 계장의 것이 될 것은 사리가 뻔한 일이 아닌가.
 
 
  선술집
 
1920년대 서울 명동(왼쪽)과 30년대 명동거리.
  언제 보든지 풍성풍성한 곳은 선술집이다. 술맛이 좋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별 탈 없는 그 술 한 잔에 안주 한 개. 이래서 일금 5원 안주만은 가지각색의 것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특전. 그리고 그 안주가 세상없는 영양학자를 다 불러대더라도 자식물(滋食物)에 속(屬)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못할 육류 어류 채소 등이다.
 
  일금 20전만 던지면 양요릿집의 일원어치 폭은 되는 영양과 취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야 확실히 고마운 일이다.
 
  술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린다면 몰라도 양요릿집과 카페, 기타 요릿집이 엄연히 존재해 있는 한에는 선술집이라는 것은 확실히 없지 못할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없는 사람들 층의 유일한 연회장 사회장은 선술집이다. 있는 놈들이 요릿집에서 100원 쓰는 동안에 없는 사람들은 선술집에서 같은 기분과 취흥을 50전, 1원에 살 수가 있다.
 
  선술집이 더럽다던 신사 나으리도 머리가 영리(怜悧)해졌는지 어정어정 제발로 걸어들어 온다.
 
  그뿐이냐. 은행 회사 대감까지 깊숙한 골목 선술집에서 안주 받은 호콩을 까먹고 있지 않느냐. 세상은 이와 같이 개명(開明)해 간다.
 
 
  우동집
 
  5전 균일의 우동집이 도처에 보이게 되었다. 전에는 구루마에다 끌고 다니더니 요즘에는 제법 상당한 거리에 깨끗한 장치를 한 집들이 구수한 내음새를 피우며 허출한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다. 5전이란 싼 맛에 그리고 조용한 맛에 학생 신사 할 것 없이 많이들 들어간다.
 
  맛이 별미요, 값싸다는 것이 가정부 여자들에게까지 선전이 되었는지 군것질감이 되어 찌개값까지 들어 쓰게 되는 모양이다.
 
 
  전당포(典當鋪)
 
개벽사가 펴낸 잡지 《별건곤》(표지 안석주)의 1933년 9월호 표지에 실린 당대 신여성과 모던 보이. 오른쪽이 일제시대 전당포 모습이다.
  술집이 늘고 카페가 느는 한편에 전당포 발전이 또한 그 이상 놀랍다. 북촌에는 전에 없던 일본인질옥(日本人質屋)이 여기저기 굉장히 큰 건물을 가지고 서 있다. 버젓한 이층 벽돌 양옥을 진고개 바닥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빨아 먹으려는 것인가? 구차한 월급쟁이들의 처느진(처진?-편집자) 양복을 보관하는 곳인가? 시계를 잡히고 분수 없는 젊은 사람들의 카페에 갈 자금을 융통하는가. 부녀(婦女)들의 비녀 가락지를 잡고 남편의 ○작유흥(○雀遊興)을 도와주는가. 대부분은 이것으로 큰 이익을 보고 발전하는 것일 것이다.
 
 
  호떡집
 
잡지 《혜성》 1931년 11월호에 실린 〈경성 앞뒤 골 풍경(風景)〉 첫 장.
  (3行略) 턱을 고이고 앉아서 손님 오기만 기다리는 호떡집 중국인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요새 호떡 잘 팔려?” 하고 물으면
 
  “우리 이거 안 팔려 해서 야단.”
 
  “왜 안 팔려.”
 
  “우리 몰라지. 우리 대국 갈 테야.”
 
  한때 학생들에게 큰 환영을 받던 호떡이 요즘은 갑자기 안 팔리는 모양이다. 한 개 5전이란 턱없이 비싼 관계도 있지만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끼친 영향이 큰 원인인 모양이다.
 
  중국요릿집에서는 그 후로 조선 사람에게 외상을 아니 주는 모양이다. 그래도 팔리기는 하는 모양인데 호떡집만은 까딱하다가는 경성 시내에서 그림자조차 없어질 것 같다.⊙
 
  (출처=《혜성》 제1권 제8호, 1931년 11월호)
 
  (편집자-만보산 사건은 1931년 7월 2일에 중국 만주 지린성 창춘현 싼싱푸(三姓堡)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의 술책으로 한국인 농민과 중국인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및 유혈사태로 만주사변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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