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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27〉 ‘붓에 지다’, 글씨에 삶을 건 추사와 원교와 창암 세 남자 이야기

제주 귀양에서 돌아온 추사가 말했다. “원교의 현판은 어디 있는가?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 주게. 내가 그때는 잘못 보았어”

글 : 문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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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 명문가 출신 추사, 일곱 살 때부터 글씨로 재주 과시
⊙ 입춘첩 본 영의정 채제공 “만일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크게 귀하게 되리다”
⊙ 다산을 매개로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소치 허련 같은 조선 후기 최고의 인재들이 굴비처럼 인맥 엮여
⊙ 원교 이광사는 ‘나주 벽서사건’으로 잃을 뻔한 목숨을 영조가 불쌍히 여겨 살렸다
⊙ 창암 이삼만은 가난한 집안의 명필, 추사로부터 저평가받았지만 추사가 훗날 뉘우쳐
⊙ 창암, 추사가 돌아간 뒤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일갈
⊙ 해남 대흥사는 세 명필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는 ‘서예의 박물관’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이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전라남도 해남에 대흥사(大興寺)라는 대찰(大刹)이 있다. 충청남도 예산의 추사고택(秋史古宅)을 본 뒤 땅끝마을 해남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큰절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추사는 흔히 명필(名筆)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 후기 우리 문화의 거대한 봉우리였다.
 
  그는 시서화(詩書畵)에 능했고 청나라 학자들도 혀를 내두른 금석학의 거두(巨頭)였으며 장서가이기도 했다. 충남 추사고택의 주소는 예산군 용궁리다. 추사는 여기서 1786년 6월 3일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양지 바른 곳에 단정하게 보존된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나눠져 있는데 이것은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가문의 모습이라고 한다.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이다. 서울에서 기술자를 불러 지은 집으로, 원래 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복원됐다.
  원래 남에게 넘어간 집을 고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을 지시해 지금처럼 우리들에게 추사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원형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옛집의 소박한 운치는 남아 있다. 관리도 철저히 되는 듯 마감시간이면 어김없이 관리직원들이 나타난다. 추사고택의 사랑채는 기역자(ㄱ) 형이며 가운데로 난 문을 열면 방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안채는 미음자(ㅁ) 구조로, 안으로 들어서면 육간대청이 보이고 양옆으로 안방과 부엌이 있다. 반대편에는 안사랑과 작은 부엌도 있다. 추사고택의 기둥에는 추사의 글씨가 많다. 하나같이 교훈을 주는 말들이어서 집을 살피며 글씨의 뜻을 되새기는 것도 뜻있는 여정(旅程)이 될 듯하다. 이 집은 한양에서 나라의 건물을 짓던 목수를 불러 만들었다.
 
  추사가 명문대가의 자제였다는 뜻이다. 아버지 김노경은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추사의 증조부)인데 월성위는 영조의 부마였다. 김한신의 아내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였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세자의 형으로, 어렸을 적 죽은 첫아들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의 딸이었다. 명문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추사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 일화가 여섯 살 때 월성위 궁에 붙인 입춘첩이다. 입춘첩이란 입춘 때 대문에 붙이는 ‘건양다경’ ‘입춘대길’ 같은 글을 말한다. 어린 김정희의 글을 본 박제가는 “이 어린아이가 훗날 학예로 이름을 드날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해인 김정희가 7살 때는 당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역시 입춘첩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글씨로 이름을 날릴 만큼 명필(名筆)이다.” 그야말로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낭중지추의 재주였는데 당대의 재상 채제공은 추사의 앞날을 예지한 듯한 말을 남겼다. “만일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크게 귀하게 되리다.”
 
추사고택에는 다양한 주련이 걸려 있다.
  추사는 당대의 학자 박제가에게 사사했으며 스물네 살 때인 1809년 생원시에서 일등으로 합격한 뒤 동지겸사은사부사로 북경에 간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수행했다. 자제군관이란 직책을 얻었는데 중국에서 추사는 거유(巨儒)들을 만난다. 당시 47세인 완원, 78세인 옹방강을 찾아 사제의(師弟義)를 맺고 주학년(朱鶴年)·이정원(李鼎元)·조강(曹江)·서송(徐松)·옹수배(翁樹培)·옹수곤(翁樹崑)·사학숭(謝學崇) 등이다.
 
  추사에게 중국행은 차(茶)를 접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청나라의 고매한 선비들은 차를 즐겼는데 이 문화를 접한 추사도 차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차 문화가 없다시피 했다. 추사가 북경에서 만난 인물 중 특히 옹방강은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였는데 추사를 향해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추사에게 귀중한 자료도 잔뜩 선물했다. 석묵서루(石墨書樓)라는 자신의 개인 도서관에 소장된 장서와 고탁본 자료를 추사에게 보내줘 추사의 안목을 한꺼번에 넓힌 것이다. 옹방강은 불교에도 심취한 인물이었는데 이것은 훗날 추사가 불교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완원의 역할도 추사의 삶에서 중요하다.
 
  그는 옹방강과 함께 청을 대표하는 학자였는데 추사가 찾아오자 ‘용봉승설’이라는 명차를 대접했다. 추사는 훗날 ‘승설도인’이라는 호도 썼는데 이때 맛본 용봉승설의 맛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사가 서른 살 되던 1815년, 그는 동갑 초의선사와 금란지교(金蘭之交)의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잠깐 초의선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다산초당의 모습이다. 다산을 매개로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원교 이광사 등은 거대한 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1786년(정조 10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초의선사의 속성은 장씨로 15살 때 큰 위기를 맞았다. 강변에서 놀다 그만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스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장씨 소년에게 출가를 권했고, 소년은 1년 뒤인 16세 때 남평 운흥사에서 민성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스님의 삶을 시작했다.
 
  초의선사는 19살 때 영암 월출산에서 득도를 했다고 한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뒤부터는 전국을 돌며 선지식을 키웠다. 마침내 대흥사의 13대 대종사가 됐는데 대종사는 한마디로 불가의 큰어른을 말한다. 초의선사의 관심 분야는 매우 폭이 넓었다고 한다. 한낱 학승(學僧)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가 추사를 알게 된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 때문이다.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을 산 다산을 아들 정학연이 자주 찾았다. 그때 정학연은 대흥사의 초의선사를 알게 됐고 그의 지식에 감동해 “한양에 가면 여러 명사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느날 초의선사가 한양으로 오자 정학연이 추사를 부른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설(異說)도 있다. 초의선사가 한때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선사를 모실 때 추사가 해붕선사를 찾아왔고 이때 초의와도 인사를 했다는 것이지만 뭐가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다. 한마디로 다산은 유배 중 유일·혜장스님이라는 당대의 고승들과 교유했고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다산을 매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예산 추사고택 앞에 있는 석조물로 추사체를 엿볼 수 있다.
  추사와 초의선사의 관계는 잘 규명돼 있는데 여기서는 추사가 마흔 살 때 제주도로 유배당하면서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외로운 유배 시절, 추사가 초의선사가 보내 준 차로 시름을 달랬음을 알 수 있다.
 
  “햇차를 몇 편이나 만들었습니까. 잘 보관하였다가 내게도 보내 주시겠지요. 자흔과 향훈스님들이 만든 차도 빠른 인편에 부쳐 주십시오. 혹 스님 한 분을 정해 (그에게 차를) 보내신다 해도 불가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세신도 편안한가요. 늘 염려됩니다. 단오절 부채(節)를 보내니 나누어 곁에 두세요.”
 
  “갑자기 돌아오는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습니다. 차 향기를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만 같습니다. 편지의 유무(有無)는 원래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나는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났습니다. 지금 다시 차를 보고 나아졌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편지의 유무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추사는 편지를 즐겨 썼지만 초의선사는 답장을 잘 안 보냈다는데 그것을 말하는 듯하다. 또 한 가지 ‘인편으로 편지와 차포를 받았다’는 부분이다. 인편(人便)은 차 배달 심부름꾼을 말하는데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분부를 받고 추사에게 차를 심부름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그렇다면 소치 허련은 무슨 연유로 초의선사와 인연을 맺었을까. 1809년 태어난 허련은 소설 《홍길동》을 쓴 교산 허균의 집안이었다고 한다. 허균의 후예 중 진도에 정착한 이가 허대(許岱)인데 그는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임해군이 역모죄로 몰려 진도로 귀양오자 수행한 허대가 아예 눌러앉은 것이다.
 
  진도라는 당시로는 고도절해(孤島絶海)에서 그림을 그리던 허련의 정열을 맨처음 알아본 이는 숙부였다. 그는 “내 조카는 반드시 그림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것”이라며 어렵게 오륜행실도를 구해 줬고 허련은 그것을 모방하며 실력을 키웠다. 허련이 초의선사를 알게 된 것은 1835년 무렵이다. 초의선사는 ‘호남팔고(湖南八高)’라고 칭송받았다.
 
  그의 〈다산도(茶山圖)〉 〈백운동도(白雲洞圖)〉 같은 그림을 보면 초의선사가 불법뿐 아니라 시서화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의선사는 허련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남긴 《몽연록(夢緣錄)》에는 초의선사에 대한 감사의 글이 있다. “초의선사는 나를 항상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고 방을 빌려주며 거처하도록 해 주었다.”
 
공재 윤두서 선생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다. 소치 허련은 해남 윤씨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다. 허련의 재주를 알아본 초의선사는 대흥사 한산전에 머물며 불화를 가르치는 한편 녹우당의 해남 윤씨에게 부탁해 허련이 공재 윤두서 선생의 그림을 열람하도록 했다. 이 모든 게 허련을 위한 배려였다. 허련은 “공재 선생의 그림을 열람한 뒤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초의선사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다산의 문하에서 해남 윤씨 후손인 윤종민, 윤종영, 윤종심, 윤종삼 등과 동문수학했기 때문이다. 다시 《몽연록》을 살펴본다. “아주 어릴 적에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처럼 홀로 담담하고 고요하게 살았겠는가. 선사와 수년을 왕래하다 보니 기질과 취미가 동일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초의선사는 이제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한다. 1838년 8월 무렵 금강산 유람을 떠난 초의선사는 허련의 그림을 추사에게 보여줬다. 허련의 그림을 본 추사는 대번에 “압록강 이동에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격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허군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루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한양으로 올라와 안목을 넓히는 것이 어떨지요?” 자기 문하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초의선사는 이 소식을 허련에게 전했고 기별을 받은 허련은 이십 일을 걸어 추사를 만난다. 소치는 당시를 “초의선사가 전하는 편지를 올리고 곧 추사 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마치 옛날부터 서로 아는 것처럼 느꼈다. 추사 선생의 위대한 덕화가 사람을 감싸는 듯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추사와 소치의 사제관계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면서 끝나지만 소치는 제주도로 스승을 찾아갈 정도였다. 이후 소치의 그림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장했는데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다음과 같은 시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마음속에 한 폭의 산수를 채비하여 늘 밝은 정신을 품어 세속을 초월하는 풍취가 있은 다음에야 붓을 들어 삼매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경지는 소치 한 사람뿐이다(心窩裏準備一副邱壑 神明中常蘊 傲世絶俗之姿然後 落筆便入三昧 此世界小癡一人而已).”
 
  이 소치가 후손에게 남긴 교훈이 있다. 첫째, 붓 재주 하나로 성가(成家)할 생각을 말라, 둘째 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라, 셋째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넷째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근면·성실·겸손의 정신이 배어 있는 말이다. 소치의 가문은 이후 5대에 걸쳐 13명의 화가를 낳으니 한국 동양화의 산맥이라 하겠다.
 
  소치를 비롯해 2대 미산(米山) 허형(許瀅), 3대 남농(南農) 허건(許楗), 임인(林人) 허림(許林), 4대 임전(林田) 허문(許文), 5대는 허진 전남대 교수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사도세자와 정조가 이어지고 정조 시대의 다산 정약용과 연담 유일스님-혜장스님이 연결되며 다시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소치 허련이 맺어지는 것이다.
 
  이제 당대의 거장들이 교유했던 무대 해남 대흥사를 알아본다. 대흥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로 추정되며 사찰 스스로는 백제 구이신왕 때인 426년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라는 분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정관존자에 대해서는 생애나 활동 상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계종 22교구 본사인 대흥사는 근대까지만 해도 대흥사·대둔사로 불렸는데 지금은 대흥사로 통일됐다. 이 사찰은 풍담스님부터 초의선사까지 13대 대종사(大宗師)를 배출했으며 만화부터 범해스님까지 13대 대강사(大講師)를 낳았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이라는 명성 못지않게 호국(護國)의 도량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이곳을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이라고 했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흥사는 승병의 총본부가 됐다. 지금도 절 안에 있는 표충사라는 사당에는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스님 같은 승병 지도부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유서 깊은 대흥사는 볼 것도 많지만 현판을 빼 놓아서는 안 된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렀다. 이때 대웅전 현판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글씨를 써 달게 했다. 문제는 추사가 내려 버린 대웅전 글씨가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추사는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이렇게 호통까지 쳤다고 한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찌 안다는 사람(초의선사)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달아 놓을 수가 있는 것인가?” 추사의 극성에 초의선사는 원교의 현판을 떼 버렸다. 원교는 중국과 다른 우리 특유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이광사의 글을 폄하한 추사의 자존심도 대단했지만 7년3개월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양으로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귀양길에 떼어 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은 어디 있는가?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 주게. 내가 그때는 잘못 보았어.”
 
  이것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하루아침에 사형을 당할 뻔한 위기를 맞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추사가 제주도라는 절해고도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봤다는 증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참고로, 이광사 역시 추사처럼 전남 완도 옆 신지도라는 섬에서 22년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큰아버지가 반(反) 영조의 진영에 섰던 게 화근이었다.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의 현판이다. 이광사가 쓴 것이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으로 역시 이광사의 작품이다.
  훗날에는 자신도 천주교도들의 나주 벽서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남의 절에는 원교의 글씨가 제법 남아 있다. 대흥사의 대웅보전 외에도 침계루·천불전·해탈문이 그의 작품이고,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일주문·명부전의 글씨도 그의 것이다. 그의 아들이 훗날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이다. 내친김에 원교 이광사의 생애를 본다.
 
  원교 이광사는 추사가 그랬듯 서예의 명가 출신이다. 종고조부 이경석(李景奭), 증조부 이정영(李正英), 부친 이진검(李眞儉)이 모두 명필이었다. 원교는 양명학을 받아들인 당시로선 진보학자였으며 인품 높고 명필로 이름을 날렸지만 1755년의 이른바 ‘나주 벽서사건’으로 삶의 물결이 확 바뀌어 버렸다.
 
  이 일로 큰아버지 이진유(李眞儒)가 처형되고 원교도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됐다. 영조시대 명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병세재언록》이라는 책에는 당시 의금부에 끌려온 원교가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이렇게 외쳤다.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불쌍히 여겨 귀양으로 마무리지었다는 것이다.
 
  원교가 있는 회령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조정에서는 이것을 문제 삼아 원교를 다시 신지도로 보냈다. 원교는 거기서 풀려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원교의 글씨체를 동국진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스승인 백하 윤순의 뒤를 이어 원교체를 완성하자 사람들이 겸재 정선이 동국진경 산수를 창출한 것과 같다 하여 동국진체로 부르기 시작했다.
 
대흥사 명부전으로 이광사의 동국진체다.

대흥사에 있는 무량수전으로 추사의 작품이다.
  원교와 추사는 나이 차가 많아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원교가 숨진 뒤 추사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흥사 현판만 두고 대립한 것이 아니다. 원교가 서예의 이론을 집대성해 《원교필결(員嶠筆訣)》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훗날 추사가 후기를 쓰면서 호되게 비판한 것이다. 길지만 전문을 살펴본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서예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이르는 진체(晉體·왕희지체)니 촉체(蜀體·조맹부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런 것이 있다고 여겨 표준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니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아 가소롭다.
 
  원교는 《필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엽 이래로 다 언필(붓을 뉘어서 쓰는 것)의 서(書)이다. 그래서 획의 위와 왼편은 붓끝이 발라가기 때문에 먹이 짙고 부드러우며 아래와 바른편은 붓의 중심이 지나가기 때문에 먹이 묽고 깔끄러운 동시에 획은 치우쳐 완전하지 못하다.
 
  이 설(說)은 하나의 가로획은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하므로 미세한 데까지 분석한 것 같으나 가장 말이 안 된다. 위에는 단지 왼편만 있고 바른편이 없으며 아래에는 단지 바른편만 있고 왼편이 없단 말인가? 붓끝이 발라 가는 것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붓 중심이 지나가는 것이 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창암 이삼만의 작품이다. 글씨 하나하나가 뱀이 혀를 낼름거리는 듯하다.
  추사와 원교를 말하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다. 이삼만은 전라북도 전주, 지금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는 한옥마을 근처 옥류동에서 약초 캐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삼만이 스물네 살 때 아버지가 독사에 물려 사망했다. 화가 난 이삼만은 인근 산자락의 뱀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쇠지팡이 3개가 못 쓰게 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이삼만은 독사만 보면 그 자리에서 살과 뼈까지 우두둑 씹어 먹었는데 나중에는 뱀들이 이삼만만 보면 아예 기를 못 쓰고 얼어붙은 듯 꿈쩍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요즘도 전북지방에서는 정월 첫 뱀날에 ‘이삼만’ 석 자를 대문에 거꾸로 붙이는 풍습이 있다.
 
  이삼만의 이름이 뱀을 막는 일종의 ‘부적’이 된 것이다. 이삼만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변변한 붓을 써 보지도 못했다. 칡뿌리로 만든 갈필, 대나무를 잘게 쪼개서 만든 죽필, 꾀꼬리 깃털로 만든 앵우필이 고작이었으며 낙관은 고구마에 도장을 파 사용했고 종이도 한약봉지, 헌 창호지, 낡은 부채 같은 곳에 글을 썼다.
 
  추사와 창암 사이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던 길에 전주에 살던 이삼만의 집을 찾았다. 당시 추사가 쉰넷, 이삼만은 일흔이었다. 창암이 추사에게 자신이 쓴 글을 내밀자 추사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 던졌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 살겠습니다.” 이에 창암은 말이 없었다.
 
  추사가 돌아가자 비로소 창암이 제자들에게 넋두리 비슷하게 말했다.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제주도에 있는 추사기념관이다.
  창암이 죽은 뒤 1년 후에 추사는 제주도 유배에서 풀렸다. 추사가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전주 창암집에 들렀다. 집은 창암의 제자가 지키고 있었다. 추사는 스스로 붓을 들어 ‘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고 쓰고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書家)가 누워 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공의 필법은 나라에서 최고봉을 이루었고 나이가 들면서 입신의 경지에 들어 명성이 중국에까지 미쳤다.”
 
  전남 대흥사에는 추사와 창암의 글씨가 나란히 걸려 있다. 무량수각이 추사의 것이고 가허루(駕虛樓)가 창암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흥사에는 추사와 원교와 창암의 글이 다 모여 있다. 그런가 하면 구례 천은사의 보제루(普濟樓)도 창암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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