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17〉 ‘뎃포(鐵砲)’로 본 유럽과 일본의 만남

글 : 신상목  (주) 기리야마 대표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다네가시마 영주, 병사 200명을 1년간 유지할 돈을 주고 포르투갈인으로부터 화승총 2자루 구입
⊙ 오다 노부나가, 뎃포 생산지 구니토모 점령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생산 관리 맡겨
⊙ ‘뎃포’의 국산화 성공은 일본이 외국 문물 받아들여 뿌리 내리게 한 대표적 사례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일본은 화승총이 전래되자마자 이것을 금방 자기 것으로 만들어 전국으로 퍼뜨렸다. 그림은 전국시대에 나온 사격 교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발간 이후 유럽인들은 동방으로의 길을 갈구한다. 향신료, 금을 원하는 세속적 동기와 기독교 포교의 종교적 이유가 교차하면서 욕구는 현실적 추진력을 얻고 행동으로 옮겨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동방으로 가는 바닷길을 현실화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콜럼버스는 당시 존재하던 모든 지리·천문·역사 서적을 탐독한 후, 지구는 둥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론은 맞았지만 결론의 기반이 된 팩트는 사실 오류투성이였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유럽에 형성된 지리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구의 크기를 실제보다 훨씬 작게 추정하였고, 따라서 서쪽으로 3000마일만 항해해 가면 일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실제 유럽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는 1만 마일이 넘는다). 그러한 오류의 신념이 그에게 서쪽으로의 항해를 향한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다.
 
  콜럼버스가 3000마일을 항해하여 도달한 곳은 아시아가 아닌, 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불리게 되는 신대륙이었지만,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다. 콜럼버스가 도달한 곳이 어디건, 그는 지구가 바다 끝에 낭떠러지가 있는 원반(圓盤)이 아니라 공처럼 둥근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인도로 가는 서쪽 뱃길이 존재한다면 동쪽 뱃길이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진출
 
  지중해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중계무역 덕을 톡톡히 보던 리스본 왕국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안(西岸)을 훑으며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워밍업을 하고 있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코 다 가마 등이 이끄는 원정대가 결국 아프리카를 둘러 아라비아해를 거쳐 인도로 가는 뱃길 개척에 성공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포르투갈인들은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서쪽으로 가면 신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항해의 귀신들이었다.
 
  유사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무력 충돌을 불사하며 경쟁을 벌이자 종교적 권위가 나선다. 1494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로 포르투갈·스페인 양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고 대서양 한복판에 그은 선을 기준으로 스페인은 서쪽을, 포르투갈은 동쪽을 차지하기로 합의한다. 선을 어디에 그을지 밀고 당김 속에 남미의 브라질은 포르투갈, 아시아의 필리핀은 스페인 차지가 되었다. 유럽의 두 기독교국이 배를 좀 탈 줄 알게 되었다고 비기독교 세계를 평화롭게 나누자는 합의를 하고 교황은 그를 신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그 어처구니없는 합의가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신호탄이 되었다.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 ‘정복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들은 신대륙에서 원주민 학살을 마다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여 식민지를 점령하고 통치하면서 그곳에서 얻어지는 산물을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반면 포르투갈은 해양로 장악을 통한 해양영토 확보와 그에 따른 독점적 무역 이익 추구를 기조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안(東岸), 아라비아해, 인도양에 이르는 해역에서는 핵심 거점 지역을 점령하면서 거대한 해양제국(Estado da India·포르투갈어로 ‘인도제국’이라는 뜻)을 구축했으나, (일부 동남아 제도·諸島 지역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권역에서는 해상 교역 루트 확보에 만족해야 했다. 중국·태국·베트남·일본 등 비유럽 문명권의 기존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기에는 힘이 부쳤기 때문이다.
 
  인도 서부 해안에 위치한 고아(Goa·포르투갈령 인도)는 1510년 정복자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에 의해 포르투갈령이 된 이후 포르투갈 해양제국의 최대 거점이 되었다. 인도양 일대에서 획득된 막대한 양의 향신료와 노예가 고아를 거쳐 유럽에 수출되었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며 기독교 수호자를 자처하던) 포르투갈 왕실이 후원하는 선교사들이 고아를 기점으로 아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더 큰 부(富)를 찾아 동진(東進)을 거듭하며 중국에 접근할 기회를 노리던 포르투갈은 1553년 마카오의 일부를 명나라로부터 조차(租借)한다. 당시 중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외국인 전용 거류지였다. 이로써 인도양, 남중국해를 넘어 동중국해 일원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포르투갈의 해양로 거점이 완성된다.
 
 
  다네가시마의 뎃포 전래
 
뎃포가 처음 전래된 다네가시마의 뎃포.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진출하기 10년 전인 1543년, 일본과 포르투갈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1606년 일본의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가 집필한 《철포기(鐵砲記)》에 의하면, 1543년 8월 수상한 배가 다네가시마(種子島·규슈 남단에 위치한 섬) 해안에 표착(漂着)한다. 배에는 100명이 넘는 중국인이 타고 있었고, 그중에 흰 피부, 곱슬머리의 해괴한 외모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지역 책임자가 승선해 있던 중국인과 필담을 통해 남만(南蠻)의 상인들임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일본 문헌에 ‘牟良叔舍’(Francisco Zeimoto)와 ‘喜利志多陀孟太’(Antonio Da Mota)로 기록된 포르투갈인들로, 일본 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유럽인들이었다.
 
  이들은 곧 도주(島主)인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 앞에 불려간다. 도키타카는 이방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호기심 충만한 젊은 지배자와 지배자의 환심을 사려는 이방인 사이에 중국어·포르투갈어 이중 통역으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도키타카는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길쭉한 막대 같은 물체가 무엇인지 묻는다. 이방인들의 답변을 들은 도키타카의 눈이 번뜩인다. 도키타카의 흥미를 눈치챈 이방인들이 곧 시연(試演)에 나선다. 과녁을 세우고 화약을 재운 후 방아쇠를 당기니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목표물이 박살난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속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네가시마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에 일본에서 ‘뎃포’(鐵砲)로 불리게 되는, 근대 무기의 대명사 소총(musket)이 일본 땅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에 대한 유럽측 기록은 이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포르투갈의 군인이자 외교관인 안토니오 갈바노(Antonio Galvano)는 포르투갈령 인도 일대의 통치를 관장하면서 현지의 사정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1563년에 간행된 그의 저작 《신구(新舊)세계 발견기(Tratado dos Descobrimentos, antigos e modernos, feitos ate' a era de 1550)》에는 포르투갈인들의 일본 방문(또는 발견)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기술(記述)이 있다.
 
 
  포르투갈인들, ‘지팡구’를 발견
 
  〈1542년, 샴 왕국(지금의 태국)의 도드라에 정박해 있던 배의 선장 디에고 데 프레이타스 휘하 포르투갈 선원 3인이 허가 없이 정크선을 타고 중국으로 출항하였다. 안토니오 다 모타, 프란시스코 제이모토, 안토니오 벤토 3인은 북위 30도 부근에 있는 닝보(寧波)로 가고자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육지로부터 멀어져 바다로 떠밀려가다가 북위 32도에서 동쪽에 있는 섬을 발견했다. 그 이름은 일본(Japoes)이라고 하며, 실로 소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부귀(富貴)의 섬 지팡구와 같이 금은보화가 넘쳐 흘렀다.〉
 
  일본과 포르투갈의 기록이 각각 1543년과 1542년으로 1년의 시차가 있어 어느 쪽이 정확한 연도인지를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일본과 서양의 첫 만남이 어떠한 시대적 배경과 정황하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1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 하겠다.
 
  갈바노의 기술에서 볼 수 있듯 그때까지도 일본은 유럽인들에게 마르코 폴로가 심어 놓은 환상의 황금 나라 ‘지팡구’로 인식되고 있었다.
 
  뎃포의 위력에 반한 도키타카는 뎃포 2정을 2000냥을 주고 사들였다고 한다. 10냥이면 병사 한 명의 1년치 봉록에 해당하니 2000냥이면 200명의 군대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훗날 이 소문이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유럽에 퍼지면서 일본은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챙길 수 있는 엘도라도의 땅으로 다시 한 번 유럽인들의 뇌리에 각인된다.
 
 
  대장장이 딸 와카사의 전설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사격술을 습득한 도키타카는 뎃포에 푹 빠진다. 머리 좋은 가솔(家率)에게 작동법과 화약 제조법을 익히게 하는 한편, 한 정을 리버스 엔지니어링용(역설계) 샘플로 기술자에게 제공한다. 카피의 명을 받은 것은 섬에서 제일가는 도검(刀劍)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 기요사다(八板金兵衛淸定)였다. 기요사다는 이듬해인 1544년 뎃포 복제에 성공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음 접하는 메커니즘의 서양 무기이기에 낯설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간단한 구조여서 총신(barrel) 등은 솜씨 있는 대장장이라면 못 만들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나사’(screw)였다. 당시 화승(火繩·matchlock) 방식의 유럽 소총은 화약을 총신 안에 재운 후, 총열의 후미 안쪽을 암나사(bolt)로 깎고 수나사 마개를 돌려 넣어 폭발 압력이 배출되지 않도록 입구를 열었다 막았다 하는 것이 핵심 기술이었다.
 
  당시 일본의 금속 가공 기술로는 정확한 매칭의 나사를 제조할 수가 없었다. 뎃포가 전래된 이듬해인 1544년 다른 배를 타고 포르투갈인 기술자가 다네가시마를 방문했을 때, 기요사다가 그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나사 문제를 해결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네가시마 민담에는 대장장이 기요사다의 딸인 와카사(若狹)가 아버지를 돕기 위해 프란시스코 제모토와 결혼하여 해외로 나갔다가 1544년 포르투갈 기술자를 데리고 귀국하였다는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일본에서는 와카사를 유럽인과 혼인한 최초의 일본 여성으로 보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다(그 가련한 스토리로 인해 와카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가 창작될 정도이다).
 
  이렇듯 뎃포의 전래와 복제가 다네가시마에서 이뤄진 배경 때문에 뎃포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까지 뎃포는 다네가시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뎃포’의 상업화
 
사카이의 뎃포공장. 상공업 중심지였던 사카이는 초기 뎃포 생산지 중 하나였다.
  다네가시마의 복제 성공 이후, 뎃포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일본 각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한다. 다네가시마는 철 함유량이 높은 모래의 산지로, 그를 제련하여 생산한 철을 수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다네가시마에는 사카이(堺·오사카 인근에 위치한 상공업 중심지) 출신의 다치바나야 마타사부로(橘屋又三郞)라는 주물(鑄物)품 전문 상인이 체류하고 있었다. 다치바나야는 다네가시마 체류 기간 중 뎃포 제작기법을 익힌 후 사카이에 돌아와 뎃포 제작에 나선다. 사카이는 전국에서 상인과 기술자들이 몰려들던 곳이다. 다치바나야의 뎃포는 오사카와 교토의 긴키(近畿) 지역은 물론 멀리 간토(關東) 일대에까지 알려져 구매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다치바나야는 ‘뎃포마타’(鐵砲又)로 불리는 대상인이 되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기이노쿠니(紀伊國·지금의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유력 무장(武將) 쓰다 가즈나가(津田算長)는 뎃포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발 빠르게 움직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직접 다네가시마에 가서 뎃포를 손에 넣은 후, 도검 철장(鐵匠) 시바쓰지 세이에몬(芝辻淸右衛門)에게 복제를 의뢰한다. 시바쓰지가 복제에 성공하자 쓰다는 뎃포의 대량 생산을 후원했고, 이후 쓰다의 본거지인 네고로(根來)는 일대 뎃포 생산지가 되었다.
 
  쓰다는 스스로가 뎃포의 명사수였으며, 그가 고안한 뎃포 활용 전술은 쓰다류포술(津田流砲術)로 불리며 뎃포의 실전화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쓰다 일족은 네고로지(根來寺)라는 사찰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는데, 쓰다의 지휘하에 뎃포로 무장한 이곳 승병들은 ‘네고로슈’(根來衆)라 불리며 센고쿠시대의 전란 속에서 주군(主君)을 바꿔 가며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용병 집단으로 활약하였다.
 
 
  ‘뎃포’ 생산 책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는 뎃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구니토모를 점령했다.
  이외에도 히노(日野) 등 많은 곳에서 뎃포 생산이 이루어졌으나, 특히 주목할 곳은 사카이, 네고로와 함께 3대 뎃포 생산지로 명성을 떨친 구니토모(國友·지금의 시가·滋賀현)이다.
 
  구니토모는 당시 집권 세력인 무로마치 막부가 직접 나서 뎃포를 전력화(戰力化)한 사례이다.
 
  1544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는 다네가시마로부터 헌상받은 뎃포를 보고 즉각 뎃포 생산을 명한다(그의 아들 요시테루(義輝)가 명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내분과 하극상(下剋上)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략무기에 해당하는 뎃포의 존재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쇼군의 명을 받은 구니토모 젠베에(國友善兵衛)를 필두로 하는 구니토모의 대장장이들이 1544년 두 정의 복제품을 완성하여 쇼군에게 헌상한다(《구니토모철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으나 연도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쇼군의 명에 의해 최신 전략병기를 생산하는 구니토모는 최중요 전략시설이 된다. 가장 먼저 구니토모를 낚아챈 것은 뎃포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것을 직감한 오다 노부나가였다. 오다는 구니토모에 뎃포 주문을 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570년 아예 구니토모를 장악하고 소령(所領)으로 삼아 뎃포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이때 뎃포 생산을 관장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오다는 뎃포를 사용한 혁신적 전법으로 경쟁 다이묘들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전국 통일을 향한 기선을 잡았다. 오다의 휘하에 있던 도요토미 역시 뎃포의 생산과 사용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전문가였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어 덴카비토(天下人·전국을 통일하여 권력을 잡은 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구니토모를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핵심 기술자들에게 뎃포다이칸(鐵砲代官)이라는 공직을 부여하는 한편, 구니토모 이외의 무허가 뎃포 생산을 금하였다. 이에 따라 에도 막부 치하에서 구니토모는 실질적으로 뎃포의 생산과 관리를 독점하는 국가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전파’와 ‘전래’
 
  포르투갈에 의해 뎃포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1510년 고아를 접수한 포르투갈은 1515년 아르케부스(arquebus·일본에 전래된 화승총의 명칭) 생산을 위한 대규모 병기창(兵器廠)을 건립한다.
 
  포르투갈의 해외 제국은 지도·나침반·아르케부스로 유지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르케부스는 포르투갈이 동방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존재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아르케부스를 가득 싣고 다니다가 문명의 정도가 낮은 곳에서는 아르케부스를 사용해 약탈에 나서고, 문명의 정도가 높은 곳에서는 아르케부스를 상품으로 판매하였다. 해적과 상인의 구분은 그들에게 무의미하였다. 1525년 고아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동남아와 중국 각지에 아르케부스가 전파되었다. 지팡구 전설에서 비롯된 일본에 대한 환상이 포르투갈의 동진을 부추긴 중요한 동기였기에, 일본에 뎃포가 소개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상황이었다.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 뎃포가 언제 어떻게 일본에 전해졌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뎃포를 받아들인 일본의 대응방식이다. 일본의 학자들 중에는 유럽 세력의 진출에 대한 동아시아 각 지역의 대응을 개념화하면서 ‘전래(傳來)’와 ‘전파(傳播)’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전래’는 ‘외부의 문물이 도입되어 현지에 뿌리 내리고 내재화되는 현상’으로, ‘전파’는 ‘외부의 문물이 도입되어 널리 퍼지는 현상’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유럽의 아르케부스가 ‘전파’된 것은 남아시아와 중국이 먼저이지만, 능동적 대응을 통해 전파가 짧은 시간 안에 ‘전래’로 성격 전환이 이루어진 곳은 일본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지 불과 수년 만에 뎃포의 국산화와 연이은 대량 보급에 성공하고 그로 인해 전쟁의 양상과 국면이 완전히 달라지는 획기적 변화가 일본에서 있었음을 생각할 때 딱히 부정하기도 어려운 일본인들의 자화자찬이다.⊙
조회 : 11648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07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