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갑식의 주유천하 〈20〉 미륵의 도래(到來)를 기원한 도선국사와 장길산의 무대, 운주사

하루아침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이 솟구쳤다는 설화의 배경은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일주문-천왕문 같은 전통 양식 아닌 입구부터 미륵상이 도열
⊙ 현판 글씨 자체가 예술품, 뒷산은 신령스런 거북이 형상
⊙ 10각형 석조불감… 경주 석굴암과는 또 다른 양식
⊙ 대웅전 옆 나지막한 언덕엔 시위불… 그 위엔 부부 와불
⊙ 도선국사가 하룻밤에 사방 30리에 있는 돌로 천불천탑 쌓았다는 창건설화
⊙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도 등장
운주사 경내에 도열해 있는 석탑들이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뭔가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기법으로 지어졌다.
  《조선일보》에 ‘국운풍수’를 연재 중인 김두규 우석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국의 유명 사찰이 화제가 됐다.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가 풍광에서 으뜸이라면, 전라남도 화순(和順)의 운주사(雲住寺)는 기이함에 있어 따를 곳이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야말로 운주사는 이 땅의 사찰 가운데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절이라 하겠다.
 
  보통 사찰은 입구의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사천왕문(四天王門), 해탈문(解脫門)을 거쳐야 대웅전을 비롯한 가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운주사만은 다르다. 진입하는 방향으로 왼쪽에 19기의 크기도 표정도 다른 미륵상이 놓여 있고 앞으로는 9층 석탑과 석불 몇 기가 있는데 주변을 살펴보면 다시 놀라게 된다.
 
운주사의 일주문이다. 운주사라는 글씨 자체가 일품이다.
  자연석 밑으로 아무렇게나 놓인 것 같은 석불들이 눈여겨볼수록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구름이 머무른다’는 운주사의 일주문의 현판 글씨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운’자는 구름 운자인데 우리가 보통 보던 것과 다르고 절 뒤에 버티고 선 영귀산, 혹 영구산으로 읽는 산은 신령스런 거북이 형상이다.
 
  날이 추워서인지 고드름을 잔뜩 뒤집어쓴 석불부터 잘 찾기 힘든 위치에 놓인 석불까지 불상(佛像)의 천국이다. 한참 석불과 탑들을 구경하다 보면 석조불감이 보인다. 석조불감은 불상을 넣은 함 같은 것인데 자세히 보면 두 불상이 등을 맞대고 있다. 석조불감을 보면서 언뜻 연상되는 것은 경주의 석굴암(石窟庵)이다.
 
  살펴보면 운주사의 석조불감은 석굴암의 그것과는 정교함에서 무척 차이 난다. 다소 조잡해 보이지만 이런 양식은 여간해서 보기 힘들다. 석조불감 뒤로는 다각형이지만 원형처럼 보이는 탑이 나온다. 이름은 원형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10각형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석불과 석탑을 지나면 비로소 대웅전이 보인다.
 
운주사의 석불들은 민초(民草)들의 모습과 닮았다.
  운주사에는 건물 자체가 많지 않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돼 운주사가 폐사(廢寺)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운주사의 구경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웅전 쪽에서 바깥쪽을 봤을 때 오른쪽에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데 그 위로 올라가면 두 기의 석탑이 보이고 ‘시위불’, 즉 누군가를 지킨다는 미륵불이 보인다.
 
  그렇다면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부부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기의 와불(臥佛)이다. 길이 10m 가까운 와불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하늘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다. 와불 주변에서 보면 운주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데 운주사 대웅전 뒤편 언덕으로도 석불과 탑이 보인다. 이런 운주사는 언제 누가 세운 것일까.
 
  운주사를 창건한 분은 도선(道詵)국사(827~898)라고 한다. 도선은 우리 풍수사상의 대가이자 우리가 지금 보는 많은 사찰의 창건자이다. 전국을 다녀보면 사찰을 세운 분은 대개 도선, 자장율사, 의상대사 순이다. 전남 영암이 고향인 도선국사는 금씨였는데 15세에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했다.
 
  월유산은 충북 영동과 황간 사이에 있는 산을 말한다. 도선은 이후 동리산(棟裏山) 혜철(惠撤)대사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을 배운 그는 운봉산과 태백산에서 수도하다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자리 잡았다. 그의 도력이 전국적으로 소문나자 신라 헌강왕이 궁으로 모셨으나 도선은 거절했다.
 
  왕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고 다시 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도선은 사후에 더 명성을 떨쳤다. 효공왕은 그에게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고려 숙종은 대선사(大禪師), 왕사(王師)로 추증했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했다. 도선은 음양지리(陰陽地理)와 풍수상지(風水相地)에 능했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 태어날 것을 내다보고 왕건의 아버지에게 왕이 나올 집터를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도선비기(道詵秘記)》는 고려부터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용 전체가 실제로 도선이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도선비기니 도선의 제자를 사칭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일례로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절을 세우는 데 산수의 순역을 점쳐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도선이 남긴 비기의 내용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도선은 왜 운주사를 세운 것일까. 운주사 창건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터무니없는 전설만은 아니다.
 
고드름 속에 서 있는 석불(사진 맨 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석불(사진 가운데 왼쪽), 아기 석불과 어른 석불(사진 가운데 중앙),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석불(사진 가운데 오른쪽), 대웅전을 등에 지고 있는 석불 등 운주사의 석불은 모습이 제각각이다.
  조선시대 지어진 《조선사찰자료》라는 책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최완수가 지은 ‘명찰순례’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다.
 
  “우리나라 지형은 떠가는 배와 같으니 태백산, 금강산은 그 뱃머리요 월출산과 한라산은 그 배꼬리이다. 부안의 변산은 그 키이며 영남의 지리산은 그 삿대이고 능주의 운주는 그 뱃구레(船腹)이다.
 
  배가 물 위에 뜨려면 물건으로 그 뱃구레를 눌러주고 앞뒤에 키와 삿대가 있어 그 가는 것을 제어해야 배가 솟구쳐 엎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건립하여 그것을 진압하게 되었다.
 
  특히 운주사 아래로 서리서리 구부러져 내려와 솟구친 곳에 따로 천불천탑을 설치해 놓은 것은 그것으로 뱃구레를 채우려는 것이고 금강산과 월출산에 더욱 정성을 들여 절을 지은 것도 그것으로써 머리와 꼬리를 무겁게 하려는 것이었다.”
 
  과연 이 말대로 도선국사는 월출산 자락에 대흥사라는 명찰(名刹)을 지었으며 금강산에는 건봉사를 중창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자료를 하나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의 사찰을 만든 스님들의 순위에 관한 것이다. 도선국사는 모두 79개 사찰을 창건했고 17개 사찰을 중창했다고 한다.
 
  아도화상은 17개 사찰, 원효대사는 87개 사찰, 의상대사는 84개 사찰, 지공선사는 12개 사찰, 나옹 혜근화상은 56개 사찰, 태고보우화상은 11개 사찰, 무학자초대사는 73개 가찰, 청허 휴정대사는 19개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도선국사는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단 하룻밤 사이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이것은 아마 도선국사의 도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후세 사람들이 만든 설이 아닐까 싶은데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일보》 문화부 이한수 차장의 말이다.
 
  “몇 년 전 한 학자와 함께 운주사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가 그러더군요. 운주사는 ‘불상 만드는 공장과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그 역시 추측에 불과하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었습니다.”
 
  천여 개의 불상과 탑을 보면 그런 상상도 가능하다 싶다. 그 학자가 이런 추측을 한 것은 사찰 내의 석불 및 석탑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조각기법이 투박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곳의 암석 재질은 석불, 석탑을 만들기에 부적합하고 전문가의 솜씨는 더더욱 아니다.
 
사각형의 석탑과 원형 석탑이 투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앞서의 창건설화 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첫째, 도선국사가 당나라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지세를 살피니 이곳 운주사 땅이 여자의 음부(陰部) 형국으로, 장차 임금이 나올 군왕지(君王地)여서 그 혈을 끊기로 했다는 거다. 이에 도선은 명당을 누르는 탑을 세우고 도술을 부려서 근처 30리 안팎에 있는 돌들을 불러모아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언덕 꼭대기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부부 와불과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다.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고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이 난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이 울었다고 해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착안해 장편소설을 쓴 작가가 있다. 〈장길산〉을 쓴 황석영이다. 그의 소설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영조 3년 변산반도와 월출산을 근거로 난을 일으킨 유민(流民)들이 6년 뒤 전라도 진도-나주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노비들과 합류하는 것으로 나온다. 관군에게 패해 달아나던 그들은 능주 땅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오며 노비와 천민이 양반 대신 나라의 중심이 되는 개벽천지 새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게 된다.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세우자!” 이 절절한 외침에 따라 전국에서 몰려온 천민과 백정들은 혹은 보리밭 밭고랑에 돌을 눕혀놓고 새기기도 하고 혹은 산비탈에서 쪼기도 하고 혹은 암벽 중간에 매달려서 정과 망치를 두드렸다.
 
언덕 중턱에 있는 시위불에서 내려다본 운주사의 전경이다.
  소설에는 운주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나온다. 운주사(運舟寺), 즉 배는 천민들의 세상이요, 그 배를 움직이는 물은 자신들과 같은 천민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중생이 물이 되어 고이면 배가 떠서 나아가게 되는 게야.”
 
  천민들은 미륵을 본 적이 없기에 제각각 모습이 달랐다. 이렇게 해서 구백구십구 개의 미륵상과 탑을 세우고 마지막 미륵만이 남았는데 그 미륵의 재료가 산꼭대기에 있는 집채보다 더 큰 바위였다. 그들은 미륵을 처박힌 형상으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세상 밑바닥에 처박힌 것처럼 마지막 미륵도 위쪽으로는 다리가, 아래쪽에는 머리가 있는 상족하수(上足下首)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실제로 운주사의 와불은 머리가 낮은 쪽에 있고 다리가 높은 쪽에 있다. 마지막 미륵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는데 고단함을 이기지 못한 한 천민이 거짓말로 외쳤다. “닭이 울었다!”, 즉 하룻밤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미륵을 지탱하는 사람들은 실망해 주저앉았고 와불은 비탈에 처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가 황석영의 상상력은 ‘한국의 3대 구라’라는 그의 별호처럼 그럴듯하다. 장길산은 조선 숙종대의 도적으로 홍길동-임꺽정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길산과 관련된 기록이 두 번 등장한다. 1692년 평안도 양덕현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고을 현감을 좌천시켰다는 것이다.
 
대웅전에서 입구 쪽을 바라보면 미륵석불과 탑이 혼재돼 있다.
  두 번째는 1697년 이익화, 장영우 등이 반역을 꾀했는데 이들이 장길산과 연루돼 있다는 것이다. 이때 숙종이 하교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장길산을 체포하지 못했다는 한탄인데 이 부분에 착안해 황석영이 장길산을 운주사로 보낸 것 같다.
 
  “국적(國敵)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가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학자들은 지금의 운주사 주차장 인근 절터에서 나온 유물들을 토대로 운주사의 건립 연대를 고려 초기인 11~12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 운주사에는 천불천탑은 석탑 21기, 석불 93구가 남아 있지만 그 역시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천불천탑은 거짓일까.
 
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에 누워 있는 부부 와불이다.
  16세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천불산은 능성현 서쪽 25리 지경에 있다. 운주사는 천불산 속에 있는데 절의 좌우 쪽 허리에 석불과 석탑이 각기 1000개씩 있으며 석실(石室)이 있어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앉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곳에 천불천탑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1632년 간행된 《능주목지》와 1923년 간행된 《나주읍지》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슷한 기록이 실려 있으니 천불천탑은 일제시대 훼손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는 것이 운주사의 명칭이다. 운주사는 구름 운(雲) 머물 주(住)를 쓰는데 앞서 소설 〈장길산〉에 나오듯이 갈 운(運) 배 주(舟)로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1984년 전남대 박물관팀의 발굴조사 때 ‘운주사 환은천조(雲住寺 丸恩天造), 홍치팔년(弘治八年)’이라는 기와가 나왔다. 이로 미루어 배를 운전한다는 의미의 운주사(運舟寺)는 후대에 누군가 만들어낸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홍치팔년(弘治八年)은 1495년으로 연산군 1년을 뜻한다.
 
  그런데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운주 화상이 거북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거나 ‘마고 할미가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이곳이 미륵신앙의 중심지였다는 분석도 가능하게 한다. 미륵신앙은 혁명을 바라는 천민과 노비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그러기에 운주사가 불교 사찰이라기보다는 신분 해방 운동의 신앙처였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운주사에 있는 7층 석탑 하나를 세우려면 지금의 가격으로 4000만원 정도가 드는데 이런 돈을 낼 재력이 없다면 미륵신앙 결사조직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도저히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석불과 석탑 때문에 대웅전이 오히려 관심을 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이들은 운주사를 밀교세력이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운주사의 수막새기와에서 범자문(梵字文)이 발견됐는데 해독하니 ‘옴마니밧메훔’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밀교에서 지혜와 복을 바라며 외우는 주문(呪文)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석조불감 속에 있는 좌상도 남북을 바라보며 등을 맞대고 있어 밀교적 성격의 음양불이라 할 수 있고 많은 불상의 수인이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을 도식화한 것이라는데 불교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다. 운주사는 기존의 사찰과 다른 파격적인 가람 배치와 석탑-석불 때문인지 별의별 해석이 다 나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담양 성담 천문대장 출신인 박종철씨가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새롭게 밝혀지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이란 책을 통해 “운주사의 석탑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땅에 구현해 놓은 하나의 천문도”라고 주장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와불 밑에 놓인 북두칠성(北斗七星) 모양의 칠성바위였다. 그에 따르면 운주사 전체에 배치된 석탑과 불상은 그냥 놓아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체를 본뜬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칠성바위는 자연석이라기보다 누군가 가공해 놓은 바위처럼 생겨 칠성바위라고 부르기는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절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주지들이 불사(佛事)공양을 한다며 절의 옛 맛을 훼손시키기도 한다. 다행히도 운주사의 옛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에 운주사의 30년 전 모습이 등장한다. 한승원 원작, 임권택 감독, 강수연 주연의 영화에 등장하는 운주사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가며 감상해 볼 만하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4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최유정    (2017-12-09)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한국의 유명 사찰과 풍수지리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민상    (2017-12-08)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직접 운주사에 답사를 다녀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정보 전달을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장혜린    (2017-12-06)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이 기사를 읽고 국운풍수책을 참고해 한국사찰에도 풍수가 존재한다는 새로운 사실 알고갑니다!
  김태진    (2017-12-06)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한국의 유명 사찰들에 풍수를 고려하였다는 사실과 지식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2017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