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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 뉘우스

무성영화 시대 영화인들

“나운규, 〈아리랑〉과 같은 명편(名篇)을 제작, 조선영화 인기 독점”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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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 심훈의 〈조선영화계의 언퍼레이드〉… 초창기 영화인 모습 그려
⊙ “미남형보다는 윤봉춘(尹逢春) 타입의 출연자가 금후 필요해”
⊙ “여우 김연실(金蓮實), 각선미 없는 모던 걸. 독신으로 흠모의 적(的)”
⊙ “신일선(申一仙), 그만큼 깨끗이 생긴 여우가 없어 인기가 경기구(輕氣球)처럼 올라가”
영화는 일제 강점기 한국인과 희로애락을 같이했다.
사진은 한국영화인협회가 정한 ‘영화의 날’의 서울 극장가 모습.
  20세기 영화는 그야말로 근대화의 산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개의 극장이 일본인 소유였고 영화자본, 필름, 촬영장비, 배우들마저 열악·부족한 상태에서 민족영화 제작을 위해 “레디고(ready go)!”를 외쳤다.
 
  소설 《상록수》의 심훈(沈熏·1901~ 1936) 선생이 쓴 〈조선영화계의 언퍼레이드〉는 한국영화의 초창기 시절, 땀과 눈물을 흘렸던 영화인들의 발자취다. 1931년 《동광》 7월호에 게재됐다. 심훈 역시 소설가와 기자가 아닌 영화감독과 배우, 시나리오 작가로 한국영화사에 이름을 올렸다. 1925년 이경손(李慶孫)이 감독한 〈장한몽〉의 주인공 주삼손(朱三孫)이 사라지자 대역으로 영화 후반부에 출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다 사망했다.
 
  참담한 영화계였으나 그곳에 희로애락이 있었고 민족의 애환이 있었다. ‘마돈나’ 신일선(申一仙)과 김일송(金一松)과 김정숙(金靜淑)이 있어 흑백화면이 밝게 빛났고, 나운규(羅雲奎)와 나웅(羅雄), 윤봉춘(尹逢春)이 있어 늠름한 기상이 드러났다. 그러나 당대 무성영화 필름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몇몇 스틸 컷 사진만 전해진다.
 
  한국 최초의 영화는 1919년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로 인정되고 있다. 완전한 무성영화는 4년 뒤인 1923년작인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다. 이후 〈춘양전〉(무성), 〈장화홍련전〉, 〈비악(悲惡)의 곡〉, 〈개척자〉, 〈멍텅구리〉를 거쳐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통해 무성영화는 절정을 이루었다.
 
  원문을 살리되 현대 표준어에 맞게 고쳤다. 사진자료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www.kmdb.or.kr/)’의 도움을 받았다.
 

  조선영화인 언파레드
  심훈(沈熏)
 
소설가 심훈이 쓴 1931년 《동광》 7월호에 실린 〈조연영화인 언파레드〉. 언파레드는 ‘온 퍼레이드(on parade)’라는 의미로, 연극공연 후 관객의 커튼 콜에 배우들이 한줄로 도열한다는 뜻이다.
  영화인보다는 그 역사가 오랜 점으로 보더라도 연극인부터 써야 옳겠으나 필자의 형편으로 우선 가까운 영화인을 위시하야 평전도 아니요 ‘가십’도 아닌 인명행진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끄적여 보려 한다.
 
  인물평이란 본시 자칫하면 오해받기 쉬운 노릇이지만 더구나 만평 비슷하게 되면 당자에 대하야 적지 않은 실례다. 그러라고 ‘정(正)’자를 달아가며 똑바른 평을 하자니 필자의 책임이 과중하다. 그러므로 각 개인에게 일일이 예를 갖춰 정중히 또는 정확히 쓰기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아래에 나열해 보려는 영화인 여러분에게 평소에 홍모(鴻毛·기러기 털처럼 극히 가벼움을 의미한다-편집자 주)만한 사감도 없으려니와 따라서 인격을 중상하려는 악의는 물론 없다. 그러나 철필 끝이란 원체 뾰족한 것이라 종이 위를 달리다가는 따끔하게 찌를지도 모르겠고 탈선을 하면 충고 비슷한 언구(言句)가 튀어들어 갈는지 그 역 예측키 어렵다. 찔려 아픈 사람은 모름지기 반항할 일이요, 아니꼬운 충고를 받은 분은 마땅히 “예끼 건방진 놈!” 하고 칭할 일이다.
 
  어쨌든 선구적(先驅的) 영화예술가로서 시대의 첨단을 걷는다느니보담 빈궁과 질곡의 첨단을 걷고 있는 우리 조선의 영화인인지라 한 동지의 촌철쯤으로는 과히 노염을 타지 않을 만한 아량이 있을 것만 믿고 비교적 솔직한 의견을 토막을 쳐서 적어 보려는 것이다.
 
 
  총 지휘자
 
  윤백남(尹白南)
 
   원각사 시대에 문수성좌를 조직한 극계의 선각자의 일인으로 이래(爾來·아주 가까운 때-편집자) 민중극단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백남(白南)프로덕션 - 최근의 선전영화 〈정의는 이긴다〉를 제작하기까지 수십년래(來) 극계, 영화계의 허다한 풍파를 겪으며 적지 않은 제자를 양성하고 음으로 양으로 이원(梨園)을 가꾸어 온 분이다. 조선서 맨 처음으로 작품의 형태로 제작된 체신국 선전영화 〈월하의 맹서〉(李月華 주연)가 씨의 작품이요 개인의 이름으로 프로덕션을 일으킨 것도 씨로서 효시다. 〈심청전〉, 〈개척자〉가 그때의 소산이었으니 생각하면 벌써 아득한 옛날이다.
 
  씨는 일본의 고상(高商) 출신으로 명철한 두뇌의 주인공이라 이재치산(理財治産)에도 밝을 듯하나 어디까지 재자(才子)형이요 다감한 성격이 주반(珠盤)질만 하고 늙지를 못하게 한 것이다.
 
  그는 무대연출이나 촬영감독 같은 실제적 활동보다는 극작가나 ‘시나리오 라이터’가 적재(適材)일 듯하다. 청빈한 그는 생활의 방편으로 야담방송을 시작한 것이 어느덧 전 조선을 다리에 걸치고 입심을 부리며 다니는 야담대가가 되고 필료(筆料)를 견양하고 붓을 들다가 슬그머니 대중소설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씨의 본도(本道)가 아니다. 기회가 손아귀에 잡히기만 하면 소지(素志)를 관철하고야 말 결심을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씨의 권토중래적 활동을 기대하거니와 씨는 보리밭도 못 지나가는 불주당(不酒黨)이면서 양주정(佯酒酊)의 명인이라 하고 좌담(坐談)은 입당(入堂)한 것이라 막론하고라도 일본의 낙어(落語)나 〈낭화절(浪花節)〉 같은 소리는 일인(日人)도 명함을 못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연치(年齒)가 이미 불혹을 혹 넘은지라 여간한 자리에서는 그 은재(隱才)의 주머니 끈을 끄르지 않는다 한다.
 
 
  조일재(趙一齋)
 
  지나간 그 옛날 매신(每申)의 기자로 〈금색야차(金色夜又)〉를 개작하야 〈장한몽(長恨夢)〉으로 이름을 날리고 윤백남씨 등과 같이 원각사 무대에서 〈불여귀(不如歸)〉의 중장(中將)으로 분장하야 환도(環刀)바람에 연극감기가 들기 시작한 이후 계림영화협회를 창립하고 〈장한몽〉, 〈산채왕(山菜王)〉, 〈먼동이 틀 때〉 등 수다(數多)한 작품을 제공하였다. 자본주도 아니요 실지로 메가폰을 잡은 것도 아니나 배후에서 모든 일을 주비(籌備)한 총지휘자였다. 신장이 6척이요 성격이 관후하기 대국 사람 같아서 발등 우에 벼락 불똥이 떨어져도 왼눈 하나 깜작거리지 않는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있고 따라서 무슨 일이든지 한번 붙잡으면 끈기 있게 잡아 늘리는 힘이 대단하다. ‘계림’이 경영상 실패를 거듭하는 중 씨 홀로 빈 간판을 수호신과 같이 지키고 오기 수 3년에 이르렀었다. 그는 영화가 전업적(專業的)으로 유망하고 사회적으로 끽긴(喫緊·매우 중요-편집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이해하면서 예술적으로 영화에 대하여서는 문외한과 같이 무심하다. 어쨌든 과거에 있어서 사계(斯界)를 위하야 많은 고생과 아울러 적지 않은 공로가 있는 분이다. 두주(斗酒)를 오히려 사양해 본 적이 없는 대음가(大飮家)로 가끔 바지 속에서 박연폭포가 흘러내려도 태연자약히 잔을 기울인다고 -.
 
 
  박정현(朴晶鉉)
  (생략-편집자)
 
 
  촬영감독
 
  이경손(李慶孫)
 
   부산의 조선키네마회사에서 윤백남씨의 조감독 노릇을 한 것을 필두로 〈심청전〉, 〈개척자〉, 〈장한몽〉, 〈산채왕〉, 〈봉황의 면류관〉, 〈숙영낭자전〉, 최근 상하이에서 제작한 〈양자강〉 등 허다한 작품을 감독한 촬영감독으로서 고참이요 또한 선배다. 그의 작품이 모조리 걸작이라고 찬사를 올릴 수는 없으나 영화의 처녀지를 개척하느라고 갖은 고난을 겪어온 사계의 공로자로서 그의 이름이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신(新)감각파적인 그의 성격은 조합지중(鳥合之衆)을 통어(統御)할 만한 포용성과 통제력이 적다. 그러므로 실제 사무가로 제1선에 서기에는 적재가 아닌 감이 없지 않다. 그를 대할 때마다 채플린을 연상시킨다. 기선의 보이, 전도사, 교원, 순회배우… 등 기구한 그의 반생(半生)을 보아도 그렇거니와 단구수신(短軀瘦身·키가 작고 몸이 여위었다는 의미-편집자)의 풍봉(風丰·살찌고 아름다운 용모-편집자)을 쫓아 채플린과 방사(倣似)하다. 고독한 그는 또다시 유랑의 길을 떠났다. 〈양자강〉 1편은 그가 몽침(夢寢) 간에도 잊지 못하는 고국의 동지들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장래의 촉망이 크거니와 그가 중요작가로서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한 것은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구영(李龜永)
 
   단성사 선전부에서 늙어 가느니만큼 외국영화통이요 소개자요 또 〈쌍옥류(雙玉淚)〉 시대 이래 근자에 〈승방비곡(僧房悲曲)〉, 최근에 〈수일(守一)과 순애(順愛)〉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작품에 배후에서 ‘메가폰’을 들고 ‘레디 잇!’을 부른 사람이다. 본격적으로 감독을 하는 것보다는 대개는 합의제로 일을 해 온 것이나 영화에 관한 평론도 적지 않았다.
 
 
  안종화(安鍾和)
 
   신파(新派)연극 전성시대에 김소량(金小浪) 일파(一派)에 가담하야 여역(女役)을 맡아온 무대경험도 있고 부산 조(朝)키네 제1회 작품 〈해(海)의 비곡(秘曲)〉에 주연을 하였던 것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윤백남씨의 제자로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조직하야 그 중추분자가 되었고 〈가화상(假花商)〉과 〈노래하는 시절〉을 감독하였다. 노력한 데 비하여서는 감독 수법에 있어서 아직 볼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유감이다. 방금 촬영 중인 ‘싸구려’ 전사(傳士)를 고대한다.
 
 
  김유영(金幽影) 김영환(金永煥)
  (생략-편집자)
 
 
  시나리오 작가
 
  안석영(安夕影)
 
   조선에는 아직 전문으로 시나리오만 쓰는 사람이 없으나 씨는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에 가담하야 〈화륜(火輪)〉의 일부와 〈노래하는 시절〉, 〈출발〉 그리고 현재는 영화소설 〈인간궤도〉를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있다. 신문기자로, 편집자로, 삽화로, 만화로, 소설로, 시로, 시나리오로 그는 실로 좌불안석의 다각적 활동가요 정력인이다. 재주덩어리인 씨는 참신한 감각과 날카로운 신경이 움직이는 대로 토운생용(吐雲生龍·구름을 토해내는 살아있는 용-편집자)의 기세를 보인다. 성격상 한 가지 일을 고집하지 못하고 주위가 또한 화필만 붙잡고 앉지 못하게 하는 사정을 양해치 못함은 아니다. 그러나 재화(才華)와 정력을 뜯어 벌려서 남비(濫費)하지 말고 외골수로 집중시키면 어떠한 걸작이 나올는지 모를 것이다. 새로운 의식의 파지자(把持者)요 문무(?)를 쌍전(雙全)한 그의 장래야말로 바라는 배 크다. 씨여 모름지기 한 길을 뚫고 파 나아가라.
 
 
  서광제(徐光齊)
 
   프롤레타리아 영화이론과 작품평을 많이 써 왔다. 그리고 〈화륜〉 일부와 〈버스 걸〉 등 시나리오도 발표하였다. 아직까지 정면의 활동이 없으나 혈기가 괄하야 사상과 행동이 불온하다고 일껏 맡아 두었던 자동차 운전수 면허장까지 빼앗겼다고 두덜두덜. (이 밖에 몇 분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사정상 할애한다.)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 이명우(李明雨)
  손용진(孫勇進) 한창섭(韓昌燮)
  민우양(閔又洋)

  (생략-편집자)
 
 
  남(男)배우
 
  나운규(羅雲奎)
 
   조선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한 몸으로 원(原), 각(脚), 감(監), 자(自)주연하고 그중에도 〈아리랑〉과 같은 명편(名篇)을 제작하야 전 조선영화 팬의 인기를 독점하던 사계의 총아다. 지금 새삼스레 장황하게 그를 소개할 필요와 지면이 아울러 없거니와 그가 밟아온 족적은 과연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냉정히 따져 볼 것 같으면 공죄(功罪)가 상등하다. 〈따그러쓰〉나 〈탈매지〉의 활극을 흉내 내어 일반 관중의 저급흥미를 교묘히 이용하야 뛰고 달리고 숨바꼭질하는 것으로 우선 속중(俗衆)의 갈채를 받았다. 기지(奇智)종횡하야 한 작품을 손쉽게 얽어서 꾸그려(구부려?-편집자) 놓는 데 능하고 장기가 있으나 그 내용인즉 천편일률 소영웅주의로 일관하였다. 규모는 크게 잡으나 표현이 거칠고 그의 액션, 내지 독특한 ‘유모’까지도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었다. 험상스러운 그의 용모와 5척 남짓한 왜구(倭軀)가 처음부터 미친 사람이나 불구자 이외에는 적역(適役)이 없는 특수배우에 불과하다고 본다. 〈아리랑〉 전편과 〈벙어리 삼룡〉이가 그중의 백미인 까닭이다. 그가 그만한 인기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 그 원인을 캐어 보면 무슨 시국에 대한 대지(大志)나 품은 듯한 룸펜의 서커스적 활약과 명인이불명(鳴咽而不鳴·낯빛은 엄하지만 마음은 부드럽다는 의미-편집자)하는 곳에 어떠한 사상의 암시가 숨은 듯이 심각침통(深刻沈痛)을 가장한 일종 흥행가치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 말에 불평이 있다면 과거의 수십개나 되는 작품을 통하야 그 내용에 있어서 일관되는 어떠한 주의와 사상의 조류가 흐르고 있었던가를 스스로 반성, 검토해 볼 일이다.
 
  뜀박질 잘하던 기린아는 지금 언덕비탈을 거꾸로 달리고 있다. 일본 국수회(國粹會)의 지회장이 돈을 대는 〈금강람(金剛嵐)〉에 검극(劍劇)배우 원산만(遠山滿)이와 공연하야 나운규의 ‘나(羅)’자가 떨어지고 ‘미나도좌’(일제시대 서울 종로에 있던 극장-편집자)로 배구자(裵龜子) 일행을 따라다녀서 ‘운(雲)’자까지 잃어버렸다는 말이 들리게까지 된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일반에게 배우들이 가장 천대를 받는 제1조건인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사계의 거두로서 마땅히 삼가야 할 바가 있지 않을까? 나군이어 군에게 케케묵은 문자 하나를 바친다.
 
  ‘천인비봉(千仞飛鳳)이여든 기불탁속(饑不啄粟)하라.’(봉황은 천 길을 날며 주려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는 의미-편집자)
 
 
  나웅(羅雄)
 
   요절한 소설가 나빈(羅彬·나도향-편집자)씨의 조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그는 아무래도 얌전한 문인 같은 인상을 준다. 〈약혼〉에서 깨끗한 연기를 보였고 〈젊은이의 노래〉에도 주연하였다. 최근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에는 적역(適役)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본다. 출연보다는 시나리오를 썼으면 한다.
 
 
  이경선(李慶善)
 
   〈메일, 뱀파이어〉(색적역·索敵役)로 단벌이다. 그의 연기는 직세(織細)하고 경쾌하야 간드러진 품이 ‘아돌프 멘주’(Adolphe Menjou·미국 영화배우-편집자)를 사숙(私淑)한 보람이 있다. 몸을 자유로 움직여야만 독특한 기예를 발휘할 터인데 스테이지가 없다. 상체의 스타일이 어색한 듯하니 주의할 일.
 
 
  임화(林和)
 
   카프의 맹원(盟員). 이론과 비평이 앞선다. 자신이 출연한 〈유랑〉, 〈혼가(昏街)〉는 들어서 재론할 그 무엇이 하나도 없다. 〈지하촌〉을 기대하였으나 역시 페이드아웃(fade out·화면과 음향이 점점 사라지다-편집자). 젊은 막스 보이라면 군의 자존심이 펄펄 뛸 일, 타인의 포폄으로 일을 삼든 과거를 거울삼아 자아의 동향에 당목(瞠目·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봄-편집자)하기 바란다.
 
 
  윤봉춘(尹逢春)
 
   조선키네마 이후 나운규군과 같이 여러 작품에 출연하였고 그 후의 활동은 매거(枚擧·낱낱이 들어 말함-편집자)키 어렵다. 견인심중(堅忍沈重)한 그의 성격은 스크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승방비곡(僧房悲曲)〉 중 살수차를 땀을 흘리며 끌고 가는 몇 커트를 보아도 특히 프롤레타리아 영화에 틀이 꽉 들어맞아 실감을 주는 배우다. 그 리얼한 점이 그의 생명이다. 더구나 도시 노동자로는 앉았다가 그대로 렌즈 앞에 나서면 고만일 것이다. 재래(在來)의 미남형보다는 윤군과 같은 타입의 출연자가 금후로는 더욱 필요할 것이다.
 
 
  강홍식(姜弘植) 남궁운(南宮雲)
  이규설(李圭卨) 이원용(李源鎔)
  임운학(林雲鶴) 이금용(李錦龍)
  박제행(朴齊行) 서월영(徐月影)
  석일양(石一良) 손효웅(孫孝雄)
  주인규(朱仁圭) 정기탁(鄭起鐸)
  전창근(全昌根) 주삼손(朱三孫)
  홍개명(洪開明) 함춘하(咸春霞)

  (생략-편집자)
 
 
  여배우
 
  김정숙(金靜淑)
 
  눌변이라 무대에는 서지 못하고 영화 전문의 여우(女優)로 고참이요 제일 많이 출연하였으니 〈장한몽〉부터 치더라도 〈화륜〉에 이르기까지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없을 만치 나오고 또 나왔다. 독특한 연기가 있는 것보다는 여배우가 귀한 조선 영화계의 특수사정이 여기저기 출연하게 된 ‘찬스’를 지은 것이라고 함이 정직한 말일 것이다. 성애(性愛)관계로도 파란이 중첩하였던 모양. 지금은 나웅군과 동서(同捿) 중이라 한다.
 
 
  김연실(金蓮實)
 
   신일선(申一仙)이가 일골(一汨·사라지다-편집자)한 뒤로는 김연실의 독단장(獨壇場)인 감이 없지 않을 만큼 새 작품은 거의 다 도맡아 놓고 출연하였다. 그 역시 이렇다 할 만한 독특한 장기가 없다. 평평(平平) 범범(凡凡)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설 뿐 곡선, 더구나 각선미가 없는 것은 모던 걸로서 아까운 일이다. 무대극으로도 상당한 지위를 점령하고 있다. 아직도 독신으로 그야말로 만도(滿都·온 도시-편집자) 애활가(愛活家)의 흠모의 적(的)이 되어 있다고.
 
 
  김일송(金一松)
 
  정기탁군과 같이 〈춘희〉에 출연한 뒤에 동군(同君)과 손을 잡고 상하이로 가서 그와 결혼까지 하고 여러 중국영화에 출연하야 지금도 인기가 남았다 한다. 영화인의 생활이란 전변무쌍(轉變無雙)하야 지금은 정군과도 이별하고 서울 와 있다고. 매우 소질이 있던 사람이다. 부활할 생각은 없는가?
 
 
  김보신(金寶信)
 
   고(故) 왕덕성(王德星)씨의 아내로 그의 작품 〈회심곡(悔心曲)〉에 최후로 출연하였다가 대구(大邱)서 일을 꾸미던 중 왕씨의 거세(去世)로 실의낙담(失意落膽)하야 눈물로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다고.
 
 
 
 
  이월화(李月華)
 
   토월회의 명여우로 아득한 옛날에는 윤백남씨의 〈월하의 맹서〉를 비롯하야 〈해의 비곡〉 이래 극단까지 조직하였던 여걸(?), 지금은 상하이 어느 카페에서 댄서로 뚱뚱한 몸이 아주 절구통같이 비대해졌다는 소식을 전한다.
 
 
 
 
  복혜숙(卜惠淑)
 
   토월회 배우로 상당히 노숙한 기예를 가지고 무대의 여왕 노릇을 하였다. 음주무량(飮酒無量)하시되 필급란(必及亂)이요 현하(懸河)의 웅변이 여간 사내는 그의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시불리혜(時不利兮)하야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방금 인천(仁川)서 기생영업을 한다고.
 
  그의 주연한 작품은 〈농중조(籠中鳥)〉, 〈낙화유수(落花流水)〉, 〈세 동무〉 등.
 
 
  신일선(申一仙)
 
   영화 여배우 중 가장 미모를 자랑하고 팬은 막론하고 조선적(朝鮮的)으로 떠들어대던 여자니 새삼스레 첩첩(喋喋)할 흥미가 없다. 솔직히 말한다면 얼굴의 윤곽은 선명하나 밑 동자(童子)와 같이 무표정이요 연기를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나이가 28이요 그만큼 깨끗이 생긴 여우가 없었던 까닭에 소위 인기라는 것이 경기구(輕氣球)같이 올라갔던 것에 불외(不外)하다. 〈먼동이 틀 때〉를 마지막으로 출연하고 능주(陵州) 청년 부호였던 양모(梁某)의 제2 부인으로 벌써 사랑의 결정을 둘이나 안은 신세가 되었다 한다. 이미 과거의 사람이요 소생(甦生)도 여망이 없으나 빼어 놓을 수 없기에 두어 줄 여백을 채운다.
 
 
  전옥(全玉) 하소양(河小楊)
  유신방(柳新芳) 조경희(趙敬姬)
  김명순(金明淳)

  (생략-편집자)
 
  (출처=1931년 《동광》 7월호. p.5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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