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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14〉 에도 지식인의 초상 ‐ 오규 소라이

글 : 신상목  (주)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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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시대 거치며 승려의 지식 독점 마감, 실용주의 확산
⊙ 오규 소라이,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며 주자학 비판
⊙ 오규 소라이 이후 직접 공자 시대의 고전을 탐구하는 학풍 수립, 메이지 유신의 기반이 됨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일본의 마키아벨리’ 오규 소라이.
  유럽 근대화를 촉발한 종교 개혁의 본질은 지식 혁명이다. 마르틴 루터의 성경 번역은 교회의 지식 독점을 해체하고 지식을 민중에게 돌리려 한 시도였다. 유럽의 근대화 과정은 교회의 지식 독점이 해체되면서 민중이 종교적 권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치와 경제가 세속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유럽과 같은 드라마틱한 종교 개혁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교 개혁의 본질에 해당하는 과정이 근세기에 존재하였다. 형태만 다를 뿐 원리는 유사한 근대화의 궤적이다.
 
  일본이 국가 체계를 갖춘 이래 지식을 독점한 것은 승려들이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학문의 속성을 갖고 있다. 중국에 유학을 갔다온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권위를 얻었다. 유학(儒學)도 승려들이 경전을 반입하여 해석하고 전파하였다. 승려들은 세속 세력에 대한 지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사(國師), 즉 나라의 스승으로 모셔졌다. 승려들은 오랫동안 지식의 정점이었고, 교육의 중심이었다.
 
  승려의 지식 독점은 비슷한 시기 고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해체 과정이다. 조선에서는 사대부가 등장하여 불교의 지식 독점을 해체했다.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해체의 주역이 되었다. 오직 실력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였던 전국(戰國)시대를 맞아 기존의 권위는 의심되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지식과 정보가 중시되었다.
 
  가장 먼저 천하통일에 근접하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뜻을 거스르는 불교 집단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척결하였다.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교세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거주지를 제한하며 통제를 강화하였다. 억불 정책은 에도 막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승려들의 지적 권위는 무너졌고 정치는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화하였다.
 
  이 지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지식 생태계가 분기(分岐)한다. 조선의 사대부는 본질적으로 지식인 집단으로, 불교의 지식 독점을 해체한 이후 스스로 지식을 독점하였다. 반면 일본의 무가는 스스로 지식을 독점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집권과 통치에 도움이 된다면 다양한 소스(source)의 지식을 취사선택하는 실용적·실리적 접근을 취하였다.
 
 
  일본 주자학의 토대 닦은 하야시 라잔
 
일본 주자학의 토대를 닦은 하야시 라잔.
  에도 막부가 집권 후 정권 차원에서 통치철학으로 채택한 것은 유학, 그중에서도 주자학이다. 그 토대를 닦은 것이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1583년 교토에서 낭인(浪人·주군이 없는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하야시는 유소년 시절 교토의 건인사(建仁寺)에 위탁되어 불교를 공부한다.
 
  사원이 소장한 방대한 서적을 탐닉하던 하야시는 불경보다 유학의 경전에 흥미를 느끼고 주자학 공부에 천착한다. 당대 유학의 권위자이자 스승이었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천거로 이에야스의 상담역이 된 그는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3대 이에미츠에 걸쳐 쇼군의 스승으로서 막부가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공고한 신분제, 예(禮)에 바탕한 사회 질서, 충과 효의 강조 등 막부에 시급하였던 통치 안정화의 이론적, 사상적 토대를 하야시가 완성해 주었다. 막부의 하야시 등용으로 주자학은 막부의 관학(官學)이 되었고 주자학은 무가(武家)의 필수 지식이 되었다.
 
  주자학이 관학이 되기는 하였지만 무(無)비판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야시의 주자학은 조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론(理氣論)을 신봉하였고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배척하였다. 전술(前述)한 대로 일본의 무가적 전통은 지식의 교조화(敎條化)보다 실용적·실리적 융통성을 선호한다. 하야시의 도덕론, 관념론에 치우친 주자학 절대화 학풍은 곧 비판에 직면한다.
 
 
  오규 소라이의 주자학 비판
 
오규 소라이를 중용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그 선봉에 선 것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였다. 오규는 1666년 에도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좌천으로 모친의 고향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독학으로 불교, 유학의 경전과 고전을 탐독하면서 지식의 기반을 쌓는다.
 
  부친의 복권(復權)으로 에도에 복귀하였을 즈음에 극심한 생활고로 저잣거리의 인정과 비정(非情)을 두루 경험한 그는 학문은 민중의 삶에 기여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오규는 후에 학식을 인정받아 관직에 오르고 8대 쇼군 요시무네에게 정치적 자문을 하면서 이러한 신념을 정치에 투영하려 하였다.
 
  오규가 에도 지식사(知識史)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정치적 실적보다는 그의 개혁적 사상에 있다. 당시 일본은 막부 창업 이래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내부적 모순과 갈등이 노정되고 있었다. 직전 20년간 아라이 시라이시(新井白石)가 주자학에 기초하여 주도한 정덕의 치(正德の治) 개혁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고 도시와 농촌 모두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쇼군 요시무네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취임과 동시에 사회 분위기 일신과 제도 개혁을 모색한다. 에도시대 3대 개혁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향보의 개혁(享保の改革)’이다. 오규는 이러한 시대상 속에서 개혁 정책에 자신의 뜻을 반영코자 하였던 것이다.
 
  오규는 당시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인정(人情)에 이끌리지 않는 규율과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정치 철학을 설파하였다. 어찌 보면 유가보다는 법가에 가까운 법치 중시의 사상이었다. 오규는 주자학이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기론(理氣論)이라는 틀에 세상을 끼워 맞추려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모순을 안고 있는 주자학으로는 세상을 개혁할 수 없으며 보다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기성관념을 혁파하여 ‘안천하(安天下)’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정도(正道)라고 강조하였다.
 
 
  일본의 마키아벨리
 
  그는 주자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중국어, 특히 고어(古語)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여 유학의 경전을 주자의 해석이 아닌 원전을 통해 직접 해석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중용(中庸)》을 받아들임에 있어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의존하지 않고 체계적인 방법론을 통해 원전을 분석한 《중용해(中庸解)》를 집필하여 주자의 해석이 오류와 독선으로 점철되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다른 관료나 학자들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유교적 도의(道義)를 논하면 오규는 원전을 근거로 선현(先賢)의 뜻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추궁하였다. 주자의 해석에 의존한 사람들이 원전에 근거한 그의 논박 이상의 지적 권위를 제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원전으로 읽은 사람과 다이제스트 번역본으로 읽은 사람 간에 논쟁이 붙었을 때 지적 권위의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규의 이러한 고전 중시 해석론은 ‘고문사(古文辭)학파’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겐엔(蘐園)학파’를 이루었다. “주자학 등 후세의 해석에 좌우되지 말 것. 직접 중국 고전으로 돌아가 배울 것”을 강조한 오규의 사상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실증적 연구와 고증을 중시하는 일본 유학계 학풍의 초석이 되었다.
 
  오규의 학문적 성과는 후에 조선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오규의 《논어징(論語徵)》을 대거 인용하면서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일본 정치사상계의 대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政男)는 오규를 “근대성의 사상적 개척자이자 정치의 발견자”라고 평한다. 유럽의 지식사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것이 근대 정치의 토대를 닦았듯이 오규가 통치 철학으로서의 유학이 교조적 관념론, 도덕론에 치우치지 않고 실증과 실용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한 것은 근대 정치의 발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기틀
 
  유학을 현실에 밀착시키려 한 오규의 사상은 중농주의적 유교관에서 탈피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위정자의 덕(德)을 도덕적 통치를 넘어 국가 경영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에도 후기 경세가들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막부 관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주자학이 주류로 남아 있었지만, 시대 변화에 민감한 번에서는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유능한 경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막부 말기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압력으로 막부체제가 흔들릴 때 사쓰마, 조슈, 도사, 사가 등 서남지역의 번(藩)들은 유능한 경세가들을 전국에서 초빙하여 신지식으로 무장한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자체적인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정책을 통해 국력을 배양하여 막부 타도 및 메이지유신, 근대국가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유학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망칠 수도 흥하게 할 수도 있다. 에도시대의 유학은 독점되지 않았고 종교화하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해석은 배척이 아니라 공존·경쟁의 길로 걸었다. 조선의 유교와 일본의 유학은 같은 뿌리에서 자랐지만 다른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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