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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12〉 사전(辭典)으로 서양 언어와의 통로를 열다

글 : 신상목  (주)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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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무라 산바쿠, 1796년 일본 최초의 난화사전(蘭和辭典)으로 알려진 《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
    편찬
⊙ 에도 막부, 네덜란드인 되프 고용해 《두후하루마(ドゥ一フハルマ)》 편찬
⊙ 1814년 최초의 영일사전인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諳厄利亞語林大成)》 편찬
⊙ 사전 번역 과정에서 자유(自由·liberty), 경제(經濟·economy), 물리(物理·physics) 등 근대 개념어
    만들어 내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나가사키 데지마의 화란(네덜란드)인들. 이들과 접촉하면서 일본에서는 화란어 사전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1774년 《해체신서》의 출간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서양의 문물은 물건의 형태로 접하거나 대화를 통해 단편적 내용을 파악하는 수준이었을 뿐, ‘책’이라는 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책에 그려진 그림이나 얼마 되지 않는 아는 단어를 통해 추측할 뿐 지식의 보고인 책이 지식 흡수에 전혀 도움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체신서》가 출간되자 난학자(蘭學者)들 사이에 ‘번역’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다. 그 이전부터 서양의 책에 적혀 있는 꼬부랑 글자의 뜻만 알 수 있으면 그 지식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신서》 이전에 번역서가 없었던 것은 ‘사전(辭典·dictionary)’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 대화의 수준을 넘어 외국어를 통한 지식의 흡수를 위해서는 도구적 기초로서 사전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해체신서》의 출간을 계기로 일부 뜻있는 난학자들이 ‘난일(蘭日)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편찬 작업에 착수한다.
 
  당시 난학계는 크게 에도파와 나가사키파로 나뉘어 있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화란인(네덜란드인)들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유창하게 화란어를 구사하는 통사(通詞·번역관)들이 난학 전파에 힘쓰고 있었다. 에도에서는 의사 중심의 지식인들이 일문(一門)을 이뤄 화란어 실력은 나가사키파에 못 미치지만 난학을 학문적 관점에서 열성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이 중 에도파의 이나무라 산바쿠(稻村三伯)가 화란어 사전 편찬에 도전장을 던진다. 아무래도 대면(對面) 통역보다 서적을 통한 지식 흡수의 필요성이 높았던 에도파가 사전의 필요성을 더 절감했던 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산바쿠는 본래 의사 출신으로 당시 에도 난학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澤)의 《난학계제(蘭學階梯)》를 접하고 난학 연구에 몰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전 편찬의 꿈을 꾸게 된다.
 
 
  蘭佛사전 원용해 蘭日사전 편찬
 
일본 최초의 서양어 사전으로 알려진 《하루마와게》.
  산바쿠 이전에도 난일사전 편찬의 시도가 있었다. 당시 어학 실력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나가사키 통사 니시젠 사부로(西善三郞)가 화란어 사전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수만 개에 이르는 단어의 내용 파악도 내용 파악이지만 알파벳 순서로 정렬되어 있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가 없는 상황에서 사전을 발간하는 것은 일개인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산바쿠는 이를 우회하는 방법으로 시간 단축의 실마리를 찾는다. 나가사키 통사 출신으로 겐타쿠가 화란어 교사로 에도로 초빙한 이시이 쇼스케(石井庄助)로부터 《난불사서(蘭佛辭書·Woordenboek der Nederduitsche en Francsche Taalen)》를 소개받고 이 사전을 활용해 난일사전을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난불사서》는 프랑스인 François Halma(일본 발음 프랑소와 하루마)가 1729년 편찬한 Dutch-French 사전이다. 난불사전으로 일본어 사전을 만든다는 발상은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네덜란드어도 모르는데 불어로 뜻풀이가 되어 있는 사전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배경은 이렇다. 화란은 19세기 초까지 국어(화란어)사전이 없었다. 18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면서 고유의 국어사전을 발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화란어 사전이 있었다면 일본의 난학자들이 그를 기초로 난일사전을 만들 생각을 했겠지만 화란어 사전이 없으니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 화란어 사전의 대용(代用)으로 착목된 것이 하루마의 《난불사서》이다.
 
  하루마 《난불사서》에는 알파벳 순서로 화란어 표제어를 나열하고, 각 표제어에는 먼저 화란어로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주석(註釋)이 달리고, 그다음에 본문으로 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가 설명되어 있었다. 이러한 독특한 체계는 당시 화란어 사전이 없었다는 사정에 기인한다. 화란인들도 이 사전을 자국어 사전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산바쿠는 이 중에서 프랑스어는 제쳐두고 화란어 표제어와 그에 대한 화란어 주석을 활용하여 난일사전을 만든 것이다. 사전의 편찬에는 산바쿠의 뜻에 동조하는 우타가와 겐즈이(宇田川玄隨), 오카다 호세쓰(岡田甫說) 등의 동료 난학자들이 같이 참여하였다. 13년에 걸친 편찬 작업 끝에 1796년 일본 최초의 난화사전(蘭和辭典)으로 알려진 《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 또는 波留麻和解)》가 탄생하였다.
 
  1796년 초판 원고가 완성된 이후 2~3년에 걸쳐 30여 부가 간행되어 에도 난학계에 보급되었다. 약 6만여 개의 방대한 표제어를 수록하고 있으나 단어 설명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아 현대로 치면 어휘집 내지 단어장 정도의 성격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에도 난학계의 연구는 큰 탄력을 받았고 《하루마와게》 출간 이후 에도에서 각종 서양서적 번역서가 연달아 출간되면서 에도의 난학이 크게 융성한다.
 
 
  막부, 번역기관 설치
 
  본격적인 난일사전의 편찬은 에도 막부에 의해 추진된다. 막부는 서양 언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1811년 막부 기관인 천문방(天文方)의 부속 기관으로 양서 번역을 담당하는 ‘반쇼와게고요’(蕃書和解御用)를 설치, 유능한 난학자들을 번역관으로 임명하였다. 반쇼와게고요는 번역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본격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나가사키 데지마상관장으로 일본어에 능통한 헨드릭 되프(Hendrik Doeff)에게 난일사전의 편찬을 의뢰한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네덜란드는 ‘바타비아공화국’이라는 프랑스의 위성국이 되었다. 혼란의 와중에 화란동인도회사가 1799년 해산되고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던 영국이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의 화란 식민지를 접수하기 시작하자 동남아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동인도회사의 인력은 본국의 도움 없이 자력갱생으로 생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되프 역시 1803년 도일(渡日)한 이후 하염없이 귀국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되프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일본으로서는 그의 존재가 행운이었다. 1812년 반쇼와게고요의 의뢰를 받은 되프는 나가사키 통사들의 협조를 얻어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한다.
 
  그의 우수한 어학 실력 덕분에 빠른 속도로 번역이 진행되었다. A~T 항목까지 번역이 진행된 1817년 유럽의 정세 변동으로 되프가 갑자기 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번역 작업은 암초를 만나게 된다. 나가사키의 통사들이 작업을 이어받았으나 마무리 작업에는 16년이 추가로 소요되었고 1833년이 돼서야 초고(草稿)가 완성되었다.
 
 
  《두후하루마》, 총 5만여 개의 표제어 수록
 
일본 난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본격 난일사전 《두후하루마》.
  되프가 주도한 이 사전의 정식 명칭은 《통포자전(通布字典)》이나 일반적으로는 《두후하루마(ドゥ_フハルマ)》로 알려져 있다. 《두후하루마》도 《하루마와게》와 마찬가지로 프랑소와 하루마의 《난불사서》를 베이스로 프랑스어를 제외한 화란어 표제와 주석 설명을 활용하여 편찬되었다. 이에 따라 에도에서 만들어진 하루마 번역본을 《에도하루마》,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번역본을 《나가사키하루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후하루마》는 총 5만여 개의 표제어를 수록하고 있으며, 상세한 설명과 예문을 기재한 57권, 3000여 쪽의 방대한 책자로 구성되어 있다. 《두후하루마》의 초고를 접수한 막부는 서양 지식의 전파를 우려하여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만 30여 부 제작하고 배포처도 막부와 일부 번으로 한정하였다. 뜻있는 난학자들이 서양 세력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서양을 알아야 한다면서 막부를 설득하였으나 막부는 정식 간행에 소극적이었다. 이 책은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1854년이 되어서야 겨우 정식 간행이 허가되었다.
 
막부 말기~메이지유신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쓰 가이슈도 《두후하루마》를 필사해 공부했다.
  《두후하루마》는 난학 연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의 보고였다. 막부가 배포를 통제하는 동안에도 서로 앞다투어 입수하려고 경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비공식 사본(寫本)이 만들어져 유통되었다. 《두후하루마》를 입수한 쥬쿠(塾·사설학교)와 그렇지 못한 쥬쿠 간에 입학생 모집에 큰 차이가 발생할 정도였다. 워낙 비싼 책자였기 때문에 이를 보유한 쥬쿠들은 외부의 요청으로 사본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운영비를 보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막부의 해군장관으로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젊은 시절 일화에 이와 관련한 대목이 있다. 가이슈는 학비가 없어 쩔쩔매던 젊은 시절 10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한 의사로부터 《두후하루마》를 빌렸다. 그는 1년에 걸쳐 두 질(秩)의 사본을 만들어 한 질은 본인이 소유하고 한 질은 빌린 값보다 몇 배의 가격을 붙여 팔아 이득을 남긴 후 그 돈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자서전에서 자신이 다니던 오사카 최고의 난학교습소 ‘데키쥬쿠’(適塾)에도 《두후하루마》가 한 질밖에 없어 문하생들이 한 번이라도 사전을 더 보려고 한밤중까지 자지 않고 경쟁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이 정도로 《두후하루마》는 일본 난학의 발전에 소중한 존재였다.
 
 
  페이튼호 사건
 
  에도 후기 외국어 사전의 발간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으로 불리는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諳厄利亞語林大成)》이다. 이 사전의 편찬에는 배경이 있었다.
 
  1808년 8월 나가사키항 앞바다에 화란 국기를 게양한 한 척의 배가 출현한다. 입항 절차 수속을 위해 화란상관원과 통사들이 동 선박에 접근하자 이 선박의 승조원들이 돌연 화란상관원 두 명을 납치하고 화란기 대신 영국(잉글랜드)기를 게양하더니 나가사키항에 침입하여 화란인들을 색출한다면서 무장을 한 채로 거리를 활보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 배는 사실 영국의 페이튼(Phaeton)호로, 동남아 일대의 화란적(籍) 선박을 나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군함이었다.
 
  이들의 적대 행위에 놀란 나가사키 부교(奉行·지역관리책임자)가 인질의 석방을 요청했으나, 페이튼호는 이를 거부하고 물, 식량, 연료의 보급을 요구하면서 적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일본 측은 페이튼호를 격침하려 하였으나, 당시 나가사키 수비 임무를 맡고 있던 사가번의 군대는 페이튼호를 공격할 수 있는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일본 측이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나서야 페이튼호는 나가사키를 벗어나 이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굴욕을 맛본 막부는 큰 충격을 받는다. 후유증도 컸다. 이국선(異國船)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죄를 물어 나가사키 부교와 멋대로 막부 직할령의 수비병력을 줄인 사가현의 중신 여러 명이 할복을 해야 했다. 사가번주는 100일의 폐문(閉門) 근신 처분을 받았다.
 
 
  영일(英日)사전의 편찬
 
최초의 영일사전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
  막부는 호전적인 이국선의 출현을 계기로 영국이라는 존재에 대해 경각심을 품고 나가사키 통사들에게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울 것을 지시한다. 러시아어가 포함된 것은 당시 상관장이었던 되프가 둘러댄 거짓말 때문이었다. 되프는 화란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독점무역권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러시아가 영국을 사주하여 나가사키의 방비(防備) 태세를 시험하기 위해서 온 것이며 화란 선박을 나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허위 보고를 했던 것이다. 이미 페이튼호 사건 1년 전에 러시아의 군함이 사할린 근처의 섬에서 위협적인 행동을 하며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었기에 막부는 되프의 말을 믿었다.
 
  영어 공부를 지시받은 나가사키의 통사들은 영국 거주 경험이 있는 화란인 상관원 얀 콕 블롬호프(Jan Cock Blomhoff)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1811년 영어의 기본체계와 기초 어휘를 정리한 《안게리아겐고와게(諳厄利亞言語和解)》라는 책자를 발간한다. 이 책자를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뒤에 6000여 표제어와 품사 등을 구분 수록하여 발간한 《안게리아고린타이세이》를 최초의 영일사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서양 세력에 대한 막부의 경각심이 영어 학습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의 실천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
 
  서양 언어 사전을 최초로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한자로 된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적(知的) 작용을 요구한다. 표의(表意) 문자와 표음(表音) 문자의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서양 언어로 표현된 개념을 일본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게리아겐고와게》에는 ‘handkerchief’가 ‘하나후키’(鼻拭き)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말로 하면 ‘코닦기’ 정도의 의미이다. 일본에는 없는 물건이지만 그 용도를 파악하여 적절한 대역(對譯)어를 조어(造語)한 것이다.
 
  이보다 더 관념적인 단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liberty’를 자유(自由)로, ‘economy’를 경제(經濟)로, ‘physics’를 물리(物理)로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 없는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 사전의 편찬자들은 서양의 개념을 수용한 후 그를 자국어로 변용하는 언어의 재창조 작업에 몰두하였다.
 
  최초로 그러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화의 충돌이었고 문화의 이양(移讓)이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서구화가 본질적 요소로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의 관념을 일본의 관념으로 변환시키고 내재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는 그보다 70년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의 노력으로 닦아온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참고로 최초의 영한사전은 언더우드(H.G. Underwood)가 집필한 《영한자전》이다. 조선에는 마땅한 인쇄시설이 없어 1890년 요코하마에서 발행되었다. 언더우드는 서문에서 영어에 대한 한국어 사전이 없다는 것이 편찬의 동기가 되었다고 하면서 한국에 온 지 수개월 후부터 5년 동안 단어를 수집하는 준비 과정을 거쳤으며, 한영사전은 게일(J.S. Gale)의 도움으로, 영한사전은 헐버트(H.B. Hulbert)의 도움으로 완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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