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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의 미학산책 〈8〉 인사동의 ‘거리방식 깨침’

글 :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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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인가게, 1924년 통인가구점으로 출발해 100년 바라보는 골동품점으로 성장
⊙ 미국의 데이비드 록펠러, 김활란, 이병철 등이 단골
⊙ 고려청자는 모두 도굴품, 불화는 모두 사찰 절취품이라며 절대 거래하지 않아

김형국
1942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 /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녹색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역임 /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 저술
통인가게를 찾은 록펠러 총재(오른쪽), 1980.
록펠러 총재는 2005년 뉴욕현대미술관에 1억 달러 기증을 약속했던 미국 현대미술의 ‘전설’이었다(S. Loebl, America’s Medici: The Rockefellers and Their Astonishing Cultural Legacy, 2010). 세계적 거부임에도 통인에서 물건을 흥정할 때마다 깎아 달라고 청하곤 했지만 국내외 누구에게도 그런 적이 없었던 가게 방침에 그이도 에외가 아니었다.
  미국의 거물 은행가 데이비드 록펠러가 올 3월 102살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에 남다른 감회를 느낄 이가 이 땅에도 한 사람 있음을 나는 안다. 인사동이 골동거리라던 명실(名實)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랜드마크라 할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金完奎, 1946~)가 그이다.
 
  미국 최대의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록펠러 총재가 1974년 4월 16일에 처음 방한했을 때 그를 학수고대한 이는 경제개발 외자 확보에 목을 빼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록펠러는 이후 한 해 두 번씩 방한하면 즉시로 청와대 면담 일정이 잡혔는데 거기로 가기 앞서 매번 통인가게부터 찾았다. 그 걸음에 금강산 민화 한 틀을 샀다. 우리 민화가 세계적 수장 목록에 드는 순간이었다.
 
  회장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활동을 지원해 세계문명사에 이름을 남겼던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메디치(Medici) 가문에 비유해서, “미국의 메디치 가문”이라 소문날 정도로 세계 미술문화 초강국에서 일대 지평을 열었다. 미국 석유왕의 손자 데이비드는 그 어머니가 초석을 놓았던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사회 회장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회장으로 있던 은행에다 따로 미술관을 만들 정도로 미술품을 애장해 온 미국 현대미술 사랑의 풍향계 같은 위인이었다. 그가 조선목기도 다수 수장해 왔다는 게 통인가게 주인의 증언이었다〈도판 1 참조〉.
 
 
  묵은 가구 판매에서 출발한 통인가게
 
  1924년 서울 서촌 통인동에서 출범한 통인가게가 지금의 인사동 거리로 옮겨온 것이 1960년이었다. 좀도둑이 많았던 그 시절은 식구 가운데 누군가가 숙직을 해야 했다. 중학 3학년이던 안동김씨 집안의 막내아들이 그 노릇을 맡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엔 숙직 방에서 늦잠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 이른 아침에도 가게를 찾는 마니아들이 있었다. 예용해(芮庸海, 1929~1995)도 그런 부류였다. 문화부 기자로 이력을 쌓은 뒤 단절·멸실 위기를 공론화해서 통상 인간문화재라 말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도를 국가 차원에서 도입하게 만든 덕분에 공예, 가무 등 전통문화의 전승 가능성을 열어 준 공로자였다.
 
  그때 가게 방바닥에 주인 아들이 뒹굴고 있음을 엿보면 어김없이 타이름인지 꾸중인지를 했다. 영어를 착실히 배우라는 것. “가게 출입 외국 손님들이 늘어나는데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새나 개 모양 조형물을 앞에 두고 짹짹 또는 멍멍이라고 할 것인가. 시대가,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영어를 열심히 익혀라!” 했다. 소년은 어른 말을 명심했다.
 
  어느 하루 이화여대생 일단이 가게를 찾았다. 평소 알았던 아버지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주 친절하게 이모저모를 말해 줌을 엿보자 벌컥 화가 났다. 그 다음날 가게에 가지 않았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옛 물건의 내력에 대해 한 번도 말해 준 적이 없었으니 더 이상 아버지에게서 배울 게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라 했다.
 
  불시에 아버지가 아들 등짝을 때리면서 호통을 쳤다. 도자항아리의 묵은 때를 빼거나 가구 나무판 땟자국을 닦다 보면 옛 물건의 디테일이 자연스럽게 눈과 손에 익기 마련이라 했다.
 
 
  가게 역사가 백년을 눈앞에
 
후지모토 다쿠미, 〈인사동 거리〉, 1970년경.
신식 건물로 바뀌기 이전에 인사동으로 옮겨온 ‘통인가구점’의 모습이다.
  이 땅에 골동가게를 처음 연 것은 1906년 서울에 왔던 일본인이었다. 그럴지언정 자생(自生) 통인가게가 불과 몇 년 뒤면 백년 연륜을 쌓게 되었으니 골동상 역사로는 괄목상대할 만해졌다. 그때 누각골이라 했던 인왕산 자락 마을에서 시작했던 가게였다. 집안은 당대 세도가문 안동김씨의 피붙이였지만 나라가 망한 뒤였으니 궁궐에서 나오던 하사품도 끊긴 지 오래였다.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양반 줄기라고 상공(商工)도 할 수 없었고 도회라서 농사지을 땅도 없었다. 겨우 집과 땅을 팔아 살아가던 어느 날 남자가 장을 보던 시속대로 시장에 갔던 아버지에게 구슬을 팔아 보라는 이가 있었다. 그때 ‘꿰어야 구슬’이란 말대로 옛 구슬을 찾는 수요가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옛 물건을 팔겠다고 가게를 열자 먼저 흘러든 것이 조선가구였다. 그로써 가게 이름이 통인가구점이 되었다. 가구가 나올 때는 각종 백자 그릇 등의 세간살이는 말할 것 없고 패물도 따라 나왔다.
 
  통인가구가 인사동으로 옮겨온 것은 6·25전쟁이 끝난 뒤 전후복구가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그 일대가 대학, 방송사, 명망 개인병원, 고전음악 감상실 등 복합문화지구라는 정체성을 다져 가던 추세에다 고서점 통문관, 일인들이 두고 떠났던 표구점 등의 존재가 이웃효과를 일으키면서 골동상을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도판 2 참조〉.
 
  통인가구점은 좌상(座商)이었다. 골동 수급(需給)의 시장위계상 맨 윗자리로 점포를 가진 가게라는 말이었다. 골동거래가 일본인들이 먼저 관행을 보여주었던 바라 그 위계도 일본말로 매겨졌는데, 옛 물건이 있을 만한 무덤을 파내거나 각지에서 그런 유를 물어오는 호리다시(掘出), 씨족들이 모여 살던 곳 등 골동이 있을 만한 현장을 다니며 물건을 끌어내 오던 가이다시(買出), 안목을 갖고 좋은 물건을 찾아다가 그걸 꼭 필요한 사람에게 팔아넘기는 나카마(仲間), 우리말로 거간이 있었는데, 이런 필마단기형 장사꾼이 기대는 정처이자 물건을 쌓아 두고 수집가들에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좌상이었다.
 
 
  골동식별의 거리방식 깨침
 
〈저울추〉, 조선시대. 돌, 8.8 x 14.8 x 10.4cm.
통인가게 창업주가 문진(文鎭)으로 오래 애용했던 저울추인데, 부자 되기 축원의 뜻으로 돼지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이 애교스럽다.
  봄꽃은 해마다 같지만 사람은 가고 오지 않는다 했다. 이 말대로 통인가게의 단골손님도 세월 따라 바뀌었다. 현대 한국의 골동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나라가 발전을 향해 꿈틀그려 보던 1960년대 초반 무렵이었는데 그때 가게 출입이 빈번했던 분은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성누가병원장 박병래 박사 등이라고 김완규는 기억해냈다.
 
  김 총장이 6·25 직후 전담 거간꾼까지 거느리며 수집했던 수장품 덕분에 이화여대 것이 가장 빼어난 대학 박물관이 되었고, 이 회장 수집은 세계적 반열의 호암미술관의 근간이 되었으며, 의사의 한정 수입이라 조선백자 가운데서도 문방구류 소품만 수집한다고 평일 점심때면 어김없이 가게에 나타났던 박 박사는 타계 직전 일괄 국립중앙박물관에 넘겨 수집 문화재의 사회 환원에 아름다운 선례를 남겼다. 이즈음에 재벌가나 사회 명문가의 며느리들도 한동안 통인가게를 즐겨 찾았다. 이 여파로 미술공부가 살 만한 집안의 신부수업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도 나돌았다.
 
  재력가들의 발걸음에 이어 딱히 경제적 여유가 부추겼다기보다 타고난 미적 감성이 이끄는 바에 따라 수집에 몰입하던 부류가 나타났다. 앞서 말했던 예용해와 함께 인사동을 누볐던 출판인 한창기(韓彰琪, 1936~1997) 등이 일단의 유명 화가군들과 한국 미학의 근원과 본질을 증거할 옛 물건 찾기 대열에서 각축을 벌였다. 이들 모두 김완규의 고객이었다.
 
  김완규는 옛 공예품의 손맛은 물론 거기에 담긴 현대적 감각 찾기에 눈을 부릅뜬 수집가들의 구득 열기, 한편으로 그들 수집에 부응하려고 바쁜 걸음이던 나카마 등의 공급 행각 사이의 기싸움을 엿보는 틈으로, 간간이 골동 민간거래의 시류를 탐문하려 했음인지 어쩌다 인사동도 출입하던 최순우 박물관장의 가르침도 경청했다.
 
  최 관장은 후덕한 양반의 거동이자 개결한 선비의 언동이었다. 항상 자신의 미학을 실현해 줄 젊은이들을 대동하고 골동가게에 나와서는 분야의 권위자임은 전혀 내색지 않고 주변의 말을 열심히 경청했다. 그럼에도 젊은 골동상 김완규의 말에는 한마디씩 반응했다. 나카마 등의 실전담(實戰談)에만 의존하지 말고 한·중·일 옛 문헌 공부에도 힘써서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그렇게 인사동 거리에서 고물들의 나이인 ‘지다이(時代)’, 진품인가 아닌가의 진가(眞假), 진품도 미적 수준의 높낮이 상하(上下)를 따지는 자칭 타칭의 구안(具眼)들 사이에서 ‘잡다하나 생생한, 때론 무시무시한 현장’에서 익히는 이른바 ‘거리방식(street- wise)’ 깨침을 쌓아 나갔다. 여기엔 고려청자는 모두 도굴품, 불화는 모두 사찰 절취품이라며 절대 거래하지 않았던 창업주의 윤리의식도 들어 있었다〈도판 3 참조〉.
 
  인복(人福)도 따랐다. 최순우가 결혼 주례를 맡아 주었음은 물론 영어백과사전 외판(外販)에 불과한데도 회계관리는 국제기준을 따랐던 한창기 브리태니커 한국지사장은 골동가게의 주먹구구식 장부관리를 현대적으로 다듬도록 전문가를 붙여 주었다. 또한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의 한글전용주의에 따라 옥호를 통인가게라 고쳐 놓었다.
 
 
  아버지가 믿었던 아들
 
  초대 당주는 민예품 수집이 한창 달아오르던 1970년대 중반 어느 하루, 작심하고 그 거리에서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스물넷 ‘애숭이’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골동 거리는 안목 싸움판이라 했다. “제대로 된 요리사가 되려면 10년, 의사는 20년이, 골동품상은 30년이란 세월이 걸린다”던 일본 동업자(사카모토 고로·阪本五郞, 《미술시장》, 2007)의 말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그리고 일대의 알 만한 이들이 극구 만류했음에도 “아들을 믿는다”는 한마디로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의 기대이기도 해서 그즈음 통인가게는, 잠자던 박물관 노릇을 대신하려는 듯, 책자 발간과 함께 수준급 전시회를 연이어 열었다. 《통인미술》이란 이름으로 1권 《장도》(1974), 2권 《목칠공예》(1975), 3권 《먹통》(1977) 같은 알찬 도록을 펴내는 사이로 나무기러기, 화각, 경대, 갓통, 벼루, 표주박 등 전문분야별 기획전이 애호가들의 호응을 샀다.
 
  어려움도 있었다. 옛 사람들이 길 떠날 때 물이나 술을 마시려고 지녔던 각종 표주박 전시회 때였다. 민예품 열기가 불던 그즈음만 해도 하나가 고작 짜장면 한 그릇 값에 불과했기에 월급쟁이 언론인의 주머니 사정에 맞춤했던지 예용해가 열심히 수집했다. 해서 전시회를 앞두고 손잡이에 용이 새겨진 명품의 출품을 청했다.
 
  전시회가 끝날 즈음 그만 야단이 난 것이 구경꾼 누군가가 그 명품을 훔쳐 가 버렸다. 사후 처리는 나중 일이고 호되게 꾸중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 일단 도난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예용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나보다 더 그 표주박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통인이 마련했던 전시가 그만큼 잘되었다는 뜻이 아닌가?!”라며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생전에 그의 언동과 거동에 감동을 받은 적 있었던 나도 그 일화의 전후 사정을 들을 때마다 참 향기로운 인격이었구나, 새삼 감격한다.
 
 
  문화재 세계화 과정의 낙수가 냇물 되어
 
통인인터내셔날무빙 로고.
호랑이와 까치를 그린 민화 〈호작도(虎鵲圖)〉의 이미지를 원용한 통인의 국제물류회사 로고. ‘가장 우리다운 것이 세계와 통한다’는 이치대로 우리의 옛 생활정서 상징의 옛 그림을 상호로 차용한 통인인터내셔날과 그 자회사는 직원 3200명을 거느린 세계적 물류회사의 하나로 자랐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은 해방된 뒤 한국 땅을 밟은 각급 미국인들로 확산되었다. 반닫이가 현대 주거공간에도 잘 어울린다는 점을 먼저 간파했다.
 
  나중에 그들 이삿짐에 실려 나갈 때는 수준급 포장이 문제였다. 특히 까다로운 도자기류 운반은 상자 안에도 또 격벽을 만들거나 해서 상자 벽에서 띄우는 방식이 되기도 해야 하는데 초기엔 그게 모두들 서툴렀다.
 
  록펠러가 서울에서 구한 우리 민예품을 갖고 나갈 때 그런 어려움을 만나고는 김완규에게 고급 포장과 국제이송에도 관여해 보도록 권유했다. 한국판 DHL 또는 Fedex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받고는 세상물정 모르는 대학 샌님인 나에게까지 조언을 구했던 것은 그만큼 새 창업에 대해 고심이 많았다는 말이었다. 사람의 삶을 공간적으로 말하자면 머무름의 정주(定住) 대 움직임의 교통 두 축이라 간파하는 내 전공공부에 비추어 특히 교통의 비약적 발전이 예상되는 전망이라면 이동·물류 사업이 유망하지 않겠나, 교과서식 반응만 해 주었다. 고심 끝에 일으킨 사업이 통인익스프레스, 통인인터내셔날 등 국내외 물류사업인데 날로 번창하는 상승곡선이다〈도판 4 참조〉.
 
통인음악회, 2016년 9월 24일 밤.
오페라 아리아의 밤에 출연한 소프라노가 박수를 받고 인사하고 있다. 내빈으로 사진 오른쪽에 벳소 고로(別所浩郞) 일본대사, 왼쪽에 음악회 단골손님 마크 리퍼트(Mark Lippert) 미국대사가 보인다. 통인음악회는 1970년대 중반 이래 계속해 온 문화행사다. 처음엔 판소리, 가야금 병창 등 국악 위주였다가 역시 외국 인사들과 소통하는 데는 서양 오페라 음악이 좋을 것 같아 아리아의 밤을 1년에 5, 6차례 개최해 오고 있다. 아리아의 밤에는 보통 음악가 셋이 출연한다. 외국유학을 거친 뛰어난 젊은 예인들에게 공연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음도 작은 보람이다.
  2대째는 선대 사업의 수성만 해도 성공이라 했다. 김완규의 경우는 수성을 넘어 새 사업의 기틀까지 세웠으니 이를 일러 확장과 혁신을 특징으로 하는 ‘경장(更張)’의 경지에 올랐다 할 것이다. 자신의 입신은 그럴지언정 나라 덩치가 작아서 그런지 세계적 문화재 경매회사 소더비는 십 년 전에, 그리고 크리스티는 2016년에 한국지사를 접었다. 그만큼 이 땅의 골동인지 문화재 시장은 한풀 꺾였다. 해서 통인가게도 더 이상 골동품 거래가 주업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에서 사라져 가는 문화재 구득에 골몰한다. 이들을 강화도 땅에 지어 나갈 박물관으로 옮겨 사람들에게 보여줄 궁리만 하고 있다〈도판 5 참조〉. 문화재 취급으로 축적한 통인가게 이미지가 나중에 펼쳤던 세계화 관련 사업의 신뢰 기반이 되어 주었듯, 장차의 각종 통인박물관이, 사람이 세상의 주인임이 분명하기에, 한국 사람이 창조적 발상법을 자극할 요람이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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