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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4〉 사라진 전설 속의 왕국, 금관가야가 낳은 명장들

금관가야의 후손 김무력·김서현·김유신·김원술 4대가 결국 삼국을 통일했다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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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아들이 김무력
⊙ 가야의 왕자였던 김무력은 백제 성왕을 관산성 전투에서 살해
⊙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도 고구려 낭비성 전투 등에서 승리
⊙ 김무력의 손자가 김유신, 15세 때 화랑 된 뒤 18세에 국선(國仙) 올라
⊙ 김춘추와 인척관계 맺고 백제·고구려 정벌의 기둥
⊙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 20만 격파
⊙ 김유신 저택은 경주의 39개 금입택 가운데 으뜸
경기도 연천의 매소산성에서 본 전경이다. 우측이 한탄강, 좌측이 신천이다.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여기서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 20만명을 격파해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웠다.
  우리 역사에 아직도 그 실체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미지(未知)의 왕국(王國)이 있었다. 가야(伽倻)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가야는 변한의 12국에서 발전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고령가야·성산가야·대가야·아라가야·금관가야·소가야 등 6개 왕국이 나온다.
 
  전기(前期)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 진흥왕에 의해 망한다. 금관가야에 이어 후기(後期) 가야연맹의 맹주국 대가야가 562년 멸망하면서 가야는 전설 속으로 사라진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은 구형왕(仇衡王)이다. 구해왕(仇亥王), 구충왕(仇衝王)이란 설(說)도 있다.
 
  금관가야 마지막 구형왕의 자손들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4대를 이어서이며 그 후손들도 신라의 간성(干城)이 된다. 그러기에 혹자는 표면적으로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지만 금관가야의 후손들에 의한 통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김무력의 승리는 정보전의 결과
 
이 자랑스러운 매소산성은 지금 폐허나 다름없다. 산 정상에서 가끔 보이는 산성의 흔적이다.
  첫 번째가 구형왕의 아들로 금관가야가 망하기 직전까지 왕자였던 김무력(金武力·518~579)이다. 구형왕의 세 아들 중 두 번째로 태어난 김무력은 아버지와 함께 신라의 귀족계급인 진골(眞骨)로 편입된다. 그는 진흥왕 때의 명장 이사부(異斯夫)의 부장(副長)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백제의 왕은 성왕(聖王)이었다. 538년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성왕은 중흥을 꿈꾸던 야심가였다. 성왕은 551년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의 6개 고토(故土)를 탈환했다. 기쁨도 잠시, 신라는 고구려를 도와 백제가 탈환한 6개 군을 모두 빼앗고 거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김무력은 이때의 활약으로 잡찬 벼슬에 오르며 신주성의 도독이 됐다.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54년 대가야와 연합해 신라 관산성(管山城), 즉 지금의 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당시 관산성을 지키던 우덕(于德)이 고전하자 신주에 있던 무력은 병력을 이끌고 출전했다.
 
매소산성 성벽의 흔적이다.
  김무력은 그해 7월 성왕을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직동(피골)의 노고산성에서 전사시킨다.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동에는 은월사라는 사당이 있다. 이곳은 김무력을 모시는 곳이다. 울산 시민들은 김무력의 무덤이 인근 은월산에 실존해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왕뿐 아니라 4명의 좌평과 병사 2만9000명이 전사하는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이 공로로 김무력은 신라 최고의 신흥 장수로 올라섰고 법흥왕의 비 보도부인의 동생 박씨,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딸이었던 아양공주와 두 차례 결혼하게 됐다.
 
  김무력 장군이 성왕을 죽음으로 몬 것은 정보의 힘이었다. 성왕이 전쟁터에 친히 온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군은 세작(細作), 즉 간첩을 보내 성왕이 올 루트를 탐지했고 장수 도도로 하여금 복병(伏兵)을 이끌게 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성왕은 백제 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김서현은 진흥왕의 조카 만명부인과 결혼
 
매소산성은 입구에도 안내문이 없다. 산 중턱에 올라가면 군인들이 훈련했던 흔적이 보이며 비로소 안내문이 나온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손자이자 김무력의 아들이 김서현(金舒玄·564년~?)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김서현의 생애가 짧게 나온다. 하루는 김서현이 길에서 진흥왕의 조카 만명(萬明)을 만났다. 첫눈에 이끌린 둘은 육체관계를 갖는다. 그 후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됐다.
 
  김서현이 만노군으로 만명을 데려가려 할 때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肅訖宗)이 둘의 관계를 알았다. 숙흘종이 딸을 설득했으나 만명은 듣지 않았다. 숙흘종은 딸을 별실에 가뒀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놀란 경비병이 도망가자 만명이 탈출해 김서현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런 전설도 있다. 김서현이 어느날 꿈을 꿨는데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부인 만명 또한 황금 갑옷을 입은 어린애가 구름을 타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그 뒤 임신해 20개월 만에 낳은 아이가 바로 김유신(金庾信·595~673)이다.
 
  김서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인 양주(良州)의 총관이 됐다. 자연 백제와의 싸움이 잦을 수밖에 없었는데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진평왕 51년인 629년에는 소판으로 재직 중 아들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충북 청원군)을 공략해 전력이 열세임에도 성을 빼앗았다.
 
  김서현은 만노군 태수와 대량주 도독을 거쳐 소판(蘇判·제3관등)에 이르렀는데 그 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에 김서현의 벼슬이 각찬(角粲·제1관등)이라고 나와 있다. 《삼국유사》에도 그의 벼슬은 각간(角干) 안무대량주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로 나온다.
 
 
  낭비성 공략 때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과 함께 싸워
 
  김유신에 관한 기록은 그가 열다섯 되던 해인 609년부터 나온다. 그해 그가 화랑(花郞)이 됐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를 당시 사람들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용화향도를 이끌고 신라의 산천을 주유했다. 김유신은 18살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아버지 김서현을 따라 김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나섰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1차 접전에서 김서현의 신라군은 고구려군에 패했다. 이때 전세를 역전시킨 게 김유신이다. 직접 출전해 적을 교란시키고 적 장수의 목을 베어 오자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했고 결국 승전했다.
 
  낭비성 싸움 때 함께 출전한 인물 중 파진찬(波珍湌) 김용춘(金龍春)이 있다. 그가 훗날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아버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만남은 유명하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옷고름을 밟은 뒤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김유신의 집에 온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에게 끌렸고 이윽고 육체관계를 갖는다. 김유신은 문희가 임신하자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린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워 올렸다.
 
  남산에서 이 모습을 본 왕이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다. 마침 왕의 옆에 있던 김춘추의 안색(顔色)이 크게 변했다. 왕은 문희를 임신시킨 것이 김춘추임을 알아채고 “얼른 가서 구해 주라”고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게 됐다.
 
 
  김춘추와 김유신, 피의 맹세를 하다
 
김유신 초상.
  선덕여왕 9년, 즉 서기 642년 백제는 대야성(大耶城) 등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이때 김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 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었다.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고구려로 가기 전날 김춘추가 김유신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 김춘추의 물음에 김유신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오.”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의 맹세를 나눴다. 김춘추가 떠난 뒤 지금의 경북 경산 일대인 압량주(押梁州)의 군주(軍主)로 옮겨간 그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억류되자 결사대를 조직했다. 이 소식을 신라에 있던 고구려의 첩자가 전하자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김춘추를 풀어 줬다.
 
  644년 진골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소판(蘇判)이 된 김유신은 그해 가을 백제의 일곱 개 성을 점령했으며 645년 백제 장군 계백(階伯)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오자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출전해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 2000여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게 됐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647년 일어난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가 하면 대야성에서 죽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 데 성공하는 등 신라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됐다.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으로 승진한 김유신은 그해 6월 당 고종이 파견한 군사와 함께 백제 정벌에 나선다.
 
 
  고구려 정벌 때 김유신의 조카와 아우가 주장으로 나서
 
  김유신은 5만 병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이 이끄는 5000 결사대를 물리치고 당의 소정방군과 백제를 멸망시켰다.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어 자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김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활동을 겸하며 통일전쟁을 벌여 나갔다.
 
  668년 신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때 김유신은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됐으나 나이가 든 데다 병까지 들어 원정에 참가하지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다. 대신 김유신의 조카이자 처형 김인문과 김유신의 아우인 흠순(欽純) 등이 주장(主將)으로 나서 9월 26일에 평양을 함락시켰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임명했다. 백제·고구려의 옛땅은 물론 신라의 영토까지 지배하려 한 것이다. 이런 것을 예측한 이가 김유신이다.
 
  이제 신라는 당병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672년 고구려부흥군을 지원하던 신라는 672년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벌에서 당군과 싸웠으나 지고 말았다. 이때 김유신의 아들로 신라군 비장(裨將)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원술(元述)이 살아돌아오자 김유신은 크게 노했다.
 
 
  김유신, 아들 김원술이 살아오자 “집안 가풍 더럽혔다”며 처형 명해
 
매소산성은 연천 대전리에 있어 대전리 산성으로 불린다.
  김유신은 아들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은 왕명을 무시하고 집안의 가풍을 더럽혔다”고 꾸짖은 뒤 처형을 명했다. 문무왕이 원술을 사면했으나 원술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산속에 근신하며 이후 김유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숨어 살았다.
 
  김유신은 79세 때 사망했다. 김유신이 병들어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문무왕이 집으로 찾아가 문병하며 나눈 대화가 전해지고 있다.
 
  “과인에게 장군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께서 의심하지 않고 신을 등용하여 의심 없이 임무를 맡겨 주셨으므로 약간의 공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소인배를 멀리하시고 군자를 가까이하시고,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평안하여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매소산성에서 가까운 곳에 두물머리가 있다. 한탄강과 신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산성(山城)이 있다. 해발 138m의 성재산에 있는 이 산성의 이름이 ‘대전리산성’이다. 이곳이 바로 《삼국사기》에 신라가 당군을 결정적으로 몰아낸 서기 675년 10월 23일 신라의 승리로 끝난 매소성(買肖城)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흥미롭게도 경상북도 도민의 날이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했던 10월 23일이다. 매소성 전투가 펼쳐졌던 경기도 연천 대전리산성은 삼국시대에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경사가 급한 대전리산성의 정상에 서면 좌우로 한탄강과 신천(莘川)이 합류하며 한탄강은 임진강으로 연결된다.
 
  매소성의 위치를 두고 학자들 간에 견해가 엇갈렸다. 1978년 고대사 연구가들은 매소성을 경기도 양주시 대모산성으로 추정하고 이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1년 뒤 최영희 국사편찬위원장과 김철준 서울대교수가 대전리산성을 답사한 뒤 의문을 제기했다.
 
  사료에 나오는 입지조건과 실제 전투의 흔적들이 연천의 대전리산성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1984년부터 실시된 국사편찬위원회의 실측조사 결과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산성이 매소성의 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전리산성의 성터는 둘레가 670m이며 넓이는 1960m²다.
 
 
  장창과 쇠뇌로 당 이근행의 20만 대군 격파한 김원술
 
  670년 무렵 시작된 나당(羅唐)전쟁은 몇년을 두고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다 675년 당이 유인궤를 보내 경기도 파주의 칠중성을 공격하고 말갈군을 시켜 임진강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면서 분수령을 맞게 됐다. 당시 당의 명장 이근행(李謹行)은 매소성에 20만 대군을 배치했다.
 
  이근행의 20만 당군과 맞선 신라군은 3만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당군은 기병(騎兵) 위주였고 신라군은 보병(步兵) 위주였다. 이런 절대 열세의 전투를 뒤집은 장군이 바로 김유신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받고 김유신이 죽을 때까지 숨어 지내던 김원술이었다.
 
  김원술은 3년 전 석문 전투에서 패배해 가문으로부터 죄를 짓고 서라벌을 떠났지만 문무왕은 그를 매소성 전투 책임자로 임명했다. 김원술은 장창(長槍)전술과 쇠로 만든 활인 쇠뇌를 활용해 당군과 맞섰다. 매소성 밖의 벌판에서 벌어진 대결에서 장창과 쇠뇌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한때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돌궐군도 물리친 역전의 노장 이근행도 신라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과 전마 3만380필과 수많은 무기를 버리고 당나라 군대는 북쪽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매소성 전투 이후 신라는 당과의 전투 18번을 모두 이겼다. 당군은 매소성 전투 이후 기세를 잃어버렸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망하게 한 천하명장 설인귀(薛仁貴)를 보내 신라를 제압하고자 했지만 신라군의 강력한 투쟁으로 676년 금강 입구인 기벌포에서 4000명이 죽음으로써 끝내 패하고 말았다.
 
  매소성 전투에 이어 기벌포(伎伐浦) 전투는 676년(문무왕 16) 소부리주(所夫里州)의 기벌포, 즉 지금의 충남 장항 앞바다에서 신라와 당(唐)이 벌인 해전(海戰)이다.
 
  1년 전인 675년 이근행이 이끄는 당의 20만 대군이 매소성에서 신라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고 궤멸되자, 이를 해전에서 만회하고자 설인귀를 시켜 황해의 신라 해군을 공략하게 한 것이 기벌포 해전의 시발이다.
 
  676년 11월 설인귀가 이끄는 병선이 기벌포를 침범하자,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 함선이 이를 맞아 싸웠지만 처음에는 신라 해군이 패했다. 이어 크고 작은 22번에 걸친 싸움이 벌어졌는데 신라군은 당 해군 4000명을 수장시키고 승리를 거둔다. 이 싸움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신라의 대당(對唐) 전쟁이 끝난다.
 
 
  김유신, 집에도 못 들르고 우물물을 마신 뒤 전쟁터로 나가다
 
김유신 장군의 재매정은 왕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신라 전성기에 경주에는 39곳의 호화저택이 있었는데 이것을 금테 두른 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한다. 이 금입택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게 김유신의 재매정(財買井)이다. 《삼국유사》를 쓴 승려 일연은 39금입택 명단을 쓰면서 ‘재매정’을 ‘김유신공의 조종(祖宗·종가)’이라고 기록했다.
 
  ‘재매정’은 집 안에 우물이 있다는 뜻인데 김유신 장군의 우물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백제 의자왕의 공세가 절정이던 645년 김유신은 매리포성(경남 거창)을 공격한 계백의 백제군을 무찌르고 개선했으나 다시 백제군이 반격에 나섰다는 소식에 집에 들르지도 못한 채 다시 출정했다.
 
  이때 김유신의 집 안, 즉 재매정 사람들이 모두 문밖에서 기다렸다. 김유신은 대문을 지나쳐 50보를 더 간 다음 말을 멈추고는 집에서 마실 물을 길어 오게 했다. 김유신이 물을 마신 뒤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예전 맛 그대로구나!” 하자 이 모습을 지켜본 군사들이 “대장군께서 집에 들르지도 않고 출전하는데 우리 같은 군사들이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러워하겠느냐”며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이 우물이 바로 김유신 장군이 전투에서 승리해 경주로 돌아왔다가 다시 백제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전쟁터로 나갔다는 그 우물이다.
  김무력·김서현·김유신·김원술은 4대에 걸쳐 신라 왕실을 떠받쳤다. 그에 대한 보답인지, 신라는 김유신 가문에 대를 이어 가며 보답했다. 태종 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서 난 딸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후처(後妻)인데 남편이 죽은 지 39년 뒤인 712년 비구니가 된다.
 
  성덕왕은 그런 지소에게 ‘부인의 작호’를 내린 뒤 “해마다 조 1000석을 내린다”는 명을 내린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지금 나라 안팎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태대각간(김유신)의 덕분입니다. 생각건대 부인은 그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경계하고 훈계함이 서로 어우러져 숨은 공이 많았습니다. 과인은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여 일찍이 하루라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해마다 조 1000섬씩 드리겠습니다.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김윤문은 발해 공격에 참여
 
김유신 장군의 재매정터에 있는 비석이다.
‘태대각간 개국공’이라는 글이 보인다.
  문무왕을 이은 성덕왕(재위 702~ 737)도 김유신의 손자들인 김윤중·윤문 형제를 총애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김유신의 손자 윤중은 성덕왕 때 대아찬(17관등 중 5등)이 되었다. 여러 번 임금의 은혜와 보살핌을 받자 왕의 친척들이 자못 질투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가윗날 성덕왕이 월성의 언덕에 올라 측근들과 술자리를 벌였다. 술기운이 퍼질 무렵 성덕왕은 “김윤중은 이리 가까이 오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한 신하가 말했다. “전하! 왕실의 친인척도 있는데 어찌 멀리 앉아 있는 신하(김윤중)를 부르려 하십니까?”
 
  이에 성덕왕이 말했다. “지금 과인이 여러분과 무사태평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다 김윤중의 할아버지(김유신) 덕분이 아닙니까? 과인이 여러분의 간언을 듣고 김유신의 공로를 잊는다면 의리가 아닐 것이오. 그 자손들을 잘 대우하는 게 의리일 것입니다. 윤중은 이리 가까이 오너라.”
 
  733년(성덕왕 32년) 발해의 침략을 받은 당나라가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김윤중과 그 아우 김윤문은 성덕왕의 명을 받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발해를 쳤다. 김유신 가문은 이렇듯 여러 대를 이어 가며 신라 왕실을 도왔고 그에 따라 재산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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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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