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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3〉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두 남자의 우정 이야기

“신경호 수림외어전문학교 이사장, 망각(忘却) 속에 묻힌 애국자 김희수 선생을 복권(復權)시키겠다”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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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하치오지 시 공동묘지에서 본 두 남자의 우정
⊙ 1983년 일본 유학 와 처음 만나… 그 이후로 김희수를 그림자처럼 보좌
⊙ 열세 살 때 일본 온 김희수는 긴자에만 건물 스물세 채 가진 ‘부동산 제왕’
⊙ 나이 들어 전 재산 중앙대에 바쳐… 도산 위기의 학교 살려
⊙ IMF와 일본 버블경제 거품 꺼지며 몰락
⊙ 5년 전 사망 후 아무도 기억 못 해
⊙ 신경호, 올 1월 수림외어전문학교 정문 앞에 흉상 제막
⊙ 신경호 “김희수 이사장의 교육입국 뜻 잇겠다”
⊙ 김희수도 포기한 수림외어전문학교·수림일본어학교 두 곳 기사회생시켜
신경호 이사장이 수림일본어학교 정문 앞에 있는 김희수 선생의 흉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흉상은 일본 도쿄에 있는 김 선생의 유일한 기념물이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자동차로 50분 거리에 하치오지(八王子)라는 도시가 있다. 학교법인 금정(金井)학원 이사장이자 고쿠시칸(國士館) 대학교수인 신경호(申景浩·54) 박사가 나를 이끌고 간 곳은 도립(都立) 공동묘지였다. 하치오지 시에 있는 이 거대한 공동묘지는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반 평이 채 안 될 것 같은 묘지가 나란히 등을 대고 있었다. 무덤들의 가로세로 줄이 자로 잰 것처럼 반듯했다. 조경도 공원처럼 잘 돼 있어 일부러 소풍 올 것까지야 없겠지만 한국처럼 혐오시설로 시민들이 기피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신 이사장은 비석에 ‘김가(金家)’라고 새겨진 무덤 앞에 섰다.
 
  “이사장님 저 왔습니다. 목마르시지요.” 신 이사장은 입구 쪽에서 받아온 물통에서 주걱으로 냉수를 떠 무덤가에 뿌리며 손으로 비석을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그러곤 휴대용 제기(祭器)를 꺼내 펴더니 ‘김 선생’이 평소 좋아했다는 카스텔라를 제수(祭需)로 올린 뒤 한국 소주를 잔에 따랐다.
 
  자주 다니는 꽃집에서 손수 고른 화환을 바치더니 돗자리를 펴고 두 번 절했다. 그는 내게도 “이사장님께 한잔 바치시지요”라고 권했다. 뜻하지 않게 연고도 없는 이역(異域) 하치오지 시의 공동묘지에서 낯모르는 인물에게 한잔을 바치고 음복(飮福)까지 하게 됐다.
 
도쿄 인근 하치오지 시에 있는 김희수 선생의 묘다. 올 들어서만 신경호 이사장은 이곳을 네 차례나 찾았다고 한다.
  신 이사장과 이 ‘김 선생’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올해에만 네 번째로 여기에 성묘 왔다고 했다. 내가 가기 바로 일주일 전 춘분에도 와서 꽂아놓은 화환이 시들지 않고 여전히 싱싱했다. ‘김 선생’은 2012년 세상을 뜬 전 중앙대학교 이사장 동교(東喬) 김희수(金熙秀) 선생을 말한다.
 
  대체 신경호와 김희수는 어떤 관계인가. 신 이사장은 김희수를 1983년 만났다. 일본에 왔을 때 전라남도 고흥 출신 청년의 나이가 갓 스물이었다. 격동의 80년대 가난했지만 배우려는 의욕에 넘쳤던 신경호는 당시 욱일승천하던 두 명의 재일교포 재계 거인(巨人)을 만났다고 말했다.
 
  한 명은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 회장이었다. 신 회장은 청년의 이름을 듣더니 자신의 먼 친척인가 착각했다고 한다. 신 회장은 신경호를 비롯해 한국에서 일본으로 유학 온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가끔 용돈을 줬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이 김희수였다. 김희수 역시 신격호 회장처럼 청년들을 도왔다. 신경호가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5대 그룹 안에 드는 롯데 신격호가 아닌 김희수를 그가 사망할 때까지 29년간 모시고 사후 다시 5년간 인연을 이어간 이유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아마도 운명적 만남이었을 것이다.
 
  “김 이사장님은 제가 긴자(銀座)의 사무실로 가면 항상 물으셨어요. 뭘 타고 왔냐고요. 전철도 종류에 따라 가격이 약간 다릅니다. 전 항상 제일 싼 것을 타고 다녔습니다. 몇 번이고 그것을 물으셨는데 훗날 생각해 보니 제가 어떤 인간인지 평가해 보려고 한 것 같아요.”
 
  2015년 1월 발간된 《민족사랑 큰 빛 인간 김희수》라는 추모 문집에서 신경호 이사장은 김희수와의 인연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83년 가을 청운의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넜습니다. 그 무렵 도쿄 한국인 유학생은 130명 정도가 전부여서 모두가 잘 알고 친구와 선후배로 서로 의지하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 당시 기업가로서 활동하고 계시는 동교 김희수 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아간 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선생님은 ‘여러분은 한국 미래의 기둥이다’ ‘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라고 하시며 여러모로 지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히 저를 가까이 두며 많이 신뢰해 주시고 결혼식 주례도 서주셨습니다.”
 
  그 이후부터 신경호는 김희수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집사(執事)라고 해도 무방하고 ‘머슴’이라고 해도 나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김 이사장이 세상을 뜬 지 5년이 지났는데도 신경호는 여전히 모두가 잊은 김 이사장을 세상 속으로 복권(復權)시키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사실 신경호는 김희수의 일화를 며칠 동안 되풀이해 말했을 뿐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자랑을 하지 않았다. 지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1963년생인 그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생회장을 지냈다고 한다.
 
  워낙 언변이 좋고 열정적이며 정치가형이어서 80년대 말 한반도를 휩쓸던 민주화 열기에 동생이 뛰어들 것을 우려한 큰형이 일본 유학을 종용했다. 신경호는 도쿄 니혼대(日本大)로 유학 왔다. 유학생활을 할 때, 학위를 취득하고 보따리 강사 생활을 할 때 그를 도운 이는 지금의 아내였다.
 
  아내는 돈을 벌기 위해 주먹밥을 만드는 분식점을 냈다. 신경호는 낮에는 여기저기 학교를 다니며 강의를 하고 저녁에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뒤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지금은 취직한 장남과 함께 앞치마를 두른 채 아내가 만든 주먹밥을 나르기도 했다고 한다.
 
긴자에는 신경호 선생이 세운 금정빌딩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진 왼쪽은 제4빌딩, 오른쪽은 긴자에 처음 건축한 제1빌딩이다.
  하치오지에 가기 전 신경호는 도쿄에서 가장 번화하고 땅값이 비싸다는 긴자의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제국호텔 뒤편에 5층짜리 허름한 건물이 있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가나이(金井) 제1빌딩’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었다. 신경호는 그 건물의 좁다른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이곳이 김 이사장님이 평소 집무하시던 곳입니다. 정말 좁지요. 사람이 셋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입니다.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일하셨어요.” 신경호는 문만 보이면 열었는데 하필 화장실이었다. 1960년대 자주 볼 수 있었던,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재래식 화장실이 꽤나 정갈했다.
 
  “이런 곳에서 이사장님이…. 이 계단 손잡이의 반질반질거리는 게 다 그분의 손때가 묻은 것입니다.” 이후로도 신경호는 나를 이 골목 저 골목 데리고 갔는데 그때마다 김희수의 소유였다는 건물이 불쑥 등장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가나이 제○빌딩’이라는 동판을 달고 있었다.
 
  전성시절 김희수는 동경에만 스물세 개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한국에도 상당한 회사와 부동산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1987년 중앙대를 인수해 자신이 고생하며 평생 번 돈을 조국의 젊은이를 위한 육영(育英)사업에 바치려 했다.
 
  그랬던 그가 2008년 중앙대를 두산그룹에 넘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4년 뒤에는 세상을 떠나 지금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몇 안 된다. 과연 김희수는 어떤 인물이고 그런 김희수를 재조명하려는 신경호는 또 어떤 인물인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보기로 한다.
 
  김희수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교동리다. 마산과 진해에 인접해 있는 작은 마을에서 그는 1924년 6월 19일 아버지 김호근과 어머니 심교련의 둘째 아들이자 칠 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진동에 터를 잡은 것은 1800년대 후반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조봉대부, 동몽교관 같은 벼슬을 지낸 덕에 그의 집안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다. 그랬던 가세(家勢)가 일제의 한일강제병합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조선인들의 땅을 빼앗았는데 그중에는 김희수의 집안도 있었다.
 
  고향에 남아 일제의 눈치를 보며 소작농으로 목숨을 연명할 것인가,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할아버지는 김희수의 작은 아버지를 먼저 일본에 보내더니 김희수의 아버지마저 일본으로 보냈다. 원수의 나라를 이기려면 원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실력이 어떤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김희수가 진동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부모 없이 자라던 김희수는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38년 부산으로 가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下關)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거기서 홀로 기차를 타고 부모가 기다리는 도쿄까지 갔다. 만 열세 살 때의 모험이었다.
 
  김희수는 학문보다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1939년 동경전기학교 고등공업과에 입학했다. 한창 전쟁 중이었지만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대대적인 건설 붐이 불 것이고 그렇다면 전기의 중요성이 커지리라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1943년 학교를 졸업한 김희수는 용케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전기회사에 취직했는데 하필 본사가 지금 북한의 평양(平壤)이었다. 그는 광복이 될 때까지 2년간 평양과 진남포를 오가며 압록강 수력 전기 등 여러 변전소에서 일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과 기술이 체득되는 기간이었다.
 
  2년간의 평양 근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니 징집명령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입대일이 1945년 8월 10일이었다. 징집은 곧 죽음을 뜻했다. 그런데 그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당시 히로시마는 일본 육군의 근거지였고 우지나 항은 일본 해군의 본영이었다.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는 34만명이었다. 원자폭탄 한방으로 7만~8만명이 당일에 사망했고 도시의 70퍼센트가 파괴됐다. 운명의 8월 10일이 됐지만 원폭(原爆)의 충격 때문인지 아무도 김희수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닷새 뒤 재일한국인들은 해방의 날을 감격스럽게 맞았다.
 
  패전한 일본은 아비규환이었다. 물가가 끊임없이 폭등했다.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쳤다. 일본인들이 그 지경이니 재일교포들의 사정은 더했다. 돌아가는 길이 쉬웠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 사정도 일본과 다름없었다.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었다. 김희수 가족은 일본에 남기로 했다.
 
  무엇을 해야 하나 하며 동경 시내를 배회하던 김희수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래 바로 이기라꼬!” 김희수는 거리에서 무릎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고 훗날 회상했다. 먹고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지만 거리의 사람 가운데 옷과 신발과 장갑을 안 낀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데 착안했다.
 
김희수 선생은 금정양품점을 차려 부를 축적했다. 일본이 올림픽을 앞두고 고도성장을 이룰 때였다.
  1947년 김희수는 유라쿠초(有樂町)에 작은 양품점을 열었다. 김희수는 양품점 이름을 ‘금정양품점’이라고 지었다. 금정은 일본인들이 부르던 김희수의 일본식 이름 ‘가나이’의 한자어였는데 뜻도 좋았다. ‘돈이 샘솟듯 나오는 우물’이니 가게 이름치고는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양품점은 갈수록 잘됐다. 물건이 달려 못 팔 지경이 됐다. 양품점이 성공하면서 생활비 걱정이 없어지자 김희수는 1949년 동경전기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양품점과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잠을 네 시간도 채 못 잤지만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주경야독의 재미를 느낄 때 조국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6·25였다. 이 전쟁이 사경(死境)을 헤매던 일본 경제를 살렸다. 1949년 말까지 2억 달러였던 일본의 외화보유액이 1951년 말에는 10억 달러로 다섯 배나 증가했다. 전쟁 특수(特需)는 일본도, 김희수 집안도 살렸다.
 
  김희수의 형은 원래 공부를 잘했다. 동경대학 조선학과를 졸업했을 정도다. 형이 김희수에게 제안을 했다. 자기가 개발한 신형 어군(魚群)탐지기 판매 사업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형이 만든 어군탐지기는 성능이 뛰어났다. 주문도 밀려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사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외상으로 물건을 줬는데 수금이 안 됐던 것이다. 그때 김희수는 발명보다 힘든 게 수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금정양품점을 동생에게 물려준 김희수는 어군탐지기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제강회사를 짧게 운영하다 매각해 버렸다.
 
  그러곤 거기서 모은 돈 5000만 엔으로 부동산 임대업에 뛰어들었다. 부동산 임대업의 요체는 입지(立地)다. 어디에 있는 건물이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수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김희수는 첫 번째 빌딩을 세울 장소로 우리 서울의 명동 격인 긴자를 택했다.
 
  1961년 4월 김희수는 빌딩임대업을 담당할 금정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마침내 긴자 한복판에 금정1빌딩이 세워졌다. 그는 새로 건물을 지을 때마다 금정 제2빌딩, 금정 제3빌딩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처음부터 임대업이 잘된 것은 아니었다.
 
  지하 2층, 지상 6층의 금정 제1빌딩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당시로선 근사했다. 그런데 가끔 문의만 들어올 뿐 임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입주자들을 통해 그 건물이 쾌적하고 관리가 잘되며 편리하다는 입소문이 날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김희수가 평생 지켜온 경영철학은 절약, 내실, 합리, 신용 네 가지였다. 그 철학을 그는 건물에 적용했다. “빌딩은 기계와 같습니다. 항상 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반드시 고장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빌딩 구석구석을 점검해야만 합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어려운 시기가 지나자 금정빌딩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입주하고 싶다는 문의가 쏟아졌다. 입주자가 몰리면서 마련한 자금으로 김희수는 곳곳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김희수의 집무실은 금정 제1빌딩 맨 꼭대기 층 일곱 평 남짓한 사무실이다.
 
금정 제1빌딩을 세울 때의 모습이다. 사진 맨 왼쪽이 김희수 선생이다.
  늘 계단을 오르내리며 김희수는 틈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그러면서 만나는 입주자들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를 물었다. 입주한 사람들이라고 다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알코올중독자 같은 말썽꾸러기도 있고 월세나 관리비를 못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희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조금 힘들어도 입주자들은 다 한 가족처럼 대해주세요. 우리가 그분들을 믿어야 그분들도 우리를 믿습니다. 그분들이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합니다. 이것을 꼭 잊지 말고 실천해 주십시오.”
 
  김희수가 부동산 임대업을 시작했을 무렵, 일본인들은 아직 부동산에 큰 관심이 없었다. 김희수는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하면서 국민소득이 꾸준히 늘어나면 머지않아 반드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리라고 판단하고 돈이 모이는 대로 땅을 사고 빌딩을 지었다.
 
  1964년 일본이 OECD에 가입하고 그해 10월 제18회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부동산 임대업은 호황을 맞게 됐다. 김희수는 큰 자본이 없었지만 임대보증금으로 다른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고 그 건물을 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융자를 받는 방식으로 땅을 사들였다.
 
  1970년대 두 차례 경제위기가 왔지만 애초부터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았던 김희수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의 사업체는 부동산 임대업 외에도 건축물 수리와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국제건축영선주식회사, 광고기획과 화재보험을 대행하는 금성산업주식회사로 늘었다.
 
  1981년 11월 10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금정기업주식회사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을 때 그의 계열사는 모두 5개로 늘어 있었다. 그에게는 ‘금정 재벌’ ‘재일교포 재벌 사업가’라는 호칭이 따라다녔다. 전성시절 그가 가진 재산의 총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맨처음 그가 5000만 엔을 갖고 시작한 금정 제1빌딩의 가치가 한때 50억 엔(한화 약 500억원)을 호가했으니 전체 빌딩을 다 합치면 조(兆) 단위에 육박했을 것이라는 게 신경호 이사장의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적이라고 말했으나 김희수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땀과 눈물, 헌신의 결과였습니다. 내 이익보다 고객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우리 빌딩에 한 번 와 보십시오. 일본에서 우리 빌딩보다 더 좋은 빌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러던 김희수의 삶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김희수는 이동할 때마다 꼭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사무실에는 오래된 책상과 낡은 의자 하나, 서너 명이 앉으면 꽉 차는 응접세트가 고작이었다. 먹는 것도 그랬다. 그는 몸에 좋은 음식을 싸게 잘 먹으면 그만이지 음식에 사치를 부릴 필요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
 
  일본에서는 작은 우동가게를 즐겨 다녔고 한국에 오면 5000원짜리 된장찌개나 칼국수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1987년 중앙대학교를 인수해 이사장이 됐을 때 한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나기도 했다. ‘중앙대 신임 재단이사장은 칼국수로 점심을 때우는 1조5000억의 부동산 재벌.’
 
  신경호 이사장에 따르면 김희수는 평생 세 개의 한(恨)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첫째, 배우지 못한 한, 둘째 가난하게 살아온 한, 셋째가 나라를 잃은 한이었다. 그것을 풀기 위해 김희수는 아무리 한민족이 우수해도 역량을 발휘할 토대가 없어선 안 된다고 믿었다.
 
  “진정한 애국이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가진 우수한 역량을 길러낼 수 있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김희수 이사장님께서 1985년 일본에 수림외어(外語)전문학교를 세우기로 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다고 김희수가 부동산 임대업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조차도 무관심했던 조림사업의 미래를 보고 1963년부터 일본 북해도에 180여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임야에 조림사업을 실시한 것이다. 신경호 이사장은 그것이 “100년 앞 인류의 미래를 걱정한 활동”이라고 했다.
 
수림외어전문학교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으나 신경호 이사장이 인수한 후 부채를 전부 상환하고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1985년 무렵 한국에서 인수할 만한 교육기관이 없으면 직접 대학을 설립하려던 김희수는 당시 5공 정부가 대학 신설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자 뜻을 접었다. 그 사이 경영상태가 좋지 않거나 학내 분규에 휘말려 있던 몇몇 학교에서는 그에게 재단 인수를 타진해 왔다.
 
  이런 일들이 진척이 없자 김희수는 그해 수림외어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수림은 김희수의 ‘수’자와 그의 아내 이재림 여사의 ‘림’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1988년 마침내 수림외어전문학교는 2년제 대학으로 인가받아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를 가르치는 4개 학과를 개설하고 첫 입학생 320명을 뽑아 개교했다.
 
  그즈음 김희수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매달린 게 중앙대였다. 당시 중앙대 재단은 사학비리에 연루돼 비자금설, 부정입학설이 파다했다. 또한 이사장이 발행한 어음이 부도 처리되면서 713억원에 달하는 빚의 규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때 김희수는 필생의 결단을 내렸다.
 
  부도 위기에 빠진 중앙대 재단을 인수키로 한 것이었다. 그가 결심을 내린 이유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 7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유명 종합대학이 문을 닫는다면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이라는 것이다.
 
  둘째,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나 좋은 기업이 나선다면 당연히 양보하려 했지만 당시 국내의 어떤 기업이나 사업가, 교육자도 나서지 않았다. 군사정권 시절인데도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는 말썽 많은 학교의 재단을 많은 돈을 들여 인수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셋째, 어렵게 서울올림픽을 유치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는데 재단 부정으로 학교가 문을 닫는 모습을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당시 중앙대 부채는 713억원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중앙대 1년 예산 200억원의 3.5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김희수가 중앙대 재단을 인수해 처음 한 일은 빚을 갚는 것이었다. 일본에 있는 땅과 빌딩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돈을 들여온 뒤 전임 이사장이 발행한 어음을 회수해 현금으로 변제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중엔 가짜 어음이 많았다고 한다.
 
신경호 이사장은 메모광이다. 김희수와 나눴던 대화를 깨알같이 기록했다.
  당시 김희수는 80년대 한국의 사회적 풍토나 분위기, 대학 사회의 현실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일본에서 했던 것처럼 정직과 신용으로 대처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진리를 탐구하는 이 시대 최고 지성인들의 요람인 대학에서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게 김희수가 노년에 겪은 불행의 단초였다.
 
  중앙대를 한국에서 유일한 부채 없는 대학으로 만든 뒤 김희수는 기숙사를 신축하고 도서관을 새로 만들었으며 학생회관 등 여러 건물을 증축했다. 흉물스럽던 중앙대는 이제 말끔한 외관과 활기가 넘치는 상아탑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신경호 이사장에 따르면 그때 김희수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은 너무 다른 나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정서나 풍토, 기업과 조직 운영 방식, 공무원들의 생각과 자세, 대학의 분위기,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태도가 다 달랐습니다.”
 
  신 이사장은 말했다. “김희수 이사장님은 기업을 하듯 사업을 벌이듯 학교 일을 하고 싶지 않아 하셨습니다. 자기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헌신하면 학생들이나 교수들, 직원들과 학부모들, 나아가 정부까지도 이런 자신을 이해하고 협조해 주며 믿어줄 것으로 확신하셨지요.”
 
  하지만 언론은 그를 ‘돈 나와라 뚝딱’ 하는 식의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었다. 교수들은 그간 참았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학생들조차 학교가 하루아침에 천지개벽하듯 바뀌리라는 장밋빛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틈을 타 교직원들과 보직교수들은 80년대 말 민주화 열기에 편승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는 인기 발언을 일삼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부도날 뻔했던 학교가 갑자기 ‘동양 최대의 병원’을 짓겠다는 발표를 김희수에게 사전 허락도 받지 않은 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보직교수들과 학교 책임자들은 사석에서 공공연하게 “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이사장님이 다 알아서 해주기로 하셨다” “머지않아 중앙대학교가 동양의 하버드 대학이 될 거다. 두고 봐라”라는 식의 말을 하고 다녔다.
 
  이런 무책임한 발언의 책임은 진위(眞僞)에 관계없이 고스란히 김희수에게 돌아왔다. 학생들은 “약속을 지키라”며 김희수를 몰아붙였다. 김희수가 온갖 비리에 연루돼 있었지만 한 사람도 징계하지 않고 감싸 안았던 비리 교직원과 교수 가운데 일부의 태도가 완연히 바뀌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앙대에는 괴상한 이름의 단체들이 만들어져 김희수와 재단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유인물을 배포했으며 총장실과 이사장실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중에는 집무실의 집기를 본관 앞 연못에 빠뜨리는 일까지 태연하게 일어났다. 김희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다 1997년부터 김희수에게 동시에 악운(惡運)이 찾아왔다. 한국에 나라를 거덜 낼 뻔했던 IMF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국내에 있던 김희수의 사업체들은 그 태풍의 직격탄을 맞고 무너져 내렸다.
 
  일본에 있던 사업체들은 저 유명한 버블경제의 붕괴로 영향을 받았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김희수가 평생 일궈왔던 기업들이 휘청대는 순간 김희수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즉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간다는 말의 뜻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2008년 중앙대 재단을 두산그룹으로 넘겼다. 1987년 9월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22년 만의 퇴장이었다. 그리고 두산에서 받은 1200억원으로 수림재단과 수림문화재단을 한국에 설립했다. 김희수는 2010년 5월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동양의 MIT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업과 대학은 다르지요.”
 
  그 말을 한 지 한 달 후인 2010년 6월 1일 김희수는 심근경색과 뇌경색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1년8개월 뒤인 2012년 1월 19일 그는 88년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중앙대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인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그의 가족들 가운데 교육사업에 뜻을 둔 이는 아무도 없다. 유일하게 1983년 김희수와 만난 이후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했던 신경호 이사장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는 김희수가 중앙대를 맡으면서 방치한 학교 두 곳을 인수했다.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입니다. 이 학교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어요. 중앙대에서도 폐교하라고 했고 김희수 이사장님도 골칫거리로 생각하셨고요. 제가 인수해 일본의 공적자금을 끌어왔지요. 지금은 빚을 다 갚았습니다. 건물이 낡았는데 손볼 수 있는 곳은 다 수리했습니다.”
 
  수림외어전문학교와 2001년 수림일본어학교가 처음 세워졌을 때 당시 학교 설립준비 단계부터 일을 도맡아하고 학교 카운슬러, 강사, 부교장으로 올라온 그에게 김희수는 “신군, 학교 일은 자네에게 모두 맡길 테니 자네 힘으로 학교를 재건하도록 해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알려지지 않은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를 살리기 위해 중국부터 베트남까지 학생 유치를 위해 뛰어다녔다고 한다. 말이 학생 유치지 앵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두 학교는 현재 일본 내에서 최상위권의 전통 있는 학교로 발돋움했으며 수백 명의 졸업생과 동시 통역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취재하는 동안 신경호 이사장이 화장실에 꽤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긴자의 금정1빌딩에서도 그러더니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에서도 항상 화장실부터 보여주려 했다. 그는 “제일 더럽다고 여기는 화장실이 깨끗해야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도쿄 스미다구 료고쿠에 있는 수림일본어학교에는 김희수 이사장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銅版)이 있었다. 김희수 이사장의 5주기를 맞아 올 1월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일본 내에 지금 남은 김희수의 흔적은 ‘금정빌딩’이라는 동판과 무덤과 이 동판밖에 없다. 한국에는 수림재단과 수림문화재단뿐.
 
수림일본어학교 각 층에는 김희수 선생의 사진이 있다. 그 앞에서 평소 고인과 친했던 일본인 아라이 의원(왼쪽)과 신경호 이사장이 장난을 치고 있다.
  수림일본어학교의 각 층에는 김희수의 어록(語錄)이 벽에 적혀 있었다. 층마다 돌면 작은 김희수 박물관 혹은 김희수 기념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 김희수를 되살리는 데 진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액의 유산이라도 받은 것일까?
 
  “제가 젊었을 때 이사장님을 돕다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만일 중앙대 이사로 함께했다면 마지막에 그렇게 허무하게 나오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라도 나서지 않으면 누가 김희수 선생의 그 열정적인 삶을 기억하겠습니까.”
 
  그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려 노력할 때,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고쿠시칸 대학 교수가 됐을 때 김희수는 말렸다고 한다. 그때마다 신경호는 말했다. “제가 3년을 못 버티면 돌아오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겨낼 겁니다.”
 
  그는 젊을 적 김희수에게서 딱 한 번 3천만 엔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세 자녀를 키우며 좁은 집에 살던 그가 침대를 수리하다 다쳐 머리에 상처가 났을 때였다.
 
  그 모습을 본 김희수는 “어쩌다 그렇게 다쳤느냐”고 물었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김희수는 쌈짓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더 넓은 집을 얻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갚지 않아도 좋지만 차용증이나 하나 쓰라고 한 게 김희수 사후(死後) 문제가 됐다고 한다.
 
  이 차용증을 나중에 김희수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이가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도 거액의 고리(高利)를 붙여 요구했다. 이때 일본에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신경호는 집을 팔아 깨끗이 그 돈을 갚았다고 했다. 또한 한국에서도 방해 세력에 의해 고발되어 대검찰청까지 가는 송사에 휘말렸다. 그러나 모두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손해 보는 게 김희수를 욕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앙대재단을 내놓고 받은 1200억원으로 김희수가 소주회사를 인수하려 했을 때, 이를 적극 말린 것도 신경호였다. 그는 “이사장님, 교육사업을 하신 분이 소주회사를 하시면 세상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원래 계획대로 재단을 만들어 사회를 돕는 일을 하십시오.”
 
  당시 김희수는 한국과 일본에서 금융블랙리스트에 올라 신용카드 한 장 발급받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쪼들렸다. 그런데도 김희수는 그의 후계자로서의 신경호의 말을 수용했다. 신경호는 김희수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김희수가 끝까지 명예를 지키도록 했다.
 
  현 수림문화재단 하정웅 이사장은 생전 어느 봄날 김희수를 찾아가 향후 재단의 방향과 후계 구도를 논의했다고 한다. 김희수는 “재단 일에 대해 가족은 관계, 관심도 없으니 신경호 군을 잘 부탁한다”고 전했으며, 현재 재단에 대한 유언으로서 남게 되었다.
 
  현재 수림문화재단은 문화강국 코리아를 세계에 각인시키기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신경호는 이 재단의 상임이사를 맡아 김희수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과 일본을 바쁘게 오가고 있다.
 
  오십대 중반을 힘차게 달리고 있는 신경호 이사장의 꿈은 뭘까. “김희수 선생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그분이 했던 교육·문화사업에서 더 성과를 내려 합니다. 제가 중국에서도 외국어학교를 운영한 경험이 있습니다. 한중일(韓中日)의 젊은이들이 서로의 언어를 익히고 교류한다면 얼마나 서로 발전이 되겠습니까.”
 
  일본 전(前) 참의원이며 신당개혁 당수였던 아라이 히로유키(荒井広幸) 6선 의원은 김희수와 신경호의 관계를 오랜 기간 한국과 일본의 육영사업 등의 관계를 통해 지켜본 산증인이다. 그는 성실하며 정직한 신경호야말로 김희수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할 후계자로서 굳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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