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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1〉 道가 사라진 세상, 남명에게 지식인의 절개를 묻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지도자 자신이 선(善)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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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상(秋霜)같은 절개의 선비 조식의 삶을 되돌아본다
⊙ 주자학뿐 아니라 천문·지리·병법도 익혀
⊙ 제자들에게 ‘문무병중’ 교육… 임진왜란 때 영남의 3대 의병장이 모두 그의 제자
⊙ 홍의장군 곽재우는 외손녀 사위… 직접 혼사에 나서 전쟁에 대비한 인재로 길러
⊙ 평생 벼슬 거부하고 처사(處士) 자처… 나라에 문제 생기면 직선적인 상소
⊙ 그의 제자들 인조반정 후 몰락… 동갑 퇴계에 비해 저평가
대문에서 바라본 남명매다. 그 뒤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보인다.
  가히 배신(背信)의 시대다. 참모가 주군에게 등을 돌린다. 머슴이 주인의 약점을 쥐고 겁박한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들고 있다. 상하가 역류(逆流)하니 강호의 도(道)가 땅에 떨어져 윤리가 간 데 없다. 경상남도 산청(山淸)을 찾은 이유는 우리를 지탱해 온 선비정신을 느끼고자 함이다.
 
  일찍이 조선을 지배한 이념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학자 사마광(司馬光)에게서 왔다. 그는 《자치통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신 간의 위상은 영구히 바뀌지 않는다.”
 
  이 한마디가 조선의 정치를 틀에 박히게 했고 관료주의와 관존민비 사조를 낳았다.
 
  이것을 준열히 비판한 처사(處士)가 있다. 상하 주종관계를 횡적 평등관계로 바로잡고 권력에 짓밟히던 민생을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시각으로 바꾸려 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이다. 그가 평생 추구하며 실천했던 것은 경(敬)과 의(義)였다. 그 기개의 일단을 엿본다.
 
  지리산 천왕봉을 큰 종(鐘)으로 여기며 자신이 그 종을 울릴 거대한 공이가 되겠다고 다짐한 이가 남명이다. 그는 노년에 들어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도를 실천하다 숨을 거뒀다. 그가 쓴 ‘천왕봉’이라는 시에 이 재야에 묻힌 지식인의 웅혼한 야망이 담겨 있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萬古天王峯(만고천왕봉)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천 석으로 만든 종을 보아라 / 세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 만고의 천왕봉은 / 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

 
  남명은 1501년(연산군 7년)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조언형, 어머니는 인천 이씨로 충순위 이국의 딸이자 좌의정 최윤덕의 손녀다. 예언가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씨 댁이 명당이라 닭띠 해에 태어날 아기는 현인이 될 것이다.”
 
  남명의 외조부는 외손자를 봐 기뻐하면서도 “우리 가문의 운(運)이 조문(曺門)으로 넘어갔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다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남명은 아버지가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했다. 아홉 살 때 큰 병을 앓았는데 걱정하는 어머니를 남명은 오히려 달랬다고 한다.
 
  “하늘이 나를 보내실 때는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릴 적 이윤경·이준경 형제, 이항 등과 죽마고우로 지내던 남명은 아버지가 함경남도 단천군수로 부임하자 따라가 경서·역사·시문뿐 아니라 천문·지리·의학·궁마·진법 등 각 분야의 지식을 두루 길렀다.
 
 
  담력 키우려 물그릇 받쳐 들고 밤을 새우기도
 
조식 선생이 생애 마지막까지 거처했던 산천재.
  정신력과 담력을 키우기 위해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일세(一世)를 경륜하려던 그의 삶에 변화가 온 것은 그가 열여덟 때였다. 서울로 돌아와 성수침과 성운 종형제를 만났는데 그들의 영향으로 세속에서 출세하겠다는 뜻을 접고 깊은 인생의 경지를 추구키로 한 것이다.
 
  스무 살 때 남명은 생원시-진사시 양 과에서 1, 2등으로 급제했는데, 이때 일어난 기묘사화로 개혁의 기수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사약을 받자 시국을 한탄하며 벼슬길을 단념했다. 그는 서른 살 때 처가 김해로 이사했다.
 
  여기서 공부하기 위해 지은 것이 산해정(山海亭)이다. 정자의 이름은 그냥 붙인 것이 아니다. 태산(泰山)에 올라 사해(四海)를 바라보는 기상을 기르겠다는 뜻이었다. 진흙에서 연꽃이 피듯 산해정에는 젊은 준재들이 몰려들었다. 성대곡·이청향당·이황강·신송계 같은 이름난 유학자들이었다.
 
  김해에서 남명은 18년을 보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사림(士林) 사이에서 널리 퍼져 사림의 영수(領袖)가 됐다. 조정(朝廷)은 남명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했다. 48세 때 김해를 떠나 고향 토동으로 돌아간 남명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었다.
 
 
  계부당과 뇌룡정에 담긴 후학 양성의 꿈
 
  계부당은 말 그대로 닭이 엎드려 알을 품는다는 뜻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도장이었다. 뇌룡정은 용의 꿈틀거림처럼 뇌성을 발한다는 뜻으로 이는 초야에서 냉정히 세상을 바라보다가 국정이 문란해지거나 부조리해지면 가차 없이 비판의 채찍을 들고 국책을 건의하겠다는 뜻이었다.
 
  계부당과 뇌룡정 시절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온 이가 정인홍·오건·노옥계 같은 제자들이었다. 이들이 내린 남명에 대한 평가다.
 
  “하늘처럼 우뚝하다. 태산처럼 우람하다. 서릿발처럼 차갑다. 뙤약볕처럼 뜨겁다. 한 시대를 굽어본다.”
 
  남명이 평생 추구했던 것은 앞서 말했듯 경과 의였다. 남명은 자신이 항상 휴대했던 ‘경의검’이라는 패검(佩劍)에 이런 글귀를 새겼다.
 
  “내명자(內明者)는 경이요, 외단자(外斷者)는 의다.”
 
  먼저 자신을 수양해 근본을 세운 뒤 밖으로 정의를 과단성 있게 실천한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남명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 성성자(惺惺子)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스스로를 일깨우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성은 ‘깨달음’이라는 뜻의 한자어다.
 
 
  처사의 역할은 재야에서 나라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남명의 동상이다. 이런 우스꽝스런 동상이 전국 도처에 있다. 차라리 세우지 않는 게 좋아 보인다. 이 동상은 옥으로 만든 것인데 중국에서 제작됐다고 한다.
  그래서 남명을 추종하는 남명학의 후예들은 근본을 세우고 실천을 중시해 기존의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렇다면 남명이 추구했던 처사정신은 무엇인가. 남명이 처사를 자처한 것은 숨어 살기를 즐겨 하는 은둔지사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산청군이 펴낸 책자에 풀이가 나온다.
 
  선생은 은둔지사가 아니며 관직을 기피하는 불사(不仕)주의자도 아니다. 선생이 말하는 처사란 바로 운동경기에 있어서 법규에 따라 심판하는 심판 같은 것으로 세상의 돌아감을 지켜보고 올바른 도리를 밝혀서 전하고 그마저 어려움에 처할 때는 목숨을 내걸고 저항하는 도리를 밝히고(明道) 도덕을 전파하고(傳道) 인간의 올바른 도리를 수련(修道)하는 것이다.
 
  30대 후반에 이미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말이 퍼졌다. 서른일곱 살 되던 해 남명은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자 어머니를 설득한 뒤 본격적으로 처사로서의 삶을 걸었다. 그의 치열함은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중종 33년(1538년) 남명은 헌릉참봉에 임명됐지만 이를 고사했다. 헌릉참봉직을 내리도록 왕에게 그를 추천한 이는 회재 이언적이었다. 1544년에는 관찰사가 면담을 청했지만 거절했다. 남명과 동갑인 퇴계 이황 역시 왕에게 남명을 추천해 단성현감을 제수했지만 받지 않았다.
 
  1545년 즉위한 인종이 다시 남명을 조정으로 불렀지만 남명은 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명종 즉위 후 외척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자 남명은 그들을 비판했다. 이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뒤에 선조 때에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그 뒤 선무랑에 제수되었다가 앞서 말한 대로 퇴계의 추천에 의해 1555년 단성현감, 1556년 종부시 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했다.
 
 
 
‘단성소’에 이미 나라의 변란 예감

 
  단성현감 사직 시 올린 상소는 ‘단성소’ 혹은 ‘을묘사직소’라 불린다. 선조에게 바친 ‘무진봉사’와 함께 남명이 남긴 양대 상소문으로 유명하다. 단성소의 골자를 알아본다.
 
  …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 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 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 말단 관리들은 아래서 히히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입니다. … 궁궐 안의 신하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궁궐 밖의 신하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며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이 생각해 보면서 탄식만 나올 뿐 낮이면 하늘만 쳐다보기 여러 차례였고 밤이면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잠 못 이룬 지 오랩니다. 자전(紫殿·왕의 어머니)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어리신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 가지, 백 가지나 되는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 … 평소 조정에서는 매관매직을 하고 재물을 수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민심이 흩어져 결국 쓸 만한 장수도 없게 되고 성안에 병사 한 사람 남아 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적이 막힘없이 쳐들어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배 속의 병은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단성소는 조정의 신하들뿐 아니라 왕과 대비를 직선적으로 공격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사(兩司)에서는 “불경하다”며 처벌하라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과 사관(史官)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하다”며 그를 적극 옹호했다.
 
  1561년 남명은 지리산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지었다. 산천재는 《주역》의 ‘산천(山天) 대축(大畜)’ 괘에서 따 지은 것으로 제자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이때 그가 남긴 ‘덕산에 묻혀 산다(德山卜巨)’라는 칠언절구가 산천재 네 기둥의 주련(柱聯)에 새겨져 있다.
 
  春山底處无芳草(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오마는 /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 흰 물줄기 십 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450년 전 무진대사에 담긴 요즘 한국 사회의 문제점
 
남명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 앞에 있는 세심정이다.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이다.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무진대사에 있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혹자는 무진대사에 요즘 한국 사회의 폐단이 다 나와 있다고 한다. 그 골자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남에게서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임금 자신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 그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선을 밝힌다는 것은 이치를 궁구함을 말함이요 몸을 정성스럽게 한다 함은 몸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 인재를 얻는 것은 임금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 자신이 몸을 닦지 않으면 사람을 저울질하고 보는 능력이 갖추어 있지 않아 선악을 분간하지 못할 것이며 그러한 눈으로 사람을 취하고 버리면 모두 실패할 것이며 또한 임금이 직접 인사를 관장하지 않고 남에게 맡긴다면 누가 임금과 더불어 치도(治道)를 이룩하려 하겠습니까? … 고래로 권신이 제멋대로 결정한 일이 혹 있었고 외척이 발호한 일이 혹 있었고 내시가 정령을 가로챈 일이 혹 있었습니다만 지금처럼 서리들이 나랏일을 농락하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습니다. 군민의 온갖 정사와 국가의 기밀이 모두 그들 손에 의해 처리되고 지방의 납세와 공물이 먼저 그들의 배를 채운 뒤에야 비로소 전달되는 것입니다. … 전하께서 하늘이 굽어보듯 크게 노하시어 왕권의 위엄을 떨치시고 친히 재상과 집사들을 조사하여 그 까닭을 규명하시고 마치 순임금이 네 악당을 물리치고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것처럼 직접 처단하신다면 이는 임금이 악을 극도로 미워하심을 알고 백성들이 죄악을 범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1571년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그는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1월에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했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 영남의 3대 의병장 비롯해 50여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싸워

 
덕천서원의 모습이다. 원래 이름은 덕산서원이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남명은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으며, 음력 2월 8일,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의 나이 만 70세였다.
 
  남명의 제자들 가운데 유명한 이로는 김효원,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정인홍, 훗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등이 있다. 남명의 제자들은 북인(北人)으로 불렸는데 훗날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1624년 인조반정으로 물러나면서 북인은 대부분 실각했고 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북인은 거의 숙청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인지 남명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매우 저평가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남명학파들은 말한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한번은 퇴계가 그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남명은 “자기도 여러 번 사퇴했으면서 나보고 관직에 나갈 것을 권하는 저의가 뭐냐”고 했다. 퇴계가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에 심취한 반면 남명은 실천에 집중했으며 노장(老莊)사상도 포용했다.
 
  이 때문에 퇴계는 남명을 향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을 했고, 이에 대해 남명은 “요즘 학자들(퇴계를 지칭)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고 맞대응했다.
 
  퇴계의 남명 비판은 훗날 남명의 수제자격인 정인홍이 남명을 옹호하는 글을 올리면서 다시 재현되었다.
 
  신(정인홍)이 젊어서 조식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故)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뻣뻣한 선비는 중도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 … 조식과 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습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습니다. …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 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황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후일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해 동인(東人)을 형성했다가 다시 사상 차이로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화한다. 이런 분파주의는 조선의 고질병인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곽재우의 재주 눈여겨보고 외손녀 사위 삼아
 
조식 선생이 머문 경상남도 산청에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상징이 많다. 사진은 수령이 700년이나 되었다는 감나무다. 여기서 열린 감은 서울의 백화점에서 한 개에 5000원씩에 팔린다고 한다.
  남명은 서거하기 전 전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정인홍·김면 등 남명의 제자들은 영남의 3대 의병장으로 불릴 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이 세 분 외에도 남명의 제자로 의병장이 된 사람이 오십 명에 이른다.
 
  남명 문하생들의 의병활동은 관군의 패주와 조정의 몽진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반격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싸울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으며, 호남 곡창 지대의 보존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것으로 인식했다. 경상우도 의병들의 분전은 결국 호남의 곡창을 지킨 밑거름이 됐다.
 
  흔히 의병은 의기로만 싸워 헛된 희생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남명 문하생들이 이끄는 의병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의병장들이 문사(文士)이면서 무예와 병법을 배웠기 때문이니 남명이 실천한 문무병중(文武竝重) 교육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로써 남명의 문하생들은 선조-광해-인조 시대 초반까지 학계-정계-의병 등으로 폭넓게 활약했으니 한 처사의 교육 역량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내친김에 남명의 외손녀와 결혼한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지나간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출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지낸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수(守)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 강씨의 셋째 아들로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1117~1179)으로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 때 귀화했다. 곽재우는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는데 후에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됐다.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 역시 스승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돼 동서간이 됐다.
 
  그 뒤 상경하여 과거시험에 응시, 낙방했지만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남명은 자신의 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소식을 묻곤 했다. 일설에 따르면 곽재우가 연달아 과거시험에 실패하자 남명은 차라리 병법을 익히라고 권했다고 한다.
 
  곽재우는 1585년 과거에서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그의 글을 읽은 선조가 기분 나빠해 합격이 취소되고 만다.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학문 연구와 농사를 지으며 고향에서 은거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패하고 임금이 의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같은 해 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적은 깃발을 만들었다.
 
  그는 2000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서 신출귀몰 왜군을 물리치고 왜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했으며 왜의 보급선을 기습하기도 했다.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곽재우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정암진(鼎岩津·솥바위 나루) 전투다. 곽재우는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날랜 병사 몇 명을 선발,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해 화살 공격으로 전멸시켰다. 왜군도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군은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로 표시를 해놓았는데 이를 지켜보던 곽재우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왜군 2만명은 다음날 잘못 표시된 표지목을 따라가다 늪지로 들어섰고 마침내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경상남도 사람들은 조식이 있어 절의를 숭상한다
 
  그는 기묘한 전술을 구사했다. 예를 들면 적군 군선의 예상 경로에 통나무를 띄워 적의 물자 보급을 막았다. 다른 병사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붉은 옷을 입혀 교란 전술을 쓰는가 하면 보물이 들어 있을 법해 보이는 황금 상자에 벌을 담은 후 길가에다 놓아둬 상자를 열어본 왜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남명과 그 제자들의 공은 사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한 사관은 “영남에 선비가 많이 나고 풍속이 돈독한 까닭은 퇴계와 남명이 모두 영남에서 나서 도학 발전에 힘썼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또 다른 사관은 “좌도(경북)에는 이황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고 우도(경남)에는 조식이 있어 절의를 숭상하여 영남의 풍속은 자못 눈여겨볼 만하다”고 했다. 실학의 거두인 성호 이익은 “대체로 우도 사람들은 선량하면서도 정의로운데 이는 남명의 기풍을 본받아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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