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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0〉 1930년대의 불우한 두 천재 김유정과 이상

“명일(明日)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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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우한 두 천재, 어릴 적부터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비슷한 길
⊙ 어려서 부모 잃은 김유정, 말더듬이 증세로 사랑도 실패
⊙ 김유정 단편은 순우리말의 보고(寶庫)… 뽀뽀라는 단어도 처음 사용
⊙ 그가 살던 춘천시 신동면 실레길은 창작의 현장
김유정 생가에 있는 김유정 동상.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에 ‘실레길(道)’이 있다.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금병산(錦屛山)이다. 비단이 병풍처럼 마을을 휘감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해발 652m다. 천재 시인 이상(李箱)과 함께 1930년대 한국 단편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김유정(金裕貞·1908~1937)이 2월 12일 여기서 태어났다.
 
  김유정의 삶은 1914년 그가 서울 종로구 운니동으로 이사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대저택이었지만 1년 뒤인 1915년 어머니가 사망했고 다시 2년 뒤인 1917년 아버지(김춘식)가 아내를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잇따라 부모를 잃은 그는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말을 더듬게 됐다. 이 증세로 그는 여인(女人)들에게서 외면당했다.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김유정은 1930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는데 당대의 명창(名唱) 박녹주(朴綠珠·1905~1979)를 열렬히 사랑했다. 본명이 명이(命伊)인 박녹주는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12세 때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대의 명창 송만갑, 정정렬, 유성준, 김정문 등이 그를 가르친 스승들이었다.
 
  김유정 생가 맞은편에 있는 김유정 문학마을에는 옛날식 전화기가 놓여 있다. 수화기(受話器)를 들면 두 사람의 대화를 성우(聲優)들이 현대식으로 재연해 놓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연상의 박녹주가 학생 신분인 김유정을 매정하게 타이르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자네는 아직 어리니 열심히 공부한 뒤 찾아오라”는 요지다.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반한 것은 1928년 봄, 조선극장에서 열린 8도 모창대회에 출연한 박녹주를 봤을 때였다고 한다. 김유정은 대회 후 박녹주의 대기실로 찾아갔다. 그 후 김유정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 자신의 음성을 녹음한 레코드 등을 박녹주에게 보냈다. 결국 참다못한 박녹주가 김유정을 불러 일장훈시를 한 것이다.
 
  박녹주가 조선극장 지배인과 애정문제로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1931년 5월 2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자 김유정은 병원으로 박녹주를 찾아가 나와 결혼해 달라며 고백한다. 그런데 박녹주는 “남자를 못 믿겠다”며 통곡하며 다시 거절했다. 다음날 박녹주의 집 앞에서 김유정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김유정은 박녹주를 따라다니다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라는 내용의 혈서를 보내기도 했다. 마침내 박녹주는 김유정에게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제 잘못입니까?”라고 타일렀다. 이 말에 김유정은 박녹주를 단념하게 됐다.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해 놓은 동상들이다.
  박녹주 못지않게 김유정을 낙담케 한 또 다른 이는 시인 박용철의 동생 박봉자(1909~1988)다. 잡지 《여성》에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공동 제목으로 박봉자와 김유정의 글이 나란히 실렸다. 이후 김유정은 박봉자에게 절절한 연서(戀書) 30여 통을 보냈으나 박봉자는 답장을 일절 하지 않았다.
 
  박봉자는 김환태와 결혼한다. 평론가 김환태는 유치진과 조용만이 구인회를 탈퇴했을 때 함께 구인회에 가입한 사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김유정은 절망했다. 기록은 없지만 김유정은 말을 더듬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것이다. 대신 말로 하지 못한 열정을 원고지에 쏟아부었지만 이때 늑막염과 치질에 걸리게 된다.
 
  만신창이가 된 김유정은 낙향했다. 박녹주를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결석해 제적된 것이다. 2년간 고향에서 금병의숙을 짓고 야학활동에 열심이던 김유정은 1930년대 일제 식민지 치하의 궁핍한 농촌 현실을 절절히 체험하게 된다. 1933년 다시 서울로 간 김유정은 농촌과 도시의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신명 나게 그려낸다.
 
  1933년 잡지 《제일선(第一線)》에 〈산골나그네〉와 잡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 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됐다. 같은 해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선 〈노다지〉가 가작입선했다. 한 해에 두 차례 신춘문예에 입상한 것은 그의 성공을 담보해 주는 것 같았다.
 
김유정의 생가다.
  본격적으로 등단(登壇)한 김유정은 ‘구인회’의 멤버가 돼 창작에 열정을 불사른다. 구인회의 멤버를 살펴본다. 김기림(1908~?)은 함경북도 학성 출생으로 시집 《기상도》 《바다와 나비》 등을 남겼고 6·25 때 납북됐다. 정지용(1902~?)은 충북 옥천 태생으로 서정시의 대가다. 잡지 《카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일 때 이상이 등단했고 1939년에는 《문장》을 통해 조지훈·박목월·박두진의 청록파를 등단시켰다.
 
  이효석(1907~1942)은 강원도 봉평 출신으로, 그가 쓴 〈메밀꽃 필 무렵〉은 소설을 시(詩)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이태준(1904~?)은 현대소설의 기법을 마련한 작가로 유명하며 그가 쓴 〈문장강화(文章講話)〉는 지금도 글쓰기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꼽힌다.
 
  이무영(1908~1960)은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으나 손기정 선수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퇴직해 〈흙의 노예〉 〈역류〉 같은 소설을 써 농민문학의 효시로 꼽힌다. 조용만(1909~1995)은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반기를 들고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구인회의 산파역이었다.
 
  구인회는 들어오고 탈퇴한 작가들이 많았지만 항상 아홉이라는 숫자를 유지했다. 김유정은 이런 구인회의 후기 멤버 가운데 한 명이었다. 김유정이 구인회에 가입한 것은 유치진과 조용만이 탈퇴했을 때였다. 훗날 김유정과 깊은 교분을 쌓는 이상은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했을 때 박태원·박팔양과 함께 구인회 멤버가 됐다.
 
  이런 쟁쟁한 문학가들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김유정은 1936년 대표작이라 할 〈동백꽃〉을 발표했다. 동백꽃은 우리가 흔히 아는 붉은 꽃이 아니라 ‘생강나무꽃’으로 노랗고 멀리서 보면 산수유와 비슷하게 생겼다. 김유정 생가에는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장면을 재연해 놓은 동상과 닭 조형물이 있다.
 
  사람들이 없으면 틈틈이 즈 집 수탉을 몰고와서 우리 수탉과 쌈을 붙여놓는다. 나는 약이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나뭇지게도 벗어놓을 새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지게막대기를 뻗치고 허둥지둥 달겨들었다.
  - 소설 〈동백꽃〉 중에서

 
동백꽃은 우리가 흔히 아는 붉은 동백이 아니라 ‘생강나무 꽃’으로 노랗다. 산수유와 비슷하게 생겼다.
  소설 속 ‘점순이’는 자기 사랑에 무관심한 나(봉필)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다 ‘나’를 꾀어 땅바닥에 자빠뜨리는데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금병산 자락에 있다. 이름하여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 길’인데 지금 그곳엔 전원주택들이 하나둘씩 들어서 있고 문제의 그 길은 얼마 전까지 카페였는데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고 있다.
 
  내친김에 김유정 생가 위쪽부터 금병산까지의 실레길에 있는 몇몇 ‘길’의 종류를 알아본다.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 길’은 실제로 스무 살도 안 된 들병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인제나 홍천에서 넘어오던 길이다. 소설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등에 나오는데 들병이란 병술을 받아 파는 떠돌이 술장수를 뜻한다.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 길’은 금병산 자락 장수골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내가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이를 낳았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마을사람들이 이런 아이가 태어나면 좋지 않다며 아이의 날개를 잘라버리자 아이는 곧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고 한다. 역시 김유정의 소설 〈두포전〉에 등장하는 길이다.
 
  금병산에는 ‘산국농장 금병도원 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 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 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 길’ ‘근식이가 자 집 솥 훔치던 한숨 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 길’처럼 해학적인 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김유정 문학마을에는 그의 소설에 대한 평이 있다. “김유정이 남긴 30여 편의 단편소설은 탁월한 언어감각에 의한 독특한 체취로 오늘까지도 그 재미, 그 감동을 잃지 않고 있다. 이는 김유정이야말로 소설의 언어에서나 내용은 물론 진술방식에서 우리 문학사에 다시 없는 진정한 이야기꾼으로서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있음을 뜻한다.”
 
  김유정은 순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말들은 지금은 거의 사어(死語)처럼 된 것이 많다. 덩저리, 쌩이질, 멈씰하다, 들피지다, 괴때기, 저저히, 재우치다, 비겨대다, 줄대, 엄장, 황밤주먹, 가을하다, 보강지, 짜장, 부라질, 단작맞다, 허구리, 낙자없다, 깨묵셍이, 항차 같은 말들이 그 대표적 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요즘 즐겨 쓰는 ‘뽀뽀’라는 말도 김유정이 처음 사용했다. 홍윤표 교수는 국립국어원 정기간행물 《새국어소식》 2005년 1월호에서 ‘뽀뽀’라는 단어가 1939년작 〈애기〉에 등장한다고 했다.
 
  오, 우지마, 우리 아가야, 하고 그를 얼싸안으며 뺨도 문대고 뽀뽀도 하고 할 수 있는, 그런 큰 행복과 아울러 의무를 우리는 흠씬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작품에는 유독 ‘아리랑’이 많이 등장했다. 그래서 그를 ‘강원도 아리랑’의 작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재제 봉봉에
  아들딸 날라고 백일기도두 말게구
  타관 객리 나선 손님을 괄세두 마라
  논밭전토 쓸만한 것 기름방울이 두둥실
  계집애 쓸만한건 적조간만 간다네
  아주까리 동백아 흐내지 마라
  산골 큰 애기 떼난봉난다
  네가두 날만치나 생각을 한다면
  거리거리 노중에 열녀비가 슨다
  네팔자나 내팔자나 잘먹구 잘입구
  소라반자 미닫이 각장장판 샛별 같은 놋요강
  온앙금침 잣모벼개에 깔구덮고 잠자기는
  웅틀붕틀 멍석자리에 깊은 정이나 드리세
  - 수필 〈강원도 여성〉 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증긔차는 가자고 왼고동 트는데
  정든님 품안고 낙누낙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낼갈지 모래갈지 내모르는데
  옥씨기 강낭이는 심어 뭐하리
  - 소설 〈만부방〉 중에서

 
  그런가 하면 그의 고향 강원도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5월의 산골짝이〉라는 글의 일부분을 인용해 본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다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씨러질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산골에는 초목이 내음새까지도 특수하다. 더욱이 새로 튼 잎이 한창 퍼드러질 임시하야 바람에 풍기는 그 향취는 일필로 형용하기 어렵다….
 
  김유정의 소설은 해학적이면서 토속적이었고 때론 에로틱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동료 선후배 작가들의 평을 한번 들어본다.
 
  “죽음의 최종의 일분까지 창작의 붓을 들고 악전고투한 장한 유정! 유정은 문자 그대로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났다가 꺼졌다.”(이석훈)
 
  “고 김유정 군은 조선의 사랑이다. 조선의 피도 아니고 넋도 아니고 오로지 사랑이었다.”(김문집)
 
  “유정은 아깝게 그리고 불쌍하게 궂겼다. 나 같은 명색없는 문단꾼이면 여남은 갖다주고 도로 물러오고 싶다.”(채만식)
 
  “이제 봄빛을 앞에 두고 그와 유명을 달리하는 오늘의 심정은 애도의 정을 넘어 우리 조선 문인의 비참한 생활을 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강로향)
 
  “나는 그가 향토 기분이 누구보다도 우월한 작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모윤숙)
 
  “유정은 폐가 거의 결딴이 나다시피 못쓰게 되었다. 그가 웃통을 벗은 것을 보았는데 기구한 수신이 나와 비슷하다.”(이상)
 
  이상과 김유정의 우정은 남달랐다. 1935년 봄, 김유정의 신춘문예 당선 축하연에서 김유정과 이상이 처음으로 만났다. 두 천재작가의 만남은 한국문학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후 구인회에서 만나면서 둘은 친분을 쌓게 된다. 술을 좋아했던 이상은 종종 만취한 채 김유정을 찾았다. 이상이 쓴 글에 김유정이 등장한다.
 
  초저녁에 술을 좀 먹고 곤해서 한창 자는데 별안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시나 가까왔는데 하고 눈을 비비며 나가보니까 유정이 B군과 S군과 작반해와서 이 야단이 아닌가. 유정은 연해 성히 곤지곤지중이다. 나는 일견에 “이키! 이건 곤지곤지구나”하고, 내심 벌써 각오한 바가 있자니까 나가잔다.
 
  “김형!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 허십시다.”
 
  “아따, 그러십시다 그려.”
 
  이래서, 나도 내 벙거지를 쓰고 나섰다.

 
  1931년 이상은 한 공사 현장에서 처음 각혈하며 쓰러졌다. 이후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1933년 3월 조선총독부 건축기수직을 사직하고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소설 〈봉별기(逢別記)〉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스물세살이오—3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 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금병산 쪽에서 바라본 김유정 문학촌이다.
  일제 강점기 지식인 중에는 폐결핵 환자가 많았다. 가난을 달고 살아 영양 섭취가 형편없어 폐결핵은 예술가의 질병이라 불렸다. 찰스 디킨스는 폐결핵에 대해 “죽음과 삶이 기이할 정도로 뒤섞여 있는 나머지 죽음이 삶의 홍조와 빛깔을 취하고 삶이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는 죽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질병”이라고 썼다.
 
  김유정이 〈소낙비〉로 1935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을 때 이상은 김유정에 대해 ‘운명 공동체’라는 연대감을 느꼈다고 했다. 김유정은 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됐다. 이상은 생부모를 떠나 백부에게 입양된 ‘정신적 고아’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폐결핵으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었다.
 
  1936년 7월 김유정은 과음과 밤을 새우는 집필로 폐결핵이 악화됐다. 서울 정릉(貞陵) 근처의 산에 있는 암자로 요양 간 김유정은 술과 담배를 끊으면서 병세가 호전됐다. 그렇지만 잠깐이었다. 그해 8월 하순 급격하게 병세가 악화돼 그는 병원에 가보기도 했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건강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김유정이 푸른 포장을 방 안에 치고 촛불을 켠 채 글을 쓰고 있는데, 이상이 찾아왔다. 이상이 물었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김유정이 답했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이상이 다시 물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김유정이 답했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이상은 김유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다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情死)’를 제의한 것이었다. 이때 김유정이 “이것 좀 보십시오” 하고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앙상하게 드러난 뼈였다. 그러면서도 김유정은 말했다. “명일(明日)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이상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상은 그 모습을 서글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형!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 김유정은 그 말에 엉엉 울었다. 1937년 2월 김유정은 거처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의 매부 집으로 옮겼다. 문단에서는 병고(病苦) 작가 구조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 김유정은 세상을 뜨기 전 휘문고보 동창 안회남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맹열(猛熱)이다.” 김유정은 안회남에게 탐정소설을 번역해 돈을 만들어 그 돈으로 “닭 삼십 마리를 고아 먹고 땅꾼을 사서 살모사와 구렁이를 십여 마리 달여 먹겠다”고 했다.
 
  생명에 대한 불타는 의지였지만 김유정은 답장을 받기 전인 3월 29일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일 뒤인 4월 17일, 이상 역시 일본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불우한 두 천재들은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명을 달리했다.
 
  김유정 문학마을에는 특이한 장치가 있다. 김유정이 생존했을 무렵 우리와 외국 문학가들이 이룬 성취를 비교해 놓은 연표(年表)다. 그것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거니와 여러 가지 상념(想念)이 인다. 그것을 인용해 본다.
 
  1913년. 〈절대 고독의 시인〉 김현승 출생.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 출생.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출간
 
  1917년. 최초의 장편소설 이광수 〈무정〉 발표
 
  1920년. 김동인 〈약한 자의 슬픔〉 발표. 현진건 〈희생화〉 발표. 동인지 《폐허》 종합지 《개벽》 창간
 
  1921년. 현진건 〈빈처〉 발표. 김동인 〈배따라기〉 발표.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발표. 노신 〈아Q정전〉 발표
 
  1924년. 현진건 〈운수좋은 날〉 발표. 토마스 만 〈마의 산〉 발표.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발표
 
  1925년. 김동인 〈감자〉 발표. 나도향 〈벙어리 삼룡이〉 발표. 카프카 〈심판〉 발표. 드라이저 〈아메리카의 비극〉 발표
 
  1926년. 한용운 〈님의 침묵〉 발표. 카프카 〈성〉 발표. 헤밍웨이 〈해는 다시 떠오른다〉 발표. 솔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표
 
  1931년. 염상섭 〈삼대〉 발표. 김동명 〈동방의 애인〉 발표. 생텍쥐베리 〈야간비행〉 발표
 
  1933년. 김유정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발표.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발표
 
  1934년. 김유정 〈만무방〉 〈정분〉 〈애기〉 탈고.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발표
 
  1935년. 김유정 〈금따는 콩밭〉 등 발표. 가와바다 야스나리 〈설국〉 발표
 
  1936년. 김유정 〈동백꽃〉 발표. 마거리트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발표
 
  1937년. 김유정 〈따라지〉 발표. 채만식 〈탁류〉 발표. 장 폴 사르트리 〈벽〉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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