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연의 프로이트 다시읽기 - 기억의 비밀 〈2〉 : 월간조선

피할 수 없는 현실 혹은 마음의 고통이 있을 때 흔히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현실 문제의 해결법을 찾는 한편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무의식에서 억압하거나 의도적으로 억제해 의식에서 멀리 떨어짐으로써 고통을 피하고 해결을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과거의 충격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억을 조절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정신의학자가 프로이트 교수다. ‘억압’은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관념이 의식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정신적 힘이며, 억압의 기본 작용은 ‘단순히 무언가를 의식에서 멀리 두는 것, 그리고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억압에 해당하는 독일어 ‘Verdrangung’의 뜻은 격퇴, 물리침이다. 그는 사람들이 과거의 사건을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도망치거나 거부하는 것의 중간 단계에서 억제와 억압을 사용하여 기억의 영향을 조절한다고 했다.

그러나 억제, 억압을 통해 마음의 갈등을 물리칠 수 없는 기억들이 있으며 프로이트는 당장 풀어 버려야 할 정신적 충격이 억압에 의해 차단되면 후에 정신적인 질환과 증상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히스테리아 신경증이란 억압된 것이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복귀하여 정신·신체 증상으로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억압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면 기억과 감정을 잊고 살 수 있지만 실패하여 히스테리 신경증이 발병하면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주게 된다. 그래서 탐정이나 형사처럼 기억의 실마리인 연상을 통해 ‘억압’을 풀어 잊힌 기억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정신분석의 치료 과정이라고 했다.

프로이트 시대의 히스테리아는 현대의 불안, 공포증, 두통, 불면과 신체의 경련과 마비 등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한 신경증, 신체화 장애, 신체형 장애, 가벼운 우울증까지 일컫는 폭넓은 진단명이다. 뇌 과학자들은 의도적인 억제 현상의 효과를 증명하였으나, 무의식적인 억압은 설명할 수 없었다. 필자는 무의식의 ‘억압’은 조건 학습과 동일한 현상이며 억제와 억압의 뇌신경 통로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짐을 설명하려 한다.

프로이트 억압의 사례

프로이트의 ‘과학적 심리학 초고’ (Project for a Scientific Psychology, 1895)의 에마(Emma)라는 아가씨의 증례는 그가 히스테리 억압의 전형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에마는 젊은 여성으로 가게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있어서 혼자 들어가지 못하고 가족과 같이 가야 할 정도로 일상생활이 상당히 불편했다.

〈에마는 혼자서 상점에 갈 수 없다고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일상생활에 불편이 있다. …. 그녀가 연상하는 기억은 13세 때 어느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두 명의 점원이 서로 웃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녀는 왠지 모를 공포감에 휩싸여 달아났다. 그 두 명 중 한 명이 그녀의 옷을 보고 비웃었고 한 명은 성적(性的)으로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는 기억이 있었다. …. 더 연상을 해 보니 8세 때 사탕을 사러 들어간 식료품점 주인이 옷 위로 성기를 만지는 등 2차례 추행한 기억이 떠올랐고 …. 지금에서 당시 두 번이나 찾아간 것에 대한 자책을 했다.〉

에마는 13세의 기억은 의식에서 잘 떠오르는데 8세의 기억은 맨 처음 순간적으로 떠올랐지만 이를 부인하고 있었다. 이때의 기억은 처음에는 ‘옷’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의식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13세의 기억은 주변 가까이에 있는 재료(점원, 옷, 웃음, 성적 감각)에서 가상의 결합을 만들었는데, 즉 그녀가 옷 때문에 조롱당했다는 것과 점원 중 한 명이 그녀의 성적 호감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주 연상을 시도해 보니 13세의 ‘웃음’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중에 8세 기억의 식료품점 주인이 그녀에게 못된 장난을 치면서 띤 교활한 웃음을 연상시켰고, 점원들이 추행을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게 되어 도망간 것이라고 했다.

프로이트는, 연상을 통해 알 수 있었던 8세의 기억은 ‘옷’ 이라는 정서적으로 가장 안전한 관념으로 대리되며 ‘옷’이라는 상징을 만들었고 나머지 기억은 ‘억압’이 생겨 의식에 떠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그는 또한 8세에는 없었던 성적 수치심이 나이가 들어 성숙해지면서 기억의 해석을 바꾸어 불쾌한 감정과 이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 사례라고 했다.

8세의 망각된 기억에 대한 소위 히스테리 ‘억압’을 요약해 보면 사춘기 이후 성적 발달로 나중에 불쾌감이 편입된 것이지만 성추행에 대한 수치심인 감정적 요소가 있고 당연히 있어야 할 기억의 망각이 있으며 기억하려 하면 저항이 있고, 상징을 만들며 상징의 연상을 통해 가까스로 사건의 추정과 복원이 가능하나 그 과정은 자동적, 무의식적이라는 점이다.

H의 사례

일상생활의 가벼운 신경성 질환들-직장인들의 월요병, 주부의 명절 증후군, 신경질,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 분노 발작 등 많은 현상이 프로이트의 ‘억압’과 관련 있다. 당사자들은 다양한 신체 증상 때문에 정신적 요인의 중요성과 발생 이유를 모르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느라 고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자의 글은 의학 상식과 더불어 자신의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 사례를 소개해 본다.

28세의 H는 불면과 불안, 두통이 있으며 손발이 떨리고 땀이 나며 말을 하면 구토가 난다는 증상을 호소했다. 그녀는 최근 4년간 잘 다니던 회사를 상사의 변덕스러운 지시와 다소 성희롱 같은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회사를 찾아 이직하였는데 원래 약속했던 업무와는 다른 일을 시키는 등 불합리한 업무 지시에 못 참고 한 달 만에 다시 그 회사를 퇴직했다.

이후 좋았던 첫 직장을 퇴사한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하였는데 자신에게 맞는 회사에 취직할 수 있을지, 점점 나이는 먹어 가는데 불안하고 답답하였다. 그녀는 평소에 숫자 3에 대해 꼼꼼히 확인하는 등의 강박증이 있었고 남들보다 기억을 잘했다고 하며 직장 일을 하는 동안 회의가 있거나 발표할 일이 있으면 구역질이 날까 불안해했다.

최근 새로운 입사 시험을 보기 전에도 심한 구역질이 나타나 화장실에서 내용물 없는 구토를 하고 면접을 보기도 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도 몸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내과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필자와 상담 도중 H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구역과 구토 행동 때문에 많은 휴지를 사용해야 했다.

‘연상의 심리학’과 파블로프의 조건학습

개를 이용해 조건반사 실험을 한 파블로프 (오른쪽 끝).

H의 기억을 연상해 보니 고2 때 친구와 말다툼하다 구토를 한 기억이 있고, 더 연상을 해 보니 중2 때 시험을 보다 구토를 하였고 당시 시험을 잘 보아서 불편한 기억은 없다고 하였으며 어려서는 비위가 약해서 구토를 많이 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떨리고 두근거리면 구토 반응이 나오는 것이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와 같다고 하였다.

프로이트는 치료 경험이 쌓이면서 거의 모든 증례에서 증상과 사건 기억은 일대일의 대응 방식이 아니고 개개의 증상은 한 개뿐만 아니라 모든 특정한 기억이나 특징을 공통으로 가지는 관념의 집합체와 연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신분석은 ‘자유 연상’을 사용하므로 따라서 그의 메타심리학은 ‘연상의 심리학’(psychology of association)이라고 불릴 만하다.

필자가 프로이트의 임상 사례와 ‘과학적 심리학 초고’(1895)를 조사해 보니 그의 ‘억압’은 우리가 잘 아는 파블로프의 조건(고전) 학습과 동일한 현상이었다. 그는 종소리라는 조건 자극을 사용하여 개의 생리적 침샘 분비를 유도했다. 생리학, 심리학에서의 학습은 독립된 두 사물의 자동 연상과 관계의 의미를 생성한다.

‘억압’과 뇌 정신과학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자네.

에마는 어려서 가게 주인에게 두 차례에 걸쳐 성추행을 당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이 학습되었고 이후 젊은 남성의 비웃음, 성적인 느낌, 옷, 상점 등 조건 자극(상징)이 과거 불쾌한 사건들의 감정을 연상시키게 되자 옷 가게를 피하게 된다. 이러한 회피 행동은 또한 학습을 강화시킨다.

1. 누구에게나 성추행(무조건 자극)은 두려움, 공포의 감정과 회피 행동을 발생시킬 수 있다(무조건 반응).

2. 8세의 성추행의 두려움은 사건 당시 물리적 환경인 옷, 가게, 남성, 비웃음(조건 자극, 상징)과 결합하여 두려움, 공포의 감정과 회피 행동이 학습된다(조건 학습).

3. 13세의 경험은 학습을 강화했고 이후 옷, 가게, 남성 등 일반적인 조건 자극을 만나면 두려운 감정과 회피 행동이 자동 발생한다(조건 반응).

영리한 H는 상담 도중 자신의 구토 행동이 조건반사 같다는 말을 했다. 그녀가 말한 조건은 떨림과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들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그녀의 기억을 분석해 보니 어려서 위장이 약해 구토를 잘하던 생리 반응이 중2 때 시험, 고2 때 친구와 언쟁이라는 심리적 스트레스 상황이 구토 반응과 연결되어 학습된 것으로 추정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입사 시험, 면접 등 유사한 상황에서 증상이 나타났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의 증상은 매우 심한 데 비하여 왜 환자는 증상과 관련된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매우 궁금해했다. 당시 프랑스 정신의학자 자네(Pierre Janet·1859-1947)는 의식의 구조 혹은 취약성 때문에 기억을 못한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자네의 이론을 거부했으나 지금 보면 현대 뇌 과학의 발견에 더 잘 맞는 이론이다.

미국 오리건 대학의 안델슨 (Michael Anderson,2001)의 의도적 기억 억제에 대한 연구에서 피험자들에게 억제를 훈련시키고 기능적 뇌자기 공명 영상(fMRI)을 관찰해 보니 억제에 필요한 전전두엽의 활성은 증가되고 기억에 필수적인 해마와 내측 관자엽의 활성은 감소되어 억제의 효과를 입증하였으나 무의식적 억압은 설명할 수 없었다.

뉴욕 대학의 르두(Joseph Ledoux, 1994) 교수는 두려움, 공포의 학습은 해마와 뇌 겉질의 기억을 사용하는 신경 통로와 이보다 빠른, 겉질 아래의 감정 신경 핵인 편도와 운동핵인 선조체 등을 통한 통로가 있다고 했다. 자연에서 독사, 맹수 같은 동물을 만났을 때, 공포의 위험 신호와 민첩한 행동이 필요했던 방어 신경 회로는 큰 뇌가 필요 없는 빠른 신경 길을 사용한다.

무의식의 억압은 생존 위한 본능적 프로그램

필자는 ‘억압’ 및 혐오 학습이 이 신경 회로를 통하는 것이며 당시의 학자들이 히스테리아 증상을 반사(reflex)라고 표현했거나 프로이트도 자동적 일차 과정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억압은 불쾌한 충동이 의식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여 의식에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회상과 무관한 빠른 신경 통로를 사용하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쾌한 처음 사건이 충격을 주면 뇌 겉질 위, 아래의 신경 통로가 같이 반응하지만 세월이 지나 최초 사건 기억은 망각되고 겉질 아래 통로만 학습되었다면 이후 비슷한 조건 자극에 의해서 반응하고 증상으로 재현되므로 환자는 원래의 사건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물론 의식적 억제가 무의식적 억압으로 전환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렇게 억제는 마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회피 반응이며 무의식의 억압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프로그램이자 진화된 학습 현상이다. 억압은 뇌 겉질 아래 단순하고 민감한 신경 회로의 기억을 통하여 자기 방어와 심리적 안정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반사 행동을 일으키는 조건 자극은 일상에서 비슷한 것들이 많아, 이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면 신경증이라는 불편한 결과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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