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증의 밑바닥에는 과도한 성취욕구에서 비롯된 ‘소진 증후군Burnout syndrome’ 있어
⊙ 아침과 주말에는 사이클링, 틈나는 대로 단전호흡, 스트레칭, 산책
⊙ 병원에 온 지 3개월 만에 세로토닌까지 끊는 데 성공
함영준
1956년생. 고려대 노문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사회부장, 국제부장,
주간조선 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현 조선뉴스프레스 고문,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국제보도부문상(1999), 체육훈장 백마장(2012) /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출간
⊙ 아침과 주말에는 사이클링, 틈나는 대로 단전호흡, 스트레칭, 산책
⊙ 병원에 온 지 3개월 만에 세로토닌까지 끊는 데 성공
함영준
1956년생. 고려대 노문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사회부장, 국제부장,
주간조선 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현 조선뉴스프레스 고문,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국제보도부문상(1999), 체육훈장 백마장(2012) /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출간
1980년대 유명 영화감독 배창호(63)씨가 2015년 6월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서 뛰어내렸다. 열차가 들어왔지만 정신을 차린 배 감독이 철로 사이의 안전 공간으로 몸을 피해 해프닝으로 끝났다. ‘한국의 스필버그’란 소리를 듣던 배 감독은 90년대 이후 흥행 성적이 부진했고 최근 시도한 새 영화 제작이 잘 되지 않아 강박관념이 심해지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려 왔다고 고백했다. 전형적인 우울증에 의한 자살 시도였다.
우울증은 정상에서 밀려났거나 지금 현실에서 잘나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정상에 있고 잘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 《월간조선》에 내 우울증 기사가 나간 이후 평소 알던 사회 지도층 인사 여러 명이 자신도 우울증으로 고생했거나 지금 싸우고 있다고 고백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 CEO, 대학총장,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언론사 간부, 병원 원장 등 현직에서 잘나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 역시 남몰래 수면제를 먹으면서, 때로 불안·공황장애를 겪으면서 힘들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대중 스타들은 엄청난 심리노동자다. 늘 밝게 웃고 겸손하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소진 증후군
이들 인기 스타들의 우울증 밑바닥에는 일종의 소진 증후군(Burnout syndrome)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다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로 인해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번아웃(Burnout)을 이렇게 설명한다.
“힘들고 지친 상황인 데다가 직업적으로 감정 억제를 오래 하다 보면 ‘감정의 마비’가 온다. 이 상태가 일상으로 이어지면 결국 문제가 된다. 때로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
번아웃 신드롬은 21세기 지구촌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 특히 성과주의 문화 속에 노동 강도가 높고 행복지수가 낮은 한국인들에게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2011년 한국 사회의 정신병리 현상을 심각한 톤으로 보도했다.
“한국에서는 매일 30여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국의 인구 대비 자살률은 미국의 3배 수준이다. 최근 몇 주간 대학총장과 아이돌 그룹 리더, 스포츠뉴스 아나운서, 축구선수, 대학생과 교수 등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한국에서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 자살은 이제 일상사가 됐다. 자살의 80~90%는 우울증의 결과로 추산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선 정신과 진료를 꺼려 실제 상담치료를 받는 비율은 전체 환자의 3분의 1 정도라고 한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2011.7.7. 발췌요약〉
우울증의 원인
우울증의 발병 원인은 의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신체적 요인으로 뇌 안의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의 화학적 불균형이다. 둘째, 기질적 요인으로 집안에 우울증 병력이 있거나 본인 스스로 우울증에 취약한 기질의 소유자일 경우다. 셋째, 환경적 요인으로 사회 환경이나 본인의 처지, 또는 살아오면서 겪은 상처와 트라우마 때문이다.
근면하고 낙천적이며 감성적 성격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우울증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은 환경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급격한 사회변화, 무한경쟁시대, 가족의 해체, 경제난, 세대-계층-이념의 갈등 등이 ‘우울 사회’로 이끄는 토양이라면 거기서 숙성되는 상실감, 낙담, 불안, 소외, 낙오, 무기력, 자책, 불만, 분노, 상처, 트라우마 등이 우울증의 병원체인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경우에 침입하는 ‘상실감’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중·장년 주부에게 찾아오는 ‘빈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노인우울증’ 등도 그렇다. 신체적·생리적 변화에 따른 ‘사춘기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도 있다.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적응장애도 우울증을 이끄는 토양이다. 한국에 시집온 외국인 아내나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새터민 우울증’도 이 범주에 속한다. 사업의 실패, 해고, 청년 실업, 낙방 등 경쟁에서 뒤처진 경우 찾아오는 우울증은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의학계는 ‘가면 우울증(假面憂鬱症·Masked depression)’을 주목한다. 이유 없이 ▲두통, 어지럼증 ▲목·어깨·허리 통증 ▲불안-두근거림-불면증 ▲구역질-소화불량-과민성대장증상-변비 등이 계속되면 의심해 볼 만도 하다. 주로 오랜 기간 형성된 심리적 억압이나 스트레스, 트라우마 등에서 비롯된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진 이후 이런 증상들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과거 그 어렵던 시절, 한국 사회에선 자살은커녕 우울증도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는데, 단군 이래 가장 융성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지금 왜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진단은 이렇다.
“물질적 문제들을 해결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며, 오히려 물질적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야 정신적 문제, 곧 왜 사느냐는 실존적 문제가 대두된다.”
그때 사람들은 행복감보다 오히려 불안, 지루함, 권태 속에 빠지게 되며, 거기서 ‘존재론적 공허감’과 맞닥뜨리게 된다. 만약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고 복지제도가 잘된 서구 선진국일수록 자살률이 높았다.
빅터 프랭클의 이론만으로 한국인의 우울증을 설명하기에는 절반이 부족하다. 나는 한국인들의 유달리 강한 평등의식과 가족·이웃 간의 정(情)의 문화에 주목한다. 계층 간 격차가 날로 커지고, 개인주의와 이익 사회로 급격히 바뀌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것은 아닐까.
“쉬고 자신을 즐겁게 해줘라”
내 경우는 지나치게 나를 소진시켰고 그 밑바닥에는 과도한 성취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치료의 첫 단계는 망가진 심신을 원상회복시켜 주는 것이었다. 의사는 내게 말했다.
“좀 쉬고 자신을 즐겁게 해주세요.”
치료에는 약물요법과 인지행동 치료, 두 가지가 병행된다. 의사는 약에 대한 나의 거부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재삼 강조했다.
“몸살이나 식중독에 걸렸을 때 약을 먹어야 하듯, 우울증도 마찬가지죠. 의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는 우울증 환자를 배터리가 방전된 자동차에 비유했다. 방전된 차는 그냥 놔두거나 민다고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전원을 가져와 배터리에 연결해서 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우울증에 약물치료가 필요한 이유다.
인지행동 치료는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환자가 스스로 잘못된 심신 상태를 교정하고 활기를 되찾게 해주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또다시 방전이 안 되도록 운전 습관을 바로잡아주는 것이다.
“차가 시동이 걸리고, 이후 운행을 통해 에너지가 충전되면 외부 도움 없이 혼자 잘 굴러가게 됩니다. 그것이 1차 치료의 핵심입니다.”
내가 처방받은 약은 수면제, 진정제, 항우울제 등 세 가지였다. 이 중 핵심인 항우울제(Antidepressants)는 뇌 속의 세로토닌(신경전달물질)을 활성화시켜 우울한 감정을 억제시키는 약이다.
집으로 돌아와 약을 먹고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 이튿날 참으로 오랜만에 ‘좋은 아침’을 맞았다. 오전에 먹은 약은 진정제라 정신이 다소 느긋해졌다. 혈압과 맥박을 재보니 정상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약 기운의 위력은 컸다. 의지를 갖고 그렇게 통제하려고 해도 안 되던 불안감이 잠잠해지며 나는 조금씩 몸에 ‘시동’이 걸리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 회사에 출근할 날이 다가왔다.
이제부터는 본인의 자세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고 좋은 의사의 처방이 있어도 환자가 실천을 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인간은 신체(Body)와 정신(Mind)과 마음(Heart)으로 이뤄져 있다.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로 조화를 이뤄야 행복한 삶이다. 나는 운동을 통해 심신에 활력을 주고, 긍정적 사고방식과 명상을 통해 쇠약한 정신과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사 일과를 중심으로 인지행동 치료에 따른 훈련 지침을 만들었다.
아침: 신체 강화: 산책과 운동
낮: 정신 강화: 긍정적 사고
저녁: 마음 강화: 명상과 단전호흡
나는 알람 시각을 아침 5시로 맞춰놓았다. 우울증이 심할수록 아침은 지옥과 같다. 그러나 하루 첫 관문부터 지고 들어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인근 한강변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자전거로 달리면 잔뜩 가라앉은 마음이 서서히 ‘업(Up)’되며 경직된 몸도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페달 밟는 것조차 힘에 겨웠지만 곧 체력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오전 7시 정각에 집을 나섰다. 러시아워 전이라 30분이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보다 한 시간 이상 일찍 나오니 안도감이 생기고 회사 자료도 여유 있게 검토할 수 있었다.
의사는 내게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했다.
“우울증은 매사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이것을 긍정 모드로 바꾸세요.”
나는 서점에서 조엘 오스틴 목사가 쓴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이란 책을 구입했다. 오스틴 목사는 ‘믿는 대로 된다’는 모토하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면 실제 긍정적인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썼다.
그는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비결은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더 나은 ‘내일’이 온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책을 한 권 더 사 사무실이건 집에서건 틈나는 대로 꺼내 읽었다.
술이나 야근으로 이어지는 ‘저녁이 실종된 삶’ 대신 휴식과 여가로 에너지가 축적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선택했다. 일찍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하다 보면 기분이 즐거워졌다. TV 뉴스는 가급적 보지 않았다. 대신 〈개그 콘서트〉 같은 코미디나 예능, 자연 다큐 프로를 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한 시간 전에는 단전호흡과 명상을 했다.
처음에는 30분가량 했는데 나중에는 한 시간가량으로 늘어났다. 이것을 하고 나면 몸과 마음과 정신이 아주 개운해진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약 10분간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때 심리 상태가 바로 수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긍정의 힘》을 꺼내 다시 읽거나, 눈을 감고 기분 좋은 생각이나 기억을 떠올렸다. 오늘 일어난 좋은 일이 떠오르지 않으면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이나 미래에 일어날 좋은 일을 상상했다.
의외의 복병들
그러나 관성의 힘은 무섭다. 기분이 반짝 환해지다가 금세 어둠으로 되돌아간다. 우울증이란 놈이 어느새 기습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복병 중 하나가 술이다. 회사를 나간 지 보름 정도 지났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동창 친구 몇 명을 불러내 술자리를 가졌다.
그러다 친구들 사이에 흔히 있는 작은 언쟁이 일어났다. 보다 못한 내가 중간에 끼어들자 도리어 내가 공격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심리적으로 취약했던 나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환자인 사실을 잊었고 친구들은 내가 그런 상태임을 몰랐다.
술자리가 파하고 비몽사몽 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숙취 속에서 깨어나니까 예전의 지옥 같은 심리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과거 겪었던 공황발작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났다.
마음이 깊은 절망감에 싸이더니 마치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질 때 느낄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하면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면 저절로 몸이 움찔하면서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이러다가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으로 발전하는 것 아냐?’
토요일인 그날 나는 하루종일 누워 끙끙거리며 힘들어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넉다운됐다. 이럴 때는 무엇을 하든, 어떤 자세로 누워 있든, 힘들었다. 암 환자의 고통이 바로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인 일요일에도 나는 하루종일 누워 끙끙 앓기만 했다.
월요일 오후 바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극복하라”고 했다.
“치료를 등산에 비유하자면 정상(완쾌)에 오르기까지 무수히 넘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때 포기하면 일종의 심리적 절벽이 생겨 평생 병원이나 약물 신세를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내게 평소 투여하던 항우울제의 분량을 2배로 늘려주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장기전이다. 심리적으로 떨어질 때가 있다. 이때 다시 올라서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여기서부터는 환자의 의지다.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내가 저 언덕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24시간 특별관리 체제’를 가동시켰다. 하루 24시간 중 내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수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즉 의식이 깨어 있는 시간 중에 늘 심신을 ‘긍정 모드’로 관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아침 운동을 비롯하여 회사에서도 시간만 나면 단전호흡, 스트레칭, 산보 등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긍정의 힘》을 비롯해 정신적 힘을 주는 책의 좋은 구절이나 격언 등을 수첩에 적어놓고 꺼내 보거나, 큰소리로 낭송했다. 길을 걸을 때도 반복해 외우고 다녔다.
‘도리도리’ 운동의 위력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단전호흡과 명상을 더 강화했다. ‘도리도리’ 목운동또한 덧붙였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젓는 목운동인데 내게는 효과 만점이었다. 도리도리 목운동을 할 때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20~30분 막춤까지 추면 스트레스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내 컨디션은 급속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잠을 잘 자게 됨으로써 신체리듬을 되찾고 기력이 보충되었으며 두뇌도 활력을 찾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치료 한 달 만에 수면제는 양을 반으로 줄였고, 진정제는 끊었다. 두 달 뒤에는 수면제도 끊었다.
주말이면 근교로 자전거 나들이를 나갔다. 내친김에 아예 회사에 자전거 동호인회를 만들었다. 그해 여름은 2012 런던 하계 올림픽이 열렸고 섭씨 3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계속됐었다. 우리는 팔당, 구리, 분당, 일산, 때론 왕복 100km가 넘는 시화호까지 다녀오곤 했다. 헤어질 때는 식사와 함께 시원한 맥주와 막걸리로 기분을 냈다.
신체를 혹사시키다 보니 머리와 마음은 저절로 쉬게 되었다. 오랜만에 탈진상태로 집에 돌아와 그냥 쓰러졌다. 아늑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운동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는 모든 병의 회복력을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그때 난 분명히 깨달았다.
일요일에는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어렸을 적 그토록 지루하던 예배시간이 이제 다르게 다가왔다. 목사님의 설교가 내 마음을 울리고 머릿속에 남았다. 정신적 목욕과 영적 충전의 시간이었다.
어느 날의 체험
의사도 나의 빠른 회복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기 전 나는 《긍정의 힘》을 읽다가 뜻밖의 경험을 했다. 이 책의 4단계, ‘과거의 장벽을 깨라’ 편은 과거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 짓눌려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였다.
그런 요지의 글을 읽어내리는 순간, 바로 그때 내 아랫도리가 꿈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지난 1년간 나는 거의 성적인 충동을 느껴보지 못한 ‘고개 숙인 남자’였다. 그런데 바로 내 아랫도리가 빳빳이 고개를 들지 않는가. 나는 어떠한 성적 욕망을 상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종교 관련 서적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나는 발기 행위가 정신적 컨디션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망과 긍정의 심리가 곧 ‘정신적 비아그라’였다.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의사는 기뻐했다. “좋은 징조입니다. 9부 능선까지 왔네요.”
치료는 두 달을 지나 세 달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세 가지 약 중 진정제와 수면제는 이미 끊었고, 항우울제(세로토닌)만 당초 처방의 반(5mg)만 들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 좋은 징조는 며칠 뒤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나타났다.
암사대교를 지나 하남시 방향으로 달리다 ‘깔딱고개’라 불리는 고갯길을 넘어가면 수변 공원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쉬며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눈부신 한강을 바라보고, 우거진 강변 갈대숲을 혼자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내 귀에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팝송 중 하나인 ‘A Lover's Concerto(연인의 협주곡)’였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 노래야?’
의아해 주변을 둘러보니 자연 풍경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내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삭막한 사막과 같았던 내 마음속에 기쁨과 감성의 정서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의사들은 우울증 치유의 첫 단계는 환자의 ‘의지’보다 ‘치료’라고 말한다. 우울증 자체가 환자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오히려 의지를 넘어서는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치료가 진행돼 재활이나 회복이 진행될 때는 환자의 의지가 점점 중요해진다고 한다. 행복한 마음 상태를 만드는 최종적인 힘은 환자의 의지에서 나오지 약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드디어 이 병원에 온 지 3개월 만에 나는 세로토닌마저 끊었다. 의사는 내게 축하와 함께 이렇게 당부했다.
“우울증의 급한 불은 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재발할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앞으로는 스스로 마음의 근원적 치유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상처받은 과거, 왜곡된 생각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고치고 관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울증은 정상에서 밀려났거나 지금 현실에서 잘나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정상에 있고 잘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 《월간조선》에 내 우울증 기사가 나간 이후 평소 알던 사회 지도층 인사 여러 명이 자신도 우울증으로 고생했거나 지금 싸우고 있다고 고백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 CEO, 대학총장,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언론사 간부, 병원 원장 등 현직에서 잘나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 역시 남몰래 수면제를 먹으면서, 때로 불안·공황장애를 겪으면서 힘들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대중 스타들은 엄청난 심리노동자다. 늘 밝게 웃고 겸손하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소진 증후군
이들 인기 스타들의 우울증 밑바닥에는 일종의 소진 증후군(Burnout syndrome)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다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로 인해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번아웃(Burnout)을 이렇게 설명한다.
“힘들고 지친 상황인 데다가 직업적으로 감정 억제를 오래 하다 보면 ‘감정의 마비’가 온다. 이 상태가 일상으로 이어지면 결국 문제가 된다. 때로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
번아웃 신드롬은 21세기 지구촌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 특히 성과주의 문화 속에 노동 강도가 높고 행복지수가 낮은 한국인들에게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2011년 한국 사회의 정신병리 현상을 심각한 톤으로 보도했다.
“한국에서는 매일 30여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국의 인구 대비 자살률은 미국의 3배 수준이다. 최근 몇 주간 대학총장과 아이돌 그룹 리더, 스포츠뉴스 아나운서, 축구선수, 대학생과 교수 등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한국에서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 자살은 이제 일상사가 됐다. 자살의 80~90%는 우울증의 결과로 추산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선 정신과 진료를 꺼려 실제 상담치료를 받는 비율은 전체 환자의 3분의 1 정도라고 한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2011.7.7. 발췌요약〉
우울증의 원인
우울증의 발병 원인은 의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신체적 요인으로 뇌 안의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의 화학적 불균형이다. 둘째, 기질적 요인으로 집안에 우울증 병력이 있거나 본인 스스로 우울증에 취약한 기질의 소유자일 경우다. 셋째, 환경적 요인으로 사회 환경이나 본인의 처지, 또는 살아오면서 겪은 상처와 트라우마 때문이다.
근면하고 낙천적이며 감성적 성격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우울증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은 환경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급격한 사회변화, 무한경쟁시대, 가족의 해체, 경제난, 세대-계층-이념의 갈등 등이 ‘우울 사회’로 이끄는 토양이라면 거기서 숙성되는 상실감, 낙담, 불안, 소외, 낙오, 무기력, 자책, 불만, 분노, 상처, 트라우마 등이 우울증의 병원체인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경우에 침입하는 ‘상실감’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중·장년 주부에게 찾아오는 ‘빈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노인우울증’ 등도 그렇다. 신체적·생리적 변화에 따른 ‘사춘기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도 있다.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적응장애도 우울증을 이끄는 토양이다. 한국에 시집온 외국인 아내나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새터민 우울증’도 이 범주에 속한다. 사업의 실패, 해고, 청년 실업, 낙방 등 경쟁에서 뒤처진 경우 찾아오는 우울증은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의학계는 ‘가면 우울증(假面憂鬱症·Masked depression)’을 주목한다. 이유 없이 ▲두통, 어지럼증 ▲목·어깨·허리 통증 ▲불안-두근거림-불면증 ▲구역질-소화불량-과민성대장증상-변비 등이 계속되면 의심해 볼 만도 하다. 주로 오랜 기간 형성된 심리적 억압이나 스트레스, 트라우마 등에서 비롯된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진 이후 이런 증상들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과거 그 어렵던 시절, 한국 사회에선 자살은커녕 우울증도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는데, 단군 이래 가장 융성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지금 왜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진단은 이렇다.
“물질적 문제들을 해결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며, 오히려 물질적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야 정신적 문제, 곧 왜 사느냐는 실존적 문제가 대두된다.”
그때 사람들은 행복감보다 오히려 불안, 지루함, 권태 속에 빠지게 되며, 거기서 ‘존재론적 공허감’과 맞닥뜨리게 된다. 만약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고 복지제도가 잘된 서구 선진국일수록 자살률이 높았다.
빅터 프랭클의 이론만으로 한국인의 우울증을 설명하기에는 절반이 부족하다. 나는 한국인들의 유달리 강한 평등의식과 가족·이웃 간의 정(情)의 문화에 주목한다. 계층 간 격차가 날로 커지고, 개인주의와 이익 사회로 급격히 바뀌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것은 아닐까.
“쉬고 자신을 즐겁게 해줘라”
내 경우는 지나치게 나를 소진시켰고 그 밑바닥에는 과도한 성취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치료의 첫 단계는 망가진 심신을 원상회복시켜 주는 것이었다. 의사는 내게 말했다.“좀 쉬고 자신을 즐겁게 해주세요.”
치료에는 약물요법과 인지행동 치료, 두 가지가 병행된다. 의사는 약에 대한 나의 거부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재삼 강조했다.
“몸살이나 식중독에 걸렸을 때 약을 먹어야 하듯, 우울증도 마찬가지죠. 의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는 우울증 환자를 배터리가 방전된 자동차에 비유했다. 방전된 차는 그냥 놔두거나 민다고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전원을 가져와 배터리에 연결해서 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우울증에 약물치료가 필요한 이유다.
인지행동 치료는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환자가 스스로 잘못된 심신 상태를 교정하고 활기를 되찾게 해주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또다시 방전이 안 되도록 운전 습관을 바로잡아주는 것이다.
“차가 시동이 걸리고, 이후 운행을 통해 에너지가 충전되면 외부 도움 없이 혼자 잘 굴러가게 됩니다. 그것이 1차 치료의 핵심입니다.”
내가 처방받은 약은 수면제, 진정제, 항우울제 등 세 가지였다. 이 중 핵심인 항우울제(Antidepressants)는 뇌 속의 세로토닌(신경전달물질)을 활성화시켜 우울한 감정을 억제시키는 약이다.
집으로 돌아와 약을 먹고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 이튿날 참으로 오랜만에 ‘좋은 아침’을 맞았다. 오전에 먹은 약은 진정제라 정신이 다소 느긋해졌다. 혈압과 맥박을 재보니 정상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약 기운의 위력은 컸다. 의지를 갖고 그렇게 통제하려고 해도 안 되던 불안감이 잠잠해지며 나는 조금씩 몸에 ‘시동’이 걸리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 회사에 출근할 날이 다가왔다.
이제부터는 본인의 자세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고 좋은 의사의 처방이 있어도 환자가 실천을 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인간은 신체(Body)와 정신(Mind)과 마음(Heart)으로 이뤄져 있다.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로 조화를 이뤄야 행복한 삶이다. 나는 운동을 통해 심신에 활력을 주고, 긍정적 사고방식과 명상을 통해 쇠약한 정신과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사 일과를 중심으로 인지행동 치료에 따른 훈련 지침을 만들었다.
아침: 신체 강화: 산책과 운동
낮: 정신 강화: 긍정적 사고
저녁: 마음 강화: 명상과 단전호흡
나는 알람 시각을 아침 5시로 맞춰놓았다. 우울증이 심할수록 아침은 지옥과 같다. 그러나 하루 첫 관문부터 지고 들어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인근 한강변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자전거로 달리면 잔뜩 가라앉은 마음이 서서히 ‘업(Up)’되며 경직된 몸도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페달 밟는 것조차 힘에 겨웠지만 곧 체력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오전 7시 정각에 집을 나섰다. 러시아워 전이라 30분이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보다 한 시간 이상 일찍 나오니 안도감이 생기고 회사 자료도 여유 있게 검토할 수 있었다.
의사는 내게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했다.
“우울증은 매사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이것을 긍정 모드로 바꾸세요.”
나는 서점에서 조엘 오스틴 목사가 쓴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이란 책을 구입했다. 오스틴 목사는 ‘믿는 대로 된다’는 모토하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면 실제 긍정적인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썼다.
그는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비결은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더 나은 ‘내일’이 온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책을 한 권 더 사 사무실이건 집에서건 틈나는 대로 꺼내 읽었다.
술이나 야근으로 이어지는 ‘저녁이 실종된 삶’ 대신 휴식과 여가로 에너지가 축적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선택했다. 일찍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하다 보면 기분이 즐거워졌다. TV 뉴스는 가급적 보지 않았다. 대신 〈개그 콘서트〉 같은 코미디나 예능, 자연 다큐 프로를 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한 시간 전에는 단전호흡과 명상을 했다.
처음에는 30분가량 했는데 나중에는 한 시간가량으로 늘어났다. 이것을 하고 나면 몸과 마음과 정신이 아주 개운해진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약 10분간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때 심리 상태가 바로 수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긍정의 힘》을 꺼내 다시 읽거나, 눈을 감고 기분 좋은 생각이나 기억을 떠올렸다. 오늘 일어난 좋은 일이 떠오르지 않으면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이나 미래에 일어날 좋은 일을 상상했다.
의외의 복병들
그러나 관성의 힘은 무섭다. 기분이 반짝 환해지다가 금세 어둠으로 되돌아간다. 우울증이란 놈이 어느새 기습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복병 중 하나가 술이다. 회사를 나간 지 보름 정도 지났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동창 친구 몇 명을 불러내 술자리를 가졌다.
그러다 친구들 사이에 흔히 있는 작은 언쟁이 일어났다. 보다 못한 내가 중간에 끼어들자 도리어 내가 공격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심리적으로 취약했던 나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환자인 사실을 잊었고 친구들은 내가 그런 상태임을 몰랐다.
술자리가 파하고 비몽사몽 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숙취 속에서 깨어나니까 예전의 지옥 같은 심리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과거 겪었던 공황발작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났다.
마음이 깊은 절망감에 싸이더니 마치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질 때 느낄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하면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면 저절로 몸이 움찔하면서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이러다가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으로 발전하는 것 아냐?’
토요일인 그날 나는 하루종일 누워 끙끙거리며 힘들어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넉다운됐다. 이럴 때는 무엇을 하든, 어떤 자세로 누워 있든, 힘들었다. 암 환자의 고통이 바로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인 일요일에도 나는 하루종일 누워 끙끙 앓기만 했다.
월요일 오후 바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극복하라”고 했다.
“치료를 등산에 비유하자면 정상(완쾌)에 오르기까지 무수히 넘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때 포기하면 일종의 심리적 절벽이 생겨 평생 병원이나 약물 신세를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내게 평소 투여하던 항우울제의 분량을 2배로 늘려주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장기전이다. 심리적으로 떨어질 때가 있다. 이때 다시 올라서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여기서부터는 환자의 의지다.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내가 저 언덕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24시간 특별관리 체제’를 가동시켰다. 하루 24시간 중 내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수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즉 의식이 깨어 있는 시간 중에 늘 심신을 ‘긍정 모드’로 관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아침 운동을 비롯하여 회사에서도 시간만 나면 단전호흡, 스트레칭, 산보 등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긍정의 힘》을 비롯해 정신적 힘을 주는 책의 좋은 구절이나 격언 등을 수첩에 적어놓고 꺼내 보거나, 큰소리로 낭송했다. 길을 걸을 때도 반복해 외우고 다녔다.
‘도리도리’ 운동의 위력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단전호흡과 명상을 더 강화했다. ‘도리도리’ 목운동또한 덧붙였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젓는 목운동인데 내게는 효과 만점이었다. 도리도리 목운동을 할 때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20~30분 막춤까지 추면 스트레스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내 컨디션은 급속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잠을 잘 자게 됨으로써 신체리듬을 되찾고 기력이 보충되었으며 두뇌도 활력을 찾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치료 한 달 만에 수면제는 양을 반으로 줄였고, 진정제는 끊었다. 두 달 뒤에는 수면제도 끊었다.
주말이면 근교로 자전거 나들이를 나갔다. 내친김에 아예 회사에 자전거 동호인회를 만들었다. 그해 여름은 2012 런던 하계 올림픽이 열렸고 섭씨 3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계속됐었다. 우리는 팔당, 구리, 분당, 일산, 때론 왕복 100km가 넘는 시화호까지 다녀오곤 했다. 헤어질 때는 식사와 함께 시원한 맥주와 막걸리로 기분을 냈다.
신체를 혹사시키다 보니 머리와 마음은 저절로 쉬게 되었다. 오랜만에 탈진상태로 집에 돌아와 그냥 쓰러졌다. 아늑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운동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는 모든 병의 회복력을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그때 난 분명히 깨달았다.
일요일에는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어렸을 적 그토록 지루하던 예배시간이 이제 다르게 다가왔다. 목사님의 설교가 내 마음을 울리고 머릿속에 남았다. 정신적 목욕과 영적 충전의 시간이었다.
단전호흡과 명상 단전호흡의 기초 과정은 인터넷 등을 통해서도 손쉽게 익힐 수 있다. 기본 원리는 먼저 스트레칭이나 체조 등을 통해 굳어진 몸을 이완시킨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숨을 길게 들이시고 천천히 내쉬는 호흡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때 의식적으로 머리를 텅 비워 무념무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도리도리 운동  자리에 서거나 앉은 상태에서 편안히 눈을 감고 2~3분 정도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하듯 가볍게 흔들어준다. 이렇게 하다 보면 진동이 일어나면서 굳었던 몸이 풀리고 막혔던 기혈이 뚫리게 된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운동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
어느 날의 체험
의사도 나의 빠른 회복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기 전 나는 《긍정의 힘》을 읽다가 뜻밖의 경험을 했다. 이 책의 4단계, ‘과거의 장벽을 깨라’ 편은 과거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 짓눌려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였다.
그런 요지의 글을 읽어내리는 순간, 바로 그때 내 아랫도리가 꿈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지난 1년간 나는 거의 성적인 충동을 느껴보지 못한 ‘고개 숙인 남자’였다. 그런데 바로 내 아랫도리가 빳빳이 고개를 들지 않는가. 나는 어떠한 성적 욕망을 상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종교 관련 서적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나는 발기 행위가 정신적 컨디션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망과 긍정의 심리가 곧 ‘정신적 비아그라’였다.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의사는 기뻐했다. “좋은 징조입니다. 9부 능선까지 왔네요.”
치료는 두 달을 지나 세 달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세 가지 약 중 진정제와 수면제는 이미 끊었고, 항우울제(세로토닌)만 당초 처방의 반(5mg)만 들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 좋은 징조는 며칠 뒤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나타났다.
암사대교를 지나 하남시 방향으로 달리다 ‘깔딱고개’라 불리는 고갯길을 넘어가면 수변 공원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쉬며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눈부신 한강을 바라보고, 우거진 강변 갈대숲을 혼자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내 귀에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팝송 중 하나인 ‘A Lover's Concerto(연인의 협주곡)’였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 노래야?’
의아해 주변을 둘러보니 자연 풍경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내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삭막한 사막과 같았던 내 마음속에 기쁨과 감성의 정서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의사들은 우울증 치유의 첫 단계는 환자의 ‘의지’보다 ‘치료’라고 말한다. 우울증 자체가 환자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오히려 의지를 넘어서는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치료가 진행돼 재활이나 회복이 진행될 때는 환자의 의지가 점점 중요해진다고 한다. 행복한 마음 상태를 만드는 최종적인 힘은 환자의 의지에서 나오지 약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드디어 이 병원에 온 지 3개월 만에 나는 세로토닌마저 끊었다. 의사는 내게 축하와 함께 이렇게 당부했다.
“우울증의 급한 불은 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재발할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앞으로는 스스로 마음의 근원적 치유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상처받은 과거, 왜곡된 생각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고치고 관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