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주유천하 〈3〉 장보고와 완도, 사라진 대양강국의 꿈 : 월간조선

중국 당(唐)시대, 칠언절구의 명인 두 사람이 있었다. 시성(詩聖)이라 불린 두보(杜甫)와 두목(杜牧)이다. 세상은 둘을 대두(大杜), 소두(小杜)라 구분해 불렀다. 두목이 자신의 호를 따 만든 책 《번천문집》에 한 인물의 일대기가 있다. 두목에 따르면 그는 “명철한 두뇌를 가졌으며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란 책이 있다. 일본 천태종의 고승 엔닌(圓仁)의 불법 순례기록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같은 책인데 이 책에도 두목이 언급한 인물에게 엔닌이 보낸 편지가 수록돼 있다.

“평소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우러러 흠모감이 더해갑니다….”

이 인물에 대한 우리 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뿐이다.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반면 중국·일본 측 기록엔 자주 나온다. 중국 《신당서》, 일본 《일본후기》《속일본기》《속일본후기》 등인데, 이것은 이 인물이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국제적인 명사(名士)’였다는 뜻이다. 이 인물이 재조명을 받게 된 계기도 드라마틱하다.

해상왕 장보고의 흉상.

1959년 9월 17일, 지금도 장년층의 뇌리에 선명한 태풍 ‘사라’가 한반도에 상륙했다. 남해상 완도도 직격탄을 맞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민들이 밭으로 쓰던 장도(將島)를 폭풍이 휩쓸자 1200년 동안 묻혀 있던 목책(木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목책은 적의 외침을 막고 배를 묶어두기 위한 용도였다.

이것은 사서에서만 보았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846)와 장보고 선단의 해상기지였던 청해진(淸海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함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82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단이 이곳을 조사, 지금 사적 제308호로 지정된 장도 청해진 유적이 발굴되었다.

말 그대로 ‘장군섬’인 장도는 뭍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썰물 때는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가깝다. 장도 유적은 입구 격인 외성문(外城門), 안쪽 내성문(內城門), 가장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고대(高臺)를 중심으로 860m 길이의 토성으로 이뤄져 있다. 토성은 평평한 돌 위에 흙을 다져 넣는 판축식으로 쌓았다.

태풍 사라호가 가져온 의외의 선물

완도 앞바다 장도에는 장보고의 유적이 있다.

이곳이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시설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유물은 디귿(ㄷ)자 형 석축 석렬 유구와 우물이다. 돌로 쌓은 유구는 해안 출입과 접안(接岸) 기능을 하는 시설인데, 석축 유구 역시 토성처럼 평평한 돌 위로 흙을 다져 넣은 것으로 이런 구조물은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이 독특하다.

우물은 6m 깊이로 바닥에 통나무를 ‘정(井)’자 형으로 깔아 기초를 잡고 위에 석축을 쌓았는데 위가 직경 150cm 내외로 좁고 중간이 직경 180cm 내외로 넓어지다 바닥은 다시 좁아지는 모양이다. 우물 바닥에는 자갈을 50cm 두께로 깔아 물을 정화할 수 있게 했다. 이 우물은 청해진에 정박하는 선박들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청해진 유적 인근에 법화사 터가 있다. 법화사상은 천태종 계열의 사찰임을 보여주는데 이 터는 청해진 세력과 무역상인, 당나라로 가는 구법 승려들이 예불을 올리고 휴식을 취하는 기능을 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옛 절터에서 기와 조각, 주름무늬병, 청자 조각 등이 다수 출토됐다.

법화사 터는 완도 장좌리뿐 아니라 제주도 서귀포시 화원동에도 있다. 이것은 청해진이 제주도를 품에 안으며 동으로 일본, 서로 중국, 남으로는 남중국해까지 무역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로마를 잇는 육상 실크로드와 별개로 동아시아~남아시아~인도~페르시아를 잇는 실크로드가 실존했음이 이로써 밝혀졌다.

그렇다면 장보고는 어떤 인물인가. 《삼국유사》 ‘신무대왕, 염장, 궁파’ 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45대 신무대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궁파(弓巴)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그를 제거해 주면 왕위를 차지한 후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 궁파는 응낙하고 마음과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수도를 침범해 그 일을 이루었다. 왕이 왕위를 찬탈하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신하들이 옆에서 힘껏 간했다. ‘궁파는 비천하니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왕은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 이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그 말을 듣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불충을 저지르려 하니 소신이 제거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기꺼이 허락했다….”

여기에 장보고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첫째, 장보고의 이름은 궁파 혹은 궁복(弓福)이었으며 그는 어릴 적부터 활쏘기에 능해 훗날 활 궁자가 들어간 장(張)씨 성을 가지게 됐다. 둘째, 그의 신분은 ‘비천’했으나 왕이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셋째,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은 이미 경주를 위협할 만큼 세력이 강했다.

사서엔 “말 타고 창을 다루는 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장도 위에 자리한 고대. 여기서 장보고는 자신의 선단을 지켜봤을 것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장보고는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몇 살 아래인 정년과 친했는데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오십 리를 가면서도 물을 내뿜지 않았다고 할 만큼 수영의 달인이었다. 이들 두 사람이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젊은 시절 당나라로 갔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당은 지금의 미국처럼 능력이 있으면 국적에 관계없이 등용될 만큼 국제적인 나라였다. 장보고가 처음 맡은 벼슬은 ‘무령군소장’인데 여기 나오는 ‘무령군’이란 군단(軍團)을 말한다. 이 무령군이 생긴 게 서기 805년이니 역산하면 장보고는 780년 후반쯤 태어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기록도 나온다.

앞서 말한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가 824년 일본으로 와 엔닌을 배에 태우고 당으로 돌아갔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장보고가 824년 이전에 무령군에서 나와 당-일본-신라를 오가며 무역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군에서 경력을 쌓고 무역상으로 일하던 장보고의 삶을 바꾸는 일이 생겼다.

해적들에게 붙잡혀온 신라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참혹한 광경을 자주 목격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장보고는 828년 흥덕왕에게 간청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 신라 사람들이 도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흥덕왕은 그를 청해진 대사(大使)로 삼고 군사 1만명을 주었다. 신라의 정식 관직에는 ‘대사’라는 직책이 없었는데, 이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인 신라 조정에서 평민인 장보고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어려웠기에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 사용하던 대사라는 별칭을 그대로 사용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이후 본격적인 해상무역에 나선다. 주된 루트는 중국 양주(揚州)·영파(寧波)와 일본 하카타(博多)였다. 양주는 양쯔강 하류 도시로 내륙과 대운하를 연결하는 요충이다. 고대부터 국제무역 중심지였는데 신라-페르시아-동남아인들은 물론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온 이슬람 상인들의 최종 기착지이기도 했다.

장보고 선단이 훗날 고려청자의 기틀 닦아

장도 위에서 보면 완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파 역시 중국의 주요 국제 중개 무역항으로 주변 산물이 대형 무역선에 실려 신라-일본으로 수출됐는데 목포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신안선도 바로 여기서 일본으로 가던 배였다. 장보고 선단의 주요 교류 품목인 월주요청자(越州窯靑磁)가 여기서 만들어져 수출됨으로써 훗날 고려청자를 낳는 밑거름이 됐다.

일본 하카타는 지금의 후쿠오카로, 이곳엔 장보고 선단이 무역하던 유적지가 남아 있다. 다자이후(太宰府)는 고대 한중 교섭을 관장하던 기관이었으며 홍려관은 다자이후에 속한 기관으로 상인들을 접대하거나 숙박을 하던 영빈관이다. 이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장보고는 어이없게도 정치에 간여하면서 최후를 맞게 된다.

앞서 장보고에게 청해진 설치를 허락하고 ‘대사’ 벼슬을 허락했던 흥덕왕은 아들 없이 죽었다. 그러자 흥덕왕의 사촌동생인 상대등 김균정과 흥덕왕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위를 두고 다투다 김균정이 죽고 김제륭이 희강왕이 됐다. 김균정의 아들이었던 김우징은 가족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나 장보고에게 의탁했다.

김우징은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시중으로 있었기에 그때의 인연을 믿었던 것인데 왕실 권력다툼을 피해 청해진으로 왔을 만큼 당시 장보고의 세력은 막강했다. 희강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김명과 김이홍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희강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김명이 민애왕이 되자 김우징이 청했다.

“김명과 김이홍은 임금과 내 아버지를 죽인 이들로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소.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 장보고는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며 838년 청해진의 군사 5000명을 경주로 파견했다. 청해진 군사들은 민애왕을 죽였고 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됐다.

신라 최초의 군사 쿠데타였던 이 싸움의 주인공은 평민 출신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감의(感義)군사가 돼 식읍 2000호를 받았는데 이런 특별 대우는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백 일 붉은 꽃 없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장보고는 앞서 말한 딸의 왕비 간택 약속이 무산되며 왕과 척을 지게 됐다.

다시 《삼국유사》의 장보고 부분을 인용해 본다.

“염장은 왕명을 받고 청해진으로 가서 연락하는 사람을 통해 궁파(장보고)에게 말했다. ‘왕에게 작은 원망이 있어 현명한 공께 몸을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너희 무리가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왕비로 삼지 못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나를 만나려 하는가?’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 전했다. ‘이는 백관들이 간언한 것이지, 저는 그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청사로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소?’ 염장이 말했다. ‘왕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막하(幕下)에 기대어 해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궁파가 말했다. ‘다행한 일이오.’ 그들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사이 갑자기 염장이 궁파의 장검을 가져다 그를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를 이끌고 서울(경주)로 돌아와 결과를 보고했다. ‘궁파를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염장에게 상을 주고 아간(阿干)의 벼슬을 내렸다.”(민음사 간 《삼국유사》 김원중 옮김)

장보고 사후 5년 뒤 청해진 폐쇄… 영영 사라진 대양강국의 꿈

완도내 곳곳에 장보고 관련 기념물이 들어서 있다. 장보고 공원에 조성된 대형 동상.

장보고 사후 5년 뒤인 851년 청해진은 폐쇄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한국 해군의 기초를 세운 손원일 제독과 함께 한국사에 길이 남을 해상 3대 영웅 가운데 선구자인 장보고 시대의 퇴장은 우리 해운사에 기나긴 암흑시대가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청해진이 없어지면서 완도 일대는 폐허처럼 변했다. 이곳에 살던 모든 사람은 전라도 북쪽 벽골군, 지금의 김제군으로 강제이주됐다.

그로부터 500년이 흐르는 동안 완도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동백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고 야생동물의 천국이 됐다. 다시 완도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51년. 하지만 그 이후로도 오랜 기간 완도는 함경도의 삼수갑산 같은 오지의 대명사였다.

완도에는 앞서 말한 청해진 유적 외에도 장보고 관련 지명이 많다. 장좌리 서쪽의 장보고가 돌을 던져 맞혔다는 복바위는 지금도 돌을 맞히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청해진 군사가 해적을 잡아 가뒀다는 옥당(獄堂)터, 여섯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장수바위는 장보고가 군략을 협의했다는 곳이다. 장보고 가족들의 무덤이라는 장보네 묘 등도 있다.

현대의 완도는 장보고에 기대 많은 소득을 얻고 있다. 완도 장보고 유적지 맞은편에는 거대한 장보고 동상이 있어 어디에서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완도에서 신지도를 잇는 신지대교에 이어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대교의 이름이 장보고 대교다. 오는 2017년 장보고 대교가 완공되면 완도에서 전남 강진은 육로로 연결돼 이동시간이 크게 단축된다. 한을 품고 세상을 뜬 해양의 개척자 장보고가 만일 하늘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자신의 사후 1200여 년 만에 자기 이름을 딴 다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