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준
1956년생. 고려대 노문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사회부장, 국제부장,
주간조선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현 조선뉴스프레스 고문,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국제보도부문상(1999), 체육훈장 백마장(2012) /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출간
1956년생. 고려대 노문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사회부장, 국제부장,
주간조선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현 조선뉴스프레스 고문,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국제보도부문상(1999), 체육훈장 백마장(2012) /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출간
살다 보면 간혹 황당한 일을 당한다. 그럴 때 우린 ‘하필 왜 내게…’라며 당황해 한다. 그러나 나중 돌아보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발견하게 된다.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2012년 5월 나는 5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좀 쉬고 있던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공직 생활 때 동료들과 만나 식사를 하고 2차에서 거나하게 술도 마셨다. 여러 이유로 마음이 힘든 상태이긴 했지만 그날은 즐거웠다.
그날 공황발작 일어나다
새벽 1시 넘어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그때는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날도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가위에 눌린 듯 숨이 콱 막히면서 의식이 깨어났다. 도저히 숨을 쉬기가 어려운 호흡곤란 증상이 찾아왔다. 괴롭고 힘들고 절망에 가득 찬 감정이 엄습했다.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어 심장이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쿵쾅쿵쾅’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반사적으로 손목 맥을 짚어 보니 100m 달리기할 때처럼 빨랐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이것을 오한이라고 해야 하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가 딱딱 부딪치고 이불이 들썩거릴 정도로 흔들렸다.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 이러다 미쳐버리거나 죽을 것 같았다. 극도의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억지로 숨을 쉬면서 다시 시계를 보니 불과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사람은 친정에 갔고 아들은 회사에서 야근 중이었다. 지옥 같은 시간을 홀로 견디면서 나는 상황이 더 급박해지면 119에 신고하겠다고 생각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격렬했던 몸의 떨림과 발작적 흥분 상태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마음의 상태는 그대로였지만, 신체적으로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시계를 다시 보니 총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한나절을 보낸 듯한 긴 시간이었다. 엉금엉금 거실로 기어나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옴짝달싹하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옷은 다 젖어 있었다. 5월 초 시원한 아침 바람이 몸을 스쳤다.
도대체 왜 이럴까.
물론 요즘 내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다. 최근 내가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정리하면서 몸과 마음이 위축되고 형편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다.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옆자리가 비면서
어젯밤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옛 동료들을 만나 반가웠고 왁자지껄 저녁을 하면서 울적한 마음도 좀 가셨다. 2차 맥줏집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내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내 옆자리는 빈 상태가 되었다. 그 사람은 내가 직장을 그만둔 뒤 들어온 사람이라 잘 몰랐으며 만난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저 자리를 옮긴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엄청난 모멸감을 느꼈다.
‘아, 저 친구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내 옆자리에 앉기 싫어 자리를 옮겼구나….’
그 생각은 곧 합석한 다른 동료들에게로 이어졌다. ‘이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색하진 않지만 속으론 나를 형편없는 놈으로 보고 있을 거다.’
마음 한구석에 시커먼 좌절감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부터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 상황을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리플레이하다가 결국 발작을 일으킨 것이었다.
자격지심은 때로 무섭다. 인생을 살면서 계획을 세우다 접을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당시 나는 마치 대단한 실수나 실패를 한 양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책감은 평범한 인간관계나 상황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재가공해 스스로를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면서, 그러는 나 자신이 또 한탄스러웠다.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혀 입맛이 없었다. 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도 주섬주섬 일어나 욕실로 가 몸무게를 재니 평소보다 무려 4kg이 빠졌다. 30년 전 젊은이 때 몸무게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룻밤 새 4kg 체중 줄어
불과 하룻밤에 4kg이나 빠졌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장과 맥박이 맹렬하게 뛰며 땀을 비 오듯 흘린 것이, 마치 밤새 마라톤을 뛴 것과 같은 열량 소비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고대하던 다이어트가 하룻밤 새 일어났지만 도리어 겁이 덜컥 났다. 열량을 늘려야겠다 생각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숟가락으로 푹푹 퍼 먹었다. 도넛도 먹었다. 평소 잘 먹지 않던 단 음식들을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우악스럽게 먹어댔다. 몸무게를 재니 금방 2kg이 늘었다. 마음이 좀 안정됐다.
오후 늦게 아내가 돌아왔다. 내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정신적으로 헝클어져 있던 내게서 나온 답변은 이런 정도였다.
“몰라. 되게 힘들었어. 심장이 뛰고 발작이 일어나고….”
갑상선 질환을 앓아본 경험이 있는 그녀는 혹시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아니냐며 바로 나를 이끌고 동네 내과로 갔다.
의사는 갑상선보다 정신적인 데 문제가 있는 듯하니 종합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그러고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일종의 공황장애(Panic disorder) 증세 같네요.”
공황장애란 말은 얼마 전 개그맨 이경규가 TV에서 자신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밝혀서 알게 됐다. 그때는 남의 일로 여겼다. 인기 연예인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특유의 과장법과 호들갑을 섞어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또 몇 달 전 친한 언론계 후배가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다가 갑자기 공황장애 발작을 일으켜 거의 죽을 뻔한 것을 지나가는 차량이 보고 병원으로 데려가 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예외적인 사람의 예외적인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다. 그게 나를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공황장애’를 검색해 보니 이렇게 나와 있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불안 증상으로 공황발작(Panic attack)이 주요한 특징인 질환이다.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극도의 공포심이 느껴지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빨리 뛰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곤란해지며 땀이 나는 등의 신체증상 등이 수반된다.’ 바로 내가 겪은 그대로였다. 일종의 공황발작이 일어난 것이며, 이것이 반복되면 공황장애, 우울증 등 정신병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로 가보세요”
난데없는 공황발작은 내 내면에서 나오는 격렬한 반응이었다. 최악의 상태로 치닫는 심신을 이렇게 놔두면 안 되니 돌보라는 시그널이었다. 어찌 보면 질병은 우리 생명을 보호하고 몸을 정상화시키려는 자연스러운 신호요, 회복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당황스럽고 두렵기만 했다.
서둘러 평소 다니던 유명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순환기 계통의 내과 전문의를 만나 내 증상과 상황을 설명했다.
“작년(2011년) 12월 초, 제가 하려던 일을 접은 뒤부터 극심한 스트레스가 일어났습니다. 잠자다 벌떡 일어나고 땀 흘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3월 중순경부터는 증세가 더 나빠져 불면증이 생겨 지난 한 달 반 거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공황발작 같은 증상이 나타나더군요.”
의사는 여러 체크를 하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자율신경계가 헝클어져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원인은 갑상선 같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불면증, 좌절감이 우울증으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정신과로 가보시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과로 가다니…. 말도 안 돼.
“정신과를 가지 않고 극복할 수는 없나요? 제 의지로는 안 될까요?”
의사는 그런 나를 안됐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건강한 운동선수라도 감기 몸살에 걸려 꼼짝 못 할 때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치료를 받아야죠. 그냥 놔두면 진짜 고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창피하고 두려웠다. 진료 기록을 남기는 것도, 수면제와 진정제를 먹는 것도 싫었다.
정신병동의 암울한 얘기를 그린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가 생각났다. 교도소에서 정신병원으로 후송된 범죄자 맥머피(잭 니컬슨 분)는 그곳이 교도소보다는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억압적인 상황임을 보고 놀란다. 건강하고 활력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정신병원에 들어와 짓눌려 사는 죽은 인간들이 돼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건강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는 환자들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는데….
정신과 진찰을 받아보라는 의사의 권유는 마치 내가 인생의 부적응자나 실패자가 된 것처럼 과도한 생각을 하게 했고 그러다 평생 약물 신세를 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처방된 진정제와 수면제를 먹었다.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한결 차분한 마음 상태가 됐다.
5개월간 나 자신 되돌아봐
나는 지난 5개월간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기간 동안의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Gloomy Sunday(우울한 일요일)’가 떠오른다. 1930년대 초 유럽에서 유행한 이 노래는 자살을 암시하는 염세적 분위기로 자살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유럽 전역에 방송금지가 됐던 곡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지배해 온 생각은 두 가지였다.
내 인생은 이제 끝인가?
나는 결국 실패자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계로 뛰어들었던 내게 사회문제는 늘 관심사였다. 22년째 다니던 신문사를 나와 몇 년간 혼자 글을 쓰고 지낼 때도 그랬다. 우연한 기회로 공직 생활을 하게 됐고, 권부(權府)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민주화된 사회가 그렇게 제대로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 국회의원 도전을 결심했다. 2012년 4월에 19대 총선이 있었다. 나는 그 1년 전인 2011년 봄 사표를 내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연고지도, 후원세력도, 돈도 없었고, 무엇보다 내 성격이 정치 생리에 맞지 않았다. 결국 고민고민 하다가 총선을 4개월 앞둔 2011년 12월 초 출마 계획을 접었다. 어쨌든 버티면서 상황을 관망하자는 주위의 권유도 뿌리치고 눈 딱 감고 사무실을 폐쇄했다.
그때 내 나이 만 55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민감하고 취약한 나이였다. 후반기 인생 궤도 진입을 위해 신중한 소프트랜딩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나는 급격하게 궤도를 선회한 데다 급제동까지 하는 하드랜딩을 감행했다. 그 뒤 후폭풍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컸고,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격렬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무기력하고 허탈했다. 세상이 재미가 없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온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러다 하루아침에 집에 틀어박혀 빈둥거리니 말이다. 늦게 일어나 어슬렁거리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어 이제 뭐 하나를 생각하니 참 힘이 빠졌다. 이렇게 노인이 되어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들면 얕게 들다가 몇 번씩 깨곤 했다.
자연 지난 시간을 복기하게 된다. 마음 한구석에서 후회와 반성이 들었다.
왜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했지? 기자 시절에도 정치 쪽에는 눈도 안 돌렸던 내가 아닌가….
출마를 포기하더라도 좀 눈치껏 그만두지, 하루아침에 주위가 다 알도록 떠들썩하게 한 것은 또 무슨 경우인지….
이런 생각들은 곧 자신에 대한 창피함으로 이어졌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뭐라고 볼까.
이럴 때면 애써 합리적 근거를 대면서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끝까지 가보겠다고 고집을 계속 피웠다면 정말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됐을 것이다. 포기한 것은 나다운 결단이다.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을 놓고 더 이상 나를 탓하지는 말자. 후회하지 말자.’
마음이 좀 가라앉는가 싶으면 또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다 좋다.… 그런데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떻게 되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가야지? 내가 할 일이 있을까. 내가 어떤 일, 어떤 직책을 해야 만족스러울까. 나를 필요로 할, 받아줄 곳이 있기나 한가.’
밤마다 악몽
앞이 깜깜해지면서 다시 후회가 거듭됐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은 자신에 대한 한심함, 의구심, 불신으로 발전했다.
밤마다 악몽이 나타났다. 자다가 벌떡벌떡 깨어났다. 새벽에 마치 누군가에 목을 졸린 듯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깨어났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을 때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할딱할딱 가쁜 숨을 쉬며 깨어나곤 했다.
가장 힘든 것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나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내 스스로 가해자요 피해자인 셈이었다.
스스로 느끼는 패배감, 후회, 자책, 허탈감의 공격에 힘든 것이었다. 마음이 납덩어리처럼 무겁다가 뻥 뚫린 가슴처럼 허탈하다가 이어서 우울, 상실감, 자책감, 후회 등이 하루에도 수없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했다.
단전에 힘을 주면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심호흡을 하면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곧 어두운 마음이 덮치면서 온갖 잡념과 번뇌, 우울함에 휩싸이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집 근처 교회당에 들어가 혼자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다.
“제가 물리쳐야 할 적은 바로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죄책감, 불안, 염려, 이것이야말로 저를 파멸시키려는 장본인이자 사탄입니다. 싸워 이기게 해주소서.”
기도를 하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았으나 조금 있으면 다시 온갖 잡념이 스멀스멀 일어나며 날이 갈수록 그 빈도와 강도는 심해졌다.
햄버거 집에서 생긴 일
3월 초순경부터 친구가 마련해 준 대학로 사무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좋았으나 곧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시 잡념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생각도 ‘에너지 덩어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들은 처음에는 내 아랫배 한 귀퉁이에서 간혹 머물다 사라지곤 했다. 그 ‘불편한’ 생각들은 아랫배 한쪽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때로는 아픈 느낌을 주기도 했다. 옛 어른들이 말한 ‘속이 썩는다’는 표현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다 어느 날부터 그 생각들이 마치 암덩어리처럼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아랫배 어느 곳에 존재하던 이 절망의 덩어리는 차츰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시작했고 조금씩 커가기 시작했다. 불안, 염려가 심할 때는 커지다가 마음이 가벼워질 때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중순이 되면서 그것은 더욱 활성화됐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마음을 아프게 했고 어떨 때는 불쑥 기운이 솟아올라 진을 빼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나는 사무실 인근 햄버거 집에 갔다. 봄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화창한 날씨였으나 내 마음은 어두컴컴한 지하실과 같았다. 카운터에 서 있던 해맑은 인상의 아가씨에게 햄버거를 주문하는 순간, 내 마음속 암덩어리가 요란스럽게 팽창, 요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회한·비참함·허탈·후회·자책·수치심·좌절·죄책감·절망감 등 온갖 부정적 감정과 생각이 한꺼번에 격렬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마음이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이런 체험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 아가씨는 지옥 같은 내 마음 상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밝은 미소로 나를 응대했다. 그때 나와 그녀는 공간적으로 1m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는 너무나 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저 우주 먼 곳의 블랙홀 안에 있는 주인공이 시공간과 차원이 다른, 지구에 있는 딸과 교신할 때처럼 말이다.
‘아. 어쩌면 나는 저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영원히 이런 절망감에 사로잡혀 지내게 될지도 몰라….’
공황발작의 초기 증상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공황발작 초기 증상이 아니었나 싶다. 억지로 기운을 차리고 사무실에 돌아와 돌을 씹듯 햄버거를 먹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몸도 매우 지친 상태가 되어 의자를 젖히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극심한 피로감이 찾아왔으나 도리어 정신은 말똥말똥해졌다.
확실히 내가 이상해졌다. 이건 단순한 증상이 아니다. 몇 시간을 사무실에서 그렇게 보낸 후 나는 컴퓨터를 켜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우울증’이란 용어를 검색했다.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장애 진단 기준을 보면 우울증 환자는 거의 하루종일 ▲우울한 기분 ▲피로 또는 에너지 상실 ▲흥미나 집중력 감소 ▲체중 및 식욕 감소 ▲불면 또는 과수면 ▲자기 비하, 죄책감, 무가치감 ▲죽음·자살에 대한 반복적 생각 등의 증상을 보인다.
바로 내가 그랬다. 체중변화와 죽음·자살 생각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해당됐다. 그럼 내가 우울증에 걸렸단 말인가…. 겁이 더럭 났다. 우울증은 평소 염세적 내지 부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거나, 아니면 실연당한 사람, 갱년기 여성들에게 찾아오는 특별한 병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대략 그때를 전후해 불면증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예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날이 찾아왔다. 참으로 기나긴 불면의 밤이 시작됐다. 정상적인 경우 잠을 못 자면 다음날 낮에 피곤하고 졸음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낮에 피곤은 하지만 졸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눈을 붙이는 순간 정신은 되려 말똥말똥해진다.
잠을 못 자니 머리가 쉬지 못해 피곤하고 멍해진다. 그런 멍한 상태로 지내다 보니 머리 회전이 둔해지고, 기억력이 감퇴되며 매사 흥미가 현저히 감퇴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문 여닫는 일상의 소리에도 신경이 파르르 곤두서곤 했다.
몸을 피곤하게 하면 자연스레 잠이 찾아오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차를 안 타고 하루 수십km를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 매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머리는 다시 맑아지고 잠기운은 달아났다. 온갖 망상이 또다시 엄습했다. 한참을 드러누운 것 같은데 시간을 보면 자정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일어나 앉아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성경이나 에세이, 불경책을 집어 들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머리는 또다시 온갖 잡념에 휩싸였다. 단전호흡을 해보기도 하고, 소파에 나와 누워보기도 하고, 조용히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별별짓을 다했지만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위스키도 마셔보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음주가 알코올 중독으로 빠지는 필연적인 길이란 사실을 알기에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이렇게 긴긴 밤을 지내고 새벽이 오면 정말 끔찍하고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절망감과 좌절감이 가득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억지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운동하겠다고 나서면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털썩 소파에 눕는다. 그러면 마음 한쪽에선 다시 나가 운동하라고 재촉한다. 나가 조깅을 해야 할지, 그냥 쉬어야 할지조차 결정을 못 해 우왕좌왕, 갈팡질팡했다. 무엇을 해도 편치 않았고,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해도 마땅치 않았으며,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이렇게 힘들었는데도 나는 병원을 가거나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았다. 약 기운을 빌려 잠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적으로 허물어지는 것이요, 약물 남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 자책감이 날로 커져 갔다. 과거 온갖 일들이 떠오르면서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요,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곧 내가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이런 상태가 보름, 한 달로 이어지면서 육체적인 이상 징후가 뚜렷이 나타났다. 우선 자율신경 조절이 잘 안 됐다. 아직 차가운 3월 말 날씨에도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수건이 금세 흥건히 젖었고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식사를 할 때나 길거리를 걸어갈 때나 쉴새없이 땀이 흘러나왔다.
맥박은 왜 그리 빨리 뛰는지.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한밤중에도 맥박이 벌떡벌떡 뛰었다.
간헐적으로 마음이 아프던 현상이 점점 잦아졌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마음이 맹렬히 아프면서 순식간에 파김치가 되곤 했다. 주말에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등산을 가면 갑자기 등산로 초입에서부터 맹렬하게 마음이 아파 아예 올라가지도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우울증 속에서 생방송해
가장 큰 문제는 당시 내가 TV에 나가 생방송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난 3월 정부가 운영하는 K-TV에 나가 한류(韓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평이 좋아 4월 말 KBS-2TV 〈아침마당〉에서 한 시간 특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프로는 시청률이 보통 5% 이상 나오는 인기 프로라고 했다.
날짜가 다가오면서 걱정이 커졌다. 평소 같으면 1시간짜리 생방송이라도 겁을 내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한 달 가까이 불면증이 계속되면서 머리가 쉬지 못해 모든 게 정상이 아니었다. 혹시 중간에 내용을 까먹으면 어떻게 하나?
주저주저하다가 동네 병원을 찾아가 불면증을 호소하고 수면제 처방을 받았다. 수면제를 직접 구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약을 먹었더니 잠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잠을 잤으나 아침에 일어나니 골이 아팠다. 당초 일주일치 분량을 받아 왔으나 이틀 정도 먹고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약을 안 먹으니 역시 잠도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방송 당일이 됐다. 전날 밤 수면제를 반 알 먹고 간신히 두어 시간 눈을 붙였다. 새벽에 일어나 아파트 근처 학교 운동장을 뛰었다.
아침 8시, 정신이 그다지 맑지 않은 가운데 분장을 마치고 방송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마음은 잔뜩 다운(Down)돼 있는데 전국의 시청자를 상대로 아주 활기찬 모습으로 1시간가량 혼자 말을 해야 한다. 혹시 돌발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어떡하나. 온갖 걱정이 엄습했다.
방송 시작 사인이 들어왔다.
나는 밝게 웃으면서 조명이 비추는 TV 카메라 앞 무대로 나아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기타도 치고 노래도 했다. 마치고 난 뒤 주변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시청률도 6% 이상 나와 선방(善防)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시청자들은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그때 나는 활기차게 활동하던 어느 유명인사가 평소 우울증으로 고생해 왔다는 식의 보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이란 마음이 매우 힘들어도 외견상 다른 사람에게는 멀쩡하게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위 사람은 마음에 병이 걸린 다른 사람의 상태를 외견상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방송을 마치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마음의 통증은 더욱 심해갔다. 다음날 집사람과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는데 나는 몸살 걸린 사람처럼 끙끙거리며 좌석에 누워 있다시피 했다. 워낙 정신이 산만해 영화의 흐름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고 지금도 영화 줄거리는커녕 출연배우, 제목조차 기억에 없다.
확실히 내가 이상해졌다. 그러다 며칠 뒤, 앞서 이야기한 ‘공황발작’으로 이어졌다.(다음 호에 계속)⊙
그날 공황발작 일어나다
새벽 1시 넘어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그때는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날도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가위에 눌린 듯 숨이 콱 막히면서 의식이 깨어났다. 도저히 숨을 쉬기가 어려운 호흡곤란 증상이 찾아왔다. 괴롭고 힘들고 절망에 가득 찬 감정이 엄습했다.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어 심장이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쿵쾅쿵쾅’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반사적으로 손목 맥을 짚어 보니 100m 달리기할 때처럼 빨랐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이것을 오한이라고 해야 하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가 딱딱 부딪치고 이불이 들썩거릴 정도로 흔들렸다.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 이러다 미쳐버리거나 죽을 것 같았다. 극도의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억지로 숨을 쉬면서 다시 시계를 보니 불과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사람은 친정에 갔고 아들은 회사에서 야근 중이었다. 지옥 같은 시간을 홀로 견디면서 나는 상황이 더 급박해지면 119에 신고하겠다고 생각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격렬했던 몸의 떨림과 발작적 흥분 상태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마음의 상태는 그대로였지만, 신체적으로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시계를 다시 보니 총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한나절을 보낸 듯한 긴 시간이었다. 엉금엉금 거실로 기어나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옴짝달싹하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옷은 다 젖어 있었다. 5월 초 시원한 아침 바람이 몸을 스쳤다.
도대체 왜 이럴까.
물론 요즘 내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다. 최근 내가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정리하면서 몸과 마음이 위축되고 형편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다.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옆자리가 비면서
어젯밤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옛 동료들을 만나 반가웠고 왁자지껄 저녁을 하면서 울적한 마음도 좀 가셨다. 2차 맥줏집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내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내 옆자리는 빈 상태가 되었다. 그 사람은 내가 직장을 그만둔 뒤 들어온 사람이라 잘 몰랐으며 만난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저 자리를 옮긴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엄청난 모멸감을 느꼈다.
‘아, 저 친구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내 옆자리에 앉기 싫어 자리를 옮겼구나….’
그 생각은 곧 합석한 다른 동료들에게로 이어졌다. ‘이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색하진 않지만 속으론 나를 형편없는 놈으로 보고 있을 거다.’
마음 한구석에 시커먼 좌절감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부터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 상황을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리플레이하다가 결국 발작을 일으킨 것이었다.
자격지심은 때로 무섭다. 인생을 살면서 계획을 세우다 접을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당시 나는 마치 대단한 실수나 실패를 한 양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책감은 평범한 인간관계나 상황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재가공해 스스로를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면서, 그러는 나 자신이 또 한탄스러웠다.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혀 입맛이 없었다. 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도 주섬주섬 일어나 욕실로 가 몸무게를 재니 평소보다 무려 4kg이 빠졌다. 30년 전 젊은이 때 몸무게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룻밤 새 4kg 체중 줄어
불과 하룻밤에 4kg이나 빠졌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장과 맥박이 맹렬하게 뛰며 땀을 비 오듯 흘린 것이, 마치 밤새 마라톤을 뛴 것과 같은 열량 소비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고대하던 다이어트가 하룻밤 새 일어났지만 도리어 겁이 덜컥 났다. 열량을 늘려야겠다 생각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숟가락으로 푹푹 퍼 먹었다. 도넛도 먹었다. 평소 잘 먹지 않던 단 음식들을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우악스럽게 먹어댔다. 몸무게를 재니 금방 2kg이 늘었다. 마음이 좀 안정됐다.
오후 늦게 아내가 돌아왔다. 내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정신적으로 헝클어져 있던 내게서 나온 답변은 이런 정도였다.
“몰라. 되게 힘들었어. 심장이 뛰고 발작이 일어나고….”
갑상선 질환을 앓아본 경험이 있는 그녀는 혹시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아니냐며 바로 나를 이끌고 동네 내과로 갔다.
의사는 갑상선보다 정신적인 데 문제가 있는 듯하니 종합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그러고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일종의 공황장애(Panic disorder) 증세 같네요.”
공황장애란 말은 얼마 전 개그맨 이경규가 TV에서 자신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밝혀서 알게 됐다. 그때는 남의 일로 여겼다. 인기 연예인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특유의 과장법과 호들갑을 섞어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또 몇 달 전 친한 언론계 후배가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다가 갑자기 공황장애 발작을 일으켜 거의 죽을 뻔한 것을 지나가는 차량이 보고 병원으로 데려가 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예외적인 사람의 예외적인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다. 그게 나를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공황장애’를 검색해 보니 이렇게 나와 있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불안 증상으로 공황발작(Panic attack)이 주요한 특징인 질환이다.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극도의 공포심이 느껴지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빨리 뛰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곤란해지며 땀이 나는 등의 신체증상 등이 수반된다.’ 바로 내가 겪은 그대로였다. 일종의 공황발작이 일어난 것이며, 이것이 반복되면 공황장애, 우울증 등 정신병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로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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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정신병원을 무대로 정신병자들과 정상인 사회의 부조화를 그렸다. |
서둘러 평소 다니던 유명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순환기 계통의 내과 전문의를 만나 내 증상과 상황을 설명했다.
“작년(2011년) 12월 초, 제가 하려던 일을 접은 뒤부터 극심한 스트레스가 일어났습니다. 잠자다 벌떡 일어나고 땀 흘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3월 중순경부터는 증세가 더 나빠져 불면증이 생겨 지난 한 달 반 거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공황발작 같은 증상이 나타나더군요.”
의사는 여러 체크를 하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자율신경계가 헝클어져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원인은 갑상선 같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불면증, 좌절감이 우울증으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정신과로 가보시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과로 가다니…. 말도 안 돼.
“정신과를 가지 않고 극복할 수는 없나요? 제 의지로는 안 될까요?”
의사는 그런 나를 안됐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건강한 운동선수라도 감기 몸살에 걸려 꼼짝 못 할 때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치료를 받아야죠. 그냥 놔두면 진짜 고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창피하고 두려웠다. 진료 기록을 남기는 것도, 수면제와 진정제를 먹는 것도 싫었다.
정신병동의 암울한 얘기를 그린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가 생각났다. 교도소에서 정신병원으로 후송된 범죄자 맥머피(잭 니컬슨 분)는 그곳이 교도소보다는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억압적인 상황임을 보고 놀란다. 건강하고 활력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정신병원에 들어와 짓눌려 사는 죽은 인간들이 돼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건강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는 환자들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는데….
정신과 진찰을 받아보라는 의사의 권유는 마치 내가 인생의 부적응자나 실패자가 된 것처럼 과도한 생각을 하게 했고 그러다 평생 약물 신세를 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처방된 진정제와 수면제를 먹었다.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한결 차분한 마음 상태가 됐다.
5개월간 나 자신 되돌아봐
나는 지난 5개월간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기간 동안의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Gloomy Sunday(우울한 일요일)’가 떠오른다. 1930년대 초 유럽에서 유행한 이 노래는 자살을 암시하는 염세적 분위기로 자살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유럽 전역에 방송금지가 됐던 곡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지배해 온 생각은 두 가지였다.
내 인생은 이제 끝인가?
나는 결국 실패자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계로 뛰어들었던 내게 사회문제는 늘 관심사였다. 22년째 다니던 신문사를 나와 몇 년간 혼자 글을 쓰고 지낼 때도 그랬다. 우연한 기회로 공직 생활을 하게 됐고, 권부(權府)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민주화된 사회가 그렇게 제대로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 국회의원 도전을 결심했다. 2012년 4월에 19대 총선이 있었다. 나는 그 1년 전인 2011년 봄 사표를 내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연고지도, 후원세력도, 돈도 없었고, 무엇보다 내 성격이 정치 생리에 맞지 않았다. 결국 고민고민 하다가 총선을 4개월 앞둔 2011년 12월 초 출마 계획을 접었다. 어쨌든 버티면서 상황을 관망하자는 주위의 권유도 뿌리치고 눈 딱 감고 사무실을 폐쇄했다.
그때 내 나이 만 55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민감하고 취약한 나이였다. 후반기 인생 궤도 진입을 위해 신중한 소프트랜딩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나는 급격하게 궤도를 선회한 데다 급제동까지 하는 하드랜딩을 감행했다. 그 뒤 후폭풍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컸고,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격렬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무기력하고 허탈했다. 세상이 재미가 없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온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러다 하루아침에 집에 틀어박혀 빈둥거리니 말이다. 늦게 일어나 어슬렁거리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어 이제 뭐 하나를 생각하니 참 힘이 빠졌다. 이렇게 노인이 되어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들면 얕게 들다가 몇 번씩 깨곤 했다.
자연 지난 시간을 복기하게 된다. 마음 한구석에서 후회와 반성이 들었다.
왜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했지? 기자 시절에도 정치 쪽에는 눈도 안 돌렸던 내가 아닌가….
출마를 포기하더라도 좀 눈치껏 그만두지, 하루아침에 주위가 다 알도록 떠들썩하게 한 것은 또 무슨 경우인지….
이런 생각들은 곧 자신에 대한 창피함으로 이어졌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뭐라고 볼까.
이럴 때면 애써 합리적 근거를 대면서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끝까지 가보겠다고 고집을 계속 피웠다면 정말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됐을 것이다. 포기한 것은 나다운 결단이다.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을 놓고 더 이상 나를 탓하지는 말자. 후회하지 말자.’
마음이 좀 가라앉는가 싶으면 또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다 좋다.… 그런데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떻게 되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가야지? 내가 할 일이 있을까. 내가 어떤 일, 어떤 직책을 해야 만족스러울까. 나를 필요로 할, 받아줄 곳이 있기나 한가.’
밤마다 악몽
앞이 깜깜해지면서 다시 후회가 거듭됐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은 자신에 대한 한심함, 의구심, 불신으로 발전했다.
밤마다 악몽이 나타났다. 자다가 벌떡벌떡 깨어났다. 새벽에 마치 누군가에 목을 졸린 듯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깨어났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을 때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할딱할딱 가쁜 숨을 쉬며 깨어나곤 했다.
가장 힘든 것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나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내 스스로 가해자요 피해자인 셈이었다.
스스로 느끼는 패배감, 후회, 자책, 허탈감의 공격에 힘든 것이었다. 마음이 납덩어리처럼 무겁다가 뻥 뚫린 가슴처럼 허탈하다가 이어서 우울, 상실감, 자책감, 후회 등이 하루에도 수없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했다.
단전에 힘을 주면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심호흡을 하면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곧 어두운 마음이 덮치면서 온갖 잡념과 번뇌, 우울함에 휩싸이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집 근처 교회당에 들어가 혼자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다.
“제가 물리쳐야 할 적은 바로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죄책감, 불안, 염려, 이것이야말로 저를 파멸시키려는 장본인이자 사탄입니다. 싸워 이기게 해주소서.”
기도를 하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았으나 조금 있으면 다시 온갖 잡념이 스멀스멀 일어나며 날이 갈수록 그 빈도와 강도는 심해졌다.
햄버거 집에서 생긴 일
3월 초순경부터 친구가 마련해 준 대학로 사무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좋았으나 곧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시 잡념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생각도 ‘에너지 덩어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들은 처음에는 내 아랫배 한 귀퉁이에서 간혹 머물다 사라지곤 했다. 그 ‘불편한’ 생각들은 아랫배 한쪽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때로는 아픈 느낌을 주기도 했다. 옛 어른들이 말한 ‘속이 썩는다’는 표현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다 어느 날부터 그 생각들이 마치 암덩어리처럼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아랫배 어느 곳에 존재하던 이 절망의 덩어리는 차츰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시작했고 조금씩 커가기 시작했다. 불안, 염려가 심할 때는 커지다가 마음이 가벼워질 때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중순이 되면서 그것은 더욱 활성화됐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마음을 아프게 했고 어떨 때는 불쑥 기운이 솟아올라 진을 빼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나는 사무실 인근 햄버거 집에 갔다. 봄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화창한 날씨였으나 내 마음은 어두컴컴한 지하실과 같았다. 카운터에 서 있던 해맑은 인상의 아가씨에게 햄버거를 주문하는 순간, 내 마음속 암덩어리가 요란스럽게 팽창, 요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회한·비참함·허탈·후회·자책·수치심·좌절·죄책감·절망감 등 온갖 부정적 감정과 생각이 한꺼번에 격렬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마음이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이런 체험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 아가씨는 지옥 같은 내 마음 상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밝은 미소로 나를 응대했다. 그때 나와 그녀는 공간적으로 1m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는 너무나 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저 우주 먼 곳의 블랙홀 안에 있는 주인공이 시공간과 차원이 다른, 지구에 있는 딸과 교신할 때처럼 말이다.
‘아. 어쩌면 나는 저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영원히 이런 절망감에 사로잡혀 지내게 될지도 몰라….’
공황발작의 초기 증상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공황발작 초기 증상이 아니었나 싶다. 억지로 기운을 차리고 사무실에 돌아와 돌을 씹듯 햄버거를 먹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몸도 매우 지친 상태가 되어 의자를 젖히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극심한 피로감이 찾아왔으나 도리어 정신은 말똥말똥해졌다.
확실히 내가 이상해졌다. 이건 단순한 증상이 아니다. 몇 시간을 사무실에서 그렇게 보낸 후 나는 컴퓨터를 켜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우울증’이란 용어를 검색했다.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장애 진단 기준을 보면 우울증 환자는 거의 하루종일 ▲우울한 기분 ▲피로 또는 에너지 상실 ▲흥미나 집중력 감소 ▲체중 및 식욕 감소 ▲불면 또는 과수면 ▲자기 비하, 죄책감, 무가치감 ▲죽음·자살에 대한 반복적 생각 등의 증상을 보인다.
바로 내가 그랬다. 체중변화와 죽음·자살 생각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해당됐다. 그럼 내가 우울증에 걸렸단 말인가…. 겁이 더럭 났다. 우울증은 평소 염세적 내지 부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거나, 아니면 실연당한 사람, 갱년기 여성들에게 찾아오는 특별한 병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대략 그때를 전후해 불면증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예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날이 찾아왔다. 참으로 기나긴 불면의 밤이 시작됐다. 정상적인 경우 잠을 못 자면 다음날 낮에 피곤하고 졸음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낮에 피곤은 하지만 졸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눈을 붙이는 순간 정신은 되려 말똥말똥해진다.
잠을 못 자니 머리가 쉬지 못해 피곤하고 멍해진다. 그런 멍한 상태로 지내다 보니 머리 회전이 둔해지고, 기억력이 감퇴되며 매사 흥미가 현저히 감퇴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문 여닫는 일상의 소리에도 신경이 파르르 곤두서곤 했다.
몸을 피곤하게 하면 자연스레 잠이 찾아오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차를 안 타고 하루 수십km를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 매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머리는 다시 맑아지고 잠기운은 달아났다. 온갖 망상이 또다시 엄습했다. 한참을 드러누운 것 같은데 시간을 보면 자정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일어나 앉아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성경이나 에세이, 불경책을 집어 들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머리는 또다시 온갖 잡념에 휩싸였다. 단전호흡을 해보기도 하고, 소파에 나와 누워보기도 하고, 조용히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별별짓을 다했지만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위스키도 마셔보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음주가 알코올 중독으로 빠지는 필연적인 길이란 사실을 알기에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이렇게 긴긴 밤을 지내고 새벽이 오면 정말 끔찍하고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절망감과 좌절감이 가득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억지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운동하겠다고 나서면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털썩 소파에 눕는다. 그러면 마음 한쪽에선 다시 나가 운동하라고 재촉한다. 나가 조깅을 해야 할지, 그냥 쉬어야 할지조차 결정을 못 해 우왕좌왕, 갈팡질팡했다. 무엇을 해도 편치 않았고,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해도 마땅치 않았으며,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이렇게 힘들었는데도 나는 병원을 가거나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았다. 약 기운을 빌려 잠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적으로 허물어지는 것이요, 약물 남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 자책감이 날로 커져 갔다. 과거 온갖 일들이 떠오르면서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요,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곧 내가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이런 상태가 보름, 한 달로 이어지면서 육체적인 이상 징후가 뚜렷이 나타났다. 우선 자율신경 조절이 잘 안 됐다. 아직 차가운 3월 말 날씨에도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수건이 금세 흥건히 젖었고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식사를 할 때나 길거리를 걸어갈 때나 쉴새없이 땀이 흘러나왔다.
맥박은 왜 그리 빨리 뛰는지.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한밤중에도 맥박이 벌떡벌떡 뛰었다.
간헐적으로 마음이 아프던 현상이 점점 잦아졌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마음이 맹렬히 아프면서 순식간에 파김치가 되곤 했다. 주말에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등산을 가면 갑자기 등산로 초입에서부터 맹렬하게 마음이 아파 아예 올라가지도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우울증 속에서 생방송해
가장 큰 문제는 당시 내가 TV에 나가 생방송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난 3월 정부가 운영하는 K-TV에 나가 한류(韓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평이 좋아 4월 말 KBS-2TV 〈아침마당〉에서 한 시간 특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프로는 시청률이 보통 5% 이상 나오는 인기 프로라고 했다.
날짜가 다가오면서 걱정이 커졌다. 평소 같으면 1시간짜리 생방송이라도 겁을 내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한 달 가까이 불면증이 계속되면서 머리가 쉬지 못해 모든 게 정상이 아니었다. 혹시 중간에 내용을 까먹으면 어떻게 하나?
주저주저하다가 동네 병원을 찾아가 불면증을 호소하고 수면제 처방을 받았다. 수면제를 직접 구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약을 먹었더니 잠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잠을 잤으나 아침에 일어나니 골이 아팠다. 당초 일주일치 분량을 받아 왔으나 이틀 정도 먹고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약을 안 먹으니 역시 잠도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방송 당일이 됐다. 전날 밤 수면제를 반 알 먹고 간신히 두어 시간 눈을 붙였다. 새벽에 일어나 아파트 근처 학교 운동장을 뛰었다.
아침 8시, 정신이 그다지 맑지 않은 가운데 분장을 마치고 방송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마음은 잔뜩 다운(Down)돼 있는데 전국의 시청자를 상대로 아주 활기찬 모습으로 1시간가량 혼자 말을 해야 한다. 혹시 돌발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어떡하나. 온갖 걱정이 엄습했다.
방송 시작 사인이 들어왔다.
나는 밝게 웃으면서 조명이 비추는 TV 카메라 앞 무대로 나아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기타도 치고 노래도 했다. 마치고 난 뒤 주변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시청률도 6% 이상 나와 선방(善防)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시청자들은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그때 나는 활기차게 활동하던 어느 유명인사가 평소 우울증으로 고생해 왔다는 식의 보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이란 마음이 매우 힘들어도 외견상 다른 사람에게는 멀쩡하게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위 사람은 마음에 병이 걸린 다른 사람의 상태를 외견상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방송을 마치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마음의 통증은 더욱 심해갔다. 다음날 집사람과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는데 나는 몸살 걸린 사람처럼 끙끙거리며 좌석에 누워 있다시피 했다. 워낙 정신이 산만해 영화의 흐름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고 지금도 영화 줄거리는커녕 출연배우, 제목조차 기억에 없다.
확실히 내가 이상해졌다. 그러다 며칠 뒤, 앞서 이야기한 ‘공황발작’으로 이어졌다.(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