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을 통해 본 대한민국 원자력 창업 스토리〈4·마지막회〉 : 월간조선

1971년 3월 19일 당시 정부 1년 예산의 4배 가까운 비용이 투입된 첫 상업용 원전 고리1호기 기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생뚱맞은 기념사를 했다. 현지 촌로(村老)들 앞에서 “미국의 전략 핵 추진 잠수함(SSBN)” 운운하며 원전의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다.

“몇 년 전 진해항에 미국의 원자력잠수함이 들어와 타본 일이 있습니다. 그 잠수함은 기름 없이 궤짝만 한 원자력 연료로 1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답니다. 오늘 착공하는 이 원전도 다른 화력발전소처럼 기름이나 석탄 등을 쓰지 않고 원자력 연료 하나로 1년 이상 쓸 수 있습니다. 건설비용은 60만kwh에 1억7000만 달러가 들어 화력발전(1억2000만 달러)보다 비쌉니다만 갈수록 값싼 전력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오원철 수석의 모르쇠

1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착공 82개월 만인 1977년 4월 23일 완공한 고리1호기. 그러나 공식적인 준공식은 고리3, 4호기 기공식과 함께 1978년 7월 20일 열렸다. 사진=한국수력원자력

박정희는 치밀하고 실질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고리1호기 기공식에서 손수 원전 건설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연설문을 쓴 것일까? 박 대통령은 경제력이 있어야 군사력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경제력을 높이려면 전력이 풍부해야 한다. 1970년 말 발전설비 용량은 220만 킬로와트, 전기보급률은 27%에 불과했다. 원전 건설은 전력생산도 늘리고 군사력도 키우는 일이었던 것이다.

70년대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과 이를 둘러싼 한미 간의 충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공석하의 《소설 이휘소》와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1977년 6월 16일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세계적 이론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미국명 벤 리) 박사의 죽음이 미국의 음모라는 픽션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지금껏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 추진과 관련 한미는 공식적으로 이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72년 오원철(吳源哲·88) 당시 경제수석이 작성, 보고한 핵무기 개발의 마스터 플랜, “1980년대 초, 고순도 플루토늄탄을 완성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는 70년대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 계획이 압축된 유일한 문서다.

기자는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작성한 핵개발 비밀문서를 입수해 보도한 적이 있다. 1972년 9월 8일 오원철 당시 대통령 제2경제수석(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담당)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건이었다. 취재 당시 오씨에게 핵무기 개발 계획을 담은 문서를 작성한 배경을 들으러 갔을 때 오 전 수석은 “내가 작성한 문서가 틀림없다. 이 보고를 한 얼마 후 다시 유사한 보고서를 썼다”면서도 “그 이상은 답할 수 없다”고 했다.

오 전 수석은 “보고서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핵연료를 만들겠다는 내용이지 핵개발과는 무관하다”면서 “당시 (미국 정부에) 당한 것만 해도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는 “김정일이 핵을 갖고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상황인데 우리도 핵개발을 했었다고 하면 똑같은 ‘망나니’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비밀 보고서가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제2경제수석실 단독으로 작성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A4용지 아홉 장 분량인 ‘보고번호 제48호’의 이 보고서는 ‘2급 비밀’로 분류돼 있었다. 보고서의 제목은 ‘원자 핵연료 개발 계획’이다. 보고서 첫 페이지에는 비서실장과 대통령의 결재란, 보고관인 오원철 수석의 이름, 직인 등이 찍혀 있다. 통상적으로 당시 경제2수석실의 김광모(金光模·83) 비서관이 대부분의 문서를 작성해 오 수석에게 올린 점을 감안하면, 이 문서는 오 수석이 직접 작성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고서의 전체적인 서술은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핵무기의 비교(도표) ▲고순도 플루토늄 생산 과정(그림) ▲우리나라의 핵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고순도 플루토늄 생산 방안 비교(도표) ▲결론 ▲고순도 플루토늄 생산을 위하여 개발하여야 할 핵연료 사이클(그림) 순이다.

첫 페이지의 제목 ‘원자 핵원료 개발 계획’과는 달리, 두 번째 페이지부터는 ‘핵무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핵무기의 종류로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우라늄 235폭탄, 플루토늄 239폭탄)과 ‘핵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수소폭탄)을 들고 이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나 하는 문제를 도표를 이용해 설명했다.

이 서류는 핵개발을 위해 청와대에 최초로 제출된 보고서로 보인다. 보고서는 ‘과대한 투자를 요하지 않고 약간의 기술도입과 국내 기술개발로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탄을 택함이 타당함’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중수로 건설의 목적

보고서에서 주목할 대목은 원자력의 군사적 전용 의도가 담긴 ‘중수로(重水爐) 건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이 고리 원전 1호기 기공식에서 언급했듯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핵개발을 위한 플루토늄도 얻고 발전도 할 수 있는 ‘중수로형 원자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일한 원전인 고리 원전이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려면 비정상 가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고서는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두 가지 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고순도 플루토늄의 생산 및 발전이 가능한 겸용로(爐)에 의한 방법이다. 이 방식은 일본·인도가 채택하고 있다. 둘째는 상용발전과는 별도로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도입하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대만이 채택하고 있다.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겸용로’를 건설하는 데는 총 2억 달러가 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비용이 높다는 점을 제외하면 ‘겸용로’는 상용발전을 겸할 수 있고 플루토늄 양산이 가능하며 핵탄(核彈) 수요가 없을 때 발전로 및 재처리 공장을 상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연구로’를 채택하면 상용발전을 겸할 수 없고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어 핵탄 수요가 없을 경우에는 연구목적으로밖에는 사용할 수 없지만 비용이 대폭 낮아진다. 보고서는 1안인 ‘겸용로’를 지지했다.

이에 따라 고리발전소 2호기를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중수로로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핵연료인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시기는 80년대 초로 잡았다.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캐나다산 원자로인 ‘캔두(CANDU)’라는 글자가 나온다. 캔두 도입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최형섭 장관, 프랑스 재처리 시설 교섭

2013년 1월 14일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박정희 대통령 당시 경제수석이었던 오원철씨가 파독 광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박 대통령은 왜 핵무기를 원한 걸까. 박 대통령은 1969년 닉슨 독트린과 1971년 주한 미 7사단의 일방적인 철수로 자주국방을 결심했다. 박 대통령은 이를 위해 기관총과 박격포, 수류탄 등을 1972년 초까지 개발하는 ‘번개사업’, 극비리에 핵무기와 이를 운반하기 위한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개발을 진행했다. 미국은 한국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장비를 제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주시했다. 첨단 미사일에 핵무기까지 만든다면 한반도 정세가 크게 요동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71년 11월 청와대 경제2수석실 수석에 오원철이 임명됐고 김광모 비서관이 그 핵심참모였다. 경제2수석실은 방위산업-중화학공업 육성-행정수도건설 추진 등을 주관했고 핵무기 개발도 주도했다. 박익수(朴益洙) 국가과학기술자문회위원장 비망록 《원자력 창업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김광모 비서관은 “박 대통령이 오원철 수석을 불러 ‘주한미군 철수로 한국의 안보가 대단히 불안해. 미국한테 밤낮 눌려서 안 되겠어. 이제는 좀 미국의 안보우산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약소국가로 큰소리칠 수 있는 게 뭐 없겠소’라며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나라도 큰소리를 치고 있는데 우리도 핵개발을 할 수 없는 거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오 수석은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고 최형섭(崔亨燮) 과기처 장관의 양해를 구해 윤용구(尹容九·87) 당시 원자력연구소장을 찾아가 이 문제를 협의했다. 윤 소장은 “중수로에서 나오는 핵연료를 재처리해야 하는데 경수로에서 나오는 연료는 순도가 낮아 재처리해도 핵폭탄용으로는 부적합하다”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와 점검을 받기 때문에 임의로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

원자력계의 한 관계자는 “그해 1973년 겨울 핵개발 계획이 구체화됐다”며 “20장 분량의 차트 형식의 계획서에는 핵무기의 기본개념, 소요예산, 개발완료 예상기간 등이 적혀 있었고 박 대통령이 만족해하며 사인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로 비밀 핵개발이 추진되면서 원자력연구소 등은 연구용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1972년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미국 회사가 협력에 응하지 않자 프랑스와 재처리 기술 및 시설 도입 교섭에 나섰다.

원자력연구소는 파키스탄 등 핵개발을 꾀하는 국가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SGN(Saint-Gobin Nuclear)사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기로 하고 핵연료 가공회사 CERCA사와 협력기로 했다. 1973년 9월 고위관계자가 SGN사를 방문, 정부 간 차관 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건설 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19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사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정부는 이와 함께 캐나다로부터 캔두형 중수로의 도입을 추진했다. 이 중수로를 소개한 것은 유대계 거상(巨商) 사울 아이젠버그(Shaul Eisenberg)다. 이는 평화적인 원자력발전소 확보 외에 중수로가 발전 중에도 수시로 사용 후 핵연료를 꺼낼 수 있어 비밀 핵개발에 유리하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발전소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교체한다.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의 NRX(National Research Experimental)형을 도입하기로 했다.

인도 핵실험, 캐나다 원자로 도입 무산

캐나다 초크리버 강변에 있는 초크리버 원자력연구소 전경. 사진=캐나다원자력협회 홈페이지

한국이 재처리 시설 도입을 프랑스와 교섭하고 캐나다와 캔두형 원자로까지 도입기로 하자 포드 행정부는 ‘한국이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며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Sneider) 주한 미 대사를 앞세워 압박을 가해왔다. 미국은 한국에 민감기술(Sensitive technology)을 넘겨줄 캐나다-프랑스-벨기에에도 압력을 가했다. 캐나다는 이에 굴복해 중수로 1기와 함께 20MW급 NRX 연구로 판매협상을 중단했다. 북한이 현재 플루토늄 추출을 위해 가동하는 영변의 흑연감속로형 원자로가 5MW급이란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용량인지 알 수 있다.

1975년 5월, 인도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공교롭게 인도가 사용한 원자로가 한국에서 도입할 캔두형 원자로였다. 곽은호(郭殷鎬·77) 당시 원자력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974년 9월 김동훈(金東勳) 박사와 함께 캐나다 오타와 인근 초크리버 원자력연구소에서 캐나다원자력공사의 NRX 도입을 위한 최종 협의를 마쳤다”면서 “귀국길에 LA공항에서 비자발급을 받는 과정에서 미 법무부 직원이 캐나다에 간 목적을 꼬치꼬치 캐물으며 승강이가 벌어졌다. 귀국 후 NRX가 플루토늄 생산 목적으로 전용이 가능해 도입이 중단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곽 박사는 “캐나다가 영연방인 인도에 우리가 도입하려는 NRX와 동형인 사이러스(CIRUS) 연구용 원자로(50MW급)를 건설해 주었고 그것을 이용해 그해 5월 18일 핵실험에 성공한 시점”이라면서 “대만도 우리와 같은 시기에 연구용 원자로 TRR을 도입했다가 폐쇄했고 이러한 것들이 미국을 무척 민감하게 한 것 같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꿈이 인도의 ‘도발’로 벽에 부딪힌 셈이다.

1977년엔 원자력연구소가 벨기에 BN(Belgonucleaire)사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사용한 제2핵연료 가공사업도 취소됐다. 이것은 재처리 사업이 싹도 틔워 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은 그간 미국 정부가 공개를 거부해 온 96건의 비밀 외교문서 중 박 대통령 시절의 핵 관련 문건 15건이 공개됨으로써 확인됐다.

당시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포드 행정부에서 작성된 것들이다. 1975년 5월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각국 주재 미 대사관에 하달한 외교지침에서 “한국은 핵개발의 초기단계(Initial phases)를 거쳤으며 10년 안에 제한된 범위의 핵무기와 운반수단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고 주한 미 대사관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른 1980년대 초면 첫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1975년 4월 30일 박 대통령은 리처드 스나이더 미 대사와 만나 미국의 안보공약에 강한 불신을 표시하며 “비 오는 날에 반드시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며 “핵과 미사일 개발에서 미국의 협력을 얻지 못할 경우 제3국의 도움을 얻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당근과 채찍을 겸한 압박에 견디다 못한 한국은 1975년 12월경부터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 정부는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협력’이라는 대가를 선택했다.

“떠들썩하게 하지 마라”

월성 원전 1호기. 지난해 수명 연장이 결정돼 2022년까지 7 년간 더 가동할 수 있게 됐다. 캐나다의 캔두형 중수로 원자로와 동형으로 매일 사용 후 핵연료가 나오기 때문에 IAEA가 365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한국은 미 국무부와 의회의 압력으로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비준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NPT를 비준하는 대가로 캐나다의 캔두형 원자로 도입을 방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한국은 1975년 1월 캐나다와 캔두형 원자로 도입계약을 맺었고 원전 월성1호기 건설에 나설 수 있었다. 현재 캐나다산 중수로를 보유한 국가는 캐나다와 한국뿐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명분을, 한국은 실리를 챙긴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캔두형 원자로를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는 것에 대해 정치적 이해 못지않게 경제적 이해도 걸려 있었다. 한국의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농축 우라늄 공급은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상업적 시장이었다. 한국이 원자력 수입선을 다변화한다면 미국은 이 시장을 잠식당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캐나다로부터 구입하기로 했으니 미국이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미국은 재처리 시설을 팔지 말라고 프랑스에도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방해가 심하던 1974년 박 대통령은 김정렴(金正濂·92) 비서실장과 오 수석을 청와대 내 서재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원자력 산업을 종합적으로, 본격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김 실장의 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일본식으로 원자력 산업을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72년 오원철 수석이 작성, 보고한 핵무기 개발 계획 보고서.

“일본은 원자력발전소도 자체 제작할 수 있다. 일본은 필요하다고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도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일본이 핵무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 일본은 미국을 위시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간섭을 받고 있지 않다. 문제는 실력을 갖추는 일이다. 원자력 산업을 본격 추진하되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

오 수석은 원자력 산업의 종합계획을 작성해서 재가를 받고 추진해 나갔다. 김 실장은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는 말을 ‘극비’로 추진하라는 말로 해석했다. 우선 착수한 사업이 원자력발전소에 공급할 핵 연료봉을 만드는 공장의 추진이었다.

연료봉은 경수로용과 중수로용 연료봉 두 가지가 있다. 경수로용 연료봉을 제조하려면 미국에서 농축 우라늄을 구입해야 한다. 중수로용 연료봉은 천연 우라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만들기가 쉽다. 정부는 중수로용 연료봉 공장을 건설한다. 1976년 12월 1일 핵연료개발공단을 발족시키고 미 MIT의 주재양(朱載陽) 박사를 초대 이사장에 임명했다. 핵연료개발공단에서는 ‘화학처리 대체 사업’을 했다. 하도 미국 정부에 시달리다 보니 ‘재처리’ 대신 ‘화학처리’로 둔갑시킨 것이다.

미완의 사업

1979년 6월 30일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방한 환영행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란히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이후 한국은 꾸준히 원자력 기술의 자립을 추구해 왔다. 한국은 ‘농축·재처리’만 제외하고는 완전한 자립을 이뤘다. 현재 한국은 23기의 원전을 가동하는 세계 5위의 원자력 대국이다. 특히 중수로인 월성1호기는 중수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운전효율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1975년 원자로 국산화 사업을 시작한 이래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중단됐다가 1995년 국산 1호 연구로 ‘하나로’를 건설했다. 2009년 상업용 원전을 아랍에미리트(UAE)에 처음 수출했고 2014년 11월에는 네덜란드에 연구로 기술을 수출했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이 피살되자 한국의 원자력은 후견인을 잃었다. 핵 공단이 원자력연구소로 통합됐고 에너지연구소로 명칭마저 바뀌었다. 1980년대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나마 자라는 싹마저 잘라버렸다. 연구소의 이름에서 ‘원자력’이란 말까지 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