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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17) 朴珪壽

조선의 개국을 선도한 근대화의 선구자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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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차례 청나라 여행 바탕으로 北學이 아닌 西學을 수용하자는 근대화론 펼쳐
⊙ 평안도 관찰사 재임 시 제너럴셔먼호 불태우자 戰勝에 취한 대원군과 조정
⊙ 어전회의에서 일본과의 개국 협상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

張哲均
⊙ 66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개화파의 鼻祖 박규수. 그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사진=실학박물관
  구한말, 박규수(朴珪壽·1807~ 1877)는 서구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던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몰락해 가는 청국(淸國)을 목격하면서, 서양 문물을 도입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조선의 근대화(近代化)’를 의미한다.
 
  우리 역사는 이러한 박규수를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과 한의(韓醫) 유홍기(劉鴻基)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비조(鼻祖)’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오경석과 유홍기는 중인(中人) 신분으로 그 역할에 한계가 있었고, 사실상 조선의 개방과 근대화를 선도한 사람은 박규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 섭정(攝政)하에서 국내적으로는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대원군으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인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이후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그는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입장을 달리했으며,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비판하고 조선의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그리고 영민한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켜 개혁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금년은 광복 70년, 한국은 여전히 분단된 채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재무장으로 주변정세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한말 시대적 대전환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한 개방론자 박규수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과 대외정책을 살펴보고 그의 근대화 노력이 왜 주목받지 못했으며, 왜 조선은 망국(亡國)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볼 필요가 있다.
 
 
  쇄국을 비판하고 개방을 선도한 근대화의 선각자
 
1866년 대동강에 모습을 드러낸 제너럴셔먼호.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火攻으로 셔먼호 사건을 수습했다. 개방주의자였지만 무력에 의한 개국통상은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사진=한미우호협회
  박규수는 실학의 거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다. 청렴했던 가풍 탓에 가세가 빈한해 어려서는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영특했던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명망 높은 성리학자들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나눌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했다. 18세 무렵에는 당대 최고의 명필이자 화가이며 지식인이었던 김정희(金正喜)와 북학(北學)의 거목 박제가(朴齊家)에게 수강하면서 학문을 쌓아나갔다.
 
  20세 무렵 박규수는 이미 그의 문명(文名)을 널리 떨쳤고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학문을 지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세자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고 연이어 부모와도 사별하면서 그는 20년간 칩거(蟄居)하며 학문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래서 1848년(헌종 14) 매우 늦은 나이인 42세에 문과 증광시(增廣試)의 병과(丙科)에 급제해 처음 관직에 나갔다.
 
  1860년에는 연행사절(燕行使節)의 부사(副使)로 청국에 다녀오면서 동북아 정세의 흐름을 접했고, 얼마 후 그는 다시 청국에 가서 아편전쟁 이후 몰락하는 청국과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목격할 수 있었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 수습을 위한 안핵사(按覈使)가 돼 민란의 진상을 조사하면서 국내의 현실도 직시할 수 있었다.
 
  1863년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도승지가 된 후, 병조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을 두루 거쳤고, 흥선대원군이 착수한 경복궁 중건 작업 실무를 총괄했으며, 이어 한성부 판윤(정2품)을 거쳐 공조판서로, 그 뒤 예조판서,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돈녕부지사(敦寧府知事)로 승승장구했다.
 
  1866년(고종 3) 평안도 관찰사 재임시에는 미국의 무장(武裝)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화공(火攻)으로 수습했다. 1869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872년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청국을 사행, 귀국 후 우의정이 되었다. 이 무렵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으나 뜻대로 실현되지 않자 1874년 사직하였다.
 
  그는 북촌 자택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주변정세의 변화와 근대화 필요성을 교육시켜 개혁세력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1876년(고종 13) 한직(閑職)인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다가 이듬해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71세였다.
 
 
  박규수 근대화론의 모체는 박지원과 박제가의 北學
 
  박규수의 실학적 학풍과 근대화론은 조부인 박지원과 박제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청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를 다녀온 후 청국의 발달된 사회, 신문물 등 실학사상을 담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다.
 
  그의 실학은 도학(道學)의 입장과는 반대로 도덕보다 실용(實用)을 앞세워야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했다. 그는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한다면 그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하여 학문의 목적을 이용후생과 유민익국(裕民益國)이라 하였다. 유민익국의 요체는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인식하고,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또한 상업과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중상주의(重商主義)와 화폐의 사용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당시 보수 사대부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되자 그들과 결별하고 북학파(北學派)를 세웠다. 박지원의 북학은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대변된다. 그는 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하여 《양반전(兩班傳)》 등의 소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황을 생생하게 풍자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허생전(許生傳)》도 지었다.
 
  박지원의 제자 박제가는 박지원의 북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박지원의 가르침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연구했다. 1778년(정조 2)에는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국에 다녀와서 도구의 개량과 사회·정치 제도의 개혁에 관한 내용인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정치·사회 제도의 전반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서정(庶政)의 개혁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스승 박지원과 같이 토지경제와 중농(重農)주의를 비판하고, 청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과 무역항을 열어 통상을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그는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맥락에서 생산력을 증대하고 화폐경제를 발달시킬 수 있는 국가경제 체제를 역설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도 조정의 중신들에 의해 당치않은 소리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박규수는 효명세자의 급서와 부모와의 사별로 20년간 칩거하면서 이러한 박지원과 박제가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용후생의 실학과 통상 개방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청국 여행을 통하여 국제 정세를 살핀 후, 북학보다 서양의 ‘서학(西學)’을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근대화론’을 개진하게 된다.
 
 
  구한말 은둔 조선의 쇄국론과 개방론
 
박규수의 자주적인 개화사상을 모은 《환재집》.
  박규수가 살았던 19세기 중엽은 서구 열강들이 각기 해외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제국주의(帝國主義)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서 청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배하여 굴욕적인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면서 5개 항구를 개항하고, 영국에 치외법권(治外法權)까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적 대전환기에 조선은 변화의 소용돌이 밖에 있는 ‘은둔의 나라’였다. 조선은 위정척사론에 의거해 쇄국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천주교 등 이질적인 서구 종교와 서양 문화를 배격하는 것이었다.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 등이 주도했고, 최익현(崔益鉉)이 계승했다. 척사(斥邪)운동은 1860년대로 접어들어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고 서양의 무력시위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으로 발전하면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서구식 체제를 수용한 신(新)일본은 근대화를 재촉해 나가면서 청국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조선은 신일본의 문호개방 요구에 대해서도 사대교린(事大交隣) 체제에 안주하여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과 개항(開港)불가론을 내세우면서 척사론을 견지했다. 그들은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서양의 공업 생산품과 유한한 우리의 농업 생산물을 교역하면 경제적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과 일단 문호를 개방하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을 수 없게 된다는 논지를 폈다.
 
  박지원과 박제가의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서양 사정에도 밝은 박규수는 문호개방을 통해 신문물의 도입을 주장했다.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최익현, 김평묵 등의 척화론(斥和論)을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규정하고, 이용후생에 입각해 개항을 하고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규수의 주장은 대원군과 척사세력에게 비판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밝혀 두어야 할 사실은 박규수의 개국 주장은 무력을 앞세운 서양의 ‘함포외교’에 굴복해 타율적으로 개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통상 요청을 하면 여기에 응하자는 것이다. 서양이 무력을 사용하면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들이 개항을 요청하면 이들과 협상을 통해 자주적으로 개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척사론자들에 의해 외세(外勢)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효명세자와 고종의 학문적 스승이자 정치적 멘토
 
개방정책을 펼쳤던 고종. 박규수는 효명세자(익종)와 고종의 학문적 스승이자 정치적 멘토 역할을 했다.
  박규수가 후일 익종(翼宗)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뿐만 아니라 훗날 개방정책을 펼치는 고종의 학문적 스승이자 ‘정치적 멘토’로 그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박규수의 근대화 사상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때문이다.
 
  청년기 때의 박규수는 이미 문명을 널리 알렸고 그의 나이 18세 때부터는 2년 연하인 효명세자와 친분을 나누며 개혁을 논했고, 순조(純祖)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켰을 때 박규수는 20세의 나이로 세자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하였다. 효명세자는 ‘박규수의 학문은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큼 출중하다’며 높이 평가하였고, 박규수의 자택으로 학가(鶴駕)를 타고 왕림하리만큼 가까웠다고 한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안동 김씨의 세도문벌들을 배제하고, 비주류의 현재(賢才)를 등용하는 등 국정쇄신을 통해 개혁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박규수는 이런 효명세자의 개혁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는 단명했다. 세자가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연이어 부모와도 차례로 사별하자 그는 20년간의 긴 칩거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저작들을 거듭 읽어 북학사상을 정교화하고, 후일 홍문관 대제학에 오를 정도의 학문적 깊이를 쌓았다.
 
  그래서 그는 1848년 헌종(憲宗) 14년, 42세의 나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해 처음 관직에 나갔는데 박규수를 접한 헌종은 ‘일찍이 부왕의 사랑을 받던 너를 내가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앞으로 크게 쓸 것이니 진력하라’고 했을 정도로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박규수는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돼 고종을 측근에서 보좌하게 됐다. 막 즉위한 고종은 익종의 양자로 입적돼 보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효명세자(익종)의 정비이자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趙大妃)가 대원군에게 남편의 생전 절친했던 박규수를 적극 천거한 것이다. 박규수는 고종이 즉위하면서부터 10년 동안 어린 고종의 학문 지도를 맡았으며, 대원군 실각 뒤 고종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원로대신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그가 고종의 정치적 스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규수와 고종의 이러한 관계는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대원군과는 달리 개방정책을 추진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단초가 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고종의 근대화 노력이 실패한 이유와 관련해 그가 전통적 전제군주이기 때문으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것이 당초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부정적 평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널셔먼號 사건과 조선의 대응
 
  1863년(고종 1) 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당면한 대외문제는 러시아의 남하였다. 대원군은 천주교와 손을 잡고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으로 러시아를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혼선이 빚어졌고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1866년(고종 3) 병인사옥(丙寅邪獄)이다. 이때 박규수는 평안도 관찰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의 평양 경내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천주교도의 살해 이유를 물었다. 이 선박에는 영국인 선교사이며 통역인 토머스(R.J. Thomas) 목사를 비롯하여 청국 사람이 승선하고 있었고, 상품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적재하고 있었다.
 
  무장상선 셔먼호가 밀물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관찰사 박규수는 조선이 국법(國法)으로 교역이나 기독교를 모두 금지하고 있음을 알리고 셔먼호에 빨리 퇴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대동강 수위가 내려가자 셔먼호는 모래톱에 좌초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셔먼호 선원들은 당황하여 무기로 위협하면서 식량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박규수는 개방론자이고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셔먼호가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박규수는 어촌에서 징발한 선박 여러 척에 기름 먹인 섶을 가득 실어 셔먼호 옆으로 밀착시킨 후 궁수들이 불화살을 날려 선박에 불을 붙이는 화공법을 이용했다. 토머스 목사를 비롯한 선원은 셔먼호에 불이 붙자 현장에서 다급히 도망치려 하였으나 성난 군중은 이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대원군과 조정은 양이(洋夷)를 물리친 박규수를 높이 평가하고 전승을 자축했다. 미국에 문호개방을 주장해 온 박규수는 그의 입장과는 달리 척사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고 역설적으로 척사론은 더욱 힘을 받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박규수는 제너널셔먼호가 조선에서는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서양의 첨단 증기선이라는 사실을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誌)》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가라앉은 셔먼호의 선체와 엔진을 끌어올려 한양으로 보내면서 《해국도지》의 설명대로 실험해 보도록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대원군과 조정은 척화만 고취시킬 뿐, 증기선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朝·美 전쟁(신미양요)과 미국에 대한 조선의 인식
 
  셔먼호의 생존자는 없었으나 이 사건은 외부에 알려졌다. 병인사옥에서 살아남아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이 청국으로 돌아가 이를 알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선에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아시아함대에 셔먼호의 잔해 탐색을 지시했다. 이에 슈펠트(R.W.Shufeldt) 제독이 전함을 이끌고 셔먼호의 잔해 탐색을 위해 조선에 들어와 문제를 제기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셔먼호 문제를 힐책하는 서한만 전달하고 돌아갔다.
 
  그런 중 1871년 미국의 군함 5척이 아산만 앞바다에 다시 나타났다. 함대의 규모로 보아 일본에서와 같이 무력시위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나선 것이다. 조선 조정은 “미국은 역사는 짧고 문화는 미개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런 미국이나 미국인들과 강화하게 된다면 정학(正學)은 장차 침몰할 것이며, 마침내 조선과 조선인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강화는 용납될 수 없으며, 설사 청국이 그것을 종용하여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했다〈고종실록〉.
 
  이때 박규수는 “미국은 지구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고 일컬어지고, 난리의 배제와 분쟁의 해결을 잘하며, 또 6주(洲)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 없다고 하니, 저쪽에서는 비록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먼저 수교 맺기를 힘써 굳은 맹약을 체결하면 고립되는 우환은 거의 면할 것이다”고 미국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어 당시 조선의 국제 정치에 대한 이해의 정도와 비교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규수는 “저쪽이 호의로써 오면 우리도 호의로써 응하고, 저쪽이 예(禮)로써 오면 나도 예로써 접대할 것이니, 곧 인정이 진실로 그런 것이며 나라의 통례이다”라고 외교의 원칙을 밝혔다. 미국의 정식 요청이 있으면 여기에 응하지만 셔먼호의 경우처럼 무력에 호소하는 무법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격퇴해야 한다는 자주 개국론을 개진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 함대가 손돌목을 거쳐 광성진에 이르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신미양요·辛未洋擾). 척사론은 더욱 강화되고 대원군은 서울 등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전쟁을 강조하면서 강화를 주장하는 자는 ‘매국(賣國)’으로 다스릴 것을 다짐하였다. 미 함대는 다시 통상을 요구하다가 수도 점령 없이는 조선 정부의 굴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강화도를 떠나버렸다. 그러나 〈고종실록〉은 이 전투를 대승(大勝)이라 기록하고 있다.
 
 
  新일본의 외교문서와 書契問題
 
  1854년 미국의 흑선 무력시위에 굴복해 개국한 일본은 종래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체제를 청산하고, 1866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근대천황제 국가를 출범시켰다. 1868년(고종 5) 신일본은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를 통해 조선에 정식으로 수교를 요청해 온 외교문서에 ‘황상(皇上)’ ‘칙령(勅令)’ ‘대일본(大日本)’ 등 이전과는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일본과의 국서(國書) 교환은 교린(交隣)국 간의 서계문제(書契問題)로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외교문서를 용인할 수 없어 문서의 수리를 거부했다.
 
  일본은 서구식 ‘국민국가(國民國家)’로 국가조직을 개편한 후, 그간 조선과의 관계에서 대마도주가 담당하여 왔던 교린업무를 중앙 정부의 외무성이 일괄 담당하게 되면서 1872년에는 일본 외무성이 ‘황조’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외교문서를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이 이 문서의 수리도 거부하자 양국 간 국교가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척사론자들은 왜와 양은 일체임을 주장하고 그러한 일본과 강화하면 결국 조선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왜양일체론을 들고나왔다.
 
  이때 박규수는 평안 관찰사를 마치고 형조판서가 됐는데 대외관계에 관한 각종 외교문서들은 대부분 그가 담당하고 있었다. 영어를 몰랐던 당시 조선 정부였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해석한 중국 문헌들에 기초하여 서양과의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온 조정이 충격 속에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개방론 자 박규수는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직함(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優賞)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관작(官爵)이 승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 이를 교계(較計)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부칠 일이다”라며 그냥 형식적인 것이니 서계의 문구에 구애되지 말자고 하였다. 그러나 박규수의 주장은 최익현 등 위정척사론자들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묵살되고, 쇄국의 벽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대원군의 실각과 운요호 사건
 
  일본과의 서계문제로 조일관계가 긴장되던 그 무렵 대원군이 실각했다. 1873년, 10년간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시대가 열렸다. 대원군의 실각에 앞장선 사람은 역설적으로 척사세력의 거두 최익현이었다. 그는 대원군의 실각에 앞장서 공을 세웠으나 고종은 그의 척사론과는 달리 박규수의 개방론을 선호하고 있었다. 민비(閔妃)의 의견도 있었겠으나, 어릴 적 박규수에게서 받은 교육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박규수 등 진보·개혁세력을 정국의 전면에 내세웠다.
 
  조선에서 권력 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1875년 일본이 군함 5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강화도 앞바다로 올라와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국서를 거부한 조선에 개국 통상을 요구했다. 미국의 포함외교를 모방한 것인데, 강화도 물길을 따라 초지진 포대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이에 강화도 수비군이 포를 쏘아 위협하자, 그들도 맞서 포를 쏘면서 무력시위를 계속했다. 1875년 운요호(雲揚號) 사건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개국문제를 둘러싸고 수구세력과 개혁세력 간에 갈등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병학(金炳學), 홍순목(洪淳穆) 등 원로대신들은 척사론을 견지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비와 민규호(閔奎鎬) 등은 개국론을 지지했다. 막후에서는 대원군과 척사론자들의 저항이 끊임없었다. 고종과 민비, 그리고 박규수 등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할 조짐을 보이자 척사세력은 더욱 완고하게 저항하면서 국론은 다시 분열됐다.
 
  박규수는 대원군을 다시 찾아가 ‘만약 저들(일본)이 포를 한 번 발사하기에 이르면 이후 받으려 해도 이미 때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라며 재차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운요호 사건 직전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렸을 때도 박규수는 일본의 인호(隣好)를 거부하면 반드시 한을 품어 불화를 낳을 단서가 될 것이므로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상대가 대화로 개국을 논의하자고 하면 이를 받아들여 협상에 응하자는 개방론을 다시 주장한 것이다.
 
 
  고종의 개방정책과 강화도조약
 
조선과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근대 국제법을 토대로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지만, 사실상 일본에 의한 강압적,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약 체결 당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 사진=위키미디어
  고종은 개방에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일본과의 협상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조정은 정사(正使)로 대관(大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헌(申櫶)을, 부관에 도총부(都摠府) 윤자승(尹滋承)을 내세워 일본과의 회담에 임했다. 고종은 박규수와 친근하고 병인양요(丙寅洋擾) 등의 위기 시에 외교활동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역관 오경석을 발탁하여 문정관(問情官)에 임명해 개국 협상을 지원했다.
 
  오경석은 조선의 힘으로는 군함 5척을 끌고 온 일본과 무력으로 대결해 승산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박규수와 협의했다. 박규수는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현 국제 정세로 보아 조만간 개국은 불가피하므로 승산 없는 일본과의 전쟁은 피하되 협상을 통해 최대한 자주성을 확보하면서 개국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척사세력과 대원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상단은 고종의 후원하에 이듬해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했다.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하고,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에 부산, 인천, 원산의 세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 강화도조약은 근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체결한 조선 최초의 외국과의 협정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일본 화폐의 유통권, 개항장 내 모든 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 인정, 일본 상품의 무관세 무역 등 일본의 권리는 규정하고, 조선의 권리나 일본의 의무는 언급되지 않은 소위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이었다. 일본이 서구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최근 일본 외무성 기록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협상 시 조선 측은 일본이 요구한 13개 조항 중 최혜국(最惠國) 조관을 거부했고, 나머지 12개 조 중 9개 조에 대한 수정을 요구해 관철시킨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 측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조약 체결의 전 과정은 국왕이 조정회의를 통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고종은 원로대신 박규수의 의견을 존중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불평등조약이기는 하지만, 박규수의 생각대로 준비가 없는 조선이 일본과 전쟁으로 치달아 더 큰 굴욕을 받지 않는 방향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다수의 척사론자에 의해 매국노로 규탄받고 모함에 시달리다가 결국 병석에 누웠다. 그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인 김윤식(金允植)은 “공은 늘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東道西器의 모체는 박규수의 근대화론
 
  박규수가 살았던 시기는 한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대격변기였다. 세계사적으로는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주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였고, 자본주의가 전파되어 가는 시기로 서구 열강들은 해외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동북아 역시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예외일 수 없었다.
 
  서세동진(西勢東進)의 시대를 맞게 된 한·중·일 삼국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가 위기에 직면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청국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 조선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그것이다. 이들 논리의 공통점은 각기 자기 나라의 고유한 정신은 보존하되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은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도모해 나간다는 ‘근대화론’이었다.
 
  중체서용은 중(中)을, 화혼양재는 화(和)를 내세웠는데 유독 조선의 동도서기는 동아시아(東) 전체를 아우르는 동(東)을 내세웠다. 동도서기는 동양의 정신문화, 주로 유교적 가치관을 우위에 두고 산업·기술·과학·무기 등 물질적인 면에서는 서양문명의 기적(器 的)인 측면을 적극 수용하자는 논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논리는 조선사회의 주류인 위정척사론과 정면 대립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대내적으로는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면서 통치 질서가 근본적으로 동요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서양 함대의 출현과 그들의 통상 요구가 시작되면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혁을 시도하려는 근대화 사상이 싹트게 된 것이다. 이들 지식인의 중심에 박규수가 있었고 근대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특히 박규수는 1861년과 72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자본주의 열강의 무력에 굴복한 청의 현실을 목격하였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직접 겪으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지닌 열강에 대항하려면 문호개방을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이 절실하다고 생각하였다. 할아버지 박지원과 ‘학문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박제가의 북학을 근대 지향적 측면에서 내재적으로 계승해 ‘근대화’에 접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근대화론이 고종의 개국정책에 영향을 주었고 동도서기의 모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직후인 1882년 고종은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를 모두 뽑아버리라는 명을 내리면서 윤음(綸音)을 공포하였다. “기계를 제조하는 데 조금이라도 서양의 방법을 따르면 사도(邪道)에 물든 것으로 보는데, 이 또한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들의 교(敎)는 사악하므로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미색(美色)처럼 멀리해야 하지만, 그들의 기(器)는 이로워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니 농기구·의약·병기·배·수레와 같은 것을 제조하는 데 무엇을 꺼려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들의 교는 배척하고, 기는 본받는 것을 병행하여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종실록〉)고 하여 동도서기론을 뒷받침하였다.
 
 
  사랑방 문하생과 근대화 개혁세력의 형성
 
  서세동점의 전환기적 상황에서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의 필요성에 가장 먼저 눈뜬 사람은 역관 오경석이었다. 오경석은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 조선의 위기가 더욱 급박해졌다고 판단했다. 오경석은 더 늦기 전에 자주적으로 개국을 실현하고 개혁정책을 실시해 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할 필요를 더욱 통감하였다.
 
  그러나 중인 신분의 오경석으로서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경석은 박규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경석은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그의 《북학의》를 교과서로 생각했기 때문에 박규수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뜻을 같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젊은 양반 자제들을 교육해서 근본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해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박규수는 1860년대 후반부터 서울 북촌 재동의 자택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 김윤식,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박정양(朴定陽), 홍영식(洪英植), 윤치호(尹致昊), 유길준(兪吉濬),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에게 신서(新書)와 《연암집》 등을 교재로 국제 정세의 변화와 근대화 교육을 시작했다.
 
  1874년부터는 이들 개혁세력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당파가 형성되었다. 박규수의 근대화론은 이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는데 이들 차세대의 개혁정책 노선과 그 추진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면서 점진적 개혁과 급진 개혁 노선으로 분화하게 된다. 점진적 개혁은 박규수에게서 비롯된 동도서기를 근간으로 그 핵심은 유교적 윤리질서와 전통적 정치·사회 제도는 견지하면서 서양의 군사, 기술 등만을 수용하려는 것이다. 환언하면 기존의 전제 왕정은 유지하면서 소위 ‘서학’을 수용해 점진적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에 의해 발전된 급진적 개혁 노선은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개화’를 통해 인류 문명이 더 높은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에 대외적으로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려고,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 체제를 근대적 국가로 바꾸려 하였다.
 
  온건적 입장은 이후 갑오개혁(甲午改革),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의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주도한 동도서기론으로 이어졌고, 급진 노선은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의 개혁사상으로 이어졌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영향받은 甲申政變
 
일본 개화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 갑신정변은 그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동도서기론은 근원적으로 박규수에 의해 전개된 북학파의 이용후생과 부국강병을 모체로 하고 이를 통해 근대화와 국가 독립 유지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급진적 개혁의 방향과 일치하지만, 개혁의 대상과 추진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점을 보인다. 김옥균 등의 급진적 개혁 노선은 일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영향을 받아 인류 문명이 미개(未開)·반개화(半開化)·문명개화(文明開化)의 세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고 조선이 서양에 견주어 문명화가 덜 이루어진 상태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들은 구체제에 대한 전반적 혁신을 전제로 서양의 정치·경제·사회 제도뿐 아니라 서양의 사회윤리 내지 기독교까지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즉 서구 문명을 조선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동도서기의 점진 개혁론이 전통적인 지배 체제의 유지를 기초로 했다면, 김옥균·박영효는 전제왕권의 제한을 통한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의 정치개혁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민씨 외척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쟁취한 뒤 개혁을 추진하는 입장으로,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박규수의 사랑방 문하생이면서도 점진적 개혁론자인 김윤식은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론자들에 대해 “갑신정변의 역적들은 서양을 높이고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을 폄하하며, 인륜 도덕을 야만이라 하여 그 도(道)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칭한다”고 비판했다. 동도서기의 점진적 개혁론을 ‘조선형’이라고 한다면 화혼양재의 급진적 개혁론은 ‘일본형’ 개혁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논리는 모두 조선의 근대화라는 점에서는 그 목표가 같지만 개혁을 위한 현실적 행동 노선에서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박규수와 후쿠자와의 근대화운동은 1860년대 비슷한 시기에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후쿠자와는 1860년대부터 네덜란드어(語)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개항과 개화를 주장하면서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개화 청년 양성에 주력하여 1868년 도쿠가와 막부 지배를 종식시키고 메이지 정권을 세우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박규수의 사랑방 모임도 유사한 논리와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나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화에 앞서가면서 박규수의 근대화운동은 그 빛을 잃게 되었다.
 
  구한말 서세동점의 시기에 일본에 후쿠자와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박규수가 있었던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근대화 선각자의 이루지 못한 꿈
 
  박규수는 어릴 적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배워 알고 있었다. 16세 때 도봉산 정상에서 하늘을 두고 읊은 시가 《금유시집(錦㽔詩集)》에 남아 있다.
 
  세 개의 커다란 환약이 허공에 떠 있구나.
  하나(A)는 스스로 빛나서 밝구나.
  하나(B)는 덕성이 고요하여 그저 생명을 자라게 할 뿐이구나.
  하나(C)는 컴컴하기가 거울과 같아서 빛을 빌려 비추어주네.
 
  태양(A)·지구(B)·달(C)에 대한 천문학적 통찰을 시로써 정리한 것이다. 또 다른 문집인 《장암시집》에선 “아아! 큰 안목으로 볼 때, 지구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 그는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세계지도인 〈혼평의(渾平義)〉와 해시계이자 천문도인 〈간평의(簡平義)〉를 직접 제작했다. 간평의의 종이 제작본은 현재 실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고전 읽는 방법을 엮은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義例)》를 지었고, 문인화와 수묵화를 그렸으며 그리고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東津方略)〉과 평안도의 지도도 작성했다. 박규수는 실학자이자 문인이고 또한 과학자였던 것이다.
 
  박규수는 성품도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1871년 홍문관 제학 박규수는 향시(鄕試)에서 장원으로 뽑힌 당시 16세의 유길준과 대면하게 된다. 유길준은 유한준(兪漢雋)의 자손이었는데 박규수의 조부 박지원과 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당대 쌍벽을 이루던 문우(文友)이자 절친한 사이였으나 박지원이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유한준을 혹평하자, 그는 연암에게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을 쓴다’라며 서로 감정싸움이 오가다가 둘은 끝내 원수가 됐다고 《과정록(過庭錄)》이 전하고 있다.
 
  박규수가 유길준에게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구원(舊怨)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친근하게 대하자 그의 인품에 감복해 유길준은 그때부터 박규수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박규수의 근대화론은 일제강점 병합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가 1970년대 들어 뒤늦게 다시 등장했다. 일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극복과 자주적 근대화의 발전 논리를 지향하는 학계의 연구 분위기가 당시 고조되기 시작한 산업 근대화 열기와 맞물려 박규수에 대한 연구에 동기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망국의 변’을 오늘날 돌아보면서, 위정척사의 완고함과 쇄국정책이 1870년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첫 번째 원인을 제공했다면, 박규수의 근대화론과 개방정책은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첫 번째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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