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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16) 흥선대원군 李昰應

위정척사 편에 서서 외교에 등을 돌린 ‘살아 있는 대원군’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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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개조가 아니라, 전제왕권의 강화를 노린 대원군의 개혁정치
⊙ 쇄국정책의 단초가 된 러시아 남하와 천주교
⊙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의 근시안

張哲均
⊙ 66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쇄국정책을 추진한 흥선대원군.
  대원군(大院君)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의 군호(君號)다. 선대의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게 되면 그 방계 종친이 유교의 종법(宗法)에 따라 타계한 왕의 아들로 입적해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때 신왕의 생부(生父)에 대한 예우로 주는 존호(尊號)이다.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1623년 인조(仁祖)는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1849년 철종(哲宗)은 아버지 전계군(全溪君)을 각각 대원군에 추존한 바 있다.
 
  1863년 고종(高宗)이 즉위하면서 부친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이 대원군에 봉해졌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대원군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을 제외한 3인은 정상적 절차에 따라 추존되었으나, 흥선군만은 예외적으로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이하 흥선대원군을 대원군으로 호칭)
 
  대원군에게는 엇갈린 이미지가 뒤따른다. 먼저 견고한 안동김씨의 세력 밑에서 숨을 죽이고 살다가 어린 아들 고종을 왕으로 만든 후 섭정(攝政)을 쟁취한 ‘정치 달인’이라는 이미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해 개방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을 망국(亡國)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한국은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분단된 채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재무장으로 주변정세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구한말의 역사가 반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한말 요동치는 동북아정세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던 조선과 대원군을 살펴보고 이 역사의 교훈을 한국의 장래를 위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권력 집착으로 얼룩진 대원군의 생애
 
  대원군은 1820년 서울 안국동에서 출생했다. 8세에 맏형 흥녕군(興寧君)의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친 남연군(南延君)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서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17세에는 부친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장하면서 1841년(헌종 7) 흥선도정을 거쳐 1843년(헌종 9)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이 된 후 도감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이후 비변사 당상을 거쳐 1847년(헌종 13)에는 한직인 종친부를 운영하는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가 사복시 제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풍수지리를 믿어 아버지 남연군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 대비와 밀약하여 자신의 차남을 익종(翼宗)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져 ‘살아 있는 대원군’이라고 불렸다. 고종이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표면상으로는 조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이 섭정으로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부여받아 10년 동안 조선 조정을 이끌었다. 조선 최초로 대원군에 의한 기형적인 섭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섭정 10년이 지나면서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고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실각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뒷수습에 힘썼으나, 민비 세력과의 권력투쟁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청국(淸國)에 연행되어 4년여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중 1887년 청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손 준용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영립되어 친청파인 사대당을 축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시작되었으나, 집정이 어려워지자 청국과 통모하다 다시 실패했다. 3국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일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민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 모든 권력에서 물러났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이듬해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9세기 서세동점과 은둔의 조선
 
  대원군이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 이후 서구 열강들이 상품시장과 원료 공지 확보를 위해 동아시아 지역으로 몰려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다. 동북아의 맏형 격인 청(淸)이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배하여 굴욕적인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면서 5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천문학적 숫자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영국에 치외법권(治外法權)까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청국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였으나 이 조약의 비준(批准)과 실행을 지연시키려고 하자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1860년 수도 북경을 점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대전환기에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체제에 안주한 채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밖에 있던 ‘은둔의 나라’였다. 조선을 네 차례 방문했던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은 1897년 발간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은 신비스런 존재였으며, 따라서 영국의 지식인들조차 조선이 적도에 있다거나 지중해 또는 흑해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조선 스스로가 청국의 변방으로 자처하며 서양과의 교류를 거부한 것도 은둔의 나라로 인식된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청국이 붕괴 위기에 직면할 당시 청국의 학자 위원(魏源·1794~1856)은 《해국도지(海國圖誌)》란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각 나라의 지세(地勢)와 산업·인구·정치·풍습 등을 기술하였고, 세계 주요국의 역사·정치·지리 등을 망라한 아시아 최초의 국제편람(國際便覽)이었다. 위원은 책 서두에 양이(洋夷)를 막기 위해 서양의 장기(長技)를 채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청국의 수구세력에 의해 수용되지 못하고 훗날 중국의 근대화 사상인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이에 기초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단초를 제공했다.
 
  일본은 1854년 미국 흑선(黑船)의 등장으로 개방한 후 내부적 갈등관계를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서구식 체제를 수용하면서 극복해 나갔다. 신일본은 근대화를 재촉해 나가면서 청국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과 조선의 위정척사론
 
  1842년 청국이, 일본은 1854년 개국했다. 청과 일본을 개국시킨 서구 열강들은 다음으로 조선의 개국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186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사대교린 체제하의 조선과 청국 간의 관계를 ‘조선 문제’로 인식하면서 조선의 선점을 위해 한반도를 둘러싸고 외교적, 군사적 다툼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사대교린 체제에 안주해 온 은둔의 조선도 이제 서구 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842년 마카오의 조선인 신학생 김대건(金大建·1821~1846)을 통역으로 해서 수차례의 개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례가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이에 앞서 1832년에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The Amherst)이 충청도 연안에 와서 교역을 요청했는데 조선 정부의 거절로 실패했다. 1854년에는 러시아 군함이 거문도에 이르러 러시아 선박의 물자 공급을 요청한 적도 있다.
 
  조선은 이러한 서구 열강들의 개방 압력과 천주교, 서학(西學) 등 서구 문화의 유입에 따른 혼란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에 사림(士林)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위정척사는 정학(正學)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을 물리친다는 사상이다. 위정은 성리학을 수호하고, 척사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다. 처음에 위정척사운동은 천주교 등 서구 종교와 문화를 배격하는 것이었는데 186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쇄국정책의 근간을 형성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혁 근대화 세력도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 선각자는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었다. 그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시대에 뒤떨어진 성리학에 젖어 있는 조선의 지배층을 일깨우기 위해서 박규수 자택 사랑방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영민한 양반 자제들에게 근대화 교육을 시켰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세력의 정치적 당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위정척사로 인해 소수 의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치
 
대한제국 시절 황룡포를 입은 고종.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 열아홉 살에 헌종(憲宗)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된 ‘강화도령’ 철종은 안동김씨 세력이 골라 세운 허수아비 왕이었다. 이들은 특히 똑똑한 왕족을 경계했기 때문에 대원군은 상가를 전전하며 ‘궁도령’이라고 불리면서 그들의 감시를 피해 나가는 한편, 그는 병약한 철종이 죽는다면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 은밀히 계산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대왕대비로서 철종 사후에 왕의 지명권을 갖게 될 신정왕후(神貞王后) 조 대비를 주목했다. 조 대비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세자빈으로 들어와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후 안동김씨 세력에 눌려 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대원군은 조 대비에게 접근, 둘째 아들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하기로 뜻을 모았다. 철종이 오랜 병고 끝에 1863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조 대비는 대원군 둘째 아들인 이재황(李載晃)을 익종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옹립하였다. 1864년, 이렇게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이 탄생하고 대원군은 ‘살아 있는 대원군’으로 조 대비로부터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부여받아 섭정 형식으로 집권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 왕권은 약화되고 조정은 부패했다.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의 문란으로 민심은 흉흉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에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국제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이 개항하면서 조선도 제국주의 열강들의 개방 압력을 받게 되는 등 갈등과 혼란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의 전면에 등장한 대원군은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안동김씨를 축출하고 세도정치로 소외되어 왔던 남인, 북인의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했다. 이어 행정과 군사 기능을 담당하고 있던 비변사(備邊司)를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하여 통치기구를 정비한 후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등 법전을 편찬하여 질서를 잡아나갔다. 당시 서원은 붕당(朋黨)의 근거지로서 세금을 면제받아 국가 재정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전국의 600개의 서원 중 47개소를 제외한 서원을 정리하고 그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이어 삼정의 문란을 시정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해 나갔다. 그러나 대원군이 단행한 이러한 개혁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국가개조가 아니라 전제왕권의 확립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경복궁 중건을 위해 무리한 노동력 징발과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당백전, 원납전 등을 발행하면서 수구세력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나타났다.
 
 
  위정척사론으로 무장된 수구세력의 천주교 탄압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경우가 있기 때문에 대원군과 천주교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천주교는 1783년 이승훈(李承薰)이 동지사(冬至使)의 일원으로 청국에 다녀오는 기회에 프랑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전래된 이후 천주교신앙공동체가 설립되어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데서 발단되었는데 그 명분은 위정척사였다. 1785년 을사박해(乙巳迫害)를 시작으로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어졌다. 신유박해를 거치면서는 일체의 서양서적 전래가 금지되고 천주학 관계는 물론이고 과학, 지리 등의 저술 유입도 철저히 금지되어 쇄국의 일차적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교황청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1836년에는 모방(Maubant) 주교가 밀입국해서 포교하다가 1839년에 체포되어 참형을 당했다(기해박해·己亥迫害).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함대를 조선에 파견, 외교적 간섭과 통상수교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조선은 청국에 대해 프랑스 함대의 내한을 상세히 보고하면서 프랑스인들이 다시 오지 못하도록 부탁하는 동시에 청국을 통해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함대 함장에게 회답을 보냈다. 이 회답서는 모방 신부 등 3인의 살해 배경과 그들을 살해한 것이 조선의 법에 따른 것임을 설명하고 외교적으로는 청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다.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안내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밀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박해시기에 두 프랑스 신부는 살아남았으나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어 1846년 처형되었다(병오박해·丙午迫害). 페레올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실을 알리면서 프랑스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프랑스혁명 직후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프랑스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대원군 쇄국정책의 단초가 된 러시아의 남하와 천주교
 
  대원군은 이러한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지켜보다가 1863년 섭정을 시작하면서 서방의 개방 압력과 천주교 문제에 직접 대처해야 했다. 그런데 대원군이 대외관계에서 가장 먼저 당면한 문제는 프랑스와의 관계가 아니라 러시아와의 문제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청국으로부터 연해주를 얻은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1864년에는 러시아인 5명이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와서 공한을 전달하고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 측이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통상을 거절하자 1866년 초에는 러시아 군함이 영흥만(永興灣)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육로로 러시아 군대가 통상교역을 위해 국경을 넘어올 것이라고 위협했다.
 
  조선 측에서는 1860년대에 들어 많은 조선인이 변방 동북지방의 러시아 영토로 들어가 러시아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토지나 생업거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대원군은 이것이 러시아가 조선을 간섭할 구실이 되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 기도와 대원군의 고민을 알게 된 천주교도 남종삼(南鍾三) 등은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양국과 제휴하는 것이 좋다는 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이 유럽 각국과 교섭하려면 서양인 신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대원군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는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 교리문답을 배웠으며, 자신의 아들이 왕(고종)이 되자 감사 미사를 올리기도 했다. 고종을 키운 유모 박씨 부인도 마르타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 방안을 고민하던 대원군은 프랑스, 영국과 제휴하는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받아들였다.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 주고 그 대가로 조선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중개 역할은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이 맡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대원군은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베르뇌(Berneux) 주교 면담도 수락했다. 그런데 남종삼이 벌인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와의 접촉이 미비한 준비와 혼선으로 지연되고, 베르뇌 주교 또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대원군은 진퇴양난이 되었다. 시험대에 오른 대원군의 첫 번째 대외정책 결정은 사실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천주교 탄압(병인사옥)과 조불전쟁(병인양요)
 
  설상가상, 대원군이 ‘천주학쟁이’와 결탁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위정척사의 수구세력으로부터도 정치적 공세를 받게 되었다. 외교 실패의 역풍에 직면한 대원군은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만회책이 필요했다. 마침 1866년 초 영흥만에 내도한 러시아 군함이 스스로 퇴거했다. 문제의 발단이었던 러시아가 물러가자 그간 천주교에 관용을 보였던 대원군은 입장을 바꾸었다. 천주교를 불궤(不軌)집단으로 규정한 후, 베르뇌 주교를 잡아 처형하고 천주교 신도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 체류하던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리델 신부를 비롯한 3명(Ridel, Calais, Feron)만이 탈출했다. 1866년(고종 3)에 있었던 병인사옥(丙寅邪獄)이다.
 
  이들 3명은 청국으로 탈출해 천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Roze) 제독에게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조선에 ‘선전포고’를 했다. 조선은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기 때문에 무력 충돌을 피하고 예비회담을 하자고 대응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7척의 군함으로 리델 신부와 3명의 조선인 신도의 안내를 받으면서 원정에 나서 강화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고 겨울이 닥쳐오자 철수했다. 40일의 강화도 점령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많은 서적과 재화를 약탈해 돌아갔다(병인양요·丙寅洋擾).
 
  이렇게 프랑스 함대가 물러간 데에는 역관 오경석의 정보가 주효했다. 병인사옥이 국제문제로 비화하자 대원군은 청국에 사태를 해명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를 파견했는데 이때 오경석도 동행했다. 오경석은 자신이 그동안 구축해 놓은 청국 인사들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프랑스 함대의 병력 규모, 전함의 성능, 화포의 위력 등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 보고하면서, 프랑스 함대가 재정이 부족해 3개월분의 군량밖에 적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피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방어하면서 지구전을 전개하면 승산이 있다는 대책을 대원군에게 제출한 바 있다.
 
  병인양요로 인해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고, 양이와의 강화는 매국이요 망국임을 강조했는데, 이 척화론(斥和論)은 이항로(李恒老)의 상소에서 구체화되고 체계화되었다. 그 핵심은 위정척사에 입각하여 양이와의 조약체결, 통상에 반대하고 침입한 적은 실력으로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청국에 이 사건의 경위를 보고하면서 전승을 과시했고, 일본에도 양이에 대한 보국책의 강구를 충고했다. 대원군의 조선은 사대교린의 기존질서에 입각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청국에는 사대를,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견지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정치의 조류와 역행한 것이며, 시대적 변화를 외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
 
  조불전쟁(병인양요)이 진행되던 1868년(고종 5), 상해에 거주하는 프로이센의 유대인계 상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남연군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堀事件)이 발생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오페르트가 1866년 영국 상선(The Lona)을 타고 충청도 해미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다시 같은 해 영국 선박(The Emperor)을 타고 해미와 강화도 갑곳진에 내도하여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해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그 후 병인사옥 때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Stanisas Feron), 상해 영사관 통역을 역임한 미국인 젠킨스(F.B. Jenkins) 등이 오페르트와 모의, 젠킨스의 자금지원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이들은 통상 요구는 하지 않고 충청도 홍성군에 몰래 상륙한 후 바로 덕산으로 이동해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지만 묘광이 견고해 실패했다. 급보를 받고 군병이 출동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도망가고 난 뒤였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오페르트의 계획적인 약탈행위로 기술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오페르트 사건이 단순한 도굴행위가 아니라 조선과의 통상을 위해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오페르트가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절되자 2년 후인 1868년, 조선 사람들이 조상숭배사상이 강한 것을 이용하여, 도굴한 시체와 부장품을 볼모로 흥정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계략하에 실력자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묘를 도굴해서 관을 미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특히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책에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한양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요구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현직 왕가의 무덤을 파헤치는 서양인들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젠킨스가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로 인해 대원군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 사건에 연루된 천주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으며 병인양요와 함께 위정척사에 힘을 실어주면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조·미 관계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진행되던 1866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상선(The General Sherman)이 조선의 평양 경내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천주교도의 살해 이유를 물었다. 이 선박은 영국인 선교사이며 통역인 토머스(R.J.Thomas) 목사를 비롯하여 청국 사람의 승선은 물론, 상품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적재하고 있었다. 조선 측은 국법으로 교역이나 기독교가 모두 금지되어 있음을 알리고 빨리 퇴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던 중 대동강 수위가 내려가 선체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셔먼호 선원들은 당황하여 무기로 위협하면서 식량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당시 평안도관찰사 박규수는 근대화의 선각자였고 미국에 대한 개방을 지지했던 개혁·개방론자였지만 이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군병이 동원되어 화공으로 배를 공격해 태워버리고 토머스 목사를 비롯한 모든 선원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랑스 신부 리델이 청국으로 돌아가 이를 알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선에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미국 아시아함대사령관 벨(H.Bell) 제독에게 셔먼호의 잔해 탐색을 지시했다. 벨 제독은 슈펠트(R.W.Shufeldt) 제독으로 하여금 전함을 이끌고 조선에 가도록 했는데 그가 조선 측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셔먼호 문제를 힐책하는 서한만을 전달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셔먼호 선원 가운데 생존자가 있다는 풍문이 돌자 다시 미국 아시아함대의 셰난도(The shernandoah)호가 황해도 허사진에 나타나 사건 경위와 생존자를 탐문했다. 조선 측은 황해도 관찰사의 서한을 통해 셔먼호 사건은 미국 선원들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해명하자 미 함은 서한을 받아 돌아갔다. 이와 같이 양차에 걸친 조사에 실패한 미국은 프랑스에 미·불 합동원정을 제의했으나 프랑스는 병인양요 때와 같이 국내 혁명의 사후처리 사정으로 거절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도 남북전쟁 이후의 후유증으로 ‘조선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상해 주재 미국 총영사 시워드(George F.Seward)는 병인양요와 셔먼호 사건을 관찰하면서 조선의 전략적 위치가 매우 중요함을 인식했다. 그는 미국이 더 늦지 않게 조선과 통교할 필요가 있음을 본국에 건의했다. 마침 미국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군의 사령관 그랜트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집권하면서 알래스카와 미드웨이(1867)에 진출하고 있었다. 총영사는 그의 삼촌인 윌리엄 시워드가 국무장관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통상조약 체결과 셔먼호 사건의 조사를 위해 조선에 원정할 것을 건의했다. 1868년 미국은 청국 주재 로(F.F.Low) 공사에게 조선과 통상조약을 교섭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조약교섭에서 난파선의 구조 및 보호를 주된 목적으로 하였으며, 교섭 방법은 청국의 중재를 원했다. 그러나 청은 조선이 “속방”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완전히 독립”이라고 발을 뺐다. 그래서 로 주청 미국공사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간주하고 청국 정부를 통해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 자기와 로저스 제독이 통상조약을 교섭하기 위해 군함으로 내한한다고 전했다.
 
 
  조미전쟁(신미양요)과 척화비
 
신미양요 당시 초지진 포대를 점령한 미군.
  1871년 로 공사는 군함 5척과 약 1200명의 육전대 그리고 리델 신부 등을 대동하고 아산만 앞바다에 정박했다. 함대의 규모로 보아 일본에서와같이 함포외교를 통한 통상개방 교섭인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도착하자 이 지역의 관리가 미국 군함을 방문, 로 공사와 로저스 제독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 측 하급 관리와의 면담을 거절, 대신(장관급)의 파견을 요청했다.
 
  미국의 포함외교와 무력시위에 직면해 조선 조정은 미국은 역사는 짧고 문화는 미개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런 미국이나 미국인들과 강화하게 된다면 정학(正學)은 장차 침몰할 것이며, 마침내 조선과 조선인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강화는 용납될 수 없으며, 설사 청국이 그것을 종용하여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선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미 함대는 손돌목을 거쳐 광성진에 이르렀는데 조선이 미국 함에 발포하자 미 함대는 초지진, 광성진, 덕진진을 함락하였다(신미양요·辛未洋擾).
 
대원군의 쇄국의지를 담은 척화비.
  미국과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위정척사론은 더욱 강화되고 대원군은 서울 등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전쟁을 강조하면서 강화를 주장하는 자는 ‘매국(賣國)’으로 다스릴 것을 다짐하였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화해를 하자는 것이다. 화해를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같으니,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는 것이었다.
 
  미 함대는 다시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강화도를 떠나버렸다. 미국의 퇴거 이유는 수도 한양의 점령이 불가능하고, 한양 점령 없이는 조선 정부의 굴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 측은 350명 전후의 전사자를, 미국 측은 3명의 전사자, 10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무기의 현저한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종실록〉에는 전사자가 50여 명,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魚在淵) 장군이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을 ‘무수히’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미 함대가 스스로 물러났음에도 이 전투를 승리라고 자축하고 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틸턴(McClane Tilton) 미 해병대 대위가 그의 아내에게 쓴 장문의 편지에는 “조선군은 맹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무기라고는 겨냥도 제대로 안 되는 대포에,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화승총이 고작이었다. 최신식 대포와 최신식 레밍턴(Remington)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미군이 성벽 가까이 진격을 하자 재장전할 시간이 없는 조선군은 성벽 난간에 올라가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순식간에 조선군 250명 가까이가 전사했다. 미군 전사자는 장교 1명을 포함해 단 세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대국가로 변모한 신일본의 외교문서와 정한론
 
  미국의 함포외교에 굴복해 전격적으로 개국(1854)한 일본은 서세동점의 시대적 전환기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종래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체제를 청산하고 메이지유신(1866)을 단행해 근대 천황제 국가를 출범시켰다. 근대국가로 변신한 신(新)일본이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를 통해 조선에 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그런데 이 문서에는 황실(皇室)·봉칙(奉勅) 등 상국(上國)의 용어가 기재, 지금까지 일본을 대등한 교린국으로 상대해 온 조선의 입장을 자극한 것이다.
 
  조선이 일본 측 외교문서를 거부하자 ‘천황 친정’의 새 체제를 무시한 조선을 무력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일본 내에서 고개를 들었다. 정한론의 배경에는 고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였다는 잘못된 역사 인식이 깔려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차피 서양에 의해 점령당할 조선을 일본이 먼저 점령하는 것이 동양 평화를 위해 좋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조선침략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종전의 관행대로 통상을 요구해 왔다. 1871년에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이 군함을 타고 부산에 와서 담판을 했다.
 
  조선에서는 위정척사론자들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들어 개항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 중심에는 대원군이 위치해 있었다. 이들의 반대 이유는 첫째, 무한생산이 가능한 서양의 공산품과 유한한 우리의 농업 생산물을 교역하면 경제적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 둘째 일단 문호를 개방하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을 수 없게 된다는 논리였다.
 
  일본에서는 서구에서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의 정객들이 내부적으로 힘을 더 기른 후에 정한론을 추진해야 한다는 논리로 급진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정치 다툼을 벌였다.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가 물러나면서 정한론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정한론은 1890년대에 대륙 침략을 위한 ‘탈아론(脫亞論)’과 ‘아시아연대주의’로 재부상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잠시 지연된 것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민비세력의 ‘궁중 정변’과 대원군의 저무는 황혼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한 최익현.
  신일본에서 사이고가 물러나고 정한론이 잠잠해질 무렵,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은 이제 성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척화-쇄국보다는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민비(閔妃)와 민씨 외척이 있었다. 대원군과의 보혁 갈등과 권력 암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1876년 민비세력은 극우 노선의 척사론자로 대원군의 급진개혁에 반대해 온 최익현에게 접근해 대원군을 축출할 것을 부추겼다. 최익현은 스승인 이항로가 대원군을 지지했기 때문에 비판을 자제했었는데 이항로가 죽은 후에는 경복궁 중건 중지와 서원철폐 반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내정개혁을 비판하면서 고종이 성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아버지가 섭정할 필요가 없으며 조정 업무에 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대원군 지원세력의 반발이 거셌지만 민비와 일가의 의도되고 준비된 궁중 거사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를 옹호하고 1873년(고종 10)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문을 사전 통보 없이 폐쇄했다. 살아 있는 대원군이 실각한 것이다.
 
  그러나 물러난 대원군의 권력에 대한 집념은 멈추지 않았다. 권력 복귀를 시도했다. 개혁세력이 정국의 전면에 나섰으나 국론은 분열되고 열강의 세력경쟁을 몰고 왔다. 대원군은 이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을 이용해 1881년 자신의 서자(庶子) 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고종 폐립 사건에 관여했다. 이듬해에는 임오군란의 수습을 위해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한 달 만에 임오군란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4년여를 청국에서 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이어 1887년에는 큰아들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1894년에는 일본의 간계에 이용당해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乙未事變)에 연루되는 정치적 오류를 범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주한일본공사관의 공사 미우라와 서기관 스기무라는 대원군을 이 사건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어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대립 구도를 부각시키고 대원군에게 접근해서는 손자 이준용의 신변도 보장할 수 없다고 위협해 대원군의 협조를 얻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을미사변에의 연루는 대원군의 정치적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준 것은 분명하다.
 
 
  대원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을미사변 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다가(아관파천·俄館播遷) 1년 후 복귀한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하고 황제에 올라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민비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봉하고 국장을 성대하게 치렀다. 1898년(광무 2) 대부인 민씨(고종의 생모)가 세상을 떠나고 대원군은 일흔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대원군에게는 여러 평가가 뒤따른다. 먼저 안동김씨의 견고한 외척세력을 타도하고 ‘살아 있는 대원군’이 된 정치적 달인의 이미지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조선사회를 강력한 개혁정책으로 쇄신했던 개혁가의 이미지도 있다. 미국인 헐버트(H.B.Hulbert)는 《한국견문기》라는 저서에 “그는 목표가 정해지면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굴하지 않고 목표 달성을 위해 돌진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실로 그는 조선 정계의 마지막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고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주한미국공사 허드(Augustine Heard)는 그의 보고서에서 “왕비 민씨가 우두머리인 민씨 척족은 왕궁 내의 거의 모든 권세와 부귀 있는 자리를 독차지하여 미움을 사고 있다. 만약 실력 있는 지도자가 출현한다면 혁명을 바라는 사람들이 이 인물 주위에 결집할 것이다. 현재로선 강력한 의지와 정신력의 소유자인 흥선대원군 말고는 그런 역할을 담당할 인물이 없는 것 같다”고 당시의 대원군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정치에는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른다. 서원철폐 등의 정책에 반발했던 유생들이 남긴 부정적인 기록과 대대적으로 탄압받았던 천주교인들이 남긴 평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대원군의 개혁이 조선왕정을 되살리기 위한 복고적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리한 경복궁 중건에다가 서원에 딸린 땅과 노비를 몰수함으로써 왕실 재정을 늘렸으나 사대부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지나친 권력 편집 성향과 더불어 전제왕정 복고에 그의 정치력을 집중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대외정책의 오판은 더욱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시기 조선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척화와 왕정복고가 아니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근대화를 실현시켜 나가는 일이었다. 대원군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했다. 화이적 명분론(華夷的名分論)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의 배타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내우외환의 위기를 심화시킨 것이다.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에 저항하면서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역임했던 역사학자 문일평(文一平)은 그가 남긴 《조선인과 국제안(國際眼)》에서 조선이 국가적으로 실패한 원인으로 민기(民氣)의 위미(萎靡)와 지도자의 ‘국제적 문맹’을 지적하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대원군을 꼽았다. 망국(亡國)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대원군의 외교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날 우리의 국론은 지나치게 분열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급속히 변화하는 한반도 주변정세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돌아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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