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9〉

후베이 천하제일 누각 황학루가 낳은 명주 & 형주의 수호신 관우가 잠든 당양의 ‘관공방’

  •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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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名詩를 양산한 황학루가 이제는 명주인 황학루주도 탄생시켜
⊙ ‘짙으면서 상쾌하고 담백하면서 우아한’ 관공방

牟鍾赫
⊙ 44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서산 정상에서 바라본 황학루와 창장대교, 양쯔강.
우한(武漢)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배꼽에 해당한다. 소수민족이 절대다수인 티베트와 신장(新疆)을 제외하면 중국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후베이(湖北)성의 수도로, 양쯔강(長江)이 도시 중간을 가로지른다. 호수도 많아서 전체 면적의 1/5이 물이다. 예부터 우한은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해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렸다. 또한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다. 수운(水運)은 양쯔강의 중앙에 자리 잡아 서로 충칭(重慶), 동으로 상하이(上海)를 잇는다. 철로는 산시(陝西),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후난(湖南) 등 9개 성·시를 연결한다.
 
  본래 우한은 3개의 각기 다른 도시에서 출발했다. 첫째는 한수이(漢水) 남쪽에 있는 공업도시 한양(漢陽)이다. 둘째는 우리에게 신해혁명이 일어난 장소로 잘 알려진 우창(武昌)이다. 마지막으로, 1858년 톈진(天津)조약에 의해 개항해 영국·독일·프랑스 등 5개국의 조계(租界)가 있었던 한커우(漢口)다. 1949년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이 도시들을 합쳐 우한을 만들었다. 세 도시가 삼족정립(三足鼎立)의 형세를 이루며 2014년 말 상주인구 978만명, 면적 8494km²의 ‘대(大)우한’을 만들었다.
 
  1950년대에 하나의 도시가 됐지만, 각 지역의 생활권역은 전혀 달랐다. 이 때문에 한동안 우한은 ‘한 지붕 세 살림’을 해야만 했다. 1957년 러시아의 기술지원을 받아 창장대교(長江大橋)를 착공 3년 만에 개통하면서 비로소 도시 통합을 이뤘다. 그 한 해 전 창장대교 밑에서는 중국인들이 잊지 못할 이벤트를 벌였다. 환갑을 한참 넘긴 마오쩌둥(毛澤東)이 양쯔강을 가뿐히 헤엄쳐 건넜던 것이다. 창장대교의 길이는 1670m. 양쯔강의 폭을 감안할 때 마오의 노익장은 결코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었다.
 
  마오가 이런 이벤트를 벌인 데는 깊은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었다. 당시 마오는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 실무파가 행정권을 잡고 있던 정국을 타파코자 했다. 이를 위해 영국과 미국을 단시일 내에 따라잡겠다는 대약진운동과 농촌의 집단화를 위한 인민공사(人民公社)를 구상했다. 마오는 우한에서 자신의 계획을 정리했고, 양쯔강을 헤엄치며 결의를 다졌다. 마오의 바람과 달리 대약진운동은 중국에 엄청난 재앙만 안겨준 채 실패했다. 그에 따라 마오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1966년 우한을 다시 찾아 문화대혁명을 구상하며 실무파 축출을 노렸다.
 

 
  우한의 랜드마크
 
멀리서 바라본 높이 51.4m의 웅장한 황학루. 황학루는 강남 3대 누각 중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크다.
  이렇듯 마오가 각별히 아꼈던 우한의 랜드마크는 황학루(黃鶴樓)다. 황학루는 서산(蛇山) 서쪽 기슭에서 양쯔강을 굽어보고 있다. 악양루(岳陽樓), 등왕각(騰王閣)과 더불어 중국 강남의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높이가 51.4m로 중국 누각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본래 황학루는 223년 오나라의 손권이 유비와의 전쟁에 대비해 세운 망루를 기원으로 한다. 손권은 요충지인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며 ‘무로 나라를 다스려 번창시키려(以武治國而昌)’했다. 우창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됐다.
 
  황학루는 17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파괴되고 중건되길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규모는 점점 커졌고 건축양식은 화려해졌다. 목조로 만들어졌던 누각이 1884년 화재로 소실됐다. 이를 1985년 석조건축물에다 유리기와를 얹어서 복원했다. 창장대교의 일부가 본래 터를 차지하는 바람에 1k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밖에서 보면 5층이나 실제로 황학루는 9층이다. 누각 내부는 72개의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어 튼튼하고 견고하다.
 
  황학루라는 이름은 중국 도교 전진파(全眞派)의 조사(祖師)인 여동빈(呂洞賓)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당대 술집을 운영했던 신(辛) 씨의 가게에 여동빈이 날마다 찾아왔다. 무려 1년 동안 값도 안 치르며 술을 마셔댔지만, 신 씨는 싫은 내색 없이 그를 환대했다. 어느 날 여동빈은 먼 길을 떠나야 한다며 밀린 술값을 대신해 가게 벽에다 황학 한 마리를 그려 줬다. “손님이 올 때마다 손뼉을 치면 황학이 나와 춤을 출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여동빈이 떠난 뒤 신 씨는 긴가민가하며 실제로 손뼉을 쳐 보았다. 그러자 정말로 황학이 튀어나와 춤을 추었다. 그 뒤로 술집은 유명세를 타서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큰돈을 번 신 씨는 여동빈을 기리기 위해 가게를 허물어 누각을 세웠고, 이름을 황학루라고 지었다. 중국의 도교서에는 여동빈이 황학루에서 승천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황학루는 중국 도교의 성지이자 순례지로 사시사철 신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든다.
 
 
  최호의 〈황학루〉란 詩를 보고 붓을 내려놓은 이백
 
이백이 최호의 시를 보고 붓을 내려놓은 일을 기념해 지은 각필정.
  뛰어난 절경과 흥미로운 전설을 간직한 명소답게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시인과 명인이 황학루를 찾았다.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와 문장을 남겼다. 현재까지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만 400여 편에 달한다. 이 중 8세기 당대 관료 최호(崔顥)가 쓴 〈황학루〉는 중국 시문학의 한 획을 그은 절창으로 손꼽힌다. 이 시는 중국 칠언율시(七言律詩)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렸고(昔人已乘黃鶴去)
  이곳에는 황학루만 홀로 남았구나(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고(黃鶴一去不複返)
  흰 구름만 천년을 유유히 떠도네(白雲千載空悠悠).
  맑은 날 강에서 한양의 나무들이 빛나고(晴川歷歷漢陽樹)
  향기로운 풀은 무성히 앵무새 섬을 덮었네(芳草萋萋鸚鵡洲).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메뇨(日暮鄕關何處是)
  안개 낀 강 위에 수심만 깊어지네(煙波江上使人愁).
 
  최호는 40여 편의 시를 남겼지만,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라 평가할 수 없다. 10대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할 만큼 총명했으나 술을 즐겨 마셨고 도박을 좋아했다. 젊었을 때는 민간에서 떠도는 가사를 시구에다 차용하길 즐겼다. 이 때문에 초창기 시는 문장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부실했다. 그러나 관직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홀연 자리를 박차고 나와 천하를 20년간 주유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중년에는 웅장하고 거침없는 풍격으로 시를 써 내려갔다. 〈황학루〉는 그 절정기에 쓴 시이다.
 
  칠언율시는 7자로 해서 8구로 된 한시 형식이다. 3~6세기 중국 강남의 육조부터 격률이 엄격하고 규칙이 엄정한 율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대 초기에는 오언율시가 먼저 성행했으나, 칠언율시가 곧 대세를 이뤘다. 보통 3~4구와 5~6구가 대구(對句)되는데, 〈황학루〉는 그 구조를 완벽히 보여준다. 훗날 남송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엄우(嚴羽)는 “당대 칠언율시 가운데 최호가 지은 〈황학루〉가 제일이다(唐人七言律詩當以崔顥黃鶴樓爲第一)”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최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백도 뒤늦게 황학루를 찾았다. 황학루 주변을 둘러싼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시상이 자유롭게 떠올랐다. 하지만 누대에서 최호가 남긴 시를 발견했다. 시를 읽은 이백은 “참으로 절묘하구나”라고 탄식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이 이야기에 감복한 후세인들은 황학루 동쪽에 정자 ‘각필정(擱筆亭)’을 세웠다. 각필은 붓을 놓았다는 뜻이다. 훗날 이백은 〈황학루에서 광릉(오늘날의 양저우·揚州)으로 가는 맹호연을 떠나보내다(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를 남겨 아쉬움을 달랬다.
 
  오랜 벗이 서쪽의 황학루를 떠나(故人西辭黃鶴樓)
  봄 안개 지는 춘삼월 광릉으로 내려가네(煙花三月下揚州).
  외로운 돛단배 멀리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孤帆遠影碧空盡)
  오직 하늘 끝으로 양쯔강만 흐르는구나(惟見長江天際流).
 
  여기서 등장하는 맹호연은 후베이성 샹양(襄陽) 출신의 시인이다. 맹호연은 몇 차례 과거에 도전했으나 관계에 ‘관시(關係)’가 없어 줄곧 낙방했다. 40세가 넘어 문인들의 추천으로 현종(玄宗)을 배알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읊었던 시에서 ‘재주가 없어 영명한 군주에게 버림받았다(不才明主棄)’는 글귀가 문제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 남은 생을 고향에 은둔하며 살았다. 훗날 왕유(王維)와 더불어 중국 산수전원시(山水田園詩)의 쌍벽으로 손꼽혔다. 이백이 다시 붓을 들어 황학루에 관한 시를 남긴 것은 불우한 삶을 살았던 맹호연을 위한 헌사였다.
 
  중국 최고의 누각 시가 〈황학루〉라면, 중국 최고의 누각 산문은 〈악양루기〉다. 〈악양루기〉는 11세기 북송의 걸출한 문인이자 재상 범중엄(范仲淹)이 썼다. 460자의 명문으로, 후난(湖南)성 웨양(岳陽)시에 있는 악양루를 중건한 기념으로 남겼다. 문장 중 ‘세상 사람들보다 먼저 근심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나중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오늘날까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국우민(憂國憂民)의 마음가짐은 공직자와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한다.
 
 
  국가명주상을 두 번 수상한 황학루주
 
  현재 황학루가 목조에서 석조로 변한 데 반해, 산시(山西)성 잉(應)현에 있는 석가탑(釋迦塔)은 현존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목탑이다. 일명 ‘잉현목탑’이라 불리는데 엄청난 신기록과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먼저 높이가 67.31m, 바닥 직경이 30.27m에 달해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크다. 겉으로 보면 8각 6층탑이지만, 내부는 3층으로 된 8각탑이다. 놀랍게도 탑을 지으면서 그 흔한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나무를 꿰맞추어 지은 것이다. 그 시기가 1000년 전인 1056년이다.
 
  잉현목탑은 거란(契丹)이 세운 요나라의 황제 흥종(興宗)이 죽은 황후를 기리기 위해 건축했다. 탑을 지탱하는 돌계단을 제외하고, 오직 순수한 목탑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 프랑스의 에펠탑과 더불어 세계 3대 탑 건축물로 평가된다. 1974년 잉현목탑을 보수하던 중 《거란경》 12권을 발견했다. 《거란경》은 실체를 알 수 없었던 요대 대장경의 조판역사를 채워 주는 귀중한 인쇄물이다. 같이 발견된 석가모니 진신 치아사리 2건도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천고(千古)의 보물이다.
 
  황학루는 명시만 양산하질 않았다. 같은 이름의 명주도 탄생시켰다. 중국정부가 다섯 차례 개최한 전국 술품평회(評酒會)에서 국가명주상을 2번 수상한 ‘황학루주(酒)’가 그 주인공이다. 황학루주는 명·청대 우한의 특산 술인 한펀주(漢汾酒)를 전신으로 한다. 한펀주를 여러 술도가에서 만들었는데, 1915년 베이징(北京)전람회에서 3등상, 1929년 중화(中華)전람회에서 1등상을 탔다. 1952년 우한의 술도가들이 합병해 국영 우한술공장(酒廠)을 설립했다.
 
  우한술공장은 황학루를 회사 로고로 썼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어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되자, 1984년 술 명칭을 황학루주로 바꿨다. 1992년에는 회사 이름마저 황학루주업으로 변경했다. 새로운 브랜드로 1984년과 1989년 전국 술품평회에서 나가 국가명주상을 받는 쾌거를 성취했다. 2013년 황학루주업은 총판매액이 처음으로 10억 위안(약 1830억원)을 돌파했다. 이는 전년 대비 무려 29%나 급증한 호성적이었다.
 
  황학루주는 중국 3대 청향형(淸香型) 바이주(白酒) 중 하나로 손꼽힌다. 술 빛깔이 맑고 투명하며, 맛은 진하나 뒤끝은 부드럽고 단맛이 난다. 이는 보리와 완두로 발효한 누룩에 주원료인 수수를 더해 다시 당화(糖化)시켰기 때문이다. 황화루주업 노동자들은 누룩을 만들 때 발로 밟아 반죽한다. 원주(原酒)를 숙성시킬 때는 석판으로 항아리 위를 봉하고 흙벽에서 떨어뜨려 보관한다. 이런 수백 년 전에 시작한 양조기술을 현재까지 굳건히 지키고 있다.
 
  긴 세월 동안 황학루주는 우한 술시장의 70~80% 이상을 점유했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판매량이 많질 않았다. 오랫동안 중저가로 고착된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지난 10여 년간 고급 술이 주도했던 중국 바이주 시장에서 어필하지 못했다. 그러나 2012년 말부터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부패와의 전쟁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중국 술시장은 관공서와 기업이 주도했던 고가주의 소비가 급격히 줄고, 중저가 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 맛좋고 저렴한 황학루주의 앞날이 밝은 것은 이런 시대상에 기인한다.
 
 
  관우의 고장 징저우
 
관우가 성을 쌓아 올린 뒤 명대 말기 증축한 징저우 고성.
  우한에서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3시간을 달리면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의 도시에 도착한다. 소설 《삼국지연의(演義)》에서 제갈량과 함께 사랑받는 관우가 지켰던 형주(荊州·징저우)다. 관우의 출생연도는 명확지 않다. 단지 산시(山西)성 윈청(運城)에서 태어나, 허베이(河北)성 줘셴(涿縣)에서 유비를 만난 것은 확실하다. 나관중은 관우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키가 9척이고, 수염은 2척이다. 얼굴은 무르익은 대추 같고, 입술은 연지를 칠한 듯 붉다. 봉황의 눈에 누에 모양의 눈썹을 가졌다. 모습이 늠름하고 위풍당당하다.”
 
  그 뒤 관우는 도원(桃園)에서 유비, 장비와 의형제를 맺은 뒤 대륙 곳곳을 누볐다. 그가 일생 중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 바로 형주다. 여기서 형주는 오늘날 징저우와 전혀 다르다. 후한은 지방행정조직으로 13개의 주(州)와 서역(西域)도호부를 뒀다. 당시 형주는 오늘날 후베이와 후난(湖南)의 전부, 산시(陝西)와 허난(河南)의 남부, 구이저우(貴州)와 광시(廣西)자치구의 북부에 해당하는 7개 군(郡)을 관할했다. 지금의 징저우는 당시 강릉(江陵)이라 불렸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위나라 대군을 물리쳤다. 조조는 적벽에서 패한 뒤 각 성에 심복들을 남겨 뒀다. 이에 유비는 관우, 장비, 조자룡 등을 이끌고 형주 남부의 4군을 함락했다. 주유는 강릉과 이릉(夷陵)을 쳐들어가 점령했다. 그러자 손권은 노숙의 권유에 따라 유비를 형주자사(刺史)로 세웠다. 영토뿐만 아니라 여동생까지 유비에게 시집보내 휘하에 두고자 했다. 형주는 위군의 침입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손권은 무력과 지략을 모두 갖춘 유비 집단이 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손권 밑에서 만족할 유비가 아니었다. 213년 유장의 요청과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따라 방통, 황충 등을 이끌고 지금의 쓰촨(四川)인 익주(益州)로 들어갔다. 출정에 나서기 전 유비는 관우에게 형주의 북부를 지키도록 했다. 이때 관우는 징저우 성곽을 쌓았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징저우 고성의 기초가 됐다. 214년 유장이 유비의 속셈을 알아채면서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방통이 낙성(雒城)에서 죽었다.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자룡 등을 호출해서 익주를 차지했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 포격으로 사라진 관우의 관제묘
 
관제묘는 언제나 관우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참배객들로 붐빈다.
  215년 유비가 익주를 취한 사실을 알게 된 손권은 형주를 되찾으려 했다. 손권의 요구에 유비가 응하지 않자, 양측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빠졌다. 이때 위군이 지금의 산시성 한중(漢中)을 점령하고 친링(秦嶺)산맥을 장악하면서 쓰촨의 코앞까지 내려왔다. 유비는 위의 침략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형주 남부의 3군을 손권에게 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관우는 징저우에 관저를 두고 형주를 지켰다. 관우 혼자서 촉 동부 방어의 대임(大任)을 맡게 된 것이다.
 
  218년 조조는 눈엣가시 같은 관우를 치기 위해 조인을 파견했다. 조인은 남양(南陽)에 주둔하면서 혹독하게 군졸을 모으고 군량미를 수탈했다. 이로 인해 지방관과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완성(宛城)태수 후음과 위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초 조인은 대군을 앞세워 반란을 진압했다. 한데 이런 혼란상을 기회라 여긴 관우는 군사를 일으켜 위를 공격했다. 조조는 우금과 방덕을 보냈고 번성(樊城) 주변에서 양군은 격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병력 수가 많은 위군이 압도했지만, 마침 닥친 장마를 이용해 관우는 방덕을 죽이고 우금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뒀다.
 
  관우는 기세를 올려 번성에서 농성 중인 조인마저 압박했다. 위기감을 느낀 조조는 서황을 대장으로 증원군 20만명을 내려보냈다. 처음에는 관우가 징저우의 수비군까지 차출해 위군에 대응했다. 그러나 점차 위군의 공세에 밀려 대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몽이 이끈 오군이 상인과 상선으로 위장해 징저우를 함락했다. 위군과 오군의 협공에다 가솔들이 오군에게 사로잡힌 관우의 군사들은 진영을 이탈했다. 219년 말 관우는 지금의 허베이성 당양(當陽)인 맥성(麥城)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임저(臨沮)에서 오군에 사로잡혀 관평과 함께 참수당했다.
 
  관우가 죽자, 징저우 주민들은 관우의 관저였던 관공관(關公館)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오군은 주민들의 이런 행동을 눈감아 줬다. 그 뒤 세월의 풍파 속에 관공관은 불타 없어졌다. 이를 1396년 명조가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關帝廟)로 복원했고, 16~18세기 3차례에 걸쳐 확장했다. 특히 청 옹정제(雍正帝)가 관우뿐만 아니라 그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와 아들 관평, 부장이었던 주창까지 모시도록 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포격으로 관제묘는 다시 잿더미로 변했다.
 
 
  淸代에 이르러 聖人의 경지에까지 오른 관우
 
관제묘 내전에 돌로 만들어진 관우상 밑에 만력제가 내린 작호가 눈에 띈다.
  현재의 관제묘는 1987년 옛 유적지 위에 청대에 그려 놓은 건축도면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관제묘로 들어가면 정전의 문 위에 내걸린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위세가 천하를 뒤흔든다(威震華夏).’ 이 글귀는 19세기 동치제가 죽기 1년 전 친필로 써서 하사했다. 동치제는 18세에 요절했기에 그가 남긴 편액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정전 안은 진한 향불 냄새와 더불어 사시사철 관우상을 향해 소원을 비는 중국인들로 들끓는다. 정전 중앙에는 관우가 《춘추(春秋)》를 든 채 앉아 있다. 뒤에는 주창이 관우의 무기인 청룡언월도를 잡고, 관평은 관우의 투구를 들고 서 있다.
 
  정전 뒤에는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상이 늠름하게 서 있다. 그 밑에는 ‘신위원진(神威遠鎭)’이라 씌어 있다. 이는 명대 말기 만력제(萬曆帝)가 관우를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에 봉한 데서 유래됐다. 관우는 역대 황제로부터 수많은 작위를 하사 받았다. 청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작호가 26자에 이를 정도로 칭송은 깊어졌다. 역대 봉건왕조의 관우 숭배 열기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징저우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당양이다.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에 따르면,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잘라 조조에게 바쳤다. 그리고 머리 없는 시신은 제후의 예를 갖춰 당양 서북쪽에 묻었다. 《삼국지연의》는 손권이 유비의 보복이 두려워 관우의 죽음을 조조에게 뒤집어씌우고자 수급을 보냈던 것으로 묘사했다. 하나 조조는 손권의 음모를 간파해 관우를 형왕(荊王)으로 봉했고, 향나무로 몸을 깎아 만들어 머리를 붙인 뒤 허난성 뤄양(洛陽)시 남쪽에 안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머리는 뤄양을 베개 삼았고, 몸은 당양에 누워 있다(頭枕洛陽, 身困當陽)”고 노래해 왔다.
 
  관우의 시신이 묻힌 곳이 당양의 관릉(關陵)이다. 처음 조성될 때는 ‘한의용무안왕사(漢義勇武安王祠)’라 불렸는데, 15세기 중건하면서 명 가정제(嘉靖帝)가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다. 관우의 수급을 묻은 뤄양의 묘는 18세기 청 강희제(康熙帝)가 관림(關林)이라는 한층 높은 칭호를 부여했다. 본래 중국에서 ‘릉(陵)’은 황제의 능원에만 붙인다. 또한 ‘림(林)’은 성인의 무덤에만 바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공자의 묘인 공림(孔林)이다. 후대에 황제로 추존된 관우가 청대에 이르러서는 성인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적토마 기념하는 馬殿
 
관릉 마전에 서 있는 적토마.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한혈마로 알려져 있다.
  관릉은 입구 격인 삼원문(三元門) 앞에 석패방이 늠름히 서 있고, 금색 지붕에 붉은 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중국에서 금색 지붕은 황궁이나 황제의 능원에만 얹힌다. 규모도 커서 전체 면적이 4만5000m²에 달하고 4개의 전각, 5개의 정원이 직선으로 겹쳐져 있다. 본래 관릉은 관우의 시신만 묻은 작은 봉분이었다. 이를 송대에 더 높게 쌓아올린 뒤 그 앞에 사당을 세웠다. 명대에 현재와 같은 구조로 갖춰 증축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됐다.
 
  삼원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마전(馬殿)이 나온다. 마전에는 관우와 전장을 누볐던 적토마가 서 있다. 적토마는 서역에서 중국으로 도입된 한혈마(汗血馬)로, 붉은 털에 토끼처럼 빠른 말을 뜻한다. 본래 《삼국지》에는 여포가 탔던 명마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나관중이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관우의 말로 둔갑시켰다. 즉, 조조가 관우를 회유하기 위해 선물했고, 관우가 죽은 뒤에는 오의 장수 마충에게 넘어갔다고 적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적토마가 관우를 그리워하며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굶어죽었다”며 주군에 대한 충심이 관우 못지않은 말로 포장했다.
 
  199년 유비는 조조에 반기를 들어 차주를 죽이고 서주(徐州)를 차지했다. 이에 관우에게 하비(下邳)를 방어토록 했다. 이듬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전투에서 진 유비는 도주해 원소에게 의탁했다. 관우는 유비의 가족을 지키다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극진히 환대했는데, 이때 적토마를 하사했던 것이다. 관우는 원소의 대군이 침공해 오자, 선봉에 나서서 원소의 부장인 안량을 죽였다. 하지만 유비로부터 편지를 받은 뒤, 선물 일체와 서신 한 통을 남겨 놓은 채 조조 진영을 떠났다. 나관중은 이 편지에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고 기술했다.
 
  동군(조조)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고(不謝東君意),
  붉고 푸르게 홀로 이름을 세우리라(丹靑獨立名).
  외로이 남은 나뭇잎(관우)을 미워하지 말며(莫嫌孤葉淡),
  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으리라(終久不凋凌).
 
  조조는 수하들이 관우를 추적하자고 진언했지만, “사람에겐 각자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라”며 조용히 보내 줬다. 훗날 중국인들은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꼿꼿이 서 있는 대나무 아래 관우의 시를 적어 넣는 ‘풍우죽(風雨竹)’이나 ‘관제시죽(關帝詩竹)’을 즐겨 그렸다. 주군을 위해 충절을 지킨 관우를 칭송한 것이었다.
 
 
  대만인이 기부한 관우상
 
소박한 느낌마저 나는 관우의 묘. 묘 앞 정자에 ‘한수정후묘’라 새겨진 비가 있다.
  마전을 지나면 배전(拜殿)이 자리 잡고 있다. 배전은 역대 지방관들이 참배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기념품 가게로 바뀌었다. 배전 뒤에 있는 정전(正殿)에는 청동으로 제작된 관우상이 있다. 청대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는 떨어진다. 그러나 육중한 체구에 부릅뜬 눈과 바짝 치켜세운 눈썹을 갖춰 마치 전신(戰神)과 같다. 징저우의 관제묘처럼 관우의 좌우로는 주창이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관평은 투구를 두 손으로 받치고 서 있다. 제단 위와 청동상 양옆에는 다양한 포즈를 취한 관우의 작은 목상과 청동상이 줄지어 놓여 있다.
 
  정전 뒤 침전(寢殿)에는 높이 3.6m, 무게 800kg에 달하는 관우상이 서 있다. 이것은 1990년대 관릉을 방문했던 한 대만인이 기부했다. 관우를 향한 존경과 흠모가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침전을 지나면 관우의 시신이 묻혀 있는 봉분에 다다른다. 관우 묘는 높이 7m, 둘레 70m로 규모가 그리 크질 않다. 흥미롭게도 묘 앞 정자의 비에는 ‘한수정후묘(漢壽亭侯墓)’라 새겨져 있다. 한수정후는 관우가 안량을 죽인 뒤 조조가 조정에 표문을 올려 내린 작호다. 관우는 조조가 준 다른 선물들은 마다했지만, 적토마와 후한 황제가 내린 관작은 기꺼이 받았다.
 
  징저우와 당양 외에도 현재 중국과 전 세계 수십 곳에는 관제묘가 남아 있다. 일본, 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호주, 유럽 등 화교가 사는 곳이면 으레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와 더불어 관제묘가 건립됐다. 공자는 지난 2000여 년간 아시아를 지배했던 유학사상의 창시자다. 또한 춘추시대의 혼란을 종식하고자 주야장천(晝夜長川) 노력했던 정치가이자,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 교육자다. 이에 비해 관우는 무공이 뛰어났고 유비에게 충성을 다한 의리의 상징일 뿐이었다.
 
  《삼국지》는 ‘많은 병사들 사이를 돌파해 안양을 찌르고 그의 머리를 베었다’고 적었다. 이를 볼 때 관우의 무예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소의 또 다른 부장인 문추는 관우에게 참수당한 것이 아니라 조조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관우가 조조 곁을 떠나 유비에게 가면서 다섯 관문을 지나고 여섯 장수를 벤 오관참장(五關斬將)은 나관중의 머릿속에서 나온 허구다. 정사를 꼼꼼히 읽어 본 독자라면, 《삼국지연의》가 묘사한 관우의 무공 중 입증된 사례가 많지 않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관우의 명성을 활용한 관공방주업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관우를 ‘무예의 신’ ‘충의의 아이콘’으로 숭배했을까? 첫째, 관우는 임금이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데 아주 유용한 인물이었다. 유비와의 의리만을 지켰고 의형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봐도, 관우에게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우국애민(憂國愛民)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군주 입장에서 민족과 국가의 안위보다 임금과 왕조만 지켜 주는 충신이 더욱 반갑고 소중하다. 그 때문에 역대 봉건왕조는 적극적으로 관제묘를 세웠고 관우 우상화에 매진했다.
 
  둘째, 관우는 백성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를 갖췄다. 관우는 온갖 시련과 유혹에도 유비를 위해 싸웠고 충절을 지켰다. 또한 지덕과 문무를 고루 겸비했다. 즉, 봉건왕조가 요구하는 대장부의 품격과 기상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금세기까지 관제묘를 복원하고 관우를 숭배하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관우는 뛰어난 장수였지만, 전략가로서의 실력은 낙제점이었다. 219년 천연의 요새인 징저우를 내팽개치고 위를 공격한 행동은 너무나도 큰 실수였다. 이로 인해 관우는 죽음을 맞이했고 종국에는 유비와 장비마저 사지로 몰리게 했다.
 
  한데 관우에게 성인이나 황제보다는 한참 격이 낮으나, 현지 주민들에게 친숙한 작위 ‘공’을 붙여 술을 제조하는 회사가 있다. 당양 바로 옆 이창(宜昌)시 룽취안(龍泉)진에 있는 관공방(關公坊)주업이 그 주인공이다. 관공방은 2002년 후베이성에서 가장 큰 바이주(白酒)업체인 다오화샹(稻花香)그룹이 당양관공술공장(酒廠)을 합병해 설립했다. 본래 당양에 있던 관공술공장이 M&A 당하면서 다오화샹의 생산기지인 룽취안으로 이전된 것이다. 비록 양조 장소는 바뀌었지만, 관공술의 특징인 ‘짙으면서 상쾌하고 담백하면서 우아한(醇爽淡雅)’ 맛은 그대로 유지했다.
 
  실제 필자가 당양에서 마셔본 관공방의 중저가 바이주는 입안에 닿는 느낌은 맑고 시원했고, 목으로 넘어가서도 부드러웠다. 관공방은 저가에서 고가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술을 제조하고 있다. 다오화샹의 전국적인 판매망을 통해 2003년 3000만 위안(약 54억9000만원)에 불과했던 총판매액은 2012년 18억 위안(약 329억원)에 달할 정도로 급증했다. 현재 중국에는 산시성 윈청에 관제주업이,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 관운장주업이 있다. 하나 두 업체는 워낙 작은 술회사라서 존재감이 미미하다. 관우를 앞세운 관공방의 승승장구(乘勝長驅)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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