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 이탈리아 ⑧ 시칠리아 답사 : 월간조선

시칠리아는 지중해 중앙 십자로의 교차점에 위치한 섬이다. 동서로 지브롤터 해협과 수에즈 운하의 중간, 남북으로 리비에라 해안의 제노바와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고대 로마의 주요항구)의 중간 지점이다. 지중해가 세상의 중심이던 시절 그 중심의 한가운데였던 셈이다. 당연히 유럽의 역사에 굵직한 자국을 남긴 많은 세력과 종족들이 거쳐갔다. 고대에는 먼저 페니키아, 카르타고, 그리스의 세력이 번갈아 혹은 동시에 쟁패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500여 년은 로마의 일부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전후에는 지중해 연안을 석권했던 ‘야만’ 반달과 고트들이 다녀갔다. 중세에는 다시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차지였다가 9세기에는 신흥 제국 사라센(아랍)이 들어와 200년 넘게 통치했다. 11세기에는 노르만인이 들어와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고 이를 스와비아(독일) 호엔슈타우펜가(家)의 신성로마 황제 페데리코(독일명 프리드리히) 2세가 물려받았다가 앙주가(프랑스)에 내어준다. 15세기 이후로는 주로 스페인의 지배와 영향하에 400년을 지내다가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척 보아도 어지러울 정도다. 그것도 ‘유사 이래’가 이 정도고 역사 이전으로부터의 유산과 전승도 다양하다. 기원전 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 시대 유적지가 있으며, 유럽 고대 전사(古代前史)의 큰 분수령이었던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고 진 양측이 공히 전쟁의 폐허를 뒤로하고 새 운명을 찾아 도착한 곳도 시칠리아였다. 아이네이아스(Aeneas)가 이끄는 트로이 유민들이 자리 잡은 곳이 시칠리아 서부 트라파니(Trapani) 일대이고 율리시스는 승전 장병들을 인솔해 지금의 메시나(Messina)로 왔었다. 이렇게 유럽 역사와 문화의 원천을 형성했던 물줄기들이 전승으로, 유적으로, 혹은 예술품으로 남아 시칠리아 여행을 특별한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조금 구체적으로 보자. 반달과 고트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들어선 비잔틴 제국은 어차피 그리스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비잔틴을 내쫓고 시칠리아 도주(島主)가 된 사라센도 인적, 종교적, 언어적 측면에서 이렇다 할 변경을 강요하지 않았다. 지배층의 구조도 그렇고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어 사용도 그대로 용인한 것이다. 노르만이 사라센을 몰아내고 들어왔을 때도 이러한 병립, 허용, 공존의 전통은 이어졌다. 회교도와 기독교도가 한동네에 살았고 라틴어, 아랍어,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말을 두루 사용했다. 라틴어 쓰는 아랍인들, 아랍어 하는 기독교도들이 많았고 히브리어 쓰는 유대교도도 적지 않았다. 1000년 전 얘기가 오늘 같고 오늘의 종교 간 다툼이 1000년 전 얘기같이 들린다. 경제활동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제노바, 피사의 상인은 물론, 시리아, 아프리카의 상인들이 종교적으로 혹은 언어상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출입하고 거래했다. 건축 하나를 보더라도 노르만 건축, 이슬람 건축, 그리스 건축이 따로 있다기보다 소위 아랍-노르만-비잔틴(Arab-Norman-Byzantine) 양식, 결국 시칠리아식이라고나 불러야 할 건물이 많다. 심지어 교회를 지으면서도 노르만 외관과 비잔틴 내부장식에 이슬람풍의 쿠폴라(돔)을 얹어 짓는 식이다. 문화공존 나아가 문명공존의 이상태(理想態)를 일상 속에 구현했던 셈이다. 풍성한 문화가 뒤따랐고 다문화성(多文化性·multiculturality)은 시칠리아의 정체성처럼 되었다.

물산이 풍부한 시칠리아

에트나 산의 위용. 3350m로 우리 백두산보다 높지만 능선이 완만해 포근한 느낌을 준다.

풍성한 것은 문화만이 아니다. 토산(土産)과 소출(所出)에서 시칠리아는 단위 면적 기준으로 이탈리아 제일이다. 들은 각종 곡식, 채소와 과일나무, 꽃들로 가득하고, 산은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 너도밤나무, 도토리나무, 자작나무들로 무성하다. 자연의 생장에 최적인 기후조건과 아직도 이따금 활동하는 에트나 화산(Mt. Etna)의 덕이다. 에트나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활화산인데 섬 면적의 근 3분지 1이 그 영향권이며, 20세기 들어서도 몇 차례 크게 사고를 내어 시칠리아의 옥토(沃土) 조성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연중 일조일도 300일 이상이다. 당연히 오렌지, 레몬, 귤 등 과일과 피스타치오, 아몬드 등 열대성 견과류가 지천이다. 올리브 기름과 밀은 시칠리아산을 최고로 치고 꿀, 치즈 생산과 일찍이 아랍인들이 들여온 사탕수수는 시칠리아 특유의 다양한 후식(後食)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와인에 이르면 더 이를 것이 없다. 원래 포도나무는 에트나 기슭에서 흥에 겨워 춤추던 디오니수스의 발밑에서 처음 돋아났다고 한다. 오랜 포도나무와 활발한 와인 생산은 시칠리아 전역이 공통이지만 역시 에트나 인근에서 좋은 와인이 많이 난다.

풍광도 다양하다. 어느 코너를 돌면 아프가니스탄에라도 온 듯 흙먼지 이는 대지의 민얼굴이 이어지다가 조금 더 가면 푸른 초원의 나직한 구릉이 이어지는 것이 토스카나에 방불하다. 다시 얼마를 가면 초원의 골짜기와 흙먼지 날리는 산마루길이 동시에 나타나 미국 서부의 네바다쯤을 연상시킨다. 섬 하나에 이 정도로 다양한 자연과 물산(物産)의 축복이 내리기란 쉽지 않다. 일찍이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이탈리아 반도 수복을 꿈꾸며 아예 시라쿠사(Siracusa)로 옮겨와 살았고, 시칠리아 왕위를 물려받은 페데리코 2세가 신성로마 제위에 오른 후에도 팔레르모를 떠나려 하지 않았던 일들이 미상불 이해가 간다.

이렇게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안에서도 가장 ‘다른’ 지역이고 이 시칠리아의 ‘다름’이 이탈리아의 다양성을 완결한다. 1960년대에 출간된 바르치니(Luigi Barzini)의 스테디셀러 《이탈리아 사람들(Gli Italiani)》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1861년 시칠리아가 통일 이탈리아의 일부로 편입되던 시절 시칠리아 사람 중에는 ‘이탈리아’란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고 일부는 “사람들이 이탈리아 얘기를 하기에 새로 오신 왕비 이름인 줄 알았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통일 100년이 지나도록 크게 달라지지 않아 책을 출간하던 1960년대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이탈리아라는 말에 익숙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시칠리아가 자족(自足)한 지역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칠리아 얘기가 나오면 흔히 인용하는 괴테의 말이 있다. “시칠리아를 빼놓고는 이탈리아를 다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이탈리아를 여는) 열쇠가 시칠리아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Palermo) 땅을 밟은 지 열흘째 되던 날 토로한 감상이다.

노르만 궁의 팔라티나 경당

노르만 궁의 팔라티나 경당. 중앙 후진에 ‘최고 지배자 그리스도’ 모자이크가 보인다.

우리도 팔레르모에서 시작하자. 의미 있는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그 지형이랄까 지세를 먼저 보게 되고 그다음에는 건축이 눈에 들어온다. 팔레르모를 보면 첫눈에 그 입지(立地)가 범상치 않다. 멀끔한 펠레그리노 바위산(Mt. Pellegrino)과 알파노 산(Mt. Alfano)을 좌우에 끼고 이 두 산을 잇는 산줄기를 병풍처럼 뒤에 두른 ‘황금분지(Conca d’Oro)’에 자리 잡고 티레노 바다에 면해 로마 쪽을 바라보는 모양새다. 배산(背山)에 더해 협산임수(挾山臨水)의 안정감이 마치 반쯤 헐어낸 원형극장 안에 아늑히 자리한 느낌이다. 풍수(風水) 공부 없이 보아도 그럴듯한 광경이다.

팔레르모는 페니키아 이래 지중해의 요충이지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노르만 시절이다. 노르만이 시칠리아를 접수한 지 70년 루제로 2세(Ruggero 영어로 Roger・1095~1154)는 1130년 독자적 왕국을 창건하고 팔레르모에 정도(定都)했던 것이다. 왕국을 개창한 일은 이탈리아의 사(史)에 전무(前無)할 뿐 아니라 거의 후무(後無)한 역사적 이니셔티브였다. 루제로의 왕국은 왕조가 바뀌면서도 국체는 이어져 후에 나폴리까지 포함하는 ‘양(兩) 시칠리아 왕국(Regno delle Due Sicilie)’이 되어 1861년 이탈리아의 통일 때까지 존속한다.

팔레르모 성당의 정면.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아랍-비잔틴-노르만 혼합 양식이다.

루제로 2세는 이질 문화를 포용한다는 차원을 넘어 다문화성을 왕국의 자산으로 적극 활용해 시칠리아의 전성시대를 연 현군(賢君)이다. 노르만 사람은 무사(武士)나 축산 일을 하고, 그리스인들은 교회 일과 배(船)타는 일, 아랍인은 농사짓고, 유대인은 상업과 전문직이 몫이었다.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비로소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을 뿐이고, 프랑스와 영국도 아직 미약하고 합스부르크가는 역사에 데뷔도 못 했던 그 시절 시칠리아 왕국은 유럽 제일의 글로벌 부국이었다. 여러 문화를 포괄하다 보니 자연히 학식도 최고 수준이어서 당대 지성의 본산 콘스탄티노플이나 코르도바와 경쟁할 정도였다. 세 개의 공식 통용어 외에 시칠리아의 토착어(vernacolo)는 또 그대로 시문학에 널리 사용되어 후일 단테의 토스카나어 사용에 모범이 되었다. 오늘날 팔레르모와 그 부근의 역사 유산 중에는 이때 시작한 역사(役事)들이 많다.

그 대표적 명소가 노르만 궁(Palazzo dei Normanni)이다. 아랍인들이 지어놓은 성채를 재활용해 왕궁으로 증축했다. 1130년 루제로가 왕이 되자마자 착공해 10년 걸려 지었다. 2층에 왕실 전용 거소(居所)들의 모자이크 장식과 집기들이 이국적으로 볼 만하지만 백미는 역시 팔라티나 경당(Cappella Palatina)이다. 사실 경당(敬堂·cappella·영어의 chapel)은 개인이나 가족을 위한 사적인 예배 공간이다. 일반 신도들에게 개방하는 공공의 예배 장소인 교회가 신도들의 외경심을 일으키기 위해 위엄 있게 내외를 꾸미는 것과 달리 경당은 대개 안에 들어서면 잔잔한 감탄은 몰라도 눈이 휘둥그레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이곳은 큰 예외다. 왕의 경당임을 감안해도 유례없는 호화 성장(盛裝)이다. 들여다보면 역시 3개 문화(라틴, 그리스, 이슬람)가 혼융하는 이채로운 공간이다. 외부세력으로서 새로이 왕국을 출범시키면서 세 그룹의 핵심 토착민들을 고루 품으려는 노력의 조형적 표현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기둥머리 장식, 비잔틴의 모자이크, 아랍식의 아치 등을 두루 동원하였다. 석회동굴의 종유석(鍾乳石)을 연상시키는 천장 장식(stalactite ceiling)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유명한 알함브라 궁류(流)의 영락없는 이슬람이다. 기독교 스토리의 형상적 표현도 독특하다. 베드로나 바울의 순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등은 과감히 생략하고 승리와 기적의 얘기들만 연출했다. 중앙 후진(後陣)의 그리스도 상도 고난의 예수가 아닌 ‘최고 지배자 그리스도(Cristo Pantocratore)’의 당당한 모습이다. 군데군데 기록을 위해 새겨넣은 자구(字句)들도 모두 세 가지 언어로 동시에 표기했다. 근본을 묻지 않고 토착 신민들 모두의 눈과 머리에, 이미지로써 또 말로써 새로운 왕권의 정당성을 각인하려는 노력이 역연하다. 먼바다 항해와 낯선 땅 정복을 전문으로 하는 노르만 조상들이 해로(海路) 만 리 시칠리아에 와 사라센을 몰아낸 지 70년. 루제로의 왕국은 이렇게 야심 찬 미래를 기약했으나 두 세대 만에 직계 후손이 없어 모계인 호엔슈타우펜 집안에 왕국을 넘기고 만다.

바로크 장식으로 이름난 오라토리오

팔레르모의 테아트로 마시모. 화려한 신고전 건물은 시칠리아의 호사(豪奢) 전통을 반영한다.

노르만 궁을 나오면 지척에 에레미티(San Giovanni degli Eremiti) 교회가 있다. 아랍풍의 분홍색 돔이 눈에 띄는 비슷한 시기에 지은 교회다. 키오스트로가 예쁘고 역시 아랍인들이 각종 열대 식물로 꾸며놓은 정원이 일품이어서 쉬어갈 만한 곳이다. 인근의 두오모(카테드랄레) 역시 비슷한 시기에 지은 전형적인 혼합 양식의 건축이다. 내부는 좀 심한 개조를 겪어 18세기 신고전 양식만 남아 감흥이 덜하다. 시칠리아 왕이자 신성로마 황제이던 ‘세계의 경이(Stupor Mundi)’ 페데리코 2세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두오모를 나서면 비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Via Vittorio Emmanuelle) 큰길이다. 이 직선도로를 따라 1km 남짓 가면 옛 부두(La Cala)에 이르는데 팔레르모의 볼거리는 대개 이 길가나 혹은 그 좌우 500여m 내에 있다. 나폴리가 시역(市域)이 넓고 볼거리들이 언덕 아래위로 산재해 있어 도보로 다니기가 쉽지 않은 데 비하면 상당한 장점이다.

이쯤에서 팔레르모를 위한 변명 하나를 해본다. 나폴리도 비슷한 얘기를 듣지만 팔레르모도 오랜 세월 굳어진 메초조르노(Mezzogiorno・이탈리아 남부지방의 통칭) 공통의 부정적 평판이 있다. 전반적으로 무질서하고 상시적으로 소음이 많고 군데군데 불결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하다는 얘기다. 특히 팔레르모의 무질서와 도시 쓰레기는 괴테같이 점잖은 여행객도 한마디 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코르소(Via del Corso·포폴로 광장과 베네치아 광장을 잇는 직선도로)’ 못지않은 아름다운 길이 바람 한번 불면 쓰레기와 먼지로 가득하고…. 나폴리에서도 나귀들이 동네마다 돌며 쓰레기를 실어가던데…. 팔레르모도 무언가 방안을 내야 하는 것 아니냐?” 묻자 답 왈, “집집마다 밖으로 쓸어낸 쓰레기는 바람 없는 날엔 밖에서 썩고 바람 부는 날엔 여기저기 날아다녀…. 열심히 쓸어보았자 몽당 빗자루만 쓰레기에 추가되는 셈”이란다. 팔레르모, 나아가 시칠리아에서 요즘 말로 ‘행정의 실패(failure of public service)’는 뿌리가 깊다. 하지만 ‘실패’에 따르는 여행객의 불편들을 이내 잊게 만드는 샘솟는 매력을 아울러 갖춘 곳이다. 신화와 역사와 종교, 바꿔 말해 인류 문명에 대한 근원적 사색을 빼어난 풍광과 날씨와 음식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환대 속에 다듬어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다.

팔레르모에는 바로크 건물과 조형들이 넘쳐난다. 그중에도 팔레르모 특유의 바로크 장식으로 이름난 오라토리오(oratorio·지방귀족들의 친목과 예배를 위한 회관)들이 볼 만하다. 산 로렌초(San Lorenzo), 산타 치타(Santa Cita), 산 도메니코(San Domenico) 등이 특히 볼 만한 오라토리오들이다. 모두 팔레르모의 거장 세르포타(Giacomo Serpotta·1652~1732) 솜씨의 스투코(stucco) 장식을 자랑한다. 벽면 전체를 덮다시피 한 아기천사들의 다양한 몸짓과 분방한 움직임은 바로크 장식의 의도대로 보는 이들을 취하게 한다. 이들 오라토리오들이 모여 있는 근처에 오페라 극장 테아트로 마시모(Teatro Massimo)도 있다. 고대 신전의 외관으로 거창하게 지은 신고전 건물인데 영화 〈대부〉 3편 끝 부분의 총격 장면을 찍었던 곳이다. 이탈리아의 통일 후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통일 왕국의 새로운 판도를 순방하던 중에 이 극장을 둘러본 후 팔레르모 정도의 도시에 이런 극장이 과연 필요하냐며 몹시 의아해 했었다고 한다. ‘남쪽 사람들’의 사는 방식에 대한 ‘북쪽 사람들’의 생각을 요약한 시각이다.

몬레알레 마을

세제스타의 도리아 신전. 기원전 5세기에 이미 그리스 건축은 시칠리아 전역에서 모방되었다.

이제 어수선한 도시 분위기를 조금 비켜가 보자. 차분한 15세기 건물 아바텔리스 궁(Palazzo Abatellis)에 시칠리아 주립미술관(Galleria Regionale della Sicilia)이 있다. 중세부터 바로크까지 망라한 소장(所藏)이지만 알려진 르네상스 명품 몇 개가 역시 인상적이다. 초입의 대형 벽화 〈죽음의 승리(Trionfo del Morte)〉가 시원 섬뜩하고,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1479)의 〈수태고지 받은 성처녀(Virgine Annunciata)〉는 성처녀 얼굴 묘사에 전에 못 보던 섬세함과 친근함이 마음에 와닿는다. 인물화를 외관묘사에서 내면표현으로 끌어올린 시칠리아 출신으로는 희귀한 르네상스 화가다.

그림을 좋아한다면 좀 떨어져 있지만 19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좋은 그림들이 많은 현대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 di Pallermo)도 볼 만하다. 시칠리아 출신 미술가 위주의 지방 미술관인데도 컬렉션의 폭과 깊이 그리고 수준이 대단하다. 이탈리아의 현대미술에서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와 미래주의(futurismo)가 그저 일부임을 보여준다. 뿌리깊은 도시에 샘이 깊은 소장이다.

몬레알레(Monreale)는 팔레르모에 머무는 동안 반드시 들러야 할 교외 마을이다. 팔레르모의 ‘황금분지’를 굽어보는 경치도 그만이지만 두오모가 필수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적통 굴리엘모(Guglielmo·영어로 William) 2세가 온 정성을 기울인 역사다. 가까운 풀리아는 물론 멀리 토스카나에서까지 명장(名匠)들을 초빙해 와 짓고 꾸몄다. 피사(Pisa)의 사탑을 만든 당대의 건축가 본나노(Bonnano da Pisa)도 불려와 청동문짝을 만들었다. 두오모 내부의 벽면을 모두 덮다시피 한 모자이크 그림들과 부속 키오스트로의 아치와 조경은 다시 없을 걸작이다. 팔레르모의 노르만 궁이나 이곳 몬레알레 두오모의 모자이크 그림은 모자이크 미술의 원조인 비잔틴 본토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자이크 미술의 정수로 꼽힌다. 성경 이야기의 주요 장면들을 세심히 재현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과연 옛 사람들에게 천국의 앞마당에 와 있는 느낌을 주고 남았겠다. 훗날 십자군 원정길에 북아프리카에서 전사한 프랑스 왕 루이 9세(성루이・1214~1270)의 유해가 프랑스로 옮겨가기 전 한때 이곳에 묻혔었다.

이제 서해안부터 시작해 시계 반대방향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보자. 팔레르모를 벗어나 서해안을 향하면 1시간이 채 못 되어 세제스타(Segesta)가 나온다. 고대 엘리미(Elimi)족의 근거지로 도리아 양식의 그럴듯한 신전 하나와 극장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또한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기원전 460~395)가 “엘리미가 바로 트로이 사람들”이라고 장담하는 바람에 이들은 아이네이아스가 인솔해 온 미래 로마인의 직계 조상들로 통한다. 헬레니즘이 시칠리아 섬 서쪽까지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지척 해안의 산상마을 에리체(Erice)는 정지된 시간 속에 잠긴 듯 신비로운 분위기다. 해무(海霧)가 걷히지 않는 겨울철에는 마을 전체가 그대로 중세 아니 고대로 돌아간 듯하다. 이 일대를 거느렸던 에릭스(Eryx)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었다는 전승과 함께 마을 한가운데 아프로디테를 모시던 신전터가 남아 있다. 신전터 자리에 덧지은 노르만 시절의 성채 이름도 베네레 성(Castello di Venere)이다. 그리스 사람들의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카르타고 사람들에게는 아스타르테(Astarte), 로마인들에겐 베네레(Venere·영어로 Venus)였다.

마르살라(Marsala)는 출발이 카르타고의 해군 기지였다. 이미 이천수백 년 전부터 시라쿠사의 이름난 ‘폭군’ 디오니시우스(Dionysius), 아그리젠토의 전성시대를 이끈 티몰레온(Timoleon), ‘피해 막심한 승리(Pyrrhic victory)’의 어원(語源)을 제공해 유명해진 에피루스 왕 피로스(Pyrrhus) 등 당대 막강 병력들과 겨루었던 역전(歷戰)의 근거지다. 기원전 241년 로마에 정복된 뒤로는 카르타고 본토와 북아프리카 공략의 교두보였다. 19세기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분수령이 된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의 시칠리아 점령은 제노바를 떠나온 ‘붉은 셔츠’ 천인대(千人隊·i Mille)가 마르살라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모치아와 셀리눈테, 아그리젠토

모치아의 페니키아 유적지. 좁은 물길 건너 보이는 도시가 카르타고의 해군기지였던 마르살라다(왼쪽).
<모치아 청년상>. 페니키아의 미술 솜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오른쪽).

마르살라가 대하 서사시라면 그 앞바다 뱃길 수분(數分) 거리에 있는 작은 섬 모치아(Mozia)는 한 편의 서정시다. 모치아 섬은 기원전 8세기 소아시아의 티레(Tyre)를 떠나온 페니키아인의 오랜 근거지였다. 시라쿠사의 그리스군에 유린된 후 잊혔던 곳을 19세기 영국의 호사가 와인업자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휘태커(Joseph Whitaker)가 ‘발견’했다. 친구였던 슐리만(Heinrich Schliemann·1822~91·당시 트로이 유적지 발굴)이 방문해 페니키아 유적지임을 직접 확인해 준 곳이다. 유적지 안의 네크로폴리스에는 바알-하몬(Baal-Hammon)을 모시던 유대계 신전터까지 있어 고고학자들에게는 필수 방문지다. 휘태커가 살던 빌라는 현재 박물관인데 지난 1979년 발견된 〈모치아 청년상(Giovane di Mozia)〉을 각별히 자랑스러워한다. 과연 한눈에 보아도 명품인 실물 크기 대리석상인데 흔히 보는 그리스 조각상들과 솜씨는 비슷하나 얼굴 표정, 의상 표현, 신체 포즈 등에 자못 독특함이 느껴진다. 페니키아-카르타고 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올 만한 물건이다.

다시 육지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마차라 델 발로(Mazara del Vallo)는 오랜 어항(漁港)이다. 마을 자체가 각별히 예쁘고 시칠리아 기준(?)으로는 정돈된 마을이라 일부러 들러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여기에도 덤이 없지 않다. 최근(1998년) 앞바다에서 어부들이 엄청난 물건을 하나 건져 올렸다. 고대 그리스의 청동 조각상 <춤추는 사티로(Satiro Danzante)>(사티로는 말의 모습을 한 디오니수스의 친구). 별도의 공간(‘사티로 박물관’)에 모셔놓았는데 워낙에 명물이라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이란 설이 우세하다.

셀리눈테의 ‘신전 G’. 황성옛터의 처연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셀리눈테(Selinunte) 유적지는 마차라에서 가깝다. 시칠리아 섬 동남부에 주로 정착했던 그리스 공동체의 서부 최전방 도시였다. 세제스타의 엘리미와 마르살라의 카르타고를 최전선에서 감당하면서도 인구 8만의 번성한 도시로 200년 번성을 구가했다. 결국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의 맹렬한 공격에 지진까지 겹쳐 지도상에서 사라졌고 19세기에 와서야 발굴이 이루어졌다. 세제스타와 달리 온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폐허의 규모가 우선 놀랍고 폐허 된 모습이 처연하기 그지없다. 누구를 모셨던 신전인지조차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무너져 모든 신전터는 알파벳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그중에도 ‘신전 F’와 ‘신전 G’는 폐허의 정의(定義)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모습이다. “마치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이 쌓여 있듯 포개지고 널려 있는 기둥조각과 돌 무더기들”(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은 무릇 모든 것이 망하면 이렇게 되겠지 싶은 바로 그 전형이다. 굳이 분류하고 배치한다는 것이 오히려 무의미한 모든 것이 일목에 요연한 야생 박물관이다. 사람의 죽음을 장렬하다 하면 도시의 죽음은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아그리젠토의 콘코르디아 신전의 깨끗한 모습. 주변에 야외 조각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그리젠토(Agrigento)는 고대 그리스 도시 아크라가스(Akragas)이던 시절부터 그 환상적인 입지와 아름다운 신전들로 찬사를 듣던 곳이다. 배후의 바위절벽과 바다 사이의 길고 널찍한 언덕 마루를 따라 요소마다 신전들이 하나씩 서 있다. 과연 흔치 않은 광경이다. 제우스 신전(Tempio di Zeus Olimpio)도 그 대단한 규모로 유명하지만 역시 콘코르디아 신전(Tempio della Concordia)이 일학(一鶴)이다. 보존 상태도 완벽하고 우아한 미가 독보적이다. 종래의 우람한 거인숭배 건축을 탈피해 비로소 신(神)을 편안히 모시기에 적합한 아름다움에 이르렀다는 찬사가 붙어다닌다. 패스툼(Paestum)의 헤라 신전이 필적하나 섬세한 아름다움에서는 콘코르디아가 한 수 위라는 평가다. 괴테가 와서 보고 과연 빙켈만(J.J. Winckelmann)이 고전미의 조건으로 얘기했던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탄복했던 그 신전이다.

엔나, 아르메리나, 아이도네

카살레 빌라 유지(遺址)의 모자이크화. 분방한 소재와 표현이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이제 잠시 해안을 벗어나 섬의 중원을 몇 군데 둘러보자. 엔나(Enna)는 지리적으로 시칠리아의 정중앙이다. 이탈리아 전역에 산상 마을이 많지만 특히 우뚝한 위풍이 있다. 근처 봉우리마다 자리 잡은 대소 산상 마을들을 보조함으로 거느린 모함(母艦)의 모습이다. 어느 건물을 특정할 것 없이 마을 전체가 중세로부터 그대로 옮겨온 느낌이다. 마을 한편에 호젓한 롬바르디아 성(Castello di Lombardia)은 이름에 있는 롬바르드 이후 뭇 종족들이 거쳐갔다. 시칠리아에 대한 ‘주인의식’이 각별했던 루제로와 페데리코가 예외일 수 없다. 성채에 올라보니 주위경계라는 중세의 군사목적과 일망무제의 절경이라는 요즘의 관광목적에 고루 부합함을 알겠다. 맑은 날에는 에트나 산은 물론 시칠리아 전역이 해안까지 보인다고 한다.

심심산골이지만 근처에 흥미로운 마을 두 곳이 있다. 피아차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와 아이도네(Aidone). 각각 고대 모자이크 장식이 유명한 로마 후기 호화 빌라(Villa Imperiale del Casale)의 유지(遺址)와 최근 미국의 폴게티 박물관으로부터 회수한 ‘도난 미술품’ <모르간티나 비너스(Morgantina Venus)>가 있는 곳이다. 기원 3~4세기에 지어진 카살레 빌라를 장식한 현란한 모자이크 그림들은 미술사책에도 많이 소개된 볼거리다. 헤라클레스, 큐피드 등 신화 얘기부터 야생 사냥, 젊은 여인들의 공놀이 등 일상적 소재에 이르기까지 분방하게 묘사해 놓았다. 산골 한가운데 대단한 규모요 이례적인 화려함이어서 다름 아닌 막센티우스 황제 집안의 빌라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막센티우스는 제국의 1인자 자리를 놓고 콘스탄틴 황제와 겨루다가 로마의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패퇴한 이다.

모르간티나는 아이도네 마을의 전사(前史)시대 유적지 이름이다. 지난 70년대 이곳서 도굴된 장려우미(壯麗優美)한 비너스 입상이 198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폴게티 미술관에서 ‘발견’되었다. 그 후 오랜 외교적, 사법적 그리고 과학적(석회암 성분조사 결과) 논란이 이어졌다. 곡절 끝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드디어 2011년 이탈리아 통일 150주년을 맞아 아이도네 시에 반환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언론과 아이도네 사람들의 흥분은 대단했다. 앞서 모치아나 마차라에서 본 조각상들 못지않은 아름다움에 어려웠던 반환 과정의 사연이 겹쳐 모르간티나 비너스는 동반 반환된 예술품들과 함께 일시에 유명 볼거리가 되었다.

아이도네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시칠리아 제2의 도시이자 작곡가 벨리니(Vincenzo Bellini·오페라 <노르마>로 유명)의 고향인 카타니아(Catania)를 지나면 바로 시라쿠사다. 시라쿠사는 이오니오 바다(Mare Ionio)를 건너온 그리스 이민들이 2700년 전에 건설한 도시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단을 포함하는 그리스의 해외 광역 식민지인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중심도시였다. 시칠리아의 풍요로운 물산과 티레노 바다로 들어가는 메시나 해협을 지켜선 전략적 위치에 힘입어 일찍부터 번영의 기초를 닦고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 등 본토의 도시들과 전쟁해 이긴 일들은 18세기 미·영 간의 관계와 비교되기도 한다. 시라쿠사가 당시의 뉴욕이라면 구시가지가 위치한 섬 오르티자(Ortigia)는 맨해튼이었다. 오르티자 안팎에 27세기에 걸친 시라쿠사의 역사가 그대로 느껴지는 현장들이 아직도 관심 있는 여행객들을 맞고 있으니 대단한 일이다.

시라쿠사의 두오모 광장. 왼편이 두오모이고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산타루치아 교회다.

두오모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고대 아테나(Athena) 신전터의 남은 골조를 활용해 빈 공간을 채우는 식으로 7세기에 지은 초기 교회다. 이미 신전이던 시절부터 그리스는 물론 소아시아의 에페소,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까지 알려져 전 지중해에 유명한 건물이었다. 그 후 로마가 신전을 증축했고 비잔틴 시절인 7세기에는 교회로 아랍인들이 왔을 때는 일부 개조해 모스크로 쓰였다. 노르만 왕조 때 측랑(側廊)의 경당들을 증설하고 천장을 높였다 하니 이때가 근 천 년 전이고 보면 오늘의 우리는 대개 중세 현재 모습의 건물을 보고 있는 셈이다. 시칠리아의 역사가 이 건물 하나에 축약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모든 과정별 자취가 구분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신전 시절의 두꺼운 도리아 기둥이 그대로 교회 벽면의 일부가 되어 이천오백 년 지난 오늘에도 화석처럼 뚜렷한 것은 가슴 울렁이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두오모 광장(Piazza Duomo) 자체가 이탈리아의 수많은 구도심(舊都心) 광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기막힌 그림 두 점이 두오모 언저리에 숨어 있다. 광장 한편 산타 루치아 알라 바디아(Santa Lucia alla Badia) 교회의 제단화가 카라바조의 <성 루치아의 매장>이다. 산타 루치아는 시라쿠사의 수호성인으로 기원 304년 이곳에서 순교했다. 음습한 분위기에 등장인물들이 생동하여 보는 이도 매장 현장에 함께 선 느낌이다. 인근 말타(Malta) 섬에서 탈옥(脫獄)한 카라바조가 시칠리아로 도망와 파란의 생애 말년에 남긴 명작이다. 광장 뒤편의 소담스런 중세 저택 벨로모 궁(Palazzo Bellomo)에 자리한 주립미술관에도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팔레르모의 아바텔리스 미술관에서 만나보았던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다.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의 프라 안젤리코가 수태고지 그림의 전범을 세운 지 불과 한 세대 만에 안토넬로가 이룬 성과가 약여(躍如)하다. 이제 성모와 가브리엘레 수천사는 엄청난 순간에 긴장하기보다 기쁜 소식을 주고받는 곱기만 한 모습이다.

타오르미나

노토 건물의 바로크 장식. 창문과 발코니, 발코니를 받치는 코르벨까지 바로크 치장이 현란하다.

오르티자 섬의 끝에 자리한 마니아체 성(Castello Maniace)은 군사적 요충의 의미를 직감할 수 있는 곳이다. 1234년 페데리코 2세 때 세웠다 하나 고대 이래로 비슷한 기능을 했을 자리다. 성 위에 올라보니 과연 이오니오 바다를 한눈에 내다보며 메시나 해협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음을 알겠다. 오르티자에서 육지로 건너와 멀지 않은 고고학 공원도 시라쿠사의 필수 코스다. 통짜 바위산을 쪼고 깎아 만든 1만5000명 수용 규모의 극장(Teatro Greco)은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悲劇) 작가로 떨치던 아이스킬로스(Aeschylus)가 초연(初演) 장소로 애용했다는 곳이다. 기원전 3세기 ‘폭군’ 히에론(Hieron) 시절 지었다는 제단은 그 길이만 200m에 달하는데 하루에 황소 450마리를 희생우(犧牲牛)로 바치는 규모였다고 한다. 당시 시라쿠사가 아테네에 비견되고 또 대적했다는 얘기를 수긍가게 하는 물증들이다. 지중해 한복판에서 여러 백 년을 풍미한 시라쿠사도 로마의 천하통일이라는 대세를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기원전 3세기는 로마가 카르타고 세력은 물론 마그나 그라에키아 전역을 평정한 세기였다.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는 로마의 말 발굽 아래 역사적 종언을 고했고, 시라쿠사 태생으로 고대 최고의 수학자이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기원전 287~212)는 그 와중에 희생된 저명인사였다.

시라쿠사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일군의 바로크 도시들이 있다. 1693년의 대지진으로 일대의 40여 개 도시가 일순에 폐허로 변한 것을 당시 패션이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다. 로마의 바로크라고는 얘기만 들어본 지방 건축가들이 앞장서서 특유의 ‘시칠리아 바로크(barocco siciliano)’를 탄생시켰다. 그중에도 노토(Noto)가 유명해 ‘돌로 만든 정원(il giardino di pietra)’이란 별명을 얻었다. 재료도 전부 조형이 손쉬운 토산의 꿀빛 석회암을 사용했고, 바로크 양식이 개발한 모티프(motif)들과 장식을 총동원해 건물이 주는 극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옆으로 출렁이고 위로 솟는 형상의 건물들이 다투어 벌이는 바로크의 향연이다. 가히 바로키시모(barocchissimo·barocco의 최상급)다. 건물이 요란한 데 비해 마을은 고요하다. 이 묘한 대조는 1960년대 이탈리아 영화 중흥에 한몫을 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1912~2007) 감독의 화제작 〈모험(L’Avventura)>(우리나라에는 ‘정사’라는 제목으로 개봉)에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로마의 바로크가 가톨릭 권력의 과시라면 시칠리아의 바로크는 자연의 분노에 대한 조형적(造形的) 항의이지 싶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지만 타오르미나(Taormina)를 보지 않고서야 시칠리아를 떠날 수 없다. 사람들이 여행지에 다녀와 품평할 때 흔히 벤치마크로 삼는 것이 자신의 ‘방문 전 인식’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못 하다”느니 “사진으로 본 것이 훨씬 낫다”는 유의 평가들이다. 이런 개연성에 대비한 보험상품이 있다면 성공할 곳 중의 하나가 타오르미나다. 이오니오 푸른 바다가 그대로 이어져 눈 덮인 에트나의 완만한 능선이 되고 이를 배경으로 선 옛 극장터(Teatro Greco)의 기둥과 무너진 벽들 사이로 비끼는 석양빛을 보며 무슨 트집을 잡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공(人工)의 고전이 자연의 고전 속에 완벽한 일부로 동화되는 순간이고, 사진을 따로 찍을 것도 없이 그 순간은 머릿속에 또 가슴 속에 그대로 새겨져 남는다.

돌이켜보면 시칠리아가 가장 번성했던 때는 시칠리아를 사랑한 군주들이 시칠리아에 머물러 살며 지키고 통치했던 기간뿐이었다. 페데리코 황제의 역사적 유산들이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테 4세의 주선으로 프랑스 앙주가에 넘어간 13세기 후반부터 시칠리아의 운세는 내리막을 걸었다. 15세기에는 아라곤 왕국의 일개 지방이 되었고 이후 스페인 총독과 스페인 보르보네(Borbone)가의 왕들이 베푸는 신통찮은 통치 아래 역사발전의 뒷전으로 물러앉았던 것이다. 1860년 이탈리아의 통일운동 막바지에는 가리발디가 이끄는 불과 천 명의 민병대에 접수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시기 세상 바뀌는 과정을 시칠리아 토착 귀족의 시각에서 서늘하게 그린 소설이 있다. 토마시 디 람페두사(Giuseppe Tomasi di Lampedusa·1896~1957)의 《표범(Il Gattopardo)》. 이탈리아 말로 된 현대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다. 사라진 또 사라져 가는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가슴 저린 기록이다. 역사가 기록하고 남은 여백은 역시 문학의 몫이다. 문학이 이런 역할을 해주니 시칠리아에 대한 상련(相憐)의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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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이탈리아 ⑧ 시칠리아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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