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세계사의 驚異’ 노르만 紀行 ②

노르만, 南이탈리아를 정복, ‘태양의 왕국’을 세우다!

  •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오트빌 家門의 노르만 戰士들이, 傭兵으로 왔다가 교황을 포로로 잡고, 남부 이탈리아를 통일, 유럽의 가장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시실리 州島 팔레르모 근교에 12세기 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리던 노르만 왕이 건설한 ‘몬레알레’ 대성당과 수도원. 노르만-아랍 혼합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서기 900년대 초,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명화하여 유럽 최강의 기사(騎士)집단이 된다. 해적질을 하던 이들이 기마(騎馬)전술을 발전시켜 보병 중심의 다른 군대를 눌렀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公國)의 윌리엄 공(公)은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왕을 전사(戰死)시키고 대승(大勝), 그해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윌리엄 정복왕과 노르만 후손들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영국을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든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은 영어와 불어(佛語)를 결합시켜 오늘날 영어가 세계 최고의 언어가 되는 길도 열었다.
 
  이보다 먼저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노르만 전사들의 정복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1017년부터 본격화된 정복은 1130년 루제로 2세(영어로는 로저 2세)가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통일,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100여 년이 걸렸다. 이렇게 세워진 시칠리아 왕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가 된다. 바이킹의 피를 받은 소수의 노르만 전사들, 특히 오트빌(노르망디의 촌락) 출신 탄크레드 가문(家門)의 형제들이 지중해 문명의 심장부를 정복해 간 이야기는 삼국지처럼 흥미롭다. 유럽에서도 최근에 와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대목이다.
 
  11세기를 전후한 이탈리아 남부는 교황, 비잔틴, 신성로마제국, 롬바르디(이탈리아 북쪽), 아랍 세력이 각축하면서 여러 도시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었다. 노르만 전사들은 처음엔 용병으로 봉사하다가 나중엔 권력을 찬탈하는 방식으로 야금야금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점령해 가기 시작하였다.
 
  *999년: 노르만 전사들이 나폴리 남쪽의 도시국가 살레르노를 사라센 해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용병으로 나타난 것이 100여 년에 걸친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의 시작이다.
 
  *1017년, 이탈리아 동해안 몬테가르가노의 미카엘 천사 성소(聖所)를 노르만 순례자들이 참배할 때 바리의 롬바르드족(族) 영주 멜수스가 그들을 설득, 아풀리아를 다스리던 동로마제국(비잔틴)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노르만 전사들은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용병(傭兵)으로 고용되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046년: 오트빌 가문의 로버트 기스카르가 남이탈리아로 와서 먼저 온 형제들과 함께 정복사업에 나서는데, 분열되었던 남(南)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주역(主役)이 된다. 노르만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세력들이 1053년에 반(反)노르만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서로 적대적이던 교황, 비잔틴, 롬바르드 세력, 신성로마제국은 일단 노르만의 득세(得勢)를 꺾어야 한다는 데는 공감(共感)한다.
 
 
  노르만이 교황을 포로로 잡은 시비타테 決戰
 
타오르미나 근처의 山城 앞에 선 필자. 이 산성은 12세기 경 노르만이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만들었다.
  1052년 교황 레오 9세는, 독일로 가서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원군(援軍)을 요청, 약 700명의 스와비아 보병을 얻어 돌아왔다. 1053년 6월 레오 9세는 직접 연합군을 이끌고 노르만 타도에 나선다. 교황 측 연합군은 약 6000명이었다. 보병이 다수고 기병이 보조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이탈리아 인이 중심이었다. 노르만 전사들도 단결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각자 정복사업을 벌이던 세 사람이 뭉쳤다.
 
  탄크레드와 첫째 부인 사이에서 난 험프리(아풀리아 영주), 둘째 부인 사이에서 난 로버트 기스카르, 아벨사의 영주가 되어 있던 리처드는 약 3000명의 기병과 500명 정도의 보병을 편성했다. 이들은 교황 군대가 비잔틴 제국의 원군과 만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조기(早期) 공격을 결단했다. 노르만 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으면서 전투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은 교황에게 반기를 든 적이 없으므로 협상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053년 6월 18일 양쪽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 시비타테(Civitate)라는 들판에서 마주 섰다.
 
  노르만 군은 우익(右翼)에 중무장 기병, 가운데는 말에서 내린 기병과 궁수(弓手), 왼쪽에 기병과 보병 혼합군을 배치했다. 교황 연합군은 왼쪽에 이탈리아 부대, 오른쪽에 스와비아 보병을 두었다.
 
  노르만이 선공(先攻)했다. 우익의 중무장 기병이 교황 측의 이탈리아 보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보병은 압도적인 노르만 기병의 돌격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추격 섬멸전이 전개되었다.
 
  노르만의 중군(中軍)은 교황군의 스와비아 보병과 격돌했다. 스와비아 보병은 큰 칼을 잘 썼다. 사람을 세로로 양단(兩斷)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르만 중군은 스와비아 보병들의 철벽 같은 방어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격을 당해 수세(守勢)로 몰렸다. 이때 이탈리아 보병들을 추적하던 노르만의 중무장 기병이 섬멸전을 끝내고 돌아와 배후에서 스와비아 군(軍)을 쳤다. 스와비아 군은 양면(兩面) 공격으로 붕괴, 노르만 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만 군은 교황이 머물던 시비타테 성문(城門)에 도착,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복하면 봐주고 저항하면 주민들까지 몰살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일어난 사태에 대해선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교황이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나가 항복,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민들이 살기 위하여 교황을 성문 바깥으로 내몰았다는 설이다.
 
 
  루제로의 시칠리아 정복
 
  노르만 군대는 교황을 베네벤토로 데리고 가서 아홉 달 동안 연금(軟禁)했다. 나중에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선봉이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노르만은 교황에게 사과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여러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구원군을 보내 줄 것이라 믿고 버티었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교황은 마침내 굴복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임을 승인한 것이다. 레오 9세는 풀려난 뒤 곧 죽었다. 1059년 다른 교황 니콜라스 2세와 로버트 기스카르는 멜피(Melfi) 조약을 맺고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공인(公認)했다. 기스카르를 아풀리아 공, 카라비아 공, 시칠리아 백(伯)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노르만 세력은 교황 편에 선다. 교황의 옹립에도 간여하였다. 당시 교황들은 내부 개혁(신부의 금혼·禁婚 등)을 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맞서는데 노르만이 여기에 힘을 실으면서 역사의 대세(大勢)를 탔다.
 
  시비타테 전투는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처럼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각개 약진하던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기스카르 중심으로 통합된다. 그의 동생 루제로가 시칠리아까지 정복하고 그의 아들 루제로 2세가 나폴리 남쪽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통일한다. 1130년 루제로 2세는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 공인받았다. 이 왕국은 나중에 지배자와 이름은 바뀌지만(마지막엔 나폴리 왕국), 700년간 존속되었다.
 
 
  아말피 해안
 
나폴리 근방 아말피는 10세기 무렵 피사, 제노바, 베니스와 함께 4대 해양 公國이었다. 지금 이탈리아 해군 깃발은 이 네 도시국가의 紋章을 합성한 것이다. 아말피는 절벽면을 수평 공간처럼 활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미로를 만들어 사라센 해적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이탈리아에서 나의 노르만 기행(紀行)은 로마에서 출발, 라벨로, 아말피, 살레르노, 나폴리, 시칠리아(타오르미나, 노토, 시라큐스, 팔레르모 등)의 경로로 이뤄졌다. 노르만 전사들이 정복하고 통치하면서 남긴 흔적들이 성당, 성, 탑, 모자이크, 전설로 남아 있는 곳이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도로의 왼쪽은 봄에도 눈이 덮인 산맥이 같이 뻗어 있다. 한 시간쯤 지나 높이 500m 쯤의 산꼭대기에 사진에서 많이 보아 친숙한 수도원이 나타났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 6세기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의 본산이다. 9세기에 사라센 해적의 공격을 받아 황폐해진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노르만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1071년에 재건되고 알렉산더 2세 교황에 의하여 헌납되었다. 당시 수도원 건축엔 비잔틴 기술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몬테카시노는 신학 연구와 영적(靈的)인 권위로 하여 교황청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058년 당시 수도원장인 데시데리우스는 나중에 빅토르 3세 교황이 되는데 약 200명의 수도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노르만 세력은 이 수도원을 후원했고 수도사 아마투스는 노르만에 아주 호의적인 기록을 남겼다. 1944년 2월 15일 미군은 독일군이 숨어 있다고 판단, 이 수도원을 폭격했는데 독일군은 없었고 수백 명의 피란민이 죽었다. 전후(戰後) 수도원은 재건되었다.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베수비오스 산, 폼페이 유적, 소렌토 만, 카프리 섬, 아말피~살레르노 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의 결합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나폴리의 겉만 보고는 혹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들여다본 뒤엔 겸허해진다. 폼페이 유적을 구경한 다음 산을 넘어 아말피 해안으로 가는 길은 절벽과 협곡을 지난다. 아말피 해안 뒷산에 있는 라벨로라는 작은 산중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아말피의 해안 경치가 세계 최고라고 평한 사람은 이곳에서 살았던 미국의 소설가 고어 비달이었다.
 
  해안절벽을 깎아 세운 아말피는 10세기 전후 이탈리아의 4대 해양도시(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이 도시도 12세기 초에 나폴리와 함께 노르만의 지배로 들어갔다. 14세기의 지진으로 도시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이 그림 같은 도시의 중심에 있는 성당은 노르만-아랍 혼합의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다. 노르만 전사들이 이 도시를 점령한 뒤 세웠다. 아말피~살레르노 해안도로는 S자 연속의 단애(斷崖) 위를 달린다. 굽이를 돌 때마다 ‘이 순간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만 건축의 대표작인 살레르노의 성당도 로마네스크 건축인데, 56m의 종탑이 유명하다. 아랍과 비잔틴 기술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엔 중세의 가장 위대한 개혁적 교황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레고리 7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왜 로마가 아닌 살레르노에 묻혔는가?
 
 
  교황과 황제의 갈등
 
  11~12세기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로마의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종교적 수장인데, 세속(世俗)권력 면에서도 힘을 쓰고 싶어했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전역(全域)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主敎)들은 영주(領主)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황 입장에선 세속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성직(聖職)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파(派)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주교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 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이라야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로버트 기스카르가 지휘하는 노르만 전사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공인해 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갈 때 교황청의 실력자는 친(親)노르만 성향의 힐데브란드(나중에 그레고리 7세)였다. 그는 윌리엄의 로비를 받고는 교황을 움직여 잉글랜드 왕 해롤드를 파문(破門)했다. 파문 이유는 해롤드가 윌리엄에게 했던 약속(왕위 양보)을 깼다는 것이지만, 실제론 윌리엄 공이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면 교황에게 절대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고, 세속적 영향력의 확대를 노린 교황청의 계산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해롤드는 자신이 파문된 사실을 알고 크게 상심(傷心), 결전 날에는 아주 소극적인 지휘를 하다가 전사하였다. 왕이 파문되면 그에게 충성하는 부하들도 같은 벌을 받게 된다. 해롤드는 자신이 파문당한 사실이 부하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서둘러 결전의 날을 잡았다는 해석도 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정복이 성공한 이후엔 교황청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대동단결(大同團結)의 전통이 강한 노르만 전사들은 교황을 이용하는 데 익숙했고 파문도 겁내지 않았다.
 
 
  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굴욕.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아래)는 교황 그레고리 7세(왼쪽)에게 무릎을 꿇었다. 오른쪽은 그레고리 7세의 동맹자였던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데.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여러 교황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실력자 역할을 했다. 힐데브란드로 불린 그는 특히 노르만 전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베르사의 리처드가 제공한 300명의 노르만 전사들을 지휘, 베네딕트 10세 반대 교황(antipope)을 몰아내고 니콜라스 2세를 등극시킨 것도 그였다. 1061년 알렉산더 2세를 교황으로 선출할 때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75년 그레고리 7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남독일의 친교황 측 영주들이 들고일어나, 기한(期限)을 정하여 그 안에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廢位)하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북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적의(敵意)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재고(再考)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하인리히를 황제로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황제는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꼭두각시 교황을 세웠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사투(死鬪)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했고, 교황은 로마 내의 요새인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 저항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기스카르가 지휘하는 노르만 원군이 도착, 황제군은 저항도 하지 않고 로마에서 물러갔다. 로마를 탈환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 군이 철수할 때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 군을 따라나섰다. 그는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 위대한 개혁 교황은 죽은 뒤 살레르노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성당은 1076년에 로버트 기스카르가 기공, 1084년에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봉납되었다. 살레르노 대성당의 그레고리 7세 묘비명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였고 부정을 미워하였으므로 망명 중에 죽는다’이다.
 
 
  無法者들이 法治와 문명을 건설하다
 
  하인리히 4세도 승자(勝者)가 아니었다. 친교황 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 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왕권(王權)을 강화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가운데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 ‘시칠리아 왕국’을 만든 노르만 전사들은 유능한 행정가로 변신, 이 왕국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비잔틴과 아랍 사람들에게 종교와 통상(通商)의 자유를 허용하고, 문화와 예술 진흥의 후원자가 되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통일하는 데는 100여 년이 걸렸는데, 마무리를 한 이는 로버트 기스카르, 그의 동생 루제로 1세, 그의 아들 루제로 2세였다. 기스카르는 한때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까지 공략, 비잔틴을 정복하려고 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전성기엔 북아프리카도 점령했다. 기스카르의 아들과 윌리엄 정복왕의 아들은 1차 십자군의 선봉이었다. 노르만 전사들은 전투의 귀신이었지만 통치의 달인(達人)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남부에 남아 있는 수많은 노르만-로마네스크 식 성당, 궁전, 성, 모자이크 등이 이들의 예술적 안목과 지배자로서의 수준을 보여준다. 서기 800년경에 시작된 바이킹의 해적질과 약탈은 서기 900년경부터는 노르만 시대로 넘어갔다. 노르망디에서 실력을 쌓은 전사집단은 정복사업에 나서,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王朝)와 시칠리아 왕국을 거의 동시에 탄생시켰다. 문명파괴로 시작한 바이킹 시대는 노르만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건설로 마무리된다. 유럽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던 그들이 법치를 발전시킨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위대한 역전(逆戰)이었다.
 
 
  시칠리아를 거쳐간 민족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한국에서 교과서로 알았던 역사와 현지에서 알게 되는 역사가 달라 혼란에 빠진다. 이탈리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문명(文明)-로마와 르네상스의 고향이지만 현재의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는 1861년에 반도가 통일되면서 건국(建國)됐으니 매우 젊다. 서기 5세기에 서(西)로마가 무너진 후 19세기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한 국가나 왕조(王朝)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여러 왕국(王國)과 공국(公國)과 도시국가, 그리고 교황 직할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상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외세의 침략과 개입을 불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이 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는 11~12세기 노르만의 원정으로 세워진 나폴리 왕국이었다. 로마 남쪽의 반도와 시칠리아를 다스린 나라였다. 이 왕국의 수도는 초기엔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나중엔 나폴리였다. 11세기 이후 ‘시칠리아 왕국’,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불렸다.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는 고대 문명이 꽃핀 그리스, 이집트, 중동, 지중해와 인접하여 늘 유럽 문명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진주’ 같은 시칠리아는 여러 번 다양한 민족과 문명이 거쳐 가고 섞이고 쌓인 곳이다. 시칠리아 여행을 하면 장대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명멸(明滅)해 갔던, 여러 민족이 남긴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경탄하면서 역사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게 된다.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시칠리아에 건너와 동쪽에 시라쿠사 등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북안(北岸, 지금의 튀니지)에 살던 카르타고 인(人)들도 몰려와 서쪽에 정착하였다. 시칠리아의 주도(州都)인 팔레르모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로마의 결전인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칠리아는 로마 지배로 넘어갔다. 시칠리아는 지금이나 그때나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량이 많았다. 5세기, 서로마제국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라인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침범한다. 게르만족의 선두 주자 반달족, 고트족이 이 섬을 점령하고 약탈하더니 6세기엔 지금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동(東)로마제국(비잔틴)이 시칠리아를 기독교권으로 탈환하였다. 9세기 초부터는 중동(中東)을 석권한 사라센(이슬람 세력)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이 섬을 공략하기 시작, 827년엔 팔레르모를, 878년엔 시라쿠사를, 902년엔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전도(全島)를 이슬람화한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공업을 장려, 시칠리아는 중세(中世)암흑기에도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부터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 인들의 시칠리아 공략이 시작된다.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은 설명한 대로이고, 수십 년 앞서 노르망디 오트빌 가문(家門)의 전사(戰士) 집단이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를 공략하였다. 이들을 이끈 루제로 2세가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 왕 및 캄파니아(이탈리아 남부) 공(公)으로 공인(公認)된 것은 1130년이었다. 그는 시칠리아 왕국을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노르만의 팔레르모
 
노르만 전사들을 이끌고 시칠리아를 정복한 루제로2세.
  바이킹 사람들이 그렇듯이 노르만 지배세력도 여러 종교, 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 바탕에서 실력 위주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며, 관용적인 통치를 했다. 이슬람과 기독교도가 공존하고 아랍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과 유대인들까지 시칠리아 왕국에선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노르만이 팔레르모를 점령한 1072년부터 프랑스 앙주가가 시칠리아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1268년까지의 약 200년간은 노르만 세력의 지배 기간인데, 당시 유럽의 가장 역동적인 문명국가는 프랑스와 시칠리아였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조는 세계사에서 굵게 기록되는 두 명의 명군(名君)을 배출하였다. 루제로 2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페데리코 2세 황제(半노르만·半독일 계).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의 지중해 세계》(한길사)에서 노르만인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시칠리아를 탈환한 이후 취한 점령 정책을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노르만 정복왕) 루제로는 패배자가 된 아랍 유력자들과 그 가족을 죽이지도 않았고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남이탈리아 내륙지방에 땅을 주고 농장주로서 살게 했다. 아랍인 병사들을 노르만-시칠리아 군에 편입하였다. 아랍의 학자도, 상인도, 기술자도 농장경영자도 남았다.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며 공생(共生)하는 사회가 실현된 것이다. 오랫동안 사라센 해적에게 피해를 본 남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의 북쪽 끝에서 온 노르만 사람들에게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원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랍인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이 시기의 팔레르모를, <팔레르모만큼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가득 찬 도시는 없고, 팔레르모의 정원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고 칭송했다. 북(北)유럽의 야만인이 지중해의 문명인이 된 것이다.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한 노르만 전사들이 세운 시칠리아 왕국은 수도를 팔레르모로 정했다. 역사적 권위가 느껴지는 이 도시는 마피아가 내부 규율을 잡아서 그런지 소매치기 등 좀도둑의 준동이 덜하다고 한다. 팔레르모 오페라 극장에 가서 베르디의 ‘나부코’를 구경하였는데, 정장을 하고 온 상류층의 인상은 이탈리아라기보다는 북구(北歐)나 독일 분위기였다. 사람들의 몸이 크고 금발이 많았다. 노르만의 혈통을 받은 이들이 아직도 상류층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두 성당의 전투
 
  팔레르모엔 노르만 양식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 궁전 안에 있는 예배당의 화려한 모자이크, 팔레르모 성당과 몬레알레 성당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서양 미술사에 늘 기록되는 문화유산이다. 이 세 곳을 다 둘러본 인상은 개방, 육중, 다양(多樣), 그리고 관용과 풍성함이다. 가톨릭이 노르만, 비잔틴, 아랍 양식과 융합된 덕분이다. 이는 피정복자들을 그렇게 다스렸던 노르만 사람들의 성격을 반영한다. 노르만식 강건함과 지중해식 화려함이 조화를 이룬다.
 
  팔레르모 성당은 노르만 왕조 시절인 1184년에 기공된 이후 700년간 증·개축을 이어 갔다.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고딕, 스페인, 이슬람, 바로크, 신고전주의 양식이 더해졌다. 건축사의 흐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성당이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은 하나가 원칙인데 팔레르모엔 두 개가 있다. 팔레르모 성당과 근교의 몬레알레 성당. 팔레르모 성당의 대주교는 교황의 지원을 받아 노르만 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노르만 왕은 그를 견제하기 위하여 몬레알레 성당을 따로 지었다. 이를 ‘두 성당의 전투’라고 부른다.
 
  팔레르모 성당엔 노르만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던 루제로 2세, 그의 딸 콘스탄스, 그의 남편 하인리히 4세(신성로마제국 황제), 두 부부의 아들 페데리코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무덤이 있다. 석관(石棺)앞에 서면 12세기 전후 유럽 역사를 대표하는 노르만 계통의 두 명군(루제로 2세, 페데리코 2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르네상스적 인간형이었다.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고, 종교적 차별을 거부하였으며, 법치를 세우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주로 교황권과 맞섰다.
 
 
  가톨릭과 이슬람과 비잔틴을 융합한 노르만 예술
 
  팔레르모 시내 한복판에, 루제로 2세가 12세기에 지은 요새형 궁전이 있다. 주(州)청사로 쓰이는 이 건물은 시칠리아 지배층의 역사를 이어간다. 카르타고-로마식 요새 터 위에 아랍 인들이 자신들의 요새를 세웠고, 노르만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자 그 요새를 넓히고, 화려하고 육중한 궁전을 올린 것이다.
 
  이 건물 안에 ‘궁전 예배당’(Cappella Palatina)을 지어 봉납한 이는 루제로 2세였다. 코린트식 화강암 기둥에 의하여 세 신랑(神廊)으로 구분된 성소(聖所)의 벽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눈부시다. 금박(金箔) 배경에다가 비잔틴 양식의 이미지와 아랍 양식의 디자인으로 성경 이야기를 표현하였다. 한 지붕 안에서 당시 유럽의 3대 세력이었던 이슬람, 가톨릭, 비잔틴의 문화와 종교가 융합하고 조화를 이룬 점에서 예술의 목표를 다한 건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루제로 2세와 페데리코 2세가 이 궁전의 주인공이었을 때 팔레르모는 유럽에서 가장 자유롭고 번영하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영속(永續)되지는 못했다. 지배층이 앙주, 아라곤, 스페인으로 바뀌면서 노르만 식 개방과 관용의 문화가 사라져 갔고 이는 시칠리아의 오랜 쇠락을 뜻했다. 노르만 지배층은 우수한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뿌리를 내리게 할 중심 세력이나 사회적 토양이 없었다. 반면 잉글랜드에선 노르만 정복자들이 프랑스의 선진된 제도를 가져와서 토착 앵글로-색슨족(族)의 제도와 융합시키는 데 성공, 노르만의 우수성이 이어질 수 있었고, 대영(大英)제국의 번영으로 결실을 맺었다.
 
  팔레르모 근교 산록(山麓)에 있는 몬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리에모 2세(영어론 윌리엄 2세)가 세운 것이다.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13세기 말에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굴리에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 기간이 단축되었다.
 
 
  ‘돌에 새긴 성경’
 
팔레르모 근교에 몬레알레 성당을 지은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왕 굴리에모 2세가 성당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뜻을 담은 조각상.
  굴리에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이 성당 건축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교황권과 왕권이 격돌하는 중세였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가 앉아 있는 팔레르모 대성당이 있는데도, 왕이 나서서 같은 권역(圈域) 안에 또 대성당을 지은 데는, 교황의 간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몬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m²에 걸쳐 비잔틴풍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형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리에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왕조는 150여 년 만에 대(代)가 끊어지고, 정략(政略) 혼인에 의하여 1190년 독일 스와비아 왕조의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이 된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은 굴리에모 2세인데, 아들이 없어 고모 콘스탄스(할아버지 루제로 2세의 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콘스탄스는 독일 스와비아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의 장남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바바로사가 죽자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6세) 및 시칠리아 왕으로 등극했던 것이다. 콘스탄스는 아들을 낳는데, 그가 중세 유럽의 명군 중 한 사람인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및 지금의 체코, 네덜란드, 헝가리 등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화된 적이 없었다. 느슨한 제후국 연합체였다. 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 같지도 않다”고 조롱한 바 있다.
 
 
  시대를 앞서간 페데리코 2세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시칠리아를 다스린 名君 페데리코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종교적 수장(首長)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수장 노릇을 하기를 원하였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전역(全域)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게 복종할 뿐 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 황제에게 도전한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꾀한 이가 페데리코 2세이다. 이탈리아 통일은 교황권과 교황 직할령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페데리코와 교황은 정면충돌 코스로 달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페데리코의 통일 꿈은 600년 뒤에야 이뤄진다. 시대를 앞서간 영웅이었다.
 
  노르만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였던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노르만식(로마네스크 양식) 성(城), 성당, 궁전 건물이 유달리 많은 것은 정치가 실용적으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포용한 결과이다. 비잔틴, 아랍 세력이 남긴 건물도 부수지 않았다. 고쳐 썼고 기술자들을 우대하였다.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게 된 노르만은 고향인 잉글랜드를 정복한 고향 사람들과도 교류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을 유럽 전역에 확산시키는 매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림 같은 타오르미나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山頂 도시 카스텔 몰라. ‘어금니’란 뜻이다.
  우리는 흔히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시칠리아의 동해안 도시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 관람석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무심코 나온 말이기도 하다. 청명한 하늘, 정면엔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화산의 꼭대기(3300m)가 보였다. 왼쪽으로는 높이 200m의 해안 절벽 위에 만든 2700년 역사를 가진 도시 타오르미나, 그 뒤편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쌓은 성벽과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산정(山頂) 마을 카스텔 몰라.
 
  타오르미나에서 내려다본 이오니아해(海)의 색감은 코발트 블루이다. 여러 번 빤 청바지 색깔이다. 양쪽에 늘어선 상점들과 교회를 지나 약 1.5km인, 타오르미나 중앙로를 걷다가 절벽 위에 조성한 작은 광장에 섰다. 낙차 약 150m 아래 해안의 모래사장이 빛난다. 타오르미나는, 보는 이들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영상(映像)을 남긴다. 화산, 바다, 해안, 절벽, 유적, 마을, 교회, 수도원, 성채(城砦), 하늘, 꽃밭이 어우러진 에덴동산의 이미지이다.
 
  나는 16세기 수도원을 개조한 상 도메니코 팰리스 호텔에서 묵었다. 절벽 위에 있는데 영화 〈그랑 블루〉의 무대가 된 호텔이다. 타오르미나 해안에서 벌어진 세계 프리 다이빙 대회에 참석한 선수단이 머무는 곳으로 나온다.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 山頂 마을 몰라의 골목에서 발견한 MADE IN KOREA.
  타오르미나를 유럽의 인기 관광지로 만든 이는 독일 화가 오토 겔렝과 문호(文豪) 괴테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타오르미나의 경관을 격찬하였다. 베를린이 고향인 게렝은 나이 스무 살 때 시칠리아를 여행하다가 타오르미나에 매혹되어 겨울을 지내면서 이 도시의 환상적 모습을 화폭(畵幅)에 담아 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전시하였다. 그림을 본 유럽의 미술 평론가들은, “공상(空想)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게렝은 “타오르미나를 가 보라. 만약 내가 과장을 하였다면 경비를 물겠다”고 선언하였다.
 
  타오르미나는 감수성이 좋은 많은 예술가, 문학가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방랑벽이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생을 바꿀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D.H. 로런스와 미국의 트루먼 카포테는 ‘폰타나 베키아’라는, 17세기 빌라에서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썼다.
 
  택시를 타고 산길을 달려 ‘어금니’ 성(카스텔 몰라)에 도착했다. 해발 600m가 넘는 산이라 에트나 화산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 산꼭대기 마을에도 성당, 호텔, 그리고 맛있는 커피점이 있다. 골목을 걸어가다가 LG 상표가 붙은 에어컨을 발견했다. 이젠 한국인이 노르만처럼 세계를 누빈다는 증표였다.
 
 
  2500년간 종교적 聖所였던 시라쿠사 성당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성당. 그리스 시대부터 신전, 성당 등으로 2500년간 계속 사용되고 있는 종교건물이다. 여러 양식의 건축 기법이 섞여 있다. (사진=한오수)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의 공격을 물리친 시라쿠사 왕은 아테네 신을 모시는 도리아식 신전(神殿)을 세웠다. 기원전 415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편에 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공격하였다가 패전한다. 기원전 398년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방문, 이상향이라고 칭찬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선교여행을 할 때 시라쿠사에 도착, 기독교를 시칠리아에 소개했다. 기독교 공인 후 그리스 신전은 교회 건물로 개조된다.
 
  시칠리아는 로마 멸망 후 반달, 고트족의 공격을 받다가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의 지배로 넘어갔다. 서기 878년 아랍이 시라쿠사를 점령, 이 교회 건물을 모스크로 개조하였다. 1085년 노르만이 아랍 세력을 몰아내고 시라쿠사를 수복한 뒤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꾸었다. 성당의 관할권은 로마 교황으로 넘어갔다. 노르만은, 성당을 확장, 목조(木造) 지붕을 올리고, 모자이크를 붙였다. 1693년 대지진 때 많이 부서져 정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었다. 2500년간 중단 없이 그리스 신전, 이슬람 모스크, 기독교의 교회로 사용된, 역사의 숨결이 멈추지 않는 건물이다. 일본인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세계》에서 시라쿠사 성당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시라쿠사 성당은 기독교 교회로 돌아간 뒤에도 아랍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교회가 되기 전에 고대(古代) 신전이었던 전력(前歷)이 지금도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시라쿠사는 기독교 세계가 되든 이슬람에 굴복하든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를 줄곧 질질 끌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쓸데없는 요소를 모두 제거한 뒤에 흐르는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밖에 없는데도 더없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의 서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군사(軍事)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노르만 기행(紀行)에서 가장 편안하게 느낀 곳은 ‘달걀성’이란 뜻을 가진 나폴리 만의 카스텔 델오보 해성(海城)이었다. 시칠리아 왕국의 건설자인 노르만의 루제로 2세가 12세기 초, 나폴리를 점령한 뒤 지은 성인데, 수백 명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우람한 성채이다. 루제로는 한때 이 성에 머물렀다. 파도를 맞으면서 버텨 온 당당한 성벽을 바라보니 바다에서 기른 힘으로 문명을 파괴하다가 기독교화한 이후엔 문명 수호자로 돌변한 노르만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킹의 法
 
  미국 히스토리 채널의 연속 드라마 ‘바이킹’엔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사실(史實)에 충실하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법의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바이킹-노르만은 정복지를 잘 다스려 일류(一流) 국가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들이 다스린 나라들은 예외 없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법치국가가 되었다. 잉글랜드, 시칠리아 왕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 그런 비결의 핵심은 이들의 법치 정신이었다. 야만 상태에서도 법적(法的) 제도와 전통을 유지, 발전시켜 간 점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바이킹-노르만의 법에 대한 관점이 독특했다. 그들은 법을, 정의(正義)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공동체(共同體)를 유지하는 질서로 여겼다. 그들의 법 집행은 증거와 증인(證人)을 중시(重視)하고, 매우 실용적이었다. 바이킹은 나쁜 행위가 반드시 나쁜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살인(殺人) 행위에 대한 처벌도 슬기롭게 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일정한 시한에 자수(自首)하면 정상(情狀)을 참작(參酌)하였다. 바이킹 법은 살인한 자는 행위를 한 뒤 만나는 첫 번째 사람에게나, 세 집을 지나치기 전에 자수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살인을 한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을 경우엔 추장(酋長)이 재판장 역할을 하는 주민회의에서 피살자 가족에 대한 배상을 하는 조건으로 사형(死刑)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신고하지 않거나 밤에 몰래 죽이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았다. 바이킹은 선(善)과 악(惡)보다는 명예와 수치심을 법치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정정당당한 행동을 했느냐의 여부(與否)가 유·무죄(有無罪)를 판단하는 데 잣대가 되었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고를 만나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행위는 살인죄에 준하여 처벌했다. 회식 장소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모든 참석자들은 가해자(加害者)를 체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는 피살자(被殺者) 유족(遺族)들에게 배상해야 했다. 도둑질을 하다가 발각된 절도범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지만 강도를 죽여선 안 된다. 절도는 피해자 몰래 하지만 강도는 면전(面前)에서 이뤄지므로 피해자에게도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보장된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사소한 절도에 대한 처벌법은 통로를 만들어 지나가게 해 놓고 마을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 집단폭행에서 빠지는 주민에겐 벌금을 물렸다. 범죄자 처벌을 공동체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
 
  법치엔 왕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잦고 농사를 망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주민들이 굶게 되면 신(神)에게 황소를 잡아 바쳤다. 효과가 없으면 산 사람을 제물(祭物)로 바쳤다. 이것도 소용이 없으면 왕을 제물로 바쳤다.
 
 
  ‘피의 독수리’ 刑
 
노르만족의 ‘피의 독수리형’. 사형수의 등을 갈라내고 뼈를 부수는 이 잔혹한 형벌은 왕이나 주교 등 고위 인사들을 처벌하는 데 사용했다.
  바이킹은 ‘피의 독수리’라는 잔인한 사형 집행 의식을 유지하였다. 바이킹이 남긴 시(詩)와 그림에 소개된 방법은 이렇다.
 
  〈히스토리 채널 시리즈 ‘바이킹’에선 그 장면이 생생하게(처참하게) 재연되었다. 이 사형 방식은 왕이나 주교, 또는 추장과 같은 자가 중죄(重罪)를 범했을 때 적용하였던 것 같다.
 
  사형수의 등을 칼로 갈라 가죽을 벗기고 등뼈를 드러낸다. 갈비뼈를 부러뜨려 날개처럼 펼친다. 상처엔 소금을 뿌린다. 허파를 등 뒤로 잡아당겨 어깨 위에 얹어 놓는다. 이 모습이 ‘피로 그린 독수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렇게 칼질을 해도 사형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버티면서 죽어야 오딘 신을 만날 수 있다. 한 번이라도 소리를 질렀다가는 죽어서 좋은 데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 왕, 노르웨이의 왕자가 이런 형을 받아 죽었다고 전한다.〉
 
  노르만 전사 집단의 이탈리아 남부 정복 역사를 다룬 책 《남쪽의 북쪽 사람》(The Normans in the South, 1016-1130) 저자(著者) 존 율리우스 노르위치(John Julius Norwich)는 유럽에서 무법천지를 만든 노르만과 바이킹이 법치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패러독스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파렴치한 노르만 지배자라도 아주 독창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내곤 하였다는 것이다. 노르만 전사들은 국가를 세우는 데는 법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법치를 강화하는 것이 정권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계산하였다.
 
  이들은 법을 도덕적으로 보지 않고 실용적으로 인식하였다.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 헨리 2세와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조 건설자 루제로 왕은 치밀한 법적 제도를 갖추는 데 총력(總力)을 경주(傾注)하였다. 그들은 법을, 관념적 이상(理想)이나 정의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노르만은 법을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여겼다. 노예는 튼튼할수록 도움이 된다. 법치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지배자와 공동체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야만의 바이킹이 유럽 문명의 위대한 유산(遺産)인 법치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가끔 발견되는 경이로운 역전극(逆戰劇)의 한 막(幕)이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