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니발이 로마군을 大破한 트라시메노 호수
⊙ 聖프란체스코가 태어나고 잠든 아시시
⊙ 옴브리아에서 가장 중세적 분위기의 구비오
⊙ 용병대장에서 군주로 올라선 페데리코 몬테펠트로의 숨결 어린 우르비노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聖프란체스코가 태어나고 잠든 아시시
⊙ 옴브리아에서 가장 중세적 분위기의 구비오
⊙ 용병대장에서 군주로 올라선 페데리코 몬테펠트로의 숨결 어린 우르비노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오르비에토 시청에서 내려다본 두오모와 구시가지. 뒤에 움브리아 산지가 펼쳐지고 그 너머가 마르케다.
움브리아와 마르케 주(州)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원(中原)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각종 외족이 번갈아 혹은 동시에 출몰하면서 이탈리아는 300여 년간 천하대란의 시기를 맞는다. 샤를마뉴의 평정도 일시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진공상태는 다시 여러 백년을 지속한다. 이 기간 북에서 흥한 세력은 이 지역을 통해 내려왔고 남에서 일어난 세력은 이 지역을 거쳐 밀고 올라갔다. 롬바르드족, 아틸라의 훈족, 신성로마제국군(軍) 들은 전자의 경우고, 시칠리아에서 흥기한 호헨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페데리코) 2세나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는 후자의 사례다. 일종의 정치적 무주(無主) 지역이었던 셈이다. 이 틈새에서 11~12세기가 되면 장사나 싸움으로 입신한 대소 가문들이 각지에 생겨나고 이들이 주도하는 자치도시들이 일어난다. 공화국이건 군주국이건 강한 도시가 약한 도시들을 상대로 확장을 거듭한다. 이렇게 정리된 이탈리아의 정치 판도는 르네상스의 기운이 무르익는 1450년경이 되면 대개 다섯 나라의 병립을 보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의 큰 도시로 남아 있는 로마(교황령), 나폴리(왕국), 베네치아(공화국), 피렌체(공화국), 밀라노(공국) 등이다. 소위 ‘르네상스 5패(五覇)’다.
움브리아와 마르케를 포함해 오늘 우리가 돌아보려는 로마냐 일대는 이 시기 이후 교황 통치령(Stato Papale)이 된다. 세 지역의 역사적인 마을들과 그 맹주(盟主) 역할을 했던 대소 가문들의 소장(消長)은 중세사에 빼놓을 수 없는 얘깃거리다. ‘르네상스 5패’가 주연으로 출몰하는 무대의 배경 속에 나름대로 명멸하며 많은 유·무형의 유산을 남겨 주었다. 페루자의 발리오니(Baglioni), 카메리노의 바라노(Varano)와 같이 한두 세대를 못 넘긴 가문도 많지만, 볼로냐의 벤티볼리오(Bentivoglio), 리미니의 말라테스타(Malatesta)같이 상당 기간을 한 지역의 군주로 행세한 사례가 적지 않다. 페라라의 에스테(Este),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처럼 기백년의 장수를 기록하며 이탈리아 역사뿐 아니라 유럽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대소 자치도시는 16세기가 되면 대개 교황령으로 흡수되어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통일까지 가는 것이다.
로마에서 1시간 남짓이면 가는 오르비에토
이쯤에서 교황이 어떠한 역사적 연고로 기독교회에 대한 종교적 관할을 넘어 영토와 ‘주권’까지 갖게 됐는지 잠깐 살펴보자. 로마 교회는 초기부터 상당히 과감한 전제를 제시했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다른 사도들에 앞서는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 베드로 성인이 로마 교회의 초대 주교(교황)였다는 것, 교황이 모든 기독교회에 대한 관할권과 기독교권 군주들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는 것 등은 줄잡아 얘기해도 근거가 박약한 주장들이다. 기독교의 수장이 영토권을 보유한 세속 국가의 지배자가 된다는 근거는 더더욱 취약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보강 증거물들이 콘스탄틴과 페팽(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의 영토기증서들이다. 하지만 실제 교황의 특별한 지위는 이런 주장이나 문서보다는 역사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기원 7세기 이후 로마 교회와 경쟁관계이던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등 대형 주교구들이 속속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 교회마저 1054년 ‘대분열‘과 함께 떠나가자 로마 교회의 주장에 대한 잠재적 이의(異議) 세력들은 스스로 정리된 셈이 되었다.
사실 11세기 말이 되면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지역의 도시들에 대한 신성로마 황제의 통치권이란 것은 명색뿐이었다. 이 틈새를 교황이 파고들어와 중세사에 유명한 교황파와 황제파 간의 대립구도(겔프 vs. 기벨린)가 형성된다. 교황은 이내 (신성로마) 황제를 공공연히 욕보일 정도로 ‘성장’한다(1077년 ‘카노사의 굴욕’). 반작용이 없을 수 없다. 독일 슈바비아 공작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가 1155년 신성로마 황제가 되면서 대대적인 역전(逆轉)을 시도한다. 이제 이탈리아 중원의 도시들은 거의 예외없이 겔프 아니면 기벨린으로 나뉘고 제법 큰 도시의 경우는 한 도시 안에서조차 분파가 만들어져 르네상스에 이르는 것이다.
교황의 우선순위는 로마를 화려하게 꾸미고 영토를 확대하여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공고히 하는 일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깊이 하고 높이는 본연의 일은 뒷전에 두었다. 이 본연의 일을 대신해 감당하고 나선 이가 심심산골 움브리아의 아시시에서, 그것도 재조(在朝)가 아닌 재야(在野)에서 나온다. 성 프란체스코가 그이다.
오르비에토(Orvieto)는 로마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간다. 움브리아의 마을들 중 예외적으로 고속도로변이다. 화산 바위가 만들어 낸 천연의 고원에 높직이 자리 잡은 모습이 한눈에 보아도 범상찮다. 13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번성한 마을 중 하나로, 영역이 티레노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번성하면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당시 오르비에토의 양대 유력 가문이던 모날디와 필리페스키 간의 처절한 대립은 단테가 <신곡> 연옥편에 분류해 다루었다. 셰익스피어가 베로나의 유사한 사례(몬태그 vs. 캐풀릿: 이탈리아 명 몬테키 vs. 카펠레티)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극화한 것은 기백년 뒤다.
이 시절 오르비에토 사람들이 시세(市勢)를 기울여 세운 두오모는 이 마을의 무한한 자부심의 원천이다. 특히 정면과 성 브리지오(San Brigio) 경당의 프레스코가 일품이다. 장대한 정면은 모자이크와 조각과 부조(浮彫)로 신·구약의 주요 인물과 장면들을 소상히 재현해 보여준다. 그대로 한 권의 성서다. 당대 명장(名匠) 오르카냐(Orcagna)와 피사노(Pisano)의 솜씨다.
대부분 교회들은 서쪽에 면해 있다. 두오모 광장 건너 건물 벽면에는 벤치가 몇 개 있다. 오후 한때 그늘진 벤치에 앉아 천연 조명 속의 정면을 바라보노라면 아무리 보아도 새로 보이는 것이 있고 이미 본 것도 다르게 보인다. 고딕 건물의 내부가 실로 광활하다.
성 브리지오 경당의 프레스코는 프라 안젤리코가 시작해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5-1523)가 마무리한 것이다. 정면에서 익힌 성서 스토리의 보충수업이요 미술사의 큰 대목에 대한 현장학습이다.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특장이 되는 인체의 다양한 움직임(movimento)에 따른 근육 묘사에는 이곳 시뇨렐리의 솜씨가 교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르비에토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메디치 교황 클레멘테 7세가 이곳에 살았던 덕도 있다. 1527년 로마 대약탈(Sacco di Roma)의 앙화를 맞아 로마의 산탄젤로 요새에서도 견딜 수가 없게 된 그는 이곳의 천험에 의지해 몇 해를 지냈다.
작은 마을 여유있게 돌아봐야 하는 움브리아
오르비에토에서 페루자 가는 길에 트라시메노(Trasimeno) 호수가 있다. 기원전 217년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과 로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가 한판 결전한 현장이다. 로마의 대패로 끝나 플라미니우스 자신을 포함해 1만5000명의 로마군이 죽고 6000명이 생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호수 주변에 아직도 상귀네토(Sanguineto, sangue=피), 오사이아(Ossaia, osso=뼈) 같은 이름의 마을들이 있지만 한없이 평화롭고 한적한 호수다.
페루자(Perusia)는 움브리아의 주도(州都)다. 그다지 아름다운 마을은 아니지만 간단찮은 과거를 누렸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다. 고대 로마 이전의 이탈리아 토착 부족인 움브리와 에트루스키 유적부터 중세, 르네상스 건물과 조형들이 구도심에 빼곡하다.
움브리아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큰 자산이다. 그 집결지인 움브리아 국립미술관 방문이 필수다. 시청이 위치한 13세기 명품 건물 프리오리 궁(Palazzo dei Priori) 안 40여 개의 전시실에 방대한 소장을 자랑한다. 초입에 두초(Duccio, 1260-1318) 작 <성모자>로 시작해 르네상스 초기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1-1492)의 <성 안토니오 다면화 polyptych> 앞에 서면 나직한 탄성을 금할 수 없다. 이 둘은 토스카나 사람들이지만 움브리아와 마르케 일대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어지는 그림들 중의 발군은 당연히 움브리아의 자랑인 페루지노(Perugino, 1446-1523)와 핀투리키오(Pinturricchio, 1454-1513)다. 페루지노는 단정한 배경에 한없이 온화한 인물 표현으로 독보적 경지를 열어 라파엘에게 전수했다. 핀투리키오 역시 특유의 섬세한 장식적 묘사로 인근 스펠로(Spello)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를 비롯해 조금 멀리 시에나 두오모의 피콜로미니 도서관과 로마의 여러 교회들에 불멸의 유산을 남겼다.
움브리아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도로가 고속도로(autostrada)보다 국도(superstrada) 위주이고 지세가 인근 토스카나나 라치오에 비해 다소 험한 편이다. 급한 마음으로 다닐 곳이 아니다. 마을들이 작지만 역사, 종교, 문화, 예술 등 어느 면에서든 지나치기 어려운 곳들이다. 매사냥 좋아하던 페데리코 2세가 터 닦은 몬테팔코(Montefalco, falco=매), 원조 도자기 마을 데루타(Deruta), 트린치 궁(Palazzo Trinci)이 인상적인 폴리뇨(Foligno), 성 베네딕투스의 고향인 비경의 산중마을 노르치아(Norcia), 페루지노의 고향인 중세 마을 치타 델레 피에베(Citta delle Pieve), 고대와 중세의 모습을 겸전한 베바냐(Bevagna), 그리고 3000년 이탈리아사(史)를 중원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겪어 낸 문화도시 스폴레토(Spoleto) 등이 모두 각기 언덕 위의 빛나는 마을들이다.
이들 빛나는 마을 중에도 아시시는 특별하다.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2-1126)가 태어나고 잠든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녀간 후 천년이 다 가도록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중세인들의 실망은 컸지만 재림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 그즈음 세상에 나온 이가 프란체스코 성인이다. 그의 삶은 예수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행적이나 가르침의 파격이 그랬다. 무한 사랑의 실천도 예수와 닮았다. 평화와 자애의 실천에 아무런 경계를 두지 않았다. 십자군 원정(5차)에 회의(懷疑)한 나머지 손수 팔레스타인까지 험한 길을 떠나 술탄에게 설교하였다. 베바냐의 시골길을 가다가 새들에게도 설교하였다. ‘큰 기쁨에 찬 새들이 동산에 늘어앉아 날개를 활짝 펴고 주둥이를 열어 성인의 옷깃을 건드리던’ 그 자리엔 소담한 기념조형이 서 있다.
인근 토스카나와 라치오의 일부를 포함해 움브리아 일대에는 성 프란체스코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설교하고 일하고 탁발하고 기도하고 노래를 짓고 이적을 보인 교회, 들판, 수도원, 기도소, 암굴 들이 산재한다. 성인은 편력 후 자신이 손수 지은 고향의 ‘가난한’ 교회 포르춘콜라(Porziuncola)에 돌아와 영면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성 프란체스코가 젊은 시절 유혹을 뿌리치려 몸을 내던졌던 가시장미 덤불이 있다. 성인이 몸을 던지자 가시들이 일순 자취를 감췄다던 그 덤불이다.
아시시, 구비오, 예시
당연히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성 프란체스코 교회를 앞에 두고 잔잔한 언덕 기슭을 따라 자리 잡은 아시시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 한 폭의 그림이다. 교회 안의 제단 밑(cripta)에 있는 성인의 묘소가 알맞게 가난하다. 자연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노래하고 가난을 서원하고 실천한 성인을 생각하면 아래위 층 교회의 벽면과 천장을 뒤덮은 지오토와 피에트로 로렌제티, 시모네 마르티니 들의 위업이 부질없는 수고같이 느껴진다. 아래 층 교회(Basilica inferiore) 오른편 수랑(袖廊) 벽면에 <천사들에 둘러싸인 성 모자와 함께 선 성 프란체스코>가 그중에 범박하여 오히려 눈에 든다. 시골 아저씨 인상의 성인이 손등에 성흔(聖痕, stigmata)이 선명한 채 맨발로 서 있다. 지오토를 가르쳤다는 치마부에(Cimabue)가 남긴 몇 안 되는 벽화의 하나다.
이제 구비오(Gubbio)만 보고 마르케로 넘어가자. 쉽지 않은 입지에 기막히게 자리 잡은, 움브리아에서도 가장 중세적인 분위기의 마을이다. 콘솔리 궁(Palazzo dei Consoli)의 고졸(古拙)하며 위엄있는 고딕 건물이 굽어보는 중앙광장(Piazza Grande)이 이 산간 소읍이 누렸던 범상찮은 과거를 짐작케 한다.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언덕 기슭에 공작궁(公爵宮, Palazzo Ducale)이 있다. 이탈리아 전역에 용명을 떨치고 마르케의 우르비노에 백년 성지(城地)를 구축해 르네상스 명문가를 일구었던 페데리코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가 태어난 곳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쉼없는 발길이 이곳에 닿지 않았을 리 없다. ‘구비오의 늑대’ 전승이 그것이다. 당시 구비오 마을이 사람 잡아먹는 늑대에게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을 방문한 성인이 늑대를 상대로 설복에 나섰고, 마을 사람들과 늑대를 평화와 상생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지방별 전통만큼 자연경관도 특색이 각각이다. 큰 물결이 넓게 흐르는 듯한 구릉이 토스카나의 특징이라면 움브리아의 지형은 작은 파도가 다소 급하게 이는 모양이다. 좀 더 산골인 셈이다. 여기에 비해 아펜니노 산맥의 큰 줄기가 남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인 마르케는 큰 파도가 더 급해지는 지세다.
구비오에서 움브리아-마르케 간 주경(州境)을 넘어 아드리아해를 향하는 길에 예시(Jesi)가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큰 인물이 ‘세계의 경이’로 불리며 이탈리아 반도 곳곳은 물론 알프스 너머를 종횡하며 유럽 중세사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페데리코 2세(독일명 프리드리히 2세, 1194-1250)다. 호헨슈타우펜 왕가의 적자(嫡子)로 시칠리아 왕이자 예루살렘 왕에 신성로마 황제였다. 할아버지 바르바로사의 뜻을 이어 겔프-기벨린 대립의 최전선에서 역대 교황들과 숱한 유·무혈의 투쟁을 치렀다. 당시 독일 동부 국경에 쇄도해 온 몽골군을 감당하고 마지못해서지만 십자군 원정까지 주도하며 동분서주의 일생을 보냈다. 시칠리아 궁정 특유의 세계주의적 분위기 속에 성장해 지적 감수성과 정서적 함량이 남달랐다고 한다(당시 팔레르모는 아랍, 스페인, 노르만,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문화 전통이 혼재해 20세기로 치면 뉴욕을 상기시키는 곳이었다). 처음부터 교황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레카나티, 마체라타, 로레토
흥미로운 것은 페데리코 2세와 성 프란체스코의 접점(接點)이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교회(아시시의 두오모)에서 세례를 받았다. 두 사람과 당시의 성격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 재위)의 관계도 흥미롭다. 인노켄티우스는 페데리코가 어릴 때 후견인이었고 바티칸으로 찾아온 프란체스코 성인의 사람됨을 한눈에 알아보고 프란체스코 교단을 공인해 주었다.
그 뒤 페데리코 2세에게 십자군 원정 약속 이행을 압박하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1227-1241 재위)는 결국 그를 파문한다. 마침 페데리코는 이미 원정길에 올라 있던 바람에 비교도가 지휘하는 십자군이라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이 그레고리우스 9세가 바로 아시시 주교로 재직하며 프란체스코 성인에 감복해 물심으로 도와준 이였고 성인이 영면한 지 불과 2년 만인 1228년 그를 시성(諡聖)하고 성 프란체스코 교회를 착공한 교황이다.
한 가지 더 있다. 프란체스코와 페데리코는 나란히 르네상스의 씨를 뿌린 이들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의 휴머니티를 설교하고 실천했다. 교회와 교리와 의식을 넘어 거리에서 마을에서 도시에서 설교하고 실천한 것이다. 중세판 종교개혁이었다.
페데리코 2세 역시 피렌체의 메디치보다 200여 년 앞서 당대 지식인들을 모아 인문주의 궁정을 운영했다. 창작에도 라틴어가 아닌 구어(volgare) 사용을 장려하고 본인이 시범까지 했다. 단테의 선도적인 토스카나 어 사용보다 근 100년이 앞선 일이다.
예시에 가면 예쁜 마을을 찾은 즐거움도 크지만 시립미술관(Pinacoteca comunale)이 또 필수다. 미술관이 들어 있는 18세기 피아넷티 궁(Palazzo Pianetti) 건물도 명물이고 중세, 르네상스, 현대 미술을 망라하는 소장도 훌륭하다. 긴 통로에 연한 배럴형 천장의 로코코 장식과 프레스코화는 웬만한 왕궁을 방불케 한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마르케 일대에 많은 작품을 남긴 로렌초 로토(Lorenzo Lotto, 1480-1556)의 좋은 그림들이 많다. 과감한 색감과 탈격의 구도가 그렇게 예쁠 수 없다. 시대의 유행 매너리즘을 두고 독자적 경지를 이룩한 화가다. 현대 작가들로 피스톨레토의 ‘수태고지’ 패러디 조각과 구투소(Renato Guttuso)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끝 방에 이르니 네 가지 덕목(virtu)을 의인화한 벽화가 장려하다. 각기 지식(sapienza), 절조(temperenza), 불굴(fortienza) 그리고 정의(giustizia)를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네 가지 중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덕목이 무어냐고 필자가 지나듯 물었더니 예쁜 안내직원이 한참을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는 아닌 거 같다”고 답해 일행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예시는 속이 다 시원해지는 베르디키오(verdicchio) 와인의 명산지이기도 하다.
예시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레카나티(Recanati)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예외 없이 좋아하는 시인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i, 1798-1837)의 생가와 박물관이 볼 만하다. 카루소를 잇는 테너로 사랑받던 질리(Begnamino Gigli)의 고향으로 역시 그의 박물관이 있다. 인근 마체라타(Macerata)는 시내 한가운데 원형경기장이 인상적인 마을로 청나라 선교에 공이 큰 예수회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태어난 곳이다. 이 다양한 출신 인물들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이탈리아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영원한 분이 살던 곳을 통째로 모셔다가 보관한 곳도 이 부근이다. 또 하나 언덕 높이 빛나는 마을 로레토(Loreto). 아드리아 푸른 바다가 손에 닿을 듯한 언덕 위에 성모 마리아 성가(聖家, Santa Casa)가 있다. 팔레스타인에 있던 누옥을 천사들이 날아 옮겨왔다는 전승이다.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 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에(Medjugorje)보다 훨씬 오래된 원조 ‘마리아 성지’(Marian Shrine)다.
로레토를 공식 순례지로 만든 산타 카사
알맹이 산타 카사는 고대에 지은 단칸 돌집이다. 진짜라는 느낌과 가난하다는 확인을 주기에 충분하다. 르네상스의 거장 브라만테와 상갈로 솜씨라는 화려한 부조의 대리석 건조물에 싸여 널찍한 교회(Santuario della Santa Casa)의 제단 자리에 위치해 있다. 산타 카사가 옮겨져 왔다는 해는 1294년이다. 기독교사에 유명한 1300년 보니파키우스 교황이 주관한 성년(Holy Year) 행사가 있기 6년 전의 일이다. 이해부터 로마가 예루살렘의 대체 순례지로 공인이 된 사연은 지난 4월호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산타 카사의 ‘등장’으로 로레토가 나사렛 대신 공식 순례지로 데뷔했다. ‘천사 공수(空輸)론’에 대하여는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천사들이 아니라 ‘천사’ 뜻의 성(姓)을 가진) 안젤리(Angeli) 가문 주도로 분해, 운반되어 왔다는 보다 현실적 설명이 제시되기도 했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이런저런 성유물이 적지 않게 있지만 산타 카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직접 접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런 상징성만으로도 로레토는 빼놓지 못할 순례지가 되었다. 갈릴레이도 두 번이나 다녀갔고 데카르트, 몽테뉴, 괴테, 모차르트 등 알프스를 넘어와 다녀간 해외 저명인사들도 적지 않다. 모차르트의 <로레토 기도곡>(K195)은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매년 6월 로레토-마체라타 간 순례길 걷기는 제법 알려진 관광상품이다.
로레토부터 아드리아 해변 길을 따라 좋은 마을들이 많다. 마르케의 주도(州都) 앙코나(Ancona)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살았던 북방 한계였다. 고대 로마 때 브린디시(Brindisi)가 성지와 레반트로 가는 관문이었다면 앙코나는 달마티아 너머 판노니아, 다키아 쪽으로 원정 가는 출발지였다. 르네상스 교황들 중 최고 지성으로 공인받는 피우스 2세(Pius II, 1458-64 재위)가 모처럼 십자군을 일으킨 후 성대한 출항을 그리며 병든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으나 유럽 각국의 호응이 한심한 수준인 것을 보고 쓰러져 잠든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크로아티아(스플릿, 두브로브닉), 그리스(코르푸, 파트라스)로 페리가 다니는 바쁜 항구다. 로시니(Giacomo Rossini)의 고향인 페사로(Pesaro)와 르네상스 초기 로마냐 일대를 호령하던 말라테스타 가문의 주요 근거지 파노(Fano) 들이 두루 들러볼 만하지만 시간 없는 우리는 그라다라(Gradara)로 바로 가자.
그라다라는 피의 역사로 얼룩진 요새형 성채(Rocca)를 중심으로 잘 보존된 중세마을이다. 본래 13세기 이 지역에서 입신한 말라테스타 가(家)의 소유에서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에 넘어갔다가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의 손을 거쳐 결국 교황이 차지한다.
한때 성주였던 조반니 스포르차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팜므 파탈(femme fatale)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첫 남편이다. 음모라면 한 수 하는 보르지아 교황이 13살짜리 딸을 정혼(定婚)할 때 뒷계산이 없었을 리 없다. 갖은 음모와 투쟁으로 손바뀜이 심했던 성채의 메인 홀 입구에 새겨진 경구(警句)가 시대상을 전해 준다: ‘MALEDICTVS HOMO QVI COFIDIT IN HOMINEM’(‘인간을 믿는 인간에게 저주 있으리!’). 라틴어지만 익숙한 어간(語幹)만으로도 뜻을 짐작할 만하다.
지세 따라 쌓은 성채(castello)가 요새 목적에 그치지 않고 구조와 치장이 남다르다. 본채 1층의 포르티코(portico)나 2층의 르네상스식 주랑(柱廊, loggia)은 방어뿐 아니라 생활을 고려한 증거들이다. 성채 문화는 이렇게 저택(palazzo) 문화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모범적 현장 우르비노
이제 우리는 우르비노(Urbino)로 간다. 이번 여행 하이포인트 중 하나다. 우르비노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여러 측면에서 구상하고 일부는 실천한 모범적 현장이다.
우르비노를 오늘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일으킨 이가 앞서 구비오에서 얘기했던 페데리코 몬테펠트로다. 우르비노를 피렌체나 밀라노는 몰라도 만토바(Mantova)나 페라라(Ferrara)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일으켰다. 마르케의 산골짜기에서 놀라운 일이다. 만토바나 페라라의 경우 각각 곤차가(Gonzaga), 에스테(Este) 가문이 누대(累代)에 걸쳐 축적한 공업(功業)이지만 페데리코는 이를 거의 홀로 당대에 이룬 셈이다.
그는 문무를 겸전한 이였다. 겸전한 정도가 또 남다르다. 용병대장으로 입신한 것은 많은 르네상스 군주들과 공통이지만 그는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일이 없다. 당시 최강이라던 베네치아의 콜레오니(Bartolomeo Colleoni, 성 조반니와 파올로 교회 앞 광장에 베로키오의 기마상이 유명)도 물리쳤다. 한창 때는 가만히만 있어 달라는(전투 불참) 조건으로 계약한 일이 있을 정도다. 예술과 문학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겼다. 손에는 늘 역사서나 기도서가 들려 있었다고 한다. 그의 도서관은 바티칸 도서관 빼고는 유럽 최고의 규모요 수준의 장서를 자랑했다.
나아가 국부의 증대와 신민의 복리를 생각하고 궁실 경비를 최소화해 검소와 겸손의 미덕을 실천한 것은 당시 군주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당대에 이미 ‘이탈리아의 빛’으로 불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국 운영의 모범사례로 꼽았다. 부르크하르트도 역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 칭송으로 일관하였다.
그의 궁정(공작궁, Palazzo Ducale)에는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우르비노의 궁정 생활을 기초로 사교인(社交人)의 이상형을 정리한 흥미로운 책이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 1478-1529)의 <궁정인 교범>(Il Libro del Cortegiano)이다. 젊은이 교육의 최대 목표가 사회적으로 완벽한 신사를 만드는 데 있다는 생각이 이 시기 우르비노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을 교회의 성인들이 아니라 고대의 역사인물에서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스틸리오네 자신이 만토바 귀족 태생으로 유럽 각국의 궁정과 교유(交遊)한 ‘르네상스인’이다. 요즘으로 치면 정치인, 외교관, 군인, 시인, 저술가, 예술비평가에, 그리고 역시 ‘연애박사’(homme ’a femme) 자질까지 두루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궁극적 사교인의 자질로 첫손에 꼽은 용어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어떠한 의식적 노력의 흔적도 드러나지 않은 무관심에 가까운 자연스러움’ 정도의 뜻)는 오늘날에도 가끔 인용된다. 친구 라파엘(Raffaello Sanzio, 1483-1520)이 그려 준 그의 초상화가 파리 루브르에 걸려 있다.
하이 르네상스의 대표화가 라파엘도 우르비노 사람이다. 생몰 연대가 조금 엇갈려 페데리코 몬테펠트로와는 이승을 함께하지 못했으나, 페데리코의 자부(子婦)로 궁정의 사교를 이끌던 엘리자베타 곤차가(Elisabetta Gonzaga, 1471-1526)의 초상화를 그려 피렌체의 우피치에 남겼다. 많은 르네상스의 거장들 특히 초기 인문주의 예술의 대가들이 우르비노에 다녀갔다. 알베르티, 피사넬로, 파올로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보티첼리 등등이다. 공작궁 건물 안에 있는 마르케 국립미술관에는 ‘아, 이 그림이 여기 있었네’ 싶은 그림들이 적지 않다. 건물 한구석에 없는 듯 자리 잡은 서재(studiolo)가 일품이다. 페데리코가 공부하고 명상하던 곳이다. 조형미와 공간감이 서로 도와 미감과 기능성이 두루 살아 있다.
유럽 최대의 해수욕장이 있는 리미니
산레오(San Leo)는 우르비노에 옮겨오기 전까지 몬테펠트로 가의 근거지였다. 기원 3세기 말 달마티아에 살던 레오가 친구 마리노(Marino)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피해 아드리아 바다 건너 마르케 산중으로 피신 와 자리 잡은 곳이다. 인근 산마리노(San Marino, 오늘날까지 독립국 지위 유지)와 함께 접근은 힘들고 주위 경계에는 유리한 입지다. 산정의 성채 아래로 쾌적하고 조그만 마을이 있다. 험한 곳 마다않고 다니던 성 프란체스코도 다녀갔다.
당시 몬테펠트로 가의 손님으로 체류 중이던 귀족 하나가 성인의 설교에 감명받아 인근 라베르나(La Verna) 산을 선물로 기증했고 성인은 몇 년 뒤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다섯 군데 성흔(stigmata)을 입는다. 단테는 이곳을 연옥(purgatorio) 경치 묘사의 모델로 삼았고, 마키아벨리는 산레오의 성채야말로 이탈리아 최고의 군사건축이라고 추켜세웠다.
산레오 성은 18세기부터 교황청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서 복역 중에 옥사한 저명 수인(囚人) 중 하나가 주세페 발사모(Giuseppe Balsamo, 1743-95), 일명 칼리오스트로 백작(Conte di Cagliostro)이다.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태생으로 그야말로 일정한 직업 없이 가진 재치 하나로 계몽시대의 반계몽성을 파고들며 유럽 각국 궁정을 무상으로 출입하고 실러, 괴테 등 당대 최고 지성들과 교유한 희한한 인물이었다.
산레오에서 아드리아를 바라고 조금 내려오면 로마냐 땅이고 그 길로 해변에 이르면 리미니(Rimini)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리미니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유럽 최대의 해수욕장 때문이었다. 15km에 달하는 비치의 인기는 오늘도 여전하지만 리미니의 매력은 역시 그 역사와 볼거리들이다.
이미 고대 로마제국 시절 초대, 2대 황제가 다녀가며 아우구스투스 개선문과 티베리우스 교(橋)를 남겼다. 13세기 초반 30여 년간 신성로마 황제 페데리코 2세의 치하에 있었지만 그의 흔적은 별로 없다. 이 일대가 교황령이 된 후 그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증오가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물론 주종은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까지 리미니를 근거지로 이 일대를 주름잡던 말라테스타 가의 발자취다.
역시 말라테스타 사원(Tempio Malatetiana)이 일품이다. 말라테스타들 중에도 악명 높던 시지스몬도(Sigismondo Malatesta, 1417-1468)가 13세기 프란체스코 교회를 가족 묘소(mausoleo)로 개조한 것이다. 정면(facciata)과 외부는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맡고 내부 장식은 대개 디 두초(Agostino di Duccio: 도나텔로의 제자로 13~14세기에 활동, 페루자에서 본 두초와 구분) 솜씨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 <성 시지스몬도를 경배하는 시지스몬도>가 세월 속에 많이 상했는데도 압권임을 알겠다.
성 시지스몬도(독일명 지기스문트)는 13세기 독일 사람으로 전사(戰士)들의 수호성인이다. 외관을 보면 순수 고전 모티프만을 활용한 르네상스 최초의 건물이란 평가가 알베르티의 이름과 어울린다. 내부 장식은 많이 달라 시지스몬도의 세속 취미가 크게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성경과 성인의 이야기보다는 신화와 영웅설화, 천체와 신비스런 동물 등 이교도 소재 일색이다. 당시 교황 피우스 2세는 반목 관계이던 시지스몬도에게 살인, 간통, 친간, 신성모독, 위증 등의 죄를 물어 ‘악마 숭배자’로 규정하고 파문했다. 배경에는 말라테스타의 이런 취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후진(後陣) 흰 벽에 지오토의 그리스도 수난상(crocifissione)만이 이곳이 종교공간임을 말없이 담보하는 듯하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의 것과 함께 ‘공인’된 지오토의 성십자가 중 하나다. 지오토는 아시시의 작업을 마치고 파도바의 스크로베니(Scrovegni)한테 가는 길에 리미니에 머물렀었다.
100년 이상 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
리미니에서 해안 국도를 따라 1시간 가면 라벤나(Ravenna)다. 여느 유럽 도시 같은 인상에 라벤나가 백년 이상 로마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호노리우스가 402년 천도해 왔고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에 이어 이탈리아를 장악한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도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540년 유스티니아누스의 동로마(비잔틴)가 왔을 때도 라벤나가 근거지였다. 베네치아의 지형과 같이 석호(潟湖)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하고 콘스탄티노플과의 해상연결이 용이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라벤나는 이탈리아 안에서 마지막으로 타들어간 로마문명의 잔등(殘燈)이었다.
성 비탈레(San Vitale) 교회는 라벤나 시내 한가운데 있다. 밖에서 보는 육중한 느낌과 안에서 볼 때의 텅 빈 느낌의 조화가 묘하다.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 건축에서도 되풀이된 방식이다. 내부 천장과 벽면을 뒤덮은 수십만 개의 채색 대리석, 금빛 대리석 조각으로 된 모자이크 장식.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황비 테오도라가 성자와 신하들을 대동하고 나란히 서 있는 후진(後陣, apside)의 모자이크는 미술사 교과서에 익숙한 이미지다. 익숙한데 낯설다. 황제는 물론 신하들까지 성인들과 같은 크기에 같은 용모로 그렸다. 로마 교회의 영향권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이다.
콘스탄틴 대제라는 한 인물이 공인해 준 교회요 창건한 수도인데, 불과 200년이 안 되어 두 교회 간에 간단찮은 간격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공식 ‘대분열’은 다시 500년이 지난 후 일어난다. 같은 경내에 갈라 플라치디아(호노리우스 황제의 누이)의 묘소(Mausoleo di Galla Placidia)의 모자이크 솜씨가 전혀 못지않다. 5세기 중반 아직 서로마일 때의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모자이크 전통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Sant’Apollinare in Classe) 교회의 모자이크도 빼놓을 수 없다. 과연 라벤나는 서유럽에서 유일한 비잔틴 예술의 견본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도 우리는 역사의 큰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라벤나에서도 생각나는 인물이 몇 있다.
우선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Theodoric). 오도아케르를 몰아내고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해 40여 년을 통치했던 사람이다. 그는 야만인에 무골로서 일자무식의 비교도였으나 학습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일부 용병대장들을 상기시키는 자질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일대를 돌아보며 가다듬은 공공정신과 문화소양은 오히려 정통 로마인보다 한 수 위였다. 라벤나에 와서도 야만의 파괴본능과는 거리가 있는 치적을 남겼다.
다만 한 가지, 그는 개종할 때 가톨리시즘이 아닌 아리아니즘(Arianism)을 택했다. 비잔틴에 이어 8세기 후반 프랑크 족이 들어오면서 이 지역은 교황의 영향권에 들었고, 로마 교회의 이교(異敎) 억압 본능은 테오도리크가 누리던 동시대인들의 추앙을 퇴색시켰다. 초기 라벤나 건설의 대공은 묻힌 채 야만족 추장의 이미지만 남은 것이다. 공자가 설파한 춘추 필법의 행방을 새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테오도리크 묘소(Mausoleo di Theodoric)의 낯선 건축양식이 상상을 자극하고 그가 지었다는 아리안 교도 세례당(Battistero degli Ariani)이 이채롭다.
또 한 사람 단테(Dante Alighieri). 1302년 사랑하는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라벤나에 와 <신곡> 저술을 시작했고 20년 뒤 이곳서 숨을 거두었다. 피렌체는 과거 한동안 단테의 유해 이관을 거듭 요구했으나 라벤나 시(市)의 무대응으로 이제는 포기했다고 한다.
<신곡>이 이탈리아 최대의 베스트 셀러가 되고 유럽 문학의 고전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신곡>에 앞서 중세 내내 애독된 최장 베스트셀러도 라벤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 저자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는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테오도리크 왕의 집정관을 지냈다. 이탈리아의 역사적 베스트셀러 작가 두 명이 모두 라벤나 연고자인 셈이다. 영국 사람들은 여기에 바이런(Lord Byron, 1788-1824) 역시 라벤나에 2년을 살며 <돈 주앙>을 썼다고 덧붙이지만 우리의 주관심사에서는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다.
알프스와 아펜니노가 평지가 되어 만난 지역에 포(Po) 강이 흐르고 그 강물이 아드리아 바다와 만난 델타 지역의 남북으로 라벤나와 베네치아가 있다. 다음 달에는 포강을 넘어 베네치아를 찾아가 보자.⊙
움브리아와 마르케를 포함해 오늘 우리가 돌아보려는 로마냐 일대는 이 시기 이후 교황 통치령(Stato Papale)이 된다. 세 지역의 역사적인 마을들과 그 맹주(盟主) 역할을 했던 대소 가문들의 소장(消長)은 중세사에 빼놓을 수 없는 얘깃거리다. ‘르네상스 5패’가 주연으로 출몰하는 무대의 배경 속에 나름대로 명멸하며 많은 유·무형의 유산을 남겨 주었다. 페루자의 발리오니(Baglioni), 카메리노의 바라노(Varano)와 같이 한두 세대를 못 넘긴 가문도 많지만, 볼로냐의 벤티볼리오(Bentivoglio), 리미니의 말라테스타(Malatesta)같이 상당 기간을 한 지역의 군주로 행세한 사례가 적지 않다. 페라라의 에스테(Este),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처럼 기백년의 장수를 기록하며 이탈리아 역사뿐 아니라 유럽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대소 자치도시는 16세기가 되면 대개 교황령으로 흡수되어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통일까지 가는 것이다.
로마에서 1시간 남짓이면 가는 오르비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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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비에토 두오모의 정면. 교회 정면 조형의 결정판이자 그대로 한 권의 성경이다. |
사실 11세기 말이 되면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지역의 도시들에 대한 신성로마 황제의 통치권이란 것은 명색뿐이었다. 이 틈새를 교황이 파고들어와 중세사에 유명한 교황파와 황제파 간의 대립구도(겔프 vs. 기벨린)가 형성된다. 교황은 이내 (신성로마) 황제를 공공연히 욕보일 정도로 ‘성장’한다(1077년 ‘카노사의 굴욕’). 반작용이 없을 수 없다. 독일 슈바비아 공작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가 1155년 신성로마 황제가 되면서 대대적인 역전(逆轉)을 시도한다. 이제 이탈리아 중원의 도시들은 거의 예외없이 겔프 아니면 기벨린으로 나뉘고 제법 큰 도시의 경우는 한 도시 안에서조차 분파가 만들어져 르네상스에 이르는 것이다.
교황의 우선순위는 로마를 화려하게 꾸미고 영토를 확대하여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공고히 하는 일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깊이 하고 높이는 본연의 일은 뒷전에 두었다. 이 본연의 일을 대신해 감당하고 나선 이가 심심산골 움브리아의 아시시에서, 그것도 재조(在朝)가 아닌 재야(在野)에서 나온다. 성 프란체스코가 그이다.
오르비에토(Orvieto)는 로마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간다. 움브리아의 마을들 중 예외적으로 고속도로변이다. 화산 바위가 만들어 낸 천연의 고원에 높직이 자리 잡은 모습이 한눈에 보아도 범상찮다. 13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번성한 마을 중 하나로, 영역이 티레노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번성하면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당시 오르비에토의 양대 유력 가문이던 모날디와 필리페스키 간의 처절한 대립은 단테가 <신곡> 연옥편에 분류해 다루었다. 셰익스피어가 베로나의 유사한 사례(몬태그 vs. 캐풀릿: 이탈리아 명 몬테키 vs. 카펠레티)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극화한 것은 기백년 뒤다.
이 시절 오르비에토 사람들이 시세(市勢)를 기울여 세운 두오모는 이 마을의 무한한 자부심의 원천이다. 특히 정면과 성 브리지오(San Brigio) 경당의 프레스코가 일품이다. 장대한 정면은 모자이크와 조각과 부조(浮彫)로 신·구약의 주요 인물과 장면들을 소상히 재현해 보여준다. 그대로 한 권의 성서다. 당대 명장(名匠) 오르카냐(Orcagna)와 피사노(Pisano)의 솜씨다.
대부분 교회들은 서쪽에 면해 있다. 두오모 광장 건너 건물 벽면에는 벤치가 몇 개 있다. 오후 한때 그늘진 벤치에 앉아 천연 조명 속의 정면을 바라보노라면 아무리 보아도 새로 보이는 것이 있고 이미 본 것도 다르게 보인다. 고딕 건물의 내부가 실로 광활하다.
성 브리지오 경당의 프레스코는 프라 안젤리코가 시작해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5-1523)가 마무리한 것이다. 정면에서 익힌 성서 스토리의 보충수업이요 미술사의 큰 대목에 대한 현장학습이다.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특장이 되는 인체의 다양한 움직임(movimento)에 따른 근육 묘사에는 이곳 시뇨렐리의 솜씨가 교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르비에토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메디치 교황 클레멘테 7세가 이곳에 살았던 덕도 있다. 1527년 로마 대약탈(Sacco di Roma)의 앙화를 맞아 로마의 산탄젤로 요새에서도 견딜 수가 없게 된 그는 이곳의 천험에 의지해 몇 해를 지냈다.
작은 마을 여유있게 돌아봐야 하는 움브리아
오르비에토에서 페루자 가는 길에 트라시메노(Trasimeno) 호수가 있다. 기원전 217년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과 로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가 한판 결전한 현장이다. 로마의 대패로 끝나 플라미니우스 자신을 포함해 1만5000명의 로마군이 죽고 6000명이 생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호수 주변에 아직도 상귀네토(Sanguineto, sangue=피), 오사이아(Ossaia, osso=뼈) 같은 이름의 마을들이 있지만 한없이 평화롭고 한적한 호수다.
페루자(Perusia)는 움브리아의 주도(州都)다. 그다지 아름다운 마을은 아니지만 간단찮은 과거를 누렸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다. 고대 로마 이전의 이탈리아 토착 부족인 움브리와 에트루스키 유적부터 중세, 르네상스 건물과 조형들이 구도심에 빼곡하다.
움브리아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큰 자산이다. 그 집결지인 움브리아 국립미술관 방문이 필수다. 시청이 위치한 13세기 명품 건물 프리오리 궁(Palazzo dei Priori) 안 40여 개의 전시실에 방대한 소장을 자랑한다. 초입에 두초(Duccio, 1260-1318) 작 <성모자>로 시작해 르네상스 초기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1-1492)의 <성 안토니오 다면화 polyptych> 앞에 서면 나직한 탄성을 금할 수 없다. 이 둘은 토스카나 사람들이지만 움브리아와 마르케 일대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어지는 그림들 중의 발군은 당연히 움브리아의 자랑인 페루지노(Perugino, 1446-1523)와 핀투리키오(Pinturricchio, 1454-1513)다. 페루지노는 단정한 배경에 한없이 온화한 인물 표현으로 독보적 경지를 열어 라파엘에게 전수했다. 핀투리키오 역시 특유의 섬세한 장식적 묘사로 인근 스펠로(Spello)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를 비롯해 조금 멀리 시에나 두오모의 피콜로미니 도서관과 로마의 여러 교회들에 불멸의 유산을 남겼다.
움브리아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도로가 고속도로(autostrada)보다 국도(superstrada) 위주이고 지세가 인근 토스카나나 라치오에 비해 다소 험한 편이다. 급한 마음으로 다닐 곳이 아니다. 마을들이 작지만 역사, 종교, 문화, 예술 등 어느 면에서든 지나치기 어려운 곳들이다. 매사냥 좋아하던 페데리코 2세가 터 닦은 몬테팔코(Montefalco, falco=매), 원조 도자기 마을 데루타(Deruta), 트린치 궁(Palazzo Trinci)이 인상적인 폴리뇨(Foligno), 성 베네딕투스의 고향인 비경의 산중마을 노르치아(Norcia), 페루지노의 고향인 중세 마을 치타 델레 피에베(Citta delle Pieve), 고대와 중세의 모습을 겸전한 베바냐(Bevagna), 그리고 3000년 이탈리아사(史)를 중원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겪어 낸 문화도시 스폴레토(Spoleto) 등이 모두 각기 언덕 위의 빛나는 마을들이다.
이들 빛나는 마을 중에도 아시시는 특별하다.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2-1126)가 태어나고 잠든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녀간 후 천년이 다 가도록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중세인들의 실망은 컸지만 재림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 그즈음 세상에 나온 이가 프란체스코 성인이다. 그의 삶은 예수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행적이나 가르침의 파격이 그랬다. 무한 사랑의 실천도 예수와 닮았다. 평화와 자애의 실천에 아무런 경계를 두지 않았다. 십자군 원정(5차)에 회의(懷疑)한 나머지 손수 팔레스타인까지 험한 길을 떠나 술탄에게 설교하였다. 베바냐의 시골길을 가다가 새들에게도 설교하였다. ‘큰 기쁨에 찬 새들이 동산에 늘어앉아 날개를 활짝 펴고 주둥이를 열어 성인의 옷깃을 건드리던’ 그 자리엔 소담한 기념조형이 서 있다.
인근 토스카나와 라치오의 일부를 포함해 움브리아 일대에는 성 프란체스코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설교하고 일하고 탁발하고 기도하고 노래를 짓고 이적을 보인 교회, 들판, 수도원, 기도소, 암굴 들이 산재한다. 성인은 편력 후 자신이 손수 지은 고향의 ‘가난한’ 교회 포르춘콜라(Porziuncola)에 돌아와 영면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성 프란체스코가 젊은 시절 유혹을 뿌리치려 몸을 내던졌던 가시장미 덤불이 있다. 성인이 몸을 던지자 가시들이 일순 자취를 감췄다던 그 덤불이다.
아시시, 구비오,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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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 가운데 보이는 문이 ‘아래층 교회’의 입구이고 그 오른쪽 위에 ‘위층 교회’의 정면 상단이 보인다. |
이제 구비오(Gubbio)만 보고 마르케로 넘어가자. 쉽지 않은 입지에 기막히게 자리 잡은, 움브리아에서도 가장 중세적인 분위기의 마을이다. 콘솔리 궁(Palazzo dei Consoli)의 고졸(古拙)하며 위엄있는 고딕 건물이 굽어보는 중앙광장(Piazza Grande)이 이 산간 소읍이 누렸던 범상찮은 과거를 짐작케 한다.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언덕 기슭에 공작궁(公爵宮, Palazzo Ducale)이 있다. 이탈리아 전역에 용명을 떨치고 마르케의 우르비노에 백년 성지(城地)를 구축해 르네상스 명문가를 일구었던 페데리코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가 태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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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도시 구비오의 공작궁. 페데리코 몬테펠트로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
이탈리아는 지방별 전통만큼 자연경관도 특색이 각각이다. 큰 물결이 넓게 흐르는 듯한 구릉이 토스카나의 특징이라면 움브리아의 지형은 작은 파도가 다소 급하게 이는 모양이다. 좀 더 산골인 셈이다. 여기에 비해 아펜니노 산맥의 큰 줄기가 남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인 마르케는 큰 파도가 더 급해지는 지세다.
구비오에서 움브리아-마르케 간 주경(州境)을 넘어 아드리아해를 향하는 길에 예시(Jesi)가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큰 인물이 ‘세계의 경이’로 불리며 이탈리아 반도 곳곳은 물론 알프스 너머를 종횡하며 유럽 중세사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페데리코 2세(독일명 프리드리히 2세, 1194-1250)다. 호헨슈타우펜 왕가의 적자(嫡子)로 시칠리아 왕이자 예루살렘 왕에 신성로마 황제였다. 할아버지 바르바로사의 뜻을 이어 겔프-기벨린 대립의 최전선에서 역대 교황들과 숱한 유·무혈의 투쟁을 치렀다. 당시 독일 동부 국경에 쇄도해 온 몽골군을 감당하고 마지못해서지만 십자군 원정까지 주도하며 동분서주의 일생을 보냈다. 시칠리아 궁정 특유의 세계주의적 분위기 속에 성장해 지적 감수성과 정서적 함량이 남달랐다고 한다(당시 팔레르모는 아랍, 스페인, 노르만,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문화 전통이 혼재해 20세기로 치면 뉴욕을 상기시키는 곳이었다). 처음부터 교황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레카나티, 마체라타, 로레토
흥미로운 것은 페데리코 2세와 성 프란체스코의 접점(接點)이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교회(아시시의 두오모)에서 세례를 받았다. 두 사람과 당시의 성격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 재위)의 관계도 흥미롭다. 인노켄티우스는 페데리코가 어릴 때 후견인이었고 바티칸으로 찾아온 프란체스코 성인의 사람됨을 한눈에 알아보고 프란체스코 교단을 공인해 주었다.
그 뒤 페데리코 2세에게 십자군 원정 약속 이행을 압박하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1227-1241 재위)는 결국 그를 파문한다. 마침 페데리코는 이미 원정길에 올라 있던 바람에 비교도가 지휘하는 십자군이라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이 그레고리우스 9세가 바로 아시시 주교로 재직하며 프란체스코 성인에 감복해 물심으로 도와준 이였고 성인이 영면한 지 불과 2년 만인 1228년 그를 시성(諡聖)하고 성 프란체스코 교회를 착공한 교황이다.
한 가지 더 있다. 프란체스코와 페데리코는 나란히 르네상스의 씨를 뿌린 이들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의 휴머니티를 설교하고 실천했다. 교회와 교리와 의식을 넘어 거리에서 마을에서 도시에서 설교하고 실천한 것이다. 중세판 종교개혁이었다.
페데리코 2세 역시 피렌체의 메디치보다 200여 년 앞서 당대 지식인들을 모아 인문주의 궁정을 운영했다. 창작에도 라틴어가 아닌 구어(volgare) 사용을 장려하고 본인이 시범까지 했다. 단테의 선도적인 토스카나 어 사용보다 근 100년이 앞선 일이다.
예시에 가면 예쁜 마을을 찾은 즐거움도 크지만 시립미술관(Pinacoteca comunale)이 또 필수다. 미술관이 들어 있는 18세기 피아넷티 궁(Palazzo Pianetti) 건물도 명물이고 중세, 르네상스, 현대 미술을 망라하는 소장도 훌륭하다. 긴 통로에 연한 배럴형 천장의 로코코 장식과 프레스코화는 웬만한 왕궁을 방불케 한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마르케 일대에 많은 작품을 남긴 로렌초 로토(Lorenzo Lotto, 1480-1556)의 좋은 그림들이 많다. 과감한 색감과 탈격의 구도가 그렇게 예쁠 수 없다. 시대의 유행 매너리즘을 두고 독자적 경지를 이룩한 화가다. 현대 작가들로 피스톨레토의 ‘수태고지’ 패러디 조각과 구투소(Renato Guttuso)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끝 방에 이르니 네 가지 덕목(virtu)을 의인화한 벽화가 장려하다. 각기 지식(sapienza), 절조(temperenza), 불굴(fortienza) 그리고 정의(giustizia)를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네 가지 중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덕목이 무어냐고 필자가 지나듯 물었더니 예쁜 안내직원이 한참을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는 아닌 거 같다”고 답해 일행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예시는 속이 다 시원해지는 베르디키오(verdicchio) 와인의 명산지이기도 하다.
예시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레카나티(Recanati)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예외 없이 좋아하는 시인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i, 1798-1837)의 생가와 박물관이 볼 만하다. 카루소를 잇는 테너로 사랑받던 질리(Begnamino Gigli)의 고향으로 역시 그의 박물관이 있다. 인근 마체라타(Macerata)는 시내 한가운데 원형경기장이 인상적인 마을로 청나라 선교에 공이 큰 예수회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태어난 곳이다. 이 다양한 출신 인물들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이탈리아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영원한 분이 살던 곳을 통째로 모셔다가 보관한 곳도 이 부근이다. 또 하나 언덕 높이 빛나는 마을 로레토(Loreto). 아드리아 푸른 바다가 손에 닿을 듯한 언덕 위에 성모 마리아 성가(聖家, Santa Casa)가 있다. 팔레스타인에 있던 누옥을 천사들이 날아 옮겨왔다는 전승이다.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 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에(Medjugorje)보다 훨씬 오래된 원조 ‘마리아 성지’(Marian Shrine)다.
로레토를 공식 순례지로 만든 산타 카사
알맹이 산타 카사는 고대에 지은 단칸 돌집이다. 진짜라는 느낌과 가난하다는 확인을 주기에 충분하다. 르네상스의 거장 브라만테와 상갈로 솜씨라는 화려한 부조의 대리석 건조물에 싸여 널찍한 교회(Santuario della Santa Casa)의 제단 자리에 위치해 있다. 산타 카사가 옮겨져 왔다는 해는 1294년이다. 기독교사에 유명한 1300년 보니파키우스 교황이 주관한 성년(Holy Year) 행사가 있기 6년 전의 일이다. 이해부터 로마가 예루살렘의 대체 순례지로 공인이 된 사연은 지난 4월호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산타 카사의 ‘등장’으로 로레토가 나사렛 대신 공식 순례지로 데뷔했다. ‘천사 공수(空輸)론’에 대하여는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천사들이 아니라 ‘천사’ 뜻의 성(姓)을 가진) 안젤리(Angeli) 가문 주도로 분해, 운반되어 왔다는 보다 현실적 설명이 제시되기도 했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이런저런 성유물이 적지 않게 있지만 산타 카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직접 접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런 상징성만으로도 로레토는 빼놓지 못할 순례지가 되었다. 갈릴레이도 두 번이나 다녀갔고 데카르트, 몽테뉴, 괴테, 모차르트 등 알프스를 넘어와 다녀간 해외 저명인사들도 적지 않다. 모차르트의 <로레토 기도곡>(K195)은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매년 6월 로레토-마체라타 간 순례길 걷기는 제법 알려진 관광상품이다.
로레토부터 아드리아 해변 길을 따라 좋은 마을들이 많다. 마르케의 주도(州都) 앙코나(Ancona)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살았던 북방 한계였다. 고대 로마 때 브린디시(Brindisi)가 성지와 레반트로 가는 관문이었다면 앙코나는 달마티아 너머 판노니아, 다키아 쪽으로 원정 가는 출발지였다. 르네상스 교황들 중 최고 지성으로 공인받는 피우스 2세(Pius II, 1458-64 재위)가 모처럼 십자군을 일으킨 후 성대한 출항을 그리며 병든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으나 유럽 각국의 호응이 한심한 수준인 것을 보고 쓰러져 잠든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크로아티아(스플릿, 두브로브닉), 그리스(코르푸, 파트라스)로 페리가 다니는 바쁜 항구다. 로시니(Giacomo Rossini)의 고향인 페사로(Pesaro)와 르네상스 초기 로마냐 일대를 호령하던 말라테스타 가문의 주요 근거지 파노(Fano) 들이 두루 들러볼 만하지만 시간 없는 우리는 그라다라(Gradara)로 바로 가자.
그라다라는 피의 역사로 얼룩진 요새형 성채(Rocca)를 중심으로 잘 보존된 중세마을이다. 본래 13세기 이 지역에서 입신한 말라테스타 가(家)의 소유에서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에 넘어갔다가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의 손을 거쳐 결국 교황이 차지한다.
한때 성주였던 조반니 스포르차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팜므 파탈(femme fatale)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첫 남편이다. 음모라면 한 수 하는 보르지아 교황이 13살짜리 딸을 정혼(定婚)할 때 뒷계산이 없었을 리 없다. 갖은 음모와 투쟁으로 손바뀜이 심했던 성채의 메인 홀 입구에 새겨진 경구(警句)가 시대상을 전해 준다: ‘MALEDICTVS HOMO QVI COFIDIT IN HOMINEM’(‘인간을 믿는 인간에게 저주 있으리!’). 라틴어지만 익숙한 어간(語幹)만으로도 뜻을 짐작할 만하다.
지세 따라 쌓은 성채(castello)가 요새 목적에 그치지 않고 구조와 치장이 남다르다. 본채 1층의 포르티코(portico)나 2층의 르네상스식 주랑(柱廊, loggia)은 방어뿐 아니라 생활을 고려한 증거들이다. 성채 문화는 이렇게 저택(palazzo) 문화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모범적 현장 우르비노
이제 우리는 우르비노(Urbino)로 간다. 이번 여행 하이포인트 중 하나다. 우르비노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여러 측면에서 구상하고 일부는 실천한 모범적 현장이다.
우르비노를 오늘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일으킨 이가 앞서 구비오에서 얘기했던 페데리코 몬테펠트로다. 우르비노를 피렌체나 밀라노는 몰라도 만토바(Mantova)나 페라라(Ferrara)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일으켰다. 마르케의 산골짜기에서 놀라운 일이다. 만토바나 페라라의 경우 각각 곤차가(Gonzaga), 에스테(Este) 가문이 누대(累代)에 걸쳐 축적한 공업(功業)이지만 페데리코는 이를 거의 홀로 당대에 이룬 셈이다.
그는 문무를 겸전한 이였다. 겸전한 정도가 또 남다르다. 용병대장으로 입신한 것은 많은 르네상스 군주들과 공통이지만 그는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일이 없다. 당시 최강이라던 베네치아의 콜레오니(Bartolomeo Colleoni, 성 조반니와 파올로 교회 앞 광장에 베로키오의 기마상이 유명)도 물리쳤다. 한창 때는 가만히만 있어 달라는(전투 불참) 조건으로 계약한 일이 있을 정도다. 예술과 문학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겼다. 손에는 늘 역사서나 기도서가 들려 있었다고 한다. 그의 도서관은 바티칸 도서관 빼고는 유럽 최고의 규모요 수준의 장서를 자랑했다.
나아가 국부의 증대와 신민의 복리를 생각하고 궁실 경비를 최소화해 검소와 겸손의 미덕을 실천한 것은 당시 군주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당대에 이미 ‘이탈리아의 빛’으로 불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국 운영의 모범사례로 꼽았다. 부르크하르트도 역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 칭송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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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비노 공원의 라파엘 동상. 팰렛을 들고 선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귀엽다. |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을 교회의 성인들이 아니라 고대의 역사인물에서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스틸리오네 자신이 만토바 귀족 태생으로 유럽 각국의 궁정과 교유(交遊)한 ‘르네상스인’이다. 요즘으로 치면 정치인, 외교관, 군인, 시인, 저술가, 예술비평가에, 그리고 역시 ‘연애박사’(homme ’a femme) 자질까지 두루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궁극적 사교인의 자질로 첫손에 꼽은 용어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어떠한 의식적 노력의 흔적도 드러나지 않은 무관심에 가까운 자연스러움’ 정도의 뜻)는 오늘날에도 가끔 인용된다. 친구 라파엘(Raffaello Sanzio, 1483-1520)이 그려 준 그의 초상화가 파리 루브르에 걸려 있다.
하이 르네상스의 대표화가 라파엘도 우르비노 사람이다. 생몰 연대가 조금 엇갈려 페데리코 몬테펠트로와는 이승을 함께하지 못했으나, 페데리코의 자부(子婦)로 궁정의 사교를 이끌던 엘리자베타 곤차가(Elisabetta Gonzaga, 1471-1526)의 초상화를 그려 피렌체의 우피치에 남겼다. 많은 르네상스의 거장들 특히 초기 인문주의 예술의 대가들이 우르비노에 다녀갔다. 알베르티, 피사넬로, 파올로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보티첼리 등등이다. 공작궁 건물 안에 있는 마르케 국립미술관에는 ‘아, 이 그림이 여기 있었네’ 싶은 그림들이 적지 않다. 건물 한구석에 없는 듯 자리 잡은 서재(studiolo)가 일품이다. 페데리코가 공부하고 명상하던 곳이다. 조형미와 공간감이 서로 도와 미감과 기능성이 두루 살아 있다.
유럽 최대의 해수욕장이 있는 리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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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레오 성에서 내려다본 파노라마. 멀리 보이는 산줄기에 산마리노 공화국이 있고 그 너머가 아드리아 바다다. |
당시 몬테펠트로 가의 손님으로 체류 중이던 귀족 하나가 성인의 설교에 감명받아 인근 라베르나(La Verna) 산을 선물로 기증했고 성인은 몇 년 뒤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다섯 군데 성흔(stigmata)을 입는다. 단테는 이곳을 연옥(purgatorio) 경치 묘사의 모델로 삼았고, 마키아벨리는 산레오의 성채야말로 이탈리아 최고의 군사건축이라고 추켜세웠다.
산레오 성은 18세기부터 교황청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서 복역 중에 옥사한 저명 수인(囚人) 중 하나가 주세페 발사모(Giuseppe Balsamo, 1743-95), 일명 칼리오스트로 백작(Conte di Cagliostro)이다.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태생으로 그야말로 일정한 직업 없이 가진 재치 하나로 계몽시대의 반계몽성을 파고들며 유럽 각국 궁정을 무상으로 출입하고 실러, 괴테 등 당대 최고 지성들과 교유한 희한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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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레오 마을. 초기 교회들과 예쁜 가게들이 있는 산중의 중세마을이다. 멀리 산정에 산레오 성이 보인다. |
이미 고대 로마제국 시절 초대, 2대 황제가 다녀가며 아우구스투스 개선문과 티베리우스 교(橋)를 남겼다. 13세기 초반 30여 년간 신성로마 황제 페데리코 2세의 치하에 있었지만 그의 흔적은 별로 없다. 이 일대가 교황령이 된 후 그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증오가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물론 주종은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까지 리미니를 근거지로 이 일대를 주름잡던 말라테스타 가의 발자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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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테스타 사원의 정면. 고전 건축의 요소들을 활용해 알베르티가 디자인한 초기 르네상스 건축이다. |
성 시지스몬도(독일명 지기스문트)는 13세기 독일 사람으로 전사(戰士)들의 수호성인이다. 외관을 보면 순수 고전 모티프만을 활용한 르네상스 최초의 건물이란 평가가 알베르티의 이름과 어울린다. 내부 장식은 많이 달라 시지스몬도의 세속 취미가 크게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성경과 성인의 이야기보다는 신화와 영웅설화, 천체와 신비스런 동물 등 이교도 소재 일색이다. 당시 교황 피우스 2세는 반목 관계이던 시지스몬도에게 살인, 간통, 친간, 신성모독, 위증 등의 죄를 물어 ‘악마 숭배자’로 규정하고 파문했다. 배경에는 말라테스타의 이런 취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후진(後陣) 흰 벽에 지오토의 그리스도 수난상(crocifissione)만이 이곳이 종교공간임을 말없이 담보하는 듯하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의 것과 함께 ‘공인’된 지오토의 성십자가 중 하나다. 지오토는 아시시의 작업을 마치고 파도바의 스크로베니(Scrovegni)한테 가는 길에 리미니에 머물렀었다.
100년 이상 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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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미니 시내의 트라이아노 다리. 2000년 된 다리 위로 사람들은 물론 차량들도 다니니 놀라울 뿐이다. |
성 비탈레(San Vitale) 교회는 라벤나 시내 한가운데 있다. 밖에서 보는 육중한 느낌과 안에서 볼 때의 텅 빈 느낌의 조화가 묘하다.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 건축에서도 되풀이된 방식이다. 내부 천장과 벽면을 뒤덮은 수십만 개의 채색 대리석, 금빛 대리석 조각으로 된 모자이크 장식.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황비 테오도라가 성자와 신하들을 대동하고 나란히 서 있는 후진(後陣, apside)의 모자이크는 미술사 교과서에 익숙한 이미지다. 익숙한데 낯설다. 황제는 물론 신하들까지 성인들과 같은 크기에 같은 용모로 그렸다. 로마 교회의 영향권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이다.
콘스탄틴 대제라는 한 인물이 공인해 준 교회요 창건한 수도인데, 불과 200년이 안 되어 두 교회 간에 간단찮은 간격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공식 ‘대분열’은 다시 500년이 지난 후 일어난다. 같은 경내에 갈라 플라치디아(호노리우스 황제의 누이)의 묘소(Mausoleo di Galla Placidia)의 모자이크 솜씨가 전혀 못지않다. 5세기 중반 아직 서로마일 때의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모자이크 전통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Sant’Apollinare in Classe) 교회의 모자이크도 빼놓을 수 없다. 과연 라벤나는 서유럽에서 유일한 비잔틴 예술의 견본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도 우리는 역사의 큰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라벤나에서도 생각나는 인물이 몇 있다.
우선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Theodoric). 오도아케르를 몰아내고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해 40여 년을 통치했던 사람이다. 그는 야만인에 무골로서 일자무식의 비교도였으나 학습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일부 용병대장들을 상기시키는 자질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일대를 돌아보며 가다듬은 공공정신과 문화소양은 오히려 정통 로마인보다 한 수 위였다. 라벤나에 와서도 야만의 파괴본능과는 거리가 있는 치적을 남겼다.
다만 한 가지, 그는 개종할 때 가톨리시즘이 아닌 아리아니즘(Arianism)을 택했다. 비잔틴에 이어 8세기 후반 프랑크 족이 들어오면서 이 지역은 교황의 영향권에 들었고, 로마 교회의 이교(異敎) 억압 본능은 테오도리크가 누리던 동시대인들의 추앙을 퇴색시켰다. 초기 라벤나 건설의 대공은 묻힌 채 야만족 추장의 이미지만 남은 것이다. 공자가 설파한 춘추 필법의 행방을 새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테오도리크 묘소(Mausoleo di Theodoric)의 낯선 건축양식이 상상을 자극하고 그가 지었다는 아리안 교도 세례당(Battistero degli Ariani)이 이채롭다.
또 한 사람 단테(Dante Alighieri). 1302년 사랑하는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라벤나에 와 <신곡> 저술을 시작했고 20년 뒤 이곳서 숨을 거두었다. 피렌체는 과거 한동안 단테의 유해 이관을 거듭 요구했으나 라벤나 시(市)의 무대응으로 이제는 포기했다고 한다.
<신곡>이 이탈리아 최대의 베스트 셀러가 되고 유럽 문학의 고전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신곡>에 앞서 중세 내내 애독된 최장 베스트셀러도 라벤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 저자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는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테오도리크 왕의 집정관을 지냈다. 이탈리아의 역사적 베스트셀러 작가 두 명이 모두 라벤나 연고자인 셈이다. 영국 사람들은 여기에 바이런(Lord Byron, 1788-1824) 역시 라벤나에 2년을 살며 <돈 주앙>을 썼다고 덧붙이지만 우리의 주관심사에서는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다.
알프스와 아펜니노가 평지가 되어 만난 지역에 포(Po) 강이 흐르고 그 강물이 아드리아 바다와 만난 델타 지역의 남북으로 라벤나와 베네치아가 있다. 다음 달에는 포강을 넘어 베네치아를 찾아가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