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 49세. 서울대 국문과·同대학원 졸업.
⊙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 수상.
⊙ 소설집 : 《처녀치마》 《분홍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 장편소설 : 《푸르른 틈새》 《레가토》 《장독 뒤에 숨어서》.
⊙ 오영수 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 49세. 서울대 국문과·同대학원 졸업.
⊙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 수상.
⊙ 소설집 : 《처녀치마》 《분홍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 장편소설 : 《푸르른 틈새》 《레가토》 《장독 뒤에 숨어서》.
⊙ 오영수 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초록으로 변한 가로수를 바라보면 생선비늘 같은 나뭇잎이 허공에 흔들린다. 팔을 흔들며 간절히 무언가를 기도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안정을 준다는 초록색. 무심히 초록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 사소한 시선이 희망이다. 요즘 영원히 깨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잠에 빠졌다. 기억이라는 이웃집으로 보내야 하는데, 머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럴 때 권여선 작가의 《사랑을 믿다》를 읽은 건 다행이다. 석가는 팔고(八苦)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라는 뜻이다. 《사랑을 믿다》에서 주인공 그녀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 상태에 있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라고 했다.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고 마음의 메인보드를 그쪽으로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작가는 밤마다 꿈속에 아이들이 보여 글쓰기를 못 한다. 사람에 대한 남다른 성찰과 관찰로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밤마다 아이들의 노크소리를 듣는 건 당연하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온 인류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손쉽게 극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는,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도 삼 년 전에 그런 일을 겪었다는 정도이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비밀도 아니다. 난 사랑을 믿은 적이 있고 믿은 만큼 당한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믿은 적이 있다는 고백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 -본문에서
이 소설은 3년 만에 만난 그녀가 자신을 좋아했던 것을 알고 뒤늦게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한때 같은 직장을 다녔던 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 남자는 그런 시간을 사랑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사랑으로 규정지었던 여자는 실연의 상처를 홀로 견뎌야 했다고 술을 마시며 담담히 이야기한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었다. 그 사이 취향이 독특해져 술도 안동소주에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마시자고 한다. 남자는 그때 다른 여자가 생겨 그녀에게 소원해진 것뿐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실연이 되었다는 사실에 회한이 밀려왔다. 그녀가 얼마 전 친척으로부터 건물을 상속받았다는 말을 할 때는 후회가 점점 커져 갔다. 자신을 사랑했다는 여자가 어엿한 재력가가 된 현실이 자꾸만 그를 쓸쓸해지게 만들었다.
《사랑을 믿다》는 친척집이 모티브
―이상문학상 수상작 《사랑을 믿다》는 어떻게 보면 ‘연애학 개론’으로 보입니다. 실제 실연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서 쓴 겁니까.
“실제 실연한 얘기를 듣거나 제 경험을 투영한 얘기는 아니고, 오히려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친척분네 3층집’의 음산한 분위기에 있어요. 예전에 친척분 집 위층에 점집이 있었나 봐요. 간판 표시가 제대로 안 되었던 건지, 친척분 집을 점집으로 오인해 낯선 사람들이 자꾸 집에 들어와 앉아 있곤 했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을 했죠.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이 앉아 있고, 그 자리에 막 실연한 젊은 여자를 앉혀두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이 소설을 우리 모두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는 쿨하고 이성적이면서 막상 자신이 실연을 당하게 되면 얼마나 유약하고 자학적이 되는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망상에 시달리게 되는가, 그런 이야기를 느낌으로 쓰고 싶었어요. 그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요. 이 소설에서는 한번은 여자이고 한번은 남자인, 그런 정도입니다.”
―본인의 이야기가 들어갔느냐고 물어보면 실례가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독자들이 작품에 대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 그것이죠. 이게 누구 이야기냐, 작가 이야기가 얼마만큼 들어가 있느냐, 그게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출발이고 호기심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믿다》는 친척 3층집 에피소드가 선명하게 들어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약콩이 끓는 동안〉 〈가을이 오면〉 단편에 비해 제가 거의 안 들어가 있어요. 그 당시 《분홍리본의 시절》이라는 소설집을 내고 처음 청탁을 받고 쓴 소설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분홍리본의 시절》이 너무 칙칙하고 섬뜩하고 외설적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그래서 뭔가 산뜻한 연애소설을 써보자 하고 썼는데 예상외로 이상문학상을 받았어요. 의도만큼 썩 산뜻한 연애소설은 안 됐지만, 실연의 극복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동안 제가 썼던 작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썼어요. 그래서 제 작품들 가운데서는 좀 예외적인 소설이기도 해요.”
―평소 쓰던 대로 쓰지 않았는데, 그게 상을 받은 게 됐네요.
“네 그런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연당한 여자를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나요.
“(웃음)젊었을 때 저도 실연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그때는 뭐랄까 굉장히 이상한 상태, 그런 상태가 빨리 끝나기 바라면서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상태, 모든 일상이 다 무의미하고 그랬죠. 그건 누구에게나 다 보편적인 경험이니까요. 실연을 당하고 기운이 펄펄 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되살려서 쓸 수 있었던 거죠.”
―본문에서 점집 에피소드가 무척 사실적이고 재밌습니다.
“저도 그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소설이 막 행동하는 것보다 어떤 곳에서 머물고 얘기하고 느끼는 게 많거든요. 점집은 저도 쓰면서 재밌었어요. 남녀가 술을 마시는 기차간 같은 술집도 중요하고요. 소설에서 공간이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친척분 집에 가봤는데, 약간 그런 분위기였어요. 거실이 어두컴컴하고, 현관에 커튼도 쳐 있었고요. 거기에 어떤 사람을 앉혀놓을까, 그러다 점을 보러 온 세 사람이 노닥거리고 있는 상태, 딸이 실연한 줄도 모르고 엄마가 친척 집이라도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어 갔는데, 점집으로 오인하여 들어온 손님들이 친척 집에 앉아 있었죠. 저는 그녀를 그 상태에다 그냥 나란히 놔두고 싶었어요. 그녀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독자들이 상상하도록 가능한 한 인색하게 썼어요. 짐작건대, 단순하게는 ‘세상에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는 정도의 상대적인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에서도 표현한 바 있듯이 아마 그들을 향한 ‘꿀처럼 끈적이는 불행의 연대감’이 그녀에게 알 수 없는 힘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무엇을 통한 연대이건, 연대를 느낀다는 건 공감한다는 것이고, 공감하는 힘은 자기 자신을 조금 더 넓고 강하게 만드니까요.”
“안 좋은 일 있을 땐 낯선 곳에서 위로받아야”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해도 치유가 될 때가 있죠.
“그렇죠. 네가 지금 실연을 당해서 힘들 텐데 어떡하냐, 그런 식의 눈에 보이는 뻔한 의도적인 위로보다 남모르는 상황에 있을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 자신은 지금 실연을 당해 슬프고 고독한 상태에 있는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곁에서 툭 치고 들어오는 것이 있죠. 그들에게서는 불가해하고 당황스러운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자기하고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위로는 오버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실연당하거나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오히려 낯선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리얼한 현장묘사가 쉽지는 않잖아요.
“그게 뭐 소설 쓰는 고통이자 재미죠. 어떤 장면을 쓰려면 가만히 집중해서 그곳이 어떤 곳일까 하나씩 하나씩 인테리어를 해나가야 해요. 그러면 제 머릿속에 새로운 공간이 하나 생기는 거죠.”
―작중 화자가 실연의 유래에 대해 언급하는데, 실연을 당하면 이 소설에 쓰인 매뉴얼대로 실행해도 될 듯도 합니다만.
“글쎄요. 매뉴얼은 매뉴얼일 뿐입니다. 실연에 대한 극복방법은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실연을 당하면 각자 자기에 맞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절하게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극복했다고 해서 그 매뉴얼대로 다음번 실연을 또 극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연은 소설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모든 매뉴얼은 사후적이고, 일회적입니다. 결국 매뉴얼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녀는 오랜만에 옛 남자를 만나러 나가면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왜 그런 성의 없는 모습을 하고 나간 걸까요.
“그게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됐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남자에게 마음이 좀 남아 있거나 그랬으면 그런 차림으로 나가지 않았겠죠.”
―일종의 장치였네요. 화장을 안 해서 얼굴이 부어 보이게 한 것도.
“여자들이 화장을 하면 안 그런데, 화장을 안 하면 얼굴이 부어 보이고 색깔도 동남아 여자들처럼 보이잖아요. 남자는 그런 섬세한 차이를 모르고, 그녀가 옛날보다 검소해졌다거나, 형편이 어려워졌나 그런 쪽으로 상상을 하죠. 여우 같은 여자와 연애하다 차이고 3년 만에 그녀를 만나러 왔는데, 기대가 컸겠죠. 그런데 그녀는 옷을 예쁘게 입지도 않았고, 화장도 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부정적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거죠. 예약을 해놨다고 해서 굉장히 좋은 곳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고. 기차간 같은 술집에 들어가서 어디에나 흔히 다 있는 안주를 시키고, 특이한 것은 안동소주에 맥주를 섞어 마시자고 하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까 남자는 이 여자가 상당히 실패를 한 건 아닌가 그런 추측으로 치달려 갔죠. 3층짜리 건물을 상속받았다는 얘기를 듣기까지는요.”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한 것 같아요.
“네. 여자들이 곧 죽어도 명품백을 드는 게 남자들이 잘 속기 때문이죠.”
―화자인 남자는 결국 자신도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실연이 공평해지죠.
“제가 남성 화자는 잘 안 쓰는데 이 소설에는 그렇게 썼어요. 사실은 남자들 같은 경우 옛날에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를 만나면 시시콜콜한 말을 하지 않잖아요. 여기서 두 남녀는 서로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들이죠. 화자는 남자지만 주인공은 여자잖아요. 그녀의 얘기를 하기 위해서 남자는 ‘틀’ 같은 거죠. 그래서 독자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그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죠. 3년 만에 만난 여자가 한때 자신을 좋아했고 자신에게 실연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무척 놀라죠. 친하게 지낸 여자로 기억하고 만나러 왔는데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었다는 회한과 그때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되잖아요. 그 부분은 제 무의식이 좀 들어갔나 봐요. 끝에 가서는 남자가 실연을 당하게 되니까요. 화자를 아무렇지 않게 만들 수도 있는데 뭔가 애잔하게 그녀를 그리워하게 만들어놓았어요.”
“소설처럼 실제도 먹고 마시는 것 좋아해”
―여자가 자기감정을 좀 드러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남자에게 감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죠.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귀니까 거절당했다고 느낀 거고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녀와 좀 더 오래 만났겠죠. 그러면 사랑이라는 규정을 지으며 사귈 수도 있었고요. 그 당시 남자는 여우 같은 여자와 연애에 빠져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던 거죠. 다시 그녀를 만난 후 뒤늦은 연애감정이 생겼지만, 그 옛날 여자처럼 표현을 못 하는 건 자기도 여자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처리하려고 하는 게 있는 거죠.”
―우정, 사랑, 가족, 상사 그런 ‘관계망’에서 오는 갈등을 상당히 현실적으로 쓰는데, 그러자면 인간관계에 대한 힘든 경험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하는 만큼의 경험을 저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제가 소설가이기 때문에 그 경험을 골똘히 오래 곱씹고 반추한다는 데 있겠지요. 세상에 힘들지 않은 관계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게 삶의 비극이자 스릴이지요.”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나 봐요.
“소설에는 그렇게 썼지만 제 성격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연애감정에는 수줍은 면이 있어요. 화도 잘 내고 좋으면 좋다 표시도 잘 하는데 누구를 좋아하는 그런 마음은 표현이 쉽지 않더라고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런 면도 걱정스럽고, 정말 내 마음은 어느 정도인가, 이렇게 표현해도 될 정도로 끓어오르고 있는가, 그런 면도 자신이 없고. 아무튼 복잡한 것 같아요, 사랑이란.”
―〈약콩이 끓는 동안〉 〈가을이 오면〉 소설에는 성장통을 겪는 숙녀가 있습니다. 성격이 좀 닮았나요.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을이 오면〉보다 〈약콩이 끓는 동안〉에 제 모습이 더 많이 들어가 있는 듯합니다. 저도 성장통을 겪는 숙녀였던 적이 있으니까요.”
―권 작가 소설에는 유난히 먹고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래서 한번은 절대 먹고 마시는 장면이 안 나오는 소설을 쓰자 작심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현실에서의 저는 어떤가 하면, 소설보다 더합니다(웃음). 조금 과장하자면, 먹고 마시는 것이 거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준입니다. 맛있는 안주와 술 마시는 걸 좋아해요. 그렇다고 값비싼 요리를 먹는 건 아니고, 제철 재료의 고유한 맛을 살려 조리한 음식을 좋아합니다. 이를테면 잘 말린 무청으로 만든 시래기나물이나 요즘 한창 나오는 참죽순으로 만든 참죽나물 같은 것에 막걸리를 먹는 식이지요(웃음).”
―술안주로 나물이 의외로 어울리는 궁합이더라고요.
“무청 시래기는 특히 맥주 안주로도 좋더라고요. 저는 무청 시래기를 저장해 두고 먹는데, 그거 한 번씩 만들 때는 정말 힘들어요. 말린 거 불려야 하고 몇 시간 넘게 삶고 껍질 벗기고, 한 3일은 고생고생해서 1년치 먹을 것을 냉동실에 만들어놔요. 출출할 때 한 번씩 꺼내서 해먹으면 아주 좋아요.”
―‘안주’에 대한 철학이 있네요.
“그런가요. 저는 드라마에서 실연당하고 술만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화가 나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안주를 하나라도 먹으면서 마시지 어떻게 저러지 하죠.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등장해서 술 마시는 장면 같은 것도 돈이 없으니까 안주는 못 시켰더라도 하다못해 단무지라도 집어 먹게 해야죠. 무작정 술만 먹고 있으면 화가 나는 거죠. 저렇게 리얼하지 못하게 하다니 포장마차 가서 김 나는 어묵을 시켜놓고도 소주만 마시고 나가버리면 속이 터져요. 술과 안주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죠. 저는 술이 있으면 안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술과 어울리는 안주면 더 좋고요.”
“결혼을 꼭 국가에 알려야 할까”
―세월호 사건 때문에 울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저도 답답하고 비통해서 글을 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일 때문에 가슴이 아파서 마감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원고를 보내지 못했어요. 엉터리 같고 무책임한 사회체제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마치 카프카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아요.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데, 내부는 도대체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악의에 의해서 작동되는 그런 닫힌 세계에 대해 무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글을 쓸 때 주변을 차단하고 쓰는 편인데, 그럴 수가 없어요. 꿈을 꾸면 배에 타 있고, 이상한 상황에 놓여 있어요. 자기 전에도 자고 나서도 집중이 잘 안 돼요. 외부를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완벽한 차단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비행기가 뚝 떨어진 상황하고는 다른 거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기다리게 하는 사람들 두 가지가 다 있으니까, 감정이 다 똑같이 생기고 그런 안타까운 감정이 온 국민들에게 다 똑같이 생기고 모두 다 우울한 것 같아요.”
―결혼은 하셨나요.
“안 했어요. 10년쯤 만나는 남자친구는 있어요. 저는 굳이 결혼한 사실을 국가에 알려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걸 싫어하니까요. 오랫동안 함께 사귀다가 살 수 있으면 살아도 보고 정말 좋으면 결혼도 하는 거죠. 연애의 과정 속에서 결혼은 꼭 해야 하고 절대로 헤어지면 안 되고 그런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사슬은 이제 개선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개인적인 차이를 못 견뎌서 헤어지는 것도 있지만 집안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도 많아요. 〈사랑과 전쟁〉에도 나오지만 아닌 것을 서로 강요하고 사랑하니까 괜찮지 그러는 건 사랑이 아니고 속박이죠. 사랑이란 그럴 듯한 포장지가 아니죠. 서로가 현실적인 장애가 없어야죠. 그런 자유로운 상태가 좋아요.”
―계약결혼이 이상적이라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그렇죠. 시간이 없으니까 더 아껴주고 사랑하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겠죠. 고통스러워도 견딜 수 있고요.”
―안동이 고향인데, 부모님이 결혼 안 하는 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동에서는 태어나고 다섯 살까지 살았어요. 그래서 기억이 없어요.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제가 살았을 때는 사람 열 명 중 일곱 명이 권씨였대요. 집성촌의 의미가 강했던 거죠. 제가 처음 등단했을 때 안동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안동 출신 작가라고 안동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는데 저는 거의 기억이 안 났죠. 피디랑 사진 찍는 분이 왔는데 차 기사분이 안동 권씨라는데 그분이 거의 왕이시더라고요. 저한테 ‘아버님이 몇 대 누구신가’ 물어요. 잘 모른다고 했더니 ‘이런 괘씸한’ 이런 표정이었어요(웃음). 아버님보다 권씨가 아닌 어머니가 의외로 엄하셨어요. 하지만 결혼 부분에서는 어머니가 의외로 너그러우셨어요. 딸이 셋에 제가 셋째 딸인데 시집가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했어요. 똑똑하게 출세나 해라 식이었죠. 어머니는 저한테 돈 잘 버는 걸 바라신다기보다 신문에 한 번 났다 그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신문에 인터뷰 나오면 오려 가지고 다니시고. 신문도 《조선일보》만 보세요. 《조선일보》에 나갈 일이 거의 없는데, 한 번씩 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거론돼도 그걸 오려 가지고 다니세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
―서울대 국문과에서 석사까지 하셨네요. 과외도 꽤 하셨고요.
“그렇죠. 대단한 건 아니지만, 대단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덕분에 과외를 10년 가까이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부터 과외로 번 돈으로 집을 도왔어요. 소녀가장이었던 건 아니지만, 저는 과외비를 부모님한테 다 드리고 용돈을 받아서 썼으니까요. 용돈이 적어 술 마시고 나면 차비가 없어 학교에서 자기도 했어요.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과외를 그만두고 출판기획사를 전전하며 알바를 많이 했어요. 자서전 대필도 하고 그랬는데 힘들었어요. 그러다 등단하고 소설을 쓰면서는 제가 좋아하는 일인 소설만 쓸 수 있어서 좋았어요. 혼자 하는 일이니까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만나도 되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면서 좋아하는 일 하고 사는 거죠.”
―인세는 어떤가요.
“그게 좀 함정입니다. 단편집은 4000~ 5000부 팔리는데 인세가 10%죠. 보통 단편집 하나 내면 원고료와 인세 합쳐서 1000만원 정도 번다고 생각하면 돼요. 3년에 한 권 정도 나오니까 연봉이 330만원이네요(웃음). 그 사이에 장편도 쓰지만 생활비를 인세나 원고료로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장독 뒤에 숨어서》라는, 지금 쓰는 장편은 언제 출간할 예정입니까.
“《자음과 모음》에 연재하고 있는데 가을호까지 나오면 10월쯤 책이 나올 거 같아요. 70년대 배경이고 어느 동네에 세들어 사는 한 식구 얘기라고 할까요.”
―《사랑을 믿다》는 소설 제목처럼 사랑이라는 걸 믿습니까.
“그럼요. 믿고 말고요. 저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인 것 같아요. 사람이 어떤 호된 일을 당하면 감정이라는 게 다 말라붙을 수가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사랑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게 없다면,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살 수가 없는 거죠(웃음).”⊙
작가는 밤마다 꿈속에 아이들이 보여 글쓰기를 못 한다. 사람에 대한 남다른 성찰과 관찰로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밤마다 아이들의 노크소리를 듣는 건 당연하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온 인류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손쉽게 극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는,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도 삼 년 전에 그런 일을 겪었다는 정도이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비밀도 아니다. 난 사랑을 믿은 적이 있고 믿은 만큼 당한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믿은 적이 있다는 고백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 -본문에서
이 소설은 3년 만에 만난 그녀가 자신을 좋아했던 것을 알고 뒤늦게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한때 같은 직장을 다녔던 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 남자는 그런 시간을 사랑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사랑으로 규정지었던 여자는 실연의 상처를 홀로 견뎌야 했다고 술을 마시며 담담히 이야기한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었다. 그 사이 취향이 독특해져 술도 안동소주에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마시자고 한다. 남자는 그때 다른 여자가 생겨 그녀에게 소원해진 것뿐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실연이 되었다는 사실에 회한이 밀려왔다. 그녀가 얼마 전 친척으로부터 건물을 상속받았다는 말을 할 때는 후회가 점점 커져 갔다. 자신을 사랑했다는 여자가 어엿한 재력가가 된 현실이 자꾸만 그를 쓸쓸해지게 만들었다.
《사랑을 믿다》는 친척집이 모티브
―이상문학상 수상작 《사랑을 믿다》는 어떻게 보면 ‘연애학 개론’으로 보입니다. 실제 실연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서 쓴 겁니까.
“실제 실연한 얘기를 듣거나 제 경험을 투영한 얘기는 아니고, 오히려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친척분네 3층집’의 음산한 분위기에 있어요. 예전에 친척분 집 위층에 점집이 있었나 봐요. 간판 표시가 제대로 안 되었던 건지, 친척분 집을 점집으로 오인해 낯선 사람들이 자꾸 집에 들어와 앉아 있곤 했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을 했죠.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이 앉아 있고, 그 자리에 막 실연한 젊은 여자를 앉혀두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이 소설을 우리 모두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는 쿨하고 이성적이면서 막상 자신이 실연을 당하게 되면 얼마나 유약하고 자학적이 되는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망상에 시달리게 되는가, 그런 이야기를 느낌으로 쓰고 싶었어요. 그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요. 이 소설에서는 한번은 여자이고 한번은 남자인, 그런 정도입니다.”
―본인의 이야기가 들어갔느냐고 물어보면 실례가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독자들이 작품에 대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 그것이죠. 이게 누구 이야기냐, 작가 이야기가 얼마만큼 들어가 있느냐, 그게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출발이고 호기심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믿다》는 친척 3층집 에피소드가 선명하게 들어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약콩이 끓는 동안〉 〈가을이 오면〉 단편에 비해 제가 거의 안 들어가 있어요. 그 당시 《분홍리본의 시절》이라는 소설집을 내고 처음 청탁을 받고 쓴 소설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분홍리본의 시절》이 너무 칙칙하고 섬뜩하고 외설적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그래서 뭔가 산뜻한 연애소설을 써보자 하고 썼는데 예상외로 이상문학상을 받았어요. 의도만큼 썩 산뜻한 연애소설은 안 됐지만, 실연의 극복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동안 제가 썼던 작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썼어요. 그래서 제 작품들 가운데서는 좀 예외적인 소설이기도 해요.”
―평소 쓰던 대로 쓰지 않았는데, 그게 상을 받은 게 됐네요.
“네 그런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연당한 여자를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나요.
“(웃음)젊었을 때 저도 실연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그때는 뭐랄까 굉장히 이상한 상태, 그런 상태가 빨리 끝나기 바라면서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상태, 모든 일상이 다 무의미하고 그랬죠. 그건 누구에게나 다 보편적인 경험이니까요. 실연을 당하고 기운이 펄펄 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되살려서 쓸 수 있었던 거죠.”
―본문에서 점집 에피소드가 무척 사실적이고 재밌습니다.
“저도 그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소설이 막 행동하는 것보다 어떤 곳에서 머물고 얘기하고 느끼는 게 많거든요. 점집은 저도 쓰면서 재밌었어요. 남녀가 술을 마시는 기차간 같은 술집도 중요하고요. 소설에서 공간이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친척분 집에 가봤는데, 약간 그런 분위기였어요. 거실이 어두컴컴하고, 현관에 커튼도 쳐 있었고요. 거기에 어떤 사람을 앉혀놓을까, 그러다 점을 보러 온 세 사람이 노닥거리고 있는 상태, 딸이 실연한 줄도 모르고 엄마가 친척 집이라도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어 갔는데, 점집으로 오인하여 들어온 손님들이 친척 집에 앉아 있었죠. 저는 그녀를 그 상태에다 그냥 나란히 놔두고 싶었어요. 그녀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독자들이 상상하도록 가능한 한 인색하게 썼어요. 짐작건대, 단순하게는 ‘세상에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는 정도의 상대적인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에서도 표현한 바 있듯이 아마 그들을 향한 ‘꿀처럼 끈적이는 불행의 연대감’이 그녀에게 알 수 없는 힘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무엇을 통한 연대이건, 연대를 느낀다는 건 공감한다는 것이고, 공감하는 힘은 자기 자신을 조금 더 넓고 강하게 만드니까요.”
“안 좋은 일 있을 땐 낯선 곳에서 위로받아야”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해도 치유가 될 때가 있죠.
“그렇죠. 네가 지금 실연을 당해서 힘들 텐데 어떡하냐, 그런 식의 눈에 보이는 뻔한 의도적인 위로보다 남모르는 상황에 있을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 자신은 지금 실연을 당해 슬프고 고독한 상태에 있는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곁에서 툭 치고 들어오는 것이 있죠. 그들에게서는 불가해하고 당황스러운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자기하고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위로는 오버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실연당하거나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오히려 낯선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리얼한 현장묘사가 쉽지는 않잖아요.
“그게 뭐 소설 쓰는 고통이자 재미죠. 어떤 장면을 쓰려면 가만히 집중해서 그곳이 어떤 곳일까 하나씩 하나씩 인테리어를 해나가야 해요. 그러면 제 머릿속에 새로운 공간이 하나 생기는 거죠.”
―작중 화자가 실연의 유래에 대해 언급하는데, 실연을 당하면 이 소설에 쓰인 매뉴얼대로 실행해도 될 듯도 합니다만.
“글쎄요. 매뉴얼은 매뉴얼일 뿐입니다. 실연에 대한 극복방법은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실연을 당하면 각자 자기에 맞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절하게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극복했다고 해서 그 매뉴얼대로 다음번 실연을 또 극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연은 소설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모든 매뉴얼은 사후적이고, 일회적입니다. 결국 매뉴얼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녀는 오랜만에 옛 남자를 만나러 나가면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왜 그런 성의 없는 모습을 하고 나간 걸까요.
“그게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됐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남자에게 마음이 좀 남아 있거나 그랬으면 그런 차림으로 나가지 않았겠죠.”
―일종의 장치였네요. 화장을 안 해서 얼굴이 부어 보이게 한 것도.
“여자들이 화장을 하면 안 그런데, 화장을 안 하면 얼굴이 부어 보이고 색깔도 동남아 여자들처럼 보이잖아요. 남자는 그런 섬세한 차이를 모르고, 그녀가 옛날보다 검소해졌다거나, 형편이 어려워졌나 그런 쪽으로 상상을 하죠. 여우 같은 여자와 연애하다 차이고 3년 만에 그녀를 만나러 왔는데, 기대가 컸겠죠. 그런데 그녀는 옷을 예쁘게 입지도 않았고, 화장도 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부정적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거죠. 예약을 해놨다고 해서 굉장히 좋은 곳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고. 기차간 같은 술집에 들어가서 어디에나 흔히 다 있는 안주를 시키고, 특이한 것은 안동소주에 맥주를 섞어 마시자고 하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까 남자는 이 여자가 상당히 실패를 한 건 아닌가 그런 추측으로 치달려 갔죠. 3층짜리 건물을 상속받았다는 얘기를 듣기까지는요.”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한 것 같아요.
“네. 여자들이 곧 죽어도 명품백을 드는 게 남자들이 잘 속기 때문이죠.”
―화자인 남자는 결국 자신도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실연이 공평해지죠.
“제가 남성 화자는 잘 안 쓰는데 이 소설에는 그렇게 썼어요. 사실은 남자들 같은 경우 옛날에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를 만나면 시시콜콜한 말을 하지 않잖아요. 여기서 두 남녀는 서로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들이죠. 화자는 남자지만 주인공은 여자잖아요. 그녀의 얘기를 하기 위해서 남자는 ‘틀’ 같은 거죠. 그래서 독자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그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죠. 3년 만에 만난 여자가 한때 자신을 좋아했고 자신에게 실연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무척 놀라죠. 친하게 지낸 여자로 기억하고 만나러 왔는데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었다는 회한과 그때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되잖아요. 그 부분은 제 무의식이 좀 들어갔나 봐요. 끝에 가서는 남자가 실연을 당하게 되니까요. 화자를 아무렇지 않게 만들 수도 있는데 뭔가 애잔하게 그녀를 그리워하게 만들어놓았어요.”
“소설처럼 실제도 먹고 마시는 것 좋아해”
―여자가 자기감정을 좀 드러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남자에게 감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죠.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귀니까 거절당했다고 느낀 거고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녀와 좀 더 오래 만났겠죠. 그러면 사랑이라는 규정을 지으며 사귈 수도 있었고요. 그 당시 남자는 여우 같은 여자와 연애에 빠져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던 거죠. 다시 그녀를 만난 후 뒤늦은 연애감정이 생겼지만, 그 옛날 여자처럼 표현을 못 하는 건 자기도 여자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처리하려고 하는 게 있는 거죠.”
―우정, 사랑, 가족, 상사 그런 ‘관계망’에서 오는 갈등을 상당히 현실적으로 쓰는데, 그러자면 인간관계에 대한 힘든 경험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하는 만큼의 경험을 저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제가 소설가이기 때문에 그 경험을 골똘히 오래 곱씹고 반추한다는 데 있겠지요. 세상에 힘들지 않은 관계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게 삶의 비극이자 스릴이지요.”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나 봐요.
“소설에는 그렇게 썼지만 제 성격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연애감정에는 수줍은 면이 있어요. 화도 잘 내고 좋으면 좋다 표시도 잘 하는데 누구를 좋아하는 그런 마음은 표현이 쉽지 않더라고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런 면도 걱정스럽고, 정말 내 마음은 어느 정도인가, 이렇게 표현해도 될 정도로 끓어오르고 있는가, 그런 면도 자신이 없고. 아무튼 복잡한 것 같아요, 사랑이란.”
―〈약콩이 끓는 동안〉 〈가을이 오면〉 소설에는 성장통을 겪는 숙녀가 있습니다. 성격이 좀 닮았나요.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을이 오면〉보다 〈약콩이 끓는 동안〉에 제 모습이 더 많이 들어가 있는 듯합니다. 저도 성장통을 겪는 숙녀였던 적이 있으니까요.”
―권 작가 소설에는 유난히 먹고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래서 한번은 절대 먹고 마시는 장면이 안 나오는 소설을 쓰자 작심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현실에서의 저는 어떤가 하면, 소설보다 더합니다(웃음). 조금 과장하자면, 먹고 마시는 것이 거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준입니다. 맛있는 안주와 술 마시는 걸 좋아해요. 그렇다고 값비싼 요리를 먹는 건 아니고, 제철 재료의 고유한 맛을 살려 조리한 음식을 좋아합니다. 이를테면 잘 말린 무청으로 만든 시래기나물이나 요즘 한창 나오는 참죽순으로 만든 참죽나물 같은 것에 막걸리를 먹는 식이지요(웃음).”
―술안주로 나물이 의외로 어울리는 궁합이더라고요.
“무청 시래기는 특히 맥주 안주로도 좋더라고요. 저는 무청 시래기를 저장해 두고 먹는데, 그거 한 번씩 만들 때는 정말 힘들어요. 말린 거 불려야 하고 몇 시간 넘게 삶고 껍질 벗기고, 한 3일은 고생고생해서 1년치 먹을 것을 냉동실에 만들어놔요. 출출할 때 한 번씩 꺼내서 해먹으면 아주 좋아요.”
―‘안주’에 대한 철학이 있네요.
“그런가요. 저는 드라마에서 실연당하고 술만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화가 나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안주를 하나라도 먹으면서 마시지 어떻게 저러지 하죠.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등장해서 술 마시는 장면 같은 것도 돈이 없으니까 안주는 못 시켰더라도 하다못해 단무지라도 집어 먹게 해야죠. 무작정 술만 먹고 있으면 화가 나는 거죠. 저렇게 리얼하지 못하게 하다니 포장마차 가서 김 나는 어묵을 시켜놓고도 소주만 마시고 나가버리면 속이 터져요. 술과 안주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죠. 저는 술이 있으면 안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술과 어울리는 안주면 더 좋고요.”
“결혼을 꼭 국가에 알려야 할까”
―세월호 사건 때문에 울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저도 답답하고 비통해서 글을 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일 때문에 가슴이 아파서 마감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원고를 보내지 못했어요. 엉터리 같고 무책임한 사회체제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마치 카프카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아요.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데, 내부는 도대체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악의에 의해서 작동되는 그런 닫힌 세계에 대해 무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글을 쓸 때 주변을 차단하고 쓰는 편인데, 그럴 수가 없어요. 꿈을 꾸면 배에 타 있고, 이상한 상황에 놓여 있어요. 자기 전에도 자고 나서도 집중이 잘 안 돼요. 외부를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완벽한 차단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비행기가 뚝 떨어진 상황하고는 다른 거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기다리게 하는 사람들 두 가지가 다 있으니까, 감정이 다 똑같이 생기고 그런 안타까운 감정이 온 국민들에게 다 똑같이 생기고 모두 다 우울한 것 같아요.”
―결혼은 하셨나요.
“안 했어요. 10년쯤 만나는 남자친구는 있어요. 저는 굳이 결혼한 사실을 국가에 알려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걸 싫어하니까요. 오랫동안 함께 사귀다가 살 수 있으면 살아도 보고 정말 좋으면 결혼도 하는 거죠. 연애의 과정 속에서 결혼은 꼭 해야 하고 절대로 헤어지면 안 되고 그런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사슬은 이제 개선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개인적인 차이를 못 견뎌서 헤어지는 것도 있지만 집안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도 많아요. 〈사랑과 전쟁〉에도 나오지만 아닌 것을 서로 강요하고 사랑하니까 괜찮지 그러는 건 사랑이 아니고 속박이죠. 사랑이란 그럴 듯한 포장지가 아니죠. 서로가 현실적인 장애가 없어야죠. 그런 자유로운 상태가 좋아요.”
―계약결혼이 이상적이라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그렇죠. 시간이 없으니까 더 아껴주고 사랑하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겠죠. 고통스러워도 견딜 수 있고요.”
―안동이 고향인데, 부모님이 결혼 안 하는 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동에서는 태어나고 다섯 살까지 살았어요. 그래서 기억이 없어요.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제가 살았을 때는 사람 열 명 중 일곱 명이 권씨였대요. 집성촌의 의미가 강했던 거죠. 제가 처음 등단했을 때 안동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안동 출신 작가라고 안동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는데 저는 거의 기억이 안 났죠. 피디랑 사진 찍는 분이 왔는데 차 기사분이 안동 권씨라는데 그분이 거의 왕이시더라고요. 저한테 ‘아버님이 몇 대 누구신가’ 물어요. 잘 모른다고 했더니 ‘이런 괘씸한’ 이런 표정이었어요(웃음). 아버님보다 권씨가 아닌 어머니가 의외로 엄하셨어요. 하지만 결혼 부분에서는 어머니가 의외로 너그러우셨어요. 딸이 셋에 제가 셋째 딸인데 시집가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했어요. 똑똑하게 출세나 해라 식이었죠. 어머니는 저한테 돈 잘 버는 걸 바라신다기보다 신문에 한 번 났다 그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신문에 인터뷰 나오면 오려 가지고 다니시고. 신문도 《조선일보》만 보세요. 《조선일보》에 나갈 일이 거의 없는데, 한 번씩 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거론돼도 그걸 오려 가지고 다니세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
―서울대 국문과에서 석사까지 하셨네요. 과외도 꽤 하셨고요.
“그렇죠. 대단한 건 아니지만, 대단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덕분에 과외를 10년 가까이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부터 과외로 번 돈으로 집을 도왔어요. 소녀가장이었던 건 아니지만, 저는 과외비를 부모님한테 다 드리고 용돈을 받아서 썼으니까요. 용돈이 적어 술 마시고 나면 차비가 없어 학교에서 자기도 했어요.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과외를 그만두고 출판기획사를 전전하며 알바를 많이 했어요. 자서전 대필도 하고 그랬는데 힘들었어요. 그러다 등단하고 소설을 쓰면서는 제가 좋아하는 일인 소설만 쓸 수 있어서 좋았어요. 혼자 하는 일이니까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만나도 되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면서 좋아하는 일 하고 사는 거죠.”
―인세는 어떤가요.
“그게 좀 함정입니다. 단편집은 4000~ 5000부 팔리는데 인세가 10%죠. 보통 단편집 하나 내면 원고료와 인세 합쳐서 1000만원 정도 번다고 생각하면 돼요. 3년에 한 권 정도 나오니까 연봉이 330만원이네요(웃음). 그 사이에 장편도 쓰지만 생활비를 인세나 원고료로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장독 뒤에 숨어서》라는, 지금 쓰는 장편은 언제 출간할 예정입니까.
“《자음과 모음》에 연재하고 있는데 가을호까지 나오면 10월쯤 책이 나올 거 같아요. 70년대 배경이고 어느 동네에 세들어 사는 한 식구 얘기라고 할까요.”
―《사랑을 믿다》는 소설 제목처럼 사랑이라는 걸 믿습니까.
“그럼요. 믿고 말고요. 저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인 것 같아요. 사람이 어떤 호된 일을 당하면 감정이라는 게 다 말라붙을 수가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사랑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게 없다면,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살 수가 없는 거죠(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