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테, 마키아벨리, 조토,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 희대의 천재들 배출, 메디치 등
巨商들의 지원받으며 르네상스 開花
⊙ 르네상스 미술의 寶庫 우피치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소장한 아카데미아 미술관
⊙ 단테, 브루니,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등의 묘소가 있는 산타크로체 교회,
‘살아 있는 르네상스 미술관’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巨商들의 지원받으며 르네상스 開花
⊙ 르네상스 미술의 寶庫 우피치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소장한 아카데미아 미술관
⊙ 단테, 브루니,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등의 묘소가 있는 산타크로체 교회,
‘살아 있는 르네상스 미술관’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산 미니아토 교회에서 바라본 피렌체 전경. 한가운데 두오모의 쿠폴라와 종탑이 보인다. 맨 왼쪽이 팔라초 베키오, 오른편 끝이 산타 크로체 교회다.
르네상스(Renaissance)가 태어난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어도 태어난 장소가 피렌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14세기의 맹아(萌芽)든 15세기의 개화(開花)든 르네상스를 선도한 인물들은 거의 피렌체와 그 인근 출신이다. 건축과 미술 분야가 많이 알려져 그렇지 분야에 관계없이 적용할 수 있는 얘기다. 언어,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은 물론 수학, 화학, 지리, 천문 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분야에서 그렇다. 단테를 위시해 브루니를 거쳐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 이르는 문사(文士)·철인(哲人)·사가(史家)들, 조토에서 마사초를 거쳐 보티첼리에 이르는 화가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에서 베로키오에 이르는 건축·조각가들만이 아니다.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 같이 분류가 마땅찮은 불세출(不世出)의 전인(全人)급 거장도 여럿이다. 현대 정치학은 그 자체가 이 시절 피렌체 사람(마키아벨리)의 저서 한 권에서 비롯한 것으로 간주한다. 같은 때에 거상(巨商)들도 속출해 학예활동에 든든한 물적 토대가 돼주었다. 바르디, 페루치에서 시작해 사세티, 토르나부오니, 메디치, 파치, 스트로치, 루첼라이 등 명단이 길다. 그중 메디치 가문은 특출하다. 몇 차례 공백이 있었으나 1434년 노(老) 코시모(Cosimo il Vecchio, 1389~1464,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로 추대) 이래 1737년 후대(後代)가 끊길 때까지 근 300년을 집권하며 피렌체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단테와 조토가 생각에 잠겨 가로지르던 광장이 있고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함께 고대 건축 공부하러 로마에 가자고 의논하던 교회가 있는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 페루지노 등이 재간을 가다듬던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이 있고, 레오나르도와 마키아벨리가 함께 근무하던 정부 청사가 있는 곳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이론을 세우고 실기를 시범한 알베르티가 후에 개명(開明)교황으로 활약하는 니콜라스 5세와 함께 스트로치 집안의 가정교사를 지낸 곳도 피렌체다. 이 둘은 더불어 볼로냐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하다.
도시 하나에서 이럴 수가 있나 싶다. 르네상스 당시 피렌체의 인구를 8만~9만명 정도로 추산할 때 실로 경이로운 역사적 현상이다. 영국의 페이터(Walter Pater)는 메디치 시절의 피렌체를 두고 페리클레스 시절의 아테네 말고는 인류사에 유례가 없다고 했다. 각 분야의 인물들이 속출해 풍성한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남겨준 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봐도 낯설지 않은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과 공화주의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실행해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예감케 한 것도 피렌체다. 한때 피렌체의 화폐 피오리노(fiorino)는 전 유럽이 선호하는 국제통화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럽 주요국가의 궁정과 교황청,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에 상주 사절을 파견해 근대국가 간 외교관계 수행의 모델을 개발한 것도 피렌체였다. 중세 천 년을 뒤로하고 근대로 가는 큰 문이 열린 것이다. 이런 곳을 어찌 무작정 배회하랴. 잠깐 세계관광여행 약사(略史)라도 살펴보자.
피렌체에 대한 괴테의 찬사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유럽 대륙에 구체제가 복구되자 서유럽의 각국은 외견상 안정을 회복한다. 산업혁명 효과의 축적으로 도시 부르주아 층이 커졌다. 이들 유한(有閑)계급은 새로 얻은 여가를 문화취미에 활용해 귀족층의 전유물이던 음악과 미술의 애호층이 두꺼워진다. 역사학과 구분된 미술사학이 관심을 끌고 문학도 소설을 중심으로 단단한 작가군과 그에 못지않은 독자층이 형성된다. 이러한 추세는 20세기 초에 일단 정점에 이른다. 미술 분야만 보더라도 19세기 말의 후기 인상파에 이어 프랑스의 입체파, 독일의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 벨기에의 아르누보 등 백화가 만발하는 호시절을 맞는다. 넓게 자리 잡은 신흥 애호층의 뒷받침이 컸던 결과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국을 맞을 때까지의 이 10여 년을 프랑스 사람들은 그리움을 담아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부른다.
해외여행도 비슷한 경로를 간다.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관심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과거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 시기 ‘그랜드 투어’는 로마와 고대 로마의 유적이 주된 목적지였고 그때만 해도 귀족 자제들의 교양교육 차원이었다. 빙켈만(J.J. Winkelmann)의 유적 답사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가 교재(敎材)였다. 이제는 계몽사상과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여행의 목적도 다양해졌다. 자신들(부르주아)의 시대를 열어준 철학과 과학과 역사와 예술의 부흥의, 즉 르네상스가 일차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에도 유효하여 피렌체는 늘 방문객들로 가득하다. 괴테 같은 인물이 먼 길을 와서는 단 한마디(“한눈에 보아도 피렌체가 상당히 번성했었고 훌륭한 정부를 가졌던 것을 알겠다”)를 남기고 로마를 향해 떠나가는 사례는 영영 과거지사가 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인기 작가 포스터(E.M. Forster)가 쓴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이란 소설이 있다. 양갓집 젊은 처자의 피렌체 여행을 다룬 소설이다. 지난 80년대에 영화화되어 오스카상도 수상하고 큰 인기를 끌었었다. 이 소설에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여주인공 루시가 피렌체 시가지를 돌아보다가 촌티나는 일군의 영국 관광객을 마주한다. (‘문화’와 관계없는 듯한) 많은 관광객으로 여행의 특별성이 손상된 것으로 느낀 어린 마음이 “피렌체 여행 오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시험을 치게 해서 떨어지는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발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1908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 피렌체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해외 관광이 몇 차례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한 때문이다. 2차 대전 후 1950~60년대의 미국인 관광객, 점보 제트기 개발에 이은 70년대 일본인의 유럽 관광 러시가 있었다. 냉전 구도가 해체된 90년대에는 중국인, 러시아인들까지 대거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이제 피렌체 시내에 인파로부터 안전한 곳을 찾기 어렵다. 과거의 관광객이 양손에 가이드책자와 아이스크림(피렌체의 아이스크림은 이탈리아에서도 최고로 친다)을 들고 다녔다면 오늘의 엄청난 인파는 스마트폰과 생수병으로 무장하고 다니는 차이뿐이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자신의 이름이 붙은 신드롬을 경험한 곳도 피렌체였다. 오늘날 여행객들은 스탕달과 같은 고급형 현기증도 느끼겠지만 붐비는 인파 속에서 현대판 스탕달 신드롬에 시달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두 가지 어지럼증 모두 과장일 뿐이다. 현실적인 가능성은 잔잔한 감동에서 오는 다소의 울렁증일 것이다. 단편적인 지식이나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르네상스의 피렌체는 사람들이 이승살이에서 추구하고 저승살이를 위해 준비했던 많은 친근한 것이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로 승화되어 숨 쉬는 곳이다. 새로운 경지를 체험할 때의 가슴 설렘이 없을 수 없다.
두오모
피렌체에 가면 먼저 아르노강 좌안(左岸)의 산 미니아토(San Miniato al Monte) 교회에 올라보는 것이 순서다. 산 미니아토는 피렌체가 아직 중세의 잠 속에 있던 시절 세워진 교회다. 피렌체의 교회들이 시대의 유행에 따라 르네상스 식 단장을 추가해 갈 때도 로마네스크 모습을 잃지 않아 의연한 고풍이 있다. 교회 정면의 높직한 대리석 층계를 오르면 그림 같은 피렌체 도심의 전경이 펼쳐진다. 이 전경을 밑그림으로 머리에 넣어두고 부분을 채색해 가며 채워보자.
먼저 스카이라인을 압도하던 두 건물이 우선이다.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와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 현재 시청사). 대개 작은 도시의 경우, 성속(聖俗)의 두 대표 건물이 같은 광장에 나란히 혹은 마주보며 서 있는데 피렌체는 이들이 각기 조금 떨어진 독자적인 광장(두오모 광장과 시뇨리아 광장)에 자리해 번화한 상점길(비아 칼차이우올리)로 연결되어 있다. 둘 다 13세기 말에 짓기 시작했다. 두오모의 초대형 쿠폴라(cupola·원형지붕)는 한참 뒤인 1434년 완공해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징이 된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시를 접수한 바로 그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로마 성 베드로 교회의 쿠폴라보다 백수십 년이 앞선다. ‘전 토스카나에 그늘을 드리울 만한’ 쿠폴라를 갖게 되었을 때 피렌체 시민들의 자부심은 컸다.
피렌체 사람들은 지금도 확대어미(擴大語尾) ‘-one’를 붙여 애칭 쿠폴로네(cupolone)라고 부른다. 곁에 있는 세례당(battistero)은 기베르티가 만든 청동문이 미켈란젤로가 붙여준 찬사(‘천국의 문’)와 함께 유명하지만, 내부에 최후의 심판, 창세기와 성(聖)가족의 생애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의 장엄미도 놓칠 수 없다. 근처 두오모 박물관의 소장도 볼 만하다.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가 좋고, 도나텔로의 부조와 조각들 중에는 구약의 예레미아와 하박국 입상이 마음에 남는다. 그렇지 않아도 회화보다 앞서 가던 조각 분야였는데 이미 사실(寫實)을 넘어 표현(表現)에 이른 느낌이다.
시민권력의 상징 팔라초 베키오
팔라초 베키오는 피렌체 공화정 당시 시민권력의 상징이다. 14세기 초에 완공된 건물로 늘씬한 꽃봉오리 모양의 종탑과 함께 겸손한 자태다. 소위 시민 건물(civic structure)의 견본이다. 내부는 균형미보다 세련미에 치중하던 하이 르네상스 장식이 많아 담백한 외관과 대조를 이룬다. 자고이래 건축물의 목적은 권력자의 힘과 위엄의 과시에 있었다. 팔라초 베키오의 외관을 보며 당시 피렌체 시민들은 중세 영주들의 성채나 궁성에서 느끼던 위축감과는 많이 다른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핀 데는 다른 이유 못지않게 이런 자부심에 기초한 시민 문화(civic culture)가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이후 토스카나 일대의 많은 자치도시가 팔라초 베키오와 닮은 시청사들을 건립한다.
하지만 인간사 무평불피(无平不陂)에 무왕불복(无往不復)이다. 단테와 빌라니가 굳게 믿어 마지 않던 공화정은 얼마 못 가 극심한 파벌대립을 거쳐 유사 군주(signore) 정치로 이어진다. 급기야는 신정(神政)의 막간극까지 겪은 후 1537년 코시모 1세가 권좌에 오르고 피렌체 공화국은 토스카나 공국(公國)이 되어 1861년 이탈리아의 통일까지 지속하는 것이다. 코시모 1세는 국부 코시모 메디치의 방계(傍系)후손이다. 그는 팔라초 베키오를 자신의 사저(궁정)로 용도변경하고 정부청사는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 저술가·건축가·화가)에게 맡겨 새로 지은 우피치(Uffizi, 지금의 미술박물관 건물)로 이사 보낸다. 바사리는 화가로서보다는 르네상스 기(期) 예술가들의 전기(傳記) 전집 《저명 이탈리아 건축가, 화가 및 조각가들의 생애》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치마부에, 니콜라 피사노, 조토에서 시작해 기를란다이오, 페루지노, 레오나르도를 거쳐 티치아노, 산소비노에 이르기까지 망라한다. 우리가 13~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인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과 일화들은 대개 이 책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마키아벨리가 최초의 정치학자라면 바사리는 최초의 미술사가다.
지금은 총리가 된 마테오 렌치 피렌체 시장과의 약속
재작년 어느 봄날 마테오 렌치(Matteo Renzi) 피렌체 시장과의 약속으로 팔라초 베키오를 방문한 일이 있다. 당시 30대 중반이던 젊은 시장은 금년 초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었다. 역대 최연소 총리의 기록과 함께 이탈리아 개조의 큰 짐을 지고 있다. 800년을 의연히 그 자리에 그 청사가 그 용도로 서 있다는 것은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바로 미켈로초 솜씨의 안뜰(cortile)이다. 메디치 궁을 지은 그 미켈로초다. 바사리가 설계한 계단을 통해 이층에 올라가니 이층 거의 전체가 기둥 하나 없이 널찍한 대형 홀이다. 마주보는 동서 벽면에는 피렌체가 치른 역대 전투장면을 그린 프레스코가 가득하다. 역시 바사리 솜씨다. 이름하여 살라 데이 친퀘첸토(Sala dei Cinquecento).
여담으로, 영역 소개책자의 직역 《오백 실(Hall of Five Hundred)》은 좀 어색하다. ‘친퀘첸토’는 아무래도 르네상스 문맥에서 붙여진 이름이므로 그대로 쓰는 것이 좋겠고 굳이 번역한다면 ‘16세기 홀’이 좋을 것이다. 당연히 15세기는 ‘콰트로첸토’다. 콰트로첸토는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에서 레오나르도가 40대이던 때까지의 르네상스 전기(前期)다.
피렌체 정치의 주도권이 노 코시모와 대(大)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1449~92)의 메디치가에 있던 시절이다. 이에 비해 친퀘첸토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들의 하이 르네상스에서 초기 바로크까지를 포함한다. 새로운 공국의 군주로 베키오 궁을 차지한 코시모 1세가 새 시대의 군주를 자임하며 붙인 이름일 것이다.
같은 층의 클레멘테 7세 홀이 시장의 접견실이다. 클레멘테 7세는 레오 10세의 사촌동생으로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교황 4명 중 하나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에 카를로 5세, 프랑수와 1세, 헨리 8세 등 유럽 주요국의 야심 찬 군주들을 상대로 숱한 영욕을 체험한 교황이다.
자리를 나눠 앉자 시장은 대번에 요즘 한국 첨단제품들이 세계에서 인기가 있지만 르네상스 시절에는 피렌체가 만든 직물이 그런 인기를 누렸다며 천장과 벽면을 장식한 그림들을 설명해 준다. 천장엔 클레멘테가 (신성로마황제) 카를로 5세를 대관하는 그림이 선명하고 벽 한편엔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프레스코가 있다. 모두 바사리 작품이다.
코시모 1세의 동상
노 코시모와 대 로렌초는 피렌체의 실권자였지만 공화제의 전통을 존중해 자신들의 사저인 팔라초 메디치를 떠나지 않았다 한다. 공식 지위로는 ‘프리모 치타디노(Primo Cittadino, 제1 시민이란 뜻으로 요즘도 시장에 대한 애칭으로 상용)’에 만족했다는 설명이다. 1537년에 비로소 토스카나 공국이 출범하고 코시모 1세가 팔라초 베키오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메디치가 조상들의 이름을 붙인 여러 방을 만들고 장식했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 자신이 있다는 은근한 자랑이 느껴졌다. 오랜 도시, 오랜 건물의 예쁜 방에 앉아 잘 재단한 양복 차림의 신세대 시장과 나누는 대화가 자못 상쾌하다.
작별하려니 건네는 선물이 또 다르다. 대개는 시정(市政)이나 시황(市況)을 소개하는 화보 선물이 일반적인데 수제 넥타이다. 피렌체 직물업 전통의 훌륭한 증거란다. 나도 한국 전통문화의 겸손한 소개라며 《Korea Beauty》 책자를 건넸다. 아울러, 피렌체가 세계에서 누리는 인기 못지않게 시장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으로 안다며 정치적 장래를 축원했다. 효험이 있었는지 그는 지금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어 있다.
밖에 나오니 시뇨리아 광장을 굽어보는 코시모 1세의 기마상이 새삼 눈에 띈다. 공화정 시절의 피렌체는 초기에는 시민군으로, 뒤에 가면 용병을 사서 숱한 전투를 치렀다. 대개 시에나, 아레초, 피사, 루카 등 인근 자치도시들이 상대였고 조금 크다고 해봐야 밀라노와의 전투였다.
어느 시대나 비슷하지만 이 시절 용병의 최대 문제는 전투가 끝나거나 계약이 만료된 다음에도 돌아갈 생각을 안 한다는 점이다. 용명(勇名)과 그에 따른 몸값을 드높인 데 만족하지 않고 혼인이든 찬탈이든 고용주와의 근접관계를 활용해 권좌를 노리는 사례가 많았다. 밀라노의 스포르차(Sforza), 만토바의 곤자가(Gonzaga),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 등은 용병대장(condottiero) 출신이 군주가 된 경우다. 싸움이 전공이지만 르네상스의 개화에 나름의 공헌을 한 개명한 인물들이다.
피렌체는 달랐다. 원래 공화제여서 1인자가 따로 없었지만 실질적인 1인자가 출현하고 공화제가 명색뿐이던 메디치 시절에도 늘 용병의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 군사정은 그 성격상 군주제로 가기 마련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자치도시들과 달리 엄청난 무공을 세운 용병대장이라도 기마상 건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영국 출신의 맹장 조반니 아쿠토(영국이름: 존 호크우드)도 산 로마노 전투의 영웅 톨렌티노도 두오모 안의 벽화로만 남아 있다. 이제 피렌체는 공작령이 되었고 시민 아닌 신민(臣民)들은 처음으로 군주의 기마상을 올려다보게 된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
팔라초 베키오 바로 곁에 우피치 미술관이 있다.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지만 관광 성수기나 사람 많은 시간대를 피하는 등 대책을 강구해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이다. 조각예술에서의 고전이 고대 아테네라면 회화예술의 고전은 두말할 것 없이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다. 중세 말에 이르기까지 비잔틴 미술의 방언(方言)에 불과하던 이탈리아 미술이 단숨에 미술의 주류에 등극해 서유럽 미술을 선도하는 것이 다 이즈음 피렌체에서 비롯된다. 거장들이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속출하고,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능력과 의사를 갖춘 신흥 부호층이 생겨난 것은 역사적 행운이다. 때맞춰 되살아난 고전과 과학에 대한 관심이 종교 일변도를 넘어 소재의 다양화와 원근법 활용 등 회화 기법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결과, 유럽 열강(列强)의 군주들이 경쟁적으로 선호하고 나폴레옹이 욕심껏 가져가고 또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의 재벌들이 아무리 사갔어도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한 우피치의 소장은 세계 제일이다. 우피치에 들른 사람이면 바로 인근의 바르젤로(Palazzo del Bargello)도 챙겨보자. 단테 때에도 서 있던 몇 안 되는 대형 건물 중 하나(경찰청)로 공화정 시절의 자랑스런 유산이다. 마키아벨리가 한때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첼리니, 도나텔로, 베로키오, 미켈란젤로로 이어지는 르네상스 조각의 명품들을 예스러운 공간에 보기 좋게 배치해 놓았다.
이제 가까운 산타 크로체 교회(Chiesa di Santa Croce)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보자. 산타 크로체는 두오모보다도 1년 먼저 1295년 착공한 프란체스코 교회다. 사실 단테가 피렌체 시내를 돌아다니던 시절의 피렌체는 하나의 커다란 공사판이었다. 당시 서 있던 대형 건물이라고는 이미 올라보았던 산 미니아토 교회 말고는 바르젤로와 세례당 정도였다. 쿠폴로네는 물론 조토의 종탑도 세워지기 전이다.
이러던 것이 13세기 말 14세기 초가 되면서 오늘날 피렌체의 관광명소가 되는 성속의 주요 건물들이 일제히 착공된다. 상업이 일어서고 돈이 늘어난 것이다. 당연히 인근 시골 사람들이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볼로냐 가는 길 두메산골 무젤로에서 농사짓던 메디치 집안이 가족의 운명을 상업에 걸고 솔가해 피렌체로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다.
‘시민 건물’을 가지려는 시민들의 자부심에 대한 얘기는 이미 했다. 여기에 더해 교회를 건립(및 사적 공간인 가족 경당(敬堂) 확보)하고 개인 팔라초(시내)와 빌라(교외)를 짓고 꾸미려는 부자 상인들의 경쟁적 수요가 겹친 것이다. 이탈리아 속담 그대로 “Dove era la ricchezza, c’era l’arte(돈 있는 곳에 예술 있다)”였다.
산타 크로체 교회
교회 앞에 지켜 서서 광장을 응시하는 단테의 눈매에 생각이 가득하다. 내부에 들어서면 굳이 가이드북이 없어도 잘 알려진 화가, 조각가, 문인들이 남긴 자취가 풍성하다. 우선 널찍한 본당 안의 남북 벽면에 즐비한 피렌체 출신 인물들의 묘소가 인상적이다. 단테, 브루니, 도나텔로, 기베르티,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가 모두 이 한마을 태생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한다.
참고로, 유럽 교회의 묘소는 실제 묘(tomba)를 쓴 경우와 벽면에 추모조형(cenotafio, 영어로 한다면 funeral monument)을 꾸민 경우가 있다. 실제 유해는 교회 바닥에 별도로 관을 조성해 보관하기도 하고 추모조형의 일부로 조각한 관에 넣어두기도 한다. 산타 크로체의 경우, 마키아벨리의 유해는 추모조형의 관 속에 있고 미켈란젤로는 바닥의 관에 묻혀 있고 단테의 경우는 단지 추모조형일 뿐 실제 유해는 추방되어 말년을 보낸 라벤나에 묻혀 있다.
산타 크로체는 무엇보다 중세미술이 르네상스 미술로 넘어오는 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조토가 근대회화의 개조로 칭송되는 이유가 석연해진다. 이차원의 평면세계에 수삼백 년을 자족하던 비잔틴 영향하의 중세회화가 불과 두어 세대 만에 조토와 그 제자들에 의해 근대회화의 문턱에 성큼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새로워진 인물 모델링과 다양해진 색깔뿐이 아니다. 성가족과 성인들의 형상 모사(模寫)에만 애쓰던 과거를 털고 기독교 신앙의 감동적인 대목들을 이야기로 구성해 넓은 벽면 가득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탈리아 전 지역의 교회들에서 우리가 일상 접하는 그림들(특히 프레스코화)은 대개 이 시절 이곳 사람들의 창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편 바르디 경당 앞에 높직한 도나텔로의 예수수난상(crocifissione). 조각과 색조의 사실성이 같은 주제의 동시대 작품들과 차원이 다르다. 본당을 남쪽으로 나서면 브루넬레스키의 역작 파치 경당(Cappella di Pazzi)과 함께 시원한 회랑(chiostro)이 르네상스 건축만의 고요한 하모니로 맞아준다. ‘콰트로첸토’가 서양미술사에 당당한 시대로 남은 데는 이런 연고들이 있었구나 싶다.
사보나롤라
다음 행선지는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 산타 크로체에서 걸어가려면 조금 멀 수도 있다. 이 도메니쿠스 수도원에 오면 600년 역사에 가장 유명한 수사(修士) 두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시 둘 다 콰트로첸토 인물이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와 프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98). 프라(fra)는 프라테(frate, 형제란 뜻)의 약어로 수도사를 칭할 때 쓴다.
세대 차이는 나지만 같은 수도원, 같은 수도사의 삶과 죽음이 그렇게 극명한 차이를 보일 수 없다. 한 사람은 단아한 인물과 섬세한 경치의 성화(聖畵)를 그리며 평화로운 삶을 마친 후 로마 교회(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의 제단 옆에 잠들어 있다.
또 한 사람은 정치 수도사로 산 마르코의 대표의원(priore)이 되어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을 비난하는 대중선동으로 유사 신정(神政)체제를 이끌다가 교황(알렉산드로 6세)과 대립, 파문된 후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火刑)으로 격렬한 삶을 마친다. 사보나롤라는 1492년 대 로렌초의 임종 병상에서도 험한 기세로 회개를 촉구했다고 한다. 결국 피렌체는 4년간 유례없는 신정의 도가니를 경험한다.
이 자칭 예언자와 메디치가의 관계가 공교롭다. 권좌에 오르고 나서 노 코시모가 어느 날 피렌체에 머물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흡족해할 만한 역사(役事)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교황은 산 마르코 수도원의 복원에 1만 피오리노(당시 피렌체 평균 가구당 소비지출이 연간 약 70피오리노)를 내라고 액수까지 정해 권했고 노 코시모는 쾌락 후 총애하던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멍석을 깔아놓으니 사보나롤라가 페라라(Ferrara)에서 옮겨왔고 그 뒤는 알려진 스토리다.
한 시절 격동에 관계없이 오늘 산 마르코는 고즈넉하다. 수도원 2층 초입에 안젤리코의 <수태고지>가 긴 복도의 하얀 벽면 한편에 호젓이 빛난다. 이후 같은 주제의 그림들에 준거가 되어준 프레스코화다. 여기서부터 ㄱ자로 돌아가며 반 평 남짓한 수사들의 독방인데 안젤리코가 방마다에 작은 프레스코 성화 하나씩을 그려주었다. 한결같이 애잔하고 경건한 소품들이다. 맨 끝에 사보나롤라가 쓰던 방이 홀로 이채롭다.
산 마르코 곁에 산티시마 아눈치아타(Santissima Annunciata) 광장이 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정점에 이른 실물증거들이 집약되어 있어 흥미로운 곳이다. 광장 자체가 브루넬레스키 설계로 고대 로마의 아르코(arco)와 톤도(tondo)를 한껏 활용한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모범이다. 특히 영아(嬰兒)보호소(Spedale degli Innocenti) 건물은 안에도 좋은 그림들이 있지만 정면의 포르티코(portico)가 말쑥하다.
<다비드상>의 원본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그 옆의 산티시마 교회는 폰토르모, 브론치노, 피오렌티노 등 매너리즘 화가들의 수작을 한자리 원위치에서 감상하는 드문 기회다. 르네상스의 종점에서 ‘완성’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인지 고심한 화가들이다.
그 중간 단계의 수많은 견본은 인근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에 빼곡하다.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복제본 <다비드상>의 원본이 여기에 있다.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호출로 피렌체를 떠나기 앞서 청년 시절에 만들었다. 또 하나의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이다.
얼마 전 이탈리아 정부가 <다비드상>의 소유권 등에 대해 법적 검토서를 낸 일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통일로 구(舊) 토스카나 공국이 이탈리아 공화국에 승계되었으므로 다비드상의 소유권도 중앙정부에 있다”는 요지였다. 렌치 당시 시장의 촌철 대응이 좋았다.
“그게 무슨 비 오는 날 우산인가? 네 것 내 것 하게. 다비드상은 피렌체시의 주문으로 미켈란젤로가 만들어 1504년 시뇨리아 광장에 세운 이래 한 번도 소유권이 바뀐 적이 없다.” 렌치 시장이 중앙정부의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입장이 바뀌었을 것 같지 않다.
다음 목적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로 가는 길에 메디치 궁(Palazzo Medici-Ricardi)과 산 로렌초 교회(Chiesa di San Lorenzo)가 있다. 각각 메디치가의 가장들이 살아 잠자던 곳이고 죽어 잠든 곳이다. 팔라초 메디치의 준엄한 외관과 기능적 내부구조는 르네상스기 대도시 팔라초 건축의 모범이다. 이후 팔라초 스트로치, 팔라초 루첼라이가 잇따라 세워지고 로마에서도 팔라초 파르네제(Farnese)를 비롯해 많은 대저택이 뒤따른다.
팔라초 메디치 안의 경당을 장식한 고촐리(Benozzo Gozzoli)의 프레스코 <동방박사 행렬>은 즐거운 명품이다. 그 채색과 모델링, 자연과 수목의 미세묘사는 르네상스 회화의 중간성과를 집약해 보여준다.
비좁은 경당의 벽면을 돌아가며 장식한 파노라마식 구도가 새롭다. 등장인물들도 메디치 일가와 당시 피렌체 공의회(Consiglio di Firenze, 1438~39)에 참석했던 ‘동방’(비잔틴) 대표들의 실제 초상이다. 피렌체 공의회는 가톨릭과 정교회 간 통합 협의를 위해 노 코시모가 역점 외교사업으로 유치한 국제회의였다. 별무성과였으나 역사적 수명을 다해가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성직자, 학자들이 대거 참석해 고전에 대한 관심을 촉진하는 기회가 되었다. 조그만 광장을 가로지르면 바로 산 로렌초 교회다. 교회 안에 따로 메디치 경당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 전체가 메디치 가문의 교회다. 대 로렌초를 포함해 역대 메디치가의 인물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혀 있다. 다른 부호들이 각 교구의 교회에 가족 경당 하나 확보하려 애쓸 때, 이 집안은 팔라초 베키오 못지않은 양택(陽宅)에 살다가 바로 이웃한 두오모 못지않은 음택(陰宅)에 묻혔으니 당시의 위세를 짐작하기 어렵잖다.
‘살아 있는 르네상스 미술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다시 잠깐 걸으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정면부터 본당의 경당들을 거쳐 성구실(sagrestia)과 바깥 회랑들에 이르기까지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르네상스 회화, 조각, 건축의 보석들로 가득하다. 알베르티의 정면(facciata)이 보여주는 색, 선, 면의 조화, 마사초가 <삼위일체>로 완성한 3차원 공간감, 우첼로가 <노아의 방주>에 실현한 획기적인 원근법 등을 다 이곳에서 본다. <아기 예수 탄생>을 정감 넘치는 광경으로 재현한 보티첼리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의 일상생활로 그려낸 기를란다이오의 재치에 웃음 짓게 된다. 살아 있는 르네상스 미술관이다. 관심 분야에 달린 일이지만 만일 피렌체를 방문한 사람이 불가피하게 교회를 딱 한 곳만 ‘들어가’ 보려 한다면 여러모로 이곳이 적절하다.
당시 피렌체 부호 중 하나로 알베르티의 정면 건축비를 출연한 조반니 루첼라이의 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우아한 정면을 볼 때마다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하나님의 영광, 피렌체의 명예, 그리고 나 자신의 좋은 기억을 위해 이만한 투자가 다시 어디 있겠는가.〉 당시 개명한 상인과 부호들로 가득했던 피렌체의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이 공감했을 생각이고 실제 이러한 출연과 지원은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피렌체의 볼거리는 대개 아르노강 우안(右岸)에 모여 있다. 이제 한군데만 잠시 들르고 좌안으로 건너가자. 오니산티(Ognissanti) 교회. 도심에서 한 발짝 비켜서 멀리 베키오 다리가 바라보이는 강가의 정겨운 광장에 면해 있다. 다리 쉬어가기 좋은 위치요 분위기다.
교회 안 보티첼리의 묘소가 단출하다. 과학과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이 주조이던 시절 감수성 넘치는 자기만의 그림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던 보티첼리.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복해 아예 절필하고 은둔했던 사람이다. 동편 벽의 역작 <성 오거스틴>의 절절한 표정은 보티첼리 자신의 마음속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피티 궁과 보블리 정원
강을 건너오면 이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 브란카치(Brancacci) 경당의 삼면을 꽉 채운 프레스코는 실로 경탄스러운 콰트로첸토 피렌체의 대표적인 프레스코 연작이다. 마솔리노가 시작한 것을 마사초가 이어서 그린 수십 년 후 필리피노 리피가 완성했다. 인근 산토 스피리토 교회와 그 앞 광장은 도심 속 오아시스의 느낌이다.
그리고 팔라초 피티(Pitti). 팔라초 베키오에 살던 코시모 1세가 만년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후 가계(家系)가 끊길 때까지 근 200년간 메디치 가문의 거소(居所)였다.
피티 궁의 일부를 활용한 팔라티나 미술관은 그 소장도 대단하지만 전시 방식이 독특하다. 소장한 그림들을 연대나 주제와 관계없이 원(原)소장자가 수집해 배치했던 그대로 전시해 수집자(수집시기)의 취향(유행)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으나 피렌체에 와서 활동한 일은 없는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많다. 건물을 뒤쪽으로 나서면 보볼리 정원이다. 늘씬한 소나무와 삼나무들이 ‘들여다보기’에 지친 눈을 달래준다.
정원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벨베데레(Forte del Belvedere, 구 피렌체 성곽의 일부로 감시타워 격)에 이른다. 다시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책을 시작하며 올랐던 산 미니아토에서 본 것보다 근경(近景)이어서 그간 다닌 곳들을 확인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산 마르티노 알라 팔마에서 바라본 피렌체 잊지 못해
피렌체의 전경을 즐기는 데는 이 두 곳과 인근의 산상마을 피에솔레가 좋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피렌체 서쪽의 교외 산 마르티노 알라 팔마(San Martino alla Palma)에서 물결치는 구릉 저편에 신기루처럼 바라보이던 피렌체를 잊지 못한다. 그곳에 빌라를 갖고 있는 디니 상원 외교위원장(Lamberto Dini, 총리·외상 역임)의 초청으로 점심을 같이했던 일이 있다. 예의 콰트로첸토에 지어진 빌라다. 저명한 미국의 미술사가 베렌슨(Bernard Berenson, 1865~1959)이 이곳 교회의 포르티코 사이로 내다보이는 경치를 두고 ‘예술과 자연의 완벽한 조화’라고 했던 그 마을이다.
점심을 마치고 함께 산보하던 팔순의 위원장이 10여 년 전 자신이 외무장관이던 시절 미국의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당시 국무장관을 그 빌라에 초대했을 때의 얘기라며 먼저 홍소(哄笑)부터 금치 못한다. 그때도 함께 식사를 하고 빌라 안팎을 거니는데 올브라이트 장관이 지나는 물음으로 빌라가 언제 지어졌느냐고 묻더란다. 단지 연대만 말해줘도 되는데, 장난스런 마음이 동한 노 정치인은 “미 대륙이 발견되기 수십 년 전”이라고 답해줬고 이 말에 미국의 장관은 잠시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며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지금은 미국일지 모르지만 당시 미국은 있지도 않았고 피렌체였다는 웃음이었다. 알려진 대로 미 대륙의 명칭도 피렌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메디치 상사의 스페인 주재원으로 일하다 일약 모험가로 변신해 브라질을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는 피렌체 토박이다.
“몇십 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없는 때가 있고 몇 주간에도 몇십 년의 변화가 올 수 있는 것이다.” 레닌이 언젠가 했다는 말이다.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몇십 년’을 ‘몇백 년’으로 그리고 ‘몇 주간’을 ‘몇십 년’으로 대체하면 피렌체가 르네상스 어간에 일구어낸 변화를 비슷하게 설명해 낸다. 르네상스란, 줄여 말하면 콰트로첸토의 피렌체가 경작해 낸 지적, 예술적 활동의 총화에 다름 아니다.
르네상스가 가져온 변화는 이내 문화가 되었고 피렌체는, 아니 그 영향을 한번 접한 토스카나, 베네치아 나아가 알프스 너머의 유럽도,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뒤러, 홀바인, 브뤼겔 부자(父子)만이 르네상스 사람들이 아니다. 에라스무스, 토머스 모어, 마르틴 루터가 다 르네상스의 사람들인 것이다. 중세의 나루터에 천 년을 머물던 역사의 배는 이들이 노 저은 르네상스의 강을 건너 이제 근대의 언덕에 이른 것이다.⊙
단테와 조토가 생각에 잠겨 가로지르던 광장이 있고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함께 고대 건축 공부하러 로마에 가자고 의논하던 교회가 있는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 페루지노 등이 재간을 가다듬던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이 있고, 레오나르도와 마키아벨리가 함께 근무하던 정부 청사가 있는 곳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이론을 세우고 실기를 시범한 알베르티가 후에 개명(開明)교황으로 활약하는 니콜라스 5세와 함께 스트로치 집안의 가정교사를 지낸 곳도 피렌체다. 이 둘은 더불어 볼로냐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하다.
도시 하나에서 이럴 수가 있나 싶다. 르네상스 당시 피렌체의 인구를 8만~9만명 정도로 추산할 때 실로 경이로운 역사적 현상이다. 영국의 페이터(Walter Pater)는 메디치 시절의 피렌체를 두고 페리클레스 시절의 아테네 말고는 인류사에 유례가 없다고 했다. 각 분야의 인물들이 속출해 풍성한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남겨준 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봐도 낯설지 않은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과 공화주의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실행해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예감케 한 것도 피렌체다. 한때 피렌체의 화폐 피오리노(fiorino)는 전 유럽이 선호하는 국제통화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럽 주요국가의 궁정과 교황청,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에 상주 사절을 파견해 근대국가 간 외교관계 수행의 모델을 개발한 것도 피렌체였다. 중세 천 년을 뒤로하고 근대로 가는 큰 문이 열린 것이다. 이런 곳을 어찌 무작정 배회하랴. 잠깐 세계관광여행 약사(略史)라도 살펴보자.
피렌체에 대한 괴테의 찬사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유럽 대륙에 구체제가 복구되자 서유럽의 각국은 외견상 안정을 회복한다. 산업혁명 효과의 축적으로 도시 부르주아 층이 커졌다. 이들 유한(有閑)계급은 새로 얻은 여가를 문화취미에 활용해 귀족층의 전유물이던 음악과 미술의 애호층이 두꺼워진다. 역사학과 구분된 미술사학이 관심을 끌고 문학도 소설을 중심으로 단단한 작가군과 그에 못지않은 독자층이 형성된다. 이러한 추세는 20세기 초에 일단 정점에 이른다. 미술 분야만 보더라도 19세기 말의 후기 인상파에 이어 프랑스의 입체파, 독일의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 벨기에의 아르누보 등 백화가 만발하는 호시절을 맞는다. 넓게 자리 잡은 신흥 애호층의 뒷받침이 컸던 결과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국을 맞을 때까지의 이 10여 년을 프랑스 사람들은 그리움을 담아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부른다.
해외여행도 비슷한 경로를 간다.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관심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과거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 시기 ‘그랜드 투어’는 로마와 고대 로마의 유적이 주된 목적지였고 그때만 해도 귀족 자제들의 교양교육 차원이었다. 빙켈만(J.J. Winkelmann)의 유적 답사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가 교재(敎材)였다. 이제는 계몽사상과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여행의 목적도 다양해졌다. 자신들(부르주아)의 시대를 열어준 철학과 과학과 역사와 예술의 부흥의, 즉 르네상스가 일차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에도 유효하여 피렌체는 늘 방문객들로 가득하다. 괴테 같은 인물이 먼 길을 와서는 단 한마디(“한눈에 보아도 피렌체가 상당히 번성했었고 훌륭한 정부를 가졌던 것을 알겠다”)를 남기고 로마를 향해 떠나가는 사례는 영영 과거지사가 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인기 작가 포스터(E.M. Forster)가 쓴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이란 소설이 있다. 양갓집 젊은 처자의 피렌체 여행을 다룬 소설이다. 지난 80년대에 영화화되어 오스카상도 수상하고 큰 인기를 끌었었다. 이 소설에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여주인공 루시가 피렌체 시가지를 돌아보다가 촌티나는 일군의 영국 관광객을 마주한다. (‘문화’와 관계없는 듯한) 많은 관광객으로 여행의 특별성이 손상된 것으로 느낀 어린 마음이 “피렌체 여행 오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시험을 치게 해서 떨어지는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발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1908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 피렌체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해외 관광이 몇 차례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한 때문이다. 2차 대전 후 1950~60년대의 미국인 관광객, 점보 제트기 개발에 이은 70년대 일본인의 유럽 관광 러시가 있었다. 냉전 구도가 해체된 90년대에는 중국인, 러시아인들까지 대거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이제 피렌체 시내에 인파로부터 안전한 곳을 찾기 어렵다. 과거의 관광객이 양손에 가이드책자와 아이스크림(피렌체의 아이스크림은 이탈리아에서도 최고로 친다)을 들고 다녔다면 오늘의 엄청난 인파는 스마트폰과 생수병으로 무장하고 다니는 차이뿐이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자신의 이름이 붙은 신드롬을 경험한 곳도 피렌체였다. 오늘날 여행객들은 스탕달과 같은 고급형 현기증도 느끼겠지만 붐비는 인파 속에서 현대판 스탕달 신드롬에 시달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두 가지 어지럼증 모두 과장일 뿐이다. 현실적인 가능성은 잔잔한 감동에서 오는 다소의 울렁증일 것이다. 단편적인 지식이나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르네상스의 피렌체는 사람들이 이승살이에서 추구하고 저승살이를 위해 준비했던 많은 친근한 것이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로 승화되어 숨 쉬는 곳이다. 새로운 경지를 체험할 때의 가슴 설렘이 없을 수 없다.
두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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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오모. 맨 앞의 세례당 뒤로 종탑이 있고 그 뒤로 두오모의 정면과 쿠폴로네가 우람하다. |
먼저 스카이라인을 압도하던 두 건물이 우선이다.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와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 현재 시청사). 대개 작은 도시의 경우, 성속(聖俗)의 두 대표 건물이 같은 광장에 나란히 혹은 마주보며 서 있는데 피렌체는 이들이 각기 조금 떨어진 독자적인 광장(두오모 광장과 시뇨리아 광장)에 자리해 번화한 상점길(비아 칼차이우올리)로 연결되어 있다. 둘 다 13세기 말에 짓기 시작했다. 두오모의 초대형 쿠폴라(cupola·원형지붕)는 한참 뒤인 1434년 완공해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징이 된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시를 접수한 바로 그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로마 성 베드로 교회의 쿠폴라보다 백수십 년이 앞선다. ‘전 토스카나에 그늘을 드리울 만한’ 쿠폴라를 갖게 되었을 때 피렌체 시민들의 자부심은 컸다.
피렌체 사람들은 지금도 확대어미(擴大語尾) ‘-one’를 붙여 애칭 쿠폴로네(cupolone)라고 부른다. 곁에 있는 세례당(battistero)은 기베르티가 만든 청동문이 미켈란젤로가 붙여준 찬사(‘천국의 문’)와 함께 유명하지만, 내부에 최후의 심판, 창세기와 성(聖)가족의 생애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의 장엄미도 놓칠 수 없다. 근처 두오모 박물관의 소장도 볼 만하다.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가 좋고, 도나텔로의 부조와 조각들 중에는 구약의 예레미아와 하박국 입상이 마음에 남는다. 그렇지 않아도 회화보다 앞서 가던 조각 분야였는데 이미 사실(寫實)을 넘어 표현(表現)에 이른 느낌이다.
시민권력의 상징 팔라초 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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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뇨리아 광장의 팔라초 베키오. 피렌체의 800년 시청사다. 베키오 궁 정문 앞에 다비드상(복제)이 있다. |
하지만 인간사 무평불피(无平不陂)에 무왕불복(无往不復)이다. 단테와 빌라니가 굳게 믿어 마지 않던 공화정은 얼마 못 가 극심한 파벌대립을 거쳐 유사 군주(signore) 정치로 이어진다. 급기야는 신정(神政)의 막간극까지 겪은 후 1537년 코시모 1세가 권좌에 오르고 피렌체 공화국은 토스카나 공국(公國)이 되어 1861년 이탈리아의 통일까지 지속하는 것이다. 코시모 1세는 국부 코시모 메디치의 방계(傍系)후손이다. 그는 팔라초 베키오를 자신의 사저(궁정)로 용도변경하고 정부청사는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 저술가·건축가·화가)에게 맡겨 새로 지은 우피치(Uffizi, 지금의 미술박물관 건물)로 이사 보낸다. 바사리는 화가로서보다는 르네상스 기(期) 예술가들의 전기(傳記) 전집 《저명 이탈리아 건축가, 화가 및 조각가들의 생애》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치마부에, 니콜라 피사노, 조토에서 시작해 기를란다이오, 페루지노, 레오나르도를 거쳐 티치아노, 산소비노에 이르기까지 망라한다. 우리가 13~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인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과 일화들은 대개 이 책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마키아벨리가 최초의 정치학자라면 바사리는 최초의 미술사가다.
지금은 총리가 된 마테오 렌치 피렌체 시장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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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렌치 피렌체 시장과 면담 후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렌치 시장은 금년 초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었다. |
여담으로, 영역 소개책자의 직역 《오백 실(Hall of Five Hundred)》은 좀 어색하다. ‘친퀘첸토’는 아무래도 르네상스 문맥에서 붙여진 이름이므로 그대로 쓰는 것이 좋겠고 굳이 번역한다면 ‘16세기 홀’이 좋을 것이다. 당연히 15세기는 ‘콰트로첸토’다. 콰트로첸토는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에서 레오나르도가 40대이던 때까지의 르네상스 전기(前期)다.
피렌체 정치의 주도권이 노 코시모와 대(大)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1449~92)의 메디치가에 있던 시절이다. 이에 비해 친퀘첸토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들의 하이 르네상스에서 초기 바로크까지를 포함한다. 새로운 공국의 군주로 베키오 궁을 차지한 코시모 1세가 새 시대의 군주를 자임하며 붙인 이름일 것이다.
같은 층의 클레멘테 7세 홀이 시장의 접견실이다. 클레멘테 7세는 레오 10세의 사촌동생으로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교황 4명 중 하나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에 카를로 5세, 프랑수와 1세, 헨리 8세 등 유럽 주요국의 야심 찬 군주들을 상대로 숱한 영욕을 체험한 교황이다.
자리를 나눠 앉자 시장은 대번에 요즘 한국 첨단제품들이 세계에서 인기가 있지만 르네상스 시절에는 피렌체가 만든 직물이 그런 인기를 누렸다며 천장과 벽면을 장식한 그림들을 설명해 준다. 천장엔 클레멘테가 (신성로마황제) 카를로 5세를 대관하는 그림이 선명하고 벽 한편엔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프레스코가 있다. 모두 바사리 작품이다.
코시모 1세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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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키오 궁 앞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는 토스카나공국의 초대 공작 코시모 1세의 동상. 이처럼 개인을 우상화하는 동상은 토스카나공국 성립 후에야 등장한다. |
작별하려니 건네는 선물이 또 다르다. 대개는 시정(市政)이나 시황(市況)을 소개하는 화보 선물이 일반적인데 수제 넥타이다. 피렌체 직물업 전통의 훌륭한 증거란다. 나도 한국 전통문화의 겸손한 소개라며 《Korea Beauty》 책자를 건넸다. 아울러, 피렌체가 세계에서 누리는 인기 못지않게 시장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으로 안다며 정치적 장래를 축원했다. 효험이 있었는지 그는 지금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어 있다.
밖에 나오니 시뇨리아 광장을 굽어보는 코시모 1세의 기마상이 새삼 눈에 띈다. 공화정 시절의 피렌체는 초기에는 시민군으로, 뒤에 가면 용병을 사서 숱한 전투를 치렀다. 대개 시에나, 아레초, 피사, 루카 등 인근 자치도시들이 상대였고 조금 크다고 해봐야 밀라노와의 전투였다.
어느 시대나 비슷하지만 이 시절 용병의 최대 문제는 전투가 끝나거나 계약이 만료된 다음에도 돌아갈 생각을 안 한다는 점이다. 용명(勇名)과 그에 따른 몸값을 드높인 데 만족하지 않고 혼인이든 찬탈이든 고용주와의 근접관계를 활용해 권좌를 노리는 사례가 많았다. 밀라노의 스포르차(Sforza), 만토바의 곤자가(Gonzaga),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 등은 용병대장(condottiero) 출신이 군주가 된 경우다. 싸움이 전공이지만 르네상스의 개화에 나름의 공헌을 한 개명한 인물들이다.
피렌체는 달랐다. 원래 공화제여서 1인자가 따로 없었지만 실질적인 1인자가 출현하고 공화제가 명색뿐이던 메디치 시절에도 늘 용병의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 군사정은 그 성격상 군주제로 가기 마련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자치도시들과 달리 엄청난 무공을 세운 용병대장이라도 기마상 건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영국 출신의 맹장 조반니 아쿠토(영국이름: 존 호크우드)도 산 로마노 전투의 영웅 톨렌티노도 두오모 안의 벽화로만 남아 있다. 이제 피렌체는 공작령이 되었고 시민 아닌 신민(臣民)들은 처음으로 군주의 기마상을 올려다보게 된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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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젤로 박물관의 도나텔로 작 <다비드>. 고대 이후 최초의 나체 입상으로 논란이 됐다. |
이 결과, 유럽 열강(列强)의 군주들이 경쟁적으로 선호하고 나폴레옹이 욕심껏 가져가고 또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의 재벌들이 아무리 사갔어도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한 우피치의 소장은 세계 제일이다. 우피치에 들른 사람이면 바로 인근의 바르젤로(Palazzo del Bargello)도 챙겨보자. 단테 때에도 서 있던 몇 안 되는 대형 건물 중 하나(경찰청)로 공화정 시절의 자랑스런 유산이다. 마키아벨리가 한때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첼리니, 도나텔로, 베로키오, 미켈란젤로로 이어지는 르네상스 조각의 명품들을 예스러운 공간에 보기 좋게 배치해 놓았다.
이제 가까운 산타 크로체 교회(Chiesa di Santa Croce)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보자. 산타 크로체는 두오모보다도 1년 먼저 1295년 착공한 프란체스코 교회다. 사실 단테가 피렌체 시내를 돌아다니던 시절의 피렌체는 하나의 커다란 공사판이었다. 당시 서 있던 대형 건물이라고는 이미 올라보았던 산 미니아토 교회 말고는 바르젤로와 세례당 정도였다. 쿠폴로네는 물론 조토의 종탑도 세워지기 전이다.
이러던 것이 13세기 말 14세기 초가 되면서 오늘날 피렌체의 관광명소가 되는 성속의 주요 건물들이 일제히 착공된다. 상업이 일어서고 돈이 늘어난 것이다. 당연히 인근 시골 사람들이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볼로냐 가는 길 두메산골 무젤로에서 농사짓던 메디치 집안이 가족의 운명을 상업에 걸고 솔가해 피렌체로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다.
‘시민 건물’을 가지려는 시민들의 자부심에 대한 얘기는 이미 했다. 여기에 더해 교회를 건립(및 사적 공간인 가족 경당(敬堂) 확보)하고 개인 팔라초(시내)와 빌라(교외)를 짓고 꾸미려는 부자 상인들의 경쟁적 수요가 겹친 것이다. 이탈리아 속담 그대로 “Dove era la ricchezza, c’era l’arte(돈 있는 곳에 예술 있다)”였다.
산타 크로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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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타 크로체 광장을 응시하는 단테상. 단테는 고대의 호머나 베르길리우스에 비견되고 그가 다듬은 토스카나어는 후에 이탈리아어의 모체가 되었다. |
참고로, 유럽 교회의 묘소는 실제 묘(tomba)를 쓴 경우와 벽면에 추모조형(cenotafio, 영어로 한다면 funeral monument)을 꾸민 경우가 있다. 실제 유해는 교회 바닥에 별도로 관을 조성해 보관하기도 하고 추모조형의 일부로 조각한 관에 넣어두기도 한다. 산타 크로체의 경우, 마키아벨리의 유해는 추모조형의 관 속에 있고 미켈란젤로는 바닥의 관에 묻혀 있고 단테의 경우는 단지 추모조형일 뿐 실제 유해는 추방되어 말년을 보낸 라벤나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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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타크로체 성당 내부. 정면에 보이는 십자가와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은 중세미술에서 르네상스미술로 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
이탈리아 전 지역의 교회들에서 우리가 일상 접하는 그림들(특히 프레스코화)은 대개 이 시절 이곳 사람들의 창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편 바르디 경당 앞에 높직한 도나텔로의 예수수난상(crocifissione). 조각과 색조의 사실성이 같은 주제의 동시대 작품들과 차원이 다르다. 본당을 남쪽으로 나서면 브루넬레스키의 역작 파치 경당(Cappella di Pazzi)과 함께 시원한 회랑(chiostro)이 르네상스 건축만의 고요한 하모니로 맞아준다. ‘콰트로첸토’가 서양미술사에 당당한 시대로 남은 데는 이런 연고들이 있었구나 싶다.
사보나롤라
다음 행선지는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 산타 크로체에서 걸어가려면 조금 멀 수도 있다. 이 도메니쿠스 수도원에 오면 600년 역사에 가장 유명한 수사(修士) 두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시 둘 다 콰트로첸토 인물이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와 프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98). 프라(fra)는 프라테(frate, 형제란 뜻)의 약어로 수도사를 칭할 때 쓴다.
세대 차이는 나지만 같은 수도원, 같은 수도사의 삶과 죽음이 그렇게 극명한 차이를 보일 수 없다. 한 사람은 단아한 인물과 섬세한 경치의 성화(聖畵)를 그리며 평화로운 삶을 마친 후 로마 교회(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의 제단 옆에 잠들어 있다.
또 한 사람은 정치 수도사로 산 마르코의 대표의원(priore)이 되어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을 비난하는 대중선동으로 유사 신정(神政)체제를 이끌다가 교황(알렉산드로 6세)과 대립, 파문된 후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火刑)으로 격렬한 삶을 마친다. 사보나롤라는 1492년 대 로렌초의 임종 병상에서도 험한 기세로 회개를 촉구했다고 한다. 결국 피렌체는 4년간 유례없는 신정의 도가니를 경험한다.
이 자칭 예언자와 메디치가의 관계가 공교롭다. 권좌에 오르고 나서 노 코시모가 어느 날 피렌체에 머물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흡족해할 만한 역사(役事)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교황은 산 마르코 수도원의 복원에 1만 피오리노(당시 피렌체 평균 가구당 소비지출이 연간 약 70피오리노)를 내라고 액수까지 정해 권했고 노 코시모는 쾌락 후 총애하던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멍석을 깔아놓으니 사보나롤라가 페라라(Ferrara)에서 옮겨왔고 그 뒤는 알려진 스토리다.
한 시절 격동에 관계없이 오늘 산 마르코는 고즈넉하다. 수도원 2층 초입에 안젤리코의 <수태고지>가 긴 복도의 하얀 벽면 한편에 호젓이 빛난다. 이후 같은 주제의 그림들에 준거가 되어준 프레스코화다. 여기서부터 ㄱ자로 돌아가며 반 평 남짓한 수사들의 독방인데 안젤리코가 방마다에 작은 프레스코 성화 하나씩을 그려주었다. 한결같이 애잔하고 경건한 소품들이다. 맨 끝에 사보나롤라가 쓰던 방이 홀로 이채롭다.
산 마르코 곁에 산티시마 아눈치아타(Santissima Annunciata) 광장이 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정점에 이른 실물증거들이 집약되어 있어 흥미로운 곳이다. 광장 자체가 브루넬레스키 설계로 고대 로마의 아르코(arco)와 톤도(tondo)를 한껏 활용한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모범이다. 특히 영아(嬰兒)보호소(Spedale degli Innocenti) 건물은 안에도 좋은 그림들이 있지만 정면의 포르티코(portico)가 말쑥하다.
<다비드상>의 원본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그 옆의 산티시마 교회는 폰토르모, 브론치노, 피오렌티노 등 매너리즘 화가들의 수작을 한자리 원위치에서 감상하는 드문 기회다. 르네상스의 종점에서 ‘완성’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인지 고심한 화가들이다.
그 중간 단계의 수많은 견본은 인근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에 빼곡하다.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복제본 <다비드상>의 원본이 여기에 있다.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호출로 피렌체를 떠나기 앞서 청년 시절에 만들었다. 또 하나의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이다.
얼마 전 이탈리아 정부가 <다비드상>의 소유권 등에 대해 법적 검토서를 낸 일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통일로 구(舊) 토스카나 공국이 이탈리아 공화국에 승계되었으므로 다비드상의 소유권도 중앙정부에 있다”는 요지였다. 렌치 당시 시장의 촌철 대응이 좋았다.
“그게 무슨 비 오는 날 우산인가? 네 것 내 것 하게. 다비드상은 피렌체시의 주문으로 미켈란젤로가 만들어 1504년 시뇨리아 광장에 세운 이래 한 번도 소유권이 바뀐 적이 없다.” 렌치 시장이 중앙정부의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입장이 바뀌었을 것 같지 않다.
다음 목적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로 가는 길에 메디치 궁(Palazzo Medici-Ricardi)과 산 로렌초 교회(Chiesa di San Lorenzo)가 있다. 각각 메디치가의 가장들이 살아 잠자던 곳이고 죽어 잠든 곳이다. 팔라초 메디치의 준엄한 외관과 기능적 내부구조는 르네상스기 대도시 팔라초 건축의 모범이다. 이후 팔라초 스트로치, 팔라초 루첼라이가 잇따라 세워지고 로마에서도 팔라초 파르네제(Farnese)를 비롯해 많은 대저택이 뒤따른다.
팔라초 메디치 안의 경당을 장식한 고촐리(Benozzo Gozzoli)의 프레스코 <동방박사 행렬>은 즐거운 명품이다. 그 채색과 모델링, 자연과 수목의 미세묘사는 르네상스 회화의 중간성과를 집약해 보여준다.
비좁은 경당의 벽면을 돌아가며 장식한 파노라마식 구도가 새롭다. 등장인물들도 메디치 일가와 당시 피렌체 공의회(Consiglio di Firenze, 1438~39)에 참석했던 ‘동방’(비잔틴) 대표들의 실제 초상이다. 피렌체 공의회는 가톨릭과 정교회 간 통합 협의를 위해 노 코시모가 역점 외교사업으로 유치한 국제회의였다. 별무성과였으나 역사적 수명을 다해가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성직자, 학자들이 대거 참석해 고전에 대한 관심을 촉진하는 기회가 되었다. 조그만 광장을 가로지르면 바로 산 로렌초 교회다. 교회 안에 따로 메디치 경당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 전체가 메디치 가문의 교회다. 대 로렌초를 포함해 역대 메디치가의 인물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혀 있다. 다른 부호들이 각 교구의 교회에 가족 경당 하나 확보하려 애쓸 때, 이 집안은 팔라초 베키오 못지않은 양택(陽宅)에 살다가 바로 이웃한 두오모 못지않은 음택(陰宅)에 묻혔으니 당시의 위세를 짐작하기 어렵잖다.
‘살아 있는 르네상스 미술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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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의 정면. 알베르티가 자신의 건축이론을 유감없이 실현한 르네상스 초기 건축의 얼굴이다. |
당시 피렌체 부호 중 하나로 알베르티의 정면 건축비를 출연한 조반니 루첼라이의 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우아한 정면을 볼 때마다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하나님의 영광, 피렌체의 명예, 그리고 나 자신의 좋은 기억을 위해 이만한 투자가 다시 어디 있겠는가.〉 당시 개명한 상인과 부호들로 가득했던 피렌체의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이 공감했을 생각이고 실제 이러한 출연과 지원은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피렌체의 볼거리는 대개 아르노강 우안(右岸)에 모여 있다. 이제 한군데만 잠시 들르고 좌안으로 건너가자. 오니산티(Ognissanti) 교회. 도심에서 한 발짝 비켜서 멀리 베키오 다리가 바라보이는 강가의 정겨운 광장에 면해 있다. 다리 쉬어가기 좋은 위치요 분위기다.
교회 안 보티첼리의 묘소가 단출하다. 과학과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이 주조이던 시절 감수성 넘치는 자기만의 그림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던 보티첼리.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복해 아예 절필하고 은둔했던 사람이다. 동편 벽의 역작 <성 오거스틴>의 절절한 표정은 보티첼리 자신의 마음속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피티 궁과 보블리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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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티 궁의 팔라티나 미술관 건물 뒤로 쿠폴로네와 종탑이 보인다. |
그리고 팔라초 피티(Pitti). 팔라초 베키오에 살던 코시모 1세가 만년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후 가계(家系)가 끊길 때까지 근 200년간 메디치 가문의 거소(居所)였다.
피티 궁의 일부를 활용한 팔라티나 미술관은 그 소장도 대단하지만 전시 방식이 독특하다. 소장한 그림들을 연대나 주제와 관계없이 원(原)소장자가 수집해 배치했던 그대로 전시해 수집자(수집시기)의 취향(유행)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으나 피렌체에 와서 활동한 일은 없는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많다. 건물을 뒤쪽으로 나서면 보볼리 정원이다. 늘씬한 소나무와 삼나무들이 ‘들여다보기’에 지친 눈을 달래준다.
정원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벨베데레(Forte del Belvedere, 구 피렌체 성곽의 일부로 감시타워 격)에 이른다. 다시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책을 시작하며 올랐던 산 미니아토에서 본 것보다 근경(近景)이어서 그간 다닌 곳들을 확인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산 마르티노 알라 팔마에서 바라본 피렌체 잊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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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마르티노 빌라에서 오찬 후 디니 전 총리 내외와 함께. 한국에 관심이 많던 이탈리아의 원로 정치인이다. |
점심을 마치고 함께 산보하던 팔순의 위원장이 10여 년 전 자신이 외무장관이던 시절 미국의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당시 국무장관을 그 빌라에 초대했을 때의 얘기라며 먼저 홍소(哄笑)부터 금치 못한다. 그때도 함께 식사를 하고 빌라 안팎을 거니는데 올브라이트 장관이 지나는 물음으로 빌라가 언제 지어졌느냐고 묻더란다. 단지 연대만 말해줘도 되는데, 장난스런 마음이 동한 노 정치인은 “미 대륙이 발견되기 수십 년 전”이라고 답해줬고 이 말에 미국의 장관은 잠시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며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지금은 미국일지 모르지만 당시 미국은 있지도 않았고 피렌체였다는 웃음이었다. 알려진 대로 미 대륙의 명칭도 피렌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메디치 상사의 스페인 주재원으로 일하다 일약 모험가로 변신해 브라질을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는 피렌체 토박이다.
“몇십 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없는 때가 있고 몇 주간에도 몇십 년의 변화가 올 수 있는 것이다.” 레닌이 언젠가 했다는 말이다.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몇십 년’을 ‘몇백 년’으로 그리고 ‘몇 주간’을 ‘몇십 년’으로 대체하면 피렌체가 르네상스 어간에 일구어낸 변화를 비슷하게 설명해 낸다. 르네상스란, 줄여 말하면 콰트로첸토의 피렌체가 경작해 낸 지적, 예술적 활동의 총화에 다름 아니다.
르네상스가 가져온 변화는 이내 문화가 되었고 피렌체는, 아니 그 영향을 한번 접한 토스카나, 베네치아 나아가 알프스 너머의 유럽도,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뒤러, 홀바인, 브뤼겔 부자(父子)만이 르네상스 사람들이 아니다. 에라스무스, 토머스 모어, 마르틴 루터가 다 르네상스의 사람들인 것이다. 중세의 나루터에 천 년을 머물던 역사의 배는 이들이 노 저은 르네상스의 강을 건너 이제 근대의 언덕에 이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