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金重權前 대통령비서실장 (上) : 월간조선

1979년 9월 1일, 나는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원장으로 부임했다. 영덕지원은 내 고향 울진을 관할하는 법원이었다. 영덕은 증조부 때까지 우리 집안이 살아 오던 곳이기도 했다.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현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로 있던 내가 영덕지원장으로 내려간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당시 투병 중이던 어머니는 가끔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바람은 간절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져서 그러셨던 것 같다. 늘 나와 가까이 있고 싶어하셨던 노모(老母)를 혼자 고향으로 보낼 순 없었다. 아내와 의논했다. “얼마나 더 사실지는 모르지만 어머니 소원도 못 들어드리고 돌아가시게 하면, 평생 죄가 될 것 같다”는 내 말에 아내도 낙향(落鄕)에 동의했다.

법원행정처장에게 영덕지원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뜻을 표하자, 그는 깜짝 놀랐다. 모두들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는 판에 스스로 지방행을 자처하니 그럴 만도 했다. 노모를 모시기 위해 그런다는 내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의 병환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얘기는 조선조 때나 있었던 얘긴 줄 알았는데…. 김 판사는 현대의 선비요.”

母親喪에서 오간 정치입문 얘기

영덕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당시만 해도 사법시험 합격자가 많아야 1년에 80~100명 정도 나오던 때였다. 적을 때는 한 해에 다섯 명만 뽑은 적도 있었다. ‘판사’라고 하면 대단하게 쳐 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셈이었다. 거기에 더해 병든 노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효자(孝子)’라는 평판까지 얻게 됐다.

법원 지원장은 그 지역 기관장들 중에서 제일 서열이 높았다. 이런저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설을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런 요청이 들어오면 피하지 않았다. 그건 고향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물론 판사로서의 책무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영덕으로 내려간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아 10·26사태가 벌어졌다. 이어 12·12사태가 발생했다. 시골 법원에 근무하는 판사가 그게 뭔지 알 리가 없었다.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친구가 영덕에 다니러 왔기에 “12·12사태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도 표면적인 상황만 설명할 뿐,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듬해 4월에 돌아가셨다. 많은 사람이 문상(問喪)을 왔다. 인산인해(人山人海)라고 할 만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역에서 나름 신망을 얻은 덕이기도 하겠지만, 어머니의 음덕(陰德)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다르게 보였던 것 같다. 문상을 왔던 이정우(李正雨·대법원판사·법무부장관 역임) 대구지방법원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김 판사, 정치에 뜻을 두고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오?”

뜻밖의 얘기였다.

“고향에 내려와서 고향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 애쓰다 보니 그런 소문이 난 것 같습니다.”

“김 판사에 대해 소문이 무성해요. 당신의 정계 진출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당신을 경쟁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정치권 압력으로 영덕 떠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계진출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 같지 않았다. 그해 봄 어느날 박한상(朴漢相·6~10,12대 국회의원) 신민당 사무총장에게서 “김영삼(YS) 총재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장인(홍현욱 전 서울제일변호사회장·작고)의 친구였다. 김 총재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정치권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해 6월 1일 나는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정기인사철도 아닌데 연고도 없는 대구로 발령이 나다니…. 나는 이석선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영덕으로 온 지 9개월 만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정 대구로 가야 한다면 사표를 내겠습니다.”

이 실장은 솔직히 지역정치인들의 압력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달랬다. “지금 사표를 내면 인사에 불만을 품고 그만두는 것이 되지 않겠소? 모양이 좋지 않아요. 당신은 공인(公人)입니다. 신중히 처신해야 합니다.”

결국 나는 일단 대구지법으로 부임하기로 했다. 영덕지방법원을 떠나던 날, 법원 마당에는 수많은 고향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어른들은 “지금 대구로 같이 가서 이 잘못된 인사에 대해 항의하자”고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제 대구로 갑니다. 하지만 고향사람들이 저를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그건 사실상 고향에서 출마하겠다는 출사표(出師表)였다. 대구에서 근무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무렵, 나는 서울고등법원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이영섭(李英燮) 대법원장을 만났다. 이 대법원장은 장인의 친구이기도 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 판사를 대구로 옮긴 것은 김 판사를 음해하는 정치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대로 놔두었으면 더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은데, 정기인사철이 아니어서 서울로 불러올릴 수는 없고 해서 대구로 옮겼던 것입니다.”

정치에 뛰어들다

나는 국회의원 시절 점퍼에 운동화 차림으로 지역구를 누볐다.

서울고법에서의 근무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민정당에서 “울진 쪽에서 평판이 좋으니 정치를 할 수 있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아마 신군부(新軍部)에서는 5공(共) 출범을 준비하면서 제11대 총선(總選)을 앞두고 지역여론 조사 같은 걸 해 본 모양이었다. 내가 낙점(落點)을 받았다는 소문은 고향으로도 퍼졌다. 여러 사람이 축하전화를 걸어 왔고, 출마를 촉구했다.

나는 가족과 의논했다. 아내는 반대였다. 판사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정치라는 생소한 영역으로 나가는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리라. 장인과도 의논했다. 장인은 나를 판사의 길로 이끌어 주신 분이기도 했다. 장인은 “한번 해 보라”고 했다.

그해 11월 나는 법복을 벗었다. 민정당에서 공천을 주지 않으면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할 생각이었다. 얼마 후 민정당 조직국과 김용태(金瑢泰·12~14대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경북도지부장에게서 울진·영덕·청송 선거구 조직책으로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나중에 알기로는 당시 법원에서는 내가, 검찰에서는 이한동(李漢東·11~16대 국회의원, 국무총리 역임)씨가 뽑힌 것이라고 한다. 1981년 2월 실시된 제11대 총선에서 나는 60% 가까운 득표로 당선됐다.

1979년 영덕지원장으로 내려간 일을 두고 내가 일찌감치 정치에 뜻을 두고 그런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 사법시험(제8회) 동기인 박철언(朴哲彦·13·15대 국회의원, 정무장관 역임) 전 의원과의 관계를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향에 내려간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박철언 전 의원은 사시(司試) 동기이기는 해도 그가 검찰·청와대 등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1988년까지는 만난 일이 없었다.

국회에 등원(登院)할 당시 나는 42살이었다. 판사 출신이라는 엘리트 의식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국회에 들어가 보니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많았다. 법조(法曹) 말고는 모르고 살아왔다는 생각, 심지어는 무식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양한 국정경험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서 건설위, 문화공보위, 교통체신위, 내무위 등을 두루 거쳤다. 이때의 경험은 후일 김대중(DJ)정권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됐다.

흔히 민정당을 육법당(陸法黨)이라고 했다. ‘육사(陸士)’와 ‘법대’ 출신이 당을 꽉 잡고 있다는 의미였지만, 여기서 ‘법대’는 서울대 법대였다. ‘TK(대구·경북)정권’이라고 했지만, 내 고향 울진은 원래 내가 태어날 때에는 강원도였던 곳이어서 TK주류(主流)도 아니었다. 때문에 초·재선 의원 시절에는 내게 별로 크게 역할이 주어지기 어려웠다.

그 시절, 당에서는 소속 의원들에게 1년에 100일 이상 지역구에 내려가 있으라고 주문했다. 나는 주말이면 점퍼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지역구로 내려갔다. 지역구에 내려가서는 민박을 했다.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후일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어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인자 김 선생, 잠바 입고 논두렁길 다니던 모습을 언제 다시 볼꼬? 나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봐야 할 낀데….”

골프도 치지 않았다. 언젠가 경북 출신 의원들이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은 “김 의원은 왜 골프를 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관심이 없어서…”라고 하자, 전 대통령은 “건강관리를 위해서라도 치라”고 권유했다. 내가 골프채를 잡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민정당 사무차장 맡으며 인정받기 시작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후보와 함께 영덕에서 선거유세를 했다.

열심히 의정(議政) 활동을 한 덕분에 나는 이치호(李致浩·11~13,15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 등과 함께 점차 민정당 내 소장파(少壯派)의 기대주(期待株)로 떠올랐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1988년, 나를 민정당 제1사무차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5공 시절에는 민정당 사무처 요직에 대개 군(軍) 출신 인사들이 임명되곤 했었다. 군 출신인 박준병(朴俊炳) 사무총장은 나를 믿고 권한을 많이 위임해 주었다.

사무차장으로 있으면서 나는 1989년 4·15 동해 재선거, 8·18 영등포을(乙) 재선거, 1990년 4·3 대구서갑(西甲) 보궐선거를 치렀다. 나는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이 선거들을 승리로 이끌면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중권 의원은 6선 의원급”이라면서 나를 칭찬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이 됐다. 그해 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됐다. 나는 날치기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1991년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내무위원회에서 여야(與野) 간 몸싸움 끝에 날치기 통과된 후 법사위로 넘어왔다. 야당의원들은 점심도 거르고 날치기 통과를 경계했다. 나는 야당 의원들에게 “절대 여당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을 테니 식사하고 오라”고 했다. 그래도 야당 의원들은 믿지 않았다. 야당 간사 조승형(趙昇衡) 의원이 내 약속을 믿고 따라 주었다. 나도 약속을 지켰다. 나중에 이 때문에 당시 야당 총재이던 DJ가 나를 좋게 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1991년 말 어느 날의 일이었다. 국회 전문위원으로 파견되어 있던 채 모(某) 검사가 “축하한다”면서 내가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조선일보》 이영덕(李永德) 정치부장도 “당에서 일을 맡게 되었다는데, 기사로 써도 되겠느냐”며 확인전화를 걸어 왔다. 아직 어디서도 공식통보가 없었던 터라 “내 입장에서 말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내심 사무총장직을 맡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YS의 반대로 사무총장 못 돼

하지만 정작 발표를 보니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그 직전 원내총무를 지내다가 물러난 김윤환(金潤煥) 의원이었다. 솔직히 심기가 좀 불편했다. 그 내막은 얼마 후 김덕룡(金德龍·15~17대 국회의원, 정무장관 역임) 총재비서실장이 얘기해 주었다. 김덕룡 의원 얘기로는 모씨가 YS에게 “김중권은 월계수회”라고 얘기했고, ‘박철언’이라면 펄쩍 뛰는 YS가 나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하는 데 반대하는 바람에 김윤환 의원이 사무총장이 됐다는 것이었다. 손주환(孫柱煥) 정무수석비서관 등이 YS를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내가 월계수회, 즉 박철언계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YS와 나는 엇나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1992년이 되면서 최형우(崔炯佑·8~10·13~15대 국회의원, 내무장관 역임)·김동영(金東英·10·12·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 역임) 의원 등 YS계에서 내게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실 이미 YS에게 대세(大勢)가 기울어지고 있던 무렵이라서 싫지는 않았다.

어느날 YS가 집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마포 가든호텔 일식집에서 YS와 대좌(對坐)했다. YS가 말했다.

“김 의원, 미안하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소.”

사무총장 임명을 반대했던 데 대한 사과였다.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튀어 나갔다.

“제가 월계수회라고요?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얘기입니다. 박철언 의원과 저는 사시 동기일 뿐입니다. 저는 지역구 3선이고, 박 의원은 이제 전국구 초선일 뿐입니다. 박 의원은 노태우 대통령과 친척 관계라는 것 때문에 큰 사람이고, 저는 아래서부터 꾸준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입니다. 김윤환 의원요? 김 의원은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 동기라는 것 때문에 큰 사람 아닙니까?”

YS는 내게 “우리 멋지게 같이 정치를 해 보자”면서 나를 달랬다.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박태준(朴泰俊) 최고위원 주위에 모이기도 했다. 나도 박 최고위원의 아현동 자택에서 열린 모임에 초청받은 적이 있다. 나는 박 최고위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고위원님, 대권(大權)은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출마 선언을 하고 치고 나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박태준 최고위원은 “대통령의 뜻이 중요하다”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노태우 대통령만을 바라보다가, 노 대통령이 불출마 압박을 가하자 주저앉고 말았다.

原電 때문에 落選

하지만 1992년 4월, 제14대 총선에서 나는 낙선의 고배(苦杯)를 마시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울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문제 때문이었다.

1991년 여름부터 울진에서는 원자력발전소 3·4호기 추가 건설 문제가 큰 현안(懸案)이었다. 외부에서 과격세력이 들어와 주민들을 선동했다. 우리 집으로는 돌멩이와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나는 여당 중진의원으로서 국가적 차원에서 주민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해 12월까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원전 증설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주민들의 여론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 문제가 일단락됐다고 안도할 즈음 날벼락이 떨어졌다. 정부가 핵폐기물처리장 후보지 중 하나로 울진을 선정한 것이다. 정원식(鄭元植) 국무총리로부터 그에 관한 통보를 받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그 바람에 잠잠해지는 것 같던 지역 여론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핵폐기물처리장 후보지 제외’라는 한마디뿐이었다.

나는 핵폐기물처리장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결국 정부로부터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후보지역에서 울진을 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한번 돌아선 민심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노태우 대통령과 내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화형식(火刑式)까지 했다. 평소 성실한 지역구 관리 때문에 지역구에서 “김중권이는 평생 국회의원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듣던 나는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낙선(落選)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민자당 競選

1992년 12월 21일 청와대를 예방한 김영삼 당선자와 노태우 대통령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대선 과정에서 두 사람은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1992년 5월 4일, 나는 정무수석비서관 내정 통보를 받았다. 제14대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되기도 전이었다.

당시 정국(政局)은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競選)을 앞두고 요동치고 있었다. 경선에 나선 이종찬(李鍾贊·11~14대 국회의원, 국정원장 역임) 의원은 손주환 정무수석이 YS와 인척관계라는 이유로 그의 경질을 요구했다. 내가 임명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정무수석 임명 사실이 공표되기 전날인 5월 5일, 최형우 의원이 나를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김 의원, 내 평생 소원이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 청춘을 불살랐습니다. YS가 대통령이 되면 나는 다음 날로 바로 외유(外遊)를 나갈 겁니다. 도와주시오.”

정무수석이라는 자리 때문에 지지를 약속해 줄 수는 없었지만, 잔잔한 감동이 밀려 왔다.

‘저렇게 주군(主君)을 생각하는 장수(將帥)가 있어서 오늘날의 YS가 있는 것이로구나.’

이종찬 의원은 계속해서 불공정 경선 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선 불참까지 시사(示唆)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5월 16일 이종찬 의원과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 배석하지는 않았지만, 노 대통령은 “이종찬 의원이 내 뜻을 따르기로 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나 이종찬 의원은 5월 17일 “이번 경선은 특정인을 후보로 선출하기 위한 경선일 뿐, 진정한 의미의 경선은 아니다”라면서 후보사퇴를 선언했다. 5월 19일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YS는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SK사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YS는 노태우 대통령과 차별화 행보(行步)를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SK의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문제였다. 체신부에서 심사한 바에 의하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SK가 유력했다. 하지만 SK 최종현(崔鍾賢)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야당과 언론, 일부 국민들은 ‘특혜’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런 민심(民心)을 읽은 YS는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어느날 YS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만났다. YS가 말했다.

“SK는 절대로 안 됩니다. 민심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부가 근거를 가지고 하는 일인데, 정치적 이유 때문에 미루어서야 되겠습니까? SK가 가장 높은 평점을 받지 않았습니까?”

YS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SK불가론(不可論)을 되풀이하다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김 의원, 우리 큰일 같이 합시다.”

청와대에서 정해창(丁海昌) 비서실장, 김덕룡 민자당 총재비서실장 등과 회의를 했다. YS는 청남대(靑南臺)에 가 있던 노태우 대통령에게 김덕룡 실장을 보내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YS의 대화가 필요했다.

8월 20일 체신부는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SK를 선정했다. 그날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YS가 주례회동차 만났다. 회담이 끝나고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좋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회담 내용을 구술(口述)했다. “YS가 SK가 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된 것을 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YS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는 기자실로 내려와 그렇게 발표했다.

그러나 다음 날 YS는 다시 표변(豹變)했다. 강릉에서 열리는 지구당 행사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비판적인 뉴스를 접한 그는 강릉에 가서 정부가 SK를 이동사업자로 선정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다.

청와대에서는 난리가 났다. 일부 수석비서관은 YS가 대통령 후보로 적당한 사람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 “차라리 판을 깨자”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도 “김 대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화를 냈다.

사실 YS는 민심에 편승하기를 잘하고 말을 잘 바꾸는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으로서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3당 합당을 하면서 차기 대권은 YS에게 주기로 약속했었고, 민정계 의원 대다수도 YS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YS의 ‘깜짝쇼’

9월 16일 YS는 다시 한번 ‘깜짝쇼’를 했다. “공정한 대선 관리를 위해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면서 중립선거관리내각 구성을 주문한 것이다. 그 무렵 정국은 한준수 전 연기군수가 8월 31일 그해 3·24 총선에서 조직적인 관권(官權)개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파문이 일고 있었다. 야당은 연일 대여(對與)공세를 폈다. YS로서는 대선을 앞두고 관권선거 논란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YS가 그런 주장을 하고 나섰을 때, 정원식 총리는 남북고위급회담 참석차 평양을 방문 중이었다. YS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정 총리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정 총리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YS는 노태우 대통령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공정선거를 위해 나는 이렇게 노력했다’는 정치적 명분을 얻고 싶어서 한 얘기였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분노했다. 그에게는 YS에게 대권(大權)과 함께 자신의 국정(國政)경험을 전수(傳授)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YS는 사사건건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 행보를 통해 국민의 인기를 얻는 데만 급급해했다.

그 얼마 전의 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내게 “당에 선거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민자당에 대통령의 뜻을 전하자, 얼마 후 밀봉(密封) 봉투를 보내 왔다. 노 대통령은 봉투를 열어 보더니 흠칫했다. 서류를 들여다보니 5000억원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YS는 중립선거관리내각을 주문하고 나선 것이다. 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노태우 대통령도 YS에게 정(情)이 떨어진 듯했다. 노 대통령은 나를 불렀다.

“김 수석, 중립내각의 시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노 대통령은 나의 단호한 대답에 조금 놀라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는다. 이제 국민들은 공정한 선거관리에 대한 각하의 의지를 보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내게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

9·18 결단

9·18선언으로 민자당 탈당의사를 밝힌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10월 5일 민자당사를 떠나기 앞서 당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다음 날 나는 중립내각 구성에 관해 보고했다. 총리와 내무·법무·공보·정무장관 등 정치 관련 장관들을 교체하는 것으로 방향이 잡혔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은 민자당도 탈당하기로 했다.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YS와의 주례(週例) 회동에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회동이 끝난 후 노 대통령은 밖에서 대기 중이던 나를 불러 회동 내용을 설명했다. YS가 뜻을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내용이었다. 노 대통령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YS가 자신의 구상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인지 무척 기분 좋아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두 분은 예정이 없던 점심식사까지 같이 했다.

YS는 원래 자신이 ‘중립내각’을 요구하기도 했거니와, 당시 이미 그는 자신의 당선은 ‘따놓은 당상(堂上)’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립내각이 공정하게 관리한 선거에서 당선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이 강화될 것으로 생각했음직하다. 그날 오후 가락동 연수원에서 있었던 행사에서도 YS는 당원들에게 9·18 결단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는 사이에 민자당에서는 야단이 났다. 대통령의 결단은 무책임한 것이라는 비판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민주계는 노태우 대통령이 YS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억측했다.

그러자 YS는 다시 한번 돌변했다. 며칠 후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난 YS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무책임하게 탈당했습니다.”

분명 며칠 전 청와대 분위기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9·18 선언 후 박태준 최고위원이 민자당을 탈당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포철 영빈관에서 박 최고위원을 만나 탈당 의사 철회를 요청했다. 하지만 박 최고위원은 “지금은 내가 물러설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어 민자당 내 민정계 중진들이 잇따라 탈당하면서 ‘신당설’이 나돌았다. 그때마다 나는 그러한 일들이 노태우 대통령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열심히 해명해야 했다.

玄 총장의 3不可論

현승종 총리가 1992년 10월 13일 신임 인사차 통일국민당 당사를 방문해 정주영 총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립내각의 총리로는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양심적이고 신망 있는 어른을 모셔야 했다. 그런 분은 내 고려대 시절의 은사(恩師)인 현승종(玄勝鍾) 한림대 총장이었다. 현 총장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총리감으로 추천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분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대학 시절 내가 겪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대학 시절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로 학교는 편할 날이 없었다. 당시 학생처장이던 현승종 교수님은 학생들의 데모를 막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그분이 사회의 잘못된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부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학생들은 무엇보다도 학업에 힘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 번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데, 교복 차림의 현승종 교수님이 나타났다. 당시는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던 때였는데, 검소했던 현 교수님은 교복을 즐겨 입었다. 현 교수님은 우리에게 빨리 수업에 들어가라고 했다. 하지만 한창 피 끓던 우리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우리가 스크럼을 짜고 전진하려 할 때였다. 현 교수님이 갑자가 우리 앞에 드러누워 버렸다.

“정 나가고 싶으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

그 모습에 숙연해진 우리는 스크럼을 풀고 강의실로 향했다. 학생운동에도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노태우 대통령은 관심을 보이며, 현 총장과 접촉해 보라고 지시했다. 걱정은 현 총장의 건강 문제였다. 당시 현 총장의 나이는 73세였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그 나이는 대단한 고령(高齡)으로 여겨질 때였다(지금 내 나이가 74세다!). 마침 현승종 총장이 결혼식 주례를 선다는 소식을 듣고 직원 한 사람을 보내 그분의 건강을 살펴보게 했다. 그는 “목소리도 좋고 정정하시더라”고 보고했다.

현승종 총장께 전화를 드렸다. 이미 그분의 이름이 총리 하마평(下馬評)에 오를 때였다. 전화를 받은 현 총장은 대뜸 “만날 일 없네”라고 잘랐다. 현 총장께 간청을 해서 다음 날 서울 올림피아호텔에서 만났다. 현 총장께 9·18 결단의 의미를 설명드리고, 총리직을 수락해 주십사 부탁드렸다. 현 총장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첫째, 총리를 하려면 최소한 장관을 한 번쯤 해 보아서 행정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평생 대학에만 있었네. 둘째, 지금 내가 총장으로 있는 한림대의 윤덕선(尹德善) 이사장은 나와 평양고보 동기일세. 그가 학교발전을 위해 내게 학교를 맡겼는데, 그 친구의 뜻을 어기고 총장직을 그만둘 수는 없네. 셋째, 나는 결혼생활 50년 동안 중요한 일은 반드시 아내와 의논했었네. 그런데 지금 아내가 아들과 함께 미국을 여행하고, 지금 영국으로 향하는 중일세. 상의는 고사하고 전화조차 어려운 상황이란 말일세.”

나는 현 총장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첫째, 행정경험 부족을 말씀하시지만, 선생님은 이미 성균관대 총장, 한림대 총장, 교총(敎總) 회장으로 장관 못지않은 행정경험은 쌓으셨습니다. 둘째 문제는 사적(私的)인 문제입니다. 국가적으로 총장님이 필요한 일이라면 윤 이사장님도 이해해 줄 것입니다. 윤 이사장님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세 번째 문제 역시 지극히 사적인 일로 굳이 말씀하실 게 못 됩니다.”

그날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나는 대통령께 이날 만남을 보고한 후, 윤덕선 한림대 이사장을 찾아갔다. 윤 이사장은 내 말을 듣더니 “학교 일보다 국가가 중요한 것 아니겠소?”라면서 현 총장을 총리로 모시는 것을 양해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현승종 내각이 출현하게 됐다.

그해 말 고려대 출신 국회의원들의 연말(年末) 모임이 열렸다. 현승종 총리는 대학시절 은사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사회자로부터 인사말을 요청받고 단상에 오른 현 총리는 나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저 악당 때문에 내가 이 자리까지 불려 왔다!” 좌중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와이셔츠곽에 담긴 20억원 전달

1992년 9월 21일 국회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만나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 배경을 설명했다.

1992년 10월 말경,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 후보인 YS, DJ, 정주영(鄭周永) 통일국민당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9·18 결단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YS나 정주영 총재는 별 말이 없었지만, DJ는 노 대통령의 결단을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이라면서 극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DJ의 말에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며칠 후인 11월 초 어느 날,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노 대통령은 “오늘 저녁 김대중 총재를 만나 내 선물을 전하라”고 했다. “여당은 선거자금을 그런대로 꾸려 가고 있는 것 같고, 정주영 후보는 재벌이니까 관심 가지지 않아도 되는데, DJ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면서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관심 표명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했다.

노 대통령이 말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저녁 무렵 누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모르는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경호실 처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예쁘게 포장하고 리본까지 붙인 와이셔츠곽을 하나 두고 물러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秘資金)을 경호실에서 관리하는 줄 몰랐다.

여당 담당 비서관과 목동에 있는 DJ의 처제집으로 찾아갔다.

“대통령 각하께서 선물을 전해 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게 뭡니까?”

아마 내용물을 짐작하고 물어보는 듯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도 없었다. DJ가 말했다.

“김 수석, 그거 풀어 보세요.”

내가 난처해서 머뭇거리자 DJ는 벨을 눌러 밖에 있던 비서관을 불러 와이셔츠곽을 풀어 보게 했다. 상자 속에서는 100만원짜리 수표를 100장씩 묶은 수표다발 20개가 나왔다. 모두 20억원이었다. DJ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돈은 받을 수 없으니 가져가세요.”

그렇다고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 돈은 며칠 전 총재님께서 9·18 결단을 잘 이해하고 높이 평가해 주신 데 대한 대통령 각하의 감사의 표시입니다. 저는 이 돈을 다시 가져갈 수 없으니, 대통령 각하의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 주십시오.”

DJ의 ‘20억원’ 고백

결국 DJ는 “고맙다”면서 그 돈을 받았다. 나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하얏트호텔 사우나에서 DJ의 측근인 권노갑(權魯甲·13~15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과 우연히 만났다. 권 의원은 내게 귓속말로 “고맙다”고 했다. 순간 깜짝 놀랐다. 나는 어물어물하면서 그 자리를 피했다. ‘DJ가 그 돈을 당(민주당)으로 내려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태우 대통령께 권노갑 의원을 만난 사실을 보고했다. 이것이 후일 정쟁(政爭)의 불씨가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1995년 10월 27일,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 중이던 DJ는 “92년 대선 중반에 당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20억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는 “92년 대선 중반쯤 노씨의 모 비서관이 순전히 인사의 뜻이라며 20억원을 건네줘 받은 바 있다”며 “위로의 명목이고 어떠한 조건도 없었기 때문에 받았다”고 말했다.“ DJ는 ”그외에는 어떤 정치자금도 노씨에게 받은 바 없다“고 덧붙였다.

그 무렵 정국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노태우 비자금’의 용처(用處)에 대한 얘기들이 돌기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중간평가 유보 등 정치적 고비 때, 노 대통령이 DJ에게 돈을 준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돌았다. 검찰이 수표 추적을 할 경우 DJ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DJ는 자신을 향한 의혹이 더 커지기 전에 선제적(先制的)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실토한 것이었다.

기자들은 내게도 몰려왔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DJ는 모 비서관을 통해 20억원을 받았다고 했는데, 내가 비서관이었소? 나는 수석이었어요.”

그런,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둘러대면서 나는 베이징의 DJ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언론에서는 후속 보도를 쏟아냈다.

DJ 측에서는 “YS의 92년 대선 자금을 밝히라”면서 반격을 시도했다. 이에 대해 강삼재(姜三載·12~16대 국회의원) 민자당 사무총장은 ‘20억+알파(α)’ 주장으로 맞불을 놓았다. 20억원 이외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추가로 받은 돈이 없다는 DJ의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이었다. 여야(與野)의 다툼은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이 되었다.

97년 大選에서 다시 논란

사시 8회 동기인 안강민(安剛民)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검찰로서는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 나와서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나는 안 중수부장을 만나 설명했다. 그해 12월 5일 안강민 중수부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발표를 했다. 기자들이 “김대중씨가 받았다는 20억원은 확인했나”라고 묻자, 안 부장은 “노씨가 말을 하지 않는다”며 넘어갔다.

그걸로 이 문제는 일단락되나 싶었다. 잊혔던 이 문제를 다시 불러낸 것은 1997년 대선이었다. 그해 10월 7일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은 “DJ가 총 67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 보유해 왔다”면서 “DJ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 외에 적어도 6억3000만원을 추가로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그 바람에 ‘20억+알파’는 다시 한번 논란의 대상이 됐다. 기자들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검찰은 그때 전달된 액수가 20억원뿐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알파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당시 강삼재씨가 주장한 20억+알파의 개념에는 ‘김대중씨가 20억원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은 거짓말이다. 92년 11월 당시에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받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이번에 또 다시 사무총장이 되더니 알파의 개념을 바꾸더군요. 91년 1월과 5월에 각각 3억과 3억3000을 합쳐서 6억3000이라고요.”

강삼재 총장이 ‘알파’라고 주장한 돈은 DJ의 러시아 방문, 영국 방문, 생일 때에 의례적(儀禮的)으로 전달한 돈으로, 나와는 무관한 돈이었다. 내가 1992년 11월에 노태우 대통령의 심부름으로 DJ에게 전달한 돈만 가지고 묻는다면, 그건 분명히 20억원이었다. ‘알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