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국무총리 임명문제로 국회와 대립했다. 국무총리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사람은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세 사람이었으나, 이승만은 북한에서 온 이윤영(李允榮)을 7월 27일에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국회는 이윤영 국무총리승인안을 부결했다.
1주일 동안의 물밑 절충 끝에 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이범석(李範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었다.
뒤이은 장관 인사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공산당원이었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었다.
8월 15일에 개최된 정부수립기념식에는 맥아더 원수가 참석하여 환영을 받았다. 이날을 기하여 미군정부의 행정권이 한국정부로 이관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기념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될 여섯가지 조건을 성명했다.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통일독립촉진회(통촉)는 북한의 정부수립 공작과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로 동요했다.
김구는 상해와 중경에 따로 묻혀 있던 모친과 아내와 큰아들의 유해를 옮겨 와 비장한 심경으로 장례를 치렀다.
1. 各政派 안배로 擧國內閣 구성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임명 과정은 당동벌이(黨同伐異·시비곡직을 불문하고 자기편 사람은 돕고 반대편 사람은 공격하는 일)의 한국 정치풍토에서 제헌국회의 중요 정파들이 벌인 적나라한 권력투쟁이었다. 그것은 또한 대통령 이승만과 제헌국회 사이의 최초의 힘겨루기이기도 했다.
자신이 말한 ‘의외의 인물’이 누구냐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반응을 지켜보던 이승만은 7월 27일에 국회에 출석하여 극적인 방법으로 이윤영(李允榮)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金性洙에게는 國務總理보다 ‘덜 중대하지 않은 직책’ 맡기겠다”
박수를 받으며 의사당에 입장한 이승만은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긴 문장을 30분가량 읽었다. 그는 먼저 국무총리 인선문제를 다른 정파들이나 중요 지도자들과 상의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중에 몇 단체와 중요 지도자들과 토의 협정하야 작정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오늘 우리 형편에 각 정당과 사회의 규례가 충분히 짜이지 못한 중에 미리 발설이 되면 매인열지(每人悅之·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하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사정에서 자연 분규 문란한 상태가 이루어질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부득이 혼자 심사각득(深思覺得)해서 오늘까지 초조히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각 방면의 지도자 측에서 나를 보좌하기 위하야 정부조직과 국무총리의 인선으로 추천한 명록이 여러 가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명록을 채용하야 전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나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이승만은 이 추천명록이나 신문보도 등의 여론으로 미루어 국무총리 적임자로 가장 인망이 있는 사람이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세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민의와 또 내정의 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 세 사람은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정부수립 이전에 정당이 먼저 생겨서 다소 분규가 있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요 또 유감으로 아는 바입니다. 일후에 정치상 풍운 변태가 다소간 정리된 후에 몇 정당이 각각 주의주장으로 대립하여서 공선을 따라서 그 정당이 득세하는 날에는 득세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고 다른 정당은 다 정부에 참여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형편이 이와 같이 할 수 없는 중에 몇몇 정당을 포함해서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정당주의로 권리를 다투게 되는 중에서 행정처리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양년 동안에 몇몇 사회 민족운동단체 경력이 소상히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정당의 선도자로 지목받는 이가 피임되면 다소간 난편(難便)한 사정이 있을 것을 염려하므로 아무쪼록 피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김성수씨로 말하면 누구나 정당을 주장하는 인도자로만 지목할 수 없을 것이고 그분의 인격과 애국성심과 공평정직한 것은 어떤 정당이나 단체 사람을 막론하고 추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줄로 나는 믿으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으로는 몇십 년 전부터 알아서 절대 믿고 애중히 여기는 터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각에 국무총리보담 덜 중대하지 않은 책임을 김성수씨에게 맡기려는 것이 나의 가장 원하는 바이므로, 이다음에 발표될 때에 보시면 알려니와 이러한 각오하에서 김성수씨는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국무총리보담 덜 중대하지 않은 책임”이란 재무장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여러차례 김성수를 이화장으로 불러 미국의 건국 초기에 재무장관으로서 독립정부 건설의 기초를 닦았던 해밀튼(Alexander Hamilton)의 보기를 들면서 재무장관을 맡을 것을 집요하게 권했으나 김성수는 거절했다.1)
申翼熙는 立法府 책임 맡아야
신익희는 입법부의 책임을 맡아서 일해야 할 것이므로 제외한다고 했다.
“신익희씨는 인격이나 민중의 신망이나 해외 풍상에 임시정부 책임으로 여러 해 분투하며 끝까지 지켜 내려온 그 역사를 보든지 정치상 기능과 수완으로 보든지 누구나 그분보다 더 낫게 생각할 국무총리 자격이 몇 분 안될 것이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으로는 수십 년 전부터 깊이 알고 친임(親任)하며 애중히 여겨 오던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 삼권분립에 국회가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이 앞에 제정할 모든 법령에 급급히 할 일이 많은 수효를 점령하고 있는 중에 상당한 지도자가 없이는 전도가 심히 망창(茫蒼·큰 일을 당하여 앞이 아득함)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부의장 책임을 계속하야 이 중임을 담임하다가 국회에서 의장을 다시 선거할 때에 국회선거를 보아서 앞길을 작정하는 것이 다대한 도움을 주겠기로 입법부의 중대한 책임으로 인연해서 김동원(金東元) 부의장과 협의 진행하는 것을 부탁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조소앙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전인 7월 26일에도 이화장을 방문하여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2)
남북협상에 실망하고 돌아온 뒤로 김구 그룹과도 결별 상태에 있던 조소앙은 정부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명해 왔다.3) 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李範奭)이 국무총리로 결정된 뒤에도 조소앙은 신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할 의사가 있었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민국의 일이라면 국무총리 아니라 소학교 교장이라도 하겠다”라고 대답했다.4) 그러나 이승만은 조소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거로 좀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趙素昻은 민중의 의혹이 완전히 풀려야…
“조소앙씨는 삼십여년 전 일본 유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그 명망과 위신이 내외에 전파되어 많은 추대를 받았는데, 그때부터 내가 친절히 알게 되어 마음으로 깊이 신뢰하며 추앙하던 터입니다. 그 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나와 거리는 멀었으나 밀접한 통신상으로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나간 터이며, 귀국한 후에도 더욱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언제든지 국사에 동주병제(同舟竝濟)할 줄 믿고 있던 터이었습니다. 불행히 근자에 와서 총선거문제 이후로 노선이 갈려서 우리 대업에 다소간 방해가 있었고 민심이 따라서 현혹하게 된 것을 우리가 다 불행히 여기는 바입니다.
다행히 근자에 이르러서는 차차 휴수동거(携手同去)할 희망이 보이므로 조만간 우리가 다시 한길로 나가기를 기약하고 있는 터이니, 우리 개인상으로는 아무 의점도 없고 정의상 손실도 없으나, 정권을 잡고 민족을 인도하는 자리에서는 민중의 아혹(訝惑·의혹)이 풀려서 다 소상히 알게 되기 전에는 얼마간 의문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차차 이 아혹이 다 풀려서 우리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장애가 없도록 만든 후에 책임을 분담케 되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되므로 조소앙씨나 그 후원하는 동포들이 나의 고충을 양해할 줄로 믿습니다.”
이승만은 이어 국무위원 조직은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승인된 뒤에 국무총리와 상의해서 하겠다고 말하고, 아무리 유자격자라도 자신의 친구와 친척은 배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국회의원 중 이윤영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합니다.”
그가 말한 “의외의 인물”이란 결국 그 자신이 김성수를 설득하여 자신의 선거구를 그에게 양보하게 한 이윤영이었다.
이북 주민 위해 曺晩植 대신 李允榮을
이승만은 이윤영을 임명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공포에 대하여 이윤영 의원이 가장 놀랄 줄 압니다. 이분을 임명하는 나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첫째는 총리 임명에 먼저는 국회의원 중으로서 택할 것을 많이 생각한 것이니, 민의를 존중하고자 하는 본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는 이북대표 한 분이 그 자리 점령하기를 특별히 관심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급급한 우리 문제 중에 제일 급한 것은 남북통일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정책을 쓰든지 이북 동포의 합심합력을 얻지 않고는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먹으나 굶으나 머리 둘 집칸이라도 있고 이만치라도 자유 활동하고 살아온 터이나 이북 동포의 참혹긍측(慘酷矜惻)한 정형은 우리가 밤이나 낮이나 잊을 수 없는 터입니다.
정부를 조직하는 자리에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부통령으로 추대해서 이북 동포의 마음이라도 위로하고자 한 것이 우리 국회 전체의 동일한 원이었으나, 조 선생의 생명이 위험할 것을 염려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투표를 짐짓 아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만식씨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으로 이윤영씨가 국무총리 책임을 맡는 것이 정치상 지혜로나 민족적 정의로나 가장 적당할 것이므로 남북통일 촉성을 위하여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을 믿습니다. 조선민주당도 당이니 우리말과 모순된다 할 것이나, 그 당은 남한에서 압도적 세력을 가졌다 볼 수 없습니다. …”
이승만은 나아가 남북한 주민들 사이의 오랜 악습인 지방열을 타파하는 일에도 이윤영의 역량이 크게 기대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내가 믿고 아는 바는 이윤영 의원이 지방열을 절대 증오하여 이 악습을 극력 반대하는 분입니다. 총선거되기 전에 이북 이재동포의 특별선거구역을 정한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인데, 유엔 결정으로 이것이 실시되지 못하였던 것이나, 그때에 이재동포들이 많이 흥분되어 여러 가지 여론이 있었으나, 이윤영 의원의 애국심으로 열렬히 설명해서 모든 문제가 다 침식되고 이북 동포의 대표문제는 다 중지하게 하여 이번 선거에 지장이 없이 대성공을 하게 한 것은 또한 우리가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 이유로 이윤영씨의 상당한 인격과 온화한 심법(心法)과 확고불변하는 기개가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 바이며, 연부역강한 몸으로 우리들 대통령 부통령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뜻과 행하기 어려운 일을 다 대행할 수 있을 줄로 믿는 바입니다.”5)
유엔總會의 政府承認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승만이 7월 26일에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가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데에는 다른 고려도 있었다. 그것은 이윤영은 이북을 대표하므로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총회의 승인을 얻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이윤영은 부유층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자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6)
그러나 이승만이 퇴장한 뒤에 바로 무기명투표로 실시된 표결에서 이윤영 임명 승인안은 재석의원 193명 가운데 가 59표 대 부 132표(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각 정파, 특히 가장 강력한 세력인 한국민주당과의 사전협의 없이 대통령 선거 때의 180표라는 압도적인 다수표만 막연히 믿고 정면 돌파를 시도한 승부수의 패배였다.
이윤영 승인안 표결결과가 밝혀진 뒤에 윤석오(尹錫五) 비서가 “이윤영씨 총리 승인안이 망신만 당했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이승만은 “그래, 부결됐어!” 하고 덤덤히 말하고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윤영 승인안의 부결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는 것이다.7) 이승만은 국회가 이윤영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을 다시 논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국회는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을 내세워 재론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이윤영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은 7월 29일에 (1) 이번 총리 승인안은 단순한 인사 안건으로서 ‘의안’에 해당하지 않고 (2) 어떤 나라에서든지 일사부재의 원칙은 법률안에 한하며 (3) 이번 국회는 건국회의로서 정기회도 아니고 임시회도 아닐 뿐 아니라 (4) 총리 임명 승인에 관하여 대통령과 국회의 의사가 상충되는 경우에 대한 헌법규정이 불비함에 따라 이러한 경우에는 대통령의 재의 요청안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8)
이화장은 또다시 내방객들로 인성만성했다. 국회의 표결이 끝나자 달려온 사람은 이윤영이었다. 이윤영에 이어 오후 4시에는 무소속의 최범술(崔凡述), 정현모(鄭顯模) 두 의원이 다녀갔고, 4시 반에는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李靑天)이 30분가량 요담하고 갔다. 이튿날 아침 9시25분부터는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 노블(Harold Noble)이 찾아와서 한 시간 동안 요담했고, 이날 오후 6시40분에 무소속 구락부를 대표하여 이화장을 방문한 오석주(吳錫柱), 윤재욱(尹在旭), 김병회(金秉會)는 조소앙과 신익희 두 사람 가운데서 국무총리를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9)
한편 한민당계 의원들은 7월 27일 오후 3시에 당사 회의실에서, 무소속 의원들은 28일 오전 11시에 서울 호텔에서 각각 회의를 열고 기정 방침대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했다.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둘러싼 이승만과 국회의 이러한 대립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어중간하게 절충한 정부 권력구조에 대한 인식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다음과 같은 기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
“국회내 각파, 특히 한민계와 무소속계는 국가대계와 헌정확립을 위하여 대통령의 총리 승인 요구를 거부하고 있으며 대통령이 끝까지 국회내 세력을 무시하고 나간다면 절대 다수당이 존재치 않는 금번 국회에서는 입헌정치의 상식에 비추어 당연히 각파 세력을 기간으로 한 연립정부가 조직될 것이므로 국회내 각파는 타협하여 연립할 기운이 농후하며, 이미 무소속과 한민계에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연일 회의를 거듭하고 있어서 총리 재임명을 명일에 두고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10)
“현재 있는 政黨이 政權 잡는 것 民族 다대수가 원치 않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이승만은 7월 28일 오전에 국회 정파들을 질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국무총리 임명을 국회에서 부인한 후에는 내가 물론 다른 인물을 임명하고 또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 순서적일 것이나, 이 임명안을 제출한 후 당석에서 부결된 사실을 보면 그 속에 무슨 응결이 있어서 두 당이 각각 내응적으로 자기 당 사람이 아니면 투표 부결에 부치자고 약속이 있는 것이니, 만일 이런 사실이 있다면 내가 국무총리를 몇 번 고쳐서 임명하더라도 자기들의 내정된 사람이 아니고는 다 부결하고 말 것이니, 그 내용을 좀더 알기 전에는 다시 임명하기를 원치 않으며, 또 따라서 내가 이윤영씨를 임명한 이유를 몇 가지 설명한 것이 있으니, 그 이유가 부적당한 점이 있다든지 또 그렇지 않으면 이윤영씨를 임명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이유가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면 내가 알고자 한 것이나, 토론 한 번도 없이 부결한다는 것이 내게는 각오가 덜되는 것이다.”
이승만이 말한 두 정당이란 한민당과 한독당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무소속 의원들의 상당수가 한독당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1) 이승만은 이어 국민 대다수가 현재 있는 정당이 정권을 잡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전민족의 다대수가 지금 현재 있는 정당으로 정권을 잡게 되는 것은 원치 않는 바인데, 그중 한 정당의 유력한 분으로 정권을 잡게 하면 서울 정치계 측에서는 환영할는지 모르지만 다대수 동포에게는 낙망될 것이다. 독립촉성국민회 간부를 내가 몇 번 개조하여 보았는데, 처음에는 모든 정당이 다 민족운동에 협의 진행하기를 목적하고 두 정당의 간부 인물로 국민회 책임을 맡게 하였더니, 그후 결과로는 각각 자기 정당을 중요시하므로 민족운동을 하여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 국권 건설의 초대 정부에 이것을 또 만들어 놓고 이 앞길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적어도 국무총리 책임을 두 정당 중에 유력한 인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이 민중의 바라는 바요 또한 나의 뜻하는 것이므로 천사만려(千思萬慮)한 결과 이와 같이 한 것인데, 국회에서 무슨 이유로든지 이분을 원치 않는다면 내가 고집하려는 것은 아니나, 국회안에서 어떤 인물을 지정해 가지고 그분만을 쓰기로 활동하는 인사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는 터이니, 이것이 민족의 원하는 것인가 내가 주장하는 것이 민족의 원하는 것인가를 알아서 그대로 따르기를 나는 결심한다.”12)
이 담화가 발표되자 기자들은 서면질의서를 제출했는데, “이윤영을 재임명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이승만은 “내가 이에 대해서는 국회의 권위를 존중하여 누구든지 다시 임명하고자 하나, 정당이 결속이 있다면 재삼 임명하는 것이 무효할 것이므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아서 할 것이다”라고 무르춤했다.13)
李範奭을 비장의 카드로 숨겨 놓아
이승만은 이윤영의 국무총리 승인안이 국회에서 부결될 경우를 예상하여 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李範奭)을 내정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위에서 본 올리버에게 보낸 7월 26일자 편지에서 이승만은 유력한 총리 물망자로 김성수, 조소앙, 신익희 세 사람과 함께 이범석도 거명했다.14) 이승만은 7월 23일에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을 초치하여 장시간 논의했는데,15) 이튿날 《국제신문(國際新聞)》이 호외로 이범석이 국무총리에 내정되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이승만과 이시영은 이윤영 승인안이 부결되는 경우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문제를 논의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16)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추천한 사람은 한민당계이면서도 이승만의 신뢰가 두터운 이인(李仁)과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 그리고 민정장관 대리로서 민족청년단을 공식으로 지원해 온 헬믹(Charles G. Helmick) 등이었다.17) 다른 많은 청년단체들과는 달리 1946년 10월 9일에 미군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민족청년단은 1947년부터 정부수립 때까지 미군정부의 예산항목에 포함되어, 1947년에는 2,064만8,000원의 예산이 할당되었다.18)
이시영과 협의하여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확정한 이승만은 국회 정파들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7월 29일 오전에 먼저 독촉국민회의 고희동(高羲東)과 배은희(裵恩希)를 부른 데 이어 낮 12시50분에는 한민당의 김성수를 불러 협조를 당부했다. 그리고 1시 반에는 이청천을 초청하여 요담했다.19) 광복군총사령으로서 참모장 이범석을 지휘하는 관계에 있었던 이청천은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에 반대했다.
이범석의 내정사실이 알려지자 한민당계 의원들과 무소속 그룹은 7월 29일에 각각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조소앙을 강력히 추천해 온 무소속 그룹은 이범석 임명에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6시쯤에 윤재욱과 윤석구(尹錫龜)가 대표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한민당 쪽에서는 윤치영(尹致暎), 허정(許政) 등 이승만 직계들과 김준연(金俊淵) 등 호남파 사이에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20)
이처럼 어런더런한 상황 속에서 7월 30일 오전에 이범석이 계동 집으로 김성수를 방문하여 장시간 요담했다.21) 이범석의 협조 요청을 받은 김성수는 12부 4처 가운데에서 적어도 6석을 한민당에 배정해 주지 않으면 당 간부들을 설득할 수 없고, 또 자기로서도 대한민국 성립과정에서 한민당이 치른 역할이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비중으로 보아 그것은 최소한의 요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범석은 자기도 동감이라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22)
같은 날 국회에서는 한민당의 노일환(盧鎰煥) 의원과 같은 한민당이면서 이승만 직계인 윤치영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날 이승만은 국회에 나가서 당파를 떠나 새로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는데, 노일환이 등단하여 7월 28일의 이승만 담화를 문제 삼아 그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천황(天皇)과 같은 태도라면서 이승만이 먼저 그 담화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윤치영은 노일환을 반역자라면서 징계에 회부할 것을 동의했고, 그러자 의원석과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는 등 어수선했다.23)
국무총리 임명문제로 조각작업이 늦어지자 정국경색을 우려하는 의원들이 늘어났다. 한민당은 김성수의 설득으로 이승만이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하자는 의견이 많아져서 표결에서는 자유의사에 일임하기로 했다. 무소속 의원들 가운데에도 이번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해야 한다는 의원들이 늘어나 7월 31일에는 윤치영, 정준(鄭濬) 등의 주도로 70여명의 의원들이 의사당에서 따로 모였다.24)
마침내 이승만은 7월 31일에 기자들을 만나, “국무총리 문제로 국회에 두 부분이 있어서 자기 부분의 인물을 고집하는 폐단이 약간 있었으나, 지금은 이것도 다 풀려서 공정한 사조(思潮)로 해결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고, “여론상 이범석씨의 명망이 가장 높으므로 나는 민의를 따라 작정할 것이다” 하고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을 시사했다.25)
110표 대 84표로 李範奭 국무총리 승인 받아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위한 국회 제37차 본회의는 8월 2일 오전 10시에 개회되었다. 197명의 국회의원 전원은 개회시간 전부터 자리에 착석했고, 방청석 출입구는 개회시간 훨씬 전부터 큰 혼잡을 이루었다.
10시30분에 국회에 임석한 이승만은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요망하는 연설을 했다. 그것은 원고가 없는 즉석연설이었다. 어떻게든 국회의원들을 구슬려야 했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이 문제를 지체한 관계로 오늘은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들도 나도 또한 우리 민족 전체가 모두 여기에 대하여 대단히 초조히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어떠한 정당이나 어떠한 단체가 많은 권리를 가졌다든지 하지 말고 우리 전국민이 많은 권리를 가져야 하겠다는 여러분의 생각과 이 사람의 생각이 유일한 생각일 것입니다. … 8월 15일 안에 여기 군정장관과 사령장관들은 다 준비를 해 가지고 하루빨리 주권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국무총리 승인이) 하루빨리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또 우리 듣는 바에는 남북협의를 하는 분들이 벌써 남한대표를 뽑아 가지고 그쪽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끼리 돌아앉아서 서로 토의만 하고 나가면 안 될 것입니다. … 국무총리로 누구를 지정을 할 테니 큰 문제가 아니걸랑 동의시키고 … 이번 부결되면 그 영향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 지금은 누가 개인이나 무슨 당의 관계를 초월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때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여기에 세워 놓아야 하겠다는 그 작정을 가지고서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또 이런말 저런말 써 가지고 한다면 영향이 대단히 좋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
며칠 동안에 밖에서 유언하는 말에 이범석씨가 물망이 높고 해서 내가 이범석씨를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여러분에게 드려 놓으니, 국회에서는 길게 토의를 마시고 작정해서 통과해 주시기 바랍니다.”26)
그것은 1주일 전에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했던 자신의 권위와 통찰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듯한 당당한 연설과는 사뭇 달랐다.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오후에 표결하자고 주장하는 의원도 있었으나, 즉결하기로 결의하고 무기명투표에 들어갔다. 개표결과는 재석의원 187명 가운데 가 110표 대 부 84표(무효 2표)로 승인이 가결되었다.27)
“나의 忠誠, 나의 精力, 나의 生命을 國家民族을 위하여…”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설화적인 대첩을 이끌었던 이범석은 이제 마흔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취임 첫 소감도 무인 정치가다웠다. 임명경위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31일에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승인하였다. 국내정세를 잘 알기 때문에 쾌락한 것이며, 만일 접수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심경에 어그러질뿐더러 현 국내외 정세의 긴박한 요청에 배치되는 것이다.
나는 본래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가 민족의 현실을 떠나서 개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는 피동적이었지만 금후로는 주동적 입장에서 오직 나의 충성, 나의 정력, 나의 시간, 나의 생명을 이 국가 민족을 위하여 다만 하루라도 바치고자 한다.”
남북통일을 위한 시정방침을 묻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국무총리에 임명되리라고는 예상조차 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침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민족이고 이 강토가 양단되면 완전한 국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됨을 잘 알기 때문에 국가 민족을 위하여 적극 추진할 생각이다. 신생 정부의 제일 중대한 과업은 강토완정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적극 추진 준비함에 있다.”
조각에 대한 구상을 묻자 이범석은 “헌법상 조각은 대통령에게 중점이 있다”고 말하고, 또 지난 30일에 김성수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는 질문에는 “사적인 회담이었으며 내용은 없다” 하고 잘라 말했다.28)
國防部長官은 國務總理가 겸임하기로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의 승인이 끝나자 이승만은 그날 저녁으로 이범석과 함께 조각작업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이날 저녁 9시40분에는 재무, 법무, 농림, 교통 4부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재무부 장관 김도연(金度演)
○ 법무부 장관 이 인(李 仁)
○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 교통부 장관 민희식(閔熙植)
한민당의 중앙위원인 김도연은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무역협회장, 민주의원 의원, 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한 경제전문가였다.
이인은 국내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 사건을 도맡다시피 하여 변호했고 조선어학회 간부로서 투옥되었던 변호사였다. 미군정부의 대검찰청장을 지낸 한민당계이면서도, 이승만의 신뢰가 두터웠다.
초대 내각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조봉암의 농림부 장관 임명이었다. 이승만은 8월 4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각 구성은 정치적 안배였다고 말하면서, “한국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농민들을 휘어잡기 위해서”라고 썼다.29)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기로 내정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범석에게 의견을 묻자 이범석은 “조봉암이 아니라 김일성인들 무슨 상관입니까? 대권은 이 박사께서 쥐고 계신데” 하고 적극 찬동했다고 한다.30)
민희식이 교통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미군정부 관료 케이스로 배려된 것이었다. 미국에 유학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일하기도 한 민희식은 미군정부의 교통부장이었다.
이튿날 오후에 내무부, 사회부, 문교부 세 부의 장관이 임명되었다.
○ 내무부 장관 윤치영(尹致暎)
○ 사회부 장관 전진한(錢鎭漢)
○ 문교부 장관 안호상(安浩相)
이승만의 재미시절부터 그를 도왔고 귀국한 뒤에는 민주의원 비서국장 등으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 온 윤치영은, 미군정부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과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 두 사람의 알력관계로 어느 한 사람을 내무부장으로 임명했다가는 경찰행정에 큰 혼란이 예상되어 내무부를 맡게 되었다.31) 같은 한민당의 노일환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치영은 8월 2일에 한민당을 탈당했다.32)
이승만은 조병옥을 외무부 장관으로 내정했다가 대통령 특사로 정부승인 외교를 벌이게 하고, 장택상을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대한노총 위원장으로서 헌법에 근로자이익균점권 규정(제18조 2항)을 설치하는 데 앞장섰던 전진한은 노동문제를 관장하는 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전진한은 사회부 장관에 임명된 뒤에도 대한노총 위원장을 겸임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승만은 처음에 문교부 장관으로 장면(張勉)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추천명록에 안호상의 추천이 많고, 또 앞으로 큰 임무를 담당해야 할 주미대사 적임자를 찾지 못하여 안호상에게 문교부를 맡기고 장면을 특사로 보내어 일하는 것을 보아 주미대사로 임명하기로 한 것이었다.33) 서울대학교 교수인 안호상은 민족청년단의 이데올로그였다.
8월 4일에는 나머지 외무부, 상공부, 국방부, 체신부의 장관과 국무총리 직속인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기획처 4개처의 일부 처장인사가 있었다.
○ 외무부 장관 장택상(張澤相)
○ 상공부 장관 임영신(任永信)
○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겸임
○ 체신부 장관 윤석구(尹錫龜)
○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
조각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 있던 임영신은 이화장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자기가 귀국할 때까지 최종결정을 보류해 달라고 이승만에게 졸랐다. 8월 3일에 급히 귀국하여 공항에서 이화장으로 직행한 임영신은 조각당 마루에 허정(許政)을 상공부 장관으로 발표하려고 붓으로 써서 펼쳐 놓은 것을 보자 발로 짚으며 “우양(友洋)이 상공을 뭘 아느냐”고 했다. 그러자 이범석이 임영신에게 “그러면 당신이 상공장관 하겠소?” 하고 물었다. 그리하여 발표 직전에 상공부 장관이 임영신으로 바뀌었다.34)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윤석구가 체신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무소속구락부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이승만은 윤석구가 “말썽을 많이 부리는 귀찮은 사람”이라면서도 “실력은 있다”면서 그다지 미워하지는 않았다.35)
8월 4일에 열린 국회 제39차 본회의는 이승만의 후임으로 신익희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신익희의 의장 피선으로 결원이 된 또 한 사람의 부의장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김약수(金若水)가 한민당의 김준연을 누르고 당선되었다.36)
그리고 이튿날에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는 이승만이 임명한 김병로(金炳魯)의 대법원장 인준안을 가결했다.37)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뼈대가 갖추어졌다.

李始榮은 첫 國務會議에 참석하지 않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은 위에서 보듯이 전시의 위기 정부(crisis government)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 정파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격심한 길항을 보이고 있는 정치상황에서 그러한 거국내각으로는 이승만이 말한 “좋은 시계 속처럼 돌아가는” 정부의 기능을 하기는 어려웠다. 우선 부통령 이시영부터 조각작업에 불만을 느끼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8월 4일에 서울을 떠나 수원의 친지 집으로 가 버렸다. 그는 이튿날 열린 첫 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8월 4일 오후에 동부인하여 혜화동의 이시영 집을 방문했으나, 이시영은 이미 서울을 떠난 뒤였다.38) 이러한 해프닝도 결국은 미국식 정부운영 제도와 내각책임제 정부운영 방식에 대한 인식과 정치풍토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시영은 8월 10일의 제5차 국무회의부터 참석했다.39)
첫 국무회의가 열리던 날 아침에 이승만은 허정에게 연락하여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허정에게 총무처장을 맡아 보라고 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점잖은 허정이었으나 이승만의 이 제의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저는 국정에 참여하여 정정당당하게 저의 포부를 펴 보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운동도 했고 해방 후 정치활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국무회의에서 표결권도 없는 처장은 저의 포부를 실현할 자리는 아닙니다.”
허정은 이렇게 말하고 바로 회의장을 나갔다.
그날 저녁에 재무부 장관 김도연이 허정을 찾아갔다.
“우양, 오늘 한 말은 과했던 것 같소. 이 대통령이 몹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소. 몇 번이고 우양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40)
허정과 함께 이날 기획처장에 임명된 군정부 중앙물가행정처장 이교선(李敎善)도 이튿날 사의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8월 7일에 총무처장에는 조민당 정치부장 김병연(金炳淵), 기획처장에는 연희대학 상학부장 이순탁(李順鐸)이 임명되었다.41)
그런데 허정은 그런 지 한 달 조금 지나서 입각하게 되었다. 9월 14일에 경부선 내판(內坂)역에서 특급열차 ‘해방자호’끼리 충돌하여 미군 24명과 한국인 1명이 즉사하고 10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큰 열차사고가 발생하여 교통부 장관 민희식이 인책 사임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었다.42)
韓民黨은 是是非非주의로 임하겠다고 천명
첫 내각구성에 대한 정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가장 분개한 것은 다름 아닌 한민당이었다. 김성수의 국무총리직은 단념하더라도 이승만과의 공동정부를 기대했던 한민당은 8월 6일에 상무위원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가 거족적으로 대망하던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된 것은 경하할 바이다. 물론 정부구성의 방법 기타에 대하여서는 논의할 점이 불무할뿐더러 사회의 물의도 높을 듯하나, 우리는 차제에 오직 우리의 중앙정부가 하루바삐 국제적 승인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정중하게 전제한 담화는, 그러나 앞으로는 시시비비주의로 임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본당으로서 이번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재무장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관련은 극히 희박하다. 본당은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정부로 하여금 하루빨리 남북을 통일하고 화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하여 진정한 민족주의적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책선(責善)적 편달과 감시를 게을리 아니할 것을 이에 언명하는 바이다.”43)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8월 4일자 편지에서 김성수는 장관 자리 7석을 그의 추종자들에게 할애할 것을 요구했다고 썼다.44)
한편 조민당을 중심으로 한 이북애국단체연맹은 8월 6일에 조민당 회의실에서 전체회의를 개최했는데, 회의에서는 이승만이 이북인에 대한 약속을 위반한 것은 물론이고 “비서진을 강화한 데 불과한” 약체내각이라고 격렬한 성토가 쏟아졌다. 회의는 ‘도각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문제까지 검토했으나, 그것은 유엔 총회의 승인을 고려하여 자제하기로 하고 내각개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45)
내각비판 가운데서도 특히 임영신의 상공부 장관으로서의 능력을 의구하는 평언이 많았다.46) 대한상공회의소도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현하의 최대의 급무이며 자주독립의 기초사업인 산업재건을 담임하는 각 행정부처의 책임자 중에 그 수완이 미지수인 인물이 등장한 데 대하여 일말의 불안이 없는 바 아니나, 우리는 상공회의소의 본령에 비추어 모든 비판은 구체적 정책과 실적을 볼 때까지 보류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47)
이승만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하여 8월 5일에 김성수, 이청천, 이윤영 세 사람을 무임소 국무위원으로 내정하고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끝내 고사하고, 다른 두 사람도 8월 12일에 가서야 취임했다.48)
建國基礎의 여섯가지 요소 제시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및 광복 3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자정을 기하여 미군정부의 행정권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양되기 시작하는 뜻깊은 날이었다. 개회시간 전부터 식장인 중앙청 광장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청 정문으로부터 세종로와 태평로에는 각 정당 및 사회단체, 청년단체, 학생 등 수십만의 인파가 운집했다. 이날의 식전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태평양지역 연합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 내외가 도쿄(東京)로부터 날아와 참석한 것이었다. 맥아더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단상에는 이승만 내외와 맥아더 내외를 비롯하여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3부 수장과 유엔임시한국위원단, 하지 장군을 비롯한 남한 주둔 미군수뇌, 로마교황청 사절을 비롯한 각국 민간사절들이 자리를 잡았다.
기념식은 오전 11시30분에 개회되었다. 회장 오세창(吳世昌)의 개회사를 명제세(明濟世)가 대독한 다음, 이승만의 기념사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긴 옷고름 대신에 단추를 단 회색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 특유의 방식으로 개량한 한복이었다.
이승만은 30분에 걸쳐서 연설을 했는데, 그것은 국가건설의 기본이념을 명수사를 구사하여 이론적으로 피력한 것이어서 꼼꼼히 톺아볼 가치가 있다. 그는 먼저 이날을 맞는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국민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는 것입니다.
이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사십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하여 온 사실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한 시간입니다. 내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내 동포의 자치 자주하는 정부 밑에서 자유공기를 호흡하며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대통령의 존귀한 지위보다 대한민국의 한 공복인 직책을 다하기에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터입니다. …”
그는 이어 맥아더 장군 내외가 기념식에 참석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나서,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기에는 아직도 험하고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사천여년을 자치 자주해 온 역사는 막론하고 세인들이 남의 선전만 믿어 우리의 독립 자치할 능력에 대하여 의문하던 것을 금년 5월 10일에 전민족의 민주적 자결주의에 의한 전국 총선거로 우리가 다 청소시켰으며, 모든 방해와 지장을 일시 악감이나 낙심 애걸하는 상태를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인내와 정당한 행동으로 극복하여 온 것이니, 우리는 이 태도로 연일 행진함으로써 앞의 많은 지장을 또 일일이 이겨 나갈 것입니다. 조금도 우려하거나 퇴축할 것도 없고 어제를 통분히 여기거나 오늘을 기뻐하지만 말고 내일을 위하여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
이승만은 그러면서 “건국 기초의 요소될 만한 몇 조건”을 말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들었다.
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을 이기는 이치를 믿어야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을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애로 인하여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방침을 무효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요 우리 친우들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추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삼십년 전부터 결정하고 실행하여 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이렇듯 이승만은 건국이념의 첫째 조건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그 이념과 제도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이래로 실천해 왔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개인의 자유였다.
“(2)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하여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아서 다만 말과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력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자래로 저희 나라의 전제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습관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삼십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이승만은 이처럼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결과로 공화주의가 결실 단계에 있다고 강조하고 나서, 세 번째로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自由의 뜻을 바로 알고 政府가 자기 정부임을 믿어야
“(3)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숭히 하며 한도내에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든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계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계단을 밟아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하여 위험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권리를 사용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러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 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칙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승만은 이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의 중요성을 링컨의 유명한 민주주의의 정의를 인용하여 강조했다.
“(4)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에서는 공고하며 밖에서는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들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하는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시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반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이 받아들여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하거나 (정부를)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나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다섯째로 정부가 가장 역점사업으로 추진할 것은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향상과 평등권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 당위성을 태극기에 그려진 태극의 이치를 들어 설명했다.
노동자농민의 생활향상과 平等權 보장
“(5) 정부에서 가장 전력(專力)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의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런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통상과 공업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를 따라 발전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생활정도를 상당히 향상시키려면 모든 공업의 발전을 꾀하며 우리 농장과 공장의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없는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서로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悖·두가지 일을 한꺼번에 치러도 사리에 틀리거나 어그러짐이 없음)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들을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경영자들을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전쟁을 피하여 전민족의 화동을 도모하나니, 우리의 화동과 단체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상고적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의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를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마지막 조건으로 대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인 비판 여론과는 달리 미군정부의 한국인 관리들의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6)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외국의 경제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 세계 대세가 변하여 각 나라 간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 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의 화복안위(禍福安危)를 같이 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 되므로 어떤 작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들에 동일히 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그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기왕에 밝히 표시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며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줄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욕망이 없고 오직 세계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관심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미군정은 끝나며 대한정부는 시작되는 이 날에 모든 미국인과 모든 한인 사이에 친선을 한층 더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첫째로 미국이 일본의 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있던 적군을 밀어내었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기를 돕는 것이니, 우리 토지의 일척일촌(一尺一寸)이나 우리 재정의 분전(分錢)이라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과연 정의와 인도의 주의로 그 나라의 토대를 삼고 이것을 세계에 실천하는 증거가 이에 또 다시 표명되는 것입니다.
겸하여 과도기에 미국 장관(將官)들을 도와서 계속 노력한 모든 동포들의 업적은 우리가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직원이 일을 계속 진행하기 바라며 부득이 개체(改遞)할 경우가 있더라도 국사의 순조 진행을 위하여 끝까지 기능과 성심을 다하여 애국심의 책심(責心)을 다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
蘇聯과의 國交 수립 문제 다시 거론
이승만은 이어 미군 점령기간 내내 견원지간이었던 하지 장군을 “용감한 군인일 뿐 아니라 우리 한일들의 참된 친우”라고 추어올리고, 북한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 전국이 기뻐하는 이날에 우리가 북편을 돌아보고 비감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거의 일천만 우리 동포가 우리와 민국 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처를 요구할 것이요 다음에는 세계 대중의 양심에 호소하리니,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약한 이웃의 강토를 무단히 점령케 하기를 허락케 한다면 나중에는 세계의 평화를 유지할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만 소련이 우리에 접근한 이웃이므로 우리는 그 나라로 더불어 평화와 친선을 유지하려는 터입니다. 그 나라의 자유로 사는 것을 우리가 원하느니만치 우리가 자유로 사는 것을 그 나라도 또한 원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이 원하는 바를 그 나라도 원한다면 우리 민국은 세계 모든 자유국과 친선히 지내는 것과 같이 소련과도 친선한 우의를 다시 교환키에 노력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취임사에 이어 또 다시 소련과의 국교수립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긴 연설을 마무리했다.
“결론으로, 오늘에 지나간 역사는 마치고 새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모든 정부 중에 우리 새 정부가 다시 나서게 되므로, 우리는 남에게 배울 것도 많고 도움을 받을 것도 많습니다. 모든 자유우방들의 후의와 도움이 아니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우방들이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앞으로 계속할 것을 우리는 길이 믿는 바이며, 동시에 가장 중대한 바는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심과 굳센 결심입니다.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애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49)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이날의 연설문 초고를 기초해 줄 것을 부탁하여 써 보내 왔으나 그대로 읽지는 않았다고 하는데,50) 이날의 연설문에 올리버의 초안이 얼마나 채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맥아더는 1882년의 朝美條約 약속 지킨다고
이승만의 기념사에 이어 연합합창단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가’ 합창이 있었고, 이어 맥아더의 축사가 있었다. 맥아더는 거물 정치가답게 격조있는 웅변으로 한국인의 자긍심을 한껏 고취시키고 나서, 1882년의 조미우호통상조약을 거론하면서 한미 유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민주적 생활의 방어는 무엇보다도 개인 정신에 달렸습니다. 개인 자유의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이것을 지킬 결심과 용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미국 국민은 귀국민과 다년간 각별한 우호적 관계를 가졌습니다. 일찍이 1882년에 양국 국민 간에는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간에 영원한 평화와 우의를 선포하였습니다. 미국 국민은 이 서약에서 이탈한 적이 없으니만큼 여러분은 그 불가분 불가리(不可分不可離)의 우호관계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 각하가 신생 민주국가를 영도하는 데 각하를 보좌할 우수한 각원 여러분은 정치적 경험에서 지금까지 찾아보지 못한 가장 복잡한 문제에 당면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느냐가 귀국 국민의 통일과 복리를 대부분 측정할 뿐만 아니라 역시 아시아 대륙의 장래 안정을 결정할 것입니다. …”51)
뒤이은 축사를 통하여 하지 장군은 재조선 미군정부는 오늘 밤 자정으로 폐지되고, 한국 주둔 미군사령부 민사처가 생긴다고 발표했다.52)
맥아더 내외는 이날 오후 늦게 도쿄로 돌아갔는데, 이승만은 그에게 구왕실 소장의 질동(質銅) 향로 한 벌과 윤비(尹妃)가 사용하던 청옥 화병을 선물로 증정했다. 그리고 이범석은 은제 신선로 한 벌을 선사했다. 질동제 향로는 일찍이 고종(高宗) 황제가 맥아더 원수의 부친에게 보낸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맥아더는 부친의 유품인 그 향로를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태평양전쟁 때에 필리핀의 코레히도르(Corregidor) 작전에서 분실하고는 늘 아까워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이승만이 이번 기회에 같은 것을 구하여 선사한 것이었다.53)
2. "유엔總會에 大韓民國臨時政府 승인 요청할 터"
7월 21일에 결성된 통일독립촉진회(통촉)는 민족자주연맹의 김붕준(金朋濬)과 한국독립당의 엄항섭(嚴恒燮)을 비롯한 6명을 중앙집행위원과 감찰위원을 선정할 전형위원으로 선출했는데, 이들은 7월 23일에 제1차 회의를 개최한 데 이어 26일에는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회의를 열고 중앙집행위원 83명과 중앙감찰위원 20명을 확정했다. 중앙집행위원에는 김붕준, 엄항섭, 유석현(劉錫鉉), 여운홍(呂運弘), 김학규(金學奎), 배성룡(裵成龍), 조헌식(趙憲植), 이두산(李斗山), 조시원(趙時元), 설의식(薛義植), 홍기문(洪起文) 등이 포함되었다.54)
金奎植을 파리 유엔總會에 파견하기로
8월 1일 오후에 민족자주연맹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1차 통촉중앙집행위원회는 당면문제를 토의하고 9월에 열릴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할 대표로 김규식을 수석대표로 한 14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정치회의 소집 문제는 김구, 김규식 두 사람과 상무위원회에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는 또 김붕준, 엄항섭, 배성룡, 유석현, 김학규, 여운홍, 설의식, 송남헌(宋南憲) 등 13명을 상무위원으로 선출했다.55) 이어 8월 5일 오후에는 경교장에서 김규식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상무위원회를 열고 집행부 책임자를 다음과 같이 선임했다.
○ 사무국장 김붕준
○ 조직국장 배성룡
○ 선전국장 엄항섭
○ 재정국장 김학규56)
이렇게 하여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의 협동체제가 일단 갖추어졌다. 그러나 두 김의 행보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8월 4일에 소요산에 나들이 갔던 김구는 부산에서 거행되는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소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이튿날 아침에 김학규 등과 함께 부산에 가느라고 경교장에서 열린 제1차 통촉상무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57)
한편 민족자주연맹은 8월 4일에 김규식의 집에서 제20차 상무위원회를 열고 연맹의 정치노선에 위반하여 비밀히 진행 중인 북한 정권수립 공작에 참가한 연맹 간부 및 맹원을 조사하여 23일에 개최되는 상무위원회에서 조처하기로 결의했다.58)
김구는 부산행 열차 안에서 기자들을 만나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나누었다.
문 조각에 대한 소감은?
답 아무런 감상도 없다. 나는 그런 것을 필요로 느끼지 않는 만큼 누가 무엇이 되든지 간에 상관할 것도 없고 또 이렇다는 소감도 있을 수 없다.
문 파리 회의에 김규식 박사가 파견된다는데?
답 파리 회의는 남북에 주둔한 미소 양군 장터와 같다고 생각한다. 즉 북한이 잘되었다거니 남한이 잘되었다거니 서로 시비할 터인데, 나의 주장으로는 남북 간의 시비알력을 버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것이다. 또한 남이나 북이나 간에 남이 만든 정부의 대표들뿐이므로 순수 민간 의사를 듣겠다면 이에 응하는 것도 한 사명일 줄로 안다.
문 동대표단의 구성은 어떠한가?
답 김 박사를 단장으로 엄항섭씨 등이 수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대표단의 선발대로 서영해(徐嶺海)씨가 지난 6월 15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이미 파리에 도착해 있다. 서씨는 오래 전부터 파리에 있으면서 전 대스크프 대사의 후의로 임시정부 파리대사로 있었던 분이다.59)
임시정부의 주파리위원부 책임자였던 서영해의 해방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남북한에 수립된 두 분단정부 대신에 자신이 이끌었던, 그러나 이제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주장은 이때까지도 김구가, 이승만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유엔의 권능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김구는 이어 8월 8일에는 김규식의 파리 유엔총회 파견문제에 대하여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 김규식씨의 도불 계획은?
답 총회일자에 대어서 출발할 것이지만 아직 미정이다.
문 여권이 허가되지 않으면 어찌될 것인가?
답 거부하면 못 가는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의사를 발표치 못하게 하는 책임은 못 가게 하는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문 유엔총회에서 발언권이 인정되지 않을 적에는?
답 임기응변으로 투쟁할 계획이 서 있다.
문 남북통일에 대한 최근 동향 여하?
답 북조선 쪽의 반성을 촉구하여 남북 각기 단정추진파를 제외하고 통촉을 강화하여 적극적으로 남북통일에 힘쓰겠다. 그리고 우리 당원으로서 신생 정부에 참가한다면 당으로서 단호한 조치를 하겠다.
문 홍명희(洪命憙)씨는 어찌 되었는가?
답 재삼 보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는데, 아직 답이 없다.60)
金奎植은 民間代表 참가 어렵다며 파리行 거부
그러나 일찍이 파리강화회의 때의 쓴 경험이 있는 현실주의자 김규식은 파리행을 거부했다. 그는 8월 10일에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했다.
문 유엔총회에 독촉대표로 참석한다는데 언제쯤 출발할 것인가?
답 이 문제는 통촉 결성대회에서 결의되었지만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나는 남조선의 민간대표가 가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역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수반대표로 선임하였으나, 그 후 제1차 상무위원회 석상에서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문 그러나 김구씨는 부산에서나 인천에서 귀하가 파견된다고 언명하였는데?
답 그것은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한 것만 알고 그 후 내가 불접수한다고 말한 것을 몰랐던 까닭일 것이다. …61)
이튿날 민족자주연맹은 파리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남쪽이나 북쪽이나 관변이나 민중이나 어디나 대표를 한두 사람씩 요청하여 가지고라도 각 방면 견해를 들어 참조하여 가면서 최후결정을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라는 두리뭉실한 담화로 김규식의 말을 부연했다.62)
김규식의 이러한 태도표명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8월 12일에 유엔총회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겠다고 한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앞으로 유엔총회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 제시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는 사전에 말할 수 없다. 나의 대체 의견은 유엔조선위원단에 제출한 나의 의견서 내용에 제시된 바와 같다.”
그리고 김규식이 유엔총회 대표를 사퇴한 것에 대한 견해를 묻자 “김 박사가 견결(堅缺)히 사퇴하면 통촉상임위원회를 소집하여 토의 결정하게 될 것이다”라면서 대표 파견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63)
趙炳玉에게 에티켓에 관한 책 사보게 하라고
한편 국무회의는 8월 11일에 장면, 김활란(金活蘭), 장기영(張基永) 세 사람을 9월에 열릴 파리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64) 그리고 8월 21일에는 조병옥을 다시 구미특사 및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고문으로 임명했다.65)
이승만이 파리 유엔총회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가는 프란체스카가 9월 1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병옥에게 에티켓에 관한 책을 한 권 사 보게 하라고 쓴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외교관들이 지켜야 할 일들이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낭패할 것입니다. … 그들은 아직 포크와 나이프를 제대로 쓰는 법을 배운 일이 없습니다. 옷을 올바로 입는 법도 문제지요. 그들 대부분이 익숙하지 못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거든요”라고 썼다.66)
북한 정권수립을 위한 지하선거로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민족자주연맹은 8월 11일 오후 1시부터 4시간 동안 김규식의 집에서 임시상무위원회를 열고 연맹 산하의 정당 및 사회단체 소속 간부로서 북한 정권수립에 가담한 사람에 대하여 정권처분하기로 결의했다.67) 그리하여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한 홍명희, 이극로(李克魯), 손두환(孫斗煥), 최익한(崔益翰), 장권(張權), 이용(李鏞), 김충규(金忠圭), 김일청(金一淸), 나승규(羅承奎), 강순(姜舜) 등을 정권처분하여 물의를 빚었다.68)
이러한 두 김의 움직임에 대하여 좌익정파들은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근로인민당은 8월 17일에 두 김에 대하여 “그들은 그들의 반동적 본질을 다시 재생산하고 있다”고 말하고, “허다한 그들의 맹우들이 흔연히 참가하고 있는 결정적 사업에서 … 교묘히 이탈하여 반동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고 조선 인민의 의사와 자기들의 양심에 반항하려고 드는 그들은 실질상 외력과 국제반동의 강압에 굴복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69)
북한 정권수립을 위한 중도계 정파들의 귀추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 속에서 민족자주연맹과 한독당을 비롯한 25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은 8월 24일에 민족자주연맹 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앞으로의 정치행동을 토의한 다음, (1) 소위 제2차 남북정치지도자연석회의의 비법을 규탄하며, (2) 그 회합에 우리의 대표를 파견한 사실이 없고, (3) 4월 30일의 평양 공동코뮈니케에 위배되는 그 밖의 일체 행동과 북한에서 발전되는 사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동성명서를 연서로 발표했다. 김구와 김규식도 각각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을 대표하여 성명서에 서명했는데, 한독당을 제외한 민족자주연맹 산하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참가하고 있는 만큼 이 반대성명은 참가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의 개인적 의사표명이라는 등 혼란을 빚었다.70)
어머니와 아내와 큰아들의 遺骸 돌아와
배신감과 울분으로 착잡한 감회를 느끼고 있는 김구로 하여금 멍에의 70평생을 낡은 기록영화처럼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 생겼다. 중국 대륙에 묻고 온 모친과 아내와 큰아들의 유해가 돌아온 것이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뒤에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격화되어 만주 지방이 중공군 수중에 떨어지자 둘째 아들 김신(金信)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의 장로였던 이동녕(李東寧)과 중경시대의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었던 차이석(車利錫)의 유해와 함께 모친 곽낙원(郭樂園), 아내 최준례(崔遵禮), 큰아들 김인(金仁)의 유해를 옮겨 오게 했다. 이동녕은 기강에, 곽낙원과 김인, 차이석 세 사람은 중경에, 최준례는 상해에 묻혀 있었다.
김구는 8월 8일에 비가 내리는 인천 부두에 나가 이들의 유해를 맞았다. 곽낙원과 최준례와 김인의 유해는 경교장에 안치되었다가 8월 20일에 서울중학교 운동장에서 기독교 연합장으로 장의식이 거행되었다. 장의식은 이시영, 오세창, 김창숙(金昌淑), 김성수, 조소앙, 조완구, 명제세, 피치 박사 등의 내빈과 많은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부터 함태영(咸台永) 목사의 사회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71) 세 사람의 유해는 정릉에 안장되었다가 1999년에 최준례의 유해는 김구의 묘에 합장되고, 곽낙원과 김인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이동녕과 차이석의 유해는 9월 22일에 휘문중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의를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72)⊙
1) 《仁村金性洙傳》, 仁村紀念會, 1976, p.553 ; 尹錫五, <景武臺四季 組閣秘話③>,《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中央日報·東洋放送, 1977, pp.93~94. 2) 《朝鮮日報》1948년 7월27일자, <申氏, 趙氏를 推薦>. 3) 《서울신문》1948년 7월23일자, <參加할 用意있다>;《東亞日報》1948년 7월27일자, <政府는 獨立의 機關>. 4) 《朝鮮日報》1948년 8월10일자, <政府는 初步>.
5) 《制憲國會速記錄(1)》제35호(1948.7.27), <國務總理任命承認의 件>, 大韓民國國會, 1987, pp.645~647. 6) Rhee to Oliver, Jul. 26, 1948(梨花莊所藏) ;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184. 7) 尹錫五, 앞의 글, p.90.
8) 《서울신문》1948년 7월30일자, <總理認准問題, 朝民黨見解發表>. 9) 《서울신문》1948년 7월30일자, <趙, 申氏拔擢, 「無俱」에서 建議>. 10) 《東亞日報》1948년 7월29일자, <立憲精神擁護>. 11) 《朝鮮日報》1948년 9월29일자, <國會를 尊重>. 12) 《東亞日報》1948년 7월29일자, <民族이 願하는 길흾른다> ;《朝鮮日報》1948년 7월29일자, <李氏卽席否決은 遺憾>.
13) 《朝鮮日報》1948년 7월29일자, <國會를 尊重>. 14) Rhee to Oliver, Jul. 26, 1948,(梨花莊所藏). 15) 《朝鮮日報》1948년 7월27일자, <李副統領과 會見>. 16) 《朝鮮日報》1948년 7월27일자, <今日國會서 發表>. 17) 李仁,《半世紀의 證言》, 明知大學校出版部, 1974, p.186 ; 尹錫五, 앞의 글, p.91. 尹錫五는 맥아더 元帥와 中國戰區司令官이었던 미 국무부의 웨드마이어 將軍도 李範奭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고 했으나, 개연성이 희박하다. 18) 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p.59. 19) 《서울신문》1948년 7월30일자, <總理李範奭氏內定>. 20) 《朝鮮日報》1948년 7월31일자, <總理人選難航>. 21) 《東亞日報》1948년 7월31일자, <李範奭氏, 金性洙氏訪問>. 22) 《仁村金性洙傳》, 仁村紀念會, p.552. 23) 《朝鮮日報》1948년 7월31일자, <國會內對立尖銳>. 24) 《朝鮮日報》1948년 8월1일자, <國會도 承認態勢>. 25) 《朝鮮日報》1948년 8월1일자, <李氏總理指名確定的, 李大統領이 示唆> ;《京鄕新聞》1948년 8월1일자, <總理에 李範奭氏, 民意를 좇아 作定>.
26) 《制憲國會速記錄(1)》제37호(1948.7.27), <國務總理任命承認의 件>, pp.683~684. 27) 《朝鮮日報》1948년 8월3일자, <總理에 李範奭氏決定> ;《東亞日報》1948년 8월3일자, <李範奭氏總理決定>. 28) 《東亞日報》1948년 8월3일자, <南北統一에 努力>.
29) Rhee to Oliver, Aug. 4, 1948(梨花莊所藏) ; Robert T. Oliver, op. cit., p.186. 30) 尹錫五, 앞의 글, p.97. 31) 尹錫五, 앞의 글, pp.98~100. 32) 《서울신문》1948년 8월3일자, <尹致暎氏韓民脫黨>. 33) 尹錫五, 앞의 글, p.97. 34) 위의 글, p.101. 35) 같은 글, p.97. 36) 《서울신문》1948년 8월5일자, <國會議長에 申翼熙氏>. 37) 《東亞日報》1948년 8월6일자, <大法院長에 金炳魯氏>.
38) 《朝鮮日報》1948년 8월6일자, <李副大統領突然離京>. 39) 《朝鮮日報》1948년 8월11일자, <李副統領最初로 參席>. 40) 許政,《내일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p.159. 41) 《朝鮮日報》1948년 8월8일자, <總務金炳淵, 企劃李順鐸氏>. 42) 許政, 앞의 책, pp.159~160.
43) 《東亞日報》1948년 8월7일자, <南北統一民生解決에 專力하라>. 44) Rhee to Oliver, Aug. 4, 1948(梨花莊所藏) ; Oliver, op. cit., p.185. 45) 《東亞日報》1948년 8월8일자, <弱?內閣糾彈, 改造運動展開>. 46) 《朝鮮日報》1948년 8월6일자, <社說: 閣僚의 一瞥>. 47) 《朝鮮日報》1948년 8월8일자, <政府前途에 不安>. 48) 《서울신문》1948년 8월13일자, <問題의 無任所相, 兩氏만 遂受諾>.
49) 《京鄕新聞》1948년 8월16,18,19일자, <李大統領式辭內容>. 50) Oliver, op. cit., p.187. 51) 《朝鮮日報》1948년 8월16일자, <偉大한 韓民族, 外勢로 分裂될 理萬無>. 52) 《朝鮮日報》1948년 8월16일자, <民事處를 新設>. 53) 《서울신문》1948년 8월16일자, <李大統領 맥元帥에 香爐等을 膳物>.
54) 《朝鮮日報》1948년 7월28일자, <「統促」 中執·監委選出>. 55) 《朝鮮日報》1948년 8월3일자, <國聯에 金博士>. 56) 《朝鮮日報》1948년 8월7일자, <統促部署決定>. 57) 《朝鮮日報》1948년 8월6일자, <金九氏下釜>. 58) 《東亞日報》1948년 8월6일자, <北韓選擧參加者, 調査하여 措處>. 59) 《서울신문》1948년 8월7일자, <組閣別無所感>. 60) 《朝鮮日報》1948년 8월10일자, <兩單政排擊>.
61) 《朝鮮日報》1948년 8월11일자, <國聯行을 拒否>. 62) 《서울신문》1948년 8월12일자,. 63) 《朝鮮日報》1948년 8월13일자, <代表再選擧>. 64) 《朝鮮日報》1948년 8월12일자, <國聯代表에 三氏決定>. 65) 《서울신문》1948년 8월22일자, <趙炳玉特使不日間出發>. 66) Francesca Rhee to Oliver, Sep.1,1948(梨花莊所藏); Robert T. Oliver, op. cit., p. 195. 67) 《京鄕新聞》1948년 8월13일자, <以北政權에 加擔한 者에 政權處分採擇>. 68) 《朝鮮日報》1948년 8월18일자, <民聯崩潰?>. 69) 《朝鮮中央日報》1948년 8월18일자, <兩金氏에 對하야 勤民黨에서 聲名發表>.
70) 《東亞日報》1948년 8월26일자, <北韓政治行動參加는 非法> ;《朝鮮日報》1948년 8월26일자, <第二次南北協商反對>. 71)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p.196 ;《서울신문》1948년 8월21일자, <金九氏慈堂, 夫人, 令息遺骸葬儀式嚴肅執行>. 72) 《서울신문》1948년 9월23일자, <애끓는 追慕의 念>.
1주일 동안의 물밑 절충 끝에 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이범석(李範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었다.
뒤이은 장관 인사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공산당원이었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었다.
8월 15일에 개최된 정부수립기념식에는 맥아더 원수가 참석하여 환영을 받았다. 이날을 기하여 미군정부의 행정권이 한국정부로 이관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기념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될 여섯가지 조건을 성명했다.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통일독립촉진회(통촉)는 북한의 정부수립 공작과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로 동요했다.
김구는 상해와 중경에 따로 묻혀 있던 모친과 아내와 큰아들의 유해를 옮겨 와 비장한 심경으로 장례를 치렀다.
1. 各政派 안배로 擧國內閣 구성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임명 과정은 당동벌이(黨同伐異·시비곡직을 불문하고 자기편 사람은 돕고 반대편 사람은 공격하는 일)의 한국 정치풍토에서 제헌국회의 중요 정파들이 벌인 적나라한 권력투쟁이었다. 그것은 또한 대통령 이승만과 제헌국회 사이의 최초의 힘겨루기이기도 했다.
자신이 말한 ‘의외의 인물’이 누구냐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반응을 지켜보던 이승만은 7월 27일에 국회에 출석하여 극적인 방법으로 이윤영(李允榮)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金性洙에게는 國務總理보다 ‘덜 중대하지 않은 직책’ 맡기겠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중에 몇 단체와 중요 지도자들과 토의 협정하야 작정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오늘 우리 형편에 각 정당과 사회의 규례가 충분히 짜이지 못한 중에 미리 발설이 되면 매인열지(每人悅之·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하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사정에서 자연 분규 문란한 상태가 이루어질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부득이 혼자 심사각득(深思覺得)해서 오늘까지 초조히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각 방면의 지도자 측에서 나를 보좌하기 위하야 정부조직과 국무총리의 인선으로 추천한 명록이 여러 가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명록을 채용하야 전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나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이승만은 이 추천명록이나 신문보도 등의 여론으로 미루어 국무총리 적임자로 가장 인망이 있는 사람이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세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민의와 또 내정의 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 세 사람은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정부수립 이전에 정당이 먼저 생겨서 다소 분규가 있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요 또 유감으로 아는 바입니다. 일후에 정치상 풍운 변태가 다소간 정리된 후에 몇 정당이 각각 주의주장으로 대립하여서 공선을 따라서 그 정당이 득세하는 날에는 득세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고 다른 정당은 다 정부에 참여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형편이 이와 같이 할 수 없는 중에 몇몇 정당을 포함해서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정당주의로 권리를 다투게 되는 중에서 행정처리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양년 동안에 몇몇 사회 민족운동단체 경력이 소상히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정당의 선도자로 지목받는 이가 피임되면 다소간 난편(難便)한 사정이 있을 것을 염려하므로 아무쪼록 피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김성수씨로 말하면 누구나 정당을 주장하는 인도자로만 지목할 수 없을 것이고 그분의 인격과 애국성심과 공평정직한 것은 어떤 정당이나 단체 사람을 막론하고 추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줄로 나는 믿으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으로는 몇십 년 전부터 알아서 절대 믿고 애중히 여기는 터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각에 국무총리보담 덜 중대하지 않은 책임을 김성수씨에게 맡기려는 것이 나의 가장 원하는 바이므로, 이다음에 발표될 때에 보시면 알려니와 이러한 각오하에서 김성수씨는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국무총리보담 덜 중대하지 않은 책임”이란 재무장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여러차례 김성수를 이화장으로 불러 미국의 건국 초기에 재무장관으로서 독립정부 건설의 기초를 닦았던 해밀튼(Alexander Hamilton)의 보기를 들면서 재무장관을 맡을 것을 집요하게 권했으나 김성수는 거절했다.1)
申翼熙는 立法府 책임 맡아야
신익희는 입법부의 책임을 맡아서 일해야 할 것이므로 제외한다고 했다.
“신익희씨는 인격이나 민중의 신망이나 해외 풍상에 임시정부 책임으로 여러 해 분투하며 끝까지 지켜 내려온 그 역사를 보든지 정치상 기능과 수완으로 보든지 누구나 그분보다 더 낫게 생각할 국무총리 자격이 몇 분 안될 것이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으로는 수십 년 전부터 깊이 알고 친임(親任)하며 애중히 여겨 오던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 삼권분립에 국회가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이 앞에 제정할 모든 법령에 급급히 할 일이 많은 수효를 점령하고 있는 중에 상당한 지도자가 없이는 전도가 심히 망창(茫蒼·큰 일을 당하여 앞이 아득함)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부의장 책임을 계속하야 이 중임을 담임하다가 국회에서 의장을 다시 선거할 때에 국회선거를 보아서 앞길을 작정하는 것이 다대한 도움을 주겠기로 입법부의 중대한 책임으로 인연해서 김동원(金東元) 부의장과 협의 진행하는 것을 부탁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조소앙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전인 7월 26일에도 이화장을 방문하여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2)
남북협상에 실망하고 돌아온 뒤로 김구 그룹과도 결별 상태에 있던 조소앙은 정부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명해 왔다.3) 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李範奭)이 국무총리로 결정된 뒤에도 조소앙은 신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할 의사가 있었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민국의 일이라면 국무총리 아니라 소학교 교장이라도 하겠다”라고 대답했다.4) 그러나 이승만은 조소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거로 좀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소앙씨는 삼십여년 전 일본 유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그 명망과 위신이 내외에 전파되어 많은 추대를 받았는데, 그때부터 내가 친절히 알게 되어 마음으로 깊이 신뢰하며 추앙하던 터입니다. 그 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나와 거리는 멀었으나 밀접한 통신상으로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나간 터이며, 귀국한 후에도 더욱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언제든지 국사에 동주병제(同舟竝濟)할 줄 믿고 있던 터이었습니다. 불행히 근자에 와서 총선거문제 이후로 노선이 갈려서 우리 대업에 다소간 방해가 있었고 민심이 따라서 현혹하게 된 것을 우리가 다 불행히 여기는 바입니다.
다행히 근자에 이르러서는 차차 휴수동거(携手同去)할 희망이 보이므로 조만간 우리가 다시 한길로 나가기를 기약하고 있는 터이니, 우리 개인상으로는 아무 의점도 없고 정의상 손실도 없으나, 정권을 잡고 민족을 인도하는 자리에서는 민중의 아혹(訝惑·의혹)이 풀려서 다 소상히 알게 되기 전에는 얼마간 의문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차차 이 아혹이 다 풀려서 우리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장애가 없도록 만든 후에 책임을 분담케 되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되므로 조소앙씨나 그 후원하는 동포들이 나의 고충을 양해할 줄로 믿습니다.”
이승만은 이어 국무위원 조직은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승인된 뒤에 국무총리와 상의해서 하겠다고 말하고, 아무리 유자격자라도 자신의 친구와 친척은 배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국회의원 중 이윤영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합니다.”
그가 말한 “의외의 인물”이란 결국 그 자신이 김성수를 설득하여 자신의 선거구를 그에게 양보하게 한 이윤영이었다.
이북 주민 위해 曺晩植 대신 李允榮을
이승만은 이윤영을 임명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공포에 대하여 이윤영 의원이 가장 놀랄 줄 압니다. 이분을 임명하는 나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첫째는 총리 임명에 먼저는 국회의원 중으로서 택할 것을 많이 생각한 것이니, 민의를 존중하고자 하는 본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는 이북대표 한 분이 그 자리 점령하기를 특별히 관심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급급한 우리 문제 중에 제일 급한 것은 남북통일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정책을 쓰든지 이북 동포의 합심합력을 얻지 않고는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먹으나 굶으나 머리 둘 집칸이라도 있고 이만치라도 자유 활동하고 살아온 터이나 이북 동포의 참혹긍측(慘酷矜惻)한 정형은 우리가 밤이나 낮이나 잊을 수 없는 터입니다.
정부를 조직하는 자리에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부통령으로 추대해서 이북 동포의 마음이라도 위로하고자 한 것이 우리 국회 전체의 동일한 원이었으나, 조 선생의 생명이 위험할 것을 염려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투표를 짐짓 아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만식씨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으로 이윤영씨가 국무총리 책임을 맡는 것이 정치상 지혜로나 민족적 정의로나 가장 적당할 것이므로 남북통일 촉성을 위하여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을 믿습니다. 조선민주당도 당이니 우리말과 모순된다 할 것이나, 그 당은 남한에서 압도적 세력을 가졌다 볼 수 없습니다. …”
이승만은 나아가 남북한 주민들 사이의 오랜 악습인 지방열을 타파하는 일에도 이윤영의 역량이 크게 기대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내가 믿고 아는 바는 이윤영 의원이 지방열을 절대 증오하여 이 악습을 극력 반대하는 분입니다. 총선거되기 전에 이북 이재동포의 특별선거구역을 정한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인데, 유엔 결정으로 이것이 실시되지 못하였던 것이나, 그때에 이재동포들이 많이 흥분되어 여러 가지 여론이 있었으나, 이윤영 의원의 애국심으로 열렬히 설명해서 모든 문제가 다 침식되고 이북 동포의 대표문제는 다 중지하게 하여 이번 선거에 지장이 없이 대성공을 하게 한 것은 또한 우리가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 이유로 이윤영씨의 상당한 인격과 온화한 심법(心法)과 확고불변하는 기개가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 바이며, 연부역강한 몸으로 우리들 대통령 부통령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뜻과 행하기 어려운 일을 다 대행할 수 있을 줄로 믿는 바입니다.”5)
이승만이 7월 26일에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가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데에는 다른 고려도 있었다. 그것은 이윤영은 이북을 대표하므로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총회의 승인을 얻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이윤영은 부유층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자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6)
그러나 이승만이 퇴장한 뒤에 바로 무기명투표로 실시된 표결에서 이윤영 임명 승인안은 재석의원 193명 가운데 가 59표 대 부 132표(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각 정파, 특히 가장 강력한 세력인 한국민주당과의 사전협의 없이 대통령 선거 때의 180표라는 압도적인 다수표만 막연히 믿고 정면 돌파를 시도한 승부수의 패배였다.
이윤영 승인안 표결결과가 밝혀진 뒤에 윤석오(尹錫五) 비서가 “이윤영씨 총리 승인안이 망신만 당했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이승만은 “그래, 부결됐어!” 하고 덤덤히 말하고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윤영 승인안의 부결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는 것이다.7) 이승만은 국회가 이윤영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을 다시 논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국회는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을 내세워 재론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이윤영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은 7월 29일에 (1) 이번 총리 승인안은 단순한 인사 안건으로서 ‘의안’에 해당하지 않고 (2) 어떤 나라에서든지 일사부재의 원칙은 법률안에 한하며 (3) 이번 국회는 건국회의로서 정기회도 아니고 임시회도 아닐 뿐 아니라 (4) 총리 임명 승인에 관하여 대통령과 국회의 의사가 상충되는 경우에 대한 헌법규정이 불비함에 따라 이러한 경우에는 대통령의 재의 요청안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8)
이화장은 또다시 내방객들로 인성만성했다. 국회의 표결이 끝나자 달려온 사람은 이윤영이었다. 이윤영에 이어 오후 4시에는 무소속의 최범술(崔凡述), 정현모(鄭顯模) 두 의원이 다녀갔고, 4시 반에는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李靑天)이 30분가량 요담하고 갔다. 이튿날 아침 9시25분부터는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 노블(Harold Noble)이 찾아와서 한 시간 동안 요담했고, 이날 오후 6시40분에 무소속 구락부를 대표하여 이화장을 방문한 오석주(吳錫柱), 윤재욱(尹在旭), 김병회(金秉會)는 조소앙과 신익희 두 사람 가운데서 국무총리를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9)
한편 한민당계 의원들은 7월 27일 오후 3시에 당사 회의실에서, 무소속 의원들은 28일 오전 11시에 서울 호텔에서 각각 회의를 열고 기정 방침대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했다.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둘러싼 이승만과 국회의 이러한 대립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어중간하게 절충한 정부 권력구조에 대한 인식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다음과 같은 기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
“국회내 각파, 특히 한민계와 무소속계는 국가대계와 헌정확립을 위하여 대통령의 총리 승인 요구를 거부하고 있으며 대통령이 끝까지 국회내 세력을 무시하고 나간다면 절대 다수당이 존재치 않는 금번 국회에서는 입헌정치의 상식에 비추어 당연히 각파 세력을 기간으로 한 연립정부가 조직될 것이므로 국회내 각파는 타협하여 연립할 기운이 농후하며, 이미 무소속과 한민계에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연일 회의를 거듭하고 있어서 총리 재임명을 명일에 두고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10)
“현재 있는 政黨이 政權 잡는 것 民族 다대수가 원치 않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이승만은 7월 28일 오전에 국회 정파들을 질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국무총리 임명을 국회에서 부인한 후에는 내가 물론 다른 인물을 임명하고 또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 순서적일 것이나, 이 임명안을 제출한 후 당석에서 부결된 사실을 보면 그 속에 무슨 응결이 있어서 두 당이 각각 내응적으로 자기 당 사람이 아니면 투표 부결에 부치자고 약속이 있는 것이니, 만일 이런 사실이 있다면 내가 국무총리를 몇 번 고쳐서 임명하더라도 자기들의 내정된 사람이 아니고는 다 부결하고 말 것이니, 그 내용을 좀더 알기 전에는 다시 임명하기를 원치 않으며, 또 따라서 내가 이윤영씨를 임명한 이유를 몇 가지 설명한 것이 있으니, 그 이유가 부적당한 점이 있다든지 또 그렇지 않으면 이윤영씨를 임명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이유가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면 내가 알고자 한 것이나, 토론 한 번도 없이 부결한다는 것이 내게는 각오가 덜되는 것이다.”
이승만이 말한 두 정당이란 한민당과 한독당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무소속 의원들의 상당수가 한독당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1) 이승만은 이어 국민 대다수가 현재 있는 정당이 정권을 잡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전민족의 다대수가 지금 현재 있는 정당으로 정권을 잡게 되는 것은 원치 않는 바인데, 그중 한 정당의 유력한 분으로 정권을 잡게 하면 서울 정치계 측에서는 환영할는지 모르지만 다대수 동포에게는 낙망될 것이다. 독립촉성국민회 간부를 내가 몇 번 개조하여 보았는데, 처음에는 모든 정당이 다 민족운동에 협의 진행하기를 목적하고 두 정당의 간부 인물로 국민회 책임을 맡게 하였더니, 그후 결과로는 각각 자기 정당을 중요시하므로 민족운동을 하여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 국권 건설의 초대 정부에 이것을 또 만들어 놓고 이 앞길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적어도 국무총리 책임을 두 정당 중에 유력한 인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이 민중의 바라는 바요 또한 나의 뜻하는 것이므로 천사만려(千思萬慮)한 결과 이와 같이 한 것인데, 국회에서 무슨 이유로든지 이분을 원치 않는다면 내가 고집하려는 것은 아니나, 국회안에서 어떤 인물을 지정해 가지고 그분만을 쓰기로 활동하는 인사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는 터이니, 이것이 민족의 원하는 것인가 내가 주장하는 것이 민족의 원하는 것인가를 알아서 그대로 따르기를 나는 결심한다.”12)
이 담화가 발표되자 기자들은 서면질의서를 제출했는데, “이윤영을 재임명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이승만은 “내가 이에 대해서는 국회의 권위를 존중하여 누구든지 다시 임명하고자 하나, 정당이 결속이 있다면 재삼 임명하는 것이 무효할 것이므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아서 할 것이다”라고 무르춤했다.13)
李範奭을 비장의 카드로 숨겨 놓아
이승만은 이윤영의 국무총리 승인안이 국회에서 부결될 경우를 예상하여 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李範奭)을 내정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위에서 본 올리버에게 보낸 7월 26일자 편지에서 이승만은 유력한 총리 물망자로 김성수, 조소앙, 신익희 세 사람과 함께 이범석도 거명했다.14) 이승만은 7월 23일에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을 초치하여 장시간 논의했는데,15) 이튿날 《국제신문(國際新聞)》이 호외로 이범석이 국무총리에 내정되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이승만과 이시영은 이윤영 승인안이 부결되는 경우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문제를 논의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16)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추천한 사람은 한민당계이면서도 이승만의 신뢰가 두터운 이인(李仁)과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 그리고 민정장관 대리로서 민족청년단을 공식으로 지원해 온 헬믹(Charles G. Helmick) 등이었다.17) 다른 많은 청년단체들과는 달리 1946년 10월 9일에 미군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민족청년단은 1947년부터 정부수립 때까지 미군정부의 예산항목에 포함되어, 1947년에는 2,064만8,000원의 예산이 할당되었다.18)
이시영과 협의하여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확정한 이승만은 국회 정파들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7월 29일 오전에 먼저 독촉국민회의 고희동(高羲東)과 배은희(裵恩希)를 부른 데 이어 낮 12시50분에는 한민당의 김성수를 불러 협조를 당부했다. 그리고 1시 반에는 이청천을 초청하여 요담했다.19) 광복군총사령으로서 참모장 이범석을 지휘하는 관계에 있었던 이청천은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에 반대했다.
이범석의 내정사실이 알려지자 한민당계 의원들과 무소속 그룹은 7월 29일에 각각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조소앙을 강력히 추천해 온 무소속 그룹은 이범석 임명에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6시쯤에 윤재욱과 윤석구(尹錫龜)가 대표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한민당 쪽에서는 윤치영(尹致暎), 허정(許政) 등 이승만 직계들과 김준연(金俊淵) 등 호남파 사이에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20)
이처럼 어런더런한 상황 속에서 7월 30일 오전에 이범석이 계동 집으로 김성수를 방문하여 장시간 요담했다.21) 이범석의 협조 요청을 받은 김성수는 12부 4처 가운데에서 적어도 6석을 한민당에 배정해 주지 않으면 당 간부들을 설득할 수 없고, 또 자기로서도 대한민국 성립과정에서 한민당이 치른 역할이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비중으로 보아 그것은 최소한의 요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범석은 자기도 동감이라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22)
같은 날 국회에서는 한민당의 노일환(盧鎰煥) 의원과 같은 한민당이면서 이승만 직계인 윤치영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날 이승만은 국회에 나가서 당파를 떠나 새로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는데, 노일환이 등단하여 7월 28일의 이승만 담화를 문제 삼아 그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천황(天皇)과 같은 태도라면서 이승만이 먼저 그 담화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윤치영은 노일환을 반역자라면서 징계에 회부할 것을 동의했고, 그러자 의원석과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는 등 어수선했다.23)
국무총리 임명문제로 조각작업이 늦어지자 정국경색을 우려하는 의원들이 늘어났다. 한민당은 김성수의 설득으로 이승만이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하자는 의견이 많아져서 표결에서는 자유의사에 일임하기로 했다. 무소속 의원들 가운데에도 이번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해야 한다는 의원들이 늘어나 7월 31일에는 윤치영, 정준(鄭濬) 등의 주도로 70여명의 의원들이 의사당에서 따로 모였다.24)
마침내 이승만은 7월 31일에 기자들을 만나, “국무총리 문제로 국회에 두 부분이 있어서 자기 부분의 인물을 고집하는 폐단이 약간 있었으나, 지금은 이것도 다 풀려서 공정한 사조(思潮)로 해결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고, “여론상 이범석씨의 명망이 가장 높으므로 나는 민의를 따라 작정할 것이다” 하고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을 시사했다.25)
110표 대 84표로 李範奭 국무총리 승인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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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범석(李範奭). |
10시30분에 국회에 임석한 이승만은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요망하는 연설을 했다. 그것은 원고가 없는 즉석연설이었다. 어떻게든 국회의원들을 구슬려야 했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이 문제를 지체한 관계로 오늘은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들도 나도 또한 우리 민족 전체가 모두 여기에 대하여 대단히 초조히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어떠한 정당이나 어떠한 단체가 많은 권리를 가졌다든지 하지 말고 우리 전국민이 많은 권리를 가져야 하겠다는 여러분의 생각과 이 사람의 생각이 유일한 생각일 것입니다. … 8월 15일 안에 여기 군정장관과 사령장관들은 다 준비를 해 가지고 하루빨리 주권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국무총리 승인이) 하루빨리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또 우리 듣는 바에는 남북협의를 하는 분들이 벌써 남한대표를 뽑아 가지고 그쪽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끼리 돌아앉아서 서로 토의만 하고 나가면 안 될 것입니다. … 국무총리로 누구를 지정을 할 테니 큰 문제가 아니걸랑 동의시키고 … 이번 부결되면 그 영향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 지금은 누가 개인이나 무슨 당의 관계를 초월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때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여기에 세워 놓아야 하겠다는 그 작정을 가지고서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또 이런말 저런말 써 가지고 한다면 영향이 대단히 좋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
며칠 동안에 밖에서 유언하는 말에 이범석씨가 물망이 높고 해서 내가 이범석씨를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여러분에게 드려 놓으니, 국회에서는 길게 토의를 마시고 작정해서 통과해 주시기 바랍니다.”26)
그것은 1주일 전에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했던 자신의 권위와 통찰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듯한 당당한 연설과는 사뭇 달랐다.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오후에 표결하자고 주장하는 의원도 있었으나, 즉결하기로 결의하고 무기명투표에 들어갔다. 개표결과는 재석의원 187명 가운데 가 110표 대 부 84표(무효 2표)로 승인이 가결되었다.27)
“나의 忠誠, 나의 精力, 나의 生命을 國家民族을 위하여…”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설화적인 대첩을 이끌었던 이범석은 이제 마흔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취임 첫 소감도 무인 정치가다웠다. 임명경위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31일에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승인하였다. 국내정세를 잘 알기 때문에 쾌락한 것이며, 만일 접수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심경에 어그러질뿐더러 현 국내외 정세의 긴박한 요청에 배치되는 것이다.
나는 본래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가 민족의 현실을 떠나서 개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는 피동적이었지만 금후로는 주동적 입장에서 오직 나의 충성, 나의 정력, 나의 시간, 나의 생명을 이 국가 민족을 위하여 다만 하루라도 바치고자 한다.”
남북통일을 위한 시정방침을 묻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국무총리에 임명되리라고는 예상조차 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침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민족이고 이 강토가 양단되면 완전한 국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됨을 잘 알기 때문에 국가 민족을 위하여 적극 추진할 생각이다. 신생 정부의 제일 중대한 과업은 강토완정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적극 추진 준비함에 있다.”
조각에 대한 구상을 묻자 이범석은 “헌법상 조각은 대통령에게 중점이 있다”고 말하고, 또 지난 30일에 김성수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는 질문에는 “사적인 회담이었으며 내용은 없다” 하고 잘라 말했다.28)
國防部長官은 國務總理가 겸임하기로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의 승인이 끝나자 이승만은 그날 저녁으로 이범석과 함께 조각작업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이날 저녁 9시40분에는 재무, 법무, 농림, 교통 4부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재무부 장관 김도연(金度演)
○ 법무부 장관 이 인(李 仁)
○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 교통부 장관 민희식(閔熙植)
한민당의 중앙위원인 김도연은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무역협회장, 민주의원 의원, 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한 경제전문가였다.
이인은 국내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 사건을 도맡다시피 하여 변호했고 조선어학회 간부로서 투옥되었던 변호사였다. 미군정부의 대검찰청장을 지낸 한민당계이면서도, 이승만의 신뢰가 두터웠다.
초대 내각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조봉암의 농림부 장관 임명이었다. 이승만은 8월 4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각 구성은 정치적 안배였다고 말하면서, “한국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농민들을 휘어잡기 위해서”라고 썼다.29)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기로 내정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범석에게 의견을 묻자 이범석은 “조봉암이 아니라 김일성인들 무슨 상관입니까? 대권은 이 박사께서 쥐고 계신데” 하고 적극 찬동했다고 한다.30)
민희식이 교통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미군정부 관료 케이스로 배려된 것이었다. 미국에 유학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일하기도 한 민희식은 미군정부의 교통부장이었다.
이튿날 오후에 내무부, 사회부, 문교부 세 부의 장관이 임명되었다.
○ 내무부 장관 윤치영(尹致暎)
○ 사회부 장관 전진한(錢鎭漢)
○ 문교부 장관 안호상(安浩相)
이승만의 재미시절부터 그를 도왔고 귀국한 뒤에는 민주의원 비서국장 등으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 온 윤치영은, 미군정부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과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 두 사람의 알력관계로 어느 한 사람을 내무부장으로 임명했다가는 경찰행정에 큰 혼란이 예상되어 내무부를 맡게 되었다.31) 같은 한민당의 노일환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치영은 8월 2일에 한민당을 탈당했다.32)
이승만은 조병옥을 외무부 장관으로 내정했다가 대통령 특사로 정부승인 외교를 벌이게 하고, 장택상을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대한노총 위원장으로서 헌법에 근로자이익균점권 규정(제18조 2항)을 설치하는 데 앞장섰던 전진한은 노동문제를 관장하는 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전진한은 사회부 장관에 임명된 뒤에도 대한노총 위원장을 겸임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승만은 처음에 문교부 장관으로 장면(張勉)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추천명록에 안호상의 추천이 많고, 또 앞으로 큰 임무를 담당해야 할 주미대사 적임자를 찾지 못하여 안호상에게 문교부를 맡기고 장면을 특사로 보내어 일하는 것을 보아 주미대사로 임명하기로 한 것이었다.33) 서울대학교 교수인 안호상은 민족청년단의 이데올로그였다.
8월 4일에는 나머지 외무부, 상공부, 국방부, 체신부의 장관과 국무총리 직속인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기획처 4개처의 일부 처장인사가 있었다.
○ 외무부 장관 장택상(張澤相)
○ 상공부 장관 임영신(任永信)
○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겸임
○ 체신부 장관 윤석구(尹錫龜)
○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
조각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 있던 임영신은 이화장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자기가 귀국할 때까지 최종결정을 보류해 달라고 이승만에게 졸랐다. 8월 3일에 급히 귀국하여 공항에서 이화장으로 직행한 임영신은 조각당 마루에 허정(許政)을 상공부 장관으로 발표하려고 붓으로 써서 펼쳐 놓은 것을 보자 발로 짚으며 “우양(友洋)이 상공을 뭘 아느냐”고 했다. 그러자 이범석이 임영신에게 “그러면 당신이 상공장관 하겠소?” 하고 물었다. 그리하여 발표 직전에 상공부 장관이 임영신으로 바뀌었다.34)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윤석구가 체신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무소속구락부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이승만은 윤석구가 “말썽을 많이 부리는 귀찮은 사람”이라면서도 “실력은 있다”면서 그다지 미워하지는 않았다.35)
8월 4일에 열린 국회 제39차 본회의는 이승만의 후임으로 신익희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신익희의 의장 피선으로 결원이 된 또 한 사람의 부의장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김약수(金若水)가 한민당의 김준연을 누르고 당선되었다.36)
그리고 이튿날에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는 이승만이 임명한 김병로(金炳魯)의 대법원장 인준안을 가결했다.37)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뼈대가 갖추어졌다.

李始榮은 첫 國務會議에 참석하지 않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은 위에서 보듯이 전시의 위기 정부(crisis government)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 정파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격심한 길항을 보이고 있는 정치상황에서 그러한 거국내각으로는 이승만이 말한 “좋은 시계 속처럼 돌아가는” 정부의 기능을 하기는 어려웠다. 우선 부통령 이시영부터 조각작업에 불만을 느끼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8월 4일에 서울을 떠나 수원의 친지 집으로 가 버렸다. 그는 이튿날 열린 첫 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8월 4일 오후에 동부인하여 혜화동의 이시영 집을 방문했으나, 이시영은 이미 서울을 떠난 뒤였다.38) 이러한 해프닝도 결국은 미국식 정부운영 제도와 내각책임제 정부운영 방식에 대한 인식과 정치풍토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시영은 8월 10일의 제5차 국무회의부터 참석했다.39)
첫 국무회의가 열리던 날 아침에 이승만은 허정에게 연락하여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허정에게 총무처장을 맡아 보라고 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점잖은 허정이었으나 이승만의 이 제의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저는 국정에 참여하여 정정당당하게 저의 포부를 펴 보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운동도 했고 해방 후 정치활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국무회의에서 표결권도 없는 처장은 저의 포부를 실현할 자리는 아닙니다.”
허정은 이렇게 말하고 바로 회의장을 나갔다.
그날 저녁에 재무부 장관 김도연이 허정을 찾아갔다.
“우양, 오늘 한 말은 과했던 것 같소. 이 대통령이 몹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소. 몇 번이고 우양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40)
허정과 함께 이날 기획처장에 임명된 군정부 중앙물가행정처장 이교선(李敎善)도 이튿날 사의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8월 7일에 총무처장에는 조민당 정치부장 김병연(金炳淵), 기획처장에는 연희대학 상학부장 이순탁(李順鐸)이 임명되었다.41)
그런데 허정은 그런 지 한 달 조금 지나서 입각하게 되었다. 9월 14일에 경부선 내판(內坂)역에서 특급열차 ‘해방자호’끼리 충돌하여 미군 24명과 한국인 1명이 즉사하고 10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큰 열차사고가 발생하여 교통부 장관 민희식이 인책 사임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었다.42)
韓民黨은 是是非非주의로 임하겠다고 천명
첫 내각구성에 대한 정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가장 분개한 것은 다름 아닌 한민당이었다. 김성수의 국무총리직은 단념하더라도 이승만과의 공동정부를 기대했던 한민당은 8월 6일에 상무위원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가 거족적으로 대망하던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된 것은 경하할 바이다. 물론 정부구성의 방법 기타에 대하여서는 논의할 점이 불무할뿐더러 사회의 물의도 높을 듯하나, 우리는 차제에 오직 우리의 중앙정부가 하루바삐 국제적 승인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정중하게 전제한 담화는, 그러나 앞으로는 시시비비주의로 임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본당으로서 이번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재무장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관련은 극히 희박하다. 본당은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정부로 하여금 하루빨리 남북을 통일하고 화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하여 진정한 민족주의적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책선(責善)적 편달과 감시를 게을리 아니할 것을 이에 언명하는 바이다.”43)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8월 4일자 편지에서 김성수는 장관 자리 7석을 그의 추종자들에게 할애할 것을 요구했다고 썼다.44)
한편 조민당을 중심으로 한 이북애국단체연맹은 8월 6일에 조민당 회의실에서 전체회의를 개최했는데, 회의에서는 이승만이 이북인에 대한 약속을 위반한 것은 물론이고 “비서진을 강화한 데 불과한” 약체내각이라고 격렬한 성토가 쏟아졌다. 회의는 ‘도각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문제까지 검토했으나, 그것은 유엔 총회의 승인을 고려하여 자제하기로 하고 내각개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45)
내각비판 가운데서도 특히 임영신의 상공부 장관으로서의 능력을 의구하는 평언이 많았다.46) 대한상공회의소도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현하의 최대의 급무이며 자주독립의 기초사업인 산업재건을 담임하는 각 행정부처의 책임자 중에 그 수완이 미지수인 인물이 등장한 데 대하여 일말의 불안이 없는 바 아니나, 우리는 상공회의소의 본령에 비추어 모든 비판은 구체적 정책과 실적을 볼 때까지 보류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47)
이승만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하여 8월 5일에 김성수, 이청천, 이윤영 세 사람을 무임소 국무위원으로 내정하고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끝내 고사하고, 다른 두 사람도 8월 12일에 가서야 취임했다.48)
建國基礎의 여섯가지 요소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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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내한한 맥아더를 맞이하는 이승만(李承晩). |
단상에는 이승만 내외와 맥아더 내외를 비롯하여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3부 수장과 유엔임시한국위원단, 하지 장군을 비롯한 남한 주둔 미군수뇌, 로마교황청 사절을 비롯한 각국 민간사절들이 자리를 잡았다.
기념식은 오전 11시30분에 개회되었다. 회장 오세창(吳世昌)의 개회사를 명제세(明濟世)가 대독한 다음, 이승만의 기념사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긴 옷고름 대신에 단추를 단 회색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 특유의 방식으로 개량한 한복이었다.
이승만은 30분에 걸쳐서 연설을 했는데, 그것은 국가건설의 기본이념을 명수사를 구사하여 이론적으로 피력한 것이어서 꼼꼼히 톺아볼 가치가 있다. 그는 먼저 이날을 맞는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국민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는 것입니다.
이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사십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하여 온 사실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한 시간입니다. 내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내 동포의 자치 자주하는 정부 밑에서 자유공기를 호흡하며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대통령의 존귀한 지위보다 대한민국의 한 공복인 직책을 다하기에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터입니다. …”
그는 이어 맥아더 장군 내외가 기념식에 참석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나서,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기에는 아직도 험하고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사천여년을 자치 자주해 온 역사는 막론하고 세인들이 남의 선전만 믿어 우리의 독립 자치할 능력에 대하여 의문하던 것을 금년 5월 10일에 전민족의 민주적 자결주의에 의한 전국 총선거로 우리가 다 청소시켰으며, 모든 방해와 지장을 일시 악감이나 낙심 애걸하는 상태를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인내와 정당한 행동으로 극복하여 온 것이니, 우리는 이 태도로 연일 행진함으로써 앞의 많은 지장을 또 일일이 이겨 나갈 것입니다. 조금도 우려하거나 퇴축할 것도 없고 어제를 통분히 여기거나 오늘을 기뻐하지만 말고 내일을 위하여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
이승만은 그러면서 “건국 기초의 요소될 만한 몇 조건”을 말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들었다.
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을 이기는 이치를 믿어야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을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애로 인하여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방침을 무효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요 우리 친우들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추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삼십년 전부터 결정하고 실행하여 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이렇듯 이승만은 건국이념의 첫째 조건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그 이념과 제도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이래로 실천해 왔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개인의 자유였다.
“(2)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하여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아서 다만 말과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력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자래로 저희 나라의 전제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습관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삼십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이승만은 이처럼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결과로 공화주의가 결실 단계에 있다고 강조하고 나서, 세 번째로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自由의 뜻을 바로 알고 政府가 자기 정부임을 믿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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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李承晩). |
이러한 주장은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승만은 이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의 중요성을 링컨의 유명한 민주주의의 정의를 인용하여 강조했다.
“(4)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에서는 공고하며 밖에서는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들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하는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시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반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이 받아들여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하거나 (정부를)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나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다섯째로 정부가 가장 역점사업으로 추진할 것은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향상과 평등권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 당위성을 태극기에 그려진 태극의 이치를 들어 설명했다.
노동자농민의 생활향상과 平等權 보장
“(5) 정부에서 가장 전력(專力)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의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런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통상과 공업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를 따라 발전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생활정도를 상당히 향상시키려면 모든 공업의 발전을 꾀하며 우리 농장과 공장의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없는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서로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悖·두가지 일을 한꺼번에 치러도 사리에 틀리거나 어그러짐이 없음)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들을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경영자들을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전쟁을 피하여 전민족의 화동을 도모하나니, 우리의 화동과 단체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상고적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의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를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마지막 조건으로 대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인 비판 여론과는 달리 미군정부의 한국인 관리들의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6)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외국의 경제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 세계 대세가 변하여 각 나라 간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 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의 화복안위(禍福安危)를 같이 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 되므로 어떤 작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들에 동일히 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그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기왕에 밝히 표시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며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줄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욕망이 없고 오직 세계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관심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미군정은 끝나며 대한정부는 시작되는 이 날에 모든 미국인과 모든 한인 사이에 친선을 한층 더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첫째로 미국이 일본의 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있던 적군을 밀어내었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기를 돕는 것이니, 우리 토지의 일척일촌(一尺一寸)이나 우리 재정의 분전(分錢)이라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과연 정의와 인도의 주의로 그 나라의 토대를 삼고 이것을 세계에 실천하는 증거가 이에 또 다시 표명되는 것입니다.
겸하여 과도기에 미국 장관(將官)들을 도와서 계속 노력한 모든 동포들의 업적은 우리가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직원이 일을 계속 진행하기 바라며 부득이 개체(改遞)할 경우가 있더라도 국사의 순조 진행을 위하여 끝까지 기능과 성심을 다하여 애국심의 책심(責心)을 다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
蘇聯과의 國交 수립 문제 다시 거론
이승만은 이어 미군 점령기간 내내 견원지간이었던 하지 장군을 “용감한 군인일 뿐 아니라 우리 한일들의 참된 친우”라고 추어올리고, 북한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 전국이 기뻐하는 이날에 우리가 북편을 돌아보고 비감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거의 일천만 우리 동포가 우리와 민국 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처를 요구할 것이요 다음에는 세계 대중의 양심에 호소하리니,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약한 이웃의 강토를 무단히 점령케 하기를 허락케 한다면 나중에는 세계의 평화를 유지할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만 소련이 우리에 접근한 이웃이므로 우리는 그 나라로 더불어 평화와 친선을 유지하려는 터입니다. 그 나라의 자유로 사는 것을 우리가 원하느니만치 우리가 자유로 사는 것을 그 나라도 또한 원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이 원하는 바를 그 나라도 원한다면 우리 민국은 세계 모든 자유국과 친선히 지내는 것과 같이 소련과도 친선한 우의를 다시 교환키에 노력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취임사에 이어 또 다시 소련과의 국교수립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긴 연설을 마무리했다.
“결론으로, 오늘에 지나간 역사는 마치고 새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모든 정부 중에 우리 새 정부가 다시 나서게 되므로, 우리는 남에게 배울 것도 많고 도움을 받을 것도 많습니다. 모든 자유우방들의 후의와 도움이 아니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우방들이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앞으로 계속할 것을 우리는 길이 믿는 바이며, 동시에 가장 중대한 바는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심과 굳센 결심입니다.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애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49)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이날의 연설문 초고를 기초해 줄 것을 부탁하여 써 보내 왔으나 그대로 읽지는 않았다고 하는데,50) 이날의 연설문에 올리버의 초안이 얼마나 채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맥아더는 1882년의 朝美條約 약속 지킨다고
이승만의 기념사에 이어 연합합창단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가’ 합창이 있었고, 이어 맥아더의 축사가 있었다. 맥아더는 거물 정치가답게 격조있는 웅변으로 한국인의 자긍심을 한껏 고취시키고 나서, 1882년의 조미우호통상조약을 거론하면서 한미 유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민주적 생활의 방어는 무엇보다도 개인 정신에 달렸습니다. 개인 자유의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이것을 지킬 결심과 용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미국 국민은 귀국민과 다년간 각별한 우호적 관계를 가졌습니다. 일찍이 1882년에 양국 국민 간에는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간에 영원한 평화와 우의를 선포하였습니다. 미국 국민은 이 서약에서 이탈한 적이 없으니만큼 여러분은 그 불가분 불가리(不可分不可離)의 우호관계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 각하가 신생 민주국가를 영도하는 데 각하를 보좌할 우수한 각원 여러분은 정치적 경험에서 지금까지 찾아보지 못한 가장 복잡한 문제에 당면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느냐가 귀국 국민의 통일과 복리를 대부분 측정할 뿐만 아니라 역시 아시아 대륙의 장래 안정을 결정할 것입니다. …”51)
뒤이은 축사를 통하여 하지 장군은 재조선 미군정부는 오늘 밤 자정으로 폐지되고, 한국 주둔 미군사령부 민사처가 생긴다고 발표했다.52)
맥아더 내외는 이날 오후 늦게 도쿄로 돌아갔는데, 이승만은 그에게 구왕실 소장의 질동(質銅) 향로 한 벌과 윤비(尹妃)가 사용하던 청옥 화병을 선물로 증정했다. 그리고 이범석은 은제 신선로 한 벌을 선사했다. 질동제 향로는 일찍이 고종(高宗) 황제가 맥아더 원수의 부친에게 보낸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맥아더는 부친의 유품인 그 향로를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태평양전쟁 때에 필리핀의 코레히도르(Corregidor) 작전에서 분실하고는 늘 아까워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이승만이 이번 기회에 같은 것을 구하여 선사한 것이었다.53)
2. "유엔總會에 大韓民國臨時政府 승인 요청할 터"
7월 21일에 결성된 통일독립촉진회(통촉)는 민족자주연맹의 김붕준(金朋濬)과 한국독립당의 엄항섭(嚴恒燮)을 비롯한 6명을 중앙집행위원과 감찰위원을 선정할 전형위원으로 선출했는데, 이들은 7월 23일에 제1차 회의를 개최한 데 이어 26일에는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회의를 열고 중앙집행위원 83명과 중앙감찰위원 20명을 확정했다. 중앙집행위원에는 김붕준, 엄항섭, 유석현(劉錫鉉), 여운홍(呂運弘), 김학규(金學奎), 배성룡(裵成龍), 조헌식(趙憲植), 이두산(李斗山), 조시원(趙時元), 설의식(薛義植), 홍기문(洪起文) 등이 포함되었다.54)
金奎植을 파리 유엔總會에 파견하기로
8월 1일 오후에 민족자주연맹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1차 통촉중앙집행위원회는 당면문제를 토의하고 9월에 열릴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할 대표로 김규식을 수석대표로 한 14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정치회의 소집 문제는 김구, 김규식 두 사람과 상무위원회에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는 또 김붕준, 엄항섭, 배성룡, 유석현, 김학규, 여운홍, 설의식, 송남헌(宋南憲) 등 13명을 상무위원으로 선출했다.55) 이어 8월 5일 오후에는 경교장에서 김규식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상무위원회를 열고 집행부 책임자를 다음과 같이 선임했다.
○ 사무국장 김붕준
○ 조직국장 배성룡
○ 선전국장 엄항섭
○ 재정국장 김학규56)
이렇게 하여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의 협동체제가 일단 갖추어졌다. 그러나 두 김의 행보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8월 4일에 소요산에 나들이 갔던 김구는 부산에서 거행되는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소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이튿날 아침에 김학규 등과 함께 부산에 가느라고 경교장에서 열린 제1차 통촉상무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57)
한편 민족자주연맹은 8월 4일에 김규식의 집에서 제20차 상무위원회를 열고 연맹의 정치노선에 위반하여 비밀히 진행 중인 북한 정권수립 공작에 참가한 연맹 간부 및 맹원을 조사하여 23일에 개최되는 상무위원회에서 조처하기로 결의했다.58)
김구는 부산행 열차 안에서 기자들을 만나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나누었다.
문 조각에 대한 소감은?
답 아무런 감상도 없다. 나는 그런 것을 필요로 느끼지 않는 만큼 누가 무엇이 되든지 간에 상관할 것도 없고 또 이렇다는 소감도 있을 수 없다.
문 파리 회의에 김규식 박사가 파견된다는데?
답 파리 회의는 남북에 주둔한 미소 양군 장터와 같다고 생각한다. 즉 북한이 잘되었다거니 남한이 잘되었다거니 서로 시비할 터인데, 나의 주장으로는 남북 간의 시비알력을 버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것이다. 또한 남이나 북이나 간에 남이 만든 정부의 대표들뿐이므로 순수 민간 의사를 듣겠다면 이에 응하는 것도 한 사명일 줄로 안다.
문 동대표단의 구성은 어떠한가?
답 김 박사를 단장으로 엄항섭씨 등이 수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대표단의 선발대로 서영해(徐嶺海)씨가 지난 6월 15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이미 파리에 도착해 있다. 서씨는 오래 전부터 파리에 있으면서 전 대스크프 대사의 후의로 임시정부 파리대사로 있었던 분이다.59)
임시정부의 주파리위원부 책임자였던 서영해의 해방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남북한에 수립된 두 분단정부 대신에 자신이 이끌었던, 그러나 이제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주장은 이때까지도 김구가, 이승만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유엔의 권능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김구는 이어 8월 8일에는 김규식의 파리 유엔총회 파견문제에 대하여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 김규식씨의 도불 계획은?
답 총회일자에 대어서 출발할 것이지만 아직 미정이다.
문 여권이 허가되지 않으면 어찌될 것인가?
답 거부하면 못 가는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의사를 발표치 못하게 하는 책임은 못 가게 하는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문 유엔총회에서 발언권이 인정되지 않을 적에는?
답 임기응변으로 투쟁할 계획이 서 있다.
문 남북통일에 대한 최근 동향 여하?
답 북조선 쪽의 반성을 촉구하여 남북 각기 단정추진파를 제외하고 통촉을 강화하여 적극적으로 남북통일에 힘쓰겠다. 그리고 우리 당원으로서 신생 정부에 참가한다면 당으로서 단호한 조치를 하겠다.
문 홍명희(洪命憙)씨는 어찌 되었는가?
답 재삼 보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는데, 아직 답이 없다.60)
金奎植은 民間代表 참가 어렵다며 파리行 거부
그러나 일찍이 파리강화회의 때의 쓴 경험이 있는 현실주의자 김규식은 파리행을 거부했다. 그는 8월 10일에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했다.
문 유엔총회에 독촉대표로 참석한다는데 언제쯤 출발할 것인가?
답 이 문제는 통촉 결성대회에서 결의되었지만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나는 남조선의 민간대표가 가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역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수반대표로 선임하였으나, 그 후 제1차 상무위원회 석상에서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문 그러나 김구씨는 부산에서나 인천에서 귀하가 파견된다고 언명하였는데?
답 그것은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한 것만 알고 그 후 내가 불접수한다고 말한 것을 몰랐던 까닭일 것이다. …61)
이튿날 민족자주연맹은 파리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남쪽이나 북쪽이나 관변이나 민중이나 어디나 대표를 한두 사람씩 요청하여 가지고라도 각 방면 견해를 들어 참조하여 가면서 최후결정을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라는 두리뭉실한 담화로 김규식의 말을 부연했다.62)
김규식의 이러한 태도표명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8월 12일에 유엔총회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겠다고 한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앞으로 유엔총회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 제시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는 사전에 말할 수 없다. 나의 대체 의견은 유엔조선위원단에 제출한 나의 의견서 내용에 제시된 바와 같다.”
그리고 김규식이 유엔총회 대표를 사퇴한 것에 대한 견해를 묻자 “김 박사가 견결(堅缺)히 사퇴하면 통촉상임위원회를 소집하여 토의 결정하게 될 것이다”라면서 대표 파견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63)
趙炳玉에게 에티켓에 관한 책 사보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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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20일에 모친, 아내, 큰아들의 유해를 묻으러 정릉묘지로 걸어가는 김구(金九). |
이승만이 파리 유엔총회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가는 프란체스카가 9월 1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병옥에게 에티켓에 관한 책을 한 권 사 보게 하라고 쓴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외교관들이 지켜야 할 일들이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낭패할 것입니다. … 그들은 아직 포크와 나이프를 제대로 쓰는 법을 배운 일이 없습니다. 옷을 올바로 입는 법도 문제지요. 그들 대부분이 익숙하지 못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거든요”라고 썼다.66)
북한 정권수립을 위한 지하선거로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민족자주연맹은 8월 11일 오후 1시부터 4시간 동안 김규식의 집에서 임시상무위원회를 열고 연맹 산하의 정당 및 사회단체 소속 간부로서 북한 정권수립에 가담한 사람에 대하여 정권처분하기로 결의했다.67) 그리하여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한 홍명희, 이극로(李克魯), 손두환(孫斗煥), 최익한(崔益翰), 장권(張權), 이용(李鏞), 김충규(金忠圭), 김일청(金一淸), 나승규(羅承奎), 강순(姜舜) 등을 정권처분하여 물의를 빚었다.68)
이러한 두 김의 움직임에 대하여 좌익정파들은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근로인민당은 8월 17일에 두 김에 대하여 “그들은 그들의 반동적 본질을 다시 재생산하고 있다”고 말하고, “허다한 그들의 맹우들이 흔연히 참가하고 있는 결정적 사업에서 … 교묘히 이탈하여 반동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고 조선 인민의 의사와 자기들의 양심에 반항하려고 드는 그들은 실질상 외력과 국제반동의 강압에 굴복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69)
북한 정권수립을 위한 중도계 정파들의 귀추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 속에서 민족자주연맹과 한독당을 비롯한 25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은 8월 24일에 민족자주연맹 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앞으로의 정치행동을 토의한 다음, (1) 소위 제2차 남북정치지도자연석회의의 비법을 규탄하며, (2) 그 회합에 우리의 대표를 파견한 사실이 없고, (3) 4월 30일의 평양 공동코뮈니케에 위배되는 그 밖의 일체 행동과 북한에서 발전되는 사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동성명서를 연서로 발표했다. 김구와 김규식도 각각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을 대표하여 성명서에 서명했는데, 한독당을 제외한 민족자주연맹 산하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참가하고 있는 만큼 이 반대성명은 참가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의 개인적 의사표명이라는 등 혼란을 빚었다.70)
어머니와 아내와 큰아들의 遺骸 돌아와
배신감과 울분으로 착잡한 감회를 느끼고 있는 김구로 하여금 멍에의 70평생을 낡은 기록영화처럼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 생겼다. 중국 대륙에 묻고 온 모친과 아내와 큰아들의 유해가 돌아온 것이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뒤에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격화되어 만주 지방이 중공군 수중에 떨어지자 둘째 아들 김신(金信)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의 장로였던 이동녕(李東寧)과 중경시대의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었던 차이석(車利錫)의 유해와 함께 모친 곽낙원(郭樂園), 아내 최준례(崔遵禮), 큰아들 김인(金仁)의 유해를 옮겨 오게 했다. 이동녕은 기강에, 곽낙원과 김인, 차이석 세 사람은 중경에, 최준례는 상해에 묻혀 있었다.
김구는 8월 8일에 비가 내리는 인천 부두에 나가 이들의 유해를 맞았다. 곽낙원과 최준례와 김인의 유해는 경교장에 안치되었다가 8월 20일에 서울중학교 운동장에서 기독교 연합장으로 장의식이 거행되었다. 장의식은 이시영, 오세창, 김창숙(金昌淑), 김성수, 조소앙, 조완구, 명제세, 피치 박사 등의 내빈과 많은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부터 함태영(咸台永) 목사의 사회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71) 세 사람의 유해는 정릉에 안장되었다가 1999년에 최준례의 유해는 김구의 묘에 합장되고, 곽낙원과 김인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이동녕과 차이석의 유해는 9월 22일에 휘문중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의를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72)⊙
1) 《仁村金性洙傳》, 仁村紀念會, 1976, p.553 ; 尹錫五, <景武臺四季 組閣秘話③>,《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中央日報·東洋放送, 1977, pp.93~94. 2) 《朝鮮日報》1948년 7월27일자, <申氏, 趙氏를 推薦>. 3) 《서울신문》1948년 7월23일자, <參加할 用意있다>;《東亞日報》1948년 7월27일자, <政府는 獨立의 機關>. 4) 《朝鮮日報》1948년 8월10일자, <政府는 初步>.
5) 《制憲國會速記錄(1)》제35호(1948.7.27), <國務總理任命承認의 件>, 大韓民國國會, 1987, pp.645~647. 6) Rhee to Oliver, Jul. 26, 1948(梨花莊所藏) ;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184. 7) 尹錫五, 앞의 글, p.90.
8) 《서울신문》1948년 7월30일자, <總理認准問題, 朝民黨見解發表>. 9) 《서울신문》1948년 7월30일자, <趙, 申氏拔擢, 「無俱」에서 建議>. 10) 《東亞日報》1948년 7월29일자, <立憲精神擁護>. 11) 《朝鮮日報》1948년 9월29일자, <國會를 尊重>. 12) 《東亞日報》1948년 7월29일자, <民族이 願하는 길흾른다> ;《朝鮮日報》1948년 7월29일자, <李氏卽席否決은 遺憾>.
13) 《朝鮮日報》1948년 7월29일자, <國會를 尊重>. 14) Rhee to Oliver, Jul. 26, 1948,(梨花莊所藏). 15) 《朝鮮日報》1948년 7월27일자, <李副統領과 會見>. 16) 《朝鮮日報》1948년 7월27일자, <今日國會서 發表>. 17) 李仁,《半世紀의 證言》, 明知大學校出版部, 1974, p.186 ; 尹錫五, 앞의 글, p.91. 尹錫五는 맥아더 元帥와 中國戰區司令官이었던 미 국무부의 웨드마이어 將軍도 李範奭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고 했으나, 개연성이 희박하다. 18) 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p.59. 19) 《서울신문》1948년 7월30일자, <總理李範奭氏內定>. 20) 《朝鮮日報》1948년 7월31일자, <總理人選難航>. 21) 《東亞日報》1948년 7월31일자, <李範奭氏, 金性洙氏訪問>. 22) 《仁村金性洙傳》, 仁村紀念會, p.552. 23) 《朝鮮日報》1948년 7월31일자, <國會內對立尖銳>. 24) 《朝鮮日報》1948년 8월1일자, <國會도 承認態勢>. 25) 《朝鮮日報》1948년 8월1일자, <李氏總理指名確定的, 李大統領이 示唆> ;《京鄕新聞》1948년 8월1일자, <總理에 李範奭氏, 民意를 좇아 作定>.
26) 《制憲國會速記錄(1)》제37호(1948.7.27), <國務總理任命承認의 件>, pp.683~684. 27) 《朝鮮日報》1948년 8월3일자, <總理에 李範奭氏決定> ;《東亞日報》1948년 8월3일자, <李範奭氏總理決定>. 28) 《東亞日報》1948년 8월3일자, <南北統一에 努力>.
29) Rhee to Oliver, Aug. 4, 1948(梨花莊所藏) ; Robert T. Oliver, op. cit., p.186. 30) 尹錫五, 앞의 글, p.97. 31) 尹錫五, 앞의 글, pp.98~100. 32) 《서울신문》1948년 8월3일자, <尹致暎氏韓民脫黨>. 33) 尹錫五, 앞의 글, p.97. 34) 위의 글, p.101. 35) 같은 글, p.97. 36) 《서울신문》1948년 8월5일자, <國會議長에 申翼熙氏>. 37) 《東亞日報》1948년 8월6일자, <大法院長에 金炳魯氏>.
38) 《朝鮮日報》1948년 8월6일자, <李副大統領突然離京>. 39) 《朝鮮日報》1948년 8월11일자, <李副統領最初로 參席>. 40) 許政,《내일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p.159. 41) 《朝鮮日報》1948년 8월8일자, <總務金炳淵, 企劃李順鐸氏>. 42) 許政, 앞의 책, pp.159~160.
43) 《東亞日報》1948년 8월7일자, <南北統一民生解決에 專力하라>. 44) Rhee to Oliver, Aug. 4, 1948(梨花莊所藏) ; Oliver, op. cit., p.185. 45) 《東亞日報》1948년 8월8일자, <弱?內閣糾彈, 改造運動展開>. 46) 《朝鮮日報》1948년 8월6일자, <社說: 閣僚의 一瞥>. 47) 《朝鮮日報》1948년 8월8일자, <政府前途에 不安>. 48) 《서울신문》1948년 8월13일자, <問題의 無任所相, 兩氏만 遂受諾>.
49) 《京鄕新聞》1948년 8월16,18,19일자, <李大統領式辭內容>. 50) Oliver, op. cit., p.187. 51) 《朝鮮日報》1948년 8월16일자, <偉大한 韓民族, 外勢로 分裂될 理萬無>. 52) 《朝鮮日報》1948년 8월16일자, <民事處를 新設>. 53) 《서울신문》1948년 8월16일자, <李大統領 맥元帥에 香爐等을 膳物>.
54) 《朝鮮日報》1948년 7월28일자, <「統促」 中執·監委選出>. 55) 《朝鮮日報》1948년 8월3일자, <國聯에 金博士>. 56) 《朝鮮日報》1948년 8월7일자, <統促部署決定>. 57) 《朝鮮日報》1948년 8월6일자, <金九氏下釜>. 58) 《東亞日報》1948년 8월6일자, <北韓選擧參加者, 調査하여 措處>. 59) 《서울신문》1948년 8월7일자, <組閣別無所感>. 60) 《朝鮮日報》1948년 8월10일자, <兩單政排擊>.
61) 《朝鮮日報》1948년 8월11일자, <國聯行을 拒否>. 62) 《서울신문》1948년 8월12일자,
70) 《東亞日報》1948년 8월26일자, <北韓政治行動參加는 非法> ;《朝鮮日報》1948년 8월26일자, <第二次南北協商反對>. 71)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p.196 ;《서울신문》1948년 8월21일자, <金九氏慈堂, 夫人, 令息遺骸葬儀式嚴肅執行>. 72) 《서울신문》1948년 9월23일자, <애끓는 追慕의 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