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1948년 2월 10일에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비장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자신의 남한단독선거 반대주장을 비판하는 한국민주당을 일진회(一進會)에 빗대어 반박한 것이었다.
초조한 이승만은 시인 모윤숙(毛允淑)을 시켜 유엔소총회(小總會)에 참석하는 유엔대표단의 메논(K. P. S. Menon) 의장을 밤중에 이화장으로 초치하여 설득했다.
2월 19일에 개회된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한국의 정치정세를 설명하면서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마술적 권위를 가졌다”라고 소개했다.
유엔소총회는 2월 26일에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했다.
김구는 3월 12일과 15일에 미군정법정(美軍政法廷)의 장덕수 암살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검사로부터 피의자심문과 같은 심문을 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2월 16일에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북한은 3월 25일에야 평양방송을 통하여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남한의 17개 정당 및 사회단체를 초청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김구와 김규식의 지도자회담에 대해서는 3월 29일에 별도의 회신을 인편으로 보내 왔다.
1. 金九와 金奎植의 남북지도자회담 제의 편지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세 사람이 중국 총영사 유어만(劉馭萬)의 주선으로 중국공사관에서 오찬 회동을 가졌던 1948년 2월 10일에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유엔대표단에 미소 양군의 동시철수와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한 자신의 의견서를 모멸적인 언사로 비판한 한국민주당 그룹을 질타하는 것이었다.
“美군정의 卵翼하에서 육성된 그들”
김구는 유엔위원단의 축출을 주장하는 좌익정파들과는 달리 이 시점에서도 유엔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는, 내정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서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남북통일의 완전 자주독립정부를 수립할 것과 미소 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의 보이콧으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나,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加强)하여서 세계평화 수립을 순리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업적을 한국독립운동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민족간에 영원한 은의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도 미군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여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만들어 유엔위원단을 당혹케 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것은 한민당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김구는 한민당을 지난날의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존재라고 다음과 같이 매도했다.
“미군정의 난익〔卵翼: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소중히 기른다는 뜻〕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 매족의 일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 설령 유엔위원단이 금일의 군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독립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寃情: 원망하는 심정〕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다. 유엔위원단 제공은 한인과 영원히 풀지 못할 원한을 맺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
蔣介石의 警句 “不變으로 應萬變” 인용하며
김구는 자기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불변(不變)으로 응만변(應萬變)”이라는 말대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불변의 원칙으로 순식간에 만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또는 극복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시점은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동으로 좌익단체들이 2월 7일을 기하여 일제히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시작한 때였다. 폭동 사태는 경인 지역 일대를 비롯하여 거의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남로당은 ‘투쟁’이 시작된 지 사흘 만에 파업투쟁에 8만 471명, 집회, 봉화, 쌀투쟁 등 군중투쟁에 134만 3,289명이 참가하고, 사망자 57명, 중경상자 146명, 피검자 1만 854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1)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생산기관은 마비되고 교통과 운송은 혼란에 빠졌다. 일부지역에서는 경찰서와 지서가 습격을 받았고 경관이 살해되었다. 2·7폭동은 1946년의 10·1폭동과는 달리 남로당에 의하여 사전에 계획된 폭력투쟁이었고, 그것을 분기점으로 공산당의 전술이 무장투쟁 전술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
대규모의 조직적 폭력사태가 시작됨에 따라 경무부장 조병옥, 검찰총장 이인(李仁),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이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담화를 연달아 발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의 성명서는 폭력투쟁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
암살과 파괴와 파공〔파업〕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造出)할 것뿐이다. 악착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
김구는 다음과 같은 감상적인 문장으로 비장한 “읍고”를 끝맺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삼팔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동포 자매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 눌러 막음〕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深思)하라.”3)
이 글은 김구의 심경을 가장 잘 아는 중국시대부터의 오랜 측근인 엄항섭이 기초한 것이었다.
유엔한국위원단은 小총회 보고 문제로 티격태격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유엔소총회〔유엔임시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와 위원단 운영 문제를 둘러싸고 메논(K. P. S. Menon) 의장과 호세택(胡世澤) 사무총장이 레이크석세스로 떠나기 전날까지 티격태격했다. 2월 11일에 열린 제12차 전체회의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이 2월 6일에 공동으로 제출한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한 비망록도 토의되었으나, 그것은 비공식 토의로 처리했다.4)
이날의 회의에서는 유엔소총회에 회부하여 소총회의 결정을 요구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1)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 결의 조건하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에 관한 제반 사태의 추이에 비추어 볼 때에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부분의 한국 영토에서 결의 (2)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은 계획을 완수한다는 것은 위원단의 자의에 맡겨져 있는 것인지 또는 의무로 되어 있는지의 여부.
(2) 만일 그렇지 않다면,
a. 1947년 11월 14일의 결의 (1)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국문제를 고려할 때에 자유분위기 아래서 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위원단으로서는 한국대의원 선거를 감시할 것인가.
b. 위원단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능하고 건의할 만하다고 판단되는 그 밖의 방법들을 생각해 볼 것인가.5)
그 밖의 방법들이란 남북지도자회담을 뜻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2월 13일에 열린 제14차 전체회의는 캐나다 대표 패터슨(G. S. Patterson)의 제의에 따라 유엔소총회가 유엔위원단에 대해 남한에서 총선거를 추진하도록 지시하는 경우 그 선거는 유엔총회가 협의대상으로 초청할 대표들을 선출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등 세 가지 사항의 결의 문제를 두고 토의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6) 결국 모든 것은 메논 의장에게 맡겨졌다. 메논은 토요일인 이튿날 오전에 김포공항을 출발할 예정이었다.
모윤숙이 밤중에 메논과 梨花莊으로
그런데 이날 밤 메논에게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승만의 아집과 계략에 따른 해프닝이었다.
밤이 꽤 깊어갈 시간에 이승만은 모윤숙(毛允淑)에게 전화를 걸어 메논을 이화장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동안 메논과 모윤숙은 퍽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모윤숙은 이승만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그의 주장이 옳은 노선이라고 확신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돕고 있었다. 그러한 모윤숙이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막무가내였다.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있나. 전화 좀 걸어 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이승만의 이처럼 간곡한 목소리를 모윤숙은 처음 들었다. 핑계가 문제였다. 모윤숙은 며칠 전에 메논과 인도의 타지마할(Taj Mahal) 이야기를 나누었던 생각이 났다. 메논은 타지마할은 밤에 보아야 그 낭만에 취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모윤숙은 메논에게 전화를 걸어 금곡릉〔金谷陵: 양주군 금곡리에 있는 홍릉과 유릉의 통칭〕에 가자고 했다. 동대문쪽으로 차를 몰아 인삼차나 한잔 마시고 가자면서 이화장 앞마당으로 안내했다. 메논은 차에서 내리면서 성난 목소리로 “노티 걸(장난꾸러기)!”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가운을 걸치고 마당으로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인삼차를 권하면서 이 밤중에 찾아 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메논은 “미스 모가 금곡릉 달구경을 가자고 해서 나왔습니다. 여기가 목적이 아닙니다”하며 계면쩍게 웃었다.
모윤숙을 부엌으로 데리고 간 프란체스카는 한지에 붓으로 쓴 저명인사급의 서명과 도장이 찍힌 두루마리를 쥐여 주었다.7)
그 두루마리는 유엔위원단에 제출하는 이승만의 의견서였다. 한국위원단은 지도급 인사들에게 200명 이상의 연기명과 날인을 받아서 의견서를 제출하게 통지했었는데, 통지서를 받은 이기붕(李起鵬) 비서가 그 통지서를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잊고 있었기 때문에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의 의견서가 제출되지 않자 메논은 윤치영(尹致暎)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쪽은 다 제출했는데 이 박사쪽만 내지 않았으니 포기하는 것이냐? 우리가 내일모레 유엔으로 떠나는데 어떻게 된 거냐?” 하고 물었다. 윤치영은 부랴부랴 성명과 날인을 받느라 하루낮 하루밤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급한 나머지 이름을 대신 쓰고 도장도 급히 새겨 찍기도 했다.8)
1주일 동안에 열번도 더 전보쳐
이화장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모윤숙이 가만히 두루마리를 메논의 코트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금곡릉이 목적이 아니라 이 두루마리가 목적입니다. 이 박사를 이해해 주시고 좀 비사무적으로 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비공식 사무를 이 박사는 왜 미스 모에게 시킬까요? 그는 포기한 줄 알았소.”
메논의 목소리는 잔인하리만큼 냉엄했다.9)
신문에는 이 의견서가 이날 오후 2시부터 이화장에서 열린 정례 정치애국단체대표 연락간담회에서 토의된 것으로서, 이승만은 이날 저녁에 측근을 국제 호텔로 보내어 출발 준비에 바쁜 메논에게 급히 전했다고 보도되었다.10)
이승만은 메논이 레이크석세스로 떠난 뒤에 더 초조해졌다. 그는 날마다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메논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전보를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보문은 이승만자신이 타이프로 치고 모윤숙에게는 ‘매리언 모(Marion Moh)’라는 사인만 하게 했다. 매리언은 모윤숙의 세례명이었다. 메논이 레이크석세스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이승만이 그에게 친 전보가 열 통이 넘었다. 메논은 전보를 받을 때마다 회현동 모윤숙의 집으로 답전을 쳤다.11)
유엔소총회는 2월 19일에 개최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은 개회벽두에 한국정세에 대한 보고연설을 했다. 메논은 먼저 유엔한국위원단의 결정을 설명하고 다음의 네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는 유엔총회결의 (2)항을 남한에서만 추진하는 것. 곧 남한에 국한될 선거를 감시하여 한국국민정부로서 승인을 얻도록 남한에서 정부수립을 쉽게 하는 것.
둘째는 유엔총회결의 (1)항에 기술된 제한된 목적을 위하여, 곧 협의대상이 될 국민의 대표를 선출할 선거를 감시하는 것.
셋째는 남북한의 지도자회담과 같은 한국의 민족적 독립을 확립할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며 또 최소한도로 그것을 주의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대안은 현상태에서 유엔위원단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하고 위원단에게 위임된 사항을 총회에 반납하는 것.
그러나 이 네 번째 대안은 유엔위원단이 만장일치로 폐기했다고 보고했다.12)
이승만 박사는 네루와 같은 국민지도자
메논의 한국정치상황 분석에는 군데군데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다. 맥아더 치하의 일본국민과 하지 치하의 한국국민을 비교한 것도 그 한 가지 보기이다. 일본국민들로부터는 군사점령에 대한 기계적이고 단조롭고 징그럽다고도 할 만한 인종(忍從)을 느낄 수 있는 데 비하여 한국국민들에게는 불안하고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반항이 있다면서 “하지를 공격하는 것은 한국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일본국민들의 맥아더 숭배보다도 더 건전한 민주주의의 표식이라고 느낀다”라고 그는 말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승만에 대하여 언급한 대목이었다. 그는 남한의 대표적인 정당들로 우익의 3개정당(독촉국민회,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중간파(민족자주연맹), 좌익 4개당(남조선로동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의 존재를 설명하고 나서 이승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에서 말한 정당 가운데 유엔에 의하여 한국의 국민정부로서 승인될 정부를 남한에서 즉시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정당은 두 개였다. 그것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독촉국민회와 김성수씨가 영도하는 한국민주당이다. 이 점에 관하여 그들이 남한인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가의 여부를 확실성 있게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들이 남한에서 조직된 여론의 주요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정당은 하나의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재산이라는 것은 곧 이승만 박사의 성가이다.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그의 연륜과 학식과 사교적 매력과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과 한국의 자유에 대한 생애를 통한 일관된 옹호로 말미암아 판디트 자와할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이미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38선이 조악하게 표징하는 좌우대립이 돌연히 한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극우로 알려져 왔다. 이 박사는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옹호하거나 또는 고려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이다. …”13)
유엔소총회는 메논의 연설에 이어 각국대표들의 입장표명이 있은 다음 4일 동안의 휴회에 들어갔다.
메논의 연설문은 도하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 그리하여 하릴없는 한국민중으로 하여금 메논이 제시한 네 가지 대안을 놓고 또다시 인성만성하게 했다. 국토의 분단을 우려하는 소박한 국민감정으로는 남한만의 총선거보다 남북회담에 더 큰 기대를 갖게 마련이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2월 21일, 22일 이틀 동안 조선여론조사협회가 실시한 메논이 제시한 네 가지 대안에 대한 지지도 조사였다. 조사결과는 단정 단선 11.5%, 단선 5.0%, 남북회담 71.8%, 유엔위원단 철수 12.5%로 나타났다.14)
히지가 三領袖 초청하여 공동메시지 보내라고
메논이 유엔소총회에서 한국문제 보고연설을 한 직후인 2월 19일 저녁에 하지 장군은 경무대 관저로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세 사람을 초청했다. 회담은 저녁 8시부터 10시 반까지 세 시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하지의 보좌관이자 통역관인 이묘묵(李卯默)이 김구의 통역으로 배석했다.
하지는 자기가 왜 세 사람을 애국자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미소공동위원회 때의 일과 유엔위원단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 이상을 혼자서 말을 계속했다. 유엔위원단 멤버들은 그들이 만나 본 사람들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두 사람도 없을 정도로 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는 인상을 가지고 떠나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몇 시냐고 물었다. 9시5분이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결론을 말하라고 했다.
“아, 예, 제가 명백히 하고 싶은 요점은 여러분 애국자들이 어떤 문제에 합의를 보아야 하고 유엔소총회에 공동메시지를 보내야 하겠는데, 내용은 우리 모두가 지금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할 것에 합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는 세 사람이 남한의 총선거 문제에 의견을 달리한다고 유엔위원단이 생각한다면 선거 기회를 잃을 공산이 크므로, 세 사람이 함께 서명한 전보를 유엔소총회에 보내기 바란다면서 전문초안을 꺼내 보였다.
하지의 이러한 제의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은 달랐다. 이승만은 적어도 메논과 호세택이 그러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2월 10일에 우리 모두는 그들에게 한국지도자들이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중요 국가문제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납득시켜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는 그 이야기는 자기도 들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그들이 남한의 총선거를 건의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는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이승만과 김규식이 논쟁 벌여
그러나 김규식은 “우리는 그날 저녁에 아무것도 합의한 것이 없다”고 이승만의 말을 부인했다. 그는 김구와 자기는 남북지도자회담을 열기로 노력하는 동안은 선거를 밀어 두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모인 사람은 당신과 나뿐만 아니라 메논, 호세택, 잭슨(S. H. Jackson), 그리고 유어만 영사도 있었소. 이들이 모두 거기 있었고, 이들이 우리가 다 총선거와 남북연석회의 계획에 합의했다고 우리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논평하지 않았소?”
김구는 자기는 선거 실시에 반대하지 않으나, 자기와 김규식은 남북회담을 시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성사가 되더라도 실패한다면 자기들이 공개적으로 남한의 선거를 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우리가 남과 북의 통일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를 알아볼 모든 수단을 써 보지도 않고 남한의 총선거를 지지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라의 분단을 영구화시킨 반역자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이승만과 김규식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말했다.
“당신들이 염려할 필요는 없소이다. 나 혼자서 책임을 질 것이고, 아무도 당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이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첫째로 이 정부가 유엔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 둘째로 미국으로부터 우리를 도울 원조를 얼마나 받겠는지,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는 여기에 뛰어들 수 없습니다.”
“여보시오, 우사(尤史)! 우리 한국인들이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면서 어떻게 외국국민들에게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물을 수 있겠소? 우리가 정부를 세우면 승인해 주겠느냐고 그들에게 미리 물어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부수립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 유엔에 승인을 요구해야 해요.”
하지가 김규식에게 물었다.
“당신이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한다면 당신의 해결책은 무엇이지요?”
김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묘묵은 모든 대화내용을 김구에게 통역해 주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사실 밝히는 것이 지도자인 나의 의무”
이승만이 하지를 보고 말했다.
“하지 장군, 장군 말대로 유엔위원단이 소총회에 지금 선거를 실시하도록 권고하기는 어려울는지 모르겠어요. 한국 국민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들을 국민들에게 밝히는 것은 나의 의무입니다. 오늘 저녁에 장군이 말한 대로, 이 양반들이 지지를 거부하기 때문에 유엔위원단이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이오. 만일 소총회도 세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 거듭 말하지만 세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들이란 말이오 ― 선거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이럴 경우에 한국국민들 앞에서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불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승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 두 양반들, 특히 김구씨에게 같이 선거에 참여하자고 갖은 방법으로 설득해 보았으나 실패했소이다.”
그러면서 하지를 보고 덧붙였다.
“장군의 영향력은 성공할지 모르지요. 장군은 나의 입장을 잘 아십니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지요. 이 두 양반을 장군에게 맡깁니다. 성공하기 바랍니다.”15)
세 사람이 공동명의로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유엔소총회에 보내라는 하지의 요청을 김구와 김규식이 거절한 것은 두 사람이 공동명의로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이날의 회합에서 그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이튿날 하지의 정치고문 대리 랭던(William R. Langdon)은 이날 밤의 회담에 대하여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전문에서 “하지 장군은 세 시간의 시간만 낭비했다”면서 김구와 김규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두 사람은 남한의 선거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성명은 자신들이 남한을 북한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을 조장하는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이기 때문에 발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은 이미 단절되어 있고 머지않아 방어능력이 없는 남한으로 침투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소총회가 유엔한국위원단에게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 지시한다면 두 사람은 그것을 지지하고 참여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했다.”16)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 보내
김구와 김규식은 2월 16일에 공동명의로 김일성과 김두봉 두 사람 앞으로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는 김규식과 가까운 민족자주연맹의 상무집행위원인 신기언(申基彦)이 기초하고, 김두봉에게 보내는 편지는 엄항섭이 사신 형식으로 기초했다.17)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는 보존되어 있지 않는데, 뒤에 두 사람이 신문에 발표한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1) 우리 민족의 영원 분열과 완전 독립을 판가름하는 최후의 순간에 민족 국가를 위하여 4,50년간 분주치력(奔走致力)한 애국적 양심은 수수방관을 허하지 않는다.
(2)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3) 남북정치지도자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
(4) 북쪽 여러 지도자들도 가질 줄 믿는 데서 우선 남쪽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찬성하는 애국정당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18)
김두봉에게 보낸 김구의 편지는 먼저 우리에게 해방을 준 미소 양국의 은혜는 감사하나 양국 자체간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암담한 면도 없지 않다고 전제한 다음, “인형이여, 이것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弟)는 가슴이 답답하고 인형이 보고싶은 때마다 때묻은 보따리를 헤치고 일찍이 중경(重慶)에서 받았던 혜찰을 재삼 읽고 있습니다”라는 감상적인 문투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엿새 전에 발표한 성명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과 비슷한 문투였다.
김구는 2차 대전 말기에 임시정부 주석의 입장에서 연안(延安)에 있는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상기시킨 다음, “우리 자신이 지리멸렬하여” 유엔위원단의 공작도 효과를 거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김구는 이어 38선에 의하여 “허리가 끊어진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더 이상 볼 수 없지 않으냐고 탄식하듯이 적었다.
“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8선 이남 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쪽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아니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합석하는 것을 희망하지도 아니하지마는 기실은 절망하고 이것을 선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流離?乞: 돌아다니며 동냥질함〕하는 꼴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그러므로 우리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면서, 남북지도자회담을 열어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인형이여, 우리가 불사(不似)하지만 애국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동포의 사활과 조국의 위기와 세계의 안위가 이 순간에 달렸거늘,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책임으로서 편안히 앉아서 희망 없는 외력에 의한 해결만 꿈꾸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사(尤史) 인형과 제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지도자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주창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양인의 연서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나 남북에 있는 진정한 애국자의 힘이 큰 것이니, 인동차심(人同此心)이며 심동차리(心同此理)인지라 반드시 성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더구나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리가 있겠나이까. …”19)
위의 두 편지에서 보듯이 이때에 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한 것은 북쪽의 두 김과 남쪽의 두 김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정치지도자들 사이의 정치협상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남북한에서 각각 애국정당대표회의를 소집하여 협상대표를 선출할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2. 유엔小總會의 ‘可能지역선거’결의
유엔소총회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동안 한국의 정국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빨리 실시하자는 주장과 남북지도자회담이 우선이라는 주장이 맞서 격렬한 논란을 벌였다. 논란은 과도입법의원에서부터 빚어졌다. 2월 19일에 신익희(申翼熙), 김도연(金度演), 김법린(金法麟), 백관수(白寬洙) 등 의원 43명의 연서로 “유엔위원단은 우선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 실시를 감시하고 법적 자주독립 통일정부 수립을 협조할 귀 위원단의 신속한 임무완수를 간청함”이라는 긴급동의안이 제출되어 논란이 벌어졌고,20) 이튿날 회의는 의장 김규식이 비공식 회의로 할 것을 선포하고 비공개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 긴급동의안은 김규식 의장과 최동오(崔東旿) 부의장, 그리고 김규식을 지지하는 관선의원 23명이 일제히 퇴장하는 등의 소동 끝에 2월 23일의 회의에서 백관수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표결을 실시하여 40대 0으로 가결했다.21) 그리하여 김규식과 최동오는 2월 27일에 사임서를 제출했고, 이에 맞서 한민당 그룹은 두 사람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22)
“미국독립도 한마음 한뜻으로 된 것 아니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 이승만은 2월 23일에 반대파들은 제외하고라도 남한 총선거를 서둘러야 한다는 단호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메논의 연설문을 읽고, 그리고 입법의원의 동향 등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다.
“지금 더욱이 미국정부에서는 공개로 남한총선거를 실행하여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절대 주장하며, 세계공론이 다 이 방면으로 동성향응(同聲響應)하는 중이요, 하지 중장 또한 절대 지지하는 터이다. 우리 삼천만 애국동포여, 한길로 함께 나가자! 무슨 장애가 있든지 밀고 나가야 될 것이다. 이말 저말 듣고 아무 것도 못하고 앉았다가 마침내 다 공산화하고 말 것이니, 천인만인이 다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순조로이 독립하려면 우리는 독립할 날이 없을 것이다. 죽었던 나라를 한편에서라도 살려 놓아야 전체를 살릴 희망이 있을 것이다. 일백칠십년 전에 미국이 독립할 적에 전민족이 다 한마음 한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아비와 형은 영국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그 자제들은 미국이 독립해야 한다 해서 부자간과 형제간에 전쟁하여 가지고 된 것이다. 우리 충애동포만 다 희생적 정신으로 나서면 대내대외의 여간 장애가 있어도 다 빙소(氷消)될 것이다. 3월 1일까지 기다리는 동시에 우리는 각각 마음으로 준비하고 조직으로 준비해서 퇴축(退縮) 없이 성공하기만 기대하고 나가자!”23)
“머리보다 심장을 우선시킨 유일한 예외”
2월 24일에 속개된 유엔소총회에서 미국대표 제섭(Philip C. Jessup)은 메논이 제시한 첫째 대안, 곧 남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감시하여 한국정부로 승인을 얻도록 하는 결의안을 제안했다. 미국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나라는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인도였다. 인도의 입장이 달라진 것은 미국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아울러 이승만의 메논 설득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월 26일에 실시된 투표에서는 다음과 같은 미국의 결의안이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되었다.
“소총회의 의견으로는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결의 제조항에 따라,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에 관한 정세 추이에 비추어 보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지역에서 결의문 (2)항에 약술된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 동위원단에 부하된 의무임을 결의한다.”24)
이러한 유엔소총회 결의 뉴스를 접하고 이승만이, 그리고 모윤숙도 얼마나 기뻐했을까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메논은 뒷날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상적인 기술을 남겼다.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한 데에는 하나의 감상적인 까닭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람들은 아주 우호적이어서 우리는 많은 친구를 얻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친밀했던 사람은 한국의 지도적 여류시인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 그녀와 나는 정치적인 견해 차이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슬픔과 즐거움 같은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며 많은 신성한 시간을 보냈다. …
매리언은 시인일 뿐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퍽 단순했다. 그녀에게 남한은 한국을 의미했다. 북한은 아데나워에게 동독이 그렇듯이 하나의 궤도일탈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선거였고 이에 반대하는 투표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매리언은 온 희망을 내게 걸었다. 그녀는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고까지 칭송하는 몇 편의 시까지 썼다. 만약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가 미국 결의안에 부표를 던졌더라면 그녀는 가슴이 터지는 비통에 빠졌을 것이고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에 그녀를 대할 낯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태가 그대로 진행되게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임무를 수행하는 데 머리보다 심장을 우선시킨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내 자신을 위로했다. …”25)
메논은 3월 6일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인도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3월 19일에 귀국했다.26)
“小總會가 일개 소련의 태도도 시정하지 못하고 …”
유엔소총회의 결의는 좌우익 정파들을 모두 긴장시켰다. 이승만과 김구와 김규식도 긴장했다. 그 긴장의 성격은 각자의 담화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총회에서 한국총선거에 대하여 31대 2표로 가결한 것은 유엔대표단의 노력과 특별히 미국무성에서 정당한 주장으로 우리의 기대한 바를 달성케 된 것이다. 우리가 당초에 민족자결주의를 발휘하여 총선거를 진행하였더라면 벌써 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인데, 우리가 아니하고 있다가 이와 같이 연장이 된 것은 유감이나, 지금은 유엔의 협조와 미국의 후원으로 모든 장애가 해소되고 우리 앞길이 순조로이 열리게 되어, 지금부터는 우리 전민족이 주저 말고 일심 합력하여 모범적 선거를 진행해서 국권을 확립하고 앞으로 조국통일책을 여러 우방의 원조로 속히 해결되기를 바란다.”27)
유엔의 권능에 큰 기대를 하고 있던 김구는 소총회의 결의가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는 소련의 태도부터 나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유엔에서의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민주주의를 무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거니와, 유엔소총회가 일개 소련의 태도도 시정하지 못하고서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의 결정에 위반되는 남한에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파산을 세계적으로 선고함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내외정국을 막론하고 정의와 평화를 애호함에서 유엔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절대다수의 인사는 너무나 실망을 가질 것이다. …”
김구는 이어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나는 이로부터 세계가 다시 혼란으로 들어갈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역사의 바퀴는 앞으로 구르고 인류는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는 오직 정의에만 있는 것이다. 나는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절대다수의 애국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만 계속하겠다. 이것을 위하여서는 분골쇄신(粉骨碎身)도 부탕도화〔赴湯蹈火: 끓는 물이나 뜨거운 불도 밟고 간다는 뜻〕도 마다하지 아니하겠다.”28)
김구가 말한 북한의 ‘인민공화국’이란 북한당국이 2월 11일에 발표한 북한의 헌법초안과 관련된 보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2월 18일자 도하신문들은 일제히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서울발 AP 및 UP 통신 기사를 받아 크게 보도했는데, 그것은 미군사령부의 한 고위관리의 부정확한 설명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은 2월 6일에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를 열고 조선임시헌법 기초위원회가 소련의 1936년 헌법을 본떠서 기초한 전문 10장 102조의 헌법초안을 채택했는데,29) 그것이 2월 8일의 조선인민군 창설 뉴스와 함께 북한의 정권 수립으로 알려진 것이었다.30)
남한선거에 반대 않으나 선거에는 不參한다고
이 북한의 헌법초안은 서울의 신문에도 보도되었고,31) 남로당은 ‘2·7구국투쟁’과 병행하여 북한 헌법초안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벌였다.32)
또한 가뜩이나 과도입법의원 사태로 상심하고 있는 김규식은 앞으로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남조선총선거를 위한 유엔소총회 결의에 대하여는 남조선에 있는 조선사람도 우리의 자율적 역량이 발휘되지 못했으니까 반대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 반대할려도 반대할 도리도 없다. 나 개인으로서는 과도입법의원의 일만 끝나면 남북의 통일한 총선거라 할지라도 참가할 생각이 없으니까 남조선 선거에는 물론 불참하겠다. 그러나 남조선 선거에 반대하지는 않겠고, 이 앞으로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불참하겠다.”33)
한편 한민당 중심의 한국독립수립대책협의회(한협)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세계열강이 얼마나 조선독립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 방법이 아니고는 남북통일의 묘안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본회는 180여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하여 유엔제우호국에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국민 여러분에게 국제정국의 진실한 인식을 함으로써 우리 독립을 조속히 실현시키도록 권하는 바이다.”34)
李靑天은 李承晩과 장시간 요담 나누어
유엔소총회의 결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새로운 국제권력정치의 전개에 일희일비하던 한국의 정국에 또다시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독촉국민회를 비롯하여 조기총선을 주장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은 2월 27일 오후에 이화장에 모여 유엔소총회 결의에 대한 축하국민대회를 개최할 것과 재남이북동포 특별선거구를 설정하도록 김성수, 신익희, 박순권 세 사람이 이북단체연합회와 제휴하도록 교섭할 것 등 총선거 대비책을 토의했다.35) 같은 시간에 임시정부 그룹의 국민의회는 긴급상무위원회를 열어 유엔소총회 결의에 반대하는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국민의회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방법 등 시국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2월 29일 하오에 긴급 상무, 국무, 정무, 법무 4개 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36)
그런가 하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은 2월 27일 오전에 긴급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토론한 결과 이청천(李靑天) 단장 이하 전원이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지지하기로 하고, 이튿날 이청천이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여 남한총선거에 대하여 장시간 요담했다.37)
한편 민족자주연맹은 2월 28일 오후에 긴급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유엔소총회 결의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모든 정치활동에는 불참하고 새로운 국면에 대처하는 국민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신중히 고려중이라고 천명했다.38)
“初代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를 추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열상황은 3·1절 경축행사에서도 나타났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서울시 주최의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에는 10만을 헤아리는 군중이 운집했고, 하지 사령관과 딘 군정장관도 참석했는데, 김구와 김규식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는 경교장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김구는 기념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나는 귀국 후에 지방을 시찰할 때에 지방민중에게 말하기를 나는 정권이나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 조선이 독립되면 나는 농촌에 들어가서 농군이 되기를 원하며, 초대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할 것을 늘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조선문제가 급전환된 이때에 모모 인사들이 나한테 이 박사와 제휴하고 나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민생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므로 행동을 같이할 수 없으며, 남조선선거에 응할 수 없다.”39)
이튿날 열린 한독당 상임위원회는 남북요인회담 추진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추진위원으로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엄항섭, 김의한(金毅漢), 백홍균(白泓均), 조경한(趙擎韓) 6명을 선정했다.40)
이날 서울운동장에서는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에 이어 중앙정부수립결정안 축하국민대회가 열렸는데, 이승만은 이 자리를 이용하여 선거일정을 비롯한 선거 후의 정부수립, 국방군 창설, 유엔 가입 등에 대한 소견을 피력했다. 그는 또 ‘2·7구국투쟁’에 열중하고 있는 좌익들에게 한마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공산주의자에게 회개하라고 부탁하려고 한다. 파괴의 시대는 지나고 건설의 때가 이제 온 것이다. 건설시대에 파괴하는 것을 그만두고 건설에 협력하기를 바라고 빈다”라고 그는 말했다.41)
“남북지도자회의는 美제국주의가 案出한 것”
유엔소총회의 결의가 전해지자 좌익단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남로당중앙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등 좌익단체들은 일매지게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비판하면서 한국유엔위원단의 축출을 선동했다. 이들은 “조국사상 최대의 위기에 당면한 우리 민족은 오늘에야말로 총궐기하여 미제의 앞잡이 유엔위원단을 구축하고, 단선단정을 쳐부수고, 소미양군 철병을 실현하여 조국의 통일자유민주독립을 전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들의 발표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의 김일성과 김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내고 두 주일이나 지난 뒤인데도 “조선을 외국 제국주의자에게 팔아먹으려는 반동의 두목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그의 졸도 김성수 계열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남북요인회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회의의 제창자인 김구, 김규식의 주장하는 바가 ‘유엔위원단’의 알선 및 감시하에서(의) 회담을 요구하며 소미양군 철병 후 유엔으로 하여금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인데, 이는 유엔위원단 반대와 양군 동시철병 후에 남북통일정부를 조선인 자신에 의하여 수립하려는 인민의 투쟁이 날로 높아 가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인민의 구국투쟁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으므로 ‘통일’이니 ‘철병’이니 ‘정치범 석방’이니의 기만적 언사 밑에 유엔위원단에 대한 환상을 인민에게 퍼뜨리며, 한편에서는 양 김에 대한 연기를 집중하여 소위 중간파를 영도하여 민주진영을 견제 고립시키려는 것이며 타방에서는 분열과 단정의 책임을 소련과 남북 민주진영에다가 전가하여 결국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타협으로써 남조선 괴뢰 단정을 조작하려는 미제국주의 영도하에 그 국제 국내의 주구들을 구사하여 안출된 가장 교묘한 방법이다. …”42)
이러한 주장은 이때까지도 남한의 좌익단체들이 남북지도자회담과 관련하여 북한 당국으로부터 구체적인 협의를 받고 있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하지 장군은 3월 1일에 남한의 총선거를 5월 9일에 실시하겠다고 포고했는데,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개성, 의정부, 춘천, 주문진 등지의 수용소를 통하여 38선을 넘어오는 북한주민들의 수가 매일 800명 내지 1,000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다.43)
3. 金日成과 金枓奉의 모멸적인 回信
이승만은 총선거 준비를 서둘렀다. 3월 5일 오후에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열린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총선거에 대비한 민족대표단을 정식으로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대표단의 역할은 선거법, 선거일자, 선거집행 사무 등을 유엔위원단과 협의하는 것이었다. 대표단의 숫자는 3·1운동의 상징성이 있는 33명으로 구성하기로 하고 대표단 전형위원으로 명제세(明濟世), 김헌(金獻), 황현숙(黃賢淑), 백남훈(白南薰) 등 9명을 선출했다. 선출된 33명은 이승만을 비롯하여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 이윤영(李允榮), 김성수(金性洙), 김창숙(金昌淑), 서상천(徐相天), 신익희, 이청천, 박순천, 전진한(錢鎭漢), 이범석(李範奭), 변영태(卞榮泰), 김활란(金活蘭), 유진산(柳珍山), 이철승(李哲承) 등 우익 정당 및 사회단체대표들을 망라한 것이었다.44) 이승만은 김구를 민족대표단에 포함시키고자 했으나, 김구는 응하지 않았다.45) 이승만은 3월 10일에 유엔위원단에 대해 민족대표단의 성립을 알리면서 위원단의 제반업무를 민족대표단과 상의할 것을 요망하는 메시지를 보냈다.46) 그런데 유림의 대표인 김창숙이 3월 11일에 민족대표단에 참가한 일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부단장으로 발표된 이시영도 기자에게 대표단에 참가한 일도 없고 앞으로도 참가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47) 민족대표단 구성을 너무 서둔 나머지 사전에 충분한 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편지는 최후통첩이 아니다”
김구는 김일성과 김두봉의 회신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유엔소총회에 다녀온 메논과 호세택이 3월 13일에 경교장으로 찾아와 북한쪽의 회신이 4월 30일까지 없을 때에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어떠냐고 종용하자 “편지는 성의에서 보낸 것이지 최후통첩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회신 기간의 여부를 논할 것이 아니다”라면서 거절했다.48)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이던 유엔위원단은 3월 12일의 제22차 전체회의에서 표결을 실시하여 찬성 4(중국,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 반대 2(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기권 2(프랑스, 시리아)로 5월 9일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가결했다.49) 그런데 5월 9일은 일요일이었으므로 기독교계에서 반발이 있는 데다가 일식(日蝕)이 있을 예정이어서 하루 늦추어 5월 10일로 변경했다.
유엔소총회의 결의와 북한쪽의 무응답에 고뇌하고 있는 김구를 격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3월 2일부터 진행되고 있던 장덕수 암살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라는 미 군율재판소의 소환장을 3월 8일에 받은 것이다. 소환장은 거창하게도 “북미합중국 대통령이 김구씨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50)
이승만은 3월 8일에 김구의 장덕수 살해사건 관련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 주석이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기에 이르니 이것을 본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는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 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51)
美軍律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돼
김구는 3월 12일에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재판정에 출두했다. 한민당과 한독당 관계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방청석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미국인 방청석에도 많은 남녀 미국인들이 참석하여 김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검은 두루마기에 자줏빛 토시를 낀 김구는 재판정 한복판에 한단 높이 마련된 증인석에 앉아 심문을 받았다. 김구는 젊어서 치하포사건과 안악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일이 아련히 상기되었을 것이다.
“증인의 이름이 김구입니까?”
“그렇소.”
“증인의 직업은 독립운동가입니까?”
“내가 옳은 독립운동가였다면 오늘 이 법정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는 입장에 있겠소?”52)
이렇게 시작된 심문은 오전 오후에 걸쳐 네 시간 반이나 걸렸다. 검사나 재판관은 예의를 갖추어 묻기는 했으나 심문내용은 피의자 심문과 비슷했다. 검사는 김구가 장덕수를 가리켜 “죽일놈”이라고 말했다는 피고인들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모로 캐물었다. 또한 찾아간 피고인들을 김구가 격려해 말하기를 “그 정신은 좋지만 조심하라. 그러한 청년은 많으나 성사를 못하더라.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는 궐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도 물었다.53)
김구는 3월 15일에 열린 공판에 다시 소환되었다. 그는 심문 모두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답변을 거부했다.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했소. 도대체 나는 국제 예의를 존중해서 증인으로 나오라기에 여기 나와 앉은 바인데, 마치 나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셈이니 매우 불만하오. 내가 지도자는 못되더라도 일개 선비요. 나라를 사랑하는 나에 대해서 법정에서 이렇듯 죄인 취급을 하는 데는 나로서 이 이상 말할 것이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종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바로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장을 띄워 잡아 놓고 하시오. 내가 증인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
이렇게 흥분된 어조로 말하면서 김구가 일어서서 나오려는 것을 변호인쪽에서 만류했다. 검사가 다시 질문을 했으나 김구는 함구무언이었다. 이때에 피고인석에서 박광옥(朴光玉)이 일어나 “법정에 태극기를 달아라. ××× 먹으려면 깨끗이 먹으라!” 하고 고함을 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 이렇게 오전 공판이 끝나고 김구는 돌아왔다.54)
7巨頭 성명으로 용기 얻어
김구의 이러한 당당한 태도는 바로 3월 12일에 발표된 ‘7거두성명’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 김구는 임시정부 및 한독당 그룹을 중심으로 빈번한 회합을 가지면서 시국대책을 협의해 왔는데, 그 가운데에서 김구, 조소앙, 조완구, 조성환 네 사람과 이승만 진영에서 민족대표단에 포함시켰던 한독당 고문 김창숙, 그리고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과 홍명희(洪命憙)가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성명서는 먼저 한반도의 현정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남에서는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 하고 북에서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제정 발포한다 하여 남북이 분열 각립할 계획을 공공연하게 떠들게 되고 목하 정세는 실현 일보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일시 설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정부 또는 양국가를 형성케 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야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우리 민족의 참화가 이에서 더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적 이해를 불고하고 미국이나 소련의 정책으로만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데는 추수할 수 없는 것이다. …”
‘성명서’는 남한에 중앙정부를 먼저 수립하여 국제적 승인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빚어낼 뿐일 것이다. 우리 문제가 국제적 연관성을 무시하고 해결될 것은 아니로되 우리 민족적 견지는 불고(不顧)하고 미소의 견지를 추수하야 해결하려는 것은 본말과 주객이 전도된 부정당하고 부자연한 일이니, 부정당 부자연한 일은 영구 계속하는 법이 없다. 우리 문제를 미소공위도 해결 못하였고 국제연합도 해결 못할 모양이니, 이제는 우리 민족으로 자결하게 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
그러면서 이들은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선거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명했다.
“우리 몇 사람은 정치의 기변성(機變性), 운동의 굴신성(屈伸性), 기타 여러 가지 구실로 부득이한 채 현정세에 추수하는 것이 우리의 개인의 이익됨을 모르지 아니하나,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민족의 참화를 촉진하는 것은 민족적 양심이 허락지 아니하여,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가능한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통일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것을 동포앞에 굳게 맹세한다.”55)
‘7거두성명’에 이어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은 행동통일을 위한 협의체 구성을 추진했다. 3월 13일에 소집된 민족자주연맹의 정치위원회는 그 교섭위원으로 홍명희, 여운홍(呂運弘), 김붕준(金朋濬) 세 사람을 선정했다.56)
許哥而 등 소련派는 金奎植을 의심해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의 두 김에게 보낸 편지의 회신이 오기까지에는 40여일이 걸렸다. 북로당의 정보관계 고위당료〔당중앙위원회부부장〕였던 박병엽(朴炳燁)은 두 사람의 편지와 관련된 북한 당국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북로당은 2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 동안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와 관련된 문제와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2·7구국투쟁’ 결산문제를 의제로 열띤 토의를 벌였다. 핵심논점은 2월 4일에 열린 민족자주연맹의 정치위원 상무집행위원 연석회의의 남북요인회담 제의와 대북편지 발송 결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미군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 노블(Harold Noble)이 김규식의 사무실을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는 것을 감안할 때에 김규식이 오히려 남북협상의 움직임을 깨려는 미군정부의 공작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허가이(許哥而), 김열(金烈) 등 소련파는 김규식을 의심하면서 북로당의 정치노선을 파탄시키려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음모를 경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같이 활동했던 연안파의 김두봉과 최창익(崔昌益)은 미국의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김구와 김규식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과 김책(金策) 등 빨치산파는 연안파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지만 김구와 김규식의 애국적 행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주영하(朱寧河), 최경덕(崔璟德) 등 국내파는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북로당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사흘 동안이나 토론을 계속한 적이 없었다.
회의는 대남연락부장 임해(任海)를 서울로 급파하여 사정을 정확하게 알아오게 했다. 임해는 2월 22일 밤에 수행원 두 사람과 함께 평양을 출발했다가 23일 밤에 돌아왔다. 2월 24일, 25일 이틀 동안 다시 열린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는 임해의 보고를 통하여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가 미군정부의 공작에 의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추진하기로 했다.57)
天道敎靑友會의 3·1節 거사 계획
북한의 두 김의 회신이 늦어진 데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북조선 천도교청우당이 서울 천도교청우회의 최린(崔麟)의 지령으로 3·1절을 기하여 북한정권의 수립을 반대하는 이른바 ‘3·1재현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적발되어 2월 말에서 3월 초에 걸쳐 소련군과 북한지도부가 이 문제의 처리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군 사령부의 군정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의 《비망록》에 이 무렵의 일이 자세히 적혀 있다. 최린의 지시문을 가진 박현엽(朴炫燁), 유은덕(劉恩德) 두 여성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2월 15일이었다. ‘3·1재현운동’ 거사계획은 북조선청우당 위원장 김달현(金達鉉)의 신고로 3·1절 직전에 발각되어 지도자 19명을 포함한 172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던 남로당의 이론가 이강국(李康國)도 조사를 받았다.58)
회신이 늦어진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북정당 및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열기로 결정한 소련군과 김일성 그룹은 그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하면서 회의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회신을 늦춘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레베데프 비망록》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3월 12일자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김두봉이 김일성에게 또 전화해서 김구에게 확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답변―국가적 사업은 한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서두르는가?
…………………
김두봉―무엇 때문에 항상 그 사람을 욕하는가? 김구가 단독선거에 찬성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 빨리 만나야 한다. 김구는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김구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59)
“이제까지 별별 짓을 다 하던 金九의 태도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두봉이 3월 27일부터 나흘 동안 평양에서 열린 북로당 제2차 대회의 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북한권력 내부에서 그의 위상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제까지 별별짓을 다 하던 김구의 태도가 이제야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 방금 미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우게 되니 당황하여서 이제는 평양에 오겠다고까지 합니다. 김구가 이제라도 다소 깨닫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방심할 것은 아닙니다. …”60)
3월 20일과 24일의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북로당 특별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3월 25일 오전에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6차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4월 14일에 평양에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남한의 정당 및 단체들에 초청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평양방송은 이날 저녁 7시부터 매 시간대 뉴스시간에 북조선민전이 채택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대남제의서를 방송했다. 방송은 북로당, 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등 북한의 9개 정당 및 사회단체 명의로 남로당과 한독당을 비롯한 남한의 17개 정당 및 사회단체를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북쪽이 공식으로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북쪽은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면서도 김구와 김규식의 2월 16일자 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북로당 특별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내는 편지가 전해진 것은 이틀 뒤인 3월 27일이었다.61) 3월 15일자로 된 이 편지는 흰 인조견에 국한문의 타자로 치고 두 김의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金日成과 金枓奉이 40日만에 回信 보내와
북한의 두 김이 공동명의로 남한의 두 김에게 보낸 회신은 김두봉에게 보낸 김구의 편지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그리고 예의에 벗어나는 문투였다.
모두의 인사말도 없이 대뜸 “귀 서한 중에 제기된 문제에 관하여 회답코저 합니다” 하고 시작한 편지는 남북한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대비했다.
“조선이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이미 2년 반이 되었으나 우금 조선민족은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인민은 남북 조선의 판이한 정치 조건하에서 부동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북조선 인민들은 자기손으로서 자기운명을 결정하는 모든 창발성을 발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에는 모든 주권이 미국사람의 손에 있기 때문에 남조선 인민들과 당신들은 아무런 권리와 자유가 없이 정신상과 물질적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
편지는 그러한 상황이 빚어진 책임이 김구와 김규식의 해방이후의 행적에 있다고 대놓고 질책했다.
“당신들은 조국땅에 돌아온 후에 금일까지 민족입장에 튼튼히 서서 조선이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여 나갈 수 있는 정확한 강령과 진실한 투쟁을 문헌으로나 실천으로 뚜렷하게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거듭 파열시켰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미소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무관심한 태도로 묵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에 대한 유엔총회의 결정과 소위 유엔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당신들은 환영하였습니다.”
지도자회담 제의 수락하면서 일정 등 일방적 통보
편지는 두 사람이 제의한 남북지도자회담에 대해서도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제야 당신들은 청천백일하에서 조선국토의 양단, 조선민족의 분열을 책모하는 유엔조선위원단과 미군사령관의 정치 음모를 간파한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들의 애국적 항의는 미온적이고 당신들의 입장은 명백하지 못합니다. 민족자주독립이 위급에 봉착한 금일에 당신들은 또 무엇을 요망하고 애국적 항쟁을 실천에 옮기지 않습니까? …
이제 우리는 양위 선생이 제의하신 남북조선지도자연석회의의 소집을 본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어떤 조선을 위하여 투쟁하시려는지 그 목적과 기획을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석회의의 성과에 대하여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편지는 자신들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실시하려는 유엔의 결정을 반대하는 대책을 이미 세우고 그 투쟁방침을 토의하기 위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편지를 보냈다고 말하면서, 두 사람이 제의한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위의 지도자연석회의에 관하여서는 1948년 4월 초에 북조선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동의합니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이 연석회의에 참가하는 성원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제의합니다.
남조선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백남운, 김붕준, 김일청, 이극로, 박헌영, 허헌, 김원봉, 허성택, 유영준, 송을수, 김창준 등 15명과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달현, 박정애 이외 5명으로 예상합니다.
(1) 조선의 정치현세에 대한 의견교환.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반동선거 실시에 관한 유엔총회의 결정을 반대하며 투쟁할 대책 수립.
(3) 조선통일과 민주주의조선정부 수립에 관한 정책 연구 등등.
만일 양위 선생이 우리의 제의를 동의하신다면 1948년 3월 말일 내로 우리에게 통지하여 주실 것을 바랍니다.”62)
그것은 지극히 모멸스러운 일방적인 통고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소련의 한반도정책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63)⊙
1) 《노력인민》1948년 3월26일자, <「國聯朝鮮委員團」 抗議救國鬪爭三日間統計表>. 2) 김남식,《南勞黨硏究》, 돌베개, 1984, pp.303~308. 3) 《朝鮮日報》1948년 2월11일자, <統一의 最後機會, 派爭中止코 團結하라>. 4) 國史編纂委員會,《大韓民國史資料集(1) UN韓國臨時委員團關係文書(Ⅰ)》1987, 國史編纂委員會, p.16.
5) 國會圖書館立法調査局,《1948年度國際聯合韓國臨時委員團報告書(第一部 第一卷)》, 1965, 國會圖書館, p.63. 6) 《大韓民國史資料集(1) UN韓國臨時委員團關係文書(Ⅰ)》, p.18. 7) 毛允淑,《回想의 窓가에서》, 河書出版社, 1980, pp.232~234. 8) 윤치영, <나의 이력서(56)>,《한국일보》1981년 9월26일자.
9) 毛允淑, 앞의 책, pp.233~234. 10) 《서울신문》1948년 2월15일자, <李博士, 메논氏에 새 意見書提出>. 11) 毛允淑, 앞의 책, pp.228~229. 12) Yoon Sook Mo ed., Speeches of Dr. Menon, Mun Hwa Dang, 1948, pp.33~38 ;《東亞日報》1948년 2월22일자, <小總會메논博士報告內容>.
13) Yoon Sook Mo, op. cit., p.38 ; 위와 같음. 14) 《우리신문》1948년 2월24일자, <메논氏報告와 거리의 輿論>.
15)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o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p.134~137. 16) Langdon to Marshall, Feb. 20, 1948,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8, vol.Ⅵ, United Stated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4, pp.1131~1122. 17) 宋南憲,《解放三年史(Ⅱ) 1945-1948》, 까치, 1985, pp.534~535. 18) 《朝鮮日報》1948년 4월1일자, <南北政治協商에 對한 往復書翰의 內容 金九, 金奎植兩氏要旨를 發表>.
19)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編, <金九·金奎植이 金枓奉에게 보낸 서신>(1948.2.16),《白凡金九全集(8)》, 대한매일신보사, 1999, pp.721~ 726. 20) 《過渡立法議院速記錄》제209호(1948.2.19) ;《東亞日報》1948년 2월21일자, <南朝鮮選擧實施案, 四十三議員緊急動議> ;《朝鮮日報》1948년 2월21일자, <單選協助要請動議로 立法議場은 辱說로 修羅場化>. 21) 《過渡立法議院速記錄》제210호(1948.2.23) ;《朝鮮日報》1948년 2월25일자, <立議의 南朝鮮選擧案激論테可決>. 22) 《過渡立法議院速記錄》제211호(1948.2.27) ;《東亞日報》1948년 2월29일자, <議長과 副議長不信任案內容>.
23) 《東亞日報》1948년 2월24일자, <三月一日內選擧決定 못되면 獨自的計?推進>. 24) 國會圖書館立法調査局,《1948年度國際聯合韓國臨時委員團報告書 第一部第一卷》, p.65. 25) K. P. S. Menon, Many Worlds Revisited, Bharatiya Vidya Bahavan, 1981, pp.258~259. 26) 《朝鮮日報》1948년 3월20일자, <朝鮮自主獨立을 確信, 메논氏와 胡博士, 盛大한 歡送裡에 昨日歸國>.
27) 《京鄕新聞》1948년 2월28일자, <快報나 도리어 晩時之歎>. 28) 《京鄕新聞》1948년 2월28일자, <統一에 繼續鬪爭>. 29) 김광운,《북한정치사연구Ⅰ》, 선인, 2003, pp.614~624 참조. 30) 《東亞日報》1948년 2월18일자, <蘇領導下傀儡政府, 人民共和國宣布> ;《朝鮮日報》1948년 2월18일자, <北朝鮮共和國宣布?>. 31) 《우리신문》1948년 2월24일자, <北朝鮮臨時憲法草案>. 32) 《노력인민》1948년 3월8일자, <全人民의 總意에 附合, 原案承認接受를 要請>. 33) 《京鄕新聞》1948년 2월28일자, <政界서 隱退決意>. 34) 《朝鮮日報》1948년 2월28일자, . 35) 《朝鮮日報》1948년 2월29일자, <李博士와 獨促以北人連絡工作>.
36) 《서울신문 》1948년 2월29일자, <小總會決議反對, 國議서 國民運動展開?>. 37) 《東亞日報》1948년 2월29일자, <李靑天將軍李博士訪問>. 38) 《朝鮮日報》1948년 2월29일자, <金博士隱退前進의 雙曲>. 39) 《서울신문》1948년 3월3일자, <李博士와 行動統一不能>. 40) 《朝鮮日報》1948년 3월4일자, <韓獨, 南北會談機關設置를 決議>. 41) 《朝鮮日報》1948년 3월2일자, <國防軍組織코 UN加入>. 42) 《노력인민》1948년 3월8일자, <國聯朝委追放에 突進하자>.
43) 《東亞日報》1948년 3월4일자, <봄따라 南下하는 同胞, 하로에 千名도 넘어>. 44) 《朝鮮日報》1948년 3월7일자, <民族代表團構成, 李博士以下?三名>. 45) 《서울신문》1948년 3월9일자, <民代團參加, 金九氏拒否>. 46) 《朝鮮日報》1948년 3월13일자, <朝鮮人의 意見, 選擧에 充分反映하라>. 47) 《서울신문》1948년 3월12일자, <李始榮金昌淑氏, 民代不參加表明>. 48) 《朝鮮日報》1948년 3월14일자, <金九氏메논議長勸告를 拒否>. 49) 《大韓民國史資料集(1) UN韓國臨時委員團關係文書(Ⅰ)》, pp.24~25. 50) 《朝鮮日報》1948년 3월9일자, <證人으로 金九氏召喚>. 51) 《朝鮮日報》1948년 3월9일자, <金主席關聯說은 미들수업다>. 52) 김용식,《새벽의 약속-김용식 외교 33년》, 김영사, 1993, p.24.
53) 《朝鮮日報》1948년 3월13일자, <金九氏證人으로 出廷>. 54) 《朝鮮日報》1948년 3월16일자, <“罪人取扱에는 不滿”>. 55) 《朝鮮日報》1948년 3월13일자, <民族自決推進>.
56) 《朝鮮日報》1948년 3월16일자, <選擧反對戰線>. 57) 박병엽 구술, 윤영구-정창현 엮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pp.263~268. 58) 《레베데프 비망록》(1948.3.6),《釜山日報》1995년 2월28일자 ; 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233. 59) 《레베데프 비망록》(1948.3.12),《釜山日報》1995년 3월3일자. 60) 《朝鮮勞動黨大會資料集(Ⅰ)》, 國土統一院, 1980, p.262.
6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274~278 ; 宋南憲, 앞의 책, p.541. 62) 〈金日成·金枓奉이 金九·金奎植에게 보낸 서신〉, 《白凡金九全集(8)》, pp.727~729. 63) 《레베데프 비망록》(1948.3.10),《釜山日報》1995년 3월3일자.
초조한 이승만은 시인 모윤숙(毛允淑)을 시켜 유엔소총회(小總會)에 참석하는 유엔대표단의 메논(K. P. S. Menon) 의장을 밤중에 이화장으로 초치하여 설득했다.
2월 19일에 개회된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한국의 정치정세를 설명하면서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마술적 권위를 가졌다”라고 소개했다.
유엔소총회는 2월 26일에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했다.
김구는 3월 12일과 15일에 미군정법정(美軍政法廷)의 장덕수 암살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검사로부터 피의자심문과 같은 심문을 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2월 16일에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북한은 3월 25일에야 평양방송을 통하여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남한의 17개 정당 및 사회단체를 초청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김구와 김규식의 지도자회담에 대해서는 3월 29일에 별도의 회신을 인편으로 보내 왔다.
1. 金九와 金奎植의 남북지도자회담 제의 편지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세 사람이 중국 총영사 유어만(劉馭萬)의 주선으로 중국공사관에서 오찬 회동을 가졌던 1948년 2월 10일에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유엔대표단에 미소 양군의 동시철수와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한 자신의 의견서를 모멸적인 언사로 비판한 한국민주당 그룹을 질타하는 것이었다.
“美군정의 卵翼하에서 육성된 그들”
김구는 유엔위원단의 축출을 주장하는 좌익정파들과는 달리 이 시점에서도 유엔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는, 내정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서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남북통일의 완전 자주독립정부를 수립할 것과 미소 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의 보이콧으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나,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加强)하여서 세계평화 수립을 순리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업적을 한국독립운동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민족간에 영원한 은의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도 미군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여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만들어 유엔위원단을 당혹케 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것은 한민당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김구는 한민당을 지난날의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존재라고 다음과 같이 매도했다.
“미군정의 난익〔卵翼: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소중히 기른다는 뜻〕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 매족의 일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 설령 유엔위원단이 금일의 군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독립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寃情: 원망하는 심정〕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다. 유엔위원단 제공은 한인과 영원히 풀지 못할 원한을 맺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
蔣介石의 警句 “不變으로 應萬變” 인용하며
김구는 자기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불변(不變)으로 응만변(應萬變)”이라는 말대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불변의 원칙으로 순식간에 만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또는 극복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시점은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동으로 좌익단체들이 2월 7일을 기하여 일제히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시작한 때였다. 폭동 사태는 경인 지역 일대를 비롯하여 거의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남로당은 ‘투쟁’이 시작된 지 사흘 만에 파업투쟁에 8만 471명, 집회, 봉화, 쌀투쟁 등 군중투쟁에 134만 3,289명이 참가하고, 사망자 57명, 중경상자 146명, 피검자 1만 854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1)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생산기관은 마비되고 교통과 운송은 혼란에 빠졌다. 일부지역에서는 경찰서와 지서가 습격을 받았고 경관이 살해되었다. 2·7폭동은 1946년의 10·1폭동과는 달리 남로당에 의하여 사전에 계획된 폭력투쟁이었고, 그것을 분기점으로 공산당의 전술이 무장투쟁 전술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
대규모의 조직적 폭력사태가 시작됨에 따라 경무부장 조병옥, 검찰총장 이인(李仁),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이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담화를 연달아 발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의 성명서는 폭력투쟁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
암살과 파괴와 파공〔파업〕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造出)할 것뿐이다. 악착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
김구는 다음과 같은 감상적인 문장으로 비장한 “읍고”를 끝맺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삼팔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동포 자매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 눌러 막음〕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深思)하라.”3)
이 글은 김구의 심경을 가장 잘 아는 중국시대부터의 오랜 측근인 엄항섭이 기초한 것이었다.
유엔한국위원단은 小총회 보고 문제로 티격태격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유엔소총회〔유엔임시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와 위원단 운영 문제를 둘러싸고 메논(K. P. S. Menon) 의장과 호세택(胡世澤) 사무총장이 레이크석세스로 떠나기 전날까지 티격태격했다. 2월 11일에 열린 제12차 전체회의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이 2월 6일에 공동으로 제출한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한 비망록도 토의되었으나, 그것은 비공식 토의로 처리했다.4)
이날의 회의에서는 유엔소총회에 회부하여 소총회의 결정을 요구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1)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 결의 조건하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에 관한 제반 사태의 추이에 비추어 볼 때에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부분의 한국 영토에서 결의 (2)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은 계획을 완수한다는 것은 위원단의 자의에 맡겨져 있는 것인지 또는 의무로 되어 있는지의 여부.
(2) 만일 그렇지 않다면,
a. 1947년 11월 14일의 결의 (1)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국문제를 고려할 때에 자유분위기 아래서 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위원단으로서는 한국대의원 선거를 감시할 것인가.
b. 위원단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능하고 건의할 만하다고 판단되는 그 밖의 방법들을 생각해 볼 것인가.5)
그 밖의 방법들이란 남북지도자회담을 뜻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2월 13일에 열린 제14차 전체회의는 캐나다 대표 패터슨(G. S. Patterson)의 제의에 따라 유엔소총회가 유엔위원단에 대해 남한에서 총선거를 추진하도록 지시하는 경우 그 선거는 유엔총회가 협의대상으로 초청할 대표들을 선출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등 세 가지 사항의 결의 문제를 두고 토의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6) 결국 모든 것은 메논 의장에게 맡겨졌다. 메논은 토요일인 이튿날 오전에 김포공항을 출발할 예정이었다.
모윤숙이 밤중에 메논과 梨花莊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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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한국위원단의 메논(K. P. S. Menon) 의장과 이승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시인 모윤숙(가운데). 1948년 12월의 파리유엔총회에 정부대표로 조병옥(왼쪽), 장면(오른쪽) 등과 같이 참석했다. |
밤이 꽤 깊어갈 시간에 이승만은 모윤숙(毛允淑)에게 전화를 걸어 메논을 이화장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동안 메논과 모윤숙은 퍽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모윤숙은 이승만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그의 주장이 옳은 노선이라고 확신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돕고 있었다. 그러한 모윤숙이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막무가내였다.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있나. 전화 좀 걸어 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이승만의 이처럼 간곡한 목소리를 모윤숙은 처음 들었다. 핑계가 문제였다. 모윤숙은 며칠 전에 메논과 인도의 타지마할(Taj Mahal) 이야기를 나누었던 생각이 났다. 메논은 타지마할은 밤에 보아야 그 낭만에 취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모윤숙은 메논에게 전화를 걸어 금곡릉〔金谷陵: 양주군 금곡리에 있는 홍릉과 유릉의 통칭〕에 가자고 했다. 동대문쪽으로 차를 몰아 인삼차나 한잔 마시고 가자면서 이화장 앞마당으로 안내했다. 메논은 차에서 내리면서 성난 목소리로 “노티 걸(장난꾸러기)!”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가운을 걸치고 마당으로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인삼차를 권하면서 이 밤중에 찾아 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메논은 “미스 모가 금곡릉 달구경을 가자고 해서 나왔습니다. 여기가 목적이 아닙니다”하며 계면쩍게 웃었다.
모윤숙을 부엌으로 데리고 간 프란체스카는 한지에 붓으로 쓴 저명인사급의 서명과 도장이 찍힌 두루마리를 쥐여 주었다.7)
그 두루마리는 유엔위원단에 제출하는 이승만의 의견서였다. 한국위원단은 지도급 인사들에게 200명 이상의 연기명과 날인을 받아서 의견서를 제출하게 통지했었는데, 통지서를 받은 이기붕(李起鵬) 비서가 그 통지서를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잊고 있었기 때문에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의 의견서가 제출되지 않자 메논은 윤치영(尹致暎)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쪽은 다 제출했는데 이 박사쪽만 내지 않았으니 포기하는 것이냐? 우리가 내일모레 유엔으로 떠나는데 어떻게 된 거냐?” 하고 물었다. 윤치영은 부랴부랴 성명과 날인을 받느라 하루낮 하루밤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급한 나머지 이름을 대신 쓰고 도장도 급히 새겨 찍기도 했다.8)
1주일 동안에 열번도 더 전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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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소총회에서 한국정세를 보고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의 메논 의장. 오른쪽은 리(Jrygve Lie) 유엔 사무총장, 왼쪽은 한국위원단 사무총장 호세택(胡世澤). |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금곡릉이 목적이 아니라 이 두루마리가 목적입니다. 이 박사를 이해해 주시고 좀 비사무적으로 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비공식 사무를 이 박사는 왜 미스 모에게 시킬까요? 그는 포기한 줄 알았소.”
메논의 목소리는 잔인하리만큼 냉엄했다.9)
신문에는 이 의견서가 이날 오후 2시부터 이화장에서 열린 정례 정치애국단체대표 연락간담회에서 토의된 것으로서, 이승만은 이날 저녁에 측근을 국제 호텔로 보내어 출발 준비에 바쁜 메논에게 급히 전했다고 보도되었다.10)
이승만은 메논이 레이크석세스로 떠난 뒤에 더 초조해졌다. 그는 날마다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메논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전보를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보문은 이승만자신이 타이프로 치고 모윤숙에게는 ‘매리언 모(Marion Moh)’라는 사인만 하게 했다. 매리언은 모윤숙의 세례명이었다. 메논이 레이크석세스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이승만이 그에게 친 전보가 열 통이 넘었다. 메논은 전보를 받을 때마다 회현동 모윤숙의 집으로 답전을 쳤다.11)
유엔소총회는 2월 19일에 개최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은 개회벽두에 한국정세에 대한 보고연설을 했다. 메논은 먼저 유엔한국위원단의 결정을 설명하고 다음의 네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는 유엔총회결의 (2)항을 남한에서만 추진하는 것. 곧 남한에 국한될 선거를 감시하여 한국국민정부로서 승인을 얻도록 남한에서 정부수립을 쉽게 하는 것.
둘째는 유엔총회결의 (1)항에 기술된 제한된 목적을 위하여, 곧 협의대상이 될 국민의 대표를 선출할 선거를 감시하는 것.
셋째는 남북한의 지도자회담과 같은 한국의 민족적 독립을 확립할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며 또 최소한도로 그것을 주의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대안은 현상태에서 유엔위원단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하고 위원단에게 위임된 사항을 총회에 반납하는 것.
그러나 이 네 번째 대안은 유엔위원단이 만장일치로 폐기했다고 보고했다.12)
이승만 박사는 네루와 같은 국민지도자
메논의 한국정치상황 분석에는 군데군데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다. 맥아더 치하의 일본국민과 하지 치하의 한국국민을 비교한 것도 그 한 가지 보기이다. 일본국민들로부터는 군사점령에 대한 기계적이고 단조롭고 징그럽다고도 할 만한 인종(忍從)을 느낄 수 있는 데 비하여 한국국민들에게는 불안하고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반항이 있다면서 “하지를 공격하는 것은 한국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일본국민들의 맥아더 숭배보다도 더 건전한 민주주의의 표식이라고 느낀다”라고 그는 말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승만에 대하여 언급한 대목이었다. 그는 남한의 대표적인 정당들로 우익의 3개정당(독촉국민회,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중간파(민족자주연맹), 좌익 4개당(남조선로동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의 존재를 설명하고 나서 이승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에서 말한 정당 가운데 유엔에 의하여 한국의 국민정부로서 승인될 정부를 남한에서 즉시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정당은 두 개였다. 그것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독촉국민회와 김성수씨가 영도하는 한국민주당이다. 이 점에 관하여 그들이 남한인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가의 여부를 확실성 있게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들이 남한에서 조직된 여론의 주요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정당은 하나의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재산이라는 것은 곧 이승만 박사의 성가이다.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그의 연륜과 학식과 사교적 매력과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과 한국의 자유에 대한 생애를 통한 일관된 옹호로 말미암아 판디트 자와할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이미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38선이 조악하게 표징하는 좌우대립이 돌연히 한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극우로 알려져 왔다. 이 박사는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옹호하거나 또는 고려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이다. …”13)
유엔소총회는 메논의 연설에 이어 각국대표들의 입장표명이 있은 다음 4일 동안의 휴회에 들어갔다.
메논의 연설문은 도하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 그리하여 하릴없는 한국민중으로 하여금 메논이 제시한 네 가지 대안을 놓고 또다시 인성만성하게 했다. 국토의 분단을 우려하는 소박한 국민감정으로는 남한만의 총선거보다 남북회담에 더 큰 기대를 갖게 마련이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2월 21일, 22일 이틀 동안 조선여론조사협회가 실시한 메논이 제시한 네 가지 대안에 대한 지지도 조사였다. 조사결과는 단정 단선 11.5%, 단선 5.0%, 남북회담 71.8%, 유엔위원단 철수 12.5%로 나타났다.14)
히지가 三領袖 초청하여 공동메시지 보내라고
메논이 유엔소총회에서 한국문제 보고연설을 한 직후인 2월 19일 저녁에 하지 장군은 경무대 관저로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세 사람을 초청했다. 회담은 저녁 8시부터 10시 반까지 세 시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하지의 보좌관이자 통역관인 이묘묵(李卯默)이 김구의 통역으로 배석했다.
하지는 자기가 왜 세 사람을 애국자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미소공동위원회 때의 일과 유엔위원단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 이상을 혼자서 말을 계속했다. 유엔위원단 멤버들은 그들이 만나 본 사람들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두 사람도 없을 정도로 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는 인상을 가지고 떠나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몇 시냐고 물었다. 9시5분이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결론을 말하라고 했다.
“아, 예, 제가 명백히 하고 싶은 요점은 여러분 애국자들이 어떤 문제에 합의를 보아야 하고 유엔소총회에 공동메시지를 보내야 하겠는데, 내용은 우리 모두가 지금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할 것에 합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는 세 사람이 남한의 총선거 문제에 의견을 달리한다고 유엔위원단이 생각한다면 선거 기회를 잃을 공산이 크므로, 세 사람이 함께 서명한 전보를 유엔소총회에 보내기 바란다면서 전문초안을 꺼내 보였다.
하지의 이러한 제의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은 달랐다. 이승만은 적어도 메논과 호세택이 그러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2월 10일에 우리 모두는 그들에게 한국지도자들이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중요 국가문제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납득시켜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는 그 이야기는 자기도 들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그들이 남한의 총선거를 건의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는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이승만과 김규식이 논쟁 벌여
그러나 김규식은 “우리는 그날 저녁에 아무것도 합의한 것이 없다”고 이승만의 말을 부인했다. 그는 김구와 자기는 남북지도자회담을 열기로 노력하는 동안은 선거를 밀어 두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모인 사람은 당신과 나뿐만 아니라 메논, 호세택, 잭슨(S. H. Jackson), 그리고 유어만 영사도 있었소. 이들이 모두 거기 있었고, 이들이 우리가 다 총선거와 남북연석회의 계획에 합의했다고 우리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논평하지 않았소?”
김구는 자기는 선거 실시에 반대하지 않으나, 자기와 김규식은 남북회담을 시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성사가 되더라도 실패한다면 자기들이 공개적으로 남한의 선거를 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우리가 남과 북의 통일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를 알아볼 모든 수단을 써 보지도 않고 남한의 총선거를 지지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라의 분단을 영구화시킨 반역자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이승만과 김규식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말했다.
“당신들이 염려할 필요는 없소이다. 나 혼자서 책임을 질 것이고, 아무도 당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이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첫째로 이 정부가 유엔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 둘째로 미국으로부터 우리를 도울 원조를 얼마나 받겠는지,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는 여기에 뛰어들 수 없습니다.”
“여보시오, 우사(尤史)! 우리 한국인들이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면서 어떻게 외국국민들에게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물을 수 있겠소? 우리가 정부를 세우면 승인해 주겠느냐고 그들에게 미리 물어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부수립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 유엔에 승인을 요구해야 해요.”
하지가 김규식에게 물었다.
“당신이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한다면 당신의 해결책은 무엇이지요?”
김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묘묵은 모든 대화내용을 김구에게 통역해 주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사실 밝히는 것이 지도자인 나의 의무”
이승만이 하지를 보고 말했다.
“하지 장군, 장군 말대로 유엔위원단이 소총회에 지금 선거를 실시하도록 권고하기는 어려울는지 모르겠어요. 한국 국민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들을 국민들에게 밝히는 것은 나의 의무입니다. 오늘 저녁에 장군이 말한 대로, 이 양반들이 지지를 거부하기 때문에 유엔위원단이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이오. 만일 소총회도 세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 거듭 말하지만 세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들이란 말이오 ― 선거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이럴 경우에 한국국민들 앞에서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불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승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 두 양반들, 특히 김구씨에게 같이 선거에 참여하자고 갖은 방법으로 설득해 보았으나 실패했소이다.”
그러면서 하지를 보고 덧붙였다.
“장군의 영향력은 성공할지 모르지요. 장군은 나의 입장을 잘 아십니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지요. 이 두 양반을 장군에게 맡깁니다. 성공하기 바랍니다.”15)
세 사람이 공동명의로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유엔소총회에 보내라는 하지의 요청을 김구와 김규식이 거절한 것은 두 사람이 공동명의로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이날의 회합에서 그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이튿날 하지의 정치고문 대리 랭던(William R. Langdon)은 이날 밤의 회담에 대하여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전문에서 “하지 장군은 세 시간의 시간만 낭비했다”면서 김구와 김규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두 사람은 남한의 선거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성명은 자신들이 남한을 북한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을 조장하는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이기 때문에 발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은 이미 단절되어 있고 머지않아 방어능력이 없는 남한으로 침투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소총회가 유엔한국위원단에게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 지시한다면 두 사람은 그것을 지지하고 참여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했다.”16)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 보내
김구와 김규식은 2월 16일에 공동명의로 김일성과 김두봉 두 사람 앞으로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는 김규식과 가까운 민족자주연맹의 상무집행위원인 신기언(申基彦)이 기초하고, 김두봉에게 보내는 편지는 엄항섭이 사신 형식으로 기초했다.17)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는 보존되어 있지 않는데, 뒤에 두 사람이 신문에 발표한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1) 우리 민족의 영원 분열과 완전 독립을 판가름하는 최후의 순간에 민족 국가를 위하여 4,50년간 분주치력(奔走致力)한 애국적 양심은 수수방관을 허하지 않는다.
(2)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3) 남북정치지도자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
(4) 북쪽 여러 지도자들도 가질 줄 믿는 데서 우선 남쪽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찬성하는 애국정당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18)
김두봉에게 보낸 김구의 편지는 먼저 우리에게 해방을 준 미소 양국의 은혜는 감사하나 양국 자체간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암담한 면도 없지 않다고 전제한 다음, “인형이여, 이것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弟)는 가슴이 답답하고 인형이 보고싶은 때마다 때묻은 보따리를 헤치고 일찍이 중경(重慶)에서 받았던 혜찰을 재삼 읽고 있습니다”라는 감상적인 문투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엿새 전에 발표한 성명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과 비슷한 문투였다.
김구는 2차 대전 말기에 임시정부 주석의 입장에서 연안(延安)에 있는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상기시킨 다음, “우리 자신이 지리멸렬하여” 유엔위원단의 공작도 효과를 거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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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가 김두봉에게 보낸 1948년 2월 16일자 편지 사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8선 이남 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쪽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아니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합석하는 것을 희망하지도 아니하지마는 기실은 절망하고 이것을 선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流離?乞: 돌아다니며 동냥질함〕하는 꼴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그러므로 우리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면서, 남북지도자회담을 열어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인형이여, 우리가 불사(不似)하지만 애국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동포의 사활과 조국의 위기와 세계의 안위가 이 순간에 달렸거늘,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책임으로서 편안히 앉아서 희망 없는 외력에 의한 해결만 꿈꾸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사(尤史) 인형과 제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지도자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주창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양인의 연서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나 남북에 있는 진정한 애국자의 힘이 큰 것이니, 인동차심(人同此心)이며 심동차리(心同此理)인지라 반드시 성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더구나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리가 있겠나이까. …”19)
위의 두 편지에서 보듯이 이때에 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한 것은 북쪽의 두 김과 남쪽의 두 김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정치지도자들 사이의 정치협상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남북한에서 각각 애국정당대표회의를 소집하여 협상대표를 선출할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2. 유엔小總會의 ‘可能지역선거’결의
유엔소총회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동안 한국의 정국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빨리 실시하자는 주장과 남북지도자회담이 우선이라는 주장이 맞서 격렬한 논란을 벌였다. 논란은 과도입법의원에서부터 빚어졌다. 2월 19일에 신익희(申翼熙), 김도연(金度演), 김법린(金法麟), 백관수(白寬洙) 등 의원 43명의 연서로 “유엔위원단은 우선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 실시를 감시하고 법적 자주독립 통일정부 수립을 협조할 귀 위원단의 신속한 임무완수를 간청함”이라는 긴급동의안이 제출되어 논란이 벌어졌고,20) 이튿날 회의는 의장 김규식이 비공식 회의로 할 것을 선포하고 비공개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 긴급동의안은 김규식 의장과 최동오(崔東旿) 부의장, 그리고 김규식을 지지하는 관선의원 23명이 일제히 퇴장하는 등의 소동 끝에 2월 23일의 회의에서 백관수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표결을 실시하여 40대 0으로 가결했다.21) 그리하여 김규식과 최동오는 2월 27일에 사임서를 제출했고, 이에 맞서 한민당 그룹은 두 사람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22)
“미국독립도 한마음 한뜻으로 된 것 아니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 이승만은 2월 23일에 반대파들은 제외하고라도 남한 총선거를 서둘러야 한다는 단호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메논의 연설문을 읽고, 그리고 입법의원의 동향 등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다.
“지금 더욱이 미국정부에서는 공개로 남한총선거를 실행하여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절대 주장하며, 세계공론이 다 이 방면으로 동성향응(同聲響應)하는 중이요, 하지 중장 또한 절대 지지하는 터이다. 우리 삼천만 애국동포여, 한길로 함께 나가자! 무슨 장애가 있든지 밀고 나가야 될 것이다. 이말 저말 듣고 아무 것도 못하고 앉았다가 마침내 다 공산화하고 말 것이니, 천인만인이 다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순조로이 독립하려면 우리는 독립할 날이 없을 것이다. 죽었던 나라를 한편에서라도 살려 놓아야 전체를 살릴 희망이 있을 것이다. 일백칠십년 전에 미국이 독립할 적에 전민족이 다 한마음 한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아비와 형은 영국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그 자제들은 미국이 독립해야 한다 해서 부자간과 형제간에 전쟁하여 가지고 된 것이다. 우리 충애동포만 다 희생적 정신으로 나서면 대내대외의 여간 장애가 있어도 다 빙소(氷消)될 것이다. 3월 1일까지 기다리는 동시에 우리는 각각 마음으로 준비하고 조직으로 준비해서 퇴축(退縮) 없이 성공하기만 기대하고 나가자!”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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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2월 27일의 유엔소총회 결의를 보도한 《경향신문》 지면. |
“머리보다 심장을 우선시킨 유일한 예외”
2월 24일에 속개된 유엔소총회에서 미국대표 제섭(Philip C. Jessup)은 메논이 제시한 첫째 대안, 곧 남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감시하여 한국정부로 승인을 얻도록 하는 결의안을 제안했다. 미국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나라는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인도였다. 인도의 입장이 달라진 것은 미국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아울러 이승만의 메논 설득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월 26일에 실시된 투표에서는 다음과 같은 미국의 결의안이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되었다.
“소총회의 의견으로는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결의 제조항에 따라,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에 관한 정세 추이에 비추어 보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지역에서 결의문 (2)항에 약술된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 동위원단에 부하된 의무임을 결의한다.”24)
이러한 유엔소총회 결의 뉴스를 접하고 이승만이, 그리고 모윤숙도 얼마나 기뻐했을까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메논은 뒷날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상적인 기술을 남겼다.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한 데에는 하나의 감상적인 까닭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람들은 아주 우호적이어서 우리는 많은 친구를 얻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친밀했던 사람은 한국의 지도적 여류시인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 그녀와 나는 정치적인 견해 차이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슬픔과 즐거움 같은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며 많은 신성한 시간을 보냈다. …
매리언은 시인일 뿐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퍽 단순했다. 그녀에게 남한은 한국을 의미했다. 북한은 아데나워에게 동독이 그렇듯이 하나의 궤도일탈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선거였고 이에 반대하는 투표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매리언은 온 희망을 내게 걸었다. 그녀는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고까지 칭송하는 몇 편의 시까지 썼다. 만약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가 미국 결의안에 부표를 던졌더라면 그녀는 가슴이 터지는 비통에 빠졌을 것이고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에 그녀를 대할 낯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태가 그대로 진행되게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임무를 수행하는 데 머리보다 심장을 우선시킨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내 자신을 위로했다. …”25)
메논은 3월 6일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인도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3월 19일에 귀국했다.26)
“小總會가 일개 소련의 태도도 시정하지 못하고 …”
유엔소총회의 결의는 좌우익 정파들을 모두 긴장시켰다. 이승만과 김구와 김규식도 긴장했다. 그 긴장의 성격은 각자의 담화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총회에서 한국총선거에 대하여 31대 2표로 가결한 것은 유엔대표단의 노력과 특별히 미국무성에서 정당한 주장으로 우리의 기대한 바를 달성케 된 것이다. 우리가 당초에 민족자결주의를 발휘하여 총선거를 진행하였더라면 벌써 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인데, 우리가 아니하고 있다가 이와 같이 연장이 된 것은 유감이나, 지금은 유엔의 협조와 미국의 후원으로 모든 장애가 해소되고 우리 앞길이 순조로이 열리게 되어, 지금부터는 우리 전민족이 주저 말고 일심 합력하여 모범적 선거를 진행해서 국권을 확립하고 앞으로 조국통일책을 여러 우방의 원조로 속히 해결되기를 바란다.”27)
유엔의 권능에 큰 기대를 하고 있던 김구는 소총회의 결의가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는 소련의 태도부터 나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유엔에서의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민주주의를 무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거니와, 유엔소총회가 일개 소련의 태도도 시정하지 못하고서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의 결정에 위반되는 남한에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파산을 세계적으로 선고함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내외정국을 막론하고 정의와 평화를 애호함에서 유엔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절대다수의 인사는 너무나 실망을 가질 것이다. …”
김구는 이어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나는 이로부터 세계가 다시 혼란으로 들어갈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역사의 바퀴는 앞으로 구르고 인류는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는 오직 정의에만 있는 것이다. 나는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절대다수의 애국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만 계속하겠다. 이것을 위하여서는 분골쇄신(粉骨碎身)도 부탕도화〔赴湯蹈火: 끓는 물이나 뜨거운 불도 밟고 간다는 뜻〕도 마다하지 아니하겠다.”28)
김구가 말한 북한의 ‘인민공화국’이란 북한당국이 2월 11일에 발표한 북한의 헌법초안과 관련된 보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2월 18일자 도하신문들은 일제히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서울발 AP 및 UP 통신 기사를 받아 크게 보도했는데, 그것은 미군사령부의 한 고위관리의 부정확한 설명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은 2월 6일에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를 열고 조선임시헌법 기초위원회가 소련의 1936년 헌법을 본떠서 기초한 전문 10장 102조의 헌법초안을 채택했는데,29) 그것이 2월 8일의 조선인민군 창설 뉴스와 함께 북한의 정권 수립으로 알려진 것이었다.30)
남한선거에 반대 않으나 선거에는 不參한다고
이 북한의 헌법초안은 서울의 신문에도 보도되었고,31) 남로당은 ‘2·7구국투쟁’과 병행하여 북한 헌법초안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벌였다.32)
또한 가뜩이나 과도입법의원 사태로 상심하고 있는 김규식은 앞으로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남조선총선거를 위한 유엔소총회 결의에 대하여는 남조선에 있는 조선사람도 우리의 자율적 역량이 발휘되지 못했으니까 반대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 반대할려도 반대할 도리도 없다. 나 개인으로서는 과도입법의원의 일만 끝나면 남북의 통일한 총선거라 할지라도 참가할 생각이 없으니까 남조선 선거에는 물론 불참하겠다. 그러나 남조선 선거에 반대하지는 않겠고, 이 앞으로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불참하겠다.”33)
한편 한민당 중심의 한국독립수립대책협의회(한협)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세계열강이 얼마나 조선독립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 방법이 아니고는 남북통일의 묘안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본회는 180여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하여 유엔제우호국에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국민 여러분에게 국제정국의 진실한 인식을 함으로써 우리 독립을 조속히 실현시키도록 권하는 바이다.”34)
李靑天은 李承晩과 장시간 요담 나누어
유엔소총회의 결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새로운 국제권력정치의 전개에 일희일비하던 한국의 정국에 또다시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독촉국민회를 비롯하여 조기총선을 주장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은 2월 27일 오후에 이화장에 모여 유엔소총회 결의에 대한 축하국민대회를 개최할 것과 재남이북동포 특별선거구를 설정하도록 김성수, 신익희, 박순권 세 사람이 이북단체연합회와 제휴하도록 교섭할 것 등 총선거 대비책을 토의했다.35) 같은 시간에 임시정부 그룹의 국민의회는 긴급상무위원회를 열어 유엔소총회 결의에 반대하는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국민의회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방법 등 시국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2월 29일 하오에 긴급 상무, 국무, 정무, 법무 4개 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36)
그런가 하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은 2월 27일 오전에 긴급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토론한 결과 이청천(李靑天) 단장 이하 전원이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지지하기로 하고, 이튿날 이청천이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여 남한총선거에 대하여 장시간 요담했다.37)
한편 민족자주연맹은 2월 28일 오후에 긴급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유엔소총회 결의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모든 정치활동에는 불참하고 새로운 국면에 대처하는 국민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신중히 고려중이라고 천명했다.38)
“初代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를 추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열상황은 3·1절 경축행사에서도 나타났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서울시 주최의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에는 10만을 헤아리는 군중이 운집했고, 하지 사령관과 딘 군정장관도 참석했는데, 김구와 김규식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는 경교장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김구는 기념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나는 귀국 후에 지방을 시찰할 때에 지방민중에게 말하기를 나는 정권이나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 조선이 독립되면 나는 농촌에 들어가서 농군이 되기를 원하며, 초대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할 것을 늘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조선문제가 급전환된 이때에 모모 인사들이 나한테 이 박사와 제휴하고 나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민생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므로 행동을 같이할 수 없으며, 남조선선거에 응할 수 없다.”39)
이튿날 열린 한독당 상임위원회는 남북요인회담 추진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추진위원으로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엄항섭, 김의한(金毅漢), 백홍균(白泓均), 조경한(趙擎韓) 6명을 선정했다.40)
이날 서울운동장에서는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에 이어 중앙정부수립결정안 축하국민대회가 열렸는데, 이승만은 이 자리를 이용하여 선거일정을 비롯한 선거 후의 정부수립, 국방군 창설, 유엔 가입 등에 대한 소견을 피력했다. 그는 또 ‘2·7구국투쟁’에 열중하고 있는 좌익들에게 한마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공산주의자에게 회개하라고 부탁하려고 한다. 파괴의 시대는 지나고 건설의 때가 이제 온 것이다. 건설시대에 파괴하는 것을 그만두고 건설에 협력하기를 바라고 빈다”라고 그는 말했다.41)
“남북지도자회의는 美제국주의가 案出한 것”
유엔소총회의 결의가 전해지자 좌익단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남로당중앙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등 좌익단체들은 일매지게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비판하면서 한국유엔위원단의 축출을 선동했다. 이들은 “조국사상 최대의 위기에 당면한 우리 민족은 오늘에야말로 총궐기하여 미제의 앞잡이 유엔위원단을 구축하고, 단선단정을 쳐부수고, 소미양군 철병을 실현하여 조국의 통일자유민주독립을 전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들의 발표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의 김일성과 김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내고 두 주일이나 지난 뒤인데도 “조선을 외국 제국주의자에게 팔아먹으려는 반동의 두목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그의 졸도 김성수 계열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남북요인회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회의의 제창자인 김구, 김규식의 주장하는 바가 ‘유엔위원단’의 알선 및 감시하에서(의) 회담을 요구하며 소미양군 철병 후 유엔으로 하여금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인데, 이는 유엔위원단 반대와 양군 동시철병 후에 남북통일정부를 조선인 자신에 의하여 수립하려는 인민의 투쟁이 날로 높아 가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인민의 구국투쟁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으므로 ‘통일’이니 ‘철병’이니 ‘정치범 석방’이니의 기만적 언사 밑에 유엔위원단에 대한 환상을 인민에게 퍼뜨리며, 한편에서는 양 김에 대한 연기를 집중하여 소위 중간파를 영도하여 민주진영을 견제 고립시키려는 것이며 타방에서는 분열과 단정의 책임을 소련과 남북 민주진영에다가 전가하여 결국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타협으로써 남조선 괴뢰 단정을 조작하려는 미제국주의 영도하에 그 국제 국내의 주구들을 구사하여 안출된 가장 교묘한 방법이다. …”42)
이러한 주장은 이때까지도 남한의 좌익단체들이 남북지도자회담과 관련하여 북한 당국으로부터 구체적인 협의를 받고 있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하지 장군은 3월 1일에 남한의 총선거를 5월 9일에 실시하겠다고 포고했는데,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개성, 의정부, 춘천, 주문진 등지의 수용소를 통하여 38선을 넘어오는 북한주민들의 수가 매일 800명 내지 1,000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다.43)
3. 金日成과 金枓奉의 모멸적인 回信
이승만은 총선거 준비를 서둘렀다. 3월 5일 오후에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열린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총선거에 대비한 민족대표단을 정식으로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대표단의 역할은 선거법, 선거일자, 선거집행 사무 등을 유엔위원단과 협의하는 것이었다. 대표단의 숫자는 3·1운동의 상징성이 있는 33명으로 구성하기로 하고 대표단 전형위원으로 명제세(明濟世), 김헌(金獻), 황현숙(黃賢淑), 백남훈(白南薰) 등 9명을 선출했다. 선출된 33명은 이승만을 비롯하여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 이윤영(李允榮), 김성수(金性洙), 김창숙(金昌淑), 서상천(徐相天), 신익희, 이청천, 박순천, 전진한(錢鎭漢), 이범석(李範奭), 변영태(卞榮泰), 김활란(金活蘭), 유진산(柳珍山), 이철승(李哲承) 등 우익 정당 및 사회단체대표들을 망라한 것이었다.44) 이승만은 김구를 민족대표단에 포함시키고자 했으나, 김구는 응하지 않았다.45) 이승만은 3월 10일에 유엔위원단에 대해 민족대표단의 성립을 알리면서 위원단의 제반업무를 민족대표단과 상의할 것을 요망하는 메시지를 보냈다.46) 그런데 유림의 대표인 김창숙이 3월 11일에 민족대표단에 참가한 일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부단장으로 발표된 이시영도 기자에게 대표단에 참가한 일도 없고 앞으로도 참가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47) 민족대표단 구성을 너무 서둔 나머지 사전에 충분한 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편지는 최후통첩이 아니다”
김구는 김일성과 김두봉의 회신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유엔소총회에 다녀온 메논과 호세택이 3월 13일에 경교장으로 찾아와 북한쪽의 회신이 4월 30일까지 없을 때에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어떠냐고 종용하자 “편지는 성의에서 보낸 것이지 최후통첩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회신 기간의 여부를 논할 것이 아니다”라면서 거절했다.48)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이던 유엔위원단은 3월 12일의 제22차 전체회의에서 표결을 실시하여 찬성 4(중국,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 반대 2(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기권 2(프랑스, 시리아)로 5월 9일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가결했다.49) 그런데 5월 9일은 일요일이었으므로 기독교계에서 반발이 있는 데다가 일식(日蝕)이 있을 예정이어서 하루 늦추어 5월 10일로 변경했다.
유엔소총회의 결의와 북한쪽의 무응답에 고뇌하고 있는 김구를 격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3월 2일부터 진행되고 있던 장덕수 암살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라는 미 군율재판소의 소환장을 3월 8일에 받은 것이다. 소환장은 거창하게도 “북미합중국 대통령이 김구씨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50)
이승만은 3월 8일에 김구의 장덕수 살해사건 관련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 주석이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기에 이르니 이것을 본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는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 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51)
美軍律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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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정법정에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으로 출두하여 심문을 받는 김구. |
“증인의 이름이 김구입니까?”
“그렇소.”
“증인의 직업은 독립운동가입니까?”
“내가 옳은 독립운동가였다면 오늘 이 법정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는 입장에 있겠소?”52)
이렇게 시작된 심문은 오전 오후에 걸쳐 네 시간 반이나 걸렸다. 검사나 재판관은 예의를 갖추어 묻기는 했으나 심문내용은 피의자 심문과 비슷했다. 검사는 김구가 장덕수를 가리켜 “죽일놈”이라고 말했다는 피고인들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모로 캐물었다. 또한 찾아간 피고인들을 김구가 격려해 말하기를 “그 정신은 좋지만 조심하라. 그러한 청년은 많으나 성사를 못하더라.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는 궐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도 물었다.53)
김구는 3월 15일에 열린 공판에 다시 소환되었다. 그는 심문 모두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답변을 거부했다.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했소. 도대체 나는 국제 예의를 존중해서 증인으로 나오라기에 여기 나와 앉은 바인데, 마치 나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셈이니 매우 불만하오. 내가 지도자는 못되더라도 일개 선비요. 나라를 사랑하는 나에 대해서 법정에서 이렇듯 죄인 취급을 하는 데는 나로서 이 이상 말할 것이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종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바로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장을 띄워 잡아 놓고 하시오. 내가 증인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
이렇게 흥분된 어조로 말하면서 김구가 일어서서 나오려는 것을 변호인쪽에서 만류했다. 검사가 다시 질문을 했으나 김구는 함구무언이었다. 이때에 피고인석에서 박광옥(朴光玉)이 일어나 “법정에 태극기를 달아라. ××× 먹으려면 깨끗이 먹으라!” 하고 고함을 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 이렇게 오전 공판이 끝나고 김구는 돌아왔다.54)
7巨頭 성명으로 용기 얻어
김구의 이러한 당당한 태도는 바로 3월 12일에 발표된 ‘7거두성명’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 김구는 임시정부 및 한독당 그룹을 중심으로 빈번한 회합을 가지면서 시국대책을 협의해 왔는데, 그 가운데에서 김구, 조소앙, 조완구, 조성환 네 사람과 이승만 진영에서 민족대표단에 포함시켰던 한독당 고문 김창숙, 그리고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과 홍명희(洪命憙)가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성명서는 먼저 한반도의 현정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남에서는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 하고 북에서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제정 발포한다 하여 남북이 분열 각립할 계획을 공공연하게 떠들게 되고 목하 정세는 실현 일보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일시 설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정부 또는 양국가를 형성케 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야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우리 민족의 참화가 이에서 더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적 이해를 불고하고 미국이나 소련의 정책으로만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데는 추수할 수 없는 것이다. …”
‘성명서’는 남한에 중앙정부를 먼저 수립하여 국제적 승인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빚어낼 뿐일 것이다. 우리 문제가 국제적 연관성을 무시하고 해결될 것은 아니로되 우리 민족적 견지는 불고(不顧)하고 미소의 견지를 추수하야 해결하려는 것은 본말과 주객이 전도된 부정당하고 부자연한 일이니, 부정당 부자연한 일은 영구 계속하는 법이 없다. 우리 문제를 미소공위도 해결 못하였고 국제연합도 해결 못할 모양이니, 이제는 우리 민족으로 자결하게 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
그러면서 이들은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선거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명했다.
“우리 몇 사람은 정치의 기변성(機變性), 운동의 굴신성(屈伸性), 기타 여러 가지 구실로 부득이한 채 현정세에 추수하는 것이 우리의 개인의 이익됨을 모르지 아니하나,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민족의 참화를 촉진하는 것은 민족적 양심이 허락지 아니하여,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가능한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통일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것을 동포앞에 굳게 맹세한다.”55)
‘7거두성명’에 이어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은 행동통일을 위한 협의체 구성을 추진했다. 3월 13일에 소집된 민족자주연맹의 정치위원회는 그 교섭위원으로 홍명희, 여운홍(呂運弘), 김붕준(金朋濬) 세 사람을 선정했다.56)
許哥而 등 소련派는 金奎植을 의심해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의 두 김에게 보낸 편지의 회신이 오기까지에는 40여일이 걸렸다. 북로당의 정보관계 고위당료〔당중앙위원회부부장〕였던 박병엽(朴炳燁)은 두 사람의 편지와 관련된 북한 당국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북로당은 2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 동안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와 관련된 문제와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2·7구국투쟁’ 결산문제를 의제로 열띤 토의를 벌였다. 핵심논점은 2월 4일에 열린 민족자주연맹의 정치위원 상무집행위원 연석회의의 남북요인회담 제의와 대북편지 발송 결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미군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 노블(Harold Noble)이 김규식의 사무실을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는 것을 감안할 때에 김규식이 오히려 남북협상의 움직임을 깨려는 미군정부의 공작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허가이(許哥而), 김열(金烈) 등 소련파는 김규식을 의심하면서 북로당의 정치노선을 파탄시키려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음모를 경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같이 활동했던 연안파의 김두봉과 최창익(崔昌益)은 미국의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김구와 김규식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과 김책(金策) 등 빨치산파는 연안파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지만 김구와 김규식의 애국적 행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주영하(朱寧河), 최경덕(崔璟德) 등 국내파는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북로당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사흘 동안이나 토론을 계속한 적이 없었다.
회의는 대남연락부장 임해(任海)를 서울로 급파하여 사정을 정확하게 알아오게 했다. 임해는 2월 22일 밤에 수행원 두 사람과 함께 평양을 출발했다가 23일 밤에 돌아왔다. 2월 24일, 25일 이틀 동안 다시 열린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는 임해의 보고를 통하여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가 미군정부의 공작에 의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추진하기로 했다.57)
天道敎靑友會의 3·1節 거사 계획
북한의 두 김의 회신이 늦어진 데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북조선 천도교청우당이 서울 천도교청우회의 최린(崔麟)의 지령으로 3·1절을 기하여 북한정권의 수립을 반대하는 이른바 ‘3·1재현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적발되어 2월 말에서 3월 초에 걸쳐 소련군과 북한지도부가 이 문제의 처리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군 사령부의 군정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의 《비망록》에 이 무렵의 일이 자세히 적혀 있다. 최린의 지시문을 가진 박현엽(朴炫燁), 유은덕(劉恩德) 두 여성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2월 15일이었다. ‘3·1재현운동’ 거사계획은 북조선청우당 위원장 김달현(金達鉉)의 신고로 3·1절 직전에 발각되어 지도자 19명을 포함한 172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던 남로당의 이론가 이강국(李康國)도 조사를 받았다.58)
회신이 늦어진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북정당 및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열기로 결정한 소련군과 김일성 그룹은 그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하면서 회의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회신을 늦춘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레베데프 비망록》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3월 12일자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김두봉이 김일성에게 또 전화해서 김구에게 확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답변―국가적 사업은 한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서두르는가?
…………………
김두봉―무엇 때문에 항상 그 사람을 욕하는가? 김구가 단독선거에 찬성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 빨리 만나야 한다. 김구는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김구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59)
“이제까지 별별 짓을 다 하던 金九의 태도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두봉이 3월 27일부터 나흘 동안 평양에서 열린 북로당 제2차 대회의 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북한권력 내부에서 그의 위상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제까지 별별짓을 다 하던 김구의 태도가 이제야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 방금 미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우게 되니 당황하여서 이제는 평양에 오겠다고까지 합니다. 김구가 이제라도 다소 깨닫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방심할 것은 아닙니다. …”60)
3월 20일과 24일의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북로당 특별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3월 25일 오전에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6차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4월 14일에 평양에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남한의 정당 및 단체들에 초청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평양방송은 이날 저녁 7시부터 매 시간대 뉴스시간에 북조선민전이 채택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대남제의서를 방송했다. 방송은 북로당, 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등 북한의 9개 정당 및 사회단체 명의로 남로당과 한독당을 비롯한 남한의 17개 정당 및 사회단체를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북쪽이 공식으로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북쪽은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면서도 김구와 김규식의 2월 16일자 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북로당 특별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내는 편지가 전해진 것은 이틀 뒤인 3월 27일이었다.61) 3월 15일자로 된 이 편지는 흰 인조견에 국한문의 타자로 치고 두 김의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金日成과 金枓奉이 40日만에 回信 보내와
북한의 두 김이 공동명의로 남한의 두 김에게 보낸 회신은 김두봉에게 보낸 김구의 편지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그리고 예의에 벗어나는 문투였다.
모두의 인사말도 없이 대뜸 “귀 서한 중에 제기된 문제에 관하여 회답코저 합니다” 하고 시작한 편지는 남북한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대비했다.
“조선이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이미 2년 반이 되었으나 우금 조선민족은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인민은 남북 조선의 판이한 정치 조건하에서 부동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북조선 인민들은 자기손으로서 자기운명을 결정하는 모든 창발성을 발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에는 모든 주권이 미국사람의 손에 있기 때문에 남조선 인민들과 당신들은 아무런 권리와 자유가 없이 정신상과 물질적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
편지는 그러한 상황이 빚어진 책임이 김구와 김규식의 해방이후의 행적에 있다고 대놓고 질책했다.
“당신들은 조국땅에 돌아온 후에 금일까지 민족입장에 튼튼히 서서 조선이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여 나갈 수 있는 정확한 강령과 진실한 투쟁을 문헌으로나 실천으로 뚜렷하게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거듭 파열시켰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미소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무관심한 태도로 묵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에 대한 유엔총회의 결정과 소위 유엔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당신들은 환영하였습니다.”
지도자회담 제의 수락하면서 일정 등 일방적 통보
편지는 두 사람이 제의한 남북지도자회담에 대해서도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제야 당신들은 청천백일하에서 조선국토의 양단, 조선민족의 분열을 책모하는 유엔조선위원단과 미군사령관의 정치 음모를 간파한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들의 애국적 항의는 미온적이고 당신들의 입장은 명백하지 못합니다. 민족자주독립이 위급에 봉착한 금일에 당신들은 또 무엇을 요망하고 애국적 항쟁을 실천에 옮기지 않습니까? …
이제 우리는 양위 선생이 제의하신 남북조선지도자연석회의의 소집을 본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어떤 조선을 위하여 투쟁하시려는지 그 목적과 기획을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석회의의 성과에 대하여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편지는 자신들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실시하려는 유엔의 결정을 반대하는 대책을 이미 세우고 그 투쟁방침을 토의하기 위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편지를 보냈다고 말하면서, 두 사람이 제의한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위의 지도자연석회의에 관하여서는 1948년 4월 초에 북조선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동의합니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이 연석회의에 참가하는 성원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제의합니다.
남조선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백남운, 김붕준, 김일청, 이극로, 박헌영, 허헌, 김원봉, 허성택, 유영준, 송을수, 김창준 등 15명과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달현, 박정애 이외 5명으로 예상합니다.
(1) 조선의 정치현세에 대한 의견교환.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반동선거 실시에 관한 유엔총회의 결정을 반대하며 투쟁할 대책 수립.
(3) 조선통일과 민주주의조선정부 수립에 관한 정책 연구 등등.
만일 양위 선생이 우리의 제의를 동의하신다면 1948년 3월 말일 내로 우리에게 통지하여 주실 것을 바랍니다.”62)
그것은 지극히 모멸스러운 일방적인 통고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소련의 한반도정책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63)⊙
1) 《노력인민》1948년 3월26일자, <「國聯朝鮮委員團」 抗議救國鬪爭三日間統計表>. 2) 김남식,《南勞黨硏究》, 돌베개, 1984, pp.303~308. 3) 《朝鮮日報》1948년 2월11일자, <統一의 最後機會, 派爭中止코 團結하라>. 4) 國史編纂委員會,《大韓民國史資料集(1) UN韓國臨時委員團關係文書(Ⅰ)》1987, 國史編纂委員會, p.16.
5) 國會圖書館立法調査局,《1948年度國際聯合韓國臨時委員團報告書(第一部 第一卷)》, 1965, 國會圖書館, p.63. 6) 《大韓民國史資料集(1) UN韓國臨時委員團關係文書(Ⅰ)》, p.18. 7) 毛允淑,《回想의 窓가에서》, 河書出版社, 1980, pp.232~234. 8) 윤치영, <나의 이력서(56)>,《한국일보》1981년 9월26일자.
9) 毛允淑, 앞의 책, pp.233~234. 10) 《서울신문》1948년 2월15일자, <李博士, 메논氏에 새 意見書提出>. 11) 毛允淑, 앞의 책, pp.228~229. 12) Yoon Sook Mo ed., Speeches of Dr. Menon, Mun Hwa Dang, 1948, pp.33~38 ;《東亞日報》1948년 2월22일자, <小總會메논博士報告內容>.
13) Yoon Sook Mo, op. cit., p.38 ; 위와 같음. 14) 《우리신문》1948년 2월24일자, <메논氏報告와 거리의 輿論>.
15)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o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p.134~137. 16) Langdon to Marshall, Feb. 20, 1948,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8, vol.Ⅵ, United Stated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4, pp.1131~1122. 17) 宋南憲,《解放三年史(Ⅱ) 1945-1948》, 까치, 1985, pp.534~535. 18) 《朝鮮日報》1948년 4월1일자, <南北政治協商에 對한 往復書翰의 內容 金九, 金奎植兩氏要旨를 發表>.
19)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編, <金九·金奎植이 金枓奉에게 보낸 서신>(1948.2.16),《白凡金九全集(8)》, 대한매일신보사, 1999, pp.721~ 726. 20) 《過渡立法議院速記錄》제209호(1948.2.19) ;《東亞日報》1948년 2월21일자, <南朝鮮選擧實施案, 四十三議員緊急動議> ;《朝鮮日報》1948년 2월21일자, <單選協助要請動議로 立法議場은 辱說로 修羅場化>. 21) 《過渡立法議院速記錄》제210호(1948.2.23) ;《朝鮮日報》1948년 2월25일자, <立議의 南朝鮮選擧案激論테可決>. 22) 《過渡立法議院速記錄》제211호(1948.2.27) ;《東亞日報》1948년 2월29일자, <議長과 副議長不信任案內容>.
23) 《東亞日報》1948년 2월24일자, <三月一日內選擧決定 못되면 獨自的計?推進>. 24) 國會圖書館立法調査局,《1948年度國際聯合韓國臨時委員團報告書 第一部第一卷》, p.65. 25) K. P. S. Menon, Many Worlds Revisited, Bharatiya Vidya Bahavan, 1981, pp.258~259. 26) 《朝鮮日報》1948년 3월20일자, <朝鮮自主獨立을 確信, 메논氏와 胡博士, 盛大한 歡送裡에 昨日歸國>.
27) 《京鄕新聞》1948년 2월28일자, <快報나 도리어 晩時之歎>. 28) 《京鄕新聞》1948년 2월28일자, <統一에 繼續鬪爭>. 29) 김광운,《북한정치사연구Ⅰ》, 선인, 2003, pp.614~624 참조. 30) 《東亞日報》1948년 2월18일자, <蘇領導下傀儡政府, 人民共和國宣布> ;《朝鮮日報》1948년 2월18일자, <北朝鮮共和國宣布?>. 31) 《우리신문》1948년 2월24일자, <北朝鮮臨時憲法草案>. 32) 《노력인민》1948년 3월8일자, <全人民의 總意에 附合, 原案承認接受를 要請>. 33) 《京鄕新聞》1948년 2월28일자, <政界서 隱退決意>. 34) 《朝鮮日報》1948년 2월28일자, . 35) 《朝鮮日報》1948년 2월29일자, <李博士와 獨促以北人連絡工作>.
36) 《서울신문 》1948년 2월29일자, <小總會決議反對, 國議서 國民運動展開?>. 37) 《東亞日報》1948년 2월29일자, <李靑天將軍李博士訪問>. 38) 《朝鮮日報》1948년 2월29일자, <金博士隱退前進의 雙曲>. 39) 《서울신문》1948년 3월3일자, <李博士와 行動統一不能>. 40) 《朝鮮日報》1948년 3월4일자, <韓獨, 南北會談機關設置를 決議>. 41) 《朝鮮日報》1948년 3월2일자, <國防軍組織코 UN加入>. 42) 《노력인민》1948년 3월8일자, <國聯朝委追放에 突進하자>.
43) 《東亞日報》1948년 3월4일자, <봄따라 南下하는 同胞, 하로에 千名도 넘어>. 44) 《朝鮮日報》1948년 3월7일자, <民族代表團構成, 李博士以下?三名>. 45) 《서울신문》1948년 3월9일자, <民代團參加, 金九氏拒否>. 46) 《朝鮮日報》1948년 3월13일자, <朝鮮人의 意見, 選擧에 充分反映하라>. 47) 《서울신문》1948년 3월12일자, <李始榮金昌淑氏, 民代不參加表明>. 48) 《朝鮮日報》1948년 3월14일자, <金九氏메논議長勸告를 拒否>. 49) 《大韓民國史資料集(1) UN韓國臨時委員團關係文書(Ⅰ)》, pp.24~25. 50) 《朝鮮日報》1948년 3월9일자, <證人으로 金九氏召喚>. 51) 《朝鮮日報》1948년 3월9일자, <金主席關聯說은 미들수업다>. 52) 김용식,《새벽의 약속-김용식 외교 33년》, 김영사, 1993, p.24.
53) 《朝鮮日報》1948년 3월13일자, <金九氏證人으로 出廷>. 54) 《朝鮮日報》1948년 3월16일자, <“罪人取扱에는 不滿”>. 55) 《朝鮮日報》1948년 3월13일자, <民族自決推進>.
56) 《朝鮮日報》1948년 3월16일자, <選擧反對戰線>. 57) 박병엽 구술, 윤영구-정창현 엮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pp.263~268. 58) 《레베데프 비망록》(1948.3.6),《釜山日報》1995년 2월28일자 ; 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233. 59) 《레베데프 비망록》(1948.3.12),《釜山日報》1995년 3월3일자. 60) 《朝鮮勞動黨大會資料集(Ⅰ)》, 國土統一院, 1980, p.262.
6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274~278 ; 宋南憲, 앞의 책, p.541. 62) 〈金日成·金枓奉이 金九·金奎植에게 보낸 서신〉, 《白凡金九全集(8)》, pp.727~729. 63) 《레베데프 비망록》(1948.3.10),《釜山日報》1995년 3월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