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년 김태·안재후·황용엽·박근자·필주광 등과 미술동인 ‘앙가주망’ 결성
⊙ “너무 쉽게 물건을 버리면 인생도 그렇게 낭비되기 마련”
최경한
⊙ 70세.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 서울여대 교수·미술대학장 역임. 1961년 미술동인 ‘앙가주망’ 결성. 現 서울여대 명예교수.
장욱진기념사업모임 대표.
⊙ 수상: 제3회 이중섭미술상(1991년) 등.
원재훈
⊙ 50세.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공룡시대> 外 여러 편의 시로 등단.
⊙ “너무 쉽게 물건을 버리면 인생도 그렇게 낭비되기 마련”
최경한
⊙ 70세.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 서울여대 교수·미술대학장 역임. 1961년 미술동인 ‘앙가주망’ 결성. 現 서울여대 명예교수.
장욱진기념사업모임 대표.
⊙ 수상: 제3회 이중섭미술상(1991년) 등.
원재훈
⊙ 50세.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공룡시대> 外 여러 편의 시로 등단.
춘분(春分)이 지난 어느 날, 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사무실에서 만난 최경한(崔景漢) 선생은 아직도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선생의 미소를 보면서 근황을 물어보았다.
“요즘은 일주일에 두어 번 병원에 가서 투석 치료를 받아요, 치료과정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무척 번거로운 일입니다. 의사는 좀 더 받으라고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 허허. 그리고 여전히 그림 그리고, 사람 만나며 살고 있지. 가끔 학교에 나와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선생에게는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우선 두서없이 내가 좋아하는 이중섭(李仲燮) 화백과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그분의 생전에 서너 번 만났는데, 내가 그분을 보았을 때는 이미 정상인이 아니었어요. 좀 이상한 행동을 하시기도 하고, 거식증(据食症)이 있었던 것도 같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었어.”
그림에는 화가의 외로움과 고통이 스며들어 있다. 타인(他人)은 볼 수 없는 그런 예술가의 고독과 고통이 있다. 우리는 그 고독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최 선생은 이중섭 화백과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고 했다. 다만, 곁에서 지켜본 선생의 모습이 좀 안타까울 뿐이었다고 한다.
“부산 피란 시절에 이중섭 선생이 오산학교 선배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사람 좋은 선생이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뭐 줄 것이 없어, 담배 속 은박지에 그림을 하나 그려 선물로 주었대요. 그 유명한 담배종이 그림 중에 하나인 거죠. 그런데 그 그림을 받아 든 선배는 화가가 그림을 주려면 액자에 담은 유화(油畵) 작품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담배종이에 그린 이중섭의 ‘작품’을 받아 들고는 집에 가서 그것을 구겨 버렸다고 합니다. 담배종이에 그려 준 그림을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오해한 것이지, 허허. 그런 인심이지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담배 은박지에 새겨진 이중섭의 천진한 그림을 떠올렸다. 이렇게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 의해 얼마나 많은 좋은 것들이 사라졌을까 싶었다.
외조부 海觀 吳兢善
선생은 일제(日帝)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선생은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난 덕분에 별 고생을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외조부(外祖父)는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선생이다. 해관 선생은 구한말(舊韓末)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약했고, 이후 우리나라에 현대의술이 들어오던 초창기에는 의사로서, 나중에는 조선인 최초로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한 자선사업가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최경한 선생은 “외조부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의사가 된 분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자료를 살펴보니, 1914년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해관 선생의 의사면허는 70번이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새로 면허를 발급하는 과정에서 제1호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오긍선 선생에게는 돌아가신 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章)이 추증됐다. 최경한 선생에 의하면 해관 선생의 생활은 매우 단순하고 검소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충정로에서 외조부와 일 년 넘게 살았는데 …, 할아버지는 말씀을 별로 하지 않는 분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인 나와 물을 뿌리면서 놀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께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때, 배 안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는 조선인을 보았대요. 조선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장시간 항해와 열악한 환경으로 사람들이 피부병으로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하셨어요. 그 때문에 훗날 할아버지가 피부과를 전공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할아버지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순종(純宗) 황제가 황실 전의(典醫) 자리를 제안했으나 군산 야소병원 의사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황실 전의는 월급이 당시 화폐로 150원, 야소병원 의사의 월급은 50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이 해관 선생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白南準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선생은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최 선생은 세계적인 비디오 전위(前衛)예술가인 백남준(白南準) 선생과 경기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백남준 선생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동기생이었던 백남준은 복장이 어설펐지요. ‘헐렁이’처럼 하고 다녀서 일본말로 ‘다라시나 같다’고 놀렸어요. 하지만 그것이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한 백남준의 개성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그때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사회주의 사상이 돌았어요, 백남준 역시 좌익(左翼) 사상에 젖어 있었지. 백남준은 나와 같은 반이었는데,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적(理想的)인 사회주의 사상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어요.
그런데 백남준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일제에 비행기까지 헌납할 정도로 재력가였지요. 백남준의 부친은 아들의 그런 행동이 지극히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난데없이 좌익이라고 해서 친구들에게 얻어맞고 다닌다면 말이 안되는 것이었고,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요. 그래서 백남준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남준이 그때 외국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예술가가 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세월을 외국에서 지냈으니까 …. 여기에 있었다면 아마도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거나 삶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 시절에 외국에 있었으니까 자유스럽게 사고(思考)할 수 있었겠지요.”
최경한 선생은 “백남준은 ‘경기중학생’ 하면 떠오르는 그런 엘리트 학생이라기보다는 뭔가 어설프고 행동에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엄청난 부잣집 자식이면서 하나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어요.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활동하는 걸 보면서 어린 시절의 그런 모습은 자유로운 예술가의 모습, 천재의 한 단면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이 그를 연구하고 설명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시작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는 거지요. 창조자는 에피고넨하고는 다른 겁니다. 요즘에는 백남준보다 기술이나 감각이 뛰어난 예술가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창조자로서의 백남준은 없지요. 이것이 백남준을 설명하는 나의 방식입니다.”
해방
경기중학교에 입학을 하자 선생은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하나 이룬 셈’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쁜 소식을 평북 영변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하기 위해 1945년 3월 하순 경 선생은 만포선 열차에 올랐다. 영변은 남쪽과는 달리 3월에도 무척 추웠다.
“소월의 ‘영변, 약산 진달래’ 이런 시(詩)가 유명하지요. 거기를 가다 보면 청천강(淸川江)이 나오는데, 청천강의 푸른 강물이 생각납니다. 청천, 맑은 물이라는 뜻인데, 왜 강 이름을 이리 부르는지 그 앞에 서면 저절로 알게 되지요. 청천강 푸른 강물에 매서운 북풍(北風)이 몰아치니 장관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본 풍경이 이미 늙은 내 가슴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선생은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기 위해 경의선(京義線)을 탔다. 그때가 8월 중순 경이었다. 평양에 들어가니 이미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다. 서울엔 미군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이미 북한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적위대원(赤衛隊員)들이었다. 일종의 민간 방위조직인 적위대원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지주(地主) 등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잡아 린치를 가했다. 마을에서는 ‘어떤 집안에 누가 맞아 죽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木炭을 직접 구워서 그림 그려
은행일을 하던 선생의 아버지는 ‘북에서는 살 수 없고, 빨리 서울로 가야 된다’는 판단을 했다. 선생은 경성방송을 통해 모든 학교가 10월에 다시 개교를 한다는 뉴스를 듣고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의 가족은 우여곡절을 거쳐 아슬아슬하게 삼팔선을 넘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모든 것이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도 그러했다. 그림 재료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별 방법을 다 써서 그림을 그렸다.
“목탄(木炭)도 우리가 직접 구워서 썼어요. 깡통에다 진흙을 넣어서 버들가지 같은 나무조각을 넣은 후 촛불에 불을 댕겨서 나뭇가지를 구워 목탄을 만들었지요. 선생님들이 그 방법을 전수했어요. 물감이 없어서 유화는 그리기 힘들었어요. 고물상에 가서 일본인들이 버린 유화물감 박스 같은 걸 얻어서 그림을 그리곤 했지요. 그땐 고물상이 무척 많았어요. 전후(戰後)에는 폐품이 많았기 때문에 인사동에서부터 청계천에 이르기까지 고물상이 즐비했습니다.
유화물감을 잘 모르던 시절이라 튜브에 들어 있던 치약도 흰 물감인 줄 알았어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가루치약을 써서 튜브에 들어간 치약을 흰 물감으로 착각했지요.”
경기중학교 미술반 선생이었던 화가 김주경 길진섭 이해성 박승구 이순종 선생은 모두 월북(越北)했다. 박상옥 선생만이 서울에 남았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서울을 떠나지 못한 선생은 학교 미술실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열쇠가 전쟁의 비극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유엔군이 서울에 입성(入城)하자, 미군은 경기중학교를 임시사무실로 사용했다.
총에 맞은 라오콘상
“나는 학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수복(收復)이 되자, 학교에 가서 미술실부터 찾았어요. 열쇠로 미술실의 문을 따고 들어가니, 미술실의 모든 창문들이 부서져 있었고, 데생 실습용 석고상들도 망가져 있었지. 가만히 그 자취를 살펴보니 …, 아마도 그 석고상을 군인들이 권총사격의 표적물로 사용한 것 같았어요.”
그중에서도 한 석고상의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 전쟁의 고통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한 라오콘상(像)이었다.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뱀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칭칭 감아 죽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라오콘상은 서양의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작품이다.
“라오콘이 고통스러워하면서 온몸을 뒤틀고 있는데, 그 석고상의 허리에 총알이 관통한 자국이 있는 겁니다.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어요.”
서울 수복 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찾아와서 김일성(金日成)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자는 말을 했다. 인민군은 시청 회의실로 서울에 남아 있던 화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선생님을 따라 시청 회의실에 가 보니까, 유영국(劉永國) 장욱진(張旭鎭) 선생도 그곳에 있었다.
친구가 바꾸어 놓은 운명
“유영국 장욱진 선생 같은 분들이 초상화를 그릴 타입은 아니지요. 하지만 전쟁 중이었고,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모두 모이긴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완장을 두른 이가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니까, 하기는 싫어도 대충대충 그렸지요.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모인 화가들이 ‘너는 얼굴 그리고, 나는 넥타이를 그리자’는 식으로 그림을 억지로 그린 겁니다.
하지만 나는 나서고 말고 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은 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중학생이니까 완장 찬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도 있었어요.”
선생의 부친은 아들이 의사 되기를 원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흥미를 보이는 아들에게 “그림은 취미로 하라”고 했다. 선생 역시 부친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화가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 중에 입대해서, 군(軍) 차트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선생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서울대 미대(美大·당시는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최 선생의 원서를 넣었다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싶었다. 친구는 선생의 부친에게 “이 어지러운 시절에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선생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전쟁터에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져 아들 친구의 청을 받아들였다.
선생은 잠시 휴가를 얻어 부산으로 시험을 보러 갔다. 당시 서울대 미대는 부산 송도 해변가에 음식점으로 쓰던 건물에 있었다. 일본식의 다다미방으로 된 전형적인 요릿집이었다. 거기에서 필기시험을 치르고 이틀 뒤엔가 실기시험을 보았다. 미술 실기시험을 볼 만한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가 없었다. 책상 두어 개를 놓고, 거기에서 그림을 그렸다. 시험문제는 아주 간단했다.
“네 모습을 그려라.”
종이 한 장씩을 주고는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는 것이 시험이었다. 응시생들이 모두 자신의 증명사진을 꺼내 가지고는 그것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은 사진을 보지 않고, 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어렵지 않게 필기와 실기시험을 통과한 선생에게 면접관이 물었다.
―그래, 자네 장로교인가?
“예.”
―장로교가 뭐하는 거야?
“예수를 믿는 거죠.”
―예수를 믿어?
張勃 선생과의 만남
그 면접관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발(張勃·서울미대 학장 역임) 선생이었다. 장면(張勉) 전 총리의 동생이었던 장발 선생은 최경한 선생의 경기중 친구인 장건의 삼촌이기도 했다. 장발 선생이 또 물었다.
―자네, 마르틴 루터라고 아나?
“예, 조금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그래 어떻게 생각하나,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을 말이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뭐가 훌륭해? 왜 훌륭하다고 생각해?
“저기 거 부패한 종교에 대해서 감연히 항거해서 프로테스트한 거 아닌가요? 그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사람이 뭘 알고 이야기하는 건가? 도대체 뭘 알고 하는 이야기인가? 그게 훌륭한 거냔 말이야?
“저는 잘 모르지만, 루터가 주장한 것을 많은 사람이 믿고 있고, 몇 백년을 두고 이어져 오고 있으니까 그 사람 괜찮은 거 아닙니까?”
그러자 장발 선생은 더 참지를 못하고 화를 내면서 원서를 홱 던져 버렸다. 친구가 대신 적어 준 원서였다.
“내 미대 입시원서를 그때 처음 봤어요. 지망학과에 한자로 ‘會話’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친구는 ‘會話’와 ‘繪畵’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미술학과니까 그렇게 적은 것 같았어요. 그걸 보고 장발 선생이 ‘이 친구야, 여기가 뭐 하는 덴 줄 알고나 지망한 거야? 여기는 사람들끼리 대화하는 데가 아니란 말이야. 너 정말 경기중학교 다닌 거 맞아?’라고 소리치셨어요.
나는 속으로 ‘아이고, 난 떨어졌구나’ 생각했지요. 내가 원서를 직접 쓴 것도 아니고, 가톨릭 신자인 장발 선생에게 개신교 자랑만 했으니 정말 떨어진 줄로만 알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운이 좋게 합격을 했어요. 화가로 살아가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미대 생활은 이렇게 마치 농담하듯이 시작되었어요.”
선생은 이렇게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미술에 대한 상식이 없이 엉터리로 입학원서를 써 주었던 친구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선생의 대학 시절 이야기도 참 재미난 것이 많았다. 전쟁이 끝나고 혜화동의 건물로 미술대학이 옮겨 온 이야기, 누드화를 그린다고 하니까 서울법대 친구들이 버드나무에 올라가 구경한 이야기 등.
사진 수업도 받았고, 교수가 부족해서 미군 장교가 강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그 이야기는 구수한 숭늉 같았다. 미술대학장인 장발 선생을 비롯한 대학 은사(恩師)들의 진지한 교육은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욱진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가슴에 남았다.
선생은 장욱진기념사업모임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장욱진 화백과의 인연은 미대 3학년 때 맺어졌다.
情이 많았던 張旭鎭 화백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상태에서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情)에 굶주린 아이들이었어요. 학교의 분위기도 냉랭하고 썰렁했지요. 그런데 웬 술주정뱅이 같은 양반이 교수로 오셨는데, 인간적인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바로 장욱진 선생님입니다.
장욱진 선생님은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고,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술 잘 먹는 놈에게 ‘자, 가자’ 하시면서 대폿집에 가서 술 한 잔 하고 또 들어오시곤 했어요.
교수로서는 그리 모범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아무튼 매우 좋은 분이었어요. 술 좋아하는 아이들하고는 그저 친구처럼 지내는 그런 선생, 교수라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함께 지내는 친구처럼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그림을 봐 주셨어요.
우리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이병도(李丙燾) 선생의 따님이기도 한 장욱진 선생의 부인이 혜화동에서 책방을 하셨지요. 그 책방에 가면 사모님이 그림처럼 앉아 계셨고, 선생님은 늘 거기에 앉아 있었어요. 사모님이 외출하고 선생이 책방을 지키는 날에는 책이 많이 분실되었죠. 선생은 손님이 들어와서 책을 그냥 가져가도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던 거지요. 그런 선생을 모시고 사는 사모님과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장욱진 선생님은 그림이 전부인 인생을 살았다”고 기억하는 최경한 선생의 스승에 대한 회고는 끝이 없었다.
“장 선생님은 맨날 우리 보고 당신의 집에 가자고 하셨어요. 졸업을 한 후에도 인연은 이어졌고, 해마다 설날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선생님께 세배는 꼭 다녔지요. 어느 날, 선생이 우리가 하는 ‘앙가주망’을 같이 하자고 하셨어요.
선생은 외롭고 고독한 분이었어요. 술만 좋아하시고 친구가 별로 없었죠. 주위에는 제자들이나 후배들이 많았어요. 선생과 우리는 해남으로 완도로 대흥사로 전국에 풍광 좋은 곳을 많이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꿈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장욱진 화백이 돌아가셨을 때, 호상(護喪)은 최경한 선생이 맡았다고 한다. 장욱진기념사업모임이 만들어지자, 장 화백의 부인이 이사장을, 선생이 부이사장을 맡았다.
장욱진 화백을 기념하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이 올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의 장흥미술단지 안에 세워진다. 장 화백의 부인 이경순씨와 유족(遺族)이 기증한 유화와 채색화(彩色畵), 묵화, 벽화 등 230여점의 작품이 소장될 예정이다.
김민기 등이 제자
경기중학교 미술반원들은 지금도 끈끈한 인연으로 만나는 사이이다. 선생은 “이들과 어울린 세월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최경한 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모교(母校)인 경기중학교 미술교사가 됐다. 김민기 학전 대표를 비롯해서 화가 김종학 오천룡 박영국, 조각가 최만린 박충흠, 또 임무근(서울여대) 성완경(인하대) 신광석(서울대) 강경구(경원대) 교수 등이 그의 제자다. 1961년 서울여대가 설립되자 최 선생은 지인(知人)의 권유로 이 대학 교수가 됐다. 그해에 미술동인(同人) ‘앙가주망’이 결성됐다.
선생은 앙가주망 활동을 통해서 화가로서 입신(立身)했다. 그룹 ‘앙가주망’을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는 화가들이 그림 재료가 없어서 고생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선생은 물감을 두툼하게 바르는 기법을 쓰고 있었는데, 저질 물감을 막 섞어서 작업을 하고 나면 나중에 그림이 썩기도 했다고 한다.
박수근(朴壽根) 화백도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는 화공약품 도매상 같은 곳에 가서 아연화, 아만유와 같은 저질 재료들로 그림을 그렸다. 그 재료들을 두툼하게 개서 화폭에 발랐다. 먹색은 따로 선을 긋고 하는 식이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빛깔이 요란한 것이 없다. 그땐 거의 다 그런 식의 작업을 했다고 한다.
최경한 선생이 기억하는 박수근 화백은 진솔한 분이었다. 당시 명동의 반도호텔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常設) 화랑(畵廊)인 ‘반도화랑’이 생겼다. 현재 ‘갤러리 현대’ 대표인 박명자씨가 거기서 일하던 여학생이다. 참 오래전의 이야기다. ‘반도화랑’에 전시된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이곳을 드나들던 외국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꼽힌다.
‘앙가주망’ 결성
1961년 9월 초순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전시장 안의 한 작은 골방에서 김태 안재후 황용엽 박근자 필주광 그리고 최경한, 이렇게 6명의 화가가 열심히 전시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전시회를 열 자금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팸플릿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런 사정을 인쇄소 사장에게 말하자, 그는 인쇄소에서 종이를 절단하고 남은 자투리 종이로 싸게 만들라고 했다. 자투리 종이를 묶어 그림을 인쇄하고 겉표지에는 굵은 매직팬으로 ‘제1회 앙가주망전’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시작된 동인이 지난 2011년에 ‘앙가주망 50주년 기념전’을 열었다.
“우리가 ‘앙가주망’을 결성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1960년대 당시에는 그림을 발표할 장소도 기회도 드물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모임을 갖던 중 ‘우리들도 이 나라의 화가로서 한번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 해서 ‘앙가주망’을 만들게 된 겁니다.”
원래 ‘앙가주망’은 프랑스의 사르트르의 무신론적(無神論的) 실존주의가 존재 자체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휴머니즘적 행동주의를 지칭하는 철학개념이다. ‘나와 우리는 뭔가 해야 한다’는 지식인의 반성적 결단이며, 그 결과로서의 행동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경기중학교 미술 선생을 그만두고, 그 이후 내가 평생을 재직했던 서울여대 시절도 1961년 봄에 시작되었고, ‘앙가주망’도 그해 가을에 첫 전시회를 하게 되었지요. 우리가 첫 전시회를 열게 된 속마음은 ‘개인전(個人展)을 열 갤러리도 하나 없고, 국전(國展)도 좀 그렇고, 그렇다면 우린 뭐냐?’ 뭐 이런 생각으로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간 그린 그림을 모아서 우리가 전시한다. 이런 소박한 마음이었어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오래가는 법입니다.”
‘지마따’
“나는 추상화를 그립니다. 내 작품 이름인 <여항>이나 <풍진>의 그림을 오랫동안 그리다 보니, 일본어를 아는 친구들은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야, 이거 지마따 아니야.’
지마따는 일본어로 거리, 세상, 항간, 속세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친구들이 ‘지마따 지마따’ 하면서 놀리는 이유는, 내 그림이 천한 저잣거리를 제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목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어요. 나의 마음이 반영된 제목입니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까 원치 않게 아프기도 하고, 또 아픈 인연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열정보다는 체념을 하기도 하지요. 인생은 매우 복잡하고 중의적(重意的)인 일들이 많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이러한 것들이 얼기설기 엮여서 예술이라는 표현양식으로 태어나는 거지요.”
최경한 선생에게 요즘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청했다. 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너무 소비적인 세상이 아닌가 싶어요. 모든 물건의 귀한 가치를 모르고, 마치 일회용 컵을 쓰고 버리듯 자신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물건을 버리면 인생도 그렇게 낭비되기 마련입니다. 물건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요.
요즘 학생들에게 아쉬운 것은 글씨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손은 인간의 정신이 나오는 통로이기도 해요. 눈으로 영혼이나 추상을 감지한다면, 손은 인간의 감정이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거죠. 글씨는 음악이나 미술·문학과 같은 예술 창작의 기본이에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손으로 쓴 글씨가 없어졌어요.
요즘 학생들에게 손으로 써서 문제를 내면 읽지를 못합니다. 타이핑을 해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서예의 초서(草書)·전서(篆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이 통할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작은 물건을 잘 간직하는 것도 귀한 일이 되었고, 손글씨를 쓰는 것도 매우 귀한 일이 되어 버린 세상이에요.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요즘은 일주일에 두어 번 병원에 가서 투석 치료를 받아요, 치료과정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무척 번거로운 일입니다. 의사는 좀 더 받으라고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 허허. 그리고 여전히 그림 그리고, 사람 만나며 살고 있지. 가끔 학교에 나와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선생에게는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우선 두서없이 내가 좋아하는 이중섭(李仲燮) 화백과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그분의 생전에 서너 번 만났는데, 내가 그분을 보았을 때는 이미 정상인이 아니었어요. 좀 이상한 행동을 하시기도 하고, 거식증(据食症)이 있었던 것도 같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었어.”
그림에는 화가의 외로움과 고통이 스며들어 있다. 타인(他人)은 볼 수 없는 그런 예술가의 고독과 고통이 있다. 우리는 그 고독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최 선생은 이중섭 화백과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고 했다. 다만, 곁에서 지켜본 선생의 모습이 좀 안타까울 뿐이었다고 한다.
“부산 피란 시절에 이중섭 선생이 오산학교 선배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사람 좋은 선생이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뭐 줄 것이 없어, 담배 속 은박지에 그림을 하나 그려 선물로 주었대요. 그 유명한 담배종이 그림 중에 하나인 거죠. 그런데 그 그림을 받아 든 선배는 화가가 그림을 주려면 액자에 담은 유화(油畵) 작품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담배종이에 그린 이중섭의 ‘작품’을 받아 들고는 집에 가서 그것을 구겨 버렸다고 합니다. 담배종이에 그려 준 그림을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오해한 것이지, 허허. 그런 인심이지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담배 은박지에 새겨진 이중섭의 천진한 그림을 떠올렸다. 이렇게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 의해 얼마나 많은 좋은 것들이 사라졌을까 싶었다.
외조부 海觀 吳兢善
선생은 일제(日帝)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선생은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난 덕분에 별 고생을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외조부(外祖父)는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선생이다. 해관 선생은 구한말(舊韓末)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약했고, 이후 우리나라에 현대의술이 들어오던 초창기에는 의사로서, 나중에는 조선인 최초로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한 자선사업가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최경한 선생은 “외조부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의사가 된 분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자료를 살펴보니, 1914년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해관 선생의 의사면허는 70번이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새로 면허를 발급하는 과정에서 제1호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오긍선 선생에게는 돌아가신 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章)이 추증됐다. 최경한 선생에 의하면 해관 선생의 생활은 매우 단순하고 검소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충정로에서 외조부와 일 년 넘게 살았는데 …, 할아버지는 말씀을 별로 하지 않는 분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인 나와 물을 뿌리면서 놀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께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때, 배 안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는 조선인을 보았대요. 조선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장시간 항해와 열악한 환경으로 사람들이 피부병으로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하셨어요. 그 때문에 훗날 할아버지가 피부과를 전공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할아버지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순종(純宗) 황제가 황실 전의(典醫) 자리를 제안했으나 군산 야소병원 의사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황실 전의는 월급이 당시 화폐로 150원, 야소병원 의사의 월급은 50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이 해관 선생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白南準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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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한 화백의 경기중 친구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
“동기생이었던 백남준은 복장이 어설펐지요. ‘헐렁이’처럼 하고 다녀서 일본말로 ‘다라시나 같다’고 놀렸어요. 하지만 그것이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한 백남준의 개성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그때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사회주의 사상이 돌았어요, 백남준 역시 좌익(左翼) 사상에 젖어 있었지. 백남준은 나와 같은 반이었는데,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적(理想的)인 사회주의 사상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어요.
그런데 백남준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일제에 비행기까지 헌납할 정도로 재력가였지요. 백남준의 부친은 아들의 그런 행동이 지극히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난데없이 좌익이라고 해서 친구들에게 얻어맞고 다닌다면 말이 안되는 것이었고,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요. 그래서 백남준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남준이 그때 외국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예술가가 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세월을 외국에서 지냈으니까 …. 여기에 있었다면 아마도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거나 삶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 시절에 외국에 있었으니까 자유스럽게 사고(思考)할 수 있었겠지요.”
최경한 선생은 “백남준은 ‘경기중학생’ 하면 떠오르는 그런 엘리트 학생이라기보다는 뭔가 어설프고 행동에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엄청난 부잣집 자식이면서 하나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어요.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활동하는 걸 보면서 어린 시절의 그런 모습은 자유로운 예술가의 모습, 천재의 한 단면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이 그를 연구하고 설명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시작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는 거지요. 창조자는 에피고넨하고는 다른 겁니다. 요즘에는 백남준보다 기술이나 감각이 뛰어난 예술가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창조자로서의 백남준은 없지요. 이것이 백남준을 설명하는 나의 방식입니다.”
해방
경기중학교에 입학을 하자 선생은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하나 이룬 셈’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쁜 소식을 평북 영변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하기 위해 1945년 3월 하순 경 선생은 만포선 열차에 올랐다. 영변은 남쪽과는 달리 3월에도 무척 추웠다.
“소월의 ‘영변, 약산 진달래’ 이런 시(詩)가 유명하지요. 거기를 가다 보면 청천강(淸川江)이 나오는데, 청천강의 푸른 강물이 생각납니다. 청천, 맑은 물이라는 뜻인데, 왜 강 이름을 이리 부르는지 그 앞에 서면 저절로 알게 되지요. 청천강 푸른 강물에 매서운 북풍(北風)이 몰아치니 장관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본 풍경이 이미 늙은 내 가슴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선생은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기 위해 경의선(京義線)을 탔다. 그때가 8월 중순 경이었다. 평양에 들어가니 이미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다. 서울엔 미군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이미 북한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적위대원(赤衛隊員)들이었다. 일종의 민간 방위조직인 적위대원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지주(地主) 등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잡아 린치를 가했다. 마을에서는 ‘어떤 집안에 누가 맞아 죽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木炭을 직접 구워서 그림 그려
은행일을 하던 선생의 아버지는 ‘북에서는 살 수 없고, 빨리 서울로 가야 된다’는 판단을 했다. 선생은 경성방송을 통해 모든 학교가 10월에 다시 개교를 한다는 뉴스를 듣고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의 가족은 우여곡절을 거쳐 아슬아슬하게 삼팔선을 넘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모든 것이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도 그러했다. 그림 재료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별 방법을 다 써서 그림을 그렸다.
“목탄(木炭)도 우리가 직접 구워서 썼어요. 깡통에다 진흙을 넣어서 버들가지 같은 나무조각을 넣은 후 촛불에 불을 댕겨서 나뭇가지를 구워 목탄을 만들었지요. 선생님들이 그 방법을 전수했어요. 물감이 없어서 유화는 그리기 힘들었어요. 고물상에 가서 일본인들이 버린 유화물감 박스 같은 걸 얻어서 그림을 그리곤 했지요. 그땐 고물상이 무척 많았어요. 전후(戰後)에는 폐품이 많았기 때문에 인사동에서부터 청계천에 이르기까지 고물상이 즐비했습니다.
유화물감을 잘 모르던 시절이라 튜브에 들어 있던 치약도 흰 물감인 줄 알았어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가루치약을 써서 튜브에 들어간 치약을 흰 물감으로 착각했지요.”
경기중학교 미술반 선생이었던 화가 김주경 길진섭 이해성 박승구 이순종 선생은 모두 월북(越北)했다. 박상옥 선생만이 서울에 남았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서울을 떠나지 못한 선생은 학교 미술실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열쇠가 전쟁의 비극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유엔군이 서울에 입성(入城)하자, 미군은 경기중학교를 임시사무실로 사용했다.
총에 맞은 라오콘상
“나는 학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수복(收復)이 되자, 학교에 가서 미술실부터 찾았어요. 열쇠로 미술실의 문을 따고 들어가니, 미술실의 모든 창문들이 부서져 있었고, 데생 실습용 석고상들도 망가져 있었지. 가만히 그 자취를 살펴보니 …, 아마도 그 석고상을 군인들이 권총사격의 표적물로 사용한 것 같았어요.”그중에서도 한 석고상의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 전쟁의 고통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한 라오콘상(像)이었다.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뱀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칭칭 감아 죽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라오콘상은 서양의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작품이다.
“라오콘이 고통스러워하면서 온몸을 뒤틀고 있는데, 그 석고상의 허리에 총알이 관통한 자국이 있는 겁니다.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어요.”
서울 수복 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찾아와서 김일성(金日成)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자는 말을 했다. 인민군은 시청 회의실로 서울에 남아 있던 화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선생님을 따라 시청 회의실에 가 보니까, 유영국(劉永國) 장욱진(張旭鎭) 선생도 그곳에 있었다.
친구가 바꾸어 놓은 운명
“유영국 장욱진 선생 같은 분들이 초상화를 그릴 타입은 아니지요. 하지만 전쟁 중이었고,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모두 모이긴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완장을 두른 이가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니까, 하기는 싫어도 대충대충 그렸지요.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모인 화가들이 ‘너는 얼굴 그리고, 나는 넥타이를 그리자’는 식으로 그림을 억지로 그린 겁니다.
하지만 나는 나서고 말고 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은 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중학생이니까 완장 찬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도 있었어요.”
선생의 부친은 아들이 의사 되기를 원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흥미를 보이는 아들에게 “그림은 취미로 하라”고 했다. 선생 역시 부친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화가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 중에 입대해서, 군(軍) 차트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선생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서울대 미대(美大·당시는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최 선생의 원서를 넣었다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싶었다. 친구는 선생의 부친에게 “이 어지러운 시절에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선생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전쟁터에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져 아들 친구의 청을 받아들였다.
선생은 잠시 휴가를 얻어 부산으로 시험을 보러 갔다. 당시 서울대 미대는 부산 송도 해변가에 음식점으로 쓰던 건물에 있었다. 일본식의 다다미방으로 된 전형적인 요릿집이었다. 거기에서 필기시험을 치르고 이틀 뒤엔가 실기시험을 보았다. 미술 실기시험을 볼 만한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가 없었다. 책상 두어 개를 놓고, 거기에서 그림을 그렸다. 시험문제는 아주 간단했다.
“네 모습을 그려라.”
종이 한 장씩을 주고는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는 것이 시험이었다. 응시생들이 모두 자신의 증명사진을 꺼내 가지고는 그것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은 사진을 보지 않고, 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어렵지 않게 필기와 실기시험을 통과한 선생에게 면접관이 물었다.
―그래, 자네 장로교인가?
“예.”
―장로교가 뭐하는 거야?
“예수를 믿는 거죠.”
―예수를 믿어?
張勃 선생과의 만남
그 면접관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발(張勃·서울미대 학장 역임) 선생이었다. 장면(張勉) 전 총리의 동생이었던 장발 선생은 최경한 선생의 경기중 친구인 장건의 삼촌이기도 했다. 장발 선생이 또 물었다.
―자네, 마르틴 루터라고 아나?
“예, 조금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그래 어떻게 생각하나,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을 말이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뭐가 훌륭해? 왜 훌륭하다고 생각해?
“저기 거 부패한 종교에 대해서 감연히 항거해서 프로테스트한 거 아닌가요? 그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사람이 뭘 알고 이야기하는 건가? 도대체 뭘 알고 하는 이야기인가? 그게 훌륭한 거냔 말이야?
“저는 잘 모르지만, 루터가 주장한 것을 많은 사람이 믿고 있고, 몇 백년을 두고 이어져 오고 있으니까 그 사람 괜찮은 거 아닙니까?”
그러자 장발 선생은 더 참지를 못하고 화를 내면서 원서를 홱 던져 버렸다. 친구가 대신 적어 준 원서였다.
“내 미대 입시원서를 그때 처음 봤어요. 지망학과에 한자로 ‘會話’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친구는 ‘會話’와 ‘繪畵’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미술학과니까 그렇게 적은 것 같았어요. 그걸 보고 장발 선생이 ‘이 친구야, 여기가 뭐 하는 덴 줄 알고나 지망한 거야? 여기는 사람들끼리 대화하는 데가 아니란 말이야. 너 정말 경기중학교 다닌 거 맞아?’라고 소리치셨어요.
나는 속으로 ‘아이고, 난 떨어졌구나’ 생각했지요. 내가 원서를 직접 쓴 것도 아니고, 가톨릭 신자인 장발 선생에게 개신교 자랑만 했으니 정말 떨어진 줄로만 알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운이 좋게 합격을 했어요. 화가로 살아가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미대 생활은 이렇게 마치 농담하듯이 시작되었어요.”
선생은 이렇게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미술에 대한 상식이 없이 엉터리로 입학원서를 써 주었던 친구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선생의 대학 시절 이야기도 참 재미난 것이 많았다. 전쟁이 끝나고 혜화동의 건물로 미술대학이 옮겨 온 이야기, 누드화를 그린다고 하니까 서울법대 친구들이 버드나무에 올라가 구경한 이야기 등.
사진 수업도 받았고, 교수가 부족해서 미군 장교가 강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그 이야기는 구수한 숭늉 같았다. 미술대학장인 장발 선생을 비롯한 대학 은사(恩師)들의 진지한 교육은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욱진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가슴에 남았다.
선생은 장욱진기념사업모임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장욱진 화백과의 인연은 미대 3학년 때 맺어졌다.
情이 많았던 張旭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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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한 화백의 스승인 장욱진 화백. |
장욱진 선생님은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고,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술 잘 먹는 놈에게 ‘자, 가자’ 하시면서 대폿집에 가서 술 한 잔 하고 또 들어오시곤 했어요.
교수로서는 그리 모범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아무튼 매우 좋은 분이었어요. 술 좋아하는 아이들하고는 그저 친구처럼 지내는 그런 선생, 교수라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함께 지내는 친구처럼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그림을 봐 주셨어요.
우리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이병도(李丙燾) 선생의 따님이기도 한 장욱진 선생의 부인이 혜화동에서 책방을 하셨지요. 그 책방에 가면 사모님이 그림처럼 앉아 계셨고, 선생님은 늘 거기에 앉아 있었어요. 사모님이 외출하고 선생이 책방을 지키는 날에는 책이 많이 분실되었죠. 선생은 손님이 들어와서 책을 그냥 가져가도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던 거지요. 그런 선생을 모시고 사는 사모님과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장욱진 선생님은 그림이 전부인 인생을 살았다”고 기억하는 최경한 선생의 스승에 대한 회고는 끝이 없었다.
“장 선생님은 맨날 우리 보고 당신의 집에 가자고 하셨어요. 졸업을 한 후에도 인연은 이어졌고, 해마다 설날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선생님께 세배는 꼭 다녔지요. 어느 날, 선생이 우리가 하는 ‘앙가주망’을 같이 하자고 하셨어요.
선생은 외롭고 고독한 분이었어요. 술만 좋아하시고 친구가 별로 없었죠. 주위에는 제자들이나 후배들이 많았어요. 선생과 우리는 해남으로 완도로 대흥사로 전국에 풍광 좋은 곳을 많이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꿈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장욱진 화백이 돌아가셨을 때, 호상(護喪)은 최경한 선생이 맡았다고 한다. 장욱진기념사업모임이 만들어지자, 장 화백의 부인이 이사장을, 선생이 부이사장을 맡았다.
장욱진 화백을 기념하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이 올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의 장흥미술단지 안에 세워진다. 장 화백의 부인 이경순씨와 유족(遺族)이 기증한 유화와 채색화(彩色畵), 묵화, 벽화 등 230여점의 작품이 소장될 예정이다.
김민기 등이 제자
경기중학교 미술반원들은 지금도 끈끈한 인연으로 만나는 사이이다. 선생은 “이들과 어울린 세월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최경한 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모교(母校)인 경기중학교 미술교사가 됐다. 김민기 학전 대표를 비롯해서 화가 김종학 오천룡 박영국, 조각가 최만린 박충흠, 또 임무근(서울여대) 성완경(인하대) 신광석(서울대) 강경구(경원대) 교수 등이 그의 제자다. 1961년 서울여대가 설립되자 최 선생은 지인(知人)의 권유로 이 대학 교수가 됐다. 그해에 미술동인(同人) ‘앙가주망’이 결성됐다.
선생은 앙가주망 활동을 통해서 화가로서 입신(立身)했다. 그룹 ‘앙가주망’을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는 화가들이 그림 재료가 없어서 고생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선생은 물감을 두툼하게 바르는 기법을 쓰고 있었는데, 저질 물감을 막 섞어서 작업을 하고 나면 나중에 그림이 썩기도 했다고 한다.
박수근(朴壽根) 화백도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는 화공약품 도매상 같은 곳에 가서 아연화, 아만유와 같은 저질 재료들로 그림을 그렸다. 그 재료들을 두툼하게 개서 화폭에 발랐다. 먹색은 따로 선을 긋고 하는 식이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빛깔이 요란한 것이 없다. 그땐 거의 다 그런 식의 작업을 했다고 한다.
최경한 선생이 기억하는 박수근 화백은 진솔한 분이었다. 당시 명동의 반도호텔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常設) 화랑(畵廊)인 ‘반도화랑’이 생겼다. 현재 ‘갤러리 현대’ 대표인 박명자씨가 거기서 일하던 여학생이다. 참 오래전의 이야기다. ‘반도화랑’에 전시된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이곳을 드나들던 외국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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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9월 20일 이중섭이 1951년 피란 시절 세들어 살았던 서귀포의 초가에 모인 이중섭 세미나 참석자들. 왼쪽부터 임근준 서성록 황용엽 최경한 백영수 민정기씨다. |
‘앙가주망’ 결성
1961년 9월 초순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전시장 안의 한 작은 골방에서 김태 안재후 황용엽 박근자 필주광 그리고 최경한, 이렇게 6명의 화가가 열심히 전시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전시회를 열 자금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팸플릿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런 사정을 인쇄소 사장에게 말하자, 그는 인쇄소에서 종이를 절단하고 남은 자투리 종이로 싸게 만들라고 했다. 자투리 종이를 묶어 그림을 인쇄하고 겉표지에는 굵은 매직팬으로 ‘제1회 앙가주망전’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시작된 동인이 지난 2011년에 ‘앙가주망 50주년 기념전’을 열었다.
“우리가 ‘앙가주망’을 결성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1960년대 당시에는 그림을 발표할 장소도 기회도 드물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모임을 갖던 중 ‘우리들도 이 나라의 화가로서 한번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 해서 ‘앙가주망’을 만들게 된 겁니다.”
원래 ‘앙가주망’은 프랑스의 사르트르의 무신론적(無神論的) 실존주의가 존재 자체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휴머니즘적 행동주의를 지칭하는 철학개념이다. ‘나와 우리는 뭔가 해야 한다’는 지식인의 반성적 결단이며, 그 결과로서의 행동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경기중학교 미술 선생을 그만두고, 그 이후 내가 평생을 재직했던 서울여대 시절도 1961년 봄에 시작되었고, ‘앙가주망’도 그해 가을에 첫 전시회를 하게 되었지요. 우리가 첫 전시회를 열게 된 속마음은 ‘개인전(個人展)을 열 갤러리도 하나 없고, 국전(國展)도 좀 그렇고, 그렇다면 우린 뭐냐?’ 뭐 이런 생각으로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간 그린 그림을 모아서 우리가 전시한다. 이런 소박한 마음이었어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오래가는 법입니다.”
‘지마따’
“나는 추상화를 그립니다. 내 작품 이름인 <여항>이나 <풍진>의 그림을 오랫동안 그리다 보니, 일본어를 아는 친구들은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야, 이거 지마따 아니야.’
지마따는 일본어로 거리, 세상, 항간, 속세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친구들이 ‘지마따 지마따’ 하면서 놀리는 이유는, 내 그림이 천한 저잣거리를 제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목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어요. 나의 마음이 반영된 제목입니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까 원치 않게 아프기도 하고, 또 아픈 인연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열정보다는 체념을 하기도 하지요. 인생은 매우 복잡하고 중의적(重意的)인 일들이 많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이러한 것들이 얼기설기 엮여서 예술이라는 표현양식으로 태어나는 거지요.”
최경한 선생에게 요즘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청했다. 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너무 소비적인 세상이 아닌가 싶어요. 모든 물건의 귀한 가치를 모르고, 마치 일회용 컵을 쓰고 버리듯 자신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물건을 버리면 인생도 그렇게 낭비되기 마련입니다. 물건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요.
요즘 학생들에게 아쉬운 것은 글씨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손은 인간의 정신이 나오는 통로이기도 해요. 눈으로 영혼이나 추상을 감지한다면, 손은 인간의 감정이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거죠. 글씨는 음악이나 미술·문학과 같은 예술 창작의 기본이에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손으로 쓴 글씨가 없어졌어요.
요즘 학생들에게 손으로 써서 문제를 내면 읽지를 못합니다. 타이핑을 해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서예의 초서(草書)·전서(篆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이 통할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작은 물건을 잘 간직하는 것도 귀한 일이 되었고, 손글씨를 쓰는 것도 매우 귀한 일이 되어 버린 세상이에요.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