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정권의 지원받아 영화사 설립 후 파죽지세로 성장했다가 정권과 불화로 허가 취소당해
⊙ 1960년 <로맨스 빠빠>의 흥행 성공으로 신필림의 기반 닦아
⊙ 김일성의 전폭적 지원받던 북한에서 만든 작품은 국제무대에서도 인정받아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1960년 <로맨스 빠빠>의 흥행 성공으로 신필림의 기반 닦아
⊙ 김일성의 전폭적 지원받던 북한에서 만든 작품은 국제무대에서도 인정받아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신상옥 감독(2006년 작고)은 한국영화 반세기의 발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빠져서는 안 될 주요한 인물이다. 그의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큰 의미를 남겨놓았다. 누구보다 미장센을 중시한 미학적 영화작가였으며,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든 영화의 장인이기도 했다. 또 국내 유일의 메이저 영화사를 만들었던 제작자로서 영화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가 지구상에서 유일한 냉전지대로 남은 한반도에서 남과 북을 넘나들며 영화를 만든 특이한 발자취를 남기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그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는 지금보다 더 강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발자취처럼 그의 작품을 쫓아가는 길은 늘 이념의 틀 속에서 혼돈스럽게 엉켜버리고 만다. 작품만을 볼 것인지, 그 속에 담긴 사상까지 봐야 하는지, 그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아직도 씻어지지 않는 미혹이 머물러 있다.
그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되던 시기에 태어났고,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숭배하며 성장했다. 또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는 화려한 테크니션이었던 <자유만세>(1946)의 최인규 감독 밑에서 영상 테크닉을 전수받아 확고한 영화기술로 무장한 장르의 대가로서 한국영화계에 우뚝 섰다. 그는 채플린처럼 자신이 속한 시대의 맥락을 직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다양한 심도로 그려내는 감독으로서 예술적 평가보다는 대중의 감정에 승부를 건 흥행사로 한때 한국영화계를 쥐락펴락 했다.
신 감독의 활동이 본격화했던 1960년대 전후는 영화계가 내적으로는 주류 영화산업 시스템을 모색하는 시기였고, 외적으로는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을 편 박정희 정권의 국산영화 제작지원 정책이 맞아떨어졌던 상황이었다. 미국 메이저 영화사 시스템을 본뜬 신필림의 거대한 족적은 이런 시류의 산물이기도 했다. 신필림은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아 출범할 수 있었고,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1975년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로 영화사 허가가 취소되는 파국을 맞았다. 그 후 그의 영화제작활동은 북한에서 이어졌다.
남한·북한·미국으로 이어진 영화 같은 영화인생
그가 평생에 걸쳐 제작한 영화는 154편, 감독한 영화는 75편이다. 감독작 중에서는 십여 편 정도를 자신의 영화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꼽는다. 생전에 한 몇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남한에서 만든 영화 중 최고는 <상록수>(1961)이고, 북한에서 만든 영화 중 최고는 <탈출기>(1984)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각각 남북한의 정상들을 감동시킨 작품들이다. 신필림 탄생의 주역 역할을 한 <상록수>는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본 영화로 기록되어 있으며, <탈출기> 역시 당시 김일성을 감동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영화 같은 그의 인생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판가름하려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복잡한 사연 속에서 그가 평생 오로지 영화만 바라본 열정만을 추출해 낸다면, 그의 영화에 색깔을 나누는 작업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신필림 허가가 취소된 후 어느 날 갑자기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그가 북한에서 ‘신필림영화촬영소’의 총장으로 최은희씨에게 모스크바 영화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안긴 <소금>(1985)과 같은 영화를 열심히 만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난 10월호 이 코너에 작품세계를 소개한 정창화 감독은 인터뷰에서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본 신 감독의 모습을 기억하며 납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의혹은 여전하지만, 그의 관심이 이데올로기였다면 매년 300만 달러를 썼을 만큼 무제한적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북한에서 ‘우상숭배’의 족쇄를 채우려 하자 다시 남쪽으로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활동 본거지는 1960~70년대는 남한, 1980년대는 북한, 1990년대는 미국이었다.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이 있을까? 그의 어떤 영화도 그의 삶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다.
그의 영화행적에 대한 관심은 이제 접어두고 오락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그의 폭넓은 영화세계를 본격적으로 탐험해 보자.
1960년대 신상옥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 쏟아내
그의 작품은 데뷔작 <악야>(1952)에서 <지옥화>(1958)에 이르는 리얼리즘과 문예영화 취향의 시기를 1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만든 작품은 이광수 원작의 <꿈>(1954), 김동인의 <젊은 그들> (1955), 현진건의 <무영탑>(1957) 등이 있다. 1950년대 데뷔한 전후 세대의 감독들이 모두 그러했듯 식민지의 흔적과 피폐해진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인 사회현실이 그를 리얼리즘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시기 신 감독의 영화는 ‘전통’을 섹슈얼리티가 억압된 여성으로, ‘근대’를 섹슈얼리티 과잉의 여성으로 각기 등치시켰다. <지옥화>는 매혹적이고 위협적인 여성을 통해 근대화를 표현한 작품이다. 숨 막히도록 매혹적이지만 죽음에 이를 만큼 위험하고 타락한 존재 소냐는 당시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미국식 모더니티의 실체였다. <꿈>은 일종의 초현실 세계 속에서 설화적인 인생관과 이상적인 미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작고)씨는 우리나라 초기 소위 ‘문예영화’들이 경험적인 현실과는 격리된 액자 속의 이미지 세계라는 스타일로 고급작품처럼 포장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신상옥의 경우는 이것이 작가 체질의 근저를 이루는 중요한 경향이라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설화적 상상력은 실존가능성이 있는 역사와 만나면서 <성춘향>(1961), <연산군> (1961), <폭군 연산>(1962), <대원군> (1968), <내시>(1968), <이조여인 잔혹사>(1969), <속 내시>(1969), <이조괴담> (1970)으로 변주되어 섬세하면서도 장대한 드라마로 펼쳐졌다.
신 감독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원숙한 작가의식과 뛰어난 영화적 테크닉이 숙성된 성과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시절이 2기로 분류될 수 있다. 이른바 신상옥의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연달아 쏟아져나온 시기로, <상록수>(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벙어리 삼룡이>(1964) 등을 이때 만들었다.
이들 작품에서는 최은희씨가 아름다운 수절과부로 나오는데, 봉건적인 윤리와 여성의 욕망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지점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작품들이다. 신 감독은 “오락성이 없거나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영화로 보지 않는다” “나는 유교를 찬미한다”는 지론을 설파해 왔는데, 이 두 가지 요소가 가장 영화적으로 잘 표현된 작품들이다. 이런 특징은 전통사회에서 태어나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경험을 하면서 성장한 신 감독 자신의 특질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영화 심취
그는 192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신병용씨와 어머니 김봉선씨 사이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신태서(申泰瑞)인데, 신상옥이라는 이름은 영화계에 입문하면서 사용했다. 한의사인 아버지는 유교적 가풍을 중시했다. 청진과 회령은 영화와 관계가 깊은 지방으로, 춘사 나운규와 그의 평생동지인 윤봉준이 함께 성장하며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청진에만 세 곳의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영화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신 감독의 집 앞에 한 번에 두세 편씩 동시 상영하는 ‘소화좌(昭和座)’라는 영화관이 있었다. 그는 천마소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이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국내 영화는 물론 서양영화, 일본 무사영화 등을 섭렵했다.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골드러시> <독재자> 등을 이 시절에 봤다.
소학교 졸업 후 경성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당시 국어교사가 모던 시인인 김기림씨였고, 감하건 화백이 미술교사였다. 그는 미술반 반장으로 초현실주의에 심취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동창이 만화가 신동헌, 시인 김규동, 정치가 김철씨 등이다. 경성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가 범죄자의 사망진단서를 떼준 일을 계기로 의사면허를 취소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었지만 어머니의 억척스런 뒷바라지로 형과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신 감독은 동경미술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 그는 미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다. 미술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화면구도를 잘 잡거나 색감이 예민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 가시적으로 형성해 내는 선, 색, 형, 질감, 공간에 대한 감각과 그것들의 균형, 조화, 대비, 율동감 등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관점은 훗날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그대로 적용됐다. 영화계에 몽타주 이론을 만들어낸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등은 신 감독처럼 모두 미술 수련을 거친 사람들이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신 감독은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징병을 피해 숨어지내던 차에 광복이 되자 생계를 위해 포스터 그리는 일에 나섰다. 당시 미 군정청은 선전이나 계몽을 위한 포스터를 많이 붙였는데, 인쇄 시설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일일이 손으로 그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영화 포스터도 연결이 된 것이다. 그즈음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를 보고 매료돼 영화 일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고려영화사의 최 감독 문하생이 되었다. 당시 신 감독과 함께 최 감독의 연출부를 거친 감독이 정창화, 홍성기 감독으로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훗날 납북된 최인규 감독은 일제강점기부터 <국경>(1939), <수업료>(1940), <집없는 천사>(1941) 등으로 영화계에 주목을 받다가 광복과 함께 <자유만세>, <독립전야>(1948) 등의 화제작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이고 독창적이었다. 아무도 그런 유의 화면을 만들어낼 줄 모르던 시절의 선구자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다. 그가 자신의 영화는 직접 촬영을 하고 편집하며 새로운 기재나 기술도입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투자를 한 것은 모두 최 감독의 영향 때문이었다.
신인 감독, 인기스타 최은희와 연인이 되다
26세가 되던 해 고려영화사를 떠난 그는 데뷔작으로 <악야>를 만들었다. 문정숙씨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실험적인 요소가 강한 16mm 작품이다. 이 영화는 촬영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결국 피란지인 부산에서 완성해 개봉했다. 전쟁 시 신 감독은 공군 정훈국 촬영대 요원으로 입대해 홍성기 감독과 함께 <출격명령>이라는 공군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피란길에 올랐던 부모는 전쟁통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1·4후퇴 때 아버지가 폭격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피란생활 중 얻은 병으로 부산에서 별세했다.
그는 결혼도 영화같이 했다. 아내인 최은희씨는 평생 그에게 영원한 ‘여주인공’이면서 영화적 동지였다. 당시 최씨는 6·25 이전부터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연극배우였다. 이 두 사람이 만난 건 <야화(野花)>라는 작품에 출연하고 있을 때였다. 최씨는 남편인 촬영기사 김학성씨와 별거를 하던 상황이었는데, 정신적 고통과 과로로 무대에서 쓰러진 최씨를 본 신 감독이 객석에서 달려나와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을 인연으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당시 <코리아>(1954)를 기획하고 있던 신 감독은 영화 속 이야기 중 하나인 <춘향전>에 최씨를 출연시킬 생각으로 캐스팅을 위해 무대를 찾았던 길이었다. 최씨는 신 감독의 출연제의를 바로 승낙했고, 서울로 올라와 촬영하면서 연인이 됐다.
이 두 사람을 김학성씨가 간통죄로 고소해 우리나라 ‘간통죄 1호’로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최씨는 유부녀지만 이미 인기스타였기 때문에 신인 감독과의 연애는 호기심이 끌리는 대형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리아>의 촬영은 벽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신상옥의 작품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 영화계의 분위기였다.
〈성춘향〉 對 〈춘향전〉
이런 그를 구제해 준 사람이 바로 당시 공보처 영화과에 근무하던 이형표 감독이었다. 그는 신 감독의 대박영화 <성춘향> 때까지 많은 도움을 줬다.
이십여 종에 육박하는 각종 춘향전 영화 가운데 신 감독의 <성춘향>은 백미에 속한다. 이 시기의 영화 가운데 비디오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지만, 군데군데 중요한 장면들이 잘린 채 출시돼 대가의 작품치고는 범작이라는 오해를 받는 안타까운 영화이기도 하다. 당시 홍성기 감독 역시 <춘향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성춘향>과 맞대결을 펼쳤는데, 완패로 끝났다.
두 감독이 각자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확연하게 구분된다. 신 감독의 <성춘향>은 광한루에서 놀던 이 도령이 방자와 수행 사령들에게 “상하의 구별을 다 치우고 함께 놀자”며 자상하게 술을 권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홍 감독 <춘향전>의 이 도령은 다재다능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자로 등장한다. 4·19혁명을 경험한 관객들은 모두 ‘민주적인’ 신 감독의 이 도령을 택했다.
<무숙자>(1968)라는 서부극 또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서부극의 트레이드 마크인 황야에 대한 상상력을 우리 민족의 경험 속으로 끌어들여 만주벌판으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서부극이면서 액션멜로로 전이하는 한국적 장르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연구되고 있기도 하다.
서울 인구 5명 중 1명이 본 성춘향
신 감독뿐만 아니라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감독 등의 절정기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온 1960년대는 한국영화 미학의 핵심이 다양하게 형성된 시기이다. 유럽의 국제영화제가 주도하는 예술영화의 기준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영화를 보고 싶다면 한국영화 중에서는 신상옥의 영화에서 출발점을 찍어도 좋을 것이다.
1960년대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또 빠질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패왕 신필림의 등장이다. <로맨스 빠빠>(1960)는 그 서막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신필림의 전신인 ‘신상옥 푸로덕션’의 작품으로 그 당시 기라성 같은 배우였던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남궁원, 엄앵란이 총출동해 엄청난 흥행을 거둔 작품이다. 1952년에 <악야>로 데뷔해 모두 15편의 영화를 아내 최은희씨를 주인공으로 찍어냈지만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는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로맨스 빠빠>는 제작자로서 신상옥의 가치를 부각시킨 작품이었다.
이어 1961년 1월 28일 개봉한 <성춘향>이 40만명(당시 서울 인구 200만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흥행에 성공하면서 신 감독은 탄탄한 제작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정부는 15편 이상을 제작한 영화사만 제작사 등록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교부 고시를 공표했다. 당시 65개에 이르던 영화사는 이 기준 때문에 16개로 통폐합됐다. 신 감독은 프로덕션을 ‘주식회사 신필림’으로 바꿔 등록했다. 이들 중 명실상부한 제작사는 신필림이 유일했다. 독주체제가 마련된 것이다. 제작사만 외화수입과 제작권을 받는 특혜가 주어지기 때문에 영화계에서는 뒷말이 무성했다. 10편도 아니고 20편도 아닌 15편(<로맨스 빠빠>는 그의 16번째 작품이었다)이라는 숫자에 대해 영화계 인사들은 신 감독과 정부의 밀월관계를 의심했고, 영화계는 신필림과 그에 대항하는 충무로라는 두 세력으로 양분됐다.
신필름, 10년간 150편 제작
신필림으로 명패를 바꿔 단 1961년 이후부터 1969년까지가 신상옥 왕국의 전성기이다. 신필림의 위용은 대단했다. 용산구 문배동에 위치한 1000평 규모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3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을 갖추고 있었다. 부설연기자 학원까지 마련해 두고 있었다.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 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를 주름잡은 배우들을 발굴해 냈다.
전속작가, 감독, 촬영기사, 녹음기사까지 모두 갖춘 거대한 신필림의 제작편수는 수적으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모두 10년간 신필림이 쏟아낸 작품은 102편이다. 휘하에 두고 있던 안양필름과 신아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모두 150편이 넘는다.
이 거대왕국의 몰락은 1966년과 1967년 사이에 진행됐다. 신필림은 홍콩을 비롯한 해외와의 합작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는 등 몸집 불리기에 나섰지만 기대했던 정부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막대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재정적 위기에 처했다. 정부가 신필림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거둔 데는 영화인들의 공개적인 반발이 작용한 탓이 컸다. 1966년 영화인들이 영화법 폐기 건의문을 제출하는 등 반발이 심해지자 정부는 영화 제작업자 등록제의 내용을 대폭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동안 영화법의 방패막이 속에서 승승장구하던 신필림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당시 신필림은 과도한 제작편수에 따른 태작들을 양산한 결과 흥행과는 점점 멀어지는 실정이었다. 결국 1970년 신필림은 회사규모를 줄인 뒤 ‘안양영화주식회사’로 변신했다. 1973년에는 다시 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으로 개명하면서 연명하는 처지까지 추락했다. 그러다가 1975년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검열과정에서 삭제한 키스신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 말소 명령을 받는 수모를 겪으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975년 삭제된 키스신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허가 취소
신 감독은 당시 자신의 두 아이를 낳은 영화배우 오수미씨와의 스캔들로 홍역을 앓으며 오랜 반려자 최은희씨와의 불화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이 일이 정권의 미움을 받은 계기가 됐다고 사후 발간된 자서전 《나는 영화였다》(2007년, 랜덤하우스)에서 밝히고 있다.
신 감독 영화의 3기는 북한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 1월 홍콩에서 납북된 최은희씨를 찾아나선 그는 같은 해 북한에서 최씨를 다시 상봉했다. 선동정치 체제를 굳히고 있던 북한에서 영화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느 장소에서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시스템이 갖춰져 있을 정도였다. 좋은 영화만 없는 상태였다.
신 감독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의 북한생활에서 모두 7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첫 5년은 감금상태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지는데, 탈출 전 3년간이 활동기간이다.
그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것은 춘향전을 소재로 한 <사랑 사랑 내 사랑>(1984)으로 10전짜리 입장권이 100배나 되는 10원으로 암거래될 정도였다고 한다. 통통함이 미덕이던 북한 여배우의 이미지를 이 영화로 바꿔놓았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공항 귀빈접대실 접대원이었던 현대적 이미지의 여성을 픽업했고, 새로운 아름다움의 전형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성공 여세를 몰아 북한에서는 처음으로 효를 주제로 한 영화였던 <심청전>(1985)을 만들었고, 북한 괴수영화의 첫 작품인 <불가사리>(1985)도 선보였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신필림영화촬영소’의 총장으로 일 년에 3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마음껏 썼다. 제작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나올 수 있는 시기였다.
북한에서의 첫 작품인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가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소금>(1985)은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최은희씨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신필림 시절 그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쌀>(1963), <빨간 마후라>(1964), <이조여인 잔혹사>, <전쟁과 인간>(1971) 등으로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천년호>(1969)로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받은 정도였지 명성 있는 국제영화제의 본상 수상은 하지 못했다.
이후 1986년 다시 남쪽으로 탈출한 시기에 만든 <증발>(1994)로 칸영화제에 초대되어 특별 상영되고, 심사위원으로 영화제에 참여했다. 2002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신상옥 영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쓰리 닌자>로 할리우드 진출 성공
탈출한 이후 작고하기까지 신 감독이 만든 영화를 크게 4기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기에 그는 ‘Sheen Productions’을 만들어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다.
첫 작품 <징기스칸>은 제작비를 대기로 한 일본 기업이 무너지면서 기획단계에서 무산됐지만, 300만 달러로 만든 아동물 <쓰리 닌자>(1995)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대본은 시나리오 작가 김강윤씨와 함께 그가 만들어 영역을 현지인에게 시켰다. 영어가 서툰 그는 신인감독인 존 터틀타웁에게 이 작품을 맡겼다. 터틀타웁은 이 작품으로 인정을 받아 산드라 블록 주연의 <당신이 잠든 사이에>, 존 트라볼타 주연의 <페노메논>,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본능>을 만들며 스타급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쓰리닌자> 때 그의 감독 개런티는 3만 달러였는데, 그 후에는 500만 달러가 됐다.
<쓰리 닌자>는 그가 직접 촬영을 맡았다. 제작비를 아낀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할리우드 첫 작품을 그의 손으로 직접 찍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사회 직후 디즈니에서 배급을 자처하고 나서 미국 전역 1200개 극장에서 개봉되었고, 1999년까지 200만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팔려나갔다. 이 작품은 디즈니의 막강한 시장 속에서 아직도 팔리고 있다. 이 성공을 계기로 그는 할리우드에서 아동물로 승부를 보려고 했지만 의도대로 되질 않았다. <쓰리 닌자>의 성공 이후 그는 닌자 시리즈 3편을 더 제작했지만, 배급사가 컬럼비아로 바뀌면서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또 북한에서 만든 <불가사리>를 서양의 중세시대로 옮긴 어린이용 <갈가메스>도 배급망을 잡지 못했고, 정원사 살인사건을 다룬 <사일런트 스크림> 역시 스타급 배우가 없어서 배급에 실패했다.
〈마유미〉 〈실종〉 실패
<징기스칸>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만든 작품 <마유미>(1990)는 탈출 3년 만인 1989년에 서울로 돌아온 그가 만든 그의 4기 첫 작품이다. 탈북 이후 이념 논쟁에 휘말린 자신의 생각을 남한에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당시 똑같이 냉전이데올로기를 다룬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은 성공했지만 <마유미>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 이후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드러낸 김형욱 사건을 다룬 <증발> 역시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이 두 편으로 국내에서 “신상옥도 이제는 갔다”는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할리우드 진출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는 2004년 75번째 작품인 <겨울이야기>를 유작으로 남기며 작품활동을 접었다. 이 영화는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신구)와 며느리(김지숙) 사이의 갈등과 애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인생의 겨울을 담담하게 그려낸 거장의 노작으로 꼽힌다. 현란한 CG가 날뛰는 시점에 거꾸로 1960년대 전성기 시절의 신 감독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 드는 차분한 작품이다. 그는 ‘거울 앞으로 돌아와 다시 선’ 노장답게 이 시대에 영화가 어떻게 현실에 접근해야 하는가를 되새기도록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행적을 이데올로기적 잣대로 측정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느끼게 된다.
2006년 4월, 신 감독은 80세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영화가 곧 그의 인생이었고, 인생이 영화 같았던 그의 삶은 ‘신화’로 남아 한국영화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신상옥 감독의 ‘영원한 동지’ 최은희 인터뷰
“내 생애 마지막 꿈도 신상옥”
신상옥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최은희(81)씨는 ‘신상옥기념사업회’와 ‘공주 신상옥 청년영화제’ 등 갖가지 신 감독 기념사업에 열정을 쏟으며 남편의 부재를 메우고 있다. 또 지난 9월에는 원로 여배우로서 제56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연극·영화·무용 부문을 수상하는 등 여전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상은 그녀가 오랜 세월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분야를 넘나드는 종합 예술인으로 활동해 온 업적을 기리는 의미다. 그녀는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소금>으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바 있으며, 영화감독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과 일본에서도 출간된 북한생활 고백수기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와 자서전 《고백》 등이 있다.
신 감독과 1954년 결혼한 이후 한동안 이별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운명공동체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추억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신 감독의 영원한 동지였던 최씨에게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 방배동 자택을 찾았다. 여전한 기품과 미모를 간직한 여배우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집에서는 환자
―요즘은 어떻게 보내세요.
“집에서는 환자고 나가면 멀쩡한 일과를 보내고 있어요(웃음). 내가 걸음을 못 걸은 지 1년이 됐거든요. 허리 디스크 수술을 세 번이나 했는데, 요새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어요. 꾸준히 운동하고 재활치료하고 했더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나는 작년에서 끝나는 줄 알았어요. 세상 떠나는 줄 알 만큼 몹시 안 좋았어요.”
―얼마 전, 신필림에서 스틸사진사로 일하던 노기흘 선생이 당시부터 보관해 온 사진들을 안양시 행사에서 공개해 모처럼 신 감독의 미공개 사진을 봤는데, 그런 자료들이 불쑥불쑥 나오는 걸 보면 신 감독에 대한 여러 자료를 한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 꿈만 꾸고 있는데 아직도 실천 못 하고 있어요. 우리가 납북되는 바람에 그 많던 트로피를 비롯해 자료가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내가 국내에서 복원할 수 있는 건 다 다시 만들었어요. 신필림은 1950~60년대 영화 역사나 마찬가지예요. 사실은 내가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후배 영화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그걸 어제(11월 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사회를 했어요. 그 필름에도 많은 자료가 들어 있지만, 우리가 놓고 보는 거 하고 화면에 담아 보는 거 하고 틀리잖아요. 그래서 단독 전시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 생전에 꿈을 이뤘으면 해요.”
기념관 건립의 꿈
―그 자료는 현재 어디에 보관돼 있나요.
“안양촬영소에 불이 나면서 엄청난 자료들이 다 없어졌어요. 촬영 때 쓰는 의상도 200평 되는 창고에 꽉 찼었거든요. 우리 사진 자료도 두 박스는 됐는데, 그것도 다 없어지고 그거 생각하면 매우 가슴이 아파요. 남은 자료들을 모아서 시골 우리 딸 집에 100평짜리 창고를 하나 짓고 거기다 놔뒀어요. 1950년대서부터 쓰던 생활집기, 편집기, 동시 녹음이 가능한 미첼카메라를 비롯한 카메라 장비들 전부 거기 있어요.
필름 보관은 전문적으로 해야 하니까 영상자료원에 있고, 그 나머지 것들 내가 가지고 있지요. 누가 기념관 지을 땅은 준다고 그랬거든요. 건물 짓고 시설하는 게 엄청나니까 엄두가 안 나는 거지요. 기념관이라는 게 전시물만 전시해 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우리 작업이 움직이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시설이 있어야 해요.”
―북한에는 오히려 자료가 남아 있지 않나요.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가 북한엔 있을 것 같다고 하거든요.
“있어요, <빨간 마후라>. 우리가 가지고 나온 게 반은 원판이고, 반은 필름이라 그걸 복원해서 겨우 보게 만들었는데, 반은 안 좋고 반은 좋고 그래요.”
―몇 편이나 가지고 나왔나요.
“우리가 북에서 촬영해서 만든 것만 가지고 나왔어요. <심청전>만 못 가지고 나와서 내가 감독님한테 얼마나 원망을 들었는지. <심청전>은 일본에 수출이 됐기 때문에 살 수 있었는데, 우리가 경제적 여건이 안 돼 못 샀거든요.”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 한국영화 초창기라 영화감독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잖아요. 그때 신 감독은 어떤 분이었나요.
“처음 <코리아>라는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만났을 때는 그냥 여배우와 감독으로 끝났고, 같은 해 <꿈>을 찍으면서 연애를 했지요. 신 감독의 인상은 뭐라 그럴까 말이 없었어요. 그 이전에 나는 벌써 스타급이어서 가까워진 후에는 신 감독이 늘 비아냥거렸죠. 스타라서 큰소리친다고(웃음).”
―첫 작품 <악야>는 봤습니까.
“극단 사람과 다 같이 봤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게 키스신인데, 그때 한국영화에서 키스신은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까지만 보여주고 카메라를 돌렸거든요. 그런데 신 감독은 여자가 발을 돋우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잡더라고요. 모두 참 신선하다고 했고, 이해랑씨는 격찬을 했지요.”
북한에서 가져온 돈은 북한에 도로 뺏겨
―북한에도 영화인구가 많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북한에도 있을 건 다 있어요. 그런데 김일성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들을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게 문제지요. 그런 유의 작품에는 전부 ‘김일성 장군님’이 20번 이상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작품을 보고 출연한 배우 이름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출연 배역 이름으로 외워요. 그런 작품들을 보고 나면 평가회의를 열어가지고 거기서 감상평을 다 물어봐요. 극장은 하나 둘 정도 있고, 거의가 공장 기업소 안에 영상시설이 돼 있어요. 우리의 첫 작품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원래 연극이었는데 영화화했거든요. 원작이 김일성으로 돼 있는데, 반응이 좋아서 대박이 났어요. 그게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안겨줬죠.”
―그 이후 미국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은 또 풍이 바뀌었죠.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흥행물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아동물 ‘닌자 시리즈’를 했어요. 닌자는 패밀리 영화로 어느 정도 안전성이 있으니까 하신 거예요. 의외로 운 좋게 정말 대박 터뜨렸지요. 이 양반이 늘 하는 얘기가 ‘한국에서 수많은 작품을 해도 평생 먹을 게 없는데 여기서 한 작품 하니까 평생 먹을 게 생겼다’고 했어요. 정말 많이 벌었죠. 지금까지도 매년 얼마씩 들어와요. 그것 때문에 사는 거예요 정말.”
―그럼 북한에서 가져온 자금은 어디로 갔나요.
“뺏겼지요. 그러니까 그게 답답한 거예요. 그게 우리 계좌에 있던 돈이었는데, 다 줬어요. 왜냐면, 우리를 자기네가 납치했다는 얘기를 안 하고 스스로 탈출했다고(월북했다고) 밀어붙였거든요. 그 얘기를 안 하겠다고 해서 돌려줬어요. 그걸 우리가 먹었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어요.
우리가 나와서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라는 책을 써서 증언했는데, 자기네를 헐뜯지 않고 진실을 썼다는 걸 아니까 우리가 살아남은 거지…. 헐뜯는 걸로 썼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서방세계에서 보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진실만 얘기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거든요.”
결혼 후에는 신 감독한테 개런티 못 받아
―책을 보면 오히려 북한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선 제작 여건이 안 좋았잖아요.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만 했으면 오히려 북한에서 더 액티브하게 활동할 수 있었을 거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최초로 세계영화제의 수상기록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영화 만드는 데는 자유롭죠. 그런데 그 자유가 완전한 자유가 아니고 구속 속의 자유란 말이에요. 그게 무슨 자유라고 할 수 있나요?
신 감독과 나도 그렇고 완전 자유가 있어야만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있다고 항상 얘기를 했어요. 신 감독의 염원과도 같았던 <징기스칸>까지도 만들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완전히 뿌리 내리면 나올 수 없을 거 같아서 집도 지어줬는데 나왔잖아요.”
―신필림이 한국영화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봅니까.
“내가 말하기 우습지만, 영향은 컸다고 봐요. 늘 이야기하지만, 어디 우뚝 선 나무가 있으면 사람들은 거길 기준으로 함께 따라가게 돼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영화계에서 신필림은 그런 나무 같았다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그 속에는 신필림을 어떻게 해서든지 따라가야겠단 욕망도 있었을 것이고, 시기심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그게 다 영향력이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봐요. 모든 예술이 그렇지요. 또 감독도 많이 배출했잖아요. 영화배우도 많이 배출했고, 전속작가들도 있었고.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해요.”
―전속배우, 작가들은 거기 전속된 것만으로도 생활이 됐었나요.
“네. 내가 신 감독한테도 큰소리쳤던 게 전속작가나 배우한테 주는 개런티는 아끼지 않아요. 영화에 필요한 모든 건 아끼지 않고 하거든요.
그 당시 작가들이 그 돈 받아서 집도 사고 지방에서 땅도 사고 그런 사람도 있었는데 나만 골탕 먹었단 말이에요. 전 그냥 생활비만 갖다 썼어요. 나한테는 의상이나 화장품 사는 건 아끼지 않았어요. 날 아내로 생각 안 하고 배우로 생각했으니까.”
―신 감독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따로 개런티는 안 줬나요.
“결혼하기 전에 처음 출연한 <코리아>라는 작품에 7만원 받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정식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멘터리였는데, 그 당시 7만원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거금이었어요. 그 작품 뒤에 결혼을 했고 그때부터 안 받았어요. 미국회사에 있을 적엔 나도 정식 회사 일원으로서 등록됐기 때문에 월급을 받았던 거 그것밖에 없어요. 그나마 내가 차곡차곡 모아놓으면 그걸 영화에 도로 갖다 집어넣고…. 내가 그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
쇼핑은 꼭 신 감독과 같이 해
―신 감독 사후에 《고백》이라는 책을 낼 때, 여자로서는 고백하기 힘든 일까지 포함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데, 이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신 감독도 돌아가셨고, 우리 두 사람한테 이북에 관한 억측 같은 것도 여전하게 있고, 우리 부부에 관한 억측도 있었기 때문에 내가 죽기 전에 진실을 완전히 털어놔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양반 죽고 나서 나도 금방 죽을 것 같았어요. 책 쓰는 것 때문에 디스크 수술 다음에는 푹 쉬어야 되는데 이거 붙잡고 계속 쓴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허리가 이 모양이 된 거예요.”
―이 책 내용 중 신 감독이 모르는 내용도 있나요.
“거의 없을 거예요. 없을 거야….”(책 내용 중에는 6·25전쟁 중 국군 헌병대장에게 불려가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경험도 나와 있다.)
―모든 걸 공유하신 부부 사이네요.
“네. 우리는 때론 친구같이 모든 것 다 같이 느끼고, 아무것도 숨김이 없었어요.”
―그런 신뢰로 살다가 이혼한 일은 더 큰 상처였겠어요.
“배신감에 상처를 받았죠. 참 헌신적으로 했거든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요.
“아기를 못 낳은 거예요.”
―아기 못 낳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저희 작은 이모가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아기를 못 낳았어요. 유전인지 몰라도 나 역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아기가 안 생겼어요.”
―그래도 4명의 자녀가 있는데, 누가 젤 효자예요.
“다 효자예요. 우리 큰아들은 가까이 있고, 둘째는 미국에 있는데, 한 달에 꼭 두 번씩 안부 전화 오고, 애들이 다 괜찮아요.” (최 여사는 슬하에 네 아이를 뒀다. 명임, 정균씨는 입양한 자녀이고, 상균, 승리씨는 오수미씨가 낳았다. 그녀는 신 감독과 이혼과 재결합, 납북과 망명, 귀국의 와중에서도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신 감독은 이와 관련, 생애 마지막으로 받은 영화상 시상식장에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했다.)
―신 감독과 일을 같이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관계였을 것 같은데, 감독과 남자로서 다 좋았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워낙 영화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가정을 돌아볼 수 없었던 거는 이해를 했어요. 사람이 여러 가지 다 할 수 없으니까.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대신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난 평생 혼자 쇼핑한 적이 없어요. 쇼핑할 때면 꼭 같이 가서 자기가 골라줘야지. 그래서 감독님 돌아가신 후에는 내가 쇼핑을 못 해요. 조카들 시켜서 사오라고 그러지.”
한 남자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원도 한도 없어
―사람들이 평생 한 번도 못 겪을 일들을 겪으면서 함께 살아왔는데, 신 감독의 가장 잊히지 않는 모습은.
“저런 자세(응접실 벽에 걸린 카메라를 보는 신 감독의 사진을 가리키며)가 신 감독이 일할 때 모습이지요. 카메라 옆에서 나도 평생 같이 움직였고, 이북에 가서도 내가 연출부 일을 하고, 저 양반은 카메라를 주로 하시니까 항상 카메라와 함께한 모습이 꿈에 나타나요. 이 양반이 항상 내 옆에 있는 거예요. 이건 이 양반 반지거든(손가락에 낀 쌍가락지를 보여주며).”
―모든 걸 다 떠나서 한 남자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원도 한도 없을 거 같아요.
“그렇죠. 아무리 감독과 여배우라고 해도 이혼했을 때 7년(이혼 후 2년, 북한에서 신 감독이 억류된 5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에 24시간 떨어져 본 적이 없이 생활을 했거든요.
마릴린 먼로의 <7년만의 외출>이 생각나네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간통죄 1호’로 떠들썩했잖아요? 그때 언론이 한국의 잉그리트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유부남이던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자 로셀리니 감독이 유부녀 대스타인 버그만과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했으나, 두 사람의 불륜이 영화계는 물론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두 사람 다 재기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이혼)라고 비난했어요.”
―신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태워버리라고 했던 <연산군>은 유럽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은 작품인데, 특히 원색적인 색감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그 의상을 내가 다 만들었거든요. 시장에 가서 내가 직접 색감 골라가지고. 그래서 더 자부심을 느껴요. 집에서 다 의상을 만들었거든요.”
“월북설은 상상”
―그런 의상들이 화재로 불에 탔을 때 안타까웠겠어요.
“자식이 죽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만난 김에 확인하고 싶은데요, 두 분과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정창화 감독께서는 지난번 인터뷰에서 두 분이 월북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거든요. 특히 최 여사님 경우는 납북됐던 1978년 1월 14일 새벽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정 감독이 촬영스케줄이 있어서 저녁에 보자고 해도 계속 당장 보자고 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결국 저녁으로 미루고 나갔더니 바람을 맞았다는 얘기였어요. 왜 그렇게 황급하게 보자고 했는지 지금도 궁금해하더라고요.
“자길 그렇게 황급하게 만날 이유가 뭐 있어. 정 감독은 그 전부터 잘 알던 사이고 더군다나 홍콩에 있었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 약속을 잡았거든요. 정 감독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포함해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거든요. 무슨 남자가, 나는 있는 말도 다 못 하는데 없는 말을 만들어내. 자기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상상하는 모양이지?”
―신 감독은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진실을 알 길이 없지만, 정 감독이 홍콩에서 마지막에 들은 말이 “은희 만나러 가겠다”였다고 했어요. 그걸 어떻게 납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그 사람 인품을 드러내는 거예요.”
―신 감독의 작품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 미흡한 점은 없으세요.
“글쎄요. 나로선 만족할 수 없어요. 다 찬성할 수도 없고. ‘미장센 감독’이라는 평가는 맞는 것 같아요. 자타가 공인하는 부분이니까. 작품 할 적에 소품 하나도 찍다가 마음에 안 들면 중단시키고 인사동에 날 꼭 데리고 뛰어가요. 소품 자기가 골라서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에요. 작품 하나 완성하기 전까지는 시간 공간을 따지지 않았어요. 당시도 시간이 매우 중요했거든요. 시간이 금이라고 했어요. 겹치기 출연이 많아서 배우 한 번 쓰려면 일주일 열흘 기다려야 와요. 그걸 메우기 위해 하루에 몇 커트를 찍어야 하는데, 촬영을 미루고 그렇게 달려가는 그런 사람이니까 뭐 이루 말할 수 없죠. 신 감독을 정말 깊이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 먹는 거 입는 거 생각 안 하고 영화만 알던 사람이라는 거 잘 알지요. 그런 생각하면 신 감독이 인덕이 없다,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요. 어떤 사람은 놀 거 다 놀면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요.”
“누구와 사이 좋지 않아 영화사 허가 취소됐나”
―신 감독에 대해 후학들이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는 거죠.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봐 줬으면 하는 거죠. 정말 겉핥기로만, 구전으로 들은 것만으로 쓰니까 안타까워요.”
―신필림이 망하지 않았었다면, 신 감독이 북으로 납치되는 상황이 안 됐겠지요? 박 정권 누구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던 거예요?
“정권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었던 거고 다만 내가 한 가지 정말 아쉬운 것은 우리가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학교(안양예고)도 커 나갔을 거라 그게 아쉽고, 신 감독도 50대에 붙잡혀 갔으니까 한창 일할 때 아녜요? 정말 좋은 작품 만들어서 우리 기반을 굳건히 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너무 커요. 납치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김정일이 항상 그런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상황을 아니까 아, 이 사람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
―공백기 동안에 한국영화가 많이 바뀌어 있던가요.
“바뀌어는 있었는데, 영화계가 좋은 방향으로 컸다고 볼 수는 없었어요. 지난 10년간 정치적으로나 모든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보지만요.”
―신 감독이 주춧돌 역할을 했다면, 한국영화계가 달라졌을까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싶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죠. 영화계는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작품 하나 흥행만 잘되면 상은 모조리 타는 식으로 그런 폐단이 있어요. 작품으로서 평가하는 게 아니라 흥행으로 평가한단 말이에요. 손님 많아야 일등이라는 식으로 평가하니까.”
“독립 프로덕션 살아나야”
―앞으로 한국영화의 앞날을 어떻게 보나요? 요즘도 영화 가끔 보죠.
“앞날은 밝다고 봐요. 여배우니까 뭐 그런 면에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 영화제작 자체를 메이저(CJ, 롯데 등)에서만 하잖아요. 실제 영화 만드는 사람은 공장에서 물건 만들어내는 역할밖에는 못 하더라고요. 메이저에서 이득을 다 취한대요. 그런 게 참 아쉽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립 프로덕션이 좀 살아나야 되는데, 참 어려워요. 그렇게 되자면 작품을 잘 만들어야 되는데. 그러다 보니 워낙 대작(大作) 위주로 가잖아요. 그러니까 독립 프로덕션에서 감히 소(小)자본 가지고 할 엄두를 못 내더라고요. 그런 면에서는 어두운 면이 많고요.”
―신 감독 기념사업회가 재정난이란 말을 들었어요. 청년영화제도 올해는 완전히 빈 좌석에 썰렁하게 진행됐던데,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요.
“우리 기념사업회가 주최하질 못했어요. 내년부터는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어요.”⊙
그가 지구상에서 유일한 냉전지대로 남은 한반도에서 남과 북을 넘나들며 영화를 만든 특이한 발자취를 남기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그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는 지금보다 더 강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발자취처럼 그의 작품을 쫓아가는 길은 늘 이념의 틀 속에서 혼돈스럽게 엉켜버리고 만다. 작품만을 볼 것인지, 그 속에 담긴 사상까지 봐야 하는지, 그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아직도 씻어지지 않는 미혹이 머물러 있다.
그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되던 시기에 태어났고,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숭배하며 성장했다. 또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는 화려한 테크니션이었던 <자유만세>(1946)의 최인규 감독 밑에서 영상 테크닉을 전수받아 확고한 영화기술로 무장한 장르의 대가로서 한국영화계에 우뚝 섰다. 그는 채플린처럼 자신이 속한 시대의 맥락을 직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다양한 심도로 그려내는 감독으로서 예술적 평가보다는 대중의 감정에 승부를 건 흥행사로 한때 한국영화계를 쥐락펴락 했다.
신 감독의 활동이 본격화했던 1960년대 전후는 영화계가 내적으로는 주류 영화산업 시스템을 모색하는 시기였고, 외적으로는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을 편 박정희 정권의 국산영화 제작지원 정책이 맞아떨어졌던 상황이었다. 미국 메이저 영화사 시스템을 본뜬 신필림의 거대한 족적은 이런 시류의 산물이기도 했다. 신필림은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아 출범할 수 있었고,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1975년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로 영화사 허가가 취소되는 파국을 맞았다. 그 후 그의 영화제작활동은 북한에서 이어졌다.
남한·북한·미국으로 이어진 영화 같은 영화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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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북(在北) 시절 <탈출기>를 촬영하는 신상옥 감독(왼쪽)과 최은희씨(오른쪽). 김일성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
이런 영화 같은 그의 인생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판가름하려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복잡한 사연 속에서 그가 평생 오로지 영화만 바라본 열정만을 추출해 낸다면, 그의 영화에 색깔을 나누는 작업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신필림 허가가 취소된 후 어느 날 갑자기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그가 북한에서 ‘신필림영화촬영소’의 총장으로 최은희씨에게 모스크바 영화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안긴 <소금>(1985)과 같은 영화를 열심히 만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난 10월호 이 코너에 작품세계를 소개한 정창화 감독은 인터뷰에서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본 신 감독의 모습을 기억하며 납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의혹은 여전하지만, 그의 관심이 이데올로기였다면 매년 300만 달러를 썼을 만큼 무제한적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북한에서 ‘우상숭배’의 족쇄를 채우려 하자 다시 남쪽으로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활동 본거지는 1960~70년대는 남한, 1980년대는 북한, 1990년대는 미국이었다.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이 있을까? 그의 어떤 영화도 그의 삶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다.
그의 영화행적에 대한 관심은 이제 접어두고 오락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그의 폭넓은 영화세계를 본격적으로 탐험해 보자.
1960년대 신상옥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 쏟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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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화>(1958년). |
이 시기 신 감독의 영화는 ‘전통’을 섹슈얼리티가 억압된 여성으로, ‘근대’를 섹슈얼리티 과잉의 여성으로 각기 등치시켰다. <지옥화>는 매혹적이고 위협적인 여성을 통해 근대화를 표현한 작품이다. 숨 막히도록 매혹적이지만 죽음에 이를 만큼 위험하고 타락한 존재 소냐는 당시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미국식 모더니티의 실체였다. <꿈>은 일종의 초현실 세계 속에서 설화적인 인생관과 이상적인 미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작고)씨는 우리나라 초기 소위 ‘문예영화’들이 경험적인 현실과는 격리된 액자 속의 이미지 세계라는 스타일로 고급작품처럼 포장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신상옥의 경우는 이것이 작가 체질의 근저를 이루는 중요한 경향이라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설화적 상상력은 실존가능성이 있는 역사와 만나면서 <성춘향>(1961), <연산군> (1961), <폭군 연산>(1962), <대원군> (1968), <내시>(1968), <이조여인 잔혹사>(1969), <속 내시>(1969), <이조괴담> (1970)으로 변주되어 섬세하면서도 장대한 드라마로 펼쳐졌다.
신 감독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원숙한 작가의식과 뛰어난 영화적 테크닉이 숙성된 성과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시절이 2기로 분류될 수 있다. 이른바 신상옥의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연달아 쏟아져나온 시기로, <상록수>(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벙어리 삼룡이>(1964) 등을 이때 만들었다.
이들 작품에서는 최은희씨가 아름다운 수절과부로 나오는데, 봉건적인 윤리와 여성의 욕망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지점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작품들이다. 신 감독은 “오락성이 없거나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영화로 보지 않는다” “나는 유교를 찬미한다”는 지론을 설파해 왔는데, 이 두 가지 요소가 가장 영화적으로 잘 표현된 작품들이다. 이런 특징은 전통사회에서 태어나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경험을 하면서 성장한 신 감독 자신의 특질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영화 심취
그는 192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신병용씨와 어머니 김봉선씨 사이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신태서(申泰瑞)인데, 신상옥이라는 이름은 영화계에 입문하면서 사용했다. 한의사인 아버지는 유교적 가풍을 중시했다. 청진과 회령은 영화와 관계가 깊은 지방으로, 춘사 나운규와 그의 평생동지인 윤봉준이 함께 성장하며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청진에만 세 곳의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영화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신 감독의 집 앞에 한 번에 두세 편씩 동시 상영하는 ‘소화좌(昭和座)’라는 영화관이 있었다. 그는 천마소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이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국내 영화는 물론 서양영화, 일본 무사영화 등을 섭렵했다.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골드러시> <독재자> 등을 이 시절에 봤다.
소학교 졸업 후 경성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당시 국어교사가 모던 시인인 김기림씨였고, 감하건 화백이 미술교사였다. 그는 미술반 반장으로 초현실주의에 심취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동창이 만화가 신동헌, 시인 김규동, 정치가 김철씨 등이다. 경성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가 범죄자의 사망진단서를 떼준 일을 계기로 의사면허를 취소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었지만 어머니의 억척스런 뒷바라지로 형과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신 감독은 동경미술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 그는 미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다. 미술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화면구도를 잘 잡거나 색감이 예민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 가시적으로 형성해 내는 선, 색, 형, 질감, 공간에 대한 감각과 그것들의 균형, 조화, 대비, 율동감 등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관점은 훗날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그대로 적용됐다. 영화계에 몽타주 이론을 만들어낸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등은 신 감독처럼 모두 미술 수련을 거친 사람들이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신 감독은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징병을 피해 숨어지내던 차에 광복이 되자 생계를 위해 포스터 그리는 일에 나섰다. 당시 미 군정청은 선전이나 계몽을 위한 포스터를 많이 붙였는데, 인쇄 시설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일일이 손으로 그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영화 포스터도 연결이 된 것이다. 그즈음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를 보고 매료돼 영화 일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고려영화사의 최 감독 문하생이 되었다. 당시 신 감독과 함께 최 감독의 연출부를 거친 감독이 정창화, 홍성기 감독으로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훗날 납북된 최인규 감독은 일제강점기부터 <국경>(1939), <수업료>(1940), <집없는 천사>(1941) 등으로 영화계에 주목을 받다가 광복과 함께 <자유만세>, <독립전야>(1948) 등의 화제작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이고 독창적이었다. 아무도 그런 유의 화면을 만들어낼 줄 모르던 시절의 선구자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다. 그가 자신의 영화는 직접 촬영을 하고 편집하며 새로운 기재나 기술도입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투자를 한 것은 모두 최 감독의 영향 때문이었다.
신인 감독, 인기스타 최은희와 연인이 되다
26세가 되던 해 고려영화사를 떠난 그는 데뷔작으로 <악야>를 만들었다. 문정숙씨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실험적인 요소가 강한 16mm 작품이다. 이 영화는 촬영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결국 피란지인 부산에서 완성해 개봉했다. 전쟁 시 신 감독은 공군 정훈국 촬영대 요원으로 입대해 홍성기 감독과 함께 <출격명령>이라는 공군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피란길에 올랐던 부모는 전쟁통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1·4후퇴 때 아버지가 폭격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피란생활 중 얻은 병으로 부산에서 별세했다.
그는 결혼도 영화같이 했다. 아내인 최은희씨는 평생 그에게 영원한 ‘여주인공’이면서 영화적 동지였다. 당시 최씨는 6·25 이전부터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연극배우였다. 이 두 사람이 만난 건 <야화(野花)>라는 작품에 출연하고 있을 때였다. 최씨는 남편인 촬영기사 김학성씨와 별거를 하던 상황이었는데, 정신적 고통과 과로로 무대에서 쓰러진 최씨를 본 신 감독이 객석에서 달려나와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을 인연으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당시 <코리아>(1954)를 기획하고 있던 신 감독은 영화 속 이야기 중 하나인 <춘향전>에 최씨를 출연시킬 생각으로 캐스팅을 위해 무대를 찾았던 길이었다. 최씨는 신 감독의 출연제의를 바로 승낙했고, 서울로 올라와 촬영하면서 연인이 됐다.
이 두 사람을 김학성씨가 간통죄로 고소해 우리나라 ‘간통죄 1호’로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최씨는 유부녀지만 이미 인기스타였기 때문에 신인 감독과의 연애는 호기심이 끌리는 대형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리아>의 촬영은 벽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신상옥의 작품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 영화계의 분위기였다.
〈성춘향〉 對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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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춘향>(1961년). |
이십여 종에 육박하는 각종 춘향전 영화 가운데 신 감독의 <성춘향>은 백미에 속한다. 이 시기의 영화 가운데 비디오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지만, 군데군데 중요한 장면들이 잘린 채 출시돼 대가의 작품치고는 범작이라는 오해를 받는 안타까운 영화이기도 하다. 당시 홍성기 감독 역시 <춘향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성춘향>과 맞대결을 펼쳤는데, 완패로 끝났다.
두 감독이 각자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확연하게 구분된다. 신 감독의 <성춘향>은 광한루에서 놀던 이 도령이 방자와 수행 사령들에게 “상하의 구별을 다 치우고 함께 놀자”며 자상하게 술을 권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홍 감독 <춘향전>의 이 도령은 다재다능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자로 등장한다. 4·19혁명을 경험한 관객들은 모두 ‘민주적인’ 신 감독의 이 도령을 택했다.
<무숙자>(1968)라는 서부극 또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서부극의 트레이드 마크인 황야에 대한 상상력을 우리 민족의 경험 속으로 끌어들여 만주벌판으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서부극이면서 액션멜로로 전이하는 한국적 장르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연구되고 있기도 하다.
서울 인구 5명 중 1명이 본 성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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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스 빠빠>(1960년). |
1960년대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또 빠질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패왕 신필림의 등장이다. <로맨스 빠빠>(1960)는 그 서막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신필림의 전신인 ‘신상옥 푸로덕션’의 작품으로 그 당시 기라성 같은 배우였던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남궁원, 엄앵란이 총출동해 엄청난 흥행을 거둔 작품이다. 1952년에 <악야>로 데뷔해 모두 15편의 영화를 아내 최은희씨를 주인공으로 찍어냈지만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는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로맨스 빠빠>는 제작자로서 신상옥의 가치를 부각시킨 작품이었다.
이어 1961년 1월 28일 개봉한 <성춘향>이 40만명(당시 서울 인구 200만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흥행에 성공하면서 신 감독은 탄탄한 제작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정부는 15편 이상을 제작한 영화사만 제작사 등록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교부 고시를 공표했다. 당시 65개에 이르던 영화사는 이 기준 때문에 16개로 통폐합됐다. 신 감독은 프로덕션을 ‘주식회사 신필림’으로 바꿔 등록했다. 이들 중 명실상부한 제작사는 신필림이 유일했다. 독주체제가 마련된 것이다. 제작사만 외화수입과 제작권을 받는 특혜가 주어지기 때문에 영화계에서는 뒷말이 무성했다. 10편도 아니고 20편도 아닌 15편(<로맨스 빠빠>는 그의 16번째 작품이었다)이라는 숫자에 대해 영화계 인사들은 신 감독과 정부의 밀월관계를 의심했고, 영화계는 신필림과 그에 대항하는 충무로라는 두 세력으로 양분됐다.
신필름, 10년간 150편 제작
신필림으로 명패를 바꿔 단 1961년 이후부터 1969년까지가 신상옥 왕국의 전성기이다. 신필림의 위용은 대단했다. 용산구 문배동에 위치한 1000평 규모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3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을 갖추고 있었다. 부설연기자 학원까지 마련해 두고 있었다.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 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를 주름잡은 배우들을 발굴해 냈다.
전속작가, 감독, 촬영기사, 녹음기사까지 모두 갖춘 거대한 신필림의 제작편수는 수적으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모두 10년간 신필림이 쏟아낸 작품은 102편이다. 휘하에 두고 있던 안양필름과 신아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모두 150편이 넘는다.
이 거대왕국의 몰락은 1966년과 1967년 사이에 진행됐다. 신필림은 홍콩을 비롯한 해외와의 합작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는 등 몸집 불리기에 나섰지만 기대했던 정부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막대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재정적 위기에 처했다. 정부가 신필림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거둔 데는 영화인들의 공개적인 반발이 작용한 탓이 컸다. 1966년 영화인들이 영화법 폐기 건의문을 제출하는 등 반발이 심해지자 정부는 영화 제작업자 등록제의 내용을 대폭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동안 영화법의 방패막이 속에서 승승장구하던 신필림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당시 신필림은 과도한 제작편수에 따른 태작들을 양산한 결과 흥행과는 점점 멀어지는 실정이었다. 결국 1970년 신필림은 회사규모를 줄인 뒤 ‘안양영화주식회사’로 변신했다. 1973년에는 다시 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으로 개명하면서 연명하는 처지까지 추락했다. 그러다가 1975년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검열과정에서 삭제한 키스신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 말소 명령을 받는 수모를 겪으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975년 삭제된 키스신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허가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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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납치를 지시했던 김정일(가운데)은 두 사람을 파티에 초청하곤 했다. |
신 감독 영화의 3기는 북한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 1월 홍콩에서 납북된 최은희씨를 찾아나선 그는 같은 해 북한에서 최씨를 다시 상봉했다. 선동정치 체제를 굳히고 있던 북한에서 영화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느 장소에서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시스템이 갖춰져 있을 정도였다. 좋은 영화만 없는 상태였다.
신 감독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의 북한생활에서 모두 7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첫 5년은 감금상태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지는데, 탈출 전 3년간이 활동기간이다.
그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것은 춘향전을 소재로 한 <사랑 사랑 내 사랑>(1984)으로 10전짜리 입장권이 100배나 되는 10원으로 암거래될 정도였다고 한다. 통통함이 미덕이던 북한 여배우의 이미지를 이 영화로 바꿔놓았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공항 귀빈접대실 접대원이었던 현대적 이미지의 여성을 픽업했고, 새로운 아름다움의 전형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성공 여세를 몰아 북한에서는 처음으로 효를 주제로 한 영화였던 <심청전>(1985)을 만들었고, 북한 괴수영화의 첫 작품인 <불가사리>(1985)도 선보였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신필림영화촬영소’의 총장으로 일 년에 3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마음껏 썼다. 제작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나올 수 있는 시기였다.
북한에서의 첫 작품인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가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소금>(1985)은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최은희씨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신필림 시절 그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쌀>(1963), <빨간 마후라>(1964), <이조여인 잔혹사>, <전쟁과 인간>(1971) 등으로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천년호>(1969)로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받은 정도였지 명성 있는 국제영화제의 본상 수상은 하지 못했다.
이후 1986년 다시 남쪽으로 탈출한 시기에 만든 <증발>(1994)로 칸영화제에 초대되어 특별 상영되고, 심사위원으로 영화제에 참여했다. 2002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신상옥 영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쓰리 닌자>로 할리우드 진출 성공
탈출한 이후 작고하기까지 신 감독이 만든 영화를 크게 4기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기에 그는 ‘Sheen Productions’을 만들어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다.
첫 작품 <징기스칸>은 제작비를 대기로 한 일본 기업이 무너지면서 기획단계에서 무산됐지만, 300만 달러로 만든 아동물 <쓰리 닌자>(1995)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대본은 시나리오 작가 김강윤씨와 함께 그가 만들어 영역을 현지인에게 시켰다. 영어가 서툰 그는 신인감독인 존 터틀타웁에게 이 작품을 맡겼다. 터틀타웁은 이 작품으로 인정을 받아 산드라 블록 주연의 <당신이 잠든 사이에>, 존 트라볼타 주연의 <페노메논>,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본능>을 만들며 스타급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쓰리닌자> 때 그의 감독 개런티는 3만 달러였는데, 그 후에는 500만 달러가 됐다.
<쓰리 닌자>는 그가 직접 촬영을 맡았다. 제작비를 아낀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할리우드 첫 작품을 그의 손으로 직접 찍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사회 직후 디즈니에서 배급을 자처하고 나서 미국 전역 1200개 극장에서 개봉되었고, 1999년까지 200만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팔려나갔다. 이 작품은 디즈니의 막강한 시장 속에서 아직도 팔리고 있다. 이 성공을 계기로 그는 할리우드에서 아동물로 승부를 보려고 했지만 의도대로 되질 않았다. <쓰리 닌자>의 성공 이후 그는 닌자 시리즈 3편을 더 제작했지만, 배급사가 컬럼비아로 바뀌면서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또 북한에서 만든 <불가사리>를 서양의 중세시대로 옮긴 어린이용 <갈가메스>도 배급망을 잡지 못했고, 정원사 살인사건을 다룬 <사일런트 스크림> 역시 스타급 배우가 없어서 배급에 실패했다.
〈마유미〉 〈실종〉 실패
<징기스칸>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만든 작품 <마유미>(1990)는 탈출 3년 만인 1989년에 서울로 돌아온 그가 만든 그의 4기 첫 작품이다. 탈북 이후 이념 논쟁에 휘말린 자신의 생각을 남한에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당시 똑같이 냉전이데올로기를 다룬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은 성공했지만 <마유미>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 이후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드러낸 김형욱 사건을 다룬 <증발> 역시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이 두 편으로 국내에서 “신상옥도 이제는 갔다”는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할리우드 진출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는 2004년 75번째 작품인 <겨울이야기>를 유작으로 남기며 작품활동을 접었다. 이 영화는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신구)와 며느리(김지숙) 사이의 갈등과 애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인생의 겨울을 담담하게 그려낸 거장의 노작으로 꼽힌다. 현란한 CG가 날뛰는 시점에 거꾸로 1960년대 전성기 시절의 신 감독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 드는 차분한 작품이다. 그는 ‘거울 앞으로 돌아와 다시 선’ 노장답게 이 시대에 영화가 어떻게 현실에 접근해야 하는가를 되새기도록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행적을 이데올로기적 잣대로 측정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느끼게 된다.
2006년 4월, 신 감독은 80세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영화가 곧 그의 인생이었고, 인생이 영화 같았던 그의 삶은 ‘신화’로 남아 한국영화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신상옥 감독의 ‘영원한 동지’ 최은희 인터뷰
“내 생애 마지막 꿈도 신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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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희. |
이 상은 그녀가 오랜 세월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분야를 넘나드는 종합 예술인으로 활동해 온 업적을 기리는 의미다. 그녀는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소금>으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바 있으며, 영화감독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과 일본에서도 출간된 북한생활 고백수기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와 자서전 《고백》 등이 있다.
신 감독과 1954년 결혼한 이후 한동안 이별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운명공동체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추억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신 감독의 영원한 동지였던 최씨에게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 방배동 자택을 찾았다. 여전한 기품과 미모를 간직한 여배우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집에서는 환자
―요즘은 어떻게 보내세요.
“집에서는 환자고 나가면 멀쩡한 일과를 보내고 있어요(웃음). 내가 걸음을 못 걸은 지 1년이 됐거든요. 허리 디스크 수술을 세 번이나 했는데, 요새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어요. 꾸준히 운동하고 재활치료하고 했더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나는 작년에서 끝나는 줄 알았어요. 세상 떠나는 줄 알 만큼 몹시 안 좋았어요.”
―얼마 전, 신필림에서 스틸사진사로 일하던 노기흘 선생이 당시부터 보관해 온 사진들을 안양시 행사에서 공개해 모처럼 신 감독의 미공개 사진을 봤는데, 그런 자료들이 불쑥불쑥 나오는 걸 보면 신 감독에 대한 여러 자료를 한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 꿈만 꾸고 있는데 아직도 실천 못 하고 있어요. 우리가 납북되는 바람에 그 많던 트로피를 비롯해 자료가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내가 국내에서 복원할 수 있는 건 다 다시 만들었어요. 신필림은 1950~60년대 영화 역사나 마찬가지예요. 사실은 내가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후배 영화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그걸 어제(11월 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사회를 했어요. 그 필름에도 많은 자료가 들어 있지만, 우리가 놓고 보는 거 하고 화면에 담아 보는 거 하고 틀리잖아요. 그래서 단독 전시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 생전에 꿈을 이뤘으면 해요.”
기념관 건립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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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찍던 시절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는 연애를 했다. |
“안양촬영소에 불이 나면서 엄청난 자료들이 다 없어졌어요. 촬영 때 쓰는 의상도 200평 되는 창고에 꽉 찼었거든요. 우리 사진 자료도 두 박스는 됐는데, 그것도 다 없어지고 그거 생각하면 매우 가슴이 아파요. 남은 자료들을 모아서 시골 우리 딸 집에 100평짜리 창고를 하나 짓고 거기다 놔뒀어요. 1950년대서부터 쓰던 생활집기, 편집기, 동시 녹음이 가능한 미첼카메라를 비롯한 카메라 장비들 전부 거기 있어요.
필름 보관은 전문적으로 해야 하니까 영상자료원에 있고, 그 나머지 것들 내가 가지고 있지요. 누가 기념관 지을 땅은 준다고 그랬거든요. 건물 짓고 시설하는 게 엄청나니까 엄두가 안 나는 거지요. 기념관이라는 게 전시물만 전시해 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우리 작업이 움직이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시설이 있어야 해요.”
―북한에는 오히려 자료가 남아 있지 않나요.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가 북한엔 있을 것 같다고 하거든요.
“있어요, <빨간 마후라>. 우리가 가지고 나온 게 반은 원판이고, 반은 필름이라 그걸 복원해서 겨우 보게 만들었는데, 반은 안 좋고 반은 좋고 그래요.”
―몇 편이나 가지고 나왔나요.
“우리가 북에서 촬영해서 만든 것만 가지고 나왔어요. <심청전>만 못 가지고 나와서 내가 감독님한테 얼마나 원망을 들었는지. <심청전>은 일본에 수출이 됐기 때문에 살 수 있었는데, 우리가 경제적 여건이 안 돼 못 샀거든요.”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 한국영화 초창기라 영화감독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잖아요. 그때 신 감독은 어떤 분이었나요.
“처음 <코리아>라는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만났을 때는 그냥 여배우와 감독으로 끝났고, 같은 해 <꿈>을 찍으면서 연애를 했지요. 신 감독의 인상은 뭐라 그럴까 말이 없었어요. 그 이전에 나는 벌써 스타급이어서 가까워진 후에는 신 감독이 늘 비아냥거렸죠. 스타라서 큰소리친다고(웃음).”
―첫 작품 <악야>는 봤습니까.
“극단 사람과 다 같이 봤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게 키스신인데, 그때 한국영화에서 키스신은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까지만 보여주고 카메라를 돌렸거든요. 그런데 신 감독은 여자가 발을 돋우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잡더라고요. 모두 참 신선하다고 했고, 이해랑씨는 격찬을 했지요.”
북한에서 가져온 돈은 북한에 도로 뺏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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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북한을 탈출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가 그해 6월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북한에도 있을 건 다 있어요. 그런데 김일성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들을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게 문제지요. 그런 유의 작품에는 전부 ‘김일성 장군님’이 20번 이상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작품을 보고 출연한 배우 이름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출연 배역 이름으로 외워요. 그런 작품들을 보고 나면 평가회의를 열어가지고 거기서 감상평을 다 물어봐요. 극장은 하나 둘 정도 있고, 거의가 공장 기업소 안에 영상시설이 돼 있어요. 우리의 첫 작품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원래 연극이었는데 영화화했거든요. 원작이 김일성으로 돼 있는데, 반응이 좋아서 대박이 났어요. 그게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안겨줬죠.”
―그 이후 미국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은 또 풍이 바뀌었죠.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흥행물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아동물 ‘닌자 시리즈’를 했어요. 닌자는 패밀리 영화로 어느 정도 안전성이 있으니까 하신 거예요. 의외로 운 좋게 정말 대박 터뜨렸지요. 이 양반이 늘 하는 얘기가 ‘한국에서 수많은 작품을 해도 평생 먹을 게 없는데 여기서 한 작품 하니까 평생 먹을 게 생겼다’고 했어요. 정말 많이 벌었죠. 지금까지도 매년 얼마씩 들어와요. 그것 때문에 사는 거예요 정말.”
―그럼 북한에서 가져온 자금은 어디로 갔나요.
“뺏겼지요. 그러니까 그게 답답한 거예요. 그게 우리 계좌에 있던 돈이었는데, 다 줬어요. 왜냐면, 우리를 자기네가 납치했다는 얘기를 안 하고 스스로 탈출했다고(월북했다고) 밀어붙였거든요. 그 얘기를 안 하겠다고 해서 돌려줬어요. 그걸 우리가 먹었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어요.
우리가 나와서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라는 책을 써서 증언했는데, 자기네를 헐뜯지 않고 진실을 썼다는 걸 아니까 우리가 살아남은 거지…. 헐뜯는 걸로 썼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서방세계에서 보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진실만 얘기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거든요.”
결혼 후에는 신 감독한테 개런티 못 받아
―책을 보면 오히려 북한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선 제작 여건이 안 좋았잖아요.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만 했으면 오히려 북한에서 더 액티브하게 활동할 수 있었을 거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최초로 세계영화제의 수상기록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영화 만드는 데는 자유롭죠. 그런데 그 자유가 완전한 자유가 아니고 구속 속의 자유란 말이에요. 그게 무슨 자유라고 할 수 있나요?
신 감독과 나도 그렇고 완전 자유가 있어야만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있다고 항상 얘기를 했어요. 신 감독의 염원과도 같았던 <징기스칸>까지도 만들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완전히 뿌리 내리면 나올 수 없을 거 같아서 집도 지어줬는데 나왔잖아요.”
―신필림이 한국영화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봅니까.
“내가 말하기 우습지만, 영향은 컸다고 봐요. 늘 이야기하지만, 어디 우뚝 선 나무가 있으면 사람들은 거길 기준으로 함께 따라가게 돼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영화계에서 신필림은 그런 나무 같았다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그 속에는 신필림을 어떻게 해서든지 따라가야겠단 욕망도 있었을 것이고, 시기심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그게 다 영향력이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봐요. 모든 예술이 그렇지요. 또 감독도 많이 배출했잖아요. 영화배우도 많이 배출했고, 전속작가들도 있었고.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해요.”
―전속배우, 작가들은 거기 전속된 것만으로도 생활이 됐었나요.
“네. 내가 신 감독한테도 큰소리쳤던 게 전속작가나 배우한테 주는 개런티는 아끼지 않아요. 영화에 필요한 모든 건 아끼지 않고 하거든요.
그 당시 작가들이 그 돈 받아서 집도 사고 지방에서 땅도 사고 그런 사람도 있었는데 나만 골탕 먹었단 말이에요. 전 그냥 생활비만 갖다 썼어요. 나한테는 의상이나 화장품 사는 건 아끼지 않았어요. 날 아내로 생각 안 하고 배우로 생각했으니까.”
―신 감독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따로 개런티는 안 줬나요.
“결혼하기 전에 처음 출연한 <코리아>라는 작품에 7만원 받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정식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멘터리였는데, 그 당시 7만원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거금이었어요. 그 작품 뒤에 결혼을 했고 그때부터 안 받았어요. 미국회사에 있을 적엔 나도 정식 회사 일원으로서 등록됐기 때문에 월급을 받았던 거 그것밖에 없어요. 그나마 내가 차곡차곡 모아놓으면 그걸 영화에 도로 갖다 집어넣고…. 내가 그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
쇼핑은 꼭 신 감독과 같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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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초 파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 |
“신 감독도 돌아가셨고, 우리 두 사람한테 이북에 관한 억측 같은 것도 여전하게 있고, 우리 부부에 관한 억측도 있었기 때문에 내가 죽기 전에 진실을 완전히 털어놔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양반 죽고 나서 나도 금방 죽을 것 같았어요. 책 쓰는 것 때문에 디스크 수술 다음에는 푹 쉬어야 되는데 이거 붙잡고 계속 쓴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허리가 이 모양이 된 거예요.”
―이 책 내용 중 신 감독이 모르는 내용도 있나요.
“거의 없을 거예요. 없을 거야….”(책 내용 중에는 6·25전쟁 중 국군 헌병대장에게 불려가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경험도 나와 있다.)
―모든 걸 공유하신 부부 사이네요.
“네. 우리는 때론 친구같이 모든 것 다 같이 느끼고, 아무것도 숨김이 없었어요.”
―그런 신뢰로 살다가 이혼한 일은 더 큰 상처였겠어요.
“배신감에 상처를 받았죠. 참 헌신적으로 했거든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요.
“아기를 못 낳은 거예요.”
―아기 못 낳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저희 작은 이모가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아기를 못 낳았어요. 유전인지 몰라도 나 역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아기가 안 생겼어요.”
―그래도 4명의 자녀가 있는데, 누가 젤 효자예요.
“다 효자예요. 우리 큰아들은 가까이 있고, 둘째는 미국에 있는데, 한 달에 꼭 두 번씩 안부 전화 오고, 애들이 다 괜찮아요.” (최 여사는 슬하에 네 아이를 뒀다. 명임, 정균씨는 입양한 자녀이고, 상균, 승리씨는 오수미씨가 낳았다. 그녀는 신 감독과 이혼과 재결합, 납북과 망명, 귀국의 와중에서도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신 감독은 이와 관련, 생애 마지막으로 받은 영화상 시상식장에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했다.)
―신 감독과 일을 같이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관계였을 것 같은데, 감독과 남자로서 다 좋았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워낙 영화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가정을 돌아볼 수 없었던 거는 이해를 했어요. 사람이 여러 가지 다 할 수 없으니까.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대신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난 평생 혼자 쇼핑한 적이 없어요. 쇼핑할 때면 꼭 같이 가서 자기가 골라줘야지. 그래서 감독님 돌아가신 후에는 내가 쇼핑을 못 해요. 조카들 시켜서 사오라고 그러지.”
한 남자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원도 한도 없어
―사람들이 평생 한 번도 못 겪을 일들을 겪으면서 함께 살아왔는데, 신 감독의 가장 잊히지 않는 모습은.
“저런 자세(응접실 벽에 걸린 카메라를 보는 신 감독의 사진을 가리키며)가 신 감독이 일할 때 모습이지요. 카메라 옆에서 나도 평생 같이 움직였고, 이북에 가서도 내가 연출부 일을 하고, 저 양반은 카메라를 주로 하시니까 항상 카메라와 함께한 모습이 꿈에 나타나요. 이 양반이 항상 내 옆에 있는 거예요. 이건 이 양반 반지거든(손가락에 낀 쌍가락지를 보여주며).”
―모든 걸 다 떠나서 한 남자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원도 한도 없을 거 같아요.
“그렇죠. 아무리 감독과 여배우라고 해도 이혼했을 때 7년(이혼 후 2년, 북한에서 신 감독이 억류된 5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에 24시간 떨어져 본 적이 없이 생활을 했거든요.
마릴린 먼로의 <7년만의 외출>이 생각나네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간통죄 1호’로 떠들썩했잖아요? 그때 언론이 한국의 잉그리트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유부남이던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자 로셀리니 감독이 유부녀 대스타인 버그만과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했으나, 두 사람의 불륜이 영화계는 물론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두 사람 다 재기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이혼)라고 비난했어요.”
―신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태워버리라고 했던 <연산군>은 유럽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은 작품인데, 특히 원색적인 색감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그 의상을 내가 다 만들었거든요. 시장에 가서 내가 직접 색감 골라가지고. 그래서 더 자부심을 느껴요. 집에서 다 의상을 만들었거든요.”
“월북설은 상상”
―그런 의상들이 화재로 불에 탔을 때 안타까웠겠어요.
“자식이 죽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만난 김에 확인하고 싶은데요, 두 분과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정창화 감독께서는 지난번 인터뷰에서 두 분이 월북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거든요. 특히 최 여사님 경우는 납북됐던 1978년 1월 14일 새벽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정 감독이 촬영스케줄이 있어서 저녁에 보자고 해도 계속 당장 보자고 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결국 저녁으로 미루고 나갔더니 바람을 맞았다는 얘기였어요. 왜 그렇게 황급하게 보자고 했는지 지금도 궁금해하더라고요.
“자길 그렇게 황급하게 만날 이유가 뭐 있어. 정 감독은 그 전부터 잘 알던 사이고 더군다나 홍콩에 있었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 약속을 잡았거든요. 정 감독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포함해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거든요. 무슨 남자가, 나는 있는 말도 다 못 하는데 없는 말을 만들어내. 자기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상상하는 모양이지?”
―신 감독은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진실을 알 길이 없지만, 정 감독이 홍콩에서 마지막에 들은 말이 “은희 만나러 가겠다”였다고 했어요. 그걸 어떻게 납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그 사람 인품을 드러내는 거예요.”
―신 감독의 작품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 미흡한 점은 없으세요.
“글쎄요. 나로선 만족할 수 없어요. 다 찬성할 수도 없고. ‘미장센 감독’이라는 평가는 맞는 것 같아요. 자타가 공인하는 부분이니까. 작품 할 적에 소품 하나도 찍다가 마음에 안 들면 중단시키고 인사동에 날 꼭 데리고 뛰어가요. 소품 자기가 골라서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에요. 작품 하나 완성하기 전까지는 시간 공간을 따지지 않았어요. 당시도 시간이 매우 중요했거든요. 시간이 금이라고 했어요. 겹치기 출연이 많아서 배우 한 번 쓰려면 일주일 열흘 기다려야 와요. 그걸 메우기 위해 하루에 몇 커트를 찍어야 하는데, 촬영을 미루고 그렇게 달려가는 그런 사람이니까 뭐 이루 말할 수 없죠. 신 감독을 정말 깊이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 먹는 거 입는 거 생각 안 하고 영화만 알던 사람이라는 거 잘 알지요. 그런 생각하면 신 감독이 인덕이 없다,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요. 어떤 사람은 놀 거 다 놀면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요.”
“누구와 사이 좋지 않아 영화사 허가 취소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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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희씨는 “항상 카메라와 함께하고 있는 신상옥 감독의 모습이 꿈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봐 줬으면 하는 거죠. 정말 겉핥기로만, 구전으로 들은 것만으로 쓰니까 안타까워요.”
―신필림이 망하지 않았었다면, 신 감독이 북으로 납치되는 상황이 안 됐겠지요? 박 정권 누구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던 거예요?
“정권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었던 거고 다만 내가 한 가지 정말 아쉬운 것은 우리가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학교(안양예고)도 커 나갔을 거라 그게 아쉽고, 신 감독도 50대에 붙잡혀 갔으니까 한창 일할 때 아녜요? 정말 좋은 작품 만들어서 우리 기반을 굳건히 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너무 커요. 납치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김정일이 항상 그런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상황을 아니까 아, 이 사람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
―공백기 동안에 한국영화가 많이 바뀌어 있던가요.
“바뀌어는 있었는데, 영화계가 좋은 방향으로 컸다고 볼 수는 없었어요. 지난 10년간 정치적으로나 모든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보지만요.”
―신 감독이 주춧돌 역할을 했다면, 한국영화계가 달라졌을까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싶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죠. 영화계는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작품 하나 흥행만 잘되면 상은 모조리 타는 식으로 그런 폐단이 있어요. 작품으로서 평가하는 게 아니라 흥행으로 평가한단 말이에요. 손님 많아야 일등이라는 식으로 평가하니까.”
“독립 프로덕션 살아나야”
―앞으로 한국영화의 앞날을 어떻게 보나요? 요즘도 영화 가끔 보죠.
“앞날은 밝다고 봐요. 여배우니까 뭐 그런 면에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 영화제작 자체를 메이저(CJ, 롯데 등)에서만 하잖아요. 실제 영화 만드는 사람은 공장에서 물건 만들어내는 역할밖에는 못 하더라고요. 메이저에서 이득을 다 취한대요. 그런 게 참 아쉽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립 프로덕션이 좀 살아나야 되는데, 참 어려워요. 그렇게 되자면 작품을 잘 만들어야 되는데. 그러다 보니 워낙 대작(大作) 위주로 가잖아요. 그러니까 독립 프로덕션에서 감히 소(小)자본 가지고 할 엄두를 못 내더라고요. 그런 면에서는 어두운 면이 많고요.”
―신 감독 기념사업회가 재정난이란 말을 들었어요. 청년영화제도 올해는 완전히 빈 좌석에 썰렁하게 진행됐던데,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요.
“우리 기념사업회가 주최하질 못했어요. 내년부터는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어요.”⊙
박혜연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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