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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90)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總罷業과 都市暴動과 슈티코프의 지령

글 : 손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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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舊蘇聯 붕괴 이후에 발굴된 한국현대사관계 蘇聯자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슈티코프日記》이다.《日記》는 北韓政權 수립과정뿐만 아니라 南韓의 左翼활동도 蘇聯占領軍이 직접 지시했음을 보여준다.
 
  1946년 9월말에 總罷業이 진행되는 동안 北韓을 방문하여 실망하고 돌아온 呂運亨은 金奎植과 함께 10월 7일에 전격적으로 ‘합작7원칙’을 발표했다. 그러나 左右翼의 중심 정당인 共産黨과 韓民黨이 ‘7원칙’을 반대했다. 李承晩과 金九의 의견도 갈렸다. 金九는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李承晩은 반대했다.
 
  李承晩은 大韓勞總의 위원장이 되어 總罷業事態에 대처했다.
 
  朴憲永은 체포령을 피하여 越北했다. 北韓의 슈티코프는 총파업의 요구조건까지 지시하면서 활동자금 500万엔[원]을 지원했다.
 
  10월 16일에는 呂運亨의 서울대병원 입원실에서 共産黨의 大會派 등 朴憲永 그룹에 반대하는 3黨 대표들이 모여 社會勞動黨을 결성했다. 社勞黨은 呂運亨을 위원장으로 선출하면서도 ‘합작7원칙’에는 반대하는 모순을 드러냈다.
 
  社會黨은 南朝鮮勞動黨에 합당을 제의했으나 11월 16일에 北勞黨이 南勞黨을 지지하고 社勞黨을 부인하는 「決定書」를 발표함으로써 와해에 직면했다. 南勞黨은 11월 23,24일 이틀동안 結黨大會를 가졌다.
 

  1.《슈티코프日記》에서 드러난 북한의 남한 좌익 조종
 
  1946년 가을에 남한 사회를 뒤흔든 대규모 총파업과 도시폭동과 잇따른 농민반란은 남북한의 분단체제를 고착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미군정부의 식량정책 실패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폭력적인 민중시위를 조직하고 실천한 것은 박헌영(朴憲永)의 이른바 ‘신전술’에 따른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의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대규모 폭력시위가 북한 주둔 소련군의 구체적인 지령과 자금지원에 의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사실은 소련 붕괴 이후에 공개된 일련의 관련문서에 의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대표적 자료의 하나가 1995년에 발굴된 《슈티코프일기 1945-1948》이다. 전현수(田鉉秀) 교수에 의하여 그 일부가 발굴된 이 자료는 2004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체포령 내리자 朴憲永이 슈티코프에게 연락
 
   북한을 관할하는 소련 제1극동방면군 군사회의 위원으로서 “그가 조선에 있든 군관구 사령부에 있든 모스크바에 있든 관계없이, 그가 관여하지 않고는 당시의 북조선에서 단 하나의 조치도 취해질 수 없었다”고 일컬어지는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 중장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쪽 수석대표로 1946년과 47년에 서울에 왔었고, 북한정권 수립 뒤에는 6·25전쟁 직후인 1951년까지 북한주재 초대 소련 대사로 있었다(《月刊朝鮮》2010년 5월호, 「聯合軍과 함께 國內進入 바라」 참조). 그의 《일기》에는 이 무렵 북한에서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남한 좌익들에 대해서도 그가 자세한 지시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발굴된 《일기》는 아쉽게도 1946년 9월 6일부터 시작하고 있어서 그 이전의 상황은 《일기》를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1)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린 이틀 뒤인 46년 9월 9일자 《슈티코프일기》에는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1946년 9월 8일자 서울의 라디오방송 보도에 의하면 박헌영과 이주하(李舟河) 및 이강국(李康國)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헌영이 말하는 사회단체들이란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는 전평(全評)을 비롯한 공산당의 외곽 단체들을 뜻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같은 날자 《일기》에는 ‘김일성(金日成)에게 제기할 문제들’의 하나로 “남조선 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 좌익들에 대한) 지원정책을 강구한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그리고 9월 10일자 《일기》에는 김두봉(金枓奉)을 호출하여 “남조선의 정세, 남조선 3당합당 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다”라고 씌어 있다. 9월 11일에 있었던 정치부서 책임자회의에서는 북한주둔 소련군 군사회의 위원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소장과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 소장과 함께 남한정세와 지원조치, 향후 대책 등과 “누구를 공산당의 지도자로 지명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러고 나서 9월 19일에는 “박헌영의 향후 활동 방향에 대한 전문을 작성하여 로마넨코로 하여금 박헌영에게 전달하게 했다”고 했다.2)
 
《슈티코프日記》의 原文과 한글번역본.
 
  呂運亨은 두달 만에 다시 金日成 만나
 
  박헌영의 독단적인 행동에 따른 좌익3당 합당작업의 분열,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과 좌익의 미군정부에 대한 대응책, 좌우합작 문제 등과 관련한 소련군정부와 북한 당국자들과의 협의를 위하여 여운형(呂運亨)은 중년의 농부로 변장하고 38선을 넘어 9월 25일에 평양을 방문했다. 46년 2월의 첫 방북 이후 네 번째 방북이었다. 이때의 방북과 관련해서는 자세한 보고서가 남아 있어서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크게 참고된다.
 
  김일성을 만나자 여운형은 “나는 좌익진영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으나 북조선과 박헌영이 나를 불신하는 것이 느껴진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나를 신임한다”고 말하고, 김두봉 등 북한지도자들과 슈티코프 장군이나 소련군정부의 대표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여운형은 “나에게 생긴 모든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남으로 가지 않겠다” 하고 큰소리쳤다.
 
  이튿날 여운형은 김일성, 김두봉, 주영하(朱寧河), 최창익(崔昌益), 허가이(許哥而) 등 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들과 회담했다. 회담은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먼저 여운형이 두 시간에 걸쳐 남한의 정치정세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는 3당 합당작업과 관련하여 “박헌영에게서 심한 모욕을 느꼈다”면서, “백남운(白南雲)은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정치적으로 강간했다고 말했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하여 박헌영에게 화가 나서 옆으로 물러섰다고 했다. 여운형은 “합당이 이루어지면 미국인들의 압박 때문에 남조선로동당은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그러나 지하로 들어갈 수는 없고, 따라서 현재 합당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여운형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그 밖의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 아래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그것은 김일성의, 아니 소련군정부의 질책이었다. 여운형은 당황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을 돌다가 한참 만에 이렇게 말했다.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남조선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이 말에 대해 김일성은 “남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미군정부에 박헌영의 체포령을 조속히 취소할 것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呂運亨에게 해줄 대답 스탈린에게 물어
 
  여운형은 9월 27일에 소련군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 소장과 회담했다. 여운형은 슈티코프와도 만나기를 희망했으나 슈티코프는 신병을 이유로 로마넨코로 하여금 대신 만나게 한 것이었다. 그러기는 했으나 슈티코프는 여운형과의 회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넨코와 여운형의 회담을 앞두고 9월 24일에 스탈린에게 암호전문으로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 묻고, 지령을 요청했다.3) 이러한 슈티코프의 행동은 매사에 치밀하고 신중한 그의 성품과 스탈린과의 친밀한 관계뿐만 아니라 스탈린도 매사를 직접 챙기는 성품이었음을 시사해 준다.《일기》에는 스탈린의 지령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9월 26일에 로마넨코에게 여운형과의 회담에 대비하여 상세한 지시사항을 적어 보낸 것을 보면 스탈린의 지령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4) 지시사항은 7개항이었는데, 개중에는 여운형에게 “(5)우리는 이승만이나 김구 혹은 다른 우익 지도자들이 당신이나 좌익 지도자들보다 인민들 속에서 신망을 얻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주라는 항목도 있어서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5) 그것은 북한당국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는 여운형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朝鮮은 解放되었으나 南朝鮮은 解放 안돼”
 
  여운형과 로마넨코의 회담에는 여운형이 희망한 대로 소련 영사로 장기간 서울에 주재했던 샤브신(Anatolii I. Shabshin)도 참석했고, 또 김일성과 그의 부관 문일(文一)도 참석했다. 회담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여운형은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오는데도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회담을 시작했다. 여운형은 미군정부의 ‘한국인화’ 정책을 설명하면서 “미국인들은 좌익정당들에 대해 압박을 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이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타격을 공산당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고, 그 동기는 “미국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데 반해 조선의 공산당은 모스크바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운형은 또 미국이 소련과 싸울 생각이 있는지를 하지(John R. Hodge) 사령관과 러치(Arecher L. Lerch) 군정장관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하더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발언할 때마다 미국이 소련과 싸울 것이며 그때는 우리가 좌익과 결판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운형은 하지와 그의 고문인 랭던(William R. Langdon)과 번스(Arthur C. Bunce)가 “공개적으로 미국은 현재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정책에 이르는 도상에 있다”고 말하더라면서, “루스벨트는 소련을 인정했으며 트루먼(Harry S. Truman)은 루스벨트의 정책 정도까지 실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루스벨트 시대에 부통령을 지낸 월레스(Henry A. Wallace) 상무장관이 소련 없는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 사실도 상기시켰다. 그러나 여운형은 월레스의 이러한 발언이 미국정부의 외교정책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하여 트루먼이 9월 20일에 월레스를 전격적으로 해임한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당신이 李承晩이나 金九와 앉아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여운형은 마지막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언제쯤 재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큰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슈티코프가 병이 낫는 즉시 서울에 와서 옛 소련영사관에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곳에는 정원이 있어서 쉴 수도 있고, 미소공위가 즉각 사업을 시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련 대표단이 우리를 위해 서울에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뭄 끝에 오는 비와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역설했다.6)
 
  로마넨코는 슈티코프의 지시대로 여운형에게 대답했다. 미소공위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미소공위 개회식에서 한 슈티코프의 연설을 상기시키면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정치권력의 기본 형태는 “일본이 항복한 직후에 이남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북에서도 조선인민 스스로가 수립한 인민위원회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소비에트 군대는 조선을 소비에트화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또한 미국인들과 그 앞잡이 반동분자들이 중상하고 있듯이, 조선을 소비에트 연방의 한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로마넨코는 소련은 언제든지 미소공위를 재개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것은 “반동분자 없는 정부를 수립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라고 강조했다.
 
  로마넨코는 입법위원 문제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한 것과 꼭 같은 말로 비판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당신이 이승만이나 김구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낮은 의자를 권유하면서 자기들은 높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기를 원한다. … 당신은 조선 인민들이 지지하는 다른 민주주의적인 인사들과 동일한 대열에 있어야 하며, 당신들의 나라를 ‘미국의 상품’으로 인도하는 자들과 함께해서는 안 된다. … 좌익진영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당신이 확고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인민들 사이에서 당신의 권위를 훨씬 높여 줄 것이다.”
 
  로마넨코와의 회담으로 여운형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로마넨코에게 “(오늘의)회담은 나에게 향후 투쟁을 위한 큰 힘과 결단력을 주었다”고 말하고, 1922년에 모스크바의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여 레닌(Vladimir I. Lenin)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 면담은 끝까지 투쟁하도록 나를 고무했다”고 말했다. 회담이 끝난 뒤에 여운형은 연회에 초대되었다.7)
 
  이튿날 슈티코프는 남한의 파업투쟁과 함께 여운형과 로마넨코의 회담결과를 스탈린에게 암호전문으로 보고했다. 그는 남한 파업투쟁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9월 29일에도 스탈린에게 보고전보를 보냈다.8)
 
  여운형은 9월 30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美國과 蘇聯 다 李承晩과 金九 배제 주장
 
  대구폭동이 경상북도 일원으로 확산되기 시작할 때인 10월 3일에서 7일까지 미소공위 미국대표이며 하지 사령관의 경제고문인 번스가 미소공위 소련대표단의 일원이며 소련군사령부의 정치고문인 발라사노프(Gerasim M. Balasanov)의 초청으로 평양에 다녀왔다. 번스는 평양에 머무는 동안 발라사노프뿐만 아니라 소련군사령부의 샤닌(G. I. Shanin) 장군, 김일성, 그리고 8개월째 연금 상태에 있는 민주당 당수 조만식(曺晩植)도 만났다. 경제전문가인 번스는 일본점령기에 YMCA의 한국농촌부흥정책에 관여하여 함경도 등지에서 6년 동안 일한 경험이 있어서 한국어에도 능통했다. 발라사노프가 번스를 초청한 것은 미소공위 재개문제를 공론화하고 미국의 태도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번스와 발라사노프의 회담을 통하여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구체적으로 표명되고 있어서 눈여겨볼 만하다.
 
  번스는 소련의 전후 대외정책 전반과 강대국이 당면한 많은 세계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대한 소련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강력히 비판했다. 한국문제와 관련하여 번스는 “미국은 어떤 조건에서든지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한국이 소련의 괴뢰국가가 되는 것을 승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발라사노프는 소련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소련의 정책을 옹호했다. 그는 미국이 남한의 우익 반동세력을 지지해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소련정부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승만과 김구가 지배하는 임시정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번스는 발라사노프에게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미국은 이승만과 김구가 통괄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모든 좌익그룹과 함께 일하기를 바랐으나 이들은 최근까지도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수단과 허위선전으로 우리의 정책들을 공격해 왔다.”9)
 
  번스의 이러한 언명은 미국정부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정책을 유지하는 한 이승만과 김구는 배제할 것이라는 것을 소련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한 셈이었다.
 
  번스와 김일성의 회담에는 발라사노프와 샤브신도 동석했다. 샤브신은 발라사노프의 부관이 되어 있었다. 구소련 문서에 따르면, 번스는 남한에서 우익은 좌익을 반대하여 투쟁하고 좌익도 좌우합작을 원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번스는 이승만과 김구는 “좋지 못한 사람들”이며 박헌영도 정당들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반면에 김규식은 인민에게 영향력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서 친일파와 투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번스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기대를 표명했다. 그는 박헌영과 여운형의 합작은 미군정부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한 일부 세력을 용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 조건으로 반탁세력을 용인하되 이승만, 김구,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좌우 양극단이 아니라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좌우파에 기초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10)
 
 
  아널드도 金奎植을 첫손가락에 꼽아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이 무렵에 일시 귀국한 미소공위 미국대표단장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장군이 국무부 관리들과 나눈 대화에서도 그대로 표명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9월 23일에 한국을 떠난 아널드는 10월 9일에 국무부를 방문하여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힐드링(John R. Hilldring),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 일본과장대리 보튼(Hugh Borton) 등과 만나 한국사태에 관하여 폭넓은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총파업과 폭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의 파업과 폭동은 정치적 통합과 경제질서의 일원화를 위한 미국의 노력을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폭동이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소규모이면서도 극도로 행동적인 한국인 그룹에 의하여 잘 계획되고 조직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만일 방해자들의 계획이 두 달 동안 더 계속되면, 미국의 계획은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될 것이고 우리의 현정책의 두드러진 것, 특히 입법의원의 구성은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토의는 장소를 옮겨 가며 계속되었다. 오후에 보튼의 사무실에서 열린 회합에서 아널드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보여준 능력과 재능에 감명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성장해 온 이기적인 한국 정치인 집단은 매우 무책임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대하여 사심없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관심을 가진 한국 지도자는 극소수라면서, 김규식(金奎植)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여운형에 대해서는 머리가 뛰어나고 풍채도 좋으나 우유부단하다고 말했다. 김구는 완전히 제외되었다고 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강력하기는 하나 완전히 이기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11)
 
  아널드의 이러한 평가는 하지를 비롯한 이 무렵의 미군정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승만은 귀국하는 아널드를 위해 9월 21일에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민주의원 주최로 성대한 송별회를 베풀어 주었고 9월 23일에 그가 떠날 때에는 김포비행장에까지 나가서 배웅했다. 그런데 이승만의 그러한 행동까지도 아널드에게는 이승만의 권력추구의 집념에 기인하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쳤는지 알 수 없다.
 
 
  2. 이승만, 大韓勞總委員長 맡아 總罷業에 대처
 
  9월 총파업은 9월 23일 오전 0시를 기하여 부산지구 철도노동자 7,000여명이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시작되었다. 전평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철도노동자 4만명에게 9월 24일 오전 9시를 기하여 파업에 돌입하도록 지시했다. 조선공산당은 24일에 「남조선 노동자 제군에게 고함」이라는 삐라를 살포하여 파업을 선동했다.
 
  9월 25일에는 서울 전평 산하 출판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하여 남한의 중요 신문과 출판물의 간행이 며칠 동안 중단되었다. 파업은 서울과 지방의 우편국, 전화국, 전력회사 등으로 확산되었다.
 
 
  罷業鬪爭자금으로 500만엔 지원
 
  슈티코프는 남한에서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한 뒤에 로마넨코가 남한의 파업투쟁을 보고하면서 요구조건 및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물은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고 《일기》에 적어 놓았다.
 
  “경제적 요구들, 인금인상, 체포된 좌익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부에 의하여 폐간된 좌익 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의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에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이다.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부와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고 성명한다.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에 대하여 미군정부가 탄압을 가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파업주동자들이 500만엔〔원〕의 자금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데 대하여 200만엔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12)
 
  슈티코프의 이러한 기술은 총파업이나 도시폭동이 얼마나 북한소련군의 지시와 자금지원에 따른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파업주동자들이 300만엔의 추가지원을 요청하자 슈티코프는 모스크바로 국방상 불가닌(Nikolai A. Bulganin)에게 전화를 걸어 재가를 받고 실행했다.13)
 
 
  李承晩이 大韓勞總의 위원장 맡아
 
首都警察廳長으로서 총파업사태를 수습한 張澤相.
  전평 산하 노동조합원들의 총파업 사태가 일어나자 전평과 대립관계에 있는 대한독립노동총연맹(대한노총)은 긴장했다. 9월 24일에 열린 대책회의에서는 홍윤옥(洪允玉), 김구(金龜) 등의 소장파 지도부로서는 전평과 대결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14)
 
  9월 26일에 대한노총위원장 취임을 승낙한 이승만은 이튿날 40여 청년단체가 26일에 결성한 파업대책위원회와 대한노총이 합동으로 개최한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전선(全鮮) 파업대책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이튿날 이승만은 협의회 간부들과 함께 러치 군정장관과 군정청 운수부장을 만나 대책을 협의했다.15)
 
  대한노총은 9월 30일에 장택상(張澤相) 수도경찰청장이 지휘하는 2,000명가량의 경찰관과 다른 청년단체들과 함께 용산의 경성철도기관구(京城鐵道機關區) 노조원 2,000여명의 파업농성장에 돌입하여 해산시켰다. 파업노동자들은 10월 1일부터 직장에 복귀했고, 파업에 가담했던 1,7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16) 이렇게 하여 철도파업은 일단 수습되었으나 그 여파는 바로 대구폭동으로 이어졌다. 급한 상황에서 대한노총위원장 자리를 맡았던 이승만은 물러났고, 10월 14일에 열린 대한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후임자로 독청(獨靑)의 위원장 전진한(錢鎭漢)을 선출했다.17)
 
  이승만은 또한 민족통일총본부로 하여금 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자제와 직장복귀를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하게 했는데, 그것은 한민당이나 한독당의 성명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내용이었다. ‘격문’은 먼저 “이번 철도 종업원의 파업은 그들의 생활보장을 위한 정당한 요구”라고 일단 인정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할 우리는 모든 문제를 우리의 독립문제와 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우리의 일체의 행동이 우리의 독립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하는 것을 비판한 뒤에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부합될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애국적인 행위로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직장을 애국적 양심으로 지키면서 핍박한 민족 전체의 공통적인 생활문제는 함께 우리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하자.”18)
 
  민족통일총본부 선전부는 철도파업의 이면적 원인으로 (1) 9월 27일을 기하여 서울에서 소집된 공산당(대회파)의 당대회에 참가하는 지방대의원들의 “다리를 끊어서” 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박헌영파의 모략 (2) 군정부 당국의 박헌영파 추궁에 대한 반발 (3) 국내 소동으로서 10월적색혁명기념일과 연계시키려는 조선공산당의 음모를 들었다.19)
 
  이승만은 무슨 일에나 적극적인 행동자였다. 10월 1일에는 민통총본부 총재 명의로 또다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미곡문제나 임금문제 등으로 견디기 어려운 정형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민통총본부로 연락하면 적극적으로 당국에 소개하여 타협을 도모하겠다고 말하고, 그러나 “극렬분자의 선동에 이용되거나 혹 화심〔禍心: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포장하고 동맹파업을 주장하는 자는 결코 포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20)
 
 
  警察 63명, 民間人 73명 死亡
 
暴動으로 파괴된 大邱市街.
  총파업 사태는 마침내 10월 1일에 대구의 도시폭동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산당이 폭력전술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에서는 9월 24일에 대구지구 철도종업원들에 이어 남선전기(南鮮電氣)를 비롯한 대구시내 생산공장 40여 개소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대구시내는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공급이 되지 않았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공산당은 전평과 함께 남조선노동자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라는 파업지휘부를 조직했다.
 
  10월 1일 상오에 부녀자와 아이들을 앞세운 시위대 1,000여명은 대구시청 앞에서 쌀을 달라고 요구하며 소동을 벌였다. 2시30분부터는 이미 파업에 들어간 운수, 금속, 화학노조 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이 집결하여 대구역을 경비하던 운수경찰 및 형사들과 충돌했다. 경찰은 무장경관을 증파하여 시위군중을 해산하려 했으나 군중은 불응했다. 밤 11시에 경찰관의 위협발포로 시위군중 한 사람이 사망했다. 10월 2일에는 아침 8시부터 대구경찰서 앞 광장에 군중이 몰려들어 한 시간쯤 뒤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군중은 하오 1시쯤에 대구경찰서를 점령한 다음 유치장을 개방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통신시설을 파괴했다. 무기를 가지게 된 군중은 대구시내를 누비면서 대구경찰서 관내 지서와 파출소를 습격하고,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상했다.
 
  경찰만으로는 치안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미군은 전차를 동원하여 대구경찰서를 점거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오후 7시에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원상을 회복한 경찰은 각 지역에서 파견된 경찰증원대의 지원을 받아 폭동 주모자들과 지도급 좌익인사들의 검거에 나섰다. 대구에서 검거를 피하여 인접 중소도시로 도망간 파업노동자들이나 시위주동자들, 또는 그 지역 공산당 조직에 의하여 경상북도 각 지역에서 경찰서와 군청 등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관과 마을 유지의 집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사한 사태는 뒤이어 거의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그리하여 10월 20일 현재 경북 일대에서만 경찰 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했다.21)
 
  폭동이 시작된 지 1주일 뒤인 10월 7일에 총파업과 폭동을 지휘하고 있던 전평위원장 허성택(許成澤)은 평양을 방문하고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지시를 요청했다.22) 허성택은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蘇聯이 南韓을 침략하려 한다”
 
  하지가 10월 28일에 도쿄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보고는 미군정부가 총파업자 폭동사태에 대하여 얼마나 당황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련은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가을의 추곡수매 이후에 소련식 훈련을 받은 한국군을 이용하여 남한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증거가 증대하고 있다. 북한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보고뿐만 아니라 지난달에 압수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문서들과 지난 몇달 동안의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은 그러한 행동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제 남한 민중은 자신들이 6개월 안에 공산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살해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는 한국 민중의 미군정부에 대한 반감이 공공연히 증대되고 있고, 미국인들의 모든 행위는 미군정을 연장시키거나 한국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또 다른 행위라는 강한 비판과 선전에 봉착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에서의 소련의 선전계획은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최근의 소요사태를 더할 나위 없는 호재로 삼아 미국인들을 탱크와 비행기로 순진한 한국인들을 짓밟는 전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포악한 제국주의자들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하지는 끝으로 자신의 경제전문가들은 만일 군정부가 개인들로부터 수매하지 않는다면 춘궁기의 심각한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15만톤의 곡물수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고 적고,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건의했다.
 
  (1) 주한미군 병력이 지체없이 편제상 병력으로 채워져야 한다.
 
  (2) 미곡수매는 개별 농가가 자발적으로 정부에 판매하는 것에 한정해야 한다(그렇게 해서 수매되는 양은 보잘것없을 것이므로 그러한 조치에는 추가수입이 보장되어야 한다).
 
  (3) 점령군과 경찰 및 국방경비대를 증강시키고 지원하기 위하여 우익청년군(Rightist Youth Army)을 건설한다.
 
  (4) 소련이 북한에서 취하고 있는 조치들과 남한에서의 미국의 노력에 대한 훼방과 술책을 고위층에서 공개한다.23) 그것은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의 반소 성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이 보고전문을 합동참모본부로 보냈는데, 이에 대한 국무부의 견해는 (2)항 말고는 모두 부정적이었다.24)
 
 
  大會派 공산당원들이 黨대회 열어
 
  총파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합당문제를 둘러싼 좌익 3당의 분란은 해결되지 않았다. 인민당 선전국은 9월 24일에 9월 4일의 박헌영그룹의 일방적인 남조선로동당 결성회의에 참석했던 3당합동준비위원 9명 전원을 소환하고 여운형 당수 지명으로 장건상(張建相), 이만규(李萬珪), 조한용(趙漢用), 이임수(李林洙), 이여성(李如星), 송을수(宋乙洙), 이상백(李相佰), 함봉석(咸鳳石), 홍순영(洪淳煐) 9명을 새로 3당합동준비위원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25)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안의 합당파는 위원장 백남운의 사퇴를 요구했으나, 백남운은 9월 25일에 당대회를 소집하고, 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했다. 대회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을 새로 선출했다.26)
 
  9월 28일에는 강진(姜進)을 중심으로 하는 대회파 공산당원들이 혜화동(惠化洞) 모처에서 오전 11시부터 극비리에 당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는 250여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했다. 당대회준비위원장 윤일(尹一)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는 먼저 박헌영 일파로만 구성된 중앙위원회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새 중앙위원 27명의 선정은 김철수 등 4명의 전형위원에게 일임했다. 이어 지방정세보고를 할 때에 갑자기 미군정보참모부(G-2)의 임검으로 윤일, 강진(姜進) 등 10여명이 체포되고 회의는 오후 5시쯤에 유회되었다.
 
  둘째 날 회의는 장소를 옮겨 30일 저녁 8시에 속개되었다. 회의에는 새로 선정된 중앙위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회의는 중앙집행부의 부서 책임자와 합당준비위원 9명을 선정하고, 책임비서 선정은 선정위원에게 위임했다.27) 새로 선정된 중앙위원에는 박헌영, 이강국 등 박헌영 그룹도 포함되었다.28) 윤일과 강진 등이 연행된 이유는 미군정청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집회를 개최했기 때문이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이튿날 모두 석방되어 둘째 날 회의에 참석했다.29)
 
 
  3. 朝鮮共産黨에서 南朝鮮勞動黨으로
 
  김일성, 김두봉 등 북한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적이 실망한 여운형은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3당통합 작업보다는 좌우합작 작업에 더 열성을 기울였다. 10월 1일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바로 심장치료를 위하여 미 육군병원에 입원중인 김규식을 찾아가서 요담했다. 10월 2일 오후와 10월 3일 오전에는 인민당의 긴급회의를 열었다. 뒤이어 가진 기자회견에서 여운형은 합당문제와 좌우합작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당문제에 대해서는 “인민당은 인민당이 뜻하는 정당한 합당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공작을 원만한 방법으로 추진하는 것이며 간판개도(看板改塗)식 합당이나 기계구합(器械苟合)식 합당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당이 내포하고 있는 상극성을 제거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데면데면하게 말한 다음, 좌우합작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의욕을 피력했다.
 
  “좌우합작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때의 목적은 … 미소공위를 속히 속개시켜 남북이 통일된 정부로서 독립완성을 실현하자는 것과 이를 위하여 미소공위 속개에 지장되는 모든 조건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좌우쌍방이 매우 접근되다가 그 뒤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공작이 정돈(停頓)된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불변이다. 민족공동 이익을 위하여는 좌우협의가 필요할 줄 알며 나 자신 협의에 나아갈 것이다.”30)
 
 
  左右翼합의로 ‘합작7원칙’ 발표
 
  한편 《슈티코프일기》의 다음과 같은 기술은 여운형의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운형은 그가 북조선에서 서울로 돌아간 뒤 하지가 그를 불러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을 요청했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 여운형은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 북조선을 방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31)
 
  10월 4일 저녁에 삼청동의 김규식 집에서 열린 좌우합작위원들은 마침내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한 7개항의 합작원칙에 합의했다. 그리고 10월 6일에 열린 인민당의 중앙확대회의는 여운형의 방침에 동의하는 ‘좌우합작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했다. 그리하여 10월 7일에는 김규식과 여운형 두 사람 명의로 ‘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3) 토지개혁은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遞減買上)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대지와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노동법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가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32)
 
  그것은 토지개혁 문제나 친일파 처리문제 등에서 좌익의 ‘합작 5원칙’보다 우익의 ‘합작 8원칙’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토지개혁의 방법에서 제시한 체감매상방식이란 지주들의 소유토지를 면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단위면적의 값을 낮게 책정하여 정부가 매상한다는 것이었다.
 
 
  呂運亨, 이틀 동안 行方不明돼
 
  그런데 ‘합작 7원칙’이 보도된 10월 7일에 여운형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운형의 측근은 사건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날 아침에 한 청년이 여운형의 집으로 찾아와서 “박선생이 홍선생댁에서 기다리신다”면서 박의 편지를 전했다. 여운형은 청년을 따라 원남동(苑南洞) 로터리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자동차를 타고 박이 피신해 있는 모처로 갔다. 여운형은 박과 격론을 벌인 끝에 흥분한 나머지 뇌빈혈을 일으켰다. 박은 논쟁을 단념하고 직속 청년들에게 여운형을 인계했고, 청년들은 장시간에 걸쳐 여운형을 에워싸고 애원도 하고 공격도 하면서 좌우합작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 여운형이 거절하자 청년들은 설득을 단념하고 8일 밤에 자동차로 명륜동(明倫洞) 김모의 집까지 돌려보냈다.33) 인민당은 납치의 목적이 10월 7일 밤에 김규식의 집에서 열린 좌우합작회의에 여운형이 참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발표했다.34) 여운형은 바로 서울대학병원 이(李)내과 7호실에 입원했다.
 
  여운형이 만난 ‘박선생’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기사제목에서 박헌영을 거명했으나, 이 시점에는 박헌영은 체포령을 피하여 월북하고 없었다. 박헌영은 9월 29일에 장례를 위장한 영구차 안의 관속에 누워서 서울을 빠져나가 강원도로 가서 원산을 거쳐 10월 6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슈티코프는 《일기》에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1946년 10월 6일에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라고 적어 놓았다.35)
 
  하지는 박헌영의 체포령을 내리기는 했으나 실제로 체포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직접 박헌영을 체포하려 하자 하지는 “만일 당신이 박을 체포하면 국제적인 트러블이 일어난다”면서 어물거렸다고 한다.36) 하지로서는 박헌영을 체포했을 경우 소련쪽으로부터 제기될 항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37)
 
 
  韓國民主黨도 분열돼
 
  넉 달 넘어 좌우합작 작업이 중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각 정파들의 반응은 분분했다.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정파는 박헌영 그룹의 조선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은 10월 8일에 7일 저녁회의에 여운형이 참석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미증유의 폭압과 테러가 횡행하는 이때에 이 폭압과 테러의 주최측인 우익 반동진영과 합작이 불가능할 것은 명료한 사실이며 이 폭압과 테러의 지지자인 군정의 강화 연장을 기도하여 민주발전과 민족독립을 방해하는 입법기관을 철저히 반대하는 동시에 좌익의 명칭을 오손(汚損)하고 대중의 의사를 배반하는 정치적 부로커배에 대해서는 인민의 위력으로 단호히 배제할 것을 선언한다”는 격렬한 성명을 발표했다. “좌익의 명칭을 오손하는” 정치적 부로커배란 여운형과 그 동조자들을 지목하는 말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회파 공산당도 ‘합작 7원칙’에 반대했다. 대회파 공산당의 책임비서 강진은 10월 9일에 “목하 식량난을 위시한 미증유의 난국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은 합작원칙은 민족의 실제적 이익과 유리된 것이며 민중의 기대도 희박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입법기관 문제도 미소공위 속개를 촉진시켜야 할 이때에 군정하 기구의 정비 확대란 민족의 희망하는 바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38)
 
  대표적인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도 ‘합작 7원칙’에 다음과 같이 모호한 점이 있다면서 반대했다.
 
  첫째는 제1항에 한민족의 치명상인 신탁통치 문제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토지개혁에서 유가매수한 토지를 무상분여한다는 것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면하려면 부득이 국민들에게 중세를 과하게 될 것이며, 또 무상분여한 토지는 결국 경작권만을 인정하고 농민의 소유권은 부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셋째는 당초에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 연석회의에서 결정한 ‘8기본대책’과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넷째로 이 ‘합작원칙’은 합작위원회 자체 내의 결정이요, 앞으로 설치될 입법기관이나 그밖의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한 구속력이 없음을 부기한다고 선명했다.39)
 
  그러나 한민당의 이러한 반대성명은 이내 중요 간부들의 탈당사태를 빚고 말았다. 당의 총무의 한 사람으로서 좌우합작이 시작될 때부터 우익대표로 활동했던 원세훈(元世勳)은 8일 오후에 한민당의 성명에 반대하여 탈당계를 제출했다. 토지개혁 문제에 대한 이념차이 때문이었다.40) 이튿날에는 청년부장 박명환(朴明煥)을 비롯하여 송남헌(宋南憲), 현동원(玄東元), 이병헌(李炳憲) 등 중앙위원 16명이 탈당했다.41) 그리하여 10월 14일까지 탈당한 사람은 49명에 이르렀다.
 
  한민당은 10월 12일에 긴급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먼저 기구개혁을 결의하고 총무제를 위원장제로 바꾸어, 위원장에 김성수(金性洙), 부위원장에 백남훈(白南薰)을 선임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제를 채택하여 정원 150명 가운데 30명을 선임하고, 또 중앙집행위원 30명을 보선했다.42) 그러나 탈당사태는 계속되어 10월 21일에는 당 안에서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고 있던 김약수(金若水)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행위원 50명과 손영극(孫永極) 등 대의원 5명이 함께 탈당했다.43)
 
 
  韓獨黨과 金九는 적극 지지하고
 
  우익정파들의 주장은 한결같지 않았다. 한국독립당은 “이번 좌우합작의 성립은 민족적 양심과 민족적 열의로 보아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다”라고 극찬하고, “더욱이 ‘7원칙’은 민주국가 완성에 타당한 조건으로서 전면적으로 이를 지지한다. 그리하여 이로 하여금 미소공동위원회가 시급히 재개되어 우리 3천만이 요망하는 임시정부 수립이 최단기간에 실현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44)
 
  한독당의 이러한 성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김구의 동향이다. 김구는 하지의 초청으로 10월 11일 오전에 하지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요담했는데, 하지는 김구에게 ‘합작 7원칙’의 추진과 함께 입법기관 설립에 대하여 김구의 절대적인 협조를 부탁했다고 한다.45)
 
  김구는 이어 10월 14일에 좌우합작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는 5개항의 담화를 발표했다.
 
  “(1) 좌우합작의 목적은 민족통일에 있고 민족통일의 목적은 독립 자주의 정권을 신속히 수립함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좌우합작 공작의 성공을 위하여 시종 지지하고 협조한 것이다. 앞으로 이것은 계속할 것이다.”
 
  “(3) 나는 신탁통치를 철두철미 반대하는 바이거니와 ‘좌우합작 7원칙’ 작성에 몸소 노력한 김규식 박사도 장래 임시정부 수립 후에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해석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7원칙’ 중에 신탁반대의 표시가 없다고 해서 신탁에 대한 점이 모호하다고 볼 것은 없다.”
 
  그것은 한민당의 ‘7원칙’ 반대성명을 반박한 것이었다.
 
  “(4) 상술한 ‘7원칙’은 문자 그대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제의한 일종의 원칙에 그치는 것이고, 미비한 점에 이르러서는 장래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 상세히 규정하여 시행할 여유가 있으니 과대한 기우는 필요가 없는 바이다. …”46)
 
 
  李承晩은 共産黨 비판하며 불만 표시
 
  좌우합작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승만은 ‘합작 7원칙’에 대해서도 신중했다. ‘7원칙’이 발표되던 10월 7일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우합작의 중요 목적은 미소공위를 속개시켜 38선을 철폐하고 남북을 통일한 정부를 수립하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으로 이를 지지하고 과거 5개월 동안 침묵을 지켜 왔다. … 좌우합작이 성립되어 38선이 철폐되면 그 정부가 어떠한 정부든, 그 정부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든 나는 한 시민으로서 이를 무조건으로 지지하겠다.”47)
 
  이승만은 그러나 신중히 생각한 뒤에 10월 14일에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5개월을 가지고 토의하던 합작이 오늘에 낙착된 것을 다행으로 알며 그 내용에 몇 가지 설명할 바 있으니,
 
  (1) 좌우합작이 되면 공산분자의 파괴공작이 정지되고 민족진영의 국권회복에 같은 보조를 취할 것을 기대하였던 것인데, 지금 공산파는 대다수가 합작을 반대하며 전국적 파괴운동은 더욱 극렬하니 합작의 효력이 의문이며,
 
  (2)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문제를 나는 부인하여 왔으니 이에 대한 나의 주장은 변동이 없음을 표명하며,
 
  (3) 합작원칙 중에 민주정책(민주의원 민주정책대강)과 모순되는 조건이 있음을 나는 불만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파괴분자들을 저지하는 우리의 공작은 전민족이 통일적으로, 조직적으로 계속 진행할 것이며 신탁통치와 토지문제에 관한 것은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에 토의될 것이며 우리민족의 공원(公願)대로 타협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좌익파 소수인만으로라도 진정한 합작이 된다면 민족통일에 한 도움이 될 것이다.”48)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은 김구의 주장보다 한민당의 주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튿날 한민당의 신임 중앙집행위원장 김성수도 “신탁문제와 토지정책 같은 중대한 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에 정식 결정이 될 것이다” 하고 이승만의 담화를 뒷받침했다.49)
 
 
  呂運亨의 병실에서 社會勞動黨 만들어
 
10월 16일에 呂運亨이 입원한 서울大病院 병실에서 社會勞動黨이 결성되었다. 한복차림이 呂運亨, 呂의 왼쪽은 南朝鮮新民黨 위원장 白南雲.
  여운형은 ‘합작 7원칙’에 대한 좌익의 반응이 좋지 않자 실망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입원 소식을 듣고 북한에서 파견되어 온 정치연락원들에게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연락원들은 10월 15일에 여운형의 병실을 방문했다. 연락원의 한 사람으로 왔던 박병엽(朴炳燁)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운형은 ‘7원칙’ 가운데 입법기구 문제를 양보하고 나머지 여섯 가지는 좌익의 입장이 관철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설사 미군정이 입법기구를 만들어 군정자문기구로 전락시키려고 하면 좌익이 거기에 들어가지 않고 보이콧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말했다. 3당합당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개의 당으로 갈라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이를 수습할 수 없다는 괴로운 심정도 피력했다. 여운형은 연락원들에게 사회로동당을 발족시키려는 측은 자기가 조정해 보겠으니 북로당이 조선로동당 준비위원회 쪽을 잘 조정해 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50)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여운형의 병실에서 사회로동당이 결성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대회파 조선공산당의 합동교섭위원 27명은 이날 오전 11시에 여운형의 병실에 모여 회의를 열고 3당을 해산하고 사회로동당을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3당합동에 대한 결정서」와 18개항의 「사회로동당 강령(초안)」을 채택한 것이다.51) 「강령(초안)」은 9월 4일의 남조선로동당 준비위원회가 채택한 12개항의 강령과, 정권형태를 인민위원회 제도로 한다는 것까지, 그다지 다른 것이 없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남로당의 강령(제2항)이 조선에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한다고 천명한 것에 비하여52) 사로당의 강령(제2항)은 조선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고 하여 ‘인민’이 빠져 있는 점이다.53)
 
 
  社會勞動黨도 ‘합작7원칙’ 반대
 
  사회로동당의 태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좌우합작은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10월 7일에 발표된 ‘합작 7원칙’은 “우리민족의 주체적, 독자적 협동 협력의 면으로보다도 오히려 다른 정치적 효과를 예측하고 그것에 견제되는 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 점이다. 그리고 입법의원의 설치에 대해서도 “인민의 의사와 인민적 기초 위에 서지 못한 일종의 군정자문기관에 불과한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했다.54) 이러한 주장은 사로당 준비위원장인 여운형의 입장을 여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1월 1일에 열린 사로당의 임시중앙집행위원 및 감찰위원 선출을 위한 3당연합중앙위원회에도 여운형은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는 사로당의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과 강진을 선출했다. 그러나 백남운과 강진도 대회에 불참했는데, 《슈티코프일기》에 보면 두 사람은 10월 22일 시점에 평양에 있었다.
 
  《슈티코프일기》에는 이때에 김두봉은 백남운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했고 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고 따져 물었고, 이에 대해 박남운은 “자신은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로동당을 조직했다고 대답했다”고 기술되어 있다.55)
 
  강진을 훌닦아세운 이야기는 훨씬 자세히 적어 놓았는데, 슈티코프가 직접 그랬다는 것인지 김일성이 그랬다고 슈티코프에게 보고한 것인지는 문맥상으로 분명하지 않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강진과 만났다. 나는 합당사업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강진에게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에게 나는 당신이 미 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당신이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 당신은 (당)대회를 소집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 박헌영 동지의 결정은 그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 북조선 40만 당원의 견해이기도 하다. …”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미 제국주의의 주구로 욕했다. 미국인들은 박헌영 동지를 체포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분파활동을 하고 있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는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하여 좋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분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에 이미 당신을 호출했지만 당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로동당과 사회로동당을 통합시키겠다고 대답했다.”56)
 
  사회로동당의 진로는 이처럼 북한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운명지워졌다. 그것은 남로당과 합당하는 것이었다.
 
  《슈티코프일기》에는 이 시점에 슈티코프가 여운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언급도 있어서 눈여겨볼 만하다. 김일성과 한 대화를 적은 대목인데,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趙斗元)이 평양에 와서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묻는다고 말하면서, “여운형과 결정적으로 결별하는 것이 필요한지” 묻자 슈티코프는 “여운형을 비판하되 너무 과격하지 않게 비판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57) 슈티코프는 여운형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南朝鮮共産黨의 결당식
 
  여운형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사로당 준비위원장이면서 남로당 준비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11월 12일 오전에 인민당 회의실에서 백남운을 포함한 90여명이 참석하여 열린 사로당 중앙위원회에서 남로당과의 합동문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첫째 민주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사로당을 해체함으로써 남로당과 합동하는 것, 둘째는 합동교섭위원을 구성하여 남로당과의 합동을 재교섭하는 것, 셋째는 그렇지 않으면 기정방침대로 나가는 것이었다. 회의는 논란 끝에 둘째 방안을 채택하고,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다시 합당교섭을 하기로 했다.58) 그리하여 11월 16일에는 남로당에 무조건 합동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남로당에서 회답이 없자 사로당 선전부는 10월 19일에 “모든 인민과 함께 회답을 고대한다”는 궁색한 성명을 발표했다.59)
 
  그러나 11월 16일에 북로당 중앙상무위원회가 사로당을 부인하는 「남조선 사회로동당에 관한 결정서」를 발표함에 따라60) 사로당은 간부들의 탈당성명이 잇따르는 등 급속히 동요했다.
 
  드디어 11월 23일에 서울 견지동의 시천교(侍天敎) 강당에서 대의원 585명(공산당 395명, 인민당 140명, 신민당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조선로동당 결당대회가 열렸다.61) 그런데 남로당의 결성은, 놀랍게도 위원장은 신민당의 허헌, 부위원장은 공산당의 박헌영과 인민당의 이기석으로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중앙위원회 위원을 몇 명으로 하며 각 당에 중앙위원 자리를 몇 명씩 배분한다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평양에서 슈티코프, 김일성, 박헌영 세 사람이 사전에 결정한 대로62) 추진되었다.
 
  이기석(李基錫:李傑笑)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는 허헌의 개회사에 이어 여운형, 허헌, 이승엽(李承燁), 이기석 등 14명을 임시집행부로 선출했다. 여운형은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의 축사는 조한용이 대독했다. 이기석의 합당경과 보고에 이어 강령과 규약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다음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 선거는 허헌 등 5명의 집행부에 위임했다.
 
  대회는 이튿날 오전 11시에 속개되었다. 축사순서가 끝난 다음 서울 영등포 15공장 당대표가 “우리 영등포 각 공장 열성자 일동은 사회로동당 해체를 주장하고 남로당의 옳은 노선에 통일한다”는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미소공위에 메시지를 보내자는 긴급동의가 채택되고, 9개 사회문화단체 대표의 남로당에 대한 충성맹세 선언에 이어 시인 오장환(吳章煥)의 축시낭송이 있었다. 이어 북로당 중앙위원회가 보낸 메시지가 낭독되었다. 메시지는 “오늘 남조선에서 동무들이 선언하는 남조선로동당의 결성은 남조선인민들의 민주승리를 보장하는 선언이다. … 모든 파시스트 침략자와 민족반역자의 요소들은 남조선로동당 결성의 선언을 듣고 전율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박수와 함께 함성이 장내를 뒤덮었다. 만세 삼창이 끝났을 때에 어떤 대의원이 단상에 뛰어올라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동지는 지금 어디 있느냐?” 하고 외친 다음 “박헌영 만세”, “허헌 만세”를 외쳤다. 이에 대의원들도 호응했다.63)
 
  폐회를 앞당겨 12시40분쯤에 대회를 끝내고 대의원들이 스크럼을 짜고 ‘해방의 노래’를 부르면서 퇴장하는 순간 대회장 서기석에서 수류탄이 터져 취재기자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64)
 
  결당식이 끝나고 12월 10일에 열린 3당합동준비위원 연석회의는 중앙위원 29명, 중앙감찰위원 11명을 선출하고, 평양의 3자회동에서 내정한 대로 위원장에 허헌, 부위원장에 박헌영과 이기석을 선출했다.65) 회의가 끝나자 허헌은 인사차 하지를 방문했다.66)
 
  그러나 이렇게 결성된 남로당은 여운형의 말대로 공산당이 간판만 바꾸어 단 것에 지나지 않았다.⊙
 

  1) 전현수, <《쉬띄꼬프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 과정>,《역사비평》1995 가을호, 역사비평사, <한국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쉬띄꼬프일기》연구>,《慶北史學》, 慶北史學會, 2004, <해제: 한국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쉬띄꼬프일기》를 중심으로>,《쉬띄꼬프일기(1946~1948)》, 국사편찬위원회, 2004 참조. 2) 전현수 편역,《쉬띄꼬프일기(1946~1948)》, (1946.9.9,11,19), 국사편찬위원회, 2004.
 
  3) 《쉬띄꼬프일기》, (1946.9.24). 4) 전현수, 〈《쉬띄꼬프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역사비평》30호, 역사비평사, 1995, p.153 주55. 5) 《쉬띄꼬프일기》, (1946.9.26). 6) 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소장, <여운형_로마넨꼬 회담록>(1946.9.27),《쉬띄꼬프일기》, pp.179~183.
 
  7) <여운형_로마넨꼬 회담록>,《쉬띄꼬프일기》, pp.183~188. 8) 《쉬띄꼬프일기》, (1946.9.28,29). 9) Langdon to Byrnes, Oct. 9, 194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6, vol. Ⅷ,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1, p.744.
 
  10) 러시아연방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번스와 김일성의 대담>,《쉬띄꼬프일기》, p.24. 11) Memorrandum of Conversation With Major General A.V.Arnold, Oct. 9, 1946, FRUS 1946, vol. Ⅷ, pp.741~743. 12) 《쉬띄꼬프일기》, (1946.9.28). 13) 《쉬띄꼬프일기》, (1946.10.1,2). 14) 《朝鮮日報》1946년 10월2일자, <李博士居中調整>.
 
  15) 《朝鮮日報》1946년 10월2일자, <李博士居中調整>. 16) 《朝鮮日報》1946년 10월4일자, <鐵道員檢擧者一千七百餘名> ;《東亞日報》1946년 10월4일자, <千七百餘名을 檢擧>. 17) 조창화,《한국노동조합운동사(상)》, 한국노동문제연구원, 1978, p.138 ;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동조합운동사》, 1979, p.294. 18) 《朝鮮日報》1946년 10월2일자, <民統本部서 檄>. 19) 《大東新聞》1946년 10월3일자, <鐵道罷業의 經緯(上)>. 20) 《大東新聞》1946년 10월2일자, <妄動치 말고 合理的으로 解決>.
 
  21) 정해구,《10월 인민항쟁 연구》, 열음사, 1988, p.156. 22) 《쉬띄꼬프일기》, (1946.10.8). 23) MacArthur to Eisenhowr, Oct. 28, 1946, FRUS 1946, vol. Ⅷ, pp.750~751. 24) Memorandum by Vincent to Byrnes, Oct. 29, 1946, FRUS 1946, vol. Ⅷ, pp.751~752.
 
  25) 《獨立新報》1946년 9월25일자, <人民黨, 新準備委員을 決定>. 26) Langdon to Byrnes, Nov. 1, 1946, FRUS 1946, vol. Ⅷ, p.755 ;《쉬띄꼬프일기》, (1946.9.26). 27) 《東亞日報》1946년 10월4일자, <朴憲永派不信任案을 決議> ;《쉬띄꼬프일기》, (1946.9.26,10.21).《쉬띄꼬프일기》에는 참가자수가 200명 또는 170명이라고 했다. 28) 《쉬띄꼬프일기》, (1946.10.21). 29) Langdon to Byrnes, Nov. 1, 1946, FRUS 1946, vol. Ⅷ, p.755 ;《쉬띄꼬프일기》, (1946.9.26). 30) 《朝鮮日報》1946년 10월4일자, <合黨과 左右合作, 圓滿히 推進시키겠다>. 31) 《쉬띄꼬프일기》, (1946.10.22). 32) 《朝鮮日報》1946년 10월8일자, <合作原則을 決定>.
 
  33) 《東亞日報》1946년 10월11일자, <逮捕令바든 朴憲永과 面談, 呂運亨氏拉致는 朝共의 所行?>. 34) 《東亞日報》1946년 10월10일자, <合作妨害하는 某派所爲>. 35) 《쉬띄꼬프일기》, (1946.10.7). 36) 張澤相, <나의 交友半世紀>,《新東亞》, 1970년 7월호, p.228. 37)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발굴자료로 쓴 한국현대사》, 중앙일보사, 1996, pp.198~199. 38) 《獨立新報》1946년 10월11일자, <七原則은 民衆利益無視>. 39) 《東亞日報》1946년 10월9일자, <託治反對를 再聲明>.
 
  40) 《東亞日報》1946년 10월10일자, <韓民黨元世勳脫黨>. 41) 《朝鮮日報》1946년 10월11일자, <韓國民主黨中央委員朴明煥等十六氏脫黨>. 42) 《朝鮮日報》1946년 10월15일자, <韓國民主黨機構, 委員長制로 改革>. 43) 《朝鮮日報》1946년 10월22일자, <韓民黨에 又復大脫黨>. 44) 《서울신문》1946년 10월9일자, <韓獨黨全的支持>. 45) 《朝鮮日報》1946년 10월12일자, <金九氏合作에 贊成>. 46) 《朝鮮日報》1946년 10월16일자, <合作目的은 民族統一>. 47) 《朝鮮日報》1946년 10월9일자, <左右合作은 絶對支持>. 48) 《朝鮮日報》1946년 10월15일자, <多少不滿足한 點있으나 合作을 絶對支持>.
 
  49) 《東亞日報》1946년 10월16일자, <韓民黨委員長金性洙氏談話>. 50)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출판사, 2010, pp.204~205. 51) 《獨立新報》1946년 10월17일자, <三黨合同遂實現, 社會勞動黨을 結成>. 52) 《獨立新報》1946년 9월6일자, <勞動黨綱領草案>. 53) 《獨立新報》1946년 9월17일자, <社會勞動黨綱領草案>. 54) 《朝鮮日報》1946년 10월18일자, <左右合作과 立議問題, 社會勞動黨態度注目>. 55) 《쉬띄꼬프일기》, (1946.10.22).
 
  56) 《쉬띄꼬프일기》, (1946.10.22). 57) 《쉬띄꼬프일기》, (1946.10.21). 58) 《獨立新報》1946년 11월13일자, <呂氏, 社勞黨解體提案>. 59) 《獨立新報》1946년 11월20일자, <南勞黨側의 回答을 苦待> ;《獨立新報》1946년 11월24일자, <南朝鮮勞動黨結黨式>. 60) 《獨立新報》1946년 11월27일자, <共通性認定不能>. 61) 《쉬띄꼬프일기》, (1946.12.2). 62) 《쉬띄꼬프일기》, (1946.10.22). 63) 《獨立新報》1946년 11월26일자, <南勞黨, 結黨式盛大히 終了>. 64) 《獨立新報》1946년 11월26일자, <南勞黨結成式場에 怪漢이 手榴彈投擲>. 65) 《獨立新報》1946년 12월12일자, <委員長에 許憲氏>. 66) 《獨立新報》1946년 12월12일자, <南勞黨許氏, 하中將訪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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