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태의 회고 〈上〉朴正熙 대통령과 나 : 월간조선

“지금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경제개발계획을 소개하는 저술들이 적잖게 나왔지만, 내가 쓰는 이 회고록은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내가 옆에서 직접 경험한 사례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어서 아직까지 거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입니다. 박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모델을 확립함으로써 그의 진면목을 후세에 두루 알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경제개발계획에 밀접하게 관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회고록을 써나가고는 있지만 그 대부분이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경제철학과 비전을 좀 더 정확하고 진솔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기대이다. 그것이 또한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인 역할 내지 책임이라고도 여기고 있었다.

그의 얘기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반세기 전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정리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묵직한 원고 더미를 들춰가며 과거의 얘기들을 실타래처럼 줄줄 풀어내는 그의 기억력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당시 우리 정부가 기댈 수 있었던 가장 큰 자금줄은 역시 미국이었습니다. 정부수립 이후 미 국무성 주관으로 식료품과 의약품, 의복, 비료 등을 계속 무상으로 지원하다가 1958년 무렵 유상차관 위주로 제도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 밖에는 달리 외국자본을 유치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정부차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개발차관기금(Development Loan Fund)이었다. 1951년의 상호안전보장법(Mutual Security Act)에 근거한 차관 방식으로, 그 뒤 국제협력처(ICA갏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지원 방식과 통합되어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국제개발처)차관으로 대체된다. 이로써 그동안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명확하게 분리되었고, 무상증여의 원조보다는 개발사업을 지원하는 차관 위주로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러나 무상원조든, 유상차관이든 당시 우리 형편은 경제개발 여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개발은커녕 해마다 봄철이면 보릿고개를 넘기며 강냉이 죽과 풀뿌리로 허기를 달래야 했던 시절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해 태국이나 필리핀에도 감히 비교상대가 되지 못했다.

박정희, 황병태 과장을 대통령특사로 걸프사에 보내다

결국 박정희 정부가 국가재건을 위해 경제개발계획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마당에서는 외국자본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이미 우리의 경제계획 지원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던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시절이던 1961년 11월 워싱턴을 방문해 어렵사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으나 그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점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무렵 미국 정부의 차관 지원이 저조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로서는 아직 우리의 여건이 산업화를 이룰 만큼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시각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가운데 경제개발에 성공한 나라가 아직 없었을 때이니 말이다. 싱가포르의 성공 사례도 그 뒤의 일이었다.

그나마 대만이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구조 구축에 성공을 거두고는 있었지만, 농지개혁을 통한 농업자본의 밑받침이 있었다는 점에서 생판 처음부터 출발해야 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또 달랐다. 우리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시절 농지개혁을 단행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전란에 휩싸임으로써 그 성과를 낼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는 “그때까지의 경제학 이론에 따른다 해도 공업화를 출발점으로 삼았던 한국의 경제개발 시도는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소개한다. 개발도상국 경제발전의 모델을 만들었던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아서 루이스(Arthur Lewis) 교수의 이론이 대표적인 경우로 꼽힌다. 197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루이스 교수는 인도(印度)의 경우를 들어 개도국은 산업화에 앞서 우선은 농업 개발을 이루는 방법으로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의 개발전략은 그가 내세웠던 방향과는 순서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이 주목을 끌 수 없었다는 얘기다.

“당시 박 대통령이 나를 걸프사에 특사로 파견했던 것도 그런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아무리 다국적 기업이라고 하지만 우리 정부가 직접 나서서 민간기업을 상대로 차관교섭을 벌인다는 게 모양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워싱턴의 우리 대사관에도 알리지 말고 일을 처리하라는 특별지시가 내려졌으니까요.”

자신을 특사로 파견하는 과정에서도 장기영(張基榮) 부총리와 이후락(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만 관여했을 뿐 다른 사람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 대통령이 이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써준 임명장의 내용은 ‘황병태 경제기획원 과장. 우자(右者)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특명사절이므로 그에 준하는 예우를 하기 바란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라고 되어 있었다. 미국에 파견하면서도 임명장이 영어가 아닌 한글과 한자로만 쓰였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그 임명장을 어디선가 분실한 게 지금 보면 매우 안타깝다”며 그는 아쉬워 했다.

걸프사는 그에 앞서 이미 대한석유공사의 울산 정유공장(지금의 SK에너지)과 원유도입 계약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차관지원을 미적거리고 있던 상황에서 기왕의 인연을 내세워 다시 한 번 부딪쳐보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붓글씨로 써준 임명장 한 장만으로 세계적인 대기업의 총수를 만난다는 자체는 결코 쉽지 않았다.

경제기획원 관료들이 미국 스위프트사(社) 관계자들과 울산 제3 비료공장 건설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가운데가 프라이스 스위프트 사장, 그 오른쪽이 박진석 충주비료 사장, 장유태 충주비료 엔지니어, 황병태 경제기획원 과장.

박정희, 미국 사기업과의 계약서 국회 비준해 주는 결단 내려

결국 이 특명전권대사 사건으로 워싱턴 대사관은 한바탕 소동을 치르게 된다. 그를 수상히 여긴 걸프사가 한국 대사관에 신분 확인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김현철(金顯哲) 주미대사까지 나서 진상파악 작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오해를 빚은 나머지 “황 아무개라는 사람이 대통령의 특사를 사칭하며 걸프사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보고가 거꾸로 청와대까지 올라가게 됐던 것이다. 일개 과장의 신분으로 특명대사로 파견됐을 줄이야 대사관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공공차관 과장이라는 직책은 외국 정부나 국제기구, 공공단체들로부터 외자를 끌어들이는 자리이지 이처럼 민간기업과의 차관교섭을 진행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굳이 소관을 따진다면 외국 기업과 접촉하는 것은 당시 민간차관과의 김형국(金馨國) 과장 소관이었다.

민간차관 업무 소관은 차치하고라도 그는 직속 상사인 정문도(鄭文道) 경제협력국장과 장예준(張禮準) 운영차관보가 아닌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고 있었다. 자연히 그에게 경계의 눈총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박 대통령께서 ‘층층시하(層層侍下)에 어려움이 많지 않으냐. 자네의 적(敵)은 내가 만들었네’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시더군요”라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의 애매하던 입장과 고충을 지금은 완전히 훌훌 털어버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때 걸프사와의 접촉으로 바라던 대로의 성과는 충분히 거두었다. 걸프사가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비료공장 건설에 기꺼이 투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뒤에 ‘제4 비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진해화학’이 바로 그것이다. 국내의 비료공장으로는 아직 충주비료와 호남비료 등 두 곳밖에 없던 상황에서 특명전권대사가 톡톡히 역할을 수행해 낸 셈이다.

“그때 박 대통령은 걸프사와 같은 대기업으로부터의 외자유치가 남북이 대치 중인 우리에게는 안보 측면에서도 효과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외국자본 1억 달러를 유치하는 것은 미군 1개 사단이 국내에 주둔하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말했으니까요. 또 다른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도수로(導水路) 효과’가 있다고도 보았습니다. 당시 우리의 외환 보유고가 기껏 2억~3억 달러 규모였다는 점에서 외환운용 측면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외화를 끌어들여 공장을 짓는 것은 물론 안보문제와 외환운용에 있어서도 적잖은 효과를 보게 됐으니, 그야말로 ‘1석3조(一石三鳥)’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공장을 세우게 되면 여기에 기술도 함께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경제개발을 추진하려면 당연히 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외채 망국론’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그가 가지고 있던 외자유치에 대한 소신이다.

그러나 그렇게 잘나가던 비료공장 건설 문제는 도중에 덜컥 돌부리에 걸리고 만다. 걸프사와 똑같은 조건으로 울산에 제3 비료공장 투자를 추진하던 미국 스위프트사가 우리 정부와의 약속 내용을 국회 비준으로 보증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스위프트 측의 무리한 요구였다. 우리 정부의 체면에도 관련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면 제3, 제4 비료공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참이었다.

결국 박 대통령은 정부의 체면보다는 실리를 택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 중이던 우리 처지에서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비료공장을 놓칠 수는 없었다. 외자유치에 국회 비준까지 요청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무리한 차관 협상으로 국가의 치욕(恥辱)이 시작되었다”며 언론으로부터 저자세 협상을 성토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그 과녁의 중심에 있던 나로서도 이러다가 정말 매국노가 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책하곤 했다”며 당시를 돌이켰다.

“그러나 그렇게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외자를 유치하기로 한 박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고 봅니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을 때의 승부사적 기질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마지막 주사위를 던지려는 도박사의 처지와 흡사했다고나 할까요.”

장기영 부총리, 경제동향 보고회 브리핑 맡겨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황병태 과장. 가운데는 정문도 경제협력국장.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외국 민간업체와의 계약에 있어서도 정말로 중요한 경우라면 정부 행위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회 비준이 가능하다”는 법제처의 유권해석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유권해석을 앞세워 박 대통령은 공화당 소속이던 김성곤(金成坤) 재경위원장과 김택수(金澤壽) 원내총무 등을 상대로 국회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야당에서는 김대중(金大中), 이중재(李重載) 의원이 앞장서 반대했으나 그 정도는 예상하던 일이었다.

결국 국회 비준안은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행한 것은 박 대통령의 창업자적인 결단이었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르는 마지막 기로에서 되돌아갈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러한 협상에 따라 울산의 제3 비료공장은 1964년 11월 기공식을 가졌으며, 진해의 제4 비료공장도 연이어 기공식을 가졌다. 그것이 바로 영남화학과 진해화학이다. 둘 다 연산 25만 톤 규모의 공장이었다.

그렇다면 중앙부처의 일개 과장에 지나지 않던 그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박 대통령으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됐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그는 “장기영 부총리가 관례를 깨고 나에게 파격적으로 브리핑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던 초창기부터 박 대통령 주재의 경제동향 보고회가 경제기획원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그 브리핑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원래 기획원 내부에서도 기획국장 소관이던 브리핑이 관례를 벗어나 과장급으로는 처음으로 그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당시 국민소득이나 통화량, 금리 등의 거시지표 위주로 보고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가 이를 실물경제 위주로 바꿔야 한다고 건의했고 장 부총리가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브리핑을 맡겼던 것이다.

당시 경제동향 보고회는 대통령과 경제부처의 장차관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당의장과 정책의장, 그리고 한국은행과 산업은행 총재들이 모두 참석할 만큼 비중 있는 월례 행사였다. 그렇기에 항간에서는 농담 삼아 ‘만조백관(滿朝百官) 회의’라고도 불리던 터였다.

재무부 김용환, 상공부 오원철, 경제기획원 황병태 과장이 두각

“장기영(張基榮) 부총리가 직설적인 성격에다 관료주의적 관행에 은근히 거부감이 들던 마당에 내 얘기를 듣고는 솔깃했던 모양입니다.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지내고 나와 《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한국일보》를 창간해 운영하던 경력답게 일처리에 막힘이 없던 분 아닙니까.”

당시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의 내각에서 경제 분야를 통틀어 책임 맡은 장 부총리는 나름 한껏 업무에 의욕을 부리고 있었다. 한때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대한체육회 부회장까지 지낸 남다르고도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이 원래 일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왕초’와 ‘25시의 사나이’라는 별명도 그렇고, ‘뛰면서 생각한다’는 좌우명에서도 저돌적인 성격과 기질이 잘 드러나고 있다.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이 제 궤도를 찾은 것도 그가 부총리로 취임한 후부터다. 그런 장 부총리가 평소 눈여겨보다가 그를 경제동향 보고회의 무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브리핑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때 진행되고 있던 경제개발 사업의 추진상황 위주로 브리핑을 했다. 정유공장을 비롯해 비료공장, 제철소 등의 사업계획이 연달아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전반적으로 울산공업단지가 큰 테두리를 갖춰나갈 무렵이기도 했다. 그는 “브리핑이 끝나고 맨 앞에 앉아 있던 박 대통령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며 그때의 긴장감을 다시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번의 경제동향 브리핑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장 부총리가 “청와대에서 호출이 떨어졌다”며 그를 대동하고 청와대에 올라갔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지금의 기획원 직책에서 청와대 비서를 겸한다는 마음으로 일해달라”는 얘기를 했다. “지위와 소관에 관계없이 소신껏 업무를 처리하고 이후락 실장과 신동관(申東寬) 수행비서를 통해 나에게 직접 보고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렸다. 이를테면, 신임의 표시였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과의 직접 채널이 열렸으며, 경제개발계획 추진과정에 그가 밀접하게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됐던 것이다.

“그때 박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첫 대면 하면서 받았던 느낌은 차분하다고 할까, 아니면 차갑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군인 출신이므로 말투도 당연히 거칠 것이라고 여겼던 나로서는 오히려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지요. 아마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지내면 지낼수록, 그가 즐겨 마셨던 막걸리처럼 수수하면서도 다정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그가 피츠버그 걸프사에 특사로 파견됐던 것이 바로 그렇게 신임을 받고 난 직후의 일이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6년 고등고시(7회) 외교과에 합격해 외무부에 들어갔다가 다시 상공부를 거쳐 1961년 경제기획원의 발족과 함께 새로운 포부를 펼쳐나가던 그에게 예상치도 않았던 기회가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전적으로 그때의 브리핑 덕분에 박 대통령이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것 같다”는 게 그의 짐작이다.

이때는 이미 다른 경제부처에서도 재무부의 김용환(金龍煥) 이재과장이, 상공부에서는 오원철(吳源哲) 화학과장이 한창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모두 박 대통령의 신임과 총애를 받으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한 주인공들이다. 그는 “내가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것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외화도입 문제와 관련한 경제기획원의 업무에 국한된 것이므로 너무 확대해석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박 대통령이 그에게 표시했던 신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듬해 박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약속한 차관을 조속히 받아내려고 그를 워싱턴에 출장을 보냈다. 그는 “출장이 아니라 장기 유배나 다름없었다”며 가득 웃음을 지어 보였다.

1965년 5월 박 대통령이 미국 존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그때의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됐던 1억6000만 달러의 차관지원이 늦어질 기미가 보이자 그를 국무성 국제개발처(USAID)에 보내 읍소작전 겸 압박전술을 펼친 것이다. 이때의 차관지원은 우리 정부가 월남파병에 참여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었다. 전임자인 케네디 대통령은 박 대통령을 냉랭하게 대했지만, 당시 월남전에서 북폭(北爆)이 시작되고 전선이 한창 확대되는 상황에서 존슨 대통령 정부는 한국을 더 이상 괄시할 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 존슨 대통령이 답방 형식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사실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때 한국에 대한 지원방안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박 대통령의 방미 선물이었다. 우리 정부는 양국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긍정적인 신호로 응답했다.

박 대통령, “1억 달러 받아 내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 지시

어쨌거나, 그때 합의된 1억6000만 달러의 차관자금은 서울시내의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쓰이도록 계획이 잡혀 있었다. 이들 사업에 대한 박 대통령의 관심은 대단했다. 장 부총리를 배석시킨 가운데 직접 담당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모아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담당자들이라 해봐야 상공부와 건설부, 서울시의 국장이나 과장급 정도였으니 그때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해당 부처의 장차관들은 회의에 얼씬도 못하게 막았다. 어렵게 성사된 차관자금이니만큼 본인이 직접 챙기겠다는 뜻이었다. 업무에 있어서 직위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 박 대통령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박 대통령의 마음은 급했지만 워싱턴 당국에서 서류가 돌아가는 속도는 그리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그때까지의 경험으로 미뤄본다면 미국의 공공차관이 최종 이뤄지는 기간은 짧아도 4년, 길어지면 5년이 넘어가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현대건설이 단양에 추진하던 시멘트공장과 이회림(李會林) 회장의 동양화학이 인천에 지으려던 소다회공장이 미국의 차관자금 지연으로 늦어진 전례도 없지 않았다.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려 그를 워싱턴에 파견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1억6000만 달러 가운데 1억 달러가 당장 필요하니 그것이 성사되지 않으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며 단호한 지시를 내렸다. 그가 워싱턴으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으면서 서울로 돌아오는 티켓을 끊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매일 아침마다 담당자가 출근하는 시각에 청사 앞에서 기다렸다가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방법으로 부담감과 중압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면서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주기까지 했다. 장 부총리도 출장을 떠나는 그에게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라는 뜻에서 기다란 장죽대를 출장 보따리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워싱턴 출장을 떠난 것이 1965년 10월의 일이다. 박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시점에서는 다섯 달이 지난 뒤의 일이다. 워싱턴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푼 그는 다음 날부터 국무성 청사 앞에서 국제개발처의 한국담당 책임자가 출근하기를 기다려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때 한국을 담당했던 과장의 이름이 아이브스(Steve Ives). 그는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담당자의 이름을 스펠링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 출신인 그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 국무성에 특채된 엘리트 공무원이었다”며 관직에 들어온 배경에 대해서도 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브스는 자기 나름대로 차관업무를 신속히 진행하고 있는데도 그가 독촉하러 왔다니 이해를 하지 못하는 투였다. 그에게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 줄 테니 그냥 빨리 서울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의 출근길 눈인사가 며칠이면 제풀에 꺾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일주일, 열흘이 지나면서부터는 오히려 그의 눈인사를 피하려 드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담당자를 질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서서히 먹혀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차관 결재가 며칠 만에 떨어질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찾아왔다. 그는 두꺼운 겨울 양복을 새로 사 입었다. 설마 했지만 출장이 그토록 길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차관 결재야 어차피 늦어진다고 해도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 돌아와도 좋다는 귀국허가가 내려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장 부총리는 월요일마다 간부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그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격려와 함께 진행상황을 물으면서도 “아직 박 대통령께서 별다른 지시가 없으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라”는 얘기로 통화를 끝내곤 했다.

담당과장인 아이브스도 타향살이를 하는 그가 측은했는지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위로를 해주었다. “당신네 대통령이 너무 하는 것 아니냐”며 그의 입장을 대신해 박 대통령을 원망하는 그를 보면서 심리적인 압박작전이 성공하고 있다는 확신에 다가섰다. 그는 아이브스의 집을 방문하면서 선물로 장식 양초를 사 가지고 갔으나 받지 않겠다며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아이브스가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었을 것이다.

경제협력국장 시절 굿맨 세계은행 아시아국장(맨 오른쪽)과 김용환 재무부 이재국장(가운데)을 집으로 초청한 황병태 경제협력국장(왼쪽).

미국 출장 100일 넘어 귀국 지시받고 눈물 왈칵

결국 그렇게 해가 바뀌고 다시 음력 설을 앞두고 있던 무렵에서야 귀국 허락이 내려졌다. 장 부총리로부터 “목표로 잡았던 1억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략 그 정도만큼 차관액수가 전달됐으니 이제 돌아와도 좋다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그가 출장을 떠나온 지 대략 석 달 반만의 일이었다. 그는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며 그때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아이브스에게도 고맙다는 전화를 했지요. 고지식한 성격이었지만 우리 정부를 위해서는 나름 많이 도와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만나서 인사를 하고 돌아가겠다니까 ‘그럴 필요 없으니 곧바로 돌아가라’며 귀국 축하를 해주더군요.”

그는 아이브스와 정인영(鄭仁永)씨의 일화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영어 소통에 지장이 없었던 정인영씨가 형님인 정주영 회장을 도와 현대건설의 차관을 따내기 위해 서울 대사관의 유솜(USOM갪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미국대외원조처))은 물론 국무성의 국제개발처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그를 자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인영씨는 음식을 가리던 탓에 워싱턴 출장길에는 늘 고추장을 갖고 다녔으며, 이에 따라 아이브스가 그를 ‘미스터 고추장’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것이었다.

“아이브스를 포함해 서울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차관업무 담당자들은 정인영씨가 열심히 쫓아다니는데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울산에서 철수하는 포드자동차의 코티나 조립공장을 현대가 인수받아 지금의 현대자동차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적으로 정인영씨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화들에서 확인되듯이 경제개발을 위해 외국자본을 유치하는 과정은 하나같이 쉽지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정권이라며 지원 요청을 거절당했던 처지여서 외자유치 문제가 더욱 절실했다.

미국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는 다시 서독으로 눈길을 돌렸으나 경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독 정부로부터 겨우 경제지원을 받을 수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한 보답의 표시였다.

“박 대통령이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했던 것이 1964년 12월의 일입니다. 앞서의 얘기들과 모두 비슷한 시절에 있었던 일이지요. 그때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우리 정부에 대한 경제지원 약속이 이뤄졌던 것이었으니 박 대통령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서독방문 중 현지의 탄광지역을 찾아 광부와 간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연설을 하던 박 대통령은 “앞으로는 우리 후손이 이렇게 돈 때문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대목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동행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도 울었고, 광부 간호사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은 나의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상공부장관 보좌역으로 수행했던 백영훈(白永勳) 박사로부터 전해듣고서야 그런 내용을 알았다”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전후의 쓰라린 악조건을 딛고 일어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의 사례를 목격하면서 우리도 뭔가 이뤄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웠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선뜻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도 없었을뿐더러 국내적으로도 ‘외채 망국론’이 경제개발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외국 자본을 많이 끌어들이면 경제구조가 외국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그 바탕이었다.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이러한 이론들이 한창 풍미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프레비시(Raul Prebisch)를 비롯해 칠레의 프랑크(Gunda Frank), 브라질의 카르도소(Henrique Cardoso) 등이 이러한 ‘종속 이론’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원래 사회주의로 출발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은 그렇다 쳐도 네루의 인도 정부가 외국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론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학자들 가운데서도 카르도소처럼 나중에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투자 개방론으로 전환한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다. 카르도소는 경제학자이면서도 재무장관에 발탁된 데 이어 1994년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될 만큼 국민들에게도 정치적인 인기가 높았다. 국가 지도자로서 그의 경제정책은 시장을 개방하여 외국으로부터 투자를 받아들이자는 쪽이었다.

“외자 도입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런 이론들로 인해 학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계속 논란을 빚게 되자 박 대통령도 한때는 주춤거리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외채를 들여올수록 우리의 산업구조가 왜곡되고 경제가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데야 대통령으로서도 걱정이 없지 않았겠지요.”

특히 종합제철소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채 망국론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미국 정부가 우리의 종합제철소 건립사업에 집요하게 견제를 했고 그 결과 세계은행을 내세워 대한(對韓) 국제경제협의체(IECOK=International Economic Consultative Organization for Korea)라는 기구를 결성하여 우리의 외채조달에 대해 까다롭게 상전 노릇을 했다.

1964년 12월 서독 함보른 광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사진 오른쪽)는 파독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주중대사 시절, 한국 경제개발 경험 주제로 강연 초청 많이 받아

1966년에 창설된 IECOK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의 외채 문제를 지적하곤 했다. 한국의 외채조달이 건전성을 유지하려면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겉으로는 한국의 외채가 위험수준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종합제철 사업을 견제하는 데 본래의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들도 이런 발표를 그대로 받아 ‘외채 망국론’을 편들었으며, 국회에서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말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는 외채망국론이 이미 그때부터 대두됐던 것이다.

“외채 망국론 신경쓰지 마”

그러던 어느 날인가 박 대통령이 장 부총리와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그즈음 언론에 연달아 보도되고 있던 ‘외채 망국론’ 논란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오늘도 또 그 얘기가 나오던데, 도대체 제정신들 갖고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것인가” “거기에 너무 예민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며 장 부총리와 그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가 외국자본을 들여와 개인적으로 술 사먹고 떡 사먹는 게 아니잖으냐”고까지 했다. 경제기획원이 외채 문제로 곤경에 처한 데 대해 나름대로 위로를 해주려는 것이었지만 박 대통령 자신도 많이 언짢았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물론 외채라는 것이 전반적인 경제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추진된다면 국가적 재앙으로 닥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는 그런 단계에서 훨씬 벗어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장 부총리도 ‘수출이 계속 늘어나면서 외채상환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외국 논자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우리 신문이 문제’라며 흥분하곤 했지요.”

결과적으로는 외채를 끌어들여 먼저 공업화에 투자했던 박 대통령의 선택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고 그는 평가했다. 인도의 사회주의적 개발이나 마오쩌둥 당시의 중국이 인민공사를 내세워 자력갱생의 농업개발을 시도했으나 결국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 그 방증이다.

“이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싱가포르의 리콴유(李光耀) 수상이나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보다 먼저 경제개발의 요체를 인식한 지도자였습니다. 더욱이 실용과 현장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않느냐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이상이었지요.”

비록 박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흠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특히 그 자신이 김영삼(金泳三) 정부 시절이던 1993년부터 3년간 베이징(北京) 주재 대사로 근무할 당시 중국에서 이뤄지던 개혁·개방 정책이 이른바 ‘박정희 모델’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그곳의 정·관계를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그가 받아들인 느낌은 더욱 각별했다.

“한국의 경제개발 과정은 중국의 정계 인사들뿐 아니라 학계와 연구기관으로까지 관심이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박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계획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베이징 대학에서 몇 차례 강연 초청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이에 따라 그는 베이징 대학의 우슈칭(吳樹靑) 총장은 물론 덩샤오핑의 장남으로 전국장애인연합회장이던 덩푸팡(鄧樸方)과도 자주 만나곤 했다. 그의 미국 버클리대학 정치학박사 논문이 중국 정부의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의 주선으로 《유학과 현대화―중·한·일 유학비교연구》(儒學與現代化―中韓日儒學比較硏究)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던 것도 한국 경제개발에 대한 중국 지도층의 관심 덕분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칠흑 같은 밤, 지도없이 항구를 떠났다

그는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최근 재평가 작업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 데 대해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진심으로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분이었습니다. 언젠가 보고거리가 생겨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그는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떠도는 구름 몇 점밖에는 없었는데도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유심히 하늘을 살피고 있었던 겁니다.”

박 대통령이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이유는 비 때문이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논밭이 갈라지고 작물이 말라붙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을철 수확기만 되면 농사가 잘됐느냐, 못 됐느냐가 큰 뉴스거리가 되던 시절이었으니,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박 대통령에게는 큰 근심이었던 것이다. 그는 집무실에서도 책상에만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목격한 사례만 해도 비슷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경제개발계획에서도 박 대통령은 이런 심정과 각오로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 한 사람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항로의 지도도 없이 항구를 출발한 대한민국은 불과 10여 년 만에 순항의 닻을 올리고 세계가 놀랄 정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해 냈다.” 그가 요즘 마지막으로 손질하고 있는 원고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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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태의 회고 〈上〉朴正熙 대통령과 나

“우리가 외국자본 들여와 술 사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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