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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체험 100년 특별연재] 조선침략사상과 <日本書記>

- 천황을 맞이하여 ‘역사’를 청소하자

글 : 허문도  前 통일원 장관  asadalm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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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文道
⊙ 1940년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정한론(征韓論)의 선구자 요시다 쇼인.
  날로 키가 자라는 소년은 또래들 하고 같이 놀아야 할지, 어른들 사이에 끼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를’ 수가 있다. 지금 중국이 이와 같지 않을까. 스스로의 팽창이 일으킨 환경변화에 스스로가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답은 지역공동체로 보인다. 보다 광역의 지역협력체 속에서, 기존의 역사 속에는 없는 새 아이덴티티를 발견하고, 귀속의식을 키우는 일을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외교사령만으로는 감출 수 없는 ‘민족감정의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선가 끊어낼 수 있다면, 한일 연대는 새 시대 협력체의 코어 역(役)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역사 속에 탈아(脫亞) 등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인근 민족에 대한 멸시관을 쓸어내는 계기를 찾았으면 한다. 먼저 일본 천황의 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선침략의 교주 요시다 쇼인
 
  ‘조선침략은 일본인이라면 대(代)를 이어 힘쓰지 않으면 안되는 숭고한 의무’(吉野誠, <明治維新と征韓論>)라면서 따르는 제자들에게 거역하기 어려운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서는, 갓 서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일본 사람이 있었다. 그 제자 중에는 메이지 제일의 문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제일의 무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有朋)가 있었다. 그에 형사지(兄事之·나이가 자기보다 조금 많은 남을 형의 예로써 섬김)하는 입장에 유신의 3대(大) 원훈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도 있었다. 기도(木戶)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 직후 최초로 한국을 쳐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입에 올린 자다. 이들의 스승은 바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년)이다. 그는 국교를 트기 위해 1854년, 1년 만에 도쿄만에 다시 나타난 미국의 페리함대에 야음을 틈타 접근한 후, 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자수한다. 그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이후 그는 처형될 때까지의 6년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국금(國禁)을 어긴 수인(囚人)이었다.
 
  이 기간에 얼마 동안 쇼인(松陰)은 자택유폐의 수형생활이 있었고, 이때에 숙부 등이 열어 놓았던 사설학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딱 1년 남짓 주재했던 것이 교육경력의 전부였다. 이 짧은 기간에 배출된 문인은 모두 80여 명, 제일 어리게는 열 살짜리도 있었다. 한국을 강제병합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는 같은 조슈(長州 야마구치縣) 출신이긴 해도 이때 만 여섯 살 정도로 제자는 아니었다. 문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나같이 메이지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침략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앞에서 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평생 출세가도에서 쇼인의 제자였던 것을 자랑했던 사람이다. 1년 남짓, 혹은 수개월에 불과한 교육이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영향을 후세에 남긴 것일까.
 
 
  긴장 높은 생사의 敎場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길러낸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인은 기본적으로 유신의 혁명구호인 존황양이(尊皇攘夷)의 지사였고, 관직과는 무관한 풀섶(草莽ㆍ초망)의 혁명가였다. 밀항을 시도했을 때는 이미 뜻을 찾아, 나가사키(長崎)ㆍ에도(江戶)ㆍ도호쿠(東北)지방 등으로 전국을 헤맨 다음이었다. 제자 된 사람들도, 기존의 교육기관, 즉 번(藩) 운영의 시습관(時習館) 등에 한계를 느끼고, 무너져 내리는 구(舊) 체제를 앞에 한 격동기를 스승만큼이나 치열하게 살려는 패들이었던 모양이다. 교육은 스승과 제자들이 숙식을 하며 24시간 이루어졌다. 무슨 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아니었고, 시국과 나라의 진로를 놓고 전 인격이 부딪히는 교육이었다 한다. 교실이래 봤자 처음 다다미 8장의 방에서 시작하여 석 달 만에 다다미 10장 반짜리 방을 제자들이 손수 만들어 보탰다.
 
  봉건일본의 종말이 다가오는 격동 속, 쇼인은 초(超)급진적 행동주의자였다. 인격의 부딪힘이 기본인 교장(敎場)은 자연히 생사를 거는 것 같은 긴장이 늘 팽배해 있었다. 이 강도 높은 긴장 속에 각인된 쇼인 사상이 메이지국가의 주역이 되는 제자들을 통해 근대일본을 침략국가로 오리엔테이션 했던 것이다.
 
  쇼인의 가문은 원래 병법사범(師範)이 가직(家職)이었다. 흔히 그의 조선침략사상으로 곧잘 거론되는 것은 옥중(獄中)에서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이다.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支那)를 거느리고, 교역에서 노국(露國·러시아)에 잃은 바는, 토지에서 선만(鮮滿·조선과 만주)으로 벌충해야 할 것이다.”
 
  미국, 러시아 등 서세(西勢)의 외압 속에서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교역상의 손실을 일본은 조선, 만주 땅을 뺏어 벌충해야 할 것이라는 가당찮은 발상을 1850년대에 국사범(國事犯)으로 옥중에 앉아서 쇼인은 했던 것이다. 결국 근대 일본은 조선을 뺏어 식민지로 하고, 만주에 괴뢰국을 세워 쇼인 생각대로 걸어갔다.
 
  그런데 요시다 쇼인이 역사에 남긴 가장 확실한 이미지는 ‘천황제 찬미자의 극치’ 바로 그것이었다.
 
 
  쇼인의 침략사상
 
  쇼인은 밀항 시도에 실패하고 옥중에 있을 때, 외압 속에 있는 일본의 진로를 밝히고자, ‘존황양이’의 양이(攘夷)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구상으로 <유수록> (幽囚錄)을 엮었다.
 
  이 속에서 쇼인은 고대(古代)의 신화(神話)를 역사로 끌어안고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라, 핏줄이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天皇)의 존재를 일본이라는 나라의 우월성의 근거로 하고 있다. 여기에 당연히 반도의 삼한(三韓), 즉 신라ㆍ백제ㆍ고구려는 번국(蕃國, 미개ㆍ오랑캐의 나라)인 것이고, 천황에게 복속되어야 할 열등한 나라들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를 통해 쇼인에게서 천황이 천황인 것은 번국 조선을 복속시켜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였다. 그의 이론에서 조선의 신속(臣屬)은 천황의 불가피한 숙명인 것이다. 이 같은 천황론에 의해 이념화된 조선침략론을 쇼인은 펴놓고, 쇼카손주쿠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불어 넣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평생을 두고 실천해 갔던 쇼인의 전략구상의 중심에 ‘조선침략’이 있었던 것을 놓칠 수는 없다.
 
  “조선과 만주는 서로 연이어져, 신주(神洲·일본)의 서북에 있고, 모두 바다를 격하여 가까이 있다. 그런데 조선 같은 것은 고시(古時)에는 우리에게 신속했어도, 지금인즉슨 얼마쯤 교만하다. 무엇보다도 그 풍교(風敎)를 소상히 밝혀, 이를 옛날로 되돌려야 할 것이다.”
 
 
 
‘조선의 건방을 고쳐라’

 
  구체적으로는 “조선을 책하여 인질을 넣게 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기를, 그 옛날의 성시(盛時)와 같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시다 쇼인의 조선침략사상 전개가 8세기 초에 쓰인 <일본서기>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는 것을 뒷얘기를 위해 기억해 두고자 한다.
 
  반도에 패권(覇權)을 확립하는 것이 청일(淸日)전쟁(1894~1895년)의 주목적으로 보면, 일본은 임진왜란(1592~1598년)이 있고서 300년 만에 다시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서양 수법을 배워 침략이 아닌 척 모양을 갖추는 것이 그들의 새 기술이었다.
 
  조선에의 군사침략을 뜻하는 정한론은 메이지유신의 개막과 함께 이내 터져 나왔다. 메이지정부의 중추에 있었던 기도 다카요시의 정한론을 유신 직후의 그의 일기에서 본다.
 
  “속히 천하의 방향을 일정케 하고, 사절을 조선에 보내, 저들의 무례(無禮)를 묻고, 만약 저들이 불복할 때에는 죄를 물어 그 땅을 공격하여 신주의 무위(武威)를 신장하기를 바란다.”
 
  일기 속에서 그가 ‘무례’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에도막부기를 통해 조선이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하는 얘기다. 이 일기는 그때의 대(對)조선 외교담당이었던 쓰시마번의 사절이 일본에 일어난 큰 변혁인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에 알리기 위해 출발한 직후의 것이다.
 
  기도의 정한론은 같은 조슈 출신으로 그가 형사(兄事)했던 요시다 쇼인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쇼인이 역사에 남긴 이미지는 ‘천황제 찬미자의 하나의 극치’ 말고도 무관(無冠)의 풀섶 재야에서 진정한 혁명력이 나온다는 초망굴기론(草莽屈起論)의 지사 두 가지다.
 
  그가 천황제 국체론으로 이념화시킨 조선침략론이 메이지 초기의 정한론이었던 것이다. 쇼인은 <일본서기> 속의 허구인 삼한, 즉 신라ㆍ백제ㆍ고구려 번국론을 그대로 답습하여, 천황이란 원래가 조선을 신속시킨 존재로서 조공을 받지 않는 천황 존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법이었다. 그러므로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를 하여 천황을 받들게 된 일본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될 일은 조선을 쳐서 복속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쇼인이 주재했던 사설의 쇼카손주쿠에서 직접 훈도를 받았던 이토 히로부미가 훗날 천황제 절대주의 국체론(國體論) 헌법을 만들어 제국일본을 조형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침략을 실천할 군사력과 전략을 만들어낸 것은 다 아는 얘기다.
 
 
  한국 지식인 문화의 전략 감각 결여
 
  지금이 망국을 체험한 지 100년 되는 때라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 하나 있다.
 
  한 신문이 강제병합 100년을 기념하여, 정부의 연구기관과 공동기획한 특집기사에 요시다 쇼인 얘기가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쇼인을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로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100년’이라면 관심을 가져 마땅한 그의 조선침략사상 같은 것은 언급이 없는 것이다. 정부연구기관까지 관여하여 이 100년에 쇼인을 관광홍보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오늘의 심상인 것 같아서 한마디 하는 것이다.
 
  나라가 망한 이유를 여기서 모두 거론할 여유는 없지만, 1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손자(孫子)의 전략원칙인 지피지기(知彼知己)에서 모자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러일전쟁 직전(1903년) 서울에 왔던 유명한 영국신문의 특파원 맥켄지가, 당시의 재정부문의 권신(權臣) 이용익(李容翊)을 만나, 다가오는 전쟁을 내다보며 일본의 야욕을 기자적 입장에서 걱정했더니,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니 염려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청년 이승만(李承晩)의 투철한 독립정신과 가열한 투쟁정신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그가 한성감옥에서의 수형생활 마지막 해인 러일전쟁이 나던 1904년에 탈고한 <독립정신>에 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보이지 않고 있다. 훗날 이승만은 수십 년의 독립운동을 거쳐 세계정상의 일본을 꿰뚫는 전략가가 되지만, 한말 그때에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지도층 일반이 상황인식 능력이나 전략감각에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앞에서 든 신문 특집은 한국지식인 문화의 한계를 100년 뒤인 오늘날에도 보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후쿠자와의 조선침략사상

 
후쿠자와 유키치.
  본론으로 돌아가서, 메이지기를 통해 조선침략사상의 또 하나의 원천은 명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를 창립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근대일본의 거국일치의 이데올로기’였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창도자였다. 조선, 중국 같은 것 더 이상 상대하지 말고, 빨리 서양을 목표로 근대화하고, 서양국가로 행세하자는 것이었다.
 
  후쿠자와(福澤)에게는 전 국민을 향한 설교 강단이 있었다. 그것은 <시사신보>(時事新報)였다. 이 강단에서 이웃인 조선은 ‘아시아 속의 일소(一小) 야만국’이었고, 불문의 나라(不文之國·비문명국)였다. 그는 때로는 ‘조선에의 출병’을 헌책했고 때로는 ‘식민’을 헌책했다. 후쿠자와의 강단은 거의 일관되게 조선멸시관을 깔고 있었다.(姜尙中等, <日本はどこへ行くのか ― 日本の歷史25>, 講談社學術文庫) 조선을 ‘야만’으로 보는 멸시관은 당연히 일본 스스로에게 ‘문명 강제의 사명’을 떠안기는 것이었다. 후쿠자와에게 이 사명은 침략전쟁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국민의식 고양을 위해서도 후쿠자와는 침략전쟁을 긍정했다. 그도 일본민족의 광휘로운 선례(先例)를 신화와 역사속에서 찾았다.
 
  “일국의 인심을 흥기하여 전체를 감동케하는 방편은 외전(外戰)의 방편만 한 것이 없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은 천칠백 년의 옛날에 있었고,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출사(出師)도 이미 300년을 지났으되 인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通俗國權論>)고 후쿠자와는 서슴없었다. ‘신공황후’의 허구는 <일본서기> 속에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조선멸시관 내지 조선침략사상 역시 그 뿌리는 <일본서기>에 가서 닿아 있다.
 
 
  역사 속에 구조화된 조선번국관
 
  요시다 쇼인이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멸시관이나 조선침략사상은, 막부(幕府) 말기나 메이지기가 되어 이들이 갑자기 창작하거나 날조해 낸 것이 아니라, 그 전(前) 시대의 역사나 전승 속에 이미 구조화되어 있었던 것임을 여러 연구는 알려주고 있다. 메이지의 전 시대인 에도기는, 표면적으로는 조선통신사 등으로 선린(善隣)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전승에 근거하는 조선멸시관은 사상, 학술, 문예, 연예, 설화 등을 통해 계승,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쇼인이나 후쿠자와는 그들이 과민하게 설정했던 위기상황에 대응하여 역사전통 속에 있는 조선멸시관 내지 조선침략사상을 현실의 폴리시로 향해 퍼올렸던 것이다.
 
  삼한이라고도 하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를 일본의 번국으로 <일본서기>는 기술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일본원군 2만7000명이 663년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나당(羅唐)연합군에 패한 후, 일본으로 대거 건너온 백제의 유민(遺民)들이, 수세기에 걸쳐 먼저 건너와 정착하고 있던 친류들과 합세하여, 신라의 반도통일에 자극받아, 일본열도에 고대국가를 건립하던 과정에서 편찬된 역사서로 알려져 있다. ‘일본(日本)’이란 국호(國號)는 670년부터라고 <삼국사기>에도 보인다. 이때부터 8세기 초까지가 일본고대국가의 완성형인 율령(律令)국가 건국기로 보이는데, 이때의 사서 편찬은 달리 지식인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백제유민들 몫이었다. 사서 편찬이야말로 중심적 건국작업이고 보면, 백제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한과 콤플렉스는 열도국가의 반도국가에 대한 ‘자존심과 아이덴티티의 근간’으로 탈바꿈되어, ‘역사’는 구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일본서기〉는 신화와 허구와 사실(史實)이 혼잡되어 ‘역사서’로 만들어져 있다고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얘기한다.
 
  후세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 조선번국관이 드러나 있는 기사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두 가지 기사이다.
 
  <일본서기>의 절대적 영향력에 주목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에 와 있던 서양사람들도 있다. 메이지 초기에 일본에 와서 도쿄대학의 전신인 개성학교(開成學校)에 근대화학(化學)교육을 도입하고, 훗날엔 미국으로 돌아가 목사가 되어 저술 등으로 서양에 일본을 소개하는 데 활약한 윌리엄 E. 그리피스도 그중 하나다. 그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본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은 행해졌고 강화도사건(1875년)은 일으켜졌다’고 했다. 당시의 미국인들이 운양호(雲揚號)사건을 일본의 조선침략의 개시로 규정했던 것을 이 일화는 알려준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일본 국사화첩(國史畵帖) <대화앵>(大和櫻)에 실린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도.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의 군대는 바다를 건너기 전에 ‘신공황후’를 떠받들어 놓은 신사에서 혈제(血祭)를 올리고 침략길에 올랐던 것이다. <일본서기> 속의 ‘신공황후’ 관련 기사의 줄거리를 보겠다. 제2차세계대전 전에 일본역사의 빛나는 선례로서 전 일본국민에 의해 공유되었던 신공황후 스토리는, 소학교 교과서에 〈일본서기〉를 그대로 옮겨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때는 기원 3세기의 어느 해로 못 박혀 있다. 제14대 천황의 신공황후는 날때부터 씩씩했다. 남편 천황이 죽고 나서 황후는 바다를 덮는 군선을 거느리고 일본서 제일 가까운 신라를 쳐들어갔더니, 신라왕은 대단히 겁을 내어 신국(神國)의 신병(神兵)은 대적할 수 없다면서, 즉각 매년 조공 바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신공황후는 곧바로 개선하였는데, 드디어는 백제, 고구려의 두 나라도 일본에 복속하게 되었다.(이하 생략)’
 
  이 황당한 얘기가 <일본서기>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교과서는 전형적인 ‘황국사관’식 역사서술이라 하겠는데, 2차대전 후에는 ‘신공황후’라는 것이 가공적 인물이라고, <일본서기>에는 있어도 역사서술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기초교육에서의 장기간에 걸친 ‘신공황후’ 스토리는 평균적인 일본인 뇌리에 사실과 관계없이 조선의 나라들이 무력하고 미개하다는 조선번국관을 남겨 놓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기술 또한 <일본서기>에 있다. 임나란 님(주군, 왕의 뜻)의 나라란 뜻이다. 일본 역사학은 거의 90년대까지도 남한에 있었던 가야 여러 나라를 임나라 했을 뿐만 아니고, 4세기부터 6세기 후반까지 거의 250년간이나, 거기에다 임나일본부라는 일본관부(官府)를 두어 남조선을 지배했다고 하고 있었다. 임나일본부설 또한 그동안의 긴 역사를 통해 일본의 조선번국관의 중요한 원천으로 작용해 왔던 것은 물론이다.
 
  최근의 일본의 고고학, 역사학은 ‘4세기 중엽’이란 시점에 ‘국내를 통일한 야마토(大和) 조정(朝廷)’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러므로 ‘대규모로 출병하여 낙동강 유역을 공략하여 거기에 임나(任那)를 두었다’ 따위는 허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지난날의 대일본제국이 임나일본부의 실재를 얼마나 갈망했던지를, 그리하여 조선침탈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 보려 들었던지를 드러내는 우스꽝스런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이는 일제의 조선침략은 임나일본부가 실재했다는 전제 위에 저질러진 일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총독부, 임나일본부를 발굴하라’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식민지로 하여 들어섰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제일 첫 사업으로, 총력을 기울여 달려들었던 일이 김해 일원의 땅을 뒤집어,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는 일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에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이 주최한 ‘고대사 심포지엄 국가성립의 수수께끼’에서 저명한 고대사학자 모리 고이치(森浩一) 교수가 한 발언 속에 총독부 얘기가 나온다.
 
  모리(森) “…임나(任那ㆍ미마나)라는 것이 대단히 확실히 있던 듯이 말씀들 하시는데, 고고학 자료, 특히 유적입니다만, 유적상으로 보면 좀처럼 그것은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내가 얘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일 뿐만 아니고, 일한병합 직후에 조선총독부(總督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임나일본부를 증명하라’라는 것으로 김해 일대에서 대발굴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물은 많이 나왔지만, 전혀 핵심사안을 증명하는 자료가 없어서, 보고서는 겨우 두 페이지 정도로서, 언제 어디에 가서, 어디를 팠다고 하는 간단한 것이에요. 학술보고서는 못 내놓았다. 이건 역시 그 당시에 뭔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로서 조사를 했지만, 나오는 것은 남조선적인 것으로, 일본의 지배를 증명하는 것은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후에 나온 자료를 보태도 결론은 바뀌지 않습니다.”(松本淸張, 井上光貞, 森 浩一 등, <國家成立の謎>, 平凡社)
 
  일본의 조선침략사상이 근거하는 조선번국관이 일본고대국가의 완성기에 쓰인 <일본서기> 속에 장치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나 임나일본부 기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모두 허구인 것을 강제병합 100년인 지금, 한번 확인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신봉되던 〈일본서기〉의 이 기사들이 허구로서 확정되는 것은, 일본의 고대국가의 성립시기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였다.
 
  주목할 만한 하나의 성과는 앞에서 본 1979년의 〈아사히 신문〉 주최의 심포지엄이었다. 학계의 거장들과 신진기예가 함께 내린 종합결론은 일본의 국가 성립시기는 6세기로 정리되었다. 심포지엄에서는 국가 성립시기로 빠르게는 4세기로부터 늦게는 7세기까지가 주장되었다(여기서 국가란 공적 강제력으로서의 무력의 존재, 비용조달을 위한 조세체제, 관리가 두어지는 등의 중앙에 의한 지역구분의 국민 지배 등이 기준).
 
 
  천황의 구원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시 궁중만찬회에서 전 대통령과 건배하는 쇼와(히로히토) 천황(오른쪽).
  그런데 조선침략사상을 퍼내는 <일본서기>의 허구에 입각한 황국사관(皇國史觀)을 결정적으로 깨뜨리는 ‘말씀’이 다른 사람도 아닌 쇼와(昭和) 천황으로부터 나오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1984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광복 후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때였다. 9월 6일 궁중만찬회에서의 천황만찬사의 고대사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돌이켜보면 귀국과 우리나라와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인국(隣國)으로서, 그 사이에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분야에서 밀접한 교류가 있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에 의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면 기원 6, 7세기의 우리나라의 국가형성의 시대에는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긴 역사에 걸쳐, 양국은 깊은 이웃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고, 재차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천황의 발언에서 과거사에 관한 논의는 다른 곳으로 미루고, 재일동포 작가 김달수(金達壽)의 평언으로 고대사 언급부분을 들여다보겠다. 그는 소설가였지만, 고대사에 관한 한 역사가 이상이었다. 일본 방방곡곡을 누벼 <일본 속의 조선문화>라는 역작을 남겼다. 왜곡이 심한 일본 고대 사학계의 시각을 바로 잡고, 새 시각을 열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쇼와 천황의 ‘고대사’에 대해 김달수의 코멘트를 들어본다.
 
  “현 일본의 최고 레벨에 의해, 학문적인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각도에서 신중히 검토했을 것이 틀림없는 이 ‘말씀’은 고대사에 있어서는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고 하고서 그때의 매스컴이 천황의 과거사 관련 발언에 너무 매달려 고대사 관련의 중대한 언급을 무시해 버린 것을 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국관의 받침대, 무너지다
 
  “그보다도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라고 하는 그 앞의 ‘예를 들면 기원 6, 7세기의 우리나라의 국가형성의 시대에는’이라고 한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부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최신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고, 무엇보다도 그것에 의해 ‘4세기 반경’ ‘국내통일을 끝낸 야마토 조정’ 등의 속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야마토 조정’의 자손이라고 하는 현 천황 자신에 의해, 확실하게 부정되었다는 것입니다.”(金達壽, <日本古代史와 朝鮮>, 講談社學術文庫)
 
  일본 고대 국가의 ‘6세기 성립’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4세기 중엽부터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남한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그 이전의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확실하게 허구인 것으로 단정하는 의미가 있다.
 
  이로써 조선멸시관과 조선침략사상의 연원으로 작용했던 조선번국관의 주요한 근거는 더 이상 힘을 못쓰게 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허구에 근거했을지라도 역사를 통해 일본인들 의식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조선번국관’을 지우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근년에도 총리 경력의 인사 중에 ‘일본신국(日本神國)’운운의 망언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 ‘일본신국’은 〈일본서기〉의 처음부터 일본인들 의식 속에서는 ‘조선번국’과 맞물려 있는 인식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강제조약의 무효화도 인정 않는 일본총리의 ‘강제성 인정’ 운운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레토릭으로 과거청산을 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로가 삼류 놀음이다.
 
  강제병합에서 100년이 되고, 새 100년을 내다봐야 할 이 시점에 ‘조선번국관’이라도 정리할 계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하나의 희망을 본다.
 
  현 일본천황이 천황가와 백제왕실의 혈연관계를 2차에 걸쳐 공언했던 것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일본의 평균적 의식 상황에서는, 천황 스스로가 ‘조선번국관’을 불식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와의 혈연관계 같은 것 절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얘기다. 사서에 기록이 있어도 입에 올리는 것은 의식문제다.
 
  2001년 한일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아키히토 천황은 (나라에서 교토(京都)로 도읍을 옮기고 헤이안쬬(平安朝)을 열었던) “간무(桓武ㆍ737~806년)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는 것에 대해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몇 명 있었지만, 보도한 것은 〈아사히 신문〉뿐이었고, 그 외의 신문과 방송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 속에 뿌리 깊은 ‘조선번국관’에 거슬린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천황, ‘우리 외가는 백제 왕실’
 
노태우 대통령에게 자신의 모계는 한국계라고 실토한 아키히토 일본 천황.
  또 한 번의 현 천황의 한반도 혈연관련 발언은 1990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의 통역이 신문 인터뷰에서 최근에 밝혔다. “그해 5월 24일 궁중만찬회가 끝나기 직전 (천황이) 노 대통령에게 ‘한국과 상당한 인연이 있다고 느낀다’며 아악(雅樂) 감상을 권유했고, 식장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제 가계(家系)를 보면 모계(母系)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 궁중의 아악이 신라 아악인 것을 천황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2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얘기를 발굴해서 이 강제병합 100년에 〈아사히 신문〉이 보도한 것은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번국관’이라는 역사의 주박을 깨지 않고는 한일 양 민족의 새 100년이 의미 있게 시작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아사히 신문〉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조선번국관의 극복을 평균적인 일본인 모두의 것으로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천황의 한국방문은 그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국 측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있는 현 천황은 방문에 뜻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실권을 가진 일본 정부 당국이 한국 쪽 국민대중의 반응에 자신 없어 하는 것 같다.
 
  이 100년에 뭔가 의미 있는 일 하나라도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2차대전의 항복선언을 천황이 하지 않고, 총리나 대본영의 누군가가 했으면, 일본에는 100만명의 희생이 더 있었을 것이라 한다. 미국이 천황제와 천황을 온존시켜 점령통치를 매끈하게 했던 그 낯 두꺼운 지혜를 우리 국민이라고 차용 못할 것인가.
 
  일본천황은 현 헌법에서는 어디까지나 상징일 뿐이다. 그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과도 무관하다. 그러나 긴 역사를 통해 형성된 천황의 초 헌법적 권위는 오늘의 천황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일본사람 모두의 역사 속에 뿌리 깊은 조선멸시관, 조선번국관을 바로잡을 사람은 천황밖에 없다는 현실을 우리 국민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퓰리처 상을 받았던 미국의 허버트 빅스는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을 야멸 차게 추궁하면서 ‘내성(內省)을 모른다’ 했지만(<昭和天皇上,下>, 吉田 裕 감수, 講談社學術文庫), 그와는 달리 현 천황은 그 언설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와 조선에 관해 깊은 내성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돌 던지지 말고, 기회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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