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亡國체험 100년 특별연재] 위대한 양심법정

3·1만세의 국제파장 (中)

허문도    asadalmd@hanmail.net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許文道
⊙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진주만 기습 직후 對日선전포고에 서명하는 F.루스벨트.
  봄이 왔다.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 평생에도 봄이 한 번 왔다. 망국(亡國)의 백성 이승만 손에 여권이 들어와서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간 지 30년이나 되었어도, 미국 국적 취득을 거부하고 조선사람이기를 고집하는 무국적(無國籍)의 이승만에게 여권을 내줄 정부는 그동안 없었다. 그는 1932년 12월 뉴욕을 출발하여 이듬해 8월에 그리로 돌아갔다. 여행의 주목적은 물론 독립운동이다. 일본의 만주침략(만주사변 1931년) 문제가 국제연맹에 제소되어 세계의 이목이 제네바에 집중해 있는 기회에 세계 여론에 다시 한 번 조선독립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
 
  이 여행에서 이승만은 다음해 결혼하게 되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체스카 도너 양과 만나게 된다(자세하게는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독립의 소망이 클수록 날이면 날마다 좌절감만 쌓이는 쉰여덟 홀아비의 일상에 봄이 왔다 할 것이다. 순수 게르만인 프란체스카는 영어에도 능했고 사무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이승만은 이 여행에서, 망명정객에게 없어서는 안될 운동의 보좌역과 인생의 반려를 얻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이 필요로 하는 끝없는 도전과 창의의 정신작용의 안정적 공급원인 가정을, 이승만은 이 여행을 통해 드디어 얻게 되었다.
 
 
  이승만의 봄과 여권
 
  이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정부가 무국적자 이승만에게 여권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이 나던 해, 파리강화회의에 가보려고, 그렇게 백방으로 노력했는데도 ‘NO’로 일관하던 국무성이 이번에는 특단의 외교관여권(diplomatic passport)을 발급해 준 것이다. 이 결단을 내린 사람은 당시 세계공황 속에 있던 후버 정권의 국무장관(1929~1933년) 헨리 스팀슨이었다.
 
  한국이 일제로부터 광복하기까지는 지구 규모의 전쟁이 있어야 했던 것을 한 번 상기해 본다. 유격대가 게릴라전 좀 한다고 판세가 어찌되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1945년 3월의 도쿄(東京) 대공습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10만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 전해 7월, 도쿄로부터 가폭권(可爆圈)에 있는 사이판에 B29 기지를 만들어서는, 하늘이 새까맣게 날아와, 일본 수도(首都)의 다운타운을 완벽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방공호(防空壕)도 없지 않았을 텐데 비행기 폭격 한바탕에 수도 인구 10만명이 죽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일본 군부는 본토결전 의지만 다졌다. 가장 강경했던 일본 육군 중추가 기가 꺾이는 것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原爆)이 투하되고 나서다. 천황(天皇)조차 육군의 기세에 질려 감히 ‘전쟁 그만두자’는 소리를 못하던 것을 하게 해 준 것은 원자폭탄이었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 한 사람 바로 밑에서 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프로젝트의 총지휘 책임자가 육군장관 스팀슨이었다. 제네바에 가려는 이승만 여권의 발급을 결단한 사람이 스팀슨이었다.
 
  평소에 미국의 대외(對外)정책을 비판이나 하고 실무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만 가지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승만을 국무부 관리들은 냉대했다. 법적(法的)인 무국적을 고집하는 이승만에게 미국여권은 절대로 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제(日帝)의 침략성이 세계 앞에 돌출해 버린 만주사변 상황에서 ‘전사(warrior) 스팀슨’(스스로의 호칭)이 독립운동의 고집불통 이승만과 조우함으로써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메이지일본 미국과 師弟관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서 도쿄전범(戰犯)재판을 했을 때 그 소추의 상한은 1928년, 만주사변(1931년)을 중심으로 그 전주곡인 장쭤린(張作霖) 폭살사건까지였다.
 
  만주사변이 나기까지 스팀슨은 일반적인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스팀슨은 1920년대 말 필리핀 총독으로 1년 남짓 재직했는데, 오는 길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고위층의 접대를 받았다. 교토(京都) 미야코(都) 호텔의 추억은, 그가 훗날 원폭 사용의 책임자였을 때, 실무자들이 산으로 둘러싸인 교토가 원폭효과 측정에 좋다고 첫 대상에 넣어 놓았던 것을 손수 제외할 정도로 남아 있었다.
 
  미·일 관계가 시작되는 19세기 중엽 페리함대의 함포외교만 해도, 시바 료타로 같은 작가는 일본이 미국한테 강간당했다고 기염을 토하지만, 더 많은 연구들은 당시의 미국정부가 영·불(英佛) 등의 서구(西歐)국가들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니즘을 발휘하여, 일본을 개명(開明)시키려 했던 것을 알아냈고, 많은 일본사람도 그리 알고 있다.
 
  20세기 초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사람들이 일본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스승이 우등생 제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고, 메이지기(明治期)의 풍물기에도 나온다.
 
  홋카이도, 삿포로 시가와 연이은 벌판이 광활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초대 삿포로 농학교 교장 미국인 윌리엄 클라크의 동상이 서 있다. 손으로 오호츠크해(海)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일까. 무리를 향도하는 포즈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동상 대석에 새긴 ‘Boys, be ambitious’ 앞에 서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정경 모두가 미국사람들과 일본사람 관계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다.
 
  근년에 와서 일본 사람들이 유달리 되풀이해서 제2차세계대전을 돌이켜 보고, 설득력 있는 패인을 찾으려, 좌담, 연구토론, 저술 등으로 바빠 보인다. 이때에 자주 인용되는 책 하나가 있다. 아사가와 간이치(朝河貫一) 저(著), <일본(日本)의 화기(禍機)>다.
 
  이 책이 집필되었던 1907년 전후는 러일전쟁이 끝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을 보호국으로 하여 통감정치를 펴고 있을 때다. 당시 예일대학 교수였던 아사가와는 일본이 러일전쟁이 끝나고서 한·청(韓淸)에 대해 벌이는 일들이, 미국이 제시하고 있는 ‘주권존중, 기회균등’의 외교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자중(自重)하지 않으면 결국은 도의관철에 타협을 모르는 미국의 강대한 국력에 부딪혀 패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적 예언을 하고 있다.
 
  아사가와의 조국애를 깐, 격조 높고 통찰력 있는 서술이 오늘날도 많은 일본인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이 책이 초판으로부터 백 년이나 지난 요새 와서 다시 출간되어 읽히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일본의 지식인으로서, 일본에 대한 애정을 품은 채, 일본을 객관화할 수 있는 거리에서 일본을 보고 있는 시각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아사가와는 고향 후쿠시마 현에서 중학교를 나와 도쿄전문학교(와세다대 전신)를 졸업하고, 도미(渡美), 예일대에서 수학, 역사학 정교수로 정년할 때까지, 미국생활만 50년을 했다. 미·일관계의 원형을 체험적으로 지켜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얘기를 아사가와는 하고 있다.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은 미국의 관민(官民)이 일본 개국의 당초로부터 50년 이래로, 혹은 유럽제국의 야심을 막아주고, 혹은 우리(일본) 문화의 진보를 도와준 광대한 은의(恩義)라든지, 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으로, 또한 일본이 오래 잊어버릴 수 없는 바이다.
 
  미국은 실로 오늘에야 드디어 중국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 후의(厚意)를 일본에 대해, 일본이 근대적 국민으로서 오늘의 발전을 이룩하도록까지, 일각이라도 그 깊고 간절한 동정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 시대에 일본이 당송(唐宋)으로부터 받은 바를 가지고 여기에 비교해 보건대, 그 간접의 은의만으로서도 더 많다고 할 수 없고, 직접의 은의로서는 처음부터 한 날에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日本の 禍機>講談社 學術文庫)
 
  아사가와 교수가 이 얘기를 하는 시점은 1907년쯤이다. 일본은 메이지 근대화 과정을 통해 부모가 자식한테 주는 것 같은 은혜를 미국으로부터 입었다는 얘기인데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는 얘기이다. 또 자세히 읽으면, 미국이 동아시아에 베푼 은의가 한국만 건너뛴 것 같은 느낌이 이 글 속에 있다.
 
 
  일본의 침략성, 미국에 알리기 어려워
 
메이지시대 미국이 일본에 베푼 은의에 감사했던 역사학자 아사가와.
  하여간, 위의 인용을 통해 미·일관계의 근대가 스승·제자 관계 같았던 것을 알겠다.
 
  그래서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미국사람들에게 일본의 침략성을 바로 보게 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적 행보를 미국사람들은 생도 일본의 근대화 숙달 정도로 봤을지 모른다.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두고서도 미국은 청일전쟁을 제자 일본의 근대화 본과(本科) 입학시험 정도로 보았고, 러일전쟁을 근대화 졸업시험으로 본 것 같다.
 
  때를 같이하여 세계 최강이 된 미국은 우등으로 졸업한 생도에게 상(賞)이라도 주듯이 그 전에 한국과 맺었던 조약 같은 것은 생각도 않고 한국을 일본의 ‘자유처분’에 맡겼는지 모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그런 대통령이었다.
 
  그러니 이런 미국사람들을 인류의 양심법정이라 믿고, 이승만·서재필(徐載弼) 등의 독립지사들이 일본의 침략성을 알게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 것인가.
 
  일본에는 태평양전쟁의 패인(敗因)을 거슬러 올라가, 러일전쟁의 승리에서 찾는 시각도 있지만,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판정하고 중재를 붙인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야말로 세계사가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틀게 한 전철수라 해야 할 것 같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크게 이겼다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1905년 3월의 만주봉천(奉天) 회전만 해도, 러시아 측은 전력(戰力)을 온존한 채 퇴각하는 정도였다. 일본은 이미 전력 소모가 많았다. 일본의 공업력이 한계를 드러내 화약이 달렸고, 국제시장에서 빌린 전비(戰費)마저 바닥이 나고 있었다.
 
  러시아의 전법은 전통적으로 나폴레옹전쟁에서 쿠투쵸프 장군이 그랬지만, 퇴각전략으로 적의 병참선을 한량없이 길어 빠지게 해 놓고는 굶주림과 동장군으로 적을 섬멸해 버리는 수법이다. 러일전 당시는 시베리아 철도의 개통 초기로서, 일본군의 몇 배나 되는 대병력이 속속 만주전선으로 투입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동해에서 러시아 해군이 패전했다 해도 러시아 측에는 전쟁에 졌다는 생각이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리지 않았으면 러시아군은 계속 퇴각, 하얼빈을 지나 질질 끌면서 흥안령 산맥의 산록을 스쳐 겨울이 된 헤이룽장 얼음판 위에 올려놓고 일본군을 끝장냈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읽어낸 이토 히로부미가 루스벨트에게 그와 하버드 동창인 심복 가네코 겐타로(金子 堅太郞)를 보내, 강화(講和) 중재를 부탁했던 것이다.
 
  공업생산력이 무력으로 직결되는 시대를 맞은 20세기 초두에 미국의 철강생산은 영국을 넘어섰고, 세계 최강이었다. 명성이 높았던 해군전략가 마한의 이론에 따라 해군력도 증강해 가고 있었다. 대국(大國)의식이 있었던 루스벨트는 행세를 하고 싶던(키신저,) 참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세계사적 오착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러시아 국내의 혁명소요의 불안을 넘겨다보고 있던 루스벨트는 일본의 요청에 즉각 반응했다. 양국대표를 미국으로 불러 포츠머스에 강화회담 판을 만들어냈다. 루스벨트는 원족(遠足)을 간 생도가 다칠까 봐, 보듬어 내듯이, 일본이 전승(戰勝)포즈를 취할 수 있는 타이밍에서 전쟁터에서 불러내어 강화 테이블에 앉게 해 준 것이다.
 
  싸움을 말려 세상을 평화케 하는 것은 좋은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수천 년의 문명국 한국을 일본 처분에 맡긴 것은 루스벨트의 세계사적 오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루스벨트의 승인으로 결국 한국을 깔고 앉게 된 일본은 지난번 1월호에서 보았듯이 침략 독트린인 주권선·이익선 전략에 시동을 걸게 되었고, 태평양 전쟁까지 가고 말았다.
 
  미국은 그동안 가르쳐 온 제자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겨 근대화 과정을 졸업한 것이 대견하다는 듯이 한국을 무슨 물건처럼 상으로 준 것이다. 그 결과가 태평양전쟁에 가 닿았다.
 
  미국은 이미 1899년에 헤이 국무장관이 중국을 두고 전 세계를 향해 ‘주권존중기회균등’의 원칙을 천명하는 등으로, 동아시아에 대해 제국주의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사제관계로서도 알 수 있듯이 그때는 아직도 미국의 말 한마디면 일본을 동으로도 가고 서로도 가게 할 수 있는 때였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한국을 상품 취급했던 것이다.
 
  결론을 낸다면, 20세기 초두의 한반도에서 ‘문명적 허공’밖에 보지 못한 루스벨트의 ‘인식 오류’가 가장 원천에 있는 태평양전쟁의 진정한 원인이라 하겠다.
 
  미국사람들의 이 같은 ‘인식오류’는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인류문명의 파괴자요, 잔악한 학살자인 나치 독일과 제국 일본에다 한꺼번에 징벌전쟁을 가해 승리의 종국을 만들어 놓고, 위대한 메시아니즘의 사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눈을 감았다.
 
  F.루스벨트가 눈감는 순간까지 가다듬고 있었던 전후구상 속에서, 한국은 해방이지만 신탁통치 기간이 30~40년이었던 것이 알려져 있다.
 
  미국인들의 반도에 대한 ‘문명적 허공’이라는 인식오류가 분단, 반탁(反託)이라는 곡절을 거쳐 미국 청년 수만의 유혈까지 가서 닿은 것은 아닌지 지금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만주사변으로 외로운 스팀슨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이 났을 때, 스팀슨은 미국 정부 안에서 외로웠다. 처음, 만주의 관동군(關東軍)이 움직였을 때, 그가 평소에 익히 알고 있는 일본 외상(外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를 그는 믿었다. 대미(對美)협조에 원만한 시데하라가, 현지 파견군의 돌출쯤이야, 시빌리안 컨트롤의 상식대로 간단하게 다스릴 줄 믿고, 지켜보는 입장을 취했다.
 
  20일이 지나, 주동자 이시하라(石原莞爾)가 장성선의 도시 진저우(錦州) 폭격에 나선 것을 보고 스팀슨은 달라졌다. 일본 군부가 문민(文民)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것을 순간에 직감한 것이다. 대일(對日) 강경입장으로 돌아서는 데 스팀슨은 빨랐다.
 
  스팀슨 국무는 즉각, 일본의 대미의존적 경제구조를 염두에 두고, 일 군부의 궤도 수정을 위해 경제제재론을 폈다. 세계경제공황 속의 영국·프랑스는 극동문제를 외면하려 했고, 소극적이었다. 당시의 후버 대통령은 퀘이커 교도의 평화주의 입장에 따라, 대일 경제제재가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스팀슨을 말렸다. 이때 스팀슨은 ‘폭력과 무법 앞에 할 바를 모르고 패퇴해 가는 자유주의 사회의 무력함’에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한다.
 
  대통령이 반대하는 외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사변 앞에 미국이 내놓은 대책이 이른바 ‘불승인 정책’의 통첩, 즉 ‘무력수단으로 만들어진 일체의 상태나 조약 등을 승인할 의사가 없음을 통고’하는 것이었다(1932년 1월 7일).
 
  그러나 영, 불 등 유럽국가도 동조해 주지 않았다. 동시에 일본군의 행동을 억제하는 효과는 없었다.
 
 
 
제네바의 이승만

 
  이듬해 1월 28일에는 일본군이 상하이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을 좋게만 보고 있던 많은 미국사람이 일본의 침략성에 눈을 뜨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사변 역시 관동군이 만주에 집중한 세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모략으로 일으켰던 것이 뒷날 드러났다.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이해 4월 상하이에서 거사한 대상은 이때의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이었다.
 
  관동군은 전 만주를 석권하고서 이해 3월에는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침략의 결과를 기정사실화하고 나왔다. 국제연맹이 대응방책을 얻고자 조사단을 파견한 중에 벌어진 일이다.
 
  연맹이 파견했던 리튼 조사단은 만주사변을 침략으로 결론 내렸다. 설명이 좀 길어진 것은 독립지사 이승만의 등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1933년 초에는 리튼보고서의 채택여부를 결정하는 국제연맹 회의가 열렸다.
 
  이승만이 참관을 원했던 것은 바로 이 회의였다. 일본의 침략성을 직시하고 퓨리턴적 소명의식으로 그 저지에 나섰다가,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아 앙앙불락하고 있던 상태에서 스팀슨은 이승만과 만난 것이다. 이리하여 외교관여권은 나왔고, 이승만의 망명 인생과 한국독립운동에도 봄이 왔던 것이다.
 
  연맹회원이 아닌 미국의 국무장관 스팀슨은 이때에 제네바에 가는 이승만에게 침략저지에 일조를 해 보라고 소망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제네바 연맹회의 주변에서, 이승만은 평소처럼 임정(臨政)승인 요청이나 독립청원을 하지는 않았다. 리튼보고서 채택 국면에서 초점의 하나는 관동군이 세운 만주국의 괴뢰국 여부였다. 이승만은 재만(在滿) 100만 조선인의 의향을 들어가며(서정주, <우남 이승만전>, 화산문화기획), 연맹회의장 주변에 만주국이 괴뢰국임을 입증하는 설득력 높은 언설을 풀어놓았다.
 
  결국 리튼 보고서는 채택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침략성이 공인되어 국제고립의 길을 간 제국 일본의 종착점이 어디였던가!
 
  제네바 현장에서 그 출발을 지켜본 이승만은 한국 독립운동에 봄이 오고 있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일본의 침략성 징벌한 美의 메시아니즘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통상적인 국익(國益)이 일본과 부딪히는 게 있어서 벌어진 전쟁은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일본의 중국대륙 침공으로 드러난 침략성을 아메리카의 메시아니즘이 징벌하는 전쟁이 태평양전쟁이었다.
 
  태평양전쟁 단계에서, 서양문명 속에 근대의 선두주자인 영국처럼 아편전쟁의 후예 같은 나라들만 있었다면 세상은 어찌되었을까. 세계는 나치 히틀러와 일제의 원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세계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상에 일찍이 없었던 강대한 무력(武力)과 인지의 극한을 구사한 전략을 꺾은 아메리카는 서양 문명에서도 참으로 예외적인 존재라 할 것이다. 아메리카의 행동준칙을 확인하는 것은, 신교(信敎)의 여하와 관계없이 중요해 보인다.
 
  앞에서 미국이 퓨리턴의 신앙공동체에서 출발한 나라라는 것은 말한 적이 있다. 퓨리턴이란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로 배경 사상은 칼뱅주의였다. 16~17세기 영국의 다단했던 개혁소용돌이를 통과하고서 이들에게 남은 기질과 속성은, 세속 속에서의 금욕주의(禁慾主義), 신(神)에의 소명(召命)의식, 성(聖)공동체에의 귀속의식 등으로 꼽아진다.
 
  미국을 세웠던 퓨리턴들은 그들이 구(舊)대륙으로부터 아메리카 동부 뉴잉글랜드로 건너온 것을 성서 속 선민(選民)의 이집트 탈출, 엑소더스 신화(神話)에 겹쳐 놓고 있다.
 
  “이들에게 모든 세속사 안의 제일의적 원인은 신의 의지였다. 아메리카사(史)에서는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지도자는 언제나 퓨리턴의 소명의식에서 국가의 존재이유를 구했다.”(大下尙一 편, 講座 아메리카의 文化 1. 南雲堂)
 
  링컨이, 남북의 대립이 악화되었을 때, 통일의 회복을 절망(絶望)하여 모든 것을 바치려 들었던 이유는, 신의 뜻 밑에서 건국된 나라 아메리카는 ‘전 세계의 최후, 최선의 희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퓨리터니즘의 세속에의 번역이 아메리카의 메시아니즘 정치인 것이다.
 
  한국에도 링컨의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 지도자들은 더러 있었지만, 링컨의 혼을 내면에서 떠받친 퓨리턴 컬처에 주목하는 지도자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메리카 징벌전쟁의 주역을 두 사람만 꼽는다면, 만주사변 때의 국무장관이고 태평양 전쟁기에는 육군장관이었던 스팀슨과 4선 대통령 F.루스벨트일 것이다. 영국의 처칠이 있지만, 그에게는 자국방위가 일차 목적이었다.
 
 
  늙을 수 없는 戰士 스팀슨
 
육군장관으로 2차대전을 이끈 헨리 스팀슨.
  스팀슨이나 F.루스벨트 모두가 퓨리턴 컬처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당(黨)이 다르고, 역사 무대에의 등장시기가 다른데도, 그들의 대일징벌의 문제의식은 묘하게 계기하고, 전승되고, 통합되고, 크게 하나 되어 역사를 조형하게 된다.
 
  이승만에게 여권을 내주고 석 달 남짓 지난 1933년 3월, 스팀슨은 물러나게 되었다. 민주당의 F.루스벨트 정권 시대가 온 것이다. 스팀슨은 나이도 65세나 되었고, 침략성 징벌의 소신도 직속 대통령의 벽에 부딪혀 펴 보지 못한 채, 씁쓸하게 현역에서 물러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스팀슨의 정신은 늙을 수가 없었다. 만주에서 화베이(華北)로 일제의 침공은 깊어 갔고, 유럽서는 대(對)히틀러 유화주의가 파탄 나는 것을 보면서, 안온하게 노후를 즐길 심경에 잠길 수 없었다. 고립주의, 전쟁회피를 바라는 여론 앞에, 아메리카를 향해 계속 발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대의(大義)’의 깃발을 감아, 무위(無爲)와 타협으로 문제를 앞으로 밀쳐 놓아도 결국은 보다 큰 재액(災厄)을 가져올 뿐이다.”
 
  전운(戰雲)이 짙어가는 세계를 향해 메시아니즘 정치의 본령을 드러내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전쟁을 피하려 드는 것은 정의를 희생하여 평화를 얻자는 것이다.” “미국만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바라는 것은, 죄악일뿐더러, 진정한 평화도 없다.”
 
  스팀슨은 무엇보다도 아메리카의 사명에 투철했다. “국제정의와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부터 도망하여, 미국의 위신과 문명 그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런 와중에 재야(在野)의 스팀슨이 현직 대통령 루스벨트에게서 접점을 느끼는 경우가 나타났다.
 
  첫 임기 4년 동안 불황타개와 고립주의 여론에 몰려 무법자의 행태를 지켜만 보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일전쟁(1937년) 발발 3개월에 유명한 ‘격리연설’을 하고 나온 것이다. 루스벨트는 “인간사회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유행하려 할 때, 그 만연을 막기 위하여, 병자(病者)를 격리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다”고 하고서, “국제사회에서도 ‘무법(無法)국가’는 타국(他國)이 일시적으로 격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국민에게 호소하고 나왔다. 준비와 실현의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뿐, 침략자 응징의 불퇴전(不退戰)의 의지를 이미 다져놓고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연설이다.
 
 
  화이트하우스, 스팀슨에게 전화
 
  고립주의 여론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재야의 스팀슨은 대통령의 이 연설에서 아메리카와 세계의 앞날에 희망을 보았다.
 
  그래도 아메리카 여론은 여전히 몸을 사렸다.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항복한 다음날 저녁에서야, 스팀슨은 라디오 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붙들었다.
 
  “우리는 목하, 미국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대체로 문명이란 뭔가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문명원리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전도(轉倒)되려 하고 있다. 전체주의의 승리는 자유의 종언을 말한다. 지금은 나치 독일과 서반구 사이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힘은 영국 함대뿐이다. 이 함대를 도우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든 수단을 다해 영국을 원조하라.”(五百旗頭眞; <스팀슨 日米관계의 昭和を決めた男>季刊아스티온, NO.11 1989 冬)
 
  다음날 아침 신문 논조는 격렬하게 갈라졌다. 스팀슨은 한쪽에서는 ‘위기 앞에 일어선 영웅’이었고, 또 한쪽에서는 ‘전쟁을 선동하는 악마’였다.
 
  그런데 이날 오후 화이트하우스로부터 스팀슨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루스벨트가 협력을 요청했다. 육군장관으로의 입각(入閣)이었다.
 
  루스벨트가 스팀슨을 부른 것은, 스팀슨이 외쳐댄 아메리카의 사명을 수행할 결심이 드디어 루스벨트에게 섰다는 얘기가 된다. 스팀슨은 은퇴 후 8년이 지나 이미 72세였다. 가을에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는지라 공화당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지만, 스팀슨은 침략자 징벌의 소명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육군장관 2년, 국무장관 4년을 거친 스팀슨은 외교국방에 걸쳐 경험과 수완에서 보기 드문 에이스였다. 그러나 정당도 다르고, 나이도 15세나 많아 스팀슨은 루스벨트에게 부담스런 존재일 수 있었다. 그리고 선거를 앞둔 판에, 고립주의 여론을 상대로, 스스로의 전쟁 결심을 드러내야 하는 인사가 스팀슨 인사였다. 아메리카의 사명과 아메리카인을 루스벨트는 믿은 것이다. 루스벨트 리더십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스팀슨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국사상의 명신 위징(魏徵)이 당태종(唐太宗)에게 한 것 같은 간언도 하는 각료였다. 대전 초기에 루스벨트가 국내의 고립주의 여론에 신경을 써, 여론조사의 숫자를 재가며, 영국에 대한 원조를 일보전진, 반보후퇴 식으로, 멈칫거리고 있을 때였다. 스팀슨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질타했다.
 
  “대통령! 이 같은 위기 속에서 대통령의 책무란, 여론의 기압계를 관측한다든지, 우발사를 목을 빼어 기다리는 것은 아닐 테지요. 아메리카가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도록, 국민에 대한 강력한 지도성을 발휘하는 것이, 위기 속의 대통령의 임무 아니겠소.”(J.M.Burns, Roosevelt:The Soldier of Freedom)
 
  이 같은 간언이 있게 하는 대통령의 리더십은 위대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1940년 9월에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3국동맹을 맺고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오르는 것은 다음해 12월 8일이다.
 
  노전사 스팀슨이 아메리칸 메시아니즘의 사도 루스벨트의 부름을 받아들인 그때에,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오래 고대하던 인류의 양심법정은 개정(開廷)되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침략자를 징벌할 도의법정의 심판자들이 이때에 드디어 제자리에 착석한 것이다.
 
 
  早期 對日제재론과 3·1운동
 
  여기서 풀고 넘어가야 할 의문이 하나 있다.
 
  루스벨트가 징벌전쟁의 필요성을 들먹인 것은 진작부터였다. 1932년 가을의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루스벨트는 취임 전인 1933년 1월, 당시의 스팀슨 국무장관을 만났다. 그러고는 이른바 스팀슨 독트린을 계승할 것임을 표명했다. 대화를 통해서는, 스팀슨 내심의 정책의도였던, 경제제재 노선 자체를 전수받을 의중을 루스벨트는 보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고 더 나아가서, 루스벨트는 이때 이미 측근들에게는 대(對)일본 전쟁을 각오할 필요가 있다고 했고, 정권 발족 후의 초기 각의(閣議)에서도 대일 전쟁론을 입에 올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자원과 시장을 미국에 기대고 있던 일본이 경제제재를 가하면 폭발할 것을 물러가는 스팀슨 역시 내다보고 있었다.
 
  정권의 인수인계 단계에서 스팀슨과 루스벨트는 전쟁까지도 포함하는 엄혹한 대일제재론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五百旗頭眞, <日本の近代6, 戰爭占領講和>, 中央公論社)
 
  이 무렵으로부터 7, 8년이 지난 1940년이 되어, 프랑스가 항복하고 전 유럽이 히틀러 발밑에 엎드려도, 여론은 바다 건너 전쟁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고립주의 편이었다. 스팀슨과 루스벨트는 어떻게 만주사변 단계에서 전쟁도 각오하는 대일제재론에 도달했던 것인가. 의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들이 모두 3·1운동이 미국정치에 일으킨 파문을 무심히 볼 수 없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루스벨트는 윌슨 대통령 밑의 해군차관보였다. 유럽전선의 해군의 전쟁지도가 주무(主務)였지만, 전쟁기간 중, 서구 열강의 관심이 중국을 비워놓은 사이에, 불난 집에 도둑 들 듯, ‘21개조’를 강요하고, 산둥반도에 손을 댄 일본에 대해 강한 의구와 불신을 금치 못했다.
 
  스팀슨의 1차 육군장관 재직은 1911년부터 1913년, 1차대전 직전까지였다. 근대전을 치를 수 있는 군대로 미육군을 재편성한 게 그였다. 재야의 스팀슨은 프랑스 전선에 중령으로 참전했다. 그는 행동하는 퓨리턴이었다.
 
  루스벨트나 스팀슨 모두,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파리강화회의에 연이어진 미국국회에 3·1운동의 파장이 덮쳐, 윌슨이 궁지에 몰리고, 미국의 연맹가입이 좌절하는 것을, 무심히 볼 수 없는 입지 속에 그들은 있었다.
 
  루스벨트는 1차대전 전후해서 일본이 중국과 한국에서 드러낸 의외의 침략적 행태에 대해 심히 우려했던지, 일본이 워싱턴 회의를 통해 그동안의 침략적 실적을 털고, 해군 감축과 중국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9개국 조약을 받고 나오자, 크게 안도했다. 중국시장문제에서는 일본을 특별히 봐주라고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그로부터 8년여 지나 만주사변을 터뜨려 워싱턴체제를 깨고 나온 것이다. 미국은 메이지기를 통해 좋게만 보았던 일본이 1차대전(1914~1918년)과 3·1운동(1919년)을 통해 보여준 침략성과 잔학성에 너무도 놀랐다가, 워싱턴 회의(1921~1922)로 안심했던 것이 만주사변(1931년)으로 배반당했다. 침략자의 기만전술에 놀아난 것뿐이라는 후회와 증폭이 함께 남았을 것이다.
 
  쉬 망각하는 대중과는 달리, 퓨리턴의 소명의식으로 체제의 중심을 가고 있는 루스벨트, 스팀슨 같은 사람들한테는 특별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스팀슨과 루스벨트는 일찌감치 만주사변의 침략성 확인과 동시에 대일 제재론을 굳혔을 것이다.
 
 
  실용주의적 이상주의자 루스벨트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이 상하이사변으로 번져 제국 일본의 대륙침공이 본격화하자 루스벨트는 스스로의 대일제재론을 ‘아메리카의 사명’으로 세계 앞에 밝히고 나왔다. 앞에 나온 ‘격리연설’(quarantine speech)에서 침략자를 검역라인 밖으로 몰아낼 ‘타국’이라 했을 때 그 ‘타국’이 미국 말고 어떤 나라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루스벨트는 ‘신의(神意)를 따르는 국가’ 아메리카 앞에 징벌전쟁의 부동의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할 것이다.
 
  루스벨트는 다가오고 있는 전쟁을 예감하면서, 독일·일본·이탈리아 3국동맹(1940년 9월)이 있고 나서 3개월 후에는 아메리카를 ‘민주주의의 대(大)병기제조창’이라 했고, 이어서 무기대여법을 만들어 히틀러와 싸우는 나라들에 대한 원조체제를 갖추었다.
 
  전기작가들은 루스벨트를 프라그마틱(실용주의적) 이상주의자라 한다. 1941년 8월에는 처칠과 만나 대서양헌장을 발표한다. 이 헌장에서는 ‘제(諸)국민에게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보장하는 신세계를 건설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전쟁이 그 밑에서 싸울 이념의 깃발을 올림으로써 루스벨트는 대통령의 전쟁준비를 마무리 지었다고 하겠다.
 
 
  국가의 윤리에 둔감한 사람들
 
  일본에는 요즘에도 심심찮게 태평양전쟁에 관한 연구가 서책으로 나오고 있다. 이들에게서 심히 의아스런 대목이 하나 나온다.
 
  1941년 7, 8월 전후, 일본 군부가 동남아(東南亞) 자원지대를 향해 ‘남진(南進)’하자, 미국은 미국 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전면금수(禁輸)를 단행했다. 누구의 눈에도 전쟁이 문턱까지 다가왔다. 천황 주변, 고노에(近衛) 수상, 외무성이 대미교섭으로 전쟁을 회피해 보려 안간힘을 썼다.
 
  한둘이 아닌 일본 오늘의 연구자들이 이때에 일본 측 제안에 대한 미국 측의 회답이 너무도 ‘비(非)타협적’이라 하고 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영토보전, 주권존중선의 원칙을 되풀이 제시했다.
 
  요즘의 연구자들이 그때의 미국 태도를 ‘비타협적’이라 하는 것이 심히 의아스러운 것이다. 2차대전에서 미국의 전쟁자세는 근본이 징벌전쟁, 윤리전쟁이었다. 일상적인 국가 간 분쟁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았다. 징벌전쟁, 윤리전쟁에 적용되는 조건은 윤리기준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윤리기준이란 흥정거리처럼 가감의 대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일본의 연구자들이 전쟁을 앞둔 그때의 미국의 자세를 ‘비타협적’이라 하는 것은, 도의감각에 무관했던 일본 군부처럼, 오늘의 일본인들도 국가차원의 윤리적 사안에 대해 둔감하다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렵다.
 
  지난 시대에 대한 반성이 많지만, 합리주의의 결손(缺損)에 대한 것뿐이다. 윤리적 결손에 대한 반성은 찾기 어렵다. 제국 일본의 실패의 주종은 후자(後者) 속에 있는 게 아닐까. 근대 일본은 합리주의의 우등생이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니, 미래지향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이 과거에 붙들려 있는 한, 미래지향이란 허사(虛辭)일 것이다. 마음이 과거를 떠나게 해야 한다.
 
  앞서서 원죄(原罪)를 말했다. 원죄를 털지 않는 한, 의식의 심층은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인간 실존의 한계다.
 
  죄의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인류가 개발해 놓은 장치는 참회뿐이다.
 
  과거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타자(他者)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의 사업일 뿐이다. 함께하는 미래지향의 날이 왔으면 좋겠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