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이 임종석 얘기 들었다면 ‘내 동지 하나가 제대로 하고 있구먼’ 할 듯”
⊙ “대북 전단 살포는 옳은 일… 심리전 방송 계속해야”
⊙ “김정은, ‘우리는 미국하고 놀 만큼 다 놀았다’… 트럼프가 끌려가게 될 것”
⊙ “윤석열 정부가 강제 북송 책임자 처벌하지 않은 것 아쉬워”
金聖珉
1962년 자강도 희천 출생. 평양 경상유치원,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 김형직사범대 졸업 / 태탄군 주둔 28사 경보병 대대, 이후 박격포부대, 4군단 선전대,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출신으로 1995년 탈북. 現 자유북한방송 작가 / 국경 없는 기자회 ‘자유언론 상’, 아시아 민주 인권상,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 “대북 전단 살포는 옳은 일… 심리전 방송 계속해야”
⊙ “김정은, ‘우리는 미국하고 놀 만큼 다 놀았다’… 트럼프가 끌려가게 될 것”
⊙ “윤석열 정부가 강제 북송 책임자 처벌하지 않은 것 아쉬워”
金聖珉
1962년 자강도 희천 출생. 평양 경상유치원,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 김형직사범대 졸업 / 태탄군 주둔 28사 경보병 대대, 이후 박격포부대, 4군단 선전대,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출신으로 1995년 탈북. 現 자유북한방송 작가 / 국경 없는 기자회 ‘자유언론 상’, 아시아 민주 인권상,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한 달 사이에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의 직함은 자유북한방송 작가로 바뀌었다. 김 작가는 지난해 12월 말에 이시영 국장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줬다. 김 작가는 “건강상의 문제도 있지만, 이제는 후배들이 자유북한방송의 새 시대를 열어갈 시점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자유북한방송 대표 때도 작가의 꿈을 놓지 못했던 그는 〈감초영감〉 〈수용소의 노래〉 〈여자이고 싶었다〉, 성극 〈예수님 탄생〉 등 다수의 라디오 방송극을 집필한 적이 있다.
“이곳 강화도는 북한과 가까워요. 10분만 달리면 북한이 보입니다. 이따금 고향을 보곤 합니다. 2018년도에 뇌종양 수술을 받고 집에 있다가 병원에서 다시 오래서 갔더니 폐암에서 전이된 뇌종양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도 여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주치의가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이 새까맣게 변하더군요. 너무 막연해서 나흘 동안 물도 못 넘겼어요. 지금은 마음의 정리가 됐고, 준비할 시간이 6개월 남았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라고 생각해요.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 자신이 있거든요. 또 남은 시간이 제가 보낸 60 평생과 바꾸지 못할 소중한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지금껏 하던 일을 차분히 마무리하는 것이 남은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조사관이 ‘너 왜 왔니’라고 물었어요. 제게 남아 있는 시간에 좋은 책을 한 권 써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노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요.”
기자가 만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작가는 사시사철 푸릇한 소나무 같은 사람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도, 지독한 항암 치료를 받고 온 다음 날도, 지인들이 끊임없이 방문한 날도 지친 기색 없이 담담하고 평온했다.
인생에 ‘만약에’라는 말은 없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인생은 자신의 선택이며, 우리는 그에 따른 결과를 묵묵히 감내할 따름이다. 이럼에도 그에게 ‘만약에 북(北)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만약에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를 물었다. 그는 “시인, 또는 작가가 됐을 것 같다”고 했다.
김정일이 인정한 작가
작가 김성민에게는 글쟁이의 피가 흐른다. 그의 선친(先親)인 김순석(1921~1974년)씨는 북한의 유명 시인이다. 종군기자로 6·25 전쟁을 겪고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 지도교수로 일하면서 북한의 대표적 시인인 조빈, 서진명씨 등을 가르쳤다. 선친은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김 작가가 한국으로 오기 직전까지 했던 일은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에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북한군 장교로 있으면서 다른 부대의 군인들이 이름을 들으면 알 정도로 여러 편의 시와 수필을 잡지에 냈고, 각종 선전대 축전 때 발표한 작품이 김정일의 호평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작가였다.
“한국은 국방부에 문선대(과거 국군에서 위문 공연 등을 담당한 홍보 부대)가 하나 있지만 북한은 군단마다 선전대가 있고, 그 군단마다 작가가 있습니다. 작가는 군단 예술선전대를 위한 공연 대본을 써야 합니다. 제가 메인 작가였고, 7명의 서브 작가가 있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면 군인들의 충성심이 높아지기 때문에 선전대 작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 가령 어떤 것들을 썼나요.
“북에서는 ‘재담’이라고 하는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만담 같은 겁니다.”
〈가: 집에 갔다. 휴가 다녀왔는데 내 동생이 쌀값을 몰라.
나: 왜 몰라, 쌀값을.
가: 쌀값만 모르나. 병원의 치료비도 몰라, 옷값도 몰라. 하지만 우리의 충성심은 알지.
나: 그럼 그럼,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만 알면 되지.〉
“안 내려왔으면 유명 작가 되지 않았을까?”
“저는 온종일 글만 썼습니다. 설날 공연, 2월 16일 김정일 생일, 4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 기념일, 4월 15일 김일성 생일, 4월 25일 군대명절 공연, 5월 농촌지원, 6월 전쟁기념, 7월 전쟁 승리한 날, 8월은 8·15 해방, 9월 9일 국가 창건일, 10월 10일 당 창건일, 12월 27일 헌법절.”
― 아직도 줄줄 외우고 계시네요.
“잊히지가 않네요. 일 년에 15번 공연을 하거든요. 작가 혼자서 그걸 다 준비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부족하겠습니까. 작가가 글을 쓰고 나면 작곡가, 연출가에게 전달되고, 정치위원 심의를 통과해야 하고 1년 내내 바빴습니다. 군복 한 번 제대로 입은 적이 없습니다. 여름에는 속옷 바람에 글 쓰고, 겨울에는 뭐든 뒤집어쓴 채 글 쓰고, 탈북하기 전까지 온종일 글만 썼습니다.”
― 북한 체제에 대해 의심해 볼 겨를도 없었겠네요.
“기계였죠, 글 쓰는 기계. 북한 체제에 대해 의심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안 내려왔으면 유명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 글을 쓸 때 먹을 것은 풍족했나요.
“잊고 있었는데 한동안 강연 다닐 때마다 했던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국정원 조사를 받을 때 보니까 음료수를 계속 바꿔서 주더라고요. 제가 ‘남조선에 음료수가 몇 개냐’고 물었더니 ‘그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해서 놀랐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음료수가 몇 개인지 다 알아요. 첫째 우물, 둘째 샘물, 셋째 수돗물, 넷째 70년대 말에 사라져 버린 사이다. 1989년에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과 함께 나타난 콜라가 노동자 한 달 월급의 절반 값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식량난 시작
― 탈북할 때인 1995년이 ‘고난의 행군’ 때여서 여쭸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건데 북한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식량난에 시달렸습니다.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을 할 때였죠. 김정일은 1985년 무렵부터 ‘나라 사정이 어려우니 군대에서도 자체 농사를 지으라’며 국가에서는 쌀과 된장, 간장만 준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부식품은 자체 생산해야 했습니다. 1986년 즈음부터 우리 부대에서는 축구를 했던 운동장을 갈아엎고 배추, 무, 옥수수, 고추, 가지 같은 것들을 심었습니다. 그걸 잘하는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철철이 먹을거리를 제대로 줄 수 있었고, 그걸 못하는 지휘관은 소금국에 밥밖에 주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먼저 영양실조 환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 고난의 행군보다 훨씬 이전이네요.
“그나마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돼지고기를 줬는데 그걸 가마솥에 넣어 끓여서 먹었습니다. 한데 사병들이 돼지고기 국물 한 사발을 소화를 못 시켜요. 흡수가 되지 않아서요. 그래서 설사증이 시작됐고, 이로 인해 죽는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링거 한 대만 맞아도 설사증이 멎는데. 군대에서 죽는 사병들이 생기니까 연대 사단에 ‘영양중대’가 생기고, 허약한 병사들을 모아놓고 따로 관리를 했습니다. 영양식이랄 것도 없고 밥에 기름 한 숟가락 얹어주는….”
― 한국에서는 ‘86아시안게임’을 하고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할 때였는데요.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어느 날이 생각납니다. 점심 먹고 사병 90여 명이 등을 까고 앉아 있었습니다. 영양소가 부족해 등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껍질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런 군인들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옷을 입고 장군님 노래를 부르면서 병실(막사)로 가는 겁니다.”
“최고의 제철소 고로 9개 중 8개가 스톱”
― 북한의 토양이 너무 척박한 탓에 농사가 되지 않았던 걸까요.
“아닙니다. 농사지을 땅 자체는 척박하지 않았습니다. 거름, 비료가 없으니까 땅이 산성화돼서 첫해에는 그럭저럭 농사가 되다가 2년 차부터 되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 부대 앞에 기차 역전이 있었는데, 열차가 서면 빵통(화물칸)에 실려 있는 비료를 훔쳐오라고 지휘관들이 사병들을 내몰곤 했죠. 그 비료를 땅에 뿌리면 그해 농사가 잘되는 걸 직접 봤습니다.”
― 그 얘기는 북한 땅에 농기구가 있고, 퇴비만 있으면 농사가 잘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럼요, 그거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비료를 만들 전기가 없으니 비료 공장이 안 돌아가고, 비료가 없으니 땅이 척박해지고, 그냥 다 안 되는 겁니다.”
― 그건 자본주의가 좀 들어가면 가능한 건데요.
“평양-향산 고속도로 건설을 할 때 우리 군단이 맡은 지역이 평안남도 안주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만들려면 굴간(갱도)도 파고 다리도 놓아야 하고, 그러자면 철근과 시멘트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맡은 구간에 다리 3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사선동을 위해 선전대 작가로 건설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다리를 놓으려면 철근 20만t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부대에서 ‘철근을 구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최고사령관 명령서에 ‘620부대에 철근 20만t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그나마 현대화된 제철소가 황해제철소인데, 가서 보니 9개의 용광로가 있었습니다. 철근을 받으러 갔는데 9개 중 8개의 용광로가 그냥 멈춰 서 있었습니다.”
― 한 개만 돌아가고 있었군요.
“그건 장군님 비준 없이는 아무도 손댈 수 없다는, 이른바 ‘비준 용광로’였습니다. 미사일이든 핵 부품이든 거기에 필요한 철을 뽑아낸다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들고 간 ‘명령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황당해하는 제게 제철소 관계자가 ‘철근을 뽑으려면 최소 20명에게 줄 3일분의 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직장장(공장장)이 말하기에 군단 사령관에게 말해 옥수수 1.5t을 실어왔습니다. 다음 날부터 공장 직원들이 씩씩하게 나와서 용광로를 살릴 준비를 하더군요. 세상에, 멈춰 섰던 용광로를 이틀 만에 살리는 것도 처음 보았고, 코크스 대신 폐 타이어를 태우는 것도 처음 봤습니다. 파철을 녹이는 데 알루미늄이 필요하다기에 장마당에서 가마를 사 그걸 녹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시뻘건 철근이 나오는데, 노동자들은 노동자들 대로 벌겋게 달아오른 철근에 물을 부어 철근을 식혀서는 장마당으로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황해제철소의 대표적 시장인 송림 장마당에 나가보니 전국에서 철근이 필요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각지의 특산물 등으로 철근을 매입해 가더군요. 평양술, 개성인삼, 골동품….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북미 관계에서 유리한 쪽은 북한”
김성민 작가의 컴퓨터에는 최신 북한 동향 정보들이 가득했다. 그가 파일을 클릭할 때마다 북한 내부 문서로 짐작되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북한에서 살다 30년 전에 대한민국으로 왔지만 김성민의 레이더는 온통 북한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안에 대해 물었다.
― 트럼프 시대가 또 도래했습니다.
“김씨 일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겁니다. UN 제재가 있었을 때 김정일은 ‘우리가 언제는 제재를 받지 않은 적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김씨 일가를 자극하지 못하고, 이럴수록 더욱 ‘자력갱생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더구나 김정은은 미국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트럼프를 다룰 줄도 압니다. 얼마 전 대대장 대회 때 김정은은 ‘우리는 미국하고 놀 만큼 다 놀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트럼프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결국 트럼프가 끌려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북미(北美) 관계에서 유리한 쪽은 북한입니다.”
― 김정은이 젊은 나이에 집권했는데 그렇게 스마트한 인물인가요.
“이건 김정은이 집권 초창기에 나온 북한군 총정치국 자료입니다. 여기에 김정은의 이른바 말씀이 나오는데 4월 15일(김일성 생일) 평양 방어사령부의 박격포 대대가 축포를 쏘기 위해 평양시 중심부로 들어갔는데 김정은에게 보고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로한 김정은이 ‘나는 군대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김일성, 김정일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북한에서의 평양시 통제는 무엇보다 최고 지도부의 보위, 안전에 있는 것이고 특히 무장 반입은 금물인데 김정은에게 보고되지 않은 박격포 대대가 평양으로 들어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당시 군부가 어린 김정은을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놈이 뭐를 알겠어’라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고, 장성택에게 많은 정보가 쏠렸을 겁니다. 그러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숙청한 이후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고, 제가 파악한 바로는 김정은은 김정일보다 더 도전적입니다.”
“백두 혈통은 그냥 지정하면 그걸로 끝”
― 그렇다면 김정은이 한 수 위일 수 있다는 거네요.
“나름 유학을 해서 외국물을 먹은 것이 효과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집권 초기에 장성택을 치지 않았다면 여전히 김정은을 얕잡아 보는 시각이 있었을 것이고, 장성택 쪽으로 군부가 몰렸을 텐데 완전히 상황이 역전된 겁니다.”
― 장성택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체포 때 사진을 보니까 완전 놀라더군요. 전혀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김경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최근 몇 년 들어 김주애를 등장시키는데 4세대로의 이양 아닙니까. 레짐 체인지가 될 수 없는 겁니까.
“우리의 생각보다 북한의 내부 교육 시스템이 상당히 강합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김정일의 후계자를 두고 김정은, 김정남, 김정철이 거론될 때 저는 김정은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근거는 내부 자료를 보니 ‘평양의 어머니’라며 김정은의 조모인 김정숙에 대해 군인들을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국무부 부장관인 커트 캠벨이 ‘아무리 그래도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에게 북한을 물려주겠느냐’고 하기에 ‘안 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김정은이 세 살 난 어린아이를 지명하고 ‘이제부터 백두 혈통이 북한을 이끈다’라고 말을 하면 거기에 맞추는 것이 북한의 시스템입니다.”
― ‘김씨 왕조’라는 얘기가 정확히 맞네요.
“김주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남이 피살된 것을 우리나 알지, 북한 주민들은 알지 못합니다. 외교관이나 특별한 직업의 사람들만 알죠. 김정은의 배다른 형이라는 것도 모를 겁니다. 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백두 혈통은 그냥 지정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만약에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됐다고 해도 ‘이 사람이다’라고 하면 이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심리전 해야”
― 요즘은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노래를 듣는다고 하는데요.
“그건 다른 얘기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남한 드라마 100개를 본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건 전부 세트장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남조선에서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 결국 바뀌지 않는다는 소리인가요.
“바뀌기는 하겠지만 속도가 굉장히, 많이 늦을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더딥니다. 이 자료를 한 번 보세요. 북한의 내부 강연 자료인데 ‘어느 지방 도시에서 9000명의 고급 중학교 학생들이 안전기관을 찾아가 불순 특화물(남한 드라마 등을 지칭)을 봤다는 사실을 자수했으며, 3000명의 학생이 스스로 불순 녹화물이 있는 USB 기기를 반납했다’고 돼 있습니다.”
― 북한 사람들이 남한 문물을 많이 접하고 있으니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할 때가 아니네요.
“남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심리전(心理戰)을 의식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요즘은 북한 내부에서도 ‘인권 유린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며 인권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고, 죽이는 일을 하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겁니다.”
― 의식적으로 심리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은 대북 전단 살포 등을 지속해야 한다는 건가요.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이게 왜 부정한 일이고, 나쁜 일입니까. 대북 전단, 심리전 방송을 계속해야 합니다. UN을 비롯해 국제사회의 제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입증됐습니다. 북한 백성들이 마음을 움직여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그걸 위해 들고일어서야 합니다. 이게 통일의 기본 원칙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대북(對北) 심리전을 계속해야 합니다. 과장하거나 없는 사실을 얘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우물 밖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거죠. ‘지금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임종석은 김정은 복사본”
― 문재인 정부 때 김정은의 서울 방문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서울 한복판에 내걸렸을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 같은 애들은 정말 이상한 애들이에요. 한데 그들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 뒤에 또 다른 세력이 있고, 또 따라가면 간첩이 있죠. 대진연 같은 조직을 움직이게끔 하는 사람들이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 통진당 이석기 동부연합의 후예들이 아닐까요.
“이석기는 간첩이죠. 저는 이번에 임종석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정은 복사본이잖아요. 임종석이 ‘김정은 정권 붕괴하면 영구 분단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남한 사람이 어떻게 김정은 얘기를 그대로 따라 합니까?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차분했던 김 작가는 최근 임종석의 발언이 거론대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것이 남한 사회의 진짜 문제점”이라고 했다.
“지능화된, 소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한 사람이…(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석(私席)에서도 아니고 언론을 상대로 그런 얘기를 하다니, 이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입니다. 김정은이 봤을 때 ‘아이고, 내 동지 하나가 남조선에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구먼’이라고 할 일입니다.”
― 북한 체제를 겪은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끔찍할 것 같네요.
“제가 정의로운 대한민국 군인이라거나, 국정원 사람이라면, 하, 정말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무시하고, 통일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탈북자의 날’
― 문재인 전(前) 대통령은 탈북 어부를 북송(北送)했는데요.
“임종석이 비서실장을 할 때는 저도 분위기를 많이 주시해야 했습니다. 탈북자를 북송하더라도 누구 하나 신경이나 썼을까요? 이어 최근 발언까지, 물론 대한민국 사회가 그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참담했습니다. 저는 윤석열 정부가 적어도 탈북자를 강제 북송시킨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의 책임은 묻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못 하더군요. 지금 탈북자들이 배를 타고 못 오는 이유 중 하나가 ‘남으로 가면 도로 잡아서 돌려보낸다’는 소문도 한몫을 할 겁니다. 북한은 그런 얘기는 정말 빠르게 선전하거든요. 윤석열 정부는 탈북자들이 처음으로 선거 캠프를 꾸려서 지지했던 정부입니다. 태영호 전(前) 의원이 본부장을 하고, 탈북민들이 전국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다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정권인데 너무나 아쉽습니다.”
― ‘탈북자의 날’이 제정되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으셨지요.
“훈장은 혼자 받은 것이 아니라 탈북자 모두가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바지사장을 많이 했거든요(웃음). 탈북자동지회, 남북통일당, 제대군인 모임, 북한인권단체 등에서 바지사장을 하다 보니 눈에 띄었겠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보다 ‘탈북자의 날’이 제정됐을 때처럼 우리의 마음이 후련했던 적이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하나하나가 정말 시원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명절이 생겼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제 탈북민들이 훨씬 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북자들, ‘나는 스타’라고 생각”
김성민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지인은 “여전히 탈북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탈북자 3만4000명 시대. 누군가는 대한민국에서 잘 적응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여전히 탈북자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탈북자들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북자들은 나름 ‘나는 스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면 (국경 지역 출신의 탈북민을 제외하곤) 누구나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나 혼자 온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남한에서 넘어온 사람을 굉장히 특별 대접 해주기 때문에 탈북자들도 으레껏 자신들이 남한으로 오면 그런 대접을 받는 줄 알더라고요. 20년 정도 지나야 ‘내가 특별하지 않구나’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탈북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탈북민들은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북한에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끼리 연대(連帶)하고, 협조하는 것이야말로 통일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봅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북한 인권 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발만 물러서면 훨씬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이해해라’는 것을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 북한이 그리운 적은 없었나요.
“모란봉 기슭 대동강변에는 동평양과 서평양을 잇는 옥류교가 놓여 있습니다. 열두 개 교각 밑으로 맑은 물이 흐릅니다. 집에서 학교로 매일 지나던 그 다리 위로 버스며 승용차가 달리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갈 때에는 어머니가, 집에 갈 땐 담임선생님이 늘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던 다리입니다. 다리 머릿돌 한구석에 장난 삼아 제 이름을 적어놓기도 했었는데, 그곳이 유독 생각납니다.”
“말은 통해도 뇌 구조는 완전히 달라”
― 자유북한방송 운영의 어려움은 여전하시지요.
“진정한 애국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조갑제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북한 인권 활동도 비슷합니다. 탈북자 단체 중 예산이 없어서 문을 닫은 곳이 꽤 됩니다. 황장엽 선생도 탈북자들에게 ‘남한에서 돈을 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적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탈북민 사업가들이 북한 인권 단체를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하고 유럽과 미국처럼 국내 기업들, 사업가들이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탈북민 단체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북한방송의 새로운 미래도 이 같은 협조와 나눔을 자양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성민 작가의 방 한편에는 선친 김순석 시인의 사진이 놓여 있는데 상당한 미남이었다. 선친은 그가 12세 때 차량 전복 사고로, 어머니 역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한 살 위였는데 두 분의 사이가 지극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해방 전 평북도 미인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두 분은 슬하에 1남 5녀를 뒀다. 고향을 떠날 때 그는 “내가 떠나고 나면 부모님 산소는 누가 돌보나”를 걱정했다.
“누나가 다섯인데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남조선으로 간다고 고발할까 봐요.”
― 가족조차 믿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이네요.
“인간성이 말살됐지요. 북한은 겉으로 보면 멀쩡합니다. 평양 지하철 내부에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외국인의 눈에는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보일 겁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말까지 통하는 동포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세뇌당해 온 터라 뇌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 최근에는 탈북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국경은 아예 막혔습니다. DMZ보다 더 막혔죠. 그나마 빨리 탈북해 남한에 잘 정착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의 맹세’
사실 김성민 작가의 명함에 적힌 공식 직함은 ‘자유북한방송 이사장’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간곡하게,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직함을 ‘김성민 작가’라고 해달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한평생 마음에만 품고 있는 로망은 있지 않은가, 그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은 그런 모양이다.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는 자유북한방송 출범 20주년 행사가 열렸다. 저마다의 말 못 할 사연을 가진 탈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시영 자유북한방송 신임 대표는 말 맺음으로 김성민 작가가 지은 시(詩)를 읽었다.
〈우리의 맹세(盟誓)
다름 아닌 내 것임에도
날 때부터 우리에게 없었던 그것
시장통의 물건이 아니면서도
우리의 부모들이 빼앗긴 그것
그것 없이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
숨결이며 가치인 자유는
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맹세(盟誓)〉⊙
“이곳 강화도는 북한과 가까워요. 10분만 달리면 북한이 보입니다. 이따금 고향을 보곤 합니다. 2018년도에 뇌종양 수술을 받고 집에 있다가 병원에서 다시 오래서 갔더니 폐암에서 전이된 뇌종양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도 여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주치의가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이 새까맣게 변하더군요. 너무 막연해서 나흘 동안 물도 못 넘겼어요. 지금은 마음의 정리가 됐고, 준비할 시간이 6개월 남았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라고 생각해요.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 자신이 있거든요. 또 남은 시간이 제가 보낸 60 평생과 바꾸지 못할 소중한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지금껏 하던 일을 차분히 마무리하는 것이 남은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조사관이 ‘너 왜 왔니’라고 물었어요. 제게 남아 있는 시간에 좋은 책을 한 권 써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노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요.”
기자가 만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작가는 사시사철 푸릇한 소나무 같은 사람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도, 지독한 항암 치료를 받고 온 다음 날도, 지인들이 끊임없이 방문한 날도 지친 기색 없이 담담하고 평온했다.
인생에 ‘만약에’라는 말은 없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인생은 자신의 선택이며, 우리는 그에 따른 결과를 묵묵히 감내할 따름이다. 이럼에도 그에게 ‘만약에 북(北)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만약에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를 물었다. 그는 “시인, 또는 작가가 됐을 것 같다”고 했다.
김정일이 인정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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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연세세브란스병원 입원 때 이시영 자유북한방송 국장(김 작가의 오른쪽)과 김기성 자유북한방송 기자와 함께. |
“한국은 국방부에 문선대(과거 국군에서 위문 공연 등을 담당한 홍보 부대)가 하나 있지만 북한은 군단마다 선전대가 있고, 그 군단마다 작가가 있습니다. 작가는 군단 예술선전대를 위한 공연 대본을 써야 합니다. 제가 메인 작가였고, 7명의 서브 작가가 있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면 군인들의 충성심이 높아지기 때문에 선전대 작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 가령 어떤 것들을 썼나요.
“북에서는 ‘재담’이라고 하는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만담 같은 겁니다.”
〈가: 집에 갔다. 휴가 다녀왔는데 내 동생이 쌀값을 몰라.
나: 왜 몰라, 쌀값을.
가: 쌀값만 모르나. 병원의 치료비도 몰라, 옷값도 몰라. 하지만 우리의 충성심은 알지.
나: 그럼 그럼,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만 알면 되지.〉
“안 내려왔으면 유명 작가 되지 않았을까?”
“저는 온종일 글만 썼습니다. 설날 공연, 2월 16일 김정일 생일, 4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 기념일, 4월 15일 김일성 생일, 4월 25일 군대명절 공연, 5월 농촌지원, 6월 전쟁기념, 7월 전쟁 승리한 날, 8월은 8·15 해방, 9월 9일 국가 창건일, 10월 10일 당 창건일, 12월 27일 헌법절.”
― 아직도 줄줄 외우고 계시네요.
“잊히지가 않네요. 일 년에 15번 공연을 하거든요. 작가 혼자서 그걸 다 준비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부족하겠습니까. 작가가 글을 쓰고 나면 작곡가, 연출가에게 전달되고, 정치위원 심의를 통과해야 하고 1년 내내 바빴습니다. 군복 한 번 제대로 입은 적이 없습니다. 여름에는 속옷 바람에 글 쓰고, 겨울에는 뭐든 뒤집어쓴 채 글 쓰고, 탈북하기 전까지 온종일 글만 썼습니다.”
― 북한 체제에 대해 의심해 볼 겨를도 없었겠네요.
“기계였죠, 글 쓰는 기계. 북한 체제에 대해 의심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안 내려왔으면 유명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 글을 쓸 때 먹을 것은 풍족했나요.
“잊고 있었는데 한동안 강연 다닐 때마다 했던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국정원 조사를 받을 때 보니까 음료수를 계속 바꿔서 주더라고요. 제가 ‘남조선에 음료수가 몇 개냐’고 물었더니 ‘그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해서 놀랐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음료수가 몇 개인지 다 알아요. 첫째 우물, 둘째 샘물, 셋째 수돗물, 넷째 70년대 말에 사라져 버린 사이다. 1989년에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과 함께 나타난 콜라가 노동자 한 달 월급의 절반 값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식량난 시작
― 탈북할 때인 1995년이 ‘고난의 행군’ 때여서 여쭸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건데 북한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식량난에 시달렸습니다.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을 할 때였죠. 김정일은 1985년 무렵부터 ‘나라 사정이 어려우니 군대에서도 자체 농사를 지으라’며 국가에서는 쌀과 된장, 간장만 준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부식품은 자체 생산해야 했습니다. 1986년 즈음부터 우리 부대에서는 축구를 했던 운동장을 갈아엎고 배추, 무, 옥수수, 고추, 가지 같은 것들을 심었습니다. 그걸 잘하는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철철이 먹을거리를 제대로 줄 수 있었고, 그걸 못하는 지휘관은 소금국에 밥밖에 주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먼저 영양실조 환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 고난의 행군보다 훨씬 이전이네요.
“그나마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돼지고기를 줬는데 그걸 가마솥에 넣어 끓여서 먹었습니다. 한데 사병들이 돼지고기 국물 한 사발을 소화를 못 시켜요. 흡수가 되지 않아서요. 그래서 설사증이 시작됐고, 이로 인해 죽는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링거 한 대만 맞아도 설사증이 멎는데. 군대에서 죽는 사병들이 생기니까 연대 사단에 ‘영양중대’가 생기고, 허약한 병사들을 모아놓고 따로 관리를 했습니다. 영양식이랄 것도 없고 밥에 기름 한 숟가락 얹어주는….”
― 한국에서는 ‘86아시안게임’을 하고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할 때였는데요.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어느 날이 생각납니다. 점심 먹고 사병 90여 명이 등을 까고 앉아 있었습니다. 영양소가 부족해 등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껍질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런 군인들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옷을 입고 장군님 노래를 부르면서 병실(막사)로 가는 겁니다.”
“최고의 제철소 고로 9개 중 8개가 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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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3일 줄리 터너 방한 때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
“아닙니다. 농사지을 땅 자체는 척박하지 않았습니다. 거름, 비료가 없으니까 땅이 산성화돼서 첫해에는 그럭저럭 농사가 되다가 2년 차부터 되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 부대 앞에 기차 역전이 있었는데, 열차가 서면 빵통(화물칸)에 실려 있는 비료를 훔쳐오라고 지휘관들이 사병들을 내몰곤 했죠. 그 비료를 땅에 뿌리면 그해 농사가 잘되는 걸 직접 봤습니다.”
― 그 얘기는 북한 땅에 농기구가 있고, 퇴비만 있으면 농사가 잘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럼요, 그거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비료를 만들 전기가 없으니 비료 공장이 안 돌아가고, 비료가 없으니 땅이 척박해지고, 그냥 다 안 되는 겁니다.”
― 그건 자본주의가 좀 들어가면 가능한 건데요.
“평양-향산 고속도로 건설을 할 때 우리 군단이 맡은 지역이 평안남도 안주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만들려면 굴간(갱도)도 파고 다리도 놓아야 하고, 그러자면 철근과 시멘트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맡은 구간에 다리 3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사선동을 위해 선전대 작가로 건설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다리를 놓으려면 철근 20만t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부대에서 ‘철근을 구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최고사령관 명령서에 ‘620부대에 철근 20만t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그나마 현대화된 제철소가 황해제철소인데, 가서 보니 9개의 용광로가 있었습니다. 철근을 받으러 갔는데 9개 중 8개의 용광로가 그냥 멈춰 서 있었습니다.”
― 한 개만 돌아가고 있었군요.
“그건 장군님 비준 없이는 아무도 손댈 수 없다는, 이른바 ‘비준 용광로’였습니다. 미사일이든 핵 부품이든 거기에 필요한 철을 뽑아낸다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들고 간 ‘명령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황당해하는 제게 제철소 관계자가 ‘철근을 뽑으려면 최소 20명에게 줄 3일분의 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직장장(공장장)이 말하기에 군단 사령관에게 말해 옥수수 1.5t을 실어왔습니다. 다음 날부터 공장 직원들이 씩씩하게 나와서 용광로를 살릴 준비를 하더군요. 세상에, 멈춰 섰던 용광로를 이틀 만에 살리는 것도 처음 보았고, 코크스 대신 폐 타이어를 태우는 것도 처음 봤습니다. 파철을 녹이는 데 알루미늄이 필요하다기에 장마당에서 가마를 사 그걸 녹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시뻘건 철근이 나오는데, 노동자들은 노동자들 대로 벌겋게 달아오른 철근에 물을 부어 철근을 식혀서는 장마당으로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황해제철소의 대표적 시장인 송림 장마당에 나가보니 전국에서 철근이 필요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각지의 특산물 등으로 철근을 매입해 가더군요. 평양술, 개성인삼, 골동품….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북미 관계에서 유리한 쪽은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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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단체 집회에 참석해 연설을 하는 김성민 당시 자유북한방송 대표. |
― 트럼프 시대가 또 도래했습니다.
“김씨 일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겁니다. UN 제재가 있었을 때 김정일은 ‘우리가 언제는 제재를 받지 않은 적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김씨 일가를 자극하지 못하고, 이럴수록 더욱 ‘자력갱생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더구나 김정은은 미국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트럼프를 다룰 줄도 압니다. 얼마 전 대대장 대회 때 김정은은 ‘우리는 미국하고 놀 만큼 다 놀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트럼프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결국 트럼프가 끌려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북미(北美) 관계에서 유리한 쪽은 북한입니다.”
― 김정은이 젊은 나이에 집권했는데 그렇게 스마트한 인물인가요.
“이건 김정은이 집권 초창기에 나온 북한군 총정치국 자료입니다. 여기에 김정은의 이른바 말씀이 나오는데 4월 15일(김일성 생일) 평양 방어사령부의 박격포 대대가 축포를 쏘기 위해 평양시 중심부로 들어갔는데 김정은에게 보고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로한 김정은이 ‘나는 군대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김일성, 김정일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북한에서의 평양시 통제는 무엇보다 최고 지도부의 보위, 안전에 있는 것이고 특히 무장 반입은 금물인데 김정은에게 보고되지 않은 박격포 대대가 평양으로 들어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당시 군부가 어린 김정은을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놈이 뭐를 알겠어’라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고, 장성택에게 많은 정보가 쏠렸을 겁니다. 그러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숙청한 이후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고, 제가 파악한 바로는 김정은은 김정일보다 더 도전적입니다.”
“백두 혈통은 그냥 지정하면 그걸로 끝”
― 그렇다면 김정은이 한 수 위일 수 있다는 거네요.
“나름 유학을 해서 외국물을 먹은 것이 효과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집권 초기에 장성택을 치지 않았다면 여전히 김정은을 얕잡아 보는 시각이 있었을 것이고, 장성택 쪽으로 군부가 몰렸을 텐데 완전히 상황이 역전된 겁니다.”
― 장성택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체포 때 사진을 보니까 완전 놀라더군요. 전혀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김경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최근 몇 년 들어 김주애를 등장시키는데 4세대로의 이양 아닙니까. 레짐 체인지가 될 수 없는 겁니까.
“우리의 생각보다 북한의 내부 교육 시스템이 상당히 강합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김정일의 후계자를 두고 김정은, 김정남, 김정철이 거론될 때 저는 김정은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근거는 내부 자료를 보니 ‘평양의 어머니’라며 김정은의 조모인 김정숙에 대해 군인들을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국무부 부장관인 커트 캠벨이 ‘아무리 그래도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에게 북한을 물려주겠느냐’고 하기에 ‘안 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김정은이 세 살 난 어린아이를 지명하고 ‘이제부터 백두 혈통이 북한을 이끈다’라고 말을 하면 거기에 맞추는 것이 북한의 시스템입니다.”
― ‘김씨 왕조’라는 얘기가 정확히 맞네요.
“김주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남이 피살된 것을 우리나 알지, 북한 주민들은 알지 못합니다. 외교관이나 특별한 직업의 사람들만 알죠. 김정은의 배다른 형이라는 것도 모를 겁니다. 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백두 혈통은 그냥 지정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만약에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됐다고 해도 ‘이 사람이다’라고 하면 이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심리전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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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방미 당시 김성민 작가가 하원의원 출마를 준비하던 영킴 의원의 선거캠프 방문 모습. 왼쪽은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다. |
“그건 다른 얘기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남한 드라마 100개를 본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건 전부 세트장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남조선에서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 결국 바뀌지 않는다는 소리인가요.
“바뀌기는 하겠지만 속도가 굉장히, 많이 늦을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더딥니다. 이 자료를 한 번 보세요. 북한의 내부 강연 자료인데 ‘어느 지방 도시에서 9000명의 고급 중학교 학생들이 안전기관을 찾아가 불순 특화물(남한 드라마 등을 지칭)을 봤다는 사실을 자수했으며, 3000명의 학생이 스스로 불순 녹화물이 있는 USB 기기를 반납했다’고 돼 있습니다.”
― 북한 사람들이 남한 문물을 많이 접하고 있으니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할 때가 아니네요.
“남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심리전(心理戰)을 의식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요즘은 북한 내부에서도 ‘인권 유린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며 인권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고, 죽이는 일을 하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겁니다.”
― 의식적으로 심리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은 대북 전단 살포 등을 지속해야 한다는 건가요.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이게 왜 부정한 일이고, 나쁜 일입니까. 대북 전단, 심리전 방송을 계속해야 합니다. UN을 비롯해 국제사회의 제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입증됐습니다. 북한 백성들이 마음을 움직여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그걸 위해 들고일어서야 합니다. 이게 통일의 기본 원칙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대북(對北) 심리전을 계속해야 합니다. 과장하거나 없는 사실을 얘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우물 밖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거죠. ‘지금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임종석은 김정은 복사본”
― 문재인 정부 때 김정은의 서울 방문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서울 한복판에 내걸렸을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 같은 애들은 정말 이상한 애들이에요. 한데 그들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 뒤에 또 다른 세력이 있고, 또 따라가면 간첩이 있죠. 대진연 같은 조직을 움직이게끔 하는 사람들이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 통진당 이석기 동부연합의 후예들이 아닐까요.
“이석기는 간첩이죠. 저는 이번에 임종석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정은 복사본이잖아요. 임종석이 ‘김정은 정권 붕괴하면 영구 분단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남한 사람이 어떻게 김정은 얘기를 그대로 따라 합니까?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차분했던 김 작가는 최근 임종석의 발언이 거론대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것이 남한 사회의 진짜 문제점”이라고 했다.
“지능화된, 소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한 사람이…(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석(私席)에서도 아니고 언론을 상대로 그런 얘기를 하다니, 이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입니다. 김정은이 봤을 때 ‘아이고, 내 동지 하나가 남조선에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구먼’이라고 할 일입니다.”
― 북한 체제를 겪은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끔찍할 것 같네요.
“제가 정의로운 대한민국 군인이라거나, 국정원 사람이라면, 하, 정말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무시하고, 통일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탈북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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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강화도 모처에서 맞은 생일에 지인들과 함께. |
“임종석이 비서실장을 할 때는 저도 분위기를 많이 주시해야 했습니다. 탈북자를 북송하더라도 누구 하나 신경이나 썼을까요? 이어 최근 발언까지, 물론 대한민국 사회가 그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참담했습니다. 저는 윤석열 정부가 적어도 탈북자를 강제 북송시킨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의 책임은 묻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못 하더군요. 지금 탈북자들이 배를 타고 못 오는 이유 중 하나가 ‘남으로 가면 도로 잡아서 돌려보낸다’는 소문도 한몫을 할 겁니다. 북한은 그런 얘기는 정말 빠르게 선전하거든요. 윤석열 정부는 탈북자들이 처음으로 선거 캠프를 꾸려서 지지했던 정부입니다. 태영호 전(前) 의원이 본부장을 하고, 탈북민들이 전국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다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정권인데 너무나 아쉽습니다.”
― ‘탈북자의 날’이 제정되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으셨지요.
“훈장은 혼자 받은 것이 아니라 탈북자 모두가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바지사장을 많이 했거든요(웃음). 탈북자동지회, 남북통일당, 제대군인 모임, 북한인권단체 등에서 바지사장을 하다 보니 눈에 띄었겠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보다 ‘탈북자의 날’이 제정됐을 때처럼 우리의 마음이 후련했던 적이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하나하나가 정말 시원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명절이 생겼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제 탈북민들이 훨씬 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북자들, ‘나는 스타’라고 생각”
김성민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지인은 “여전히 탈북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탈북자 3만4000명 시대. 누군가는 대한민국에서 잘 적응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여전히 탈북자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탈북자들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북자들은 나름 ‘나는 스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면 (국경 지역 출신의 탈북민을 제외하곤) 누구나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나 혼자 온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남한에서 넘어온 사람을 굉장히 특별 대접 해주기 때문에 탈북자들도 으레껏 자신들이 남한으로 오면 그런 대접을 받는 줄 알더라고요. 20년 정도 지나야 ‘내가 특별하지 않구나’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탈북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탈북민들은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북한에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끼리 연대(連帶)하고, 협조하는 것이야말로 통일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봅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북한 인권 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발만 물러서면 훨씬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이해해라’는 것을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 북한이 그리운 적은 없었나요.
“모란봉 기슭 대동강변에는 동평양과 서평양을 잇는 옥류교가 놓여 있습니다. 열두 개 교각 밑으로 맑은 물이 흐릅니다. 집에서 학교로 매일 지나던 그 다리 위로 버스며 승용차가 달리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갈 때에는 어머니가, 집에 갈 땐 담임선생님이 늘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던 다리입니다. 다리 머릿돌 한구석에 장난 삼아 제 이름을 적어놓기도 했었는데, 그곳이 유독 생각납니다.”
“말은 통해도 뇌 구조는 완전히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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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1일 자유북한방송 송년회 때 전체 사진. |
“진정한 애국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조갑제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북한 인권 활동도 비슷합니다. 탈북자 단체 중 예산이 없어서 문을 닫은 곳이 꽤 됩니다. 황장엽 선생도 탈북자들에게 ‘남한에서 돈을 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적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탈북민 사업가들이 북한 인권 단체를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하고 유럽과 미국처럼 국내 기업들, 사업가들이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탈북민 단체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북한방송의 새로운 미래도 이 같은 협조와 나눔을 자양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성민 작가의 방 한편에는 선친 김순석 시인의 사진이 놓여 있는데 상당한 미남이었다. 선친은 그가 12세 때 차량 전복 사고로, 어머니 역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한 살 위였는데 두 분의 사이가 지극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해방 전 평북도 미인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두 분은 슬하에 1남 5녀를 뒀다. 고향을 떠날 때 그는 “내가 떠나고 나면 부모님 산소는 누가 돌보나”를 걱정했다.
“누나가 다섯인데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남조선으로 간다고 고발할까 봐요.”
― 가족조차 믿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이네요.
“인간성이 말살됐지요. 북한은 겉으로 보면 멀쩡합니다. 평양 지하철 내부에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외국인의 눈에는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보일 겁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말까지 통하는 동포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세뇌당해 온 터라 뇌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 최근에는 탈북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국경은 아예 막혔습니다. DMZ보다 더 막혔죠. 그나마 빨리 탈북해 남한에 잘 정착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의 맹세’
사실 김성민 작가의 명함에 적힌 공식 직함은 ‘자유북한방송 이사장’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간곡하게,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직함을 ‘김성민 작가’라고 해달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한평생 마음에만 품고 있는 로망은 있지 않은가, 그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은 그런 모양이다.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는 자유북한방송 출범 20주년 행사가 열렸다. 저마다의 말 못 할 사연을 가진 탈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시영 자유북한방송 신임 대표는 말 맺음으로 김성민 작가가 지은 시(詩)를 읽었다.
〈우리의 맹세(盟誓)
다름 아닌 내 것임에도
날 때부터 우리에게 없었던 그것
시장통의 물건이 아니면서도
우리의 부모들이 빼앗긴 그것
그것 없이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
숨결이며 가치인 자유는
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맹세(盟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