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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내 아버지의 6·25 전쟁 ③ 문경 옥녀봉 전투, 낙동강을 건너다

“졸지 마라. 잠드는 순간 끝장이다!”

글 : 길도형  도서출판 타임라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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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뺏고 빼앗긴 옥녀봉 전투
⊙ 선임하사가 미군에게 얻어온 초콜릿 줘, 그때 처음으로 맛봐
⊙ 빗속에서도 쉬파리들이 터져 나온 복부내장에 달라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
⊙ 미군 전차부대와 조우… “마이 네임 이즈 길운하”라고 하자 “오우, 킬, 웅, 확!”
문경 옥녀봉(541.7m). 1950년 7월 19일부터 23일까지 국군 제6사단 7연대 3대대가 북한군 1사단에 맞서 3차에 걸친 공방전 끝에 탈환했다. 사진=길도형
  옥녀봉 305고지에서 완강히 버티다 밀려난 소대는 대대 병력이 집결키로 되어 있는 옥녀봉 남쪽 1.5km 떨어진 성저리로 이동했다. 1차, 2차 옥녀봉 전투를 치르며 오늘로써 연 사흘째 격전을 치른 소대원들은 지치고 피곤한 몸임에도 훗날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격렬한 전투였음을 말해주듯 젖은 진흙투성이 소년의 전투복 군데군데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이동 중, 자꾸만 감기는 눈에 힘을 주었지만, 몰려드는 졸음에 어느새 본능으로 앞사람의 기척을 좇는 것도 잠시, 진흙탕에 빠진 것도 모른 채 우뚝 멈춰 서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387고지 방어 전투
 
  7월 20일, 옥녀봉 전방 305고지에서 밀려난 3대대는 옥녀봉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성저리에서 병력을 수습했다. 그러고 곧바로 성저리 서쪽 387고지로 이동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7월 21일, 북괴군 13사단은 국군 6사단 전면에 전(全) 병력과 야포 및 전차를 동원해 총공세를 가해왔다. 3대대가 방어진지를 구축한 387고지는 오후 2시를 기해 적 1개 연대 병력의 공격에 노출됐다. 3대대는 고지 하단부부터 7부 능선까지 세 겹으로 진지를 구축해 병력을 배치했다. 대대장(이남호)은 직접 고지 정상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진두지휘에 나섰다. 대대장은 예하 중대장들에게 무전(無電)으로 명령했다.
 
  “오늘 밤 취침은 없다. 나부터 관측소 불침번(不寢番)이다. 중대장들은 예하 소대장들에게 수시로 무전을 날려 전투태세에 이상 없도록 하라.”
 
  305고지에서 387고지로 이동한 뒤에도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소대원들은 진지 공사에 매달렸다. 좌우의 소대들과 연결하는 교통호(交通壕) 작업이 마무리되고, 교통호 50m 전방에 20여 개의 개인호(個人壕) 작업이 끝났을 때는 긴 여름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였다. 소대원들은 저녁 8시가 훌쩍 넘어서야 각자의 수통 물을 반합 뚜껑에 붓고 미숫가루를 풀었다. 그러고 오락가락하는 끝물 장맛비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건빵을 입에 넣고 씹으며 메인 목을 미숫가루 물로 달랬다.
 

  저녁 9시, 소대장이 소대원들을 집합시키고 지시했다.
 
  “1분대와 4분대가 나를 따라 전초(前哨) 개인호를 맡는다. 2분대는 좌측에서, 3분대는 우측에서 교통호를 사수한다. 각자 수류탄을 네 발 이상 최대한 소지토록 한다. 교통호 상황 통제는 선임하사가 한다.”
 
  선임하사가 성큼 나서며 말했다.
 
  “전초 개인호에는 제가 나가 있겠습니다. 소대장님은 우리 소대 지휘자입니다.”
 
  소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게 하시오.”
 
  선임하사가 자신의 군장과 소총을 챙겨 멨다. 그러고 수류탄 상자를 열고 다섯 발을 엑스반도와 탄띠에 차 보이며 1분대와 4분대원들을 독려했다.
 
  “서둘러라. 전초 개인호에 도착하는 대로 각 분대장은 기관총 진지부터 확보토록 하라.”
 
 
  비공식 군인
 
6·25 참전용사 길운하 선생(원 안). 사진=길도형
  소년도 어느새 당당한 전투원이 되어 있었다. 무극-동락리 전투로 전 연대원이 1계급 특진할 때도 공식 군인이 아닌 까닭에 배제됐었다. 물론 배제하고 싶어 배제한 것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입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속해 있는 중대 장병들 말고는 소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떻든 소년의 철모 정면에는 병사들끼리 갈매기라고 속칭하는 V(6·25 당시 일등병 계급. 이등병은 계급 표시가 없었다) 한 개가 그려져 있었다. 음성에서 7연대의 1계급 특진 행사가 끝나고 선임하사가 페인트 붓으로 그려준 것이다. 소년은 비록 정식 계급은 아니지만 소대 선임하사가 철모에 그려준 일등병 계급장이 특별하기만 했다. 민짜 철모여도 이등병은 어엿한 정식 군인이었다. 그러나 정식 군인이 아니어도 철모에 그려진 갈매기 하나는 이등병 또는 일등병 이상의 역할이 자신에게 부여되었음을 깨닫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총탄과 수류탄을 수령한 1분대와 2분대원들이 전초 개인호로 이동을 완료했을 때는 밤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선임하사가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를 지목해 각 분대의 중심 위치 개인호에 잠복하게 했다.
 
  “졸지 마라. 잠드는 순간 끝장이다!”
 
 
  “너 하나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진다”
 
  밤 10시30분, 개인호 속에 매복한 소년은 문득 이상한 기운이 들어 머리를 젖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950년의 긴 긴 장마가 끝나려는지 밤하늘 별들이 가득했다. 언제 구름이 덮이고 비가 내렸냐는 듯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고지 하단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 물소리도 귀에 익숙했다. 벌레 우는 소리, 소쩍소쩍 소쩍새 소리까지 모처럼 맛보는 쾌적한 밤공기에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자정 무렵이 지나면서 밤 세상은 마치 전쟁을 잊은 것처럼 계곡 시냇물 소리만이 주위에 가득했다.
 
  소년은 한여름 밤 방태산 골짜기 서늘한 밤공기가 흘러드는 너와 오두막에서 아버지의 팔베개를 베고 잠들었을 때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방태산 골짜기를 덮은 머루, 다래 넝쿨을 타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물웅덩이로 뛰어들었을 때의 추억도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철모를 때리는 둔탁한 쇳소리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수류탄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 안전핀을 뽑으려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 녀석, 괴뢰군이 와서 목을 떼 가도 모르겠구나.”
 
  선임하사였다. 그 옆에 소대장도 같이 서 있었다. 소대장이 엄하게 꾸짖었다.
 
  “우리는 전투 중이다. 전투 중에 잠들면 어떡하나? 너 하나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진다 여기고 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거야.”
 
  소년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겠습니다.”
 
  가벼운 주의를 준 후 소대장과 선임하사는 다른 개인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선임하사가 뒤돌아 소년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도 빨리 전쟁 끝내고 실컷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오늘 밤, 잘 참고 견디자.”
 
  그러며 전투복 윗주머니에서 무언가 종이 포장지에 싸인 것을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초콜릿이란 거다. 어제 만난 미군 수색대원에게서 하나 얻었다. 받아라.”
 
  소년은 사양하려다 말고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임하사님.”
 
  다시 혼자가 된 소년은 종이 포장을 뜯어 내용물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처음 맡아본 냄새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러고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어보았다. 꾸덕꾸덕한 조각이 입안에 들어가더니 씹기도 전에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강한 단맛에 살짝 쌉싸름한 맛이 구미를 당겼다. 소년은 개인호 벽에 기대어 앞을 주시하면서 초콜릿을 한 조각씩 떼어 입에 넣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초콜릿 맛을 보고 나자 다시금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소년은 눈을 비비기도 하고 부릅뜨기도 하며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런 와중 꿈결인 듯 아득히 먼 곳에서 전차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병들
 
  7월 21일 오전 2시, 첫닭이 울려면 아직 두어 시간 더 기다려야 하는 한밤중에 적의 야포들이 불을 뿜으며 387고지 7부 능선부터 정상부를 향해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왔다. 선두에 선 적 전차들이 고지 하단부 석천리 계곡 입구 방어진지를 직격하며 돌격해왔다. 적 포병이 쏜 포탄들이 진지 주변을 강타하고, 어둠을 가르며 날아온 전차 포탄에 참호 벽이 무너져 내렸다. 포탄이 참호 안을 직격해 폭발할 때마다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387고지를 최후의 보루로 삼은 대대원들은 진지를 사수하며 달려드는 적을 기다렸다. 전차 전면에서 발사한 기관총탄이 제1방어선 교통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섬광이 일었다. 소대원들은 적의 무시무시한 화력에도 아랑곳 않고 교통호에 엄폐한 채 적병이 근접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던져’ 하는 선임하사의 외침이 들렸다. 안전핀을 빼 쥐고 기다리던 소년의 오른손에서 수류탄이 날아갔다. 선임하사의 손에서도, 적을 기다리고 있던 분대원들의 손에서도 일제히 수류탄이 날아갔다. 분대원들 개인호 주변으로도 적 수류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적 수류탄이 폭발하며 참호 안으로 흙더미와 파편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방에서 쏜 대전차 포탄이 불꼬리를 길게 남기며 날아가 적 전차를 강타했다. 고함과 욕설이 난무하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적병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부서졌다. 그러나 파도는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수류탄이 터질 때마다 적병들은 폭사해 나가떨어졌다. 전초 분대원들이 악착같이 버티며 마지막 수류탄 한 발까지 소진했을 때, 적은 이미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예봉이 꺾이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 번 선임하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철수, 철수하라!”
 
  돌진해 오는 적병들의 총탄과 후방 소대원들의 엄호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전초 개인호 진지의 분대원들이 본대를 향해 포복을 하기 시작했다.
 
 
  백병전
 
문경재향군인회와 시민들은 문경전투 당시 7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용배 장군을 기리는 용배공원을 건립했다. 김 장군은 1951년 7월 2일 양구 토평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김 장군 흉상에 헌화하는 필자. 사진=길도형
  전초 진지를 이탈한 분대원들이 하나둘 본대에 합류했다. 몇 명이 돌아왔고 몇 명이 못 돌아왔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소대원들은 가용할 수 있는 화기를 총동원해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다. 그때 적진에서 “콰광”하는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전차가 어둠 속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마침내 대전차 포탄이 적 전차를 강타하며 기동 불능 상태로 만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북괴군의 공세는 겹겹이 이어졌다. 소대원들이 교통호를 달리며 수류탄을 내던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소대원들의 조준사격에 달려드는 적병들이 나가떨어졌다. 적이 쏜 유탄(榴彈)이 참호로 파고들어 폭발할 때마다 소대원 누군가가 쓰러져 갔다. 근접한 적병의 수류탄이 교통호 속으로 날아들 때마다 “엎드려!” “피해!” 하는 고함이 터졌고, 주변의 소대원들이 교통호 안팎으로 몸을 날렸다.
 
  계속되는 선전에도 겹겹이 밀려드는 적 공세에 소대원들의 기세는 점차 위축되었다. 소대장이 화력 지원을 요청하는 가운데 선임하사가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다그쳤다. 밀려드는 적과 막아서는 소대원들의 수류탄 공방전 속에서 타 소대의 저지선 일부가 무너지면서 대대 제1 저지선이 돌파당할 상황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중대원들이 달려들어 육탄으로 막아섰다.
 
  제1 저지선의 방어가 지속되면서 배후의 제2, 제3 방어선 대대원들이 약진, 제1 저지선 전투에 가담했다. 어느새 여명이 들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날이 밝아왔다. 소대원뿐 아니라 제1 저지선에 몰려든 대대원들 또한 미친 듯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참호 앞까지 달려든 적병들을 향해 뛰쳐나가 총검을 휘두르며 찌르고 베었다.
 
  오전 5시 무렵,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 발의 포탄이 북괴군 배후를 강타했다. 387고지를 향하던 적 박격포탄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온 포탄의 원점을 찾아 대응하며 포격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밤새 3대대와의 공방전에 화력을 쏟아부은 탓에 북괴군이 조금씩 밀리는 것이 확연했다. 북괴군은 포탄 공세를 포기하고 3대대 진지를 향해 기관총 사격만을 가했다. 엄호 사격이었다. 새벽 2시부터 387고지 점령을 위해 화력을 쏟아부은 북괴군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배후에 일부 병력만을 남긴 채 퇴각을 시작했다.
 
 
  쉬파리들
 
  상황을 파악한 소대장이 바로 추격을 명령했다. 소대원들이 진지에서 뛰쳐나와 퇴각하는 적을 추격했다. 소대 대전차포에 피격된 적 전차의 검은 연기가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소대의 추격은 곧 멈추어야 했다. 적의 퇴각 엄호 사격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대원들은 골짜기 곳곳의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적의 총탄이 날아오는 곳을 향해 대응 사격을 가했다. 30여 분에 걸친 총격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 적의 기관총 진지에 박격포탄이 명중했다. 순간 적의 엄호 사격이 사라지며 정적이 감돌았다. 이내 387고지 대대 관측소에서 호각 소리가 길게 울리며, ‘추격 중지’를 알리는 외침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대대장이 무전으로 중대장들에게 추격 중지를 명령하고 상황 종료를 전파한 것이었다. 북괴군 13사단 1개 연대 병력의 공세에 맞서 국군 7연대 3대대 병력이 치열한 사투 끝에 387고지를 사수한 것이었다. 연대는 387고지를 방어해냄에 따라 바로 전날 피탈된 옥녀봉 탈환 작전 계획에 들어갔다.
 
  소년 또한 명령에 따라 추격을 멈추고 발길을 돌렸다. 순간 정신 없이 치러낸 공방전의 끔찍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류탄 폭발에 직격당해 갈가리 찢긴 시신, 몸뚱이를 이탈한 팔과 다리들, 박살 난 머리에서 터져 나온 골수…. 7월 하순,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어디서 날아왔는지 쉬파리들이 터져 나온 복부내장에 달라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끔찍한 참상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
 
 
  달려야 산다
 
  7월 22일 오전 6시, 사상자들을 후송 보내고 7연대는 곧바로 옥녀봉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간밤에 잠시 비쳤던 맑은 하늘은 새벽부터 구름이 짙게 드리우더니 387고지 방어 전투가 끝나갈 무렵부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연대장은 비로 인해 적의 기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될 것으로 판단하고, 3대대에 오전 6시를 기해 옥녀봉 탈환 작전 돌입을 명령했다.
 
  소년의 소대는 옥녀봉 전방 305고지 탈환을 목표로 했다. 소년은 빗물에 질척이는 977번 도로를 행군해 갔다. 977번 도로를 벗어나 소로(小路)를 따라 행군하여 오전 9시가 가까웠을 때였다. 은성탄광(오늘날에는 폐광된 은성탄광을 탄광 유적 관광지로 개발한 ‘문경에코월드’가 자리하고 있다) 사택지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전방에서 기관총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좌우로 포진하여 행군해 가던 대대원들 옆으로 기관총탄이 날아와 박히며 젖은 흙과 돌멩이가 튀어 올랐다. 적의 대응을 예상한 터라 선두에 선 대대원들이 재빨리 엄폐물을 찾아 몸을 던졌다.
 
  “응사(應射)해!”
 
  10중대와 11중대원들이 은성탄광 사택지를 향해 일제 사격하는 가운데 소년이 속한 12중대가 두 개 중대를 넘어 사택지를 향해 돌진해 갔다. 적 총탄이 빗발쳤다. 12중대는 4개 소대가 각 방향을 잡아 산개하여 사택지 적진으로 돌격했다. 10중대와 12중대원들이 엄호하는 가운데 소대원들은 달리다 몸을 던지기도 하고, 빗물 흥건한 땅바닥을 포복하기도 했다.
 
  “따라와!”
 
  선임하사가 빗발치는 총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달리며 소년에게 소리쳤다. 소년은 선임하사를 뒤따라 달리며 사택지를 향해 지향사격을 했다. 총탄이 철모와 귓전을 스쳤다. 그러나 소년도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멈추는 순간 총탄이 자신을 향해 정확히 날아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달려야 살고, 돌격해야 적의 총탄이 자신에게 안 박힌다는 사실을 그동안의 돌격전을 통해 알게 됐다.
 
  사택지의 적 기관총 진지와 가까워지자 앞서 달리던 선임하사가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소년도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선임하사가 소총을 등에 가로 메고 수류탄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안전핀 뽑아 쥐고 따라와.”
 
  선임하사가 기민하게 움직여 기관총 진지로 접근해 갔다. 소년은 횡으로 10여 m 떨어져 기고 달리기를 반복하며 한 사택으로 접근해 갔다. 일제 시대에 탄광 개발과 함께 지어진 사택은 낡고 허름한 기와지붕 목조건물이었다. 낡고 허름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던 듯 노간주 울타리에는 한여름 호박넝쿨이 무성했다. 사택 창에 걸쳐진 기관총구가 보였다. 노간주 울타리 바닥을 기어 안마당으로 들어선 선임하사와 소년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둘은 호흡을 거의 똑같이 하며 총구가 보이는 창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쾅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기관총 소리가 멎었다. 지붕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옥녀봉을 탈환했지만…
 
  북괴군 2개 중대가 은성탄광 사택지 일대에 주둔한 채 남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괴군 2개 중대는 3대대의 우중(雨中) 기습을 받고 총격으로 맞섰으나, 교전 30여 분 만에 전열이 와해된 채 퇴각했다. 3대대는 여세를 몰아 옥녀봉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오전 10시 무렵 옥녀봉 탈환에 나선 3대대는 접전 끝에 오전 11시경 옥녀봉을 탈환했다. 소년의 소대는 옥녀봉 북단 305고지로 직진하여 잔적을 격퇴하고 고지를 재점령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밀려난 적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역습을 가해왔다. 적은 연대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해 옥녀봉으로 밀고 올라왔다. 옥녀봉 전면(前面) 305고지에 적의 포화가 집중됐다. 참호에서 적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던 소대는 적의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배후의 옥녀봉 능선부로 후퇴했다. 그러나 옥녀봉 능선부와 정상부에도 파상적(波狀的)인 적의 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오전 10시경부터 전개된 옥녀봉 탈환 사수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3대대에 불리해졌다. 실탄이 다 떨어져 가는 상태에서 대대원들은 한 발 한 발 조준사격으로 적의 돌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근접한 적을 수류탄을 던져 격퇴하기를 거듭함에도 적의 돌격은 멈추질 않았다. 적의 파상 공세를 막아가며 관측소의 대대장부터 중대장들까지 연대본부에 병력 증원 및 화력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날렸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병력 증원도 화력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3대대는 결국 또다시 옥녀봉 주봉(主峯)을 내주고 남쪽의 무명고지와 은성탄광 사택지 부근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오전 11시 연대의 두 개 중대 병력이 3대대원이 밀려난 곳으로 급파되어 왔다. 옥녀봉 전투를 치르기 며칠 전부터 수면은커녕 잠깐의 휴식도 취하지 못한 대대원들은 기진맥진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증원되어 온 300여 명에 이르는 두 개 중대원이 큰 힘이자 위로가 되어주었다.
 
 
  옥녀봉 재탈환
 
  2개 중대가 증원된 가운데 3대대의 옥녀봉 재탈환 전투가 재개되었다. 3대대장 이남호 소령은 정오를 기해 옥녀봉 재탈환 명령을 하달했다. 옥녀봉 일대는 북괴군 13사단 한 개 연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옥녀봉을 둘러싼 뺏고 빼앗기는 격전이 거듭되는 만큼 적도 병력을 증원 투입할 게 확실했다. 적도 옥녀봉을 완전히 수중에 넣어야 원활한 남진이 가능할 거란 작전 계획하에 필사적으로 옥녀봉 전투에 임했다. 총성과 포성이 난무하고 고지로 뛰어오르는 대대원들과 저항하는 북괴군의 함성이 뒤섞인 가운데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전개됐다.
 
  소년은 벌써 옥녀봉 능선을 세 번을 밀고 올라갔다 세 번을 밀려 내려온 상태였다. 그러고 오후 4시, 요대 탄띠뿐 아니라 가슴에 엑스자로 탄띠를 두르고, 수류탄 네 발을 더 수령해 소대원들과 함께 다시 옥녀봉 능선을 향해 돌격해 갔다. 소년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산기슭을 달렸다. 고지의 괴뢰군들을 반드시 격퇴하겠다는 의지와 용기가 용암처럼 분출했다. 총탄과 파편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소년은 돌격을 거듭했다. 난사되는 총탄에 고지의 적병들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달려 오르는 대대원들을 향해 적병들이 수류탄을 던지며 막아섰다. 그러나 노도(怒濤)처럼 고지를 집어삼키며 달려드는 대대원들의 공세에 적병들이 마침내 등을 보이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박격포탄이 지휘부를 강타하자 괴뢰군 지휘관들도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7연대 3대대는 마침내 북괴군 1개 연대를 옥녀봉 일대에서 완전히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임부택 연대장
 
임부택 7연대장.
  7월 23일, 거의 일주일여에 걸친 격전을 치른 7연대는 사단 예비대가 되어 함창으로 이동해 갔다. 이때 사단은 긴급 명령을 예하 연대들로 하달했다. 북괴군 1사단과 13사단이 사단의 중앙을 담당한 점촌 북쪽의 2연대 방어선 정면 돌파를 시도함에 따라 사단의 모든 진지가 흔들리며 사단 방어 전략이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에 사단장(김종오 대령)은 옥녀봉 전투 후 사단 예비대가 되어 함창으로 이동 중이던 7연대에 긴급히 점촌, 유곡으로 북상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3대대는 1대대와 2대대가 방어선을 친 점촌과 유곡의 267고지와 300고지로부터 약 2km 떨어진 점촌읍 공평리(현재 점촌4동)에 연대 예비대로 전환 배치되었다.
 
  소년은 연대가 긴급히 최전선으로 재투입되었음에도 대대가 후방에 예비대로 배치됨에 따라 모처럼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연대 지휘소가 예비대와 함께 있게 됨에 따라 소년은 먼 거리에서나마 임부택 연대장 얼굴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큰 형님 또는 삼촌뻘의 연대장 얼굴은 매우 진중해 보였다. 병사들과 마주쳐 경례를 받게 되면 꼭 경례로 답례했다. 당장이라도 포연과 함께 산화할 수도 있는 병사들의 안부를 되물으며 무고(無故) 무탈할 것을 당부했다. 전라도 나주 사람이라고 했다. 전해 들은 말로는 일제 말 태평양 전쟁 때 버마(미얀마) 전선까지 가서 영국군과 싸웠고, 식민지 동포들이 일본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하려는 마음에서 일본군(육군특별지원병)에 자원했다고 했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 선발된 만큼 머리가 비상하고 체격도 당당했다. 전투에 임하는 7연대원들은 지휘관에 대한 신뢰와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소년, 미군을 만나다
 
  소년은 이곳에서 미군 또한 처음으로 보았다. 공평리로 전개해 온 미군은 1개 전차 중대였다. 7연대와 연합 방어 작전을 펼치게 된 미군 전차 중대는 전차(M36 잭슨 대전차자주포) 22대를 몰고 왔다. 120여 명의 미군 전차 중대원들이 공평리 연대 본부대와 3대대원들이 있는 시골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주둔지로 입성하자 연대원들 모두 뛰쳐나와 환호하고 만세를 불렀다. 전차와 함께 싸울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高揚)됐다.
 
  소년 또한 대대원들과 함께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북괴군 전차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거대한 전차들이 줄줄이 운동장으로 들어와 도열하고, 다 들어오지 못한 전차들은 운동장 밖 공터에 도열했다. 미군 전차 중대원들이 전차에서 내려 운동장에 도열했다. 연대장이 미군 중대장의 경례에 답례하고 악수로써 미군 전차 중대를 맞았다. 전차 중대는 공평리에서 잠시 대기 상태로 있으면서 휴식과 정비 시간을 가졌다.
 
  대대원들은 예비대로 있으면서 머리도 감고 면도도 했다. 그러나 전투복을 빨아 입을 여유는 없어 대대원들의 전체적인 용모는 꾀죄죄하고 남루했다. 밤낮없이 이 고지 저 고지를 걷고 달리느라 고갈된 체력과 절대적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가 까맣게 그을린 대대원들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런 얼굴에 담긴 긴장감 또는 비장함은 백인 미군 병사의 허여멀건 한 얼굴과 대조되기에 충분했다.
 

  미군 전차병들이 잠깐의 자유시간을 이용해 대대원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장병들 대부분이 영어를 할 줄 몰랐다. 1949년 한국을 떠나기 전의 미군 부대 주변을 떠돌며 대충 주워들은 영어로 까불대는 병사가 한둘 보였지만, 그들의 영어에 미군 병사는 “왓(What)?” “왓?”거릴 뿐이었다. 그러면 미군에 파견 배속된 통역병이 다가와 미군 병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소년에게도 한 미군 전차병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흑인 병사였다. 웃는 얼굴에 하얗게 드러난 치아가 도드라져 보였다. 흑인 병사가 “헤이, 버디, 하우 아 유?” 하며 악수를 청했다. 소년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악수하자는 손짓은 알 수 있었다. 소년은 흑인 병사의 검은 손을 마주 쥐며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흑인 전차병 역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흑인 병사가 또 말을 건넸다.
 
  “와츠 유어 네임?”
 
 
  “굿바이, 굿럭!”
 
  그러자 소년은 이번에는 ‘이놈 이거 내 말을 알아듣고나 말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흑인 병사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 그냥 자기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흑인 병사는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또 말을 건넸다. 소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도리질을 했다. 흑인 병사는 검지로 자기를 가리키면서 “마이 네임 이즈 토미”라고 했다. 소년은 눈칫밥으로 자기 이름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이 흑인 병사가 건넨 말을 그대로 따라 읊으며 끝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마이 네임 이즈 길운하!”
 
  그러자 미군 병사는 무슨 대단한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처럼 환히 웃으며 크게 떠들었다.
 
  “오우, 킬, 웅, 확!”
 
  소년이 따라 웃으며 고쳐 말했다.
 
  “킬이 아니고 길!”
 
  미군 병사는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알아들었다는 듯 말했다.
 
  “예쓰 예쓰, 유어 킬!”
 
  미군 병사와 소년이 ‘킬’과 ‘길’ 외마디로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온 보드!” 하는 구령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흑인 병사가 미소를 거두고 다시 악수를 청했다. 소년은 흑인 병사의 손을 다시 마주 쥐었다. 흑인 병사가 말했다.
 
  “굿바이!”
 
  그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굿럭!”이라 말했다. 소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가슴으로 느껴졌다. 소년은 흑인 병사의 손을 놓으며 “굿바이, 굿럭!” 하고 똑같이 말해주었다. 흑인 병사가 싱긋 웃으며 뒤돌아 자신이 타고 온 전차로 걸어갔다.
 
  이후 미군 전차 중대는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그러고 1대대와 2대대 방어진지를 지나 그 전방의 점촌, 문경 축선의 2연대와 19연대 방어진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낙동강을 건너다
 
낙동강 방어선.
  7월 24일 새벽, 사단으로부터 ‘불정산을 탈환하라’는 반격 명령이 하달됐다. 적이 점령한 불정산을 탈환함으로써 남쪽으로 처진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을 끌어올려 재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대는 연대의 작전 목표에 따라 유곡(幽谷) 서북쪽 2.5km 거리에 있는 414고지를 중간 목표로 삼아 공평리를 출발했다. 3대대는 불정산 계곡을 횡단하는 것과 동시에 414고지 남쪽으로 진격했다. 중대 규모의 적이 막아섰지만, 단숨에 격파했다. 이어 사단의 방어 계획에 따라서 358고지 동쪽 기슭에서 유곡으로 통하는 지역에 대한 방어에 들어갔다. 3대대의 분전으로 옥녀봉과 수정봉을 6사단이 장악하게 되면서 전선은 낙동강을 사이에 둔 대치전으로 고착되어갔다.
 
  문경 방어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7연대는 1950년 7월 31일 낙동강을 건넜다. 문경 영순면에서 낙동강을 도하, 의성군 안계면 서쪽 노연동에 집결했다. 그러나 8월 1일 미 25사단이 기습 침투한 북괴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을 막기 위해 마산 전선으로 긴급 이동함에 따라 국군 1사단과 6사단의 방어 정면 전투지경선이 크게 넓어졌다. 월등한 화력의 미 25사단이 낙동강 서남부 전선으로 이동함에 따라 북괴군은 이 허점을 포착, 8월 3일 안계 지구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7연대는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서서히 철수했다. 북괴군 1사단, 13사단을 상대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는 가운데 8월 12일 군위에 새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3일 마정산 공격으로 적 2개 중대를 격퇴한 소대는 8월 15일 군위군 효령지구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소년의 본관은 해평(海平). 경상북도 구미군(당시 기준)에 속하는 읍 단위 고장이다. 소년은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우리는 해평 길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증조부 때 길씨 일족이 구미 금오산을 떠나 먼 북쪽 간도로 이주했다고 했다. 그런데 증조부 식구는 일이 생겨 이주 행렬로부터 떨어졌다. 결국 홍천에서 세(三)마치를 넘어 춘천 방향으로 가는 대신, 말고개(마치)를 넘어 내린천 상류를 따라 들어간 곳이 방태산 기슭이었다. 소년은 어쩌면 조상이 살았었다는 구미, 그리고 금오산 기슭 어느 마을에 가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은 소년의 학교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1950년 7월 31일 길운하 소년병은 연대가 낙동강을 건너 철수하면서 난생 처음 경상도 땅을 밟았다. 사진=길도형
  소년은 낙동강 건너 경상도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딛고 있었다. 발을 디뎠을 뿐 아니라 개인호를 파고 그 속에서 뜬눈으로 8·15 광복절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날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날이 갖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얘기는 더더욱 그러했다. 정부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나 ‘우리나라’가 세워졌고, 그 우리나라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이라는 사실만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누구도 소년에게 그런 상황을 얘기해주지는 않았다. 학교는 부랑아 소년에게 있어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런 소년에게 처음으로 무언가 가르침이 있고 배움이 있던 곳이 바로 군대였다. 춘천 7연대 한 병영의 하우스 보이가 되어 낡은 작업복이어도 좋으니까, 자신도 군복을 입은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고 얼떨결에 낡고 헐렁한 군복을 입었다.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총을 들고 제식 훈련도 하고, 총검술도 배우고, 사격 훈련도 할 줄 알았다. 군인이 되어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학교에 가지 못해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배움은 전투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장은 소년의 학교였다. 매 순간순간이 무섭고 떨리고 긴장됐다. 때로는 분노와 적개심,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분명 가르침이 있고 배움이 있었지만, 그것은 상상조차 못 했던 거칠고 잔인하고 처절한 실제 상황, 한순간 닥칠 수 있는 죽음이란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초월적 각성이었다. 총탄과 포연, 죽고 죽이는 아우성 속에서 배우는 삶과 죽음이었다. 오직 살기 위한 본능과 그것의 반복으로 숙달된 경험치만이 교사였다. 소년이 군복을 입고 두 달여에 걸쳐 배우고 깨우친 것들, 그것은 오직 군인이기 때문에 맞닥뜨려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입추가 지나고 삼복의 염천도 말복이 지나면서 한풀 꺾인 8월 15일 새벽, 광복절날 하늘은 청명하고 대기는 상쾌했다. 개인호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장병들이 여명이 밝아오자 곧 동이 튼다는 안도감에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개인호에서 나와 밤새 뻑뻑해진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기도 했다.
 
  그때였다. 격렬한 포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연대 주둔지로 빗발치듯 포탄이 쏟아져 내리며 폭발했다. 소년은 개인호에서 나와 소대원들과 함께 자신들이 담당한 참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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